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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영어: Steven Paul “Steve”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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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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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 프리미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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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teach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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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Steve Paul Jobs, 1955.2.24~2011.10.5) 미국의 기업가이며 애플의 창업자이다.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며 성공을 거두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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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출신 유명인사들, 그들은 어디에 있나?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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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기업가 정신_소중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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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애플 창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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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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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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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영어: Steven Paul “Steve”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미국의 기업인이었으며 애플의 전 CEO이자 공동 창립자이다.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했다. 또한, GUI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6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을 혁신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게 이끌었다.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하여 음악 산업 전체를 뒤바꾸어 놓았다. 또한, 2007년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바꾸어 놓았고 2010년 아이패드를 출시함으로써 포스트PC 시대(Post-PC era)를 열었다.

스티브 잡스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자 디즈니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한편 그는 2003년 무렵부터 췌장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왔다.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로 인하여 2011년 8월 24일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잡스는 CEO직에서 물러나지만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시키기로 했으나,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사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출생 배경 [ 편집 ]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조앤 시블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폴 잡스와 클래라 헤고피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잡스에게 그가 생물학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의 양아버지는 그가 열악한 환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를 항상 격려해주었다. 개발 그룹의 책임자이자 후에 최고 업무 집행 책임자로서 잡스의 오랜 동료인 델 요캄은 그의 가정 환경과 성격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을 만들든 완전히 통제하려 드는 그의 집착은 출생 직후 버려졌다는 사실과 그의 성격에서 직접적으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잡스는 잡스 부부를 ‘양부모’라고 부르거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날카롭게 반응했다.[2] 반면에 친부모에 대한 언급을 할 때에는 퉁명스러웠다. 잡스는 그의 양부모에 대해서 “그분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 반면에 친부모에 대해서는 “그들은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이지요. 무정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정자 은행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부모 [ 편집 ]

잡스의 친어머니는 조앤 시블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시블은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며 잡스의 친아버지인 시리아 출신의 압둘파타 존 잔달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의 명문 집안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잔달리의 아버지는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잔달리는 예수회 기숙학교와 아메리칸 대학교를 거쳐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교 정치학과의 조교로 활동하며 시블을 만났다. 시블은 잔달리와 함께 1954년 여름 함께 시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시블의 아버지가 잔달리와 결혼하면 부녀의 연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탓에 입양을 결심하게 되었고, 위스콘신을 벗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하며 잡스를 낳았다. 시블은 아이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고등학교 중퇴자 부부인 잡스 부부가 아이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서약서를 써서 보내자 입양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시블은 그 당시에 위독한 상태였던 아버지가 눈을 감으신 후 결혼을 하면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입양 절차가 비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20년 후에야 아들을 만나게 된다. 시블의 아버지는 입양 절차가 끝난 몇 주 후에 사망했으며, 그 후 시블과 잔달리는 성공적으로 결혼을 한다. 잔달리는 졸업 후 시리아로 떠났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해 그린베이로 돌아가 모나 심프슨이라는 딸을 낳고 살게 된다.[3]

양부모 [ 편집 ]

스티브 잡스의 양아버지인 폴 라인홀트 잡스는 위스콘신주 저먼타운에서 자랐으며, 점잖고 얌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중퇴 후에는 기계공으로 일하였으며, 열아홉살 때에는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기계공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클래라 헤고피언은 스티브 잡스의 양어머니로, 뉴저지 주에서 아르메니아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으며 상냥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었는데, 폴 잡스를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이 전쟁에 나가 사망했다는 사실이었다. 폴 잡스와 클래라 헤고피언은 폴 잡스가 해안경비대에서 제대하면서 동료들과 한 내기로 인해 만나게 되었고, 1946년 3월 약혼 했다. 그들은 위스콘신에 있는 잡스의 부모 집에서 같이 살다가 인디애나주로 집을 옮겼고, 그 후 클래라 잡스의 설득으로 샌프란시스코의 선셋디트릭트로 옮겨 생활하였다. 잡스 부부는 행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클래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어 1955년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아이에게 스티븐 폴 잡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잡스 부부는 잡스가 어릴 적에 입양 사실을 밝혔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잡스를 많이 보듬어 주었다.

어린 시절 [ 편집 ]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불량 청소년이자 사고뭉치였다. 잡스의 4학년 담임이었던 하이 힐 선생님이 돈으로 구슬리는 것으로 겨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 키트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4][5] 잡스는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2살이었던 고등학교 시절 전화번호부를 보고 휴렛 패커드사의 CEO인 빌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고 싶다며 남는 부품이 있다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빌 휴렛은 그 말을 들어주었으며 결국 잡스는 팰로앨토의 휴렛 패커드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고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휴렛 패커드사에 여름 동안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1972년 리드 칼리지에 다니다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하였으며, 1974년에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아타리에서 일을 하였다. 후에 워즈니악의 권고로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나가게 된다.

