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석 대표 | 이성호 대표가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계법인 회계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이유 #그때나는내가되기로했다 Ep.14 | Tvn 211009 방송 상위 176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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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1973년 ~ 2012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최은석 대표는 대한민국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의 선구주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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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빙에서 스트리밍 : https://tving.onelink.me/xHqC/30a78d6f
#재재 #인터뷰 #도전
그때 나는 내가 되기로 했다 The Moment I Became Me EP.14
세계를 휩쓴 파도의 창시자 이성호 CEO
10월 9일 (토) 오전 9시 tvN
#티빙에서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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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 매거진 | DESIGN – 월간 디자인

그렇기에 1990년대 중반부터 활약하기 시작한 국내 1세대 디지털 미디어 디자이너 최은석 대표의 행보를 되돌아보는 일은, 그 자체로 지난 10여 년간 한국 디지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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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design.designhouse.co.kr

Date Published: 4/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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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디스트릭트 홀딩스 대표 < 미분류 < 기사본문 - 톱클래스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최은석. 그는 2006년이 끝나가는 때 굵직한 상 2개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 ‘디스트릭트 홀딩스’의 개편 홈페이지가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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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opclass.chosun.com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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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최은석 대표 프로필, 사망원인 – 네이버 블로그

유퀴즈에 출연한. 이성호 대표 프로필 보면. 나이는 1980년생으로 올해 42세 입니다. 학력: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후. 경영학 석사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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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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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자살 둘러싼 조선일보-회사 논란 종결 – 민중의소리

세계 최초로 4D 테마파크를 선보인 최은석(39) 디스트릭트홀딩스 대표의 사망 원인이 자살이냐 아니냐를 놓고 벌어졌던 ‘조선일보’와 ‘디스트릭트’ 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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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op.co.kr

Date Published: 6/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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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대표 사망원인 놓고 논란…’심장쇼크’ vs ‘자살’ – 노컷뉴스

한국 멀티미디어 디자인계의 일인자인 최은석 디스트릭트홀딩스 대표가 최근 미국에서 돌연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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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ocutnews.co.kr

Date Published: 5/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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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이사 – 비즈니스포스트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이사.◇ 생애최은석은 CJ제일제당 대표이사다.2030년까지 3개 사업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른다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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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usinesspost.co.kr

Date Published: 7/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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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서 과로사’ 39세 최은석대표는 누구? – 머니투데이

이달 초 세계 최초로 4D 테마파크를 구현해 주목을 받았던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가 해외에서 과로사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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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mt.co.kr

Date Published: 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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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 프로필 전대표 최은석 사망이유

“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 프로필 전대표 최은석 사망이유 ” 삼성역에 있는 파도가 치는 전광판을 아는지요? 모른다면 아래 영상부터 한번 보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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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stravel.tistory.com

Date Published: 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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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대표가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계법인 회계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이유 #그때나는내가되기로했다 EP.14 | tvN 211009 방송
이성호 대표가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계법인 회계사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이유 #그때나는내가되기로했다 EP.14 | tvN 211009 방송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최은석 대표

  • Author: tvN STORY 티비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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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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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1973년 ~ 2012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최은석 대표는 대한민국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의 선구주자로 알려져 있다.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던 그는, 가족의 바람대로 인문계 학과에 진학(경희대학교 사회학과)하였으나 군 제대 이후 CD자켓 디자인 등 소소한 시각 디자인 작업을 시작으로 하여 그래픽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대표적인 WEB 1세대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는 그는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90년대 후반 웹사이트 제작과 관련하여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청와대 홈페이지를 비롯한 다양한 웹사이트 제작 업무 및 관련 서적 발간을 통해 업계에서 이름을 알려 왔다. 그러던 중 2000년 함께 일하던 또 한명의 슈퍼 디자이너이자 친구였던 김준한과 함께 뉴틸리티라는 웹 에이전시에 조인하게 되었고, 이후 2004년에 김준한, 이동훈과 함께 3인 공동으로 디스트릭트홀딩스를 창업하게 된다.

디스트릭트홀딩스는 故 최은석의 열과 혼이 담겨 있는 디지털 디자인 회사이다. 2000년 중반까지는 주로 삼성전자의 다수의 웹사이트 및 마이크로사이트 제작업무를 수행하여 왔으나 2008년 이후 단순한 웹사이트 제작 및 UX컨설팅이 아닌 각종 뉴미디어 디스플레이, 인터페이스를 디지털 콘텐츠와 접목하여 하나의 공간경험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비즈니스를 추진하고 있다. 2011년에는 큰 규모의 투자를 통해 4D Live Park라는 각종 뉴미디어 플랫폼들로 구성된 도심형 하이테크 테마파크를 선보였으며, 다소 과감한 투자였지만 이로 인해 2012년 이후부터 디스트릭트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멘텀을 발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디스트릭트의 발전 및 사업분야의 변경에 있어서 최은석 대표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흔히 스티브잡스에 비견될만큼 Visonary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항상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거시적인 계획 및 자신감을 가지고 이를 직원들에게 공유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디스트릭트의 산출물들은 창립이래로 항상 최고의 퀄리티 및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기업철학은 최은석 대표가 만들어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은석 대표는 떠났지만 디스트릭트에는 여전히 그의 철학이 숨쉬고 있다.