가정 환경 [ 편집 ]

폴 잡스는 세일즈맨과 동시에 중고차를 사들인 후 수리하여 재판매하는 일을 하였는데, 스티브 잡스에게 기계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물려주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해체하여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물건을 주는 식이었다.[6] 어린 시절 잡스의 집은 마운틴뷰에 있었는데, 폴 잡스는 차고 안에 있던 작업대의 반을 스티브에게 주며 보이지 않는 뒷부분도 앞면과 같이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전달해 주었다. 이는 후에 잡스의 제품 철학이 된다. 하지만 잡스는 실제로 기계를 다루는 데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부품을 구하기 위해 흥정을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잡스의 집은 디아블로 가 286번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일대의 집들은 대부분 부동산 개발업자 조셉 아이클러가 지은 것이였다. 아이클러는 깨끗하고 심플하면서도 저렴한 주택들을 지었으며, 잡스는 아이클러의 깔끔한 디자인이 애플 컴퓨터가 애초부터 추구했던 디자인이라 밝혔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군수산업 붐이 일어났으며, 첨단 기술이 밀집된 지역이 되었다. 그 영향을 받아 잡스는 동네의 어른들에게 여러 질문을 하며 엔지니어링에 대한 흥미를 키워 갔다.

초등학교 [ 편집 ]

잡스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폴 잡스는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불행히도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부동산 시장에 불황이 닥쳤으며, 잡스 가족은 약 2년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 청소년이자 사고뭉치였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 클라라 잡스는 잡스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는 잡스가 학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잡스는 몬타로마 초등학교에서 친한 친구 릭 페렌티노와 함께 여러가지 말썽을 피웠다. 예를 들어, 담임 선생님의 의자 밑에 폭음탄을 설치해 놓는 식이었다. 잡스는 이런 사건들로 인해 두세 차례 귀가 조치되었지만, 폴 잡스는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선생님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잡스에게 혼을 내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스티브 잡스를 제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 이머전 힐이라는 교사로, 잡스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이 뇌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 그녀는 잡스를 돈과 사탕으로 구슬려 잡스의 관심을 샀지만, 후에 잡스는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4학년 말에 잡스는 힐 선생의 권유 아래 수학 능력 평가를 보았고,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의 수학 능력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자 잡스 부부는 잡스를 한 학년만 월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중학교 [ 편집 ]

잡스는 잡스 부부의 결정에 따라 크리텐든 중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다양한 인종의 갱단으로 물들어 있던 크리텐든 중학교는 잡스에게 고통이였다. 따라서 잡스는 부모님께 다른 학교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고, 결국 쿠퍼티노와 서니베일 학군의 경계선 바로 안쪽에 있는 가장 안전하고 우수한 지역으로 이사하여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에 다니었다.

고등학교 [ 편집 ]

잡스는 9학년(현재의 중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그 주가 되는 것이 반문화 운동이었다. 잡스는 반문화 운동에 빠져 있던 12학년의 여러 학생들과 많은 교류를 하며 전자공학과 수학, 과학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마약의 한 종류인 LSD와 반문화 운동 전반에 대해서도 흥미를 보였다. 잡스는 후에 실리콘밸리의 전설이 된 존 매콜럼의 전자공학 수업을 듣기도 하였는데, 군대식 규율을 중요시하는 맥콜럼에게 권위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매콜럼에게 미움을 사던 잡스와 달리, 후에 잡스와 함께 애플 사를 세울 스티브 워즈니악은 맥콜럼의 총애를 받던 학생이었다. 워즈니악은 잡스보다 다섯 살 많은 학생으로, 같은 동네에 살던 빌 페르난데스가 워즈니악에게 잡스를 소개해 주었다. 1971년, 워즈니악과 잡스는 애플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블루 박스를 제작하고 판매하였다.

잡스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래리 랭의 차고를 종종 방문하였는데, 랭은 잡스에게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이 키트 덕분에 잡스는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 또 랭은 HP 탐구자 클럽에 잡스를 합류시켰다. 잡스는 이 클럽에서 거대한 몸집의 컴퓨터들을 볼 수 있었고, 잡스는 이 컴퓨터를 아주 인상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후에 “거기서 나는 첫 데스크톱 컴퓨터를 봤어요. 9100A라고 불린 그것은 사실 계산기를 미화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진정 최초의 데스크톱 컴퓨터이기도 했지요. 20킬로그램 정도 되는 거대한 몸집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어요. 첫눈에 반해 버렸지요.”라고 말했다.

잡스는 고등학교 시절에 다양한 일을 하였는데, HP의 조립라인에서 반복되는 조립을 하는 일과 신문 배달, 전자 기기 상점에서 재고품을 정리하는 일 등이었다. 잡스는 HP에서 동료 직원들보다는 위층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과 더 친해졌으며, 전자 기기 상점에서는 다양한 전자 기기들을 접하며 즐거워했다. 또한 잡스는 고등학교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데, 전자공학과 창작의 교차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과학 분야가 아닌 다른 여러 분야의 책들도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기 시작했고, 음악도 많이 들었다. 잡스는 특히 <리어 왕>과 <모비 딕>, 그리고 딜런 토머스의 시를 좋아했다.

대학교 [ 편집 ]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될 시기가 되자 잡스는 잡스 부부에게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7년 전에 잡스 부부는 입양한 아이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였고, 잡스의 대학 진학을 위해 학자금을 어느 정도 모아 둔 상태였으므로 잡스를 설득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잡스는 일부러 학비가 훨씬 싼 주립 대학교에는 절대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으며, 오로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잡스는 1972년 리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아 잡스는 필수 과목들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는 학교의 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잡스는 듣고 싶은 과목 수업에만 들어갔으며, 이 때 들을 가치가 없는 수업을 위해서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낸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1학기만 수강한 후 리드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하지만 잡스는 리드 대학교를 떠나지는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기숙사 주임을 설득하여 잡스가 퇴학 후에도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하도록 하였으며, 수업을 청강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후 18개월 동안 잡스는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의를 자유롭게 들었으며, 특히 캘리그래피(멋글씨)(글자를 다루는 시각디자인의 한 분야로, 출판계에서는 책의 주제를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있는 글씨로 요약하여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지 디자인에 응용한다) 강의에 흥미를 보였다. 캘리그래피 강의는 이후 트루타입 폰트를 애플 제품에 적용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교 이후 [ 편집 ]

1974년 2월, 잡스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앨터스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고, 구인 광고에 “즐기면서 돈 버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던 비디오게임 제조사 아타리의 로비에 들어가 채용해 줄 때까지 버티고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아타리의 공동 창업자이자 수석 엔지니어였던 앨 알콘에 의해 고용된다. 아타리에서도 잡스는 고집스러운 면과 남을 깔보는 성격을 내보였지만, 아타리의 창업자 놀런 부슈널은 잡스를 높게 평가하여 그가 야간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잡스는 아타리에서 몇몇 게임이 개선되도록 도왔으며, 복잡한 설명서를 읽을 필요가 없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아타리 게임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잡스는 아타리에서 일하던 도중인 1974년 초, 인도 순례 여행을 떠났고 7개월간의 여행 후 다시 아타리로 돌아와 일하였다. 부슈널은 잡스에게 브레이크아웃(Breakout)이라는 벽돌 깨기 게임을 설계할 것을 지시했는데, 칩을 50개 미만으로 사용하면 줄어든 칩에 비례해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보수를 반씩 나누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하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만에 45개의 칩만으로 게임을 설계해내지만,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기본 수고비의 절반인 350달러만 주었다. 잡스가 아타리로부터 받은 돈은 5,000달러였다. 그리고 애플을 설립하고 자신의 집 차고부터 사옥에 이르기까지 발전시켰으나, 이후 매킨토시 프로젝트 등이 실패하면서 결국 애플에서 쫓겨나나, 이후 애플은 지독한 적자를 겪다가 결국 다시 스티브 잡스를 CEO로 맡는다.

사생활 [ 편집 ]

불교 [ 편집 ]

잡스가 평생 정신적 스승으로 의지한 일본 선불교 승려 오토가와 고분

잡스는 1973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대학교 철학과를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한 후, 오리건주 올인원팜(All in one farm)이라는 사과 농장에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기거하던 일본 불교 승려인 오토가와 고분 치노(일본어: 乙川弘文)를 만나 불교에 입문했다.

1974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입사한 잡스는, 같은 해 입사한 직후에 장기간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통해 불교를 더욱 깊게 공부했다. 상당한 경지까지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잡스는 “이것(불교를 접한)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7] 아이팟 등의 단순한 디자인이 참선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이후 잡스의 결혼식 주례도 오토가와 고분이 했다. 그 이후, 회사가 잘 안 되자, 잡스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스님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오토가와 고분이 2002년 사망할 때까지, 잡스는 항상 그를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애플이란 회사명, 애플 제품의 매우 단순한 디자인, 사과농장, 불교는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식습관 [ 편집 ]

잡스는 크리텐든 중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후 크리스트드라이브 2066번지로 이사하였는데, 이 때 그는 인근의 과수원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잡스에게 유기농법으로 텃밭을 돌보는 법과 퇴비를 만드는 법 등을 알려 주었고, 잡스는 그때부터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과일과 채소를 좋아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의 <작은 지구를 위한 식습관> 역시 잡스의 채식주의 식습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페는 이 책을 통해 채식 습관은 개인적인 혜택 뿐만 아니라 지구적인 혜택 역시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책은 잡스로 하여금 극단적인 식습관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일주일 이상을 단식하거나 로만 밀에서 나오던 시리얼 제품만 먹는 식이었다.

잡스의 식습관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책은 영양학 전문가 아르놀트 에렛의 <디톡스 식습관의 치유 체계>라는 책이었다. 잡스는 이 책을 읽고 채소와 과일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은 점액이 형성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정기적으로 장기 단식을 행해야 몸 속의 독소가 사라진다고 믿게 되었다. 또한 채식을 하면 몸에 냄새가 나는 점액이 분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여러 주 몸을 씻지 않기도 해서 아타리에서 일했을 당시 동료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잡스의 이런 극단적인 식습관은 후에 그가 췌장암에 걸렸을 때 큰 문제가 되었다. 잡스는 2003년 말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수술을 거부하다 2004년 7월 31일 스탠버드 대학교 의학 센터에서 변형 휘플 수술을 받았다. 변형 휘플 수술을 통해 잡스의 췌장 일부분이 제거되었고, 따라서 잡스는 단백질을 더 많이 섭취해야 했다. 하지만 잡스는 10대 때부터 지속해 온 채식 및 금식 습관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고, 의사의 권고를 무시했다. 결국 잡스의 극단적인 식습관이 그의 건강을 더더욱 해친 것이다.