사망 [ 편집 ]

최은석은 2012년 2월 20일, 향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월간 디자인 : 최은석

profile

유니버설 프레임(Universal Frame). 터치스크린 컴퓨터를 이용해 손짓만으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 프린터, 외부 스크린과 무선 연동되는 것은 물론 휴대폰이나 이메일로도 사진 등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오프닝 공연. 각국의 석학과 정・재계 주요 인사 및 유네스코 최초 여성 사무총장인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 등 120개국 2000명의 주요 VIP 인사들에게 홀로그래픽 영상을 접목한 디지로그 공연을 선보였다.유니버설 프레임(Universal Frame). 터치스크린 컴퓨터를 이용해 손짓만으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 프린터, 외부 스크린과 무선 연동되는 것은 물론 휴대폰이나 이메일로도 사진 등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1, 2 <서울디자인자산전>에 전시된 유니버설 파사드(Universal Facade). 대형 멀티 터치스크린과 프로젝션 영상을 결합시켜 벽면 전체를 인터랙티브한 미디어 파사드로 탈바꿈시킨다. 기업의 신제품 발표회, 박람회 등은 물론 테마파크, 교육 체험 공간 등에서도 많은 수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UX스튜디오에 전시된 구형(球形) 디스플레이. 청담동에 있는 디스트릭트 UX스튜디오에서는 디스트릭트가 개발한 UX 제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uxlabs.dstrict.com

삼성 제트(Jet)폰 웹사이트. 제트폰은 삼성 ‘아몰레드폰’의 해외용 모델이다. 디스트릭트는 이 제품의 홍보를 위해 웹사이트, 로고타이프, 브로슈어, 인쇄 광고, 홍보 영상 등 제품 프로모션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작업을 했다.

삼성 제트(Jet)폰 프레젠테이션. 사회자의 손짓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환상적인 홀로그램 영상은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1 <서울디자인페스티벌 2008>에서 전시한 터치 I(Touch I). 마이크로소프트의 터치스크린 컴퓨터인 서피스(Surface)를 이용했다. ‘터치 I’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치와 연동하는 등의 기능을 추가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앞 페이지에 소개한 ‘유니버설 프레임’이다.

2 <서울디자인페스티벌 2008>에서 전시한 스윙 G(Swing G). 동작 인식 센서를 사용해 손짓만으로 화면 속 3D 그래픽 영상을 조작할 수 있다. 왼쪽 페이지에 소개한 ‘제트폰’ 프레젠테이션은 바로 이러한 장치를 만들며 쌓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휴대폰 UI 선행 연구 과제 프로젝트 인피니트(Infinite). ‘공간’과 ‘유리’라는 메타포를 사용, 기존의 2차원 평면에서 이루어지던 UI에 공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터치 기반으로 다양하고 편리하며 자유로운 사용자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에서 전시한 터치 I(Touch I). 마이크로소프트의 터치스크린 컴퓨터인 서피스(Surface)를 이용했다. ‘터치 I’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치와 연동하는 등의 기능을 추가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앞 페이지에 소개한 ‘유니버설 프레임’이다.에서 전시한 스윙 G(Swing G). 동작 인식 센서를 사용해 손짓만으로 화면 속 3D 그래픽 영상을 조작할 수 있다. 왼쪽 페이지에 소개한 ‘제트폰’ 프레젠테이션은 바로 이러한 장치를 만들며 쌓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휴대폰 UI 선행 연구 과제 프로젝트 인피니트(Infinite). ‘공간’과 ‘유리’라는 메타포를 사용, 기존의 2차원 평면에서 이루어지던 UI에 공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터치 기반으로 다양하고 편리하며 자유로운 사용자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2001년 제작한 삼성 컴덱스(Comdex) 2001 전시 프로모션 사이트. 디스트릭트의 전신인 뉴틸리티의 초기 대표 히트작이 되었다.

개인 포트폴리오 ‘오렌지서핑’ 웹사이트. 본래는 드림위버 교재의 제작 예제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웹사이트였다. <조선일보> 인터넷 대상, <동아일보> 디지털 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최은석 대표는 프리랜서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 웹사이트. 노트북, 자동차 키, 신문 등이 놓인 고급스러운 책상이 등장, 오브제를 선택해 클릭할 때마다 관련된 영상이 튀어나오는 인터랙션을 적용했다.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베라크루즈 자동차의 고급스러움을 은유할 수 있는 메타포가 놓인 책상으로 궁금증을 유발했다.2001년 제작한 삼성 컴덱스(Comdex) 2001 전시 프로모션 사이트. 디스트릭트의 전신인 뉴틸리티의 초기 대표 히트작이 되었다.개인 포트폴리오 ‘오렌지서핑’ 웹사이트. 본래는 드림위버 교재의 제작 예제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웹사이트였다. 인터넷 대상, 디지털 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최은석 대표는 프리랜서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삼성전자 글로벌 웹사이트. 삼성전자 미국 사이트를 시작으로, 전 세계 삼성전자 웹사이트를 개편할 예정이다. 디스트릭트 홀딩스는 소비자 제품군별 차별화 및 온라인 브랜드 경험 관련 전략과 UI 디자인을 맡았다.