일화 [ 편집 ]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견과류와 물만 섭취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펩시에 계약차 들렀을 때 펩시 음료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필요]

애플 설립 초기 당시에 펩시 사장인 존 스컬리를 애플에 영입할 때,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인생 끝날 때까지 설탕물을 팔겠나, 나한테 와서 세상을 바꾸겠나?”(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한다.

딸인 리사가 태어났을 때 부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애플 리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연봉이 1달러인 최고경영자로 유명한데 이 1달러마저 연봉을 단 한푼도 받지 않을 경우에 노동법상 고용관계가 유지될 수 없기에 최소한으로 정해 놓은 액수이다. [9] 또한 회사로부터 봉급을 받으면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한 몫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연봉 1달러 외에도 스톡 옵션이나 여러 가지 성과급 형태로 보상받았다. [9] 하지만 애플은 주주배당이 적기 때문에 실제 그의 소득은 디즈니 주식의 배당인 연 500억원 정도다.

또한 회사로부터 봉급을 받으면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한 몫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연봉 1달러 외에도 스톡 옵션이나 여러 가지 성과급 형태로 보상받았다. 하지만 애플은 주주배당이 적기 때문에 실제 그의 소득은 디즈니 주식의 배당인 연 500억원 정도다.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의 아성에까지 침범한 애플에 화가 난 IBM은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모양의 애플의 로고에 대해 “애플은 썩은 사과”라며 시비 걸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는 이에 “애플은 썩은 부분을 완전히 도려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주 깨끗하다”고 답변했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시절 환각제 LSD를 복용했으며, 마리화나를 즐겨폈었다.

스티브 잡스는 동양의 철학과 인문고전과 종교를 매우 좋아했다. [10]

영국 의회가 애플이 첨단 기술산업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 영국의 명예 기사 작위 수여를 2009년에 추진했다. 하지만 잡스가 노동당 연차총회에서 연설해 달라는 초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11]

업적 [ 편집 ]

맥북 에어를 발표하는 잡스

창업 이후 잡스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실패하였고, 또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경쟁사 IBM에 비해 가격이 비싸기도 했다. 그리고 응용 소프트웨어 또한 부족하자 또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세계 대부분 사람들이 PC를 사용하게 된 큰 사건이었다. 결국, 잡스는 존 스컬리에 의해 1985년에 애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사를 세워 세계 최초의 객체 지향 운영 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986년 이혼 문제 때문에 자금이 필요했던 조지 루커스 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였다. 잡스는 회사 이름을 픽사로 바꾸고 10년간 6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픽사는 여러 번 단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그 뒤로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디즈니사에 합병되었다. 그 후 1997년 넥스트는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애플로 돌아왔다. 그 해 7월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였으며,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을 한 해 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내게 하였다.[12]

이와 같은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일부 그의 팬들은 예수를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13]

애플은 2011년 8월 24일 성명을 내고 최고경영자(CEO)인 잡스가 CEO직을 즉각 사임한다고 밝혔다. 애플은 팀 쿡 최고운영책임자(COO)가 후임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14]

죽음 [ 편집 ]

2011년 10월 5일, 반기(半旗)로 내려진 성조기와 애플 깃발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15] 그러나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으며,[16]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해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7]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씩이나 등락하는 등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애플이 너무 잡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8]

2011년 1월에는 잡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병가를 냈다.[19] 이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6.5% 급락했다.[20] 스티브 잡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가운데 잡스는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졌고 사진도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다.[21] 이후 파파라치가 찍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어서 췌장암 악화로 인한 6주 시한부설이 사실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22] 그러던 중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 것 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으나,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애플 CEO직을 사임하고, 췌장암으로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잡스가 디자인한 마지막 아이폰은 아이폰 5였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은 다음의 애플 공식성명에 의해 알려졌다.

“ 애플은 명확한 비전과 창의성을 지닌 천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정말 놀라웠던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던 저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그를 잃었습니다. 이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회사를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

잡스의 장례식은 사망 이틀 후인 10월 7일 팔토 알토에서 가족들과 지인 일부가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생전 잡스가 믿던 불교식으로 진행되었고, 발인 후 애플 사옥을 방문한 뒤 화장되어 안장되었다.

관련 서적 [ 편집 ]

《iCon 스티브 잡스》, 윌리엄 사이먼 저, 민음사, 2005, ISBN 978-89-374-2547-9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저, 민음사, 2011, ISBN 978-89-374-8394-3

ISBN 978-89-374-8394-3 《I, STEVE》, 스티브 잡스 어록, 조지 빔 엮음, 쌤 엔 파커스, 2011, ISBN 978-89-6570-044-9

ISBN 978-89-6570-044-9 《스티브 잡스 이야기》, 짐 코리건 저, 권오열 옮김, 명진출판, 2010, ISBN 978-89-7677-617-4

명언 [ 편집 ]

Older people sit down and ask, ‘What is it?’ but the boy asks, ‘What can I do with it?’.

(늙은 사람은 앉아서 ‘이게 뭐야?’라고 묻는데, 소년은 ‘내가 이걸로 뭘할 수 있지?’라고 묻는다.)

People who are crazy enough to think they can change the world are the ones who do.

(자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If you live each day as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매일 최후처럼 살면, 언젠가 당신은 가장 옳은 사람이 될 것이다.)

I’m as proud of what we don’t do as I am of what we do.

(우리가 이룬 것만큼, 이루지 못한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Think different. (다르게 생각하라.)

Stay hungry, stay foolish (늘 굶주리고 엉뚱하게 생각하라)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를 소재로 한 작품 [ 편집 ]

영화 [ 편집 ]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상황 [ 편집 ]

[오늘의 인물]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신문은 선생님 [오늘의 인물]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9년 전인 2011년 오늘, 미국 기업가이자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잡스는 오늘날 ‘스마트폰’ 세상을 열게 해준 세계적인 혁신 기업가였어요.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난 스티브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양부모에게 입양됐어요. 어린 시절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았던 잡스는 리드대학교 중퇴 후 방황하던 중 어린 시절 친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1976년 차고 안에서 컴퓨터 제조 회사인 ‘애플’사를 창업했답니다. 회사 이름을 ‘애플’이라 한 이유에 대해 워즈니악은 “잡스가 수행을 했던 사과 농장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죠.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며 성공을 거뒀지만 팀원들과 불화 등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이후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를 인수해 성공을 거뒀고 1996년 애플 CEO로 화려하게 복귀했답니다. 이후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세련된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감이 돋보이는 혁신적인 전자기기를 쏟아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박세미

28세 애플 창업자 잡스 만난 당시 삼성 회장 이병철 “IBM에 맞설 인물”

저자는 삼성의 지배구조 및 조직문화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한국어판은 5월에 나올 예정이다.

김현수 기자 [email protected]

1983년 11월. 28세의 애플 창업가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도착했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공항에서 그를 맞았다.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그의 꿈인 ‘태블릿 PC’ 부품을 찾기 위해서였다.‘변덕스럽고, 끊임없이 말하고, 때로는 무례하기까지 한 캘리포니아 키드’를 맞은 것은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은 73세의 이병철 삼성 창업주였다. 미국에서 삼성은 ‘Sam-suck’(삼성에 최악이라는 구어를 붙인 말)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조악한 가전 회사 정도였지만 잡스는 한국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고 삼성을 찾았다고 한다.당시 잡스는 ‘미래는 모바일에 있다’고 쉬지 않고 얘기했고, 이 창업주는 45세 어린 미국 청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고 한다. 잡스가 접견실에서 나가자 이 창업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이 될걸세.”17일(현지 시간) 미국에서 출간된 ‘삼성 라이징(Samsung rising)’(사진)의 저자 제프리 케인 기자는 숙명적 라이벌이 된 애플과 삼성의 첫 만남을 이같이 적었다. 케인 기자는 2009년 미국 타임지 한국 특파원 등을 지낸 정보기술(IT) 전문 기자다. 삼성 라이징은 ‘대체 삼성이 무엇이기에 애플의 라이벌이 됐나’라는 미국의 질문에 대해 미국 기자가 취재해 쓴 책이다. 부제는 ‘삼성이 애플을 넘어 테크 시장의 강자가 된 내부 이야기(The Inside Story of the South Korean Giant That Set Out to Beat Apple and Conquer Tech)’.삼성과 애플의 인연은 2005년 도약기를 맞는다. 잡스는 삼성의 낸드 플래시를 보고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09년 삼성이 갤럭시S를 출시하며 애플과 삼성은 라이벌 관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

스티브 잡스(Steve Paul Jobs, 1955.2.24~2011.10.5)

미국의 기업가이며 애플의 창업자이다.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며 성공을 거두었으나,

회사 사정으로 애플을 떠나 넥스트 사를 설립하였다.

애플이 넥스트스텝을 인수하면서 경영진으로 복귀하여 애플의 CEO로 활동하며

아이폰, 아이패드를 출시하여 현재 애플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검은 목티와 청바지를 매치한 패션을 보면 스티브 잡스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는데

오늘날의 아이폰, 아이패드가 있게한 천재적인 CEO이다.

애플(1976년 4월 1일~)

미국의 전자제품 제조회사로 한국에서는 전자제품업계의 선두주자가 삼성이라면

미국에는 애플이 있다. 애플은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회사로서

맥북,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회사이다.

나는 안드로이드 폰만 사용하고 있는데 아이폰 유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이폰을 한번 사용하게 되면 타사제품은 쓰고싶지 않다고 하는 것 보면 user friendly 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닌가 싶다.

설립자는 스티브잡스,스티브 워즈니악, 론웨인이며 1996년 아이액 시리즈를 개발하여 시장에서 좋은 반응과

흑자를 얻게 된다. 애플은 넥스트스탭의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영체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아이팟이라는

MP3플레이어이다. 2003년 아이튠즈(itunes) 뮤직스토어가 시작되었고 이 영역에서도 큰 성공을 이룬다.

2010년에는 아이패드를 개발하여 태블릿 컴퓨터 시대를 열었고 80일에 300만대를 판매하는 기록을 수립하였다.

스티브 잡스의 생애

과연 스티브 잡스 같은 유명한 기업가는 유년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어떤 경험들이

그를 뛰어난 CEO가 되도록 하였는지 늘 궁금했다. 스티브 잡스의 생애는 아래와 같다.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 시스코에서 태어난 스티브 잡스는 양부모 폴과 클라라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미국서부의 농부였다. 스티브잡스는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마친뒤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동양철학을 공부했다가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그는 아타리(Atari)라는 전자게임 회사에 취업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여행을 수개월 다니다가 다시 아타리(Atari)사에 복직하였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뛰어난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니즈악의 도움을 받아 1976년 컴퓨터(회로기판)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 하였다. 이것이 애플의 시작이다.

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 애플1을 만들어 발표했으며 이를 점차 발전시켜 시장에서 큰 성공을 이뤄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성공을거뒀지만 맥(Ma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점점 판매가 줄어들었다. 워니즈악이 회사를 떠나고 1985년 5월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경영진에서 퇴출 되게 된다.

애플을 떠난뒤 넥스트(NeXT)사를 세워 세계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ap)을 개발하였다.

1996년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면서 스티브잡스는 13년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였고 경영진으로서 4억달러

흑자를 내는데 일조하였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동안은 애플의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하였으며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을 발표, 애플은 약 5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러던 그는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고 2009년에 간 이식 치료를 받게된다.

2011년 8월 24일 건강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하고 2011년 10월 5일에 56세로 사망하였다.

IT 분야에서 전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CEO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추모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남긴 뛰어난 업무적 자취들에도 불구하고 주변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비판을 사곤 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적인 목표달성에만 집중했고 애플사 근무시 매킨토시와 리사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핵심 엔지니어들과의 갈등이 많이 생겼다. 스티브 잡스는 본인이 리드했던 리사 컴퓨터 프로젝트에서

밀려나게 되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는데 매틴토시 프로젝트 엔지니어들은 노력에 비해서 형편없는 연봉을

받고있다라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맥킨토시 프로젝트가 성공했으나 리사프로젝트 팀보다

맥킨토시 프로젝트 개발팀의 급여가 훨씬 적었고 이에 상당 인원이 사기가 저하되어 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타리사에서 근무할 때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워니즈악에게 제안을 하여

5:5로 수익을 나눌것임을 사전에 약속하였으나 자신이 받은 5천 달러 중 350달러만을 워니즈악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Lisa라는 딸이 있는데 결혼전에 오랜 연인관계였던 크리스 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은 친자확인 소송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후 그는 리사가 자신의 친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가 CEO로서 달성한 수많은 업정과 업무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엔지니어, 딸을 대하는 태도등은

그가 인간적인 면모를 잘 갖추고 있지 않다라고 혹평받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 천재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48년 전 자필로 쓴 이력서…가격은?

스티브 잡스가 대학교 진학 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력서 [사진=맥루머스 캡처] [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이력서가 런던 경매에서 22만2천400달러(한화 2억5천186만원)에 판매돼 주목 받고 있다.

25일 외신 및 업계 등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가 지난 1973년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는 지난달 24일 미국 경매 사이트 ‘차터필드(Charterfields)’에 올라와 이달 24일 경매가 마감됐다. 종이 한 장인 이 이력서에는 양식의 절반 정도가 채워져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약 6개월간 다녔던 리드 칼리지를 중퇴한 후 취업하기 위해 해당 이력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소란에는 대학 이름, 전공에는 영문학으로 적었고 운전면허도 있다고 기재했다. 다만 직접 운전할 수 있지만 이동 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화번호 기재란에는 없다고 표시했다.

보유 기술은 컴퓨터와 계산기를 선택했다. 관심 분야로는 ‘전자 기술 또는 디자인 공학-디지털’과 함께 인턴으로 근무했던 회사 ‘휴렛 팩커드(HP)’를 적어 눈길을 끈다. 앞서 스티브 잡스는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HP에 하계 인턴으로 채용됐었다.

이 이력서는 가벼운 얼룩과 주름, 상단의 오래된 투명 테이프를 제외하면 매우 양호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매에 낙찰되면 편지와 정품 인증서도 함께 제공된다. 지난 2018년에는 17만5천달러(1억9천만원)에 거래됐다.

스티브 잡스와 관련된 물품은 이력서 외에도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달 1일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는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함께 만든 애플 첫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이 경매 시작가 150만 달러(약 16억7천865만원)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 컴퓨터는 수정되지 않은 NTI 마더보드와 출시 당시 쓰였던 목재 케이스를 그대로 갖추고 있는 애플1 컴퓨터 6대 중 하나로, 아직 작동이 가능한 상태다. 애플1의 출시될 당시 가격은 666달러(약 74만원)이다.

애플 출신 유명인사들, 그들은 어디에 있나?

Apple Alumni And How They Went On To Change The World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에 대해 기억할 만한 사실은 또 있다. 영리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들과 같이 일했다는 점이다.

그들 다수가 여전히 애플에 충성하고 있지만(대다수는 10년 이상 애플에 있으면서 현재는 팀 쿡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애플을 빠져 나와 다른 일에 도전한 사람도 있다. 제일 잘 알려진 애플 직원들에 대해 지금은 뭘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

앤디 허츠펠드는 1980년대 초, 오리지널 매킨토시 개발팀의 일원이었고 매킨토시 운영체제 디자인을 도왔다. 그의 애플 명함에는 “소프트웨어 마법사”라 적혀 있었다.

현재 그는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있으며, 구글+에 있는 서클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핵심 디자이너였다.

애이비 티배니언(Avie Tevanian)

애이비 티배니언은 넥스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부 부사장이었고, 넥스트 운영체제 개발의 책임자였다.

애플의 넥스트 인수 후, 넥스트 운영체제는 오에스텐으로 변모했으며, 그는 애플에 들어가서 2006년까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이끌었다. 현재 그는 벤처 투자사인 Elevation Partners의 파트너로 있다.

빌 앳킨슨(Bill Atkinson)

오리지널 매킨토시 팀의 일원이었던 빌 앳킨슨은 오리지널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매우 많은 부분을 디자인하고, 매킨토시 그래픽 UI의 핵심인 퀵드로우(QuickDraw)와 맥 최초의 그리기 프로그램인 맥페인트(MacPaint) 등 핵심 그래픽 프로그램을 다수 작성했다.

또한 그는 텍스트와 그래픽, 사운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미디어를 연결시켜서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최초의 대중성 있는 소프트웨어, 하이퍼카드(HyperCard)도 만들었다. 오랜 기간 사진사였던 앳킨슨은 현재 자연 사진에 몰두하고 있다.

버렐 스미스(Burell Smith)

애플 직원 282번인 버렐 스미스는 매킨토시용 오리지널 서킷보드(마더보드)는 물론 애플의 레이저라이터 프린터의 마더보드를 디자인한 하드웨어 천재였다.

애플을 나온 이후 그는 여러 전직 애플 직원들과 함께 하드웨어 업체인 Radius(디스플레이와 맥용 그래픽 카드, 프로세서 업그레이드 카드를 판매했다)를 공동 창업했다. 현재 은퇴한 그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클레멘트 목(Clement Mok)

클레멘트 목은 1982년 애플에 매킨토시 제품 시연팀의 아트 책임자로 들어왔으며, 그 후 1985년부터 애플의 Creative Service 팀을 이끌었다.

그는 맥의 모든 홍보물을 디자인했으며, “애플 컴퓨터의 사실상 그래픽 표준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1988년 애플을 떠나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도나 두빈스키(Donna Dubinsky)

도나 두빈스키는 소비자 지원부로 애플 초창기 시절 입사했고 애플의 소프트웨어 자회사였던 Claris의 국제영업부를 이끌었다.

그녀는 Palm과 Handspring을 공동 창업했고 PDA의 대중화를 도왔다. 2005년, 그녀는 Palm과 Handspring의 오랜 파트너인 제프 호킨스(Jeff Hawkins)와 함께 두뇌 연구 기업인 Numenta를 공동 창업한다.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

프레드 앤더슨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애플의 수석 재무책임자(CFO)였고, 스티브 잡스 휘하의 애플을 유지하고 부활시키려 노력했었다.

다만 애플의 백데이팅(backdating) 스캔들로 조사를 받은 후 360만 달러로 증권거래위원회와 합의를 하고 주식회사 일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현재 그는 벤처 투자사인 Elevation Partners의 운영이사로 일하고 있다.

길 아멜리오(Gil Amelio)

National Semiconductor의 CEO였던 길 아멜리오는 1994년 애플 이사가 된 후, 1996년 당시 허덕이고 있던 애플 CEO에 오른다.

그는 1996년 12월,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를 인수하여 잡스의 복귀를 이끌었으나 스스로 애플로부터 축출당했다. 그는 애플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Acquicor라 불리는 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벤처 투자자가 됐다.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

가이 가와사키는 애플의 수석 에반젤리스트였으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매킨토시용 제품을 만들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는 Garage Technology의 창업 파트너이면서 온라인에서 유명한 주제를 추적하는 사이트, Alltop.com을 공동 창업했다. 그는 또한 책 10권의 저자이기도 하다.

하이디 로이즌(Heidi Roizen)

하이디 로이즌은 맥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던 T/Maker의 공동 창업자였고, 1996년에 애플에 들어가 세계 개발자 관계부 부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그녀는 벤처 투자자로서 실리콘밸리에 있는 Draper Fisher Jurveston의 파트너로 있다.

장-루이 가세(Jean-Louis Gassée)

장-루이 가세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애플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애플 프랑스 지사의 수장이었다가 1985년 잡스의 축출 이후 매킨토시 개발을 이끌었고, 후에는 진보적 제품 개발 및 세계 마케팅 책임자가 됐다.

그는 미디어와 기술을 주로 다루는 Monday Note 블로그를 정기적으로 작성하고 있으며 Allegis Capital의 파트너로 있다.

조안나 호프만(Joanna Hoffmann)

조안나 호프만은 1980년 매킨토시 개발팀의 다섯 번째 멤버였으며 맥 사용자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의 첫 번째 안을 작성했었다.

그녀는 또 다른 맥 개발팀 멤버이자 실리콘밸리의 오랜 기업가인 앨레인 로스만(Alain Rossmann)과 결혼했으며,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존 스컬리(John Sculley)

존 스컬리는 펩시 사장이었으며, 스티브 잡스의 “남은 일생동안 설탕물이나 팔아먹고 살기 원하시오,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 보겠소?”라는 말로 애플에 들어왔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애플 CEO를 지냈으며 그동안 그는 매킨토시 개발 책임자였던 스티브 잡스를 애플로부터 축출했었다. 그는 현재 개인 투자회사인 Sculley Brothers의 파트너로 있다.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

존 루빈스타인은 넥스트에서 스티브 잡스와 함께 일했으며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을 맡았다. 2006년 애플에서 떠나기 전까지 그는 아이포드 팀을 이끌었으며, Elevation Partners에 합류했다가 모바일 기기/소프트웨어 업체인 Palm의 CEO가 됐다.

HP가 Palm을 인수한 후, 그는 2012년 1월 HP를 떠났고, 아직까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

Salesforce.com의 창업자이자 CEO로서 그는 원래 매킨토시부의 프로그래머였다.

미하엘 슈핀들러(Michael Spindler)

1980년에 애플에 입사하여 장시간 일한다 하여 “디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미하엘 슈핀들러는 원래 애플 유럽 지사장이었다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애플 CEO로 일한다.

PowerPC를 포함, 성공작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임기는 뉴튼과 맥 클론 등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핀들러는 애플로부터 축출되어 새로 길 아멜리오가 CEO에 올랐다.

마이크 마쿨라(Mike Markkula)

전설적인 벤터 투자자 마이크 마쿨라는 애플을 처음 도왔던 인물로서 애플의 두 번째 CEO였다. 그는 여전히 신생 기업을 투자하고 있으며, 산타클라라 대학교에 Markkula Center for Applied Ethics를 기증했다.

리드 호프만(Reid Hoffman)

LinkedIn의 공동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인 리드 호프만은 원래 애플의 제품 관리 일을 했었다.

론 존슨(Ron Johnson)

지난해 J.C.Penney의 CEO가 되기 전, 론 존슨은 애플의 소매사업을 이끌었다. 2000년에 입사했던 그는 애플스토어를 확장하여 수 십억 달러 어치의 사업으로 성장시켰다.

수잔 케어(Susan Kare)

수잔 케어는 1982년에 애플에 입사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및 아이콘 디자이너이며, 매킨토시 컴퓨터용 스크린 그래픽과 디지털 서체를 만든 책임자였다.

그녀는 또한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에서도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를 지냈으며, 현재는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최근 아이폰에 사용된 아이콘에 대해 삼성전자와 애플 간의 특허 분쟁에서 전문가 증언에 나서기도 했다.

토니 퍼델(Tony Fadell)

2004년 존 루빈스타인의 뒤를 이어 토니 퍼델은 아이포드부 수석 부사장을 지냈으며 2008년 애플에서 퇴직하여 2010년, “학습형 온도계”라 부르는 Nest Labs를 창업했다.

제프 라스킨(Jeff Raskin)

제프 라스킨은 1979년 애플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애플 II와는 달리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라는 아이디어를 추구했었다. 그는 61세의 나이로 2005년 2월, 타계했다.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스티브 “워즈” 워즈니악은 1976년 4월 1일,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했다. 저명한 자선가로서 그는 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을 설립했으며, Tech Museum과 Sillicon Valley Ballet, Children’s Discovery Museum of San Jose의 창립 스폰서였다. 현재 그는 Fusion-io의 수석 과학자로 있다.

앤디 루빈(Andy Rubin)

안드로이드의 공동 창업자이자 현재 구글 모바일 및 디지털 콘텐츠의 수석 부사장을 맡고 있는 앤디 루빈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애플의 제조 엔지니어로 일했었다.

데이브 모린(Dave Morin)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인 Path의 CEO인 데이브 모린은 2004년부터 2년간 “디자인 사고 학습과 마케팅” 일을 했었다.

앨런 케이(Alan Kay)

“미래를 제일 잘 예측하는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라는 말로 유명한 제록스 PARC 연구원이었던 앨런 케이는 1984년부터 애플 펠로우(fellow)로서 애플의 진보적 기술 그룹(ATG)에서 일했다. 그는 2001년 기술을 통한 교육 개선에 집중하는 비영리 기관, Viewpoint Research Institute를 창립하여 사장이 됐다.

라이나 왕후(Queen Raina)

요르단의 왕후, 라이나 알 압둘라(رانيا العبد الله)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애플 마케팅 일을 했었다. 1993년, 그녀와 애플 동료들이 압둘라 빈 알-후세인 공주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었고, 그곳에서 미래의 국왕을 만났다.

빌 캠벨(Bill Campbell)

Intuit 사장인 윌리엄 “빌” 캠벨은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이래 애플 이사를 역임해 왔으며, 오랜 기간 동안 애플의 마케팅 중역이었다.

전직 콜럼비아 대학교 미식축구 코치였던 그는 당시 애플 CEO였던 존 스컬리가 애플 마케팅부 부사장으로 발탁했었고 그 후 애플의 소프트웨어 자회사인 Claris를 운영했었다.

출처 : Apple Alumni And How They Went On To Change The World – For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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