1994년부터 IT업계에 몸담으며 프리랜서로 디자인 경력을 쌓았다. 2000년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뉴틸리티를 공동 창립해 CCO(Chief Creative Officer)를 역임했다. 2004년 뉴틸리티에서 분사해 디스트릭트를 설립했고 현재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창업 초기에는 삼성 컴덱스 웹사이트, 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 웹사이트, 삼성 글로벌 웹사이트 등 인터랙티브와 결합한 웹사이트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는 스크린 속에 국한된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로그 사물놀이, 삼성 제트(Jet)폰 글로벌 론칭쇼 등 인터랙티브한 공간,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대학 재학 중이던 1994년 무렵부터 청와대 홈페이지를 비롯해 다양한 웹사이트를 구축하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계속하면서도, 국내에선 웹 디자인에 비전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죠. 왜냐하면 당시 우리나라에선 아직 웹 디자인을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가 웹사이트 제작도 겸해서 하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서버를 팔면서 웹사이트 제작은 부수적으로 무료로 해주는 업체도 있었지요. 또 당시만 해도 제가 2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유학을 준비하면서 쓴 책이 라는 홈페이지 제작 툴에 관한 교재였는데, 컴퓨터 툴 활용 교재는 대개 하나의 프로젝트를 예제로 제시하고 그것을 따라 만들어보는 튜토리얼 형식으로 구성되잖아요. 그래서 그 책의 예제로 사용하기 위해 다이내믹 HTML 홈페이지를 활용한 개인 포트폴리오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왕 만든 김에 웹사이트 공모전 등에도 출품해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인터넷 대상 등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해외 공모전에서도 본선에 오르는 등 성과를 올리면서 이름을 알리게 됐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제가 요즘 디지로그 사물놀이 등의 공연을 하며 이어령 선생님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데, 그 당시 인터넷 대상 심사위원장님이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때는 이어령 선생님도 저를 전혀 모르셨고, 저 역시도 이어령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으니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구나 싶어요.이름이 알려지면서 갑자기 일감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프리랜서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죠. 저는 웹사이트 전체를 구축하기보다는 사이트의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하는 메인 페이지 시안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어요. 한번은 어떤 프로젝트에 4개 업체가 입찰했는데, 그중 3개 업체가 제가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온 일도 있었어요. 1990년대 중·후반에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쟁이 한창 치열해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런 일을 하면서 수익은 급성장했죠. 불과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연봉이 1000만 원 정도에서 억대로 늘어났으니까요. 솔직히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완성도가 대단했던 건 아니었지만, 업계에서 조금 유명하다는 이유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험을 하면서 ‘남들이 하지 않은 영역을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유리한 점이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만약 제가 인쇄물 디자인을 했다면, 비슷한 수준의 미적 성취를 이뤘더라도 그 정도로 주목받지는 못했겠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또 다른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투자자의 힘을 빌려 친구들과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디스트릭트의 전신인 뉴틸리티(Nutility)의 시작이었죠.1990년대 후반은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의 태동기라 할 수는 있지만 산업화되었다고 보기엔 이른 시기였지요. 2000년대에 들어서서야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발주를 시작하며 웹 디자인이 비로소 본격적인 ‘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때 대형 프로젝트도 많아서 30억~40억대의 매출을 올리면서, 직원 6명으로 시작한 뉴틸리티가 단기간에 60명 정도로 늘어났어요. 문제는 다른 디자인 분야처럼 웹 디자인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일’로 인식되었어야 했는데, 웹 제작이라는 것이 범용화되면서 매출도 일정 수준에서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돌파구를 찾고 싶었어요. 2004년에는 ‘컨설팅 회사’를 지향하기 위해 컨설팅 조직도 만들었지만 날로 다양해지는 기업의 욕구를 웹이라는 하나의 수단으로 해결하긴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 새로운 비즈니스 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 모바일 UI였어요. 국내의 경우 휴대폰에 컬러 액정이 일반화되면서 모바일 장치 UI라는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외국의 경우는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하며 혁신적인 UI를 도입했죠. 애플의 UI와 전략을 눈여겨보면서 저희도 사용자 경험 디자인, 즉 UX 디자인이란 분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용자 경험 디자인(UX)에 집중하기로 하고, 2004년 7월에 뉴틸리티에서 나와 ‘디스트릭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업을 했습니다. 뉴틸리티 때는 투자자가 있었지만, 디스트릭트는 저희 자본 위주로 독립했다는 경영상의 변화도 있었고요. 시대적인 환경을 고려할 때 새로운 포트폴리오가 필요한데, 이러한 변화는 웹 미디어였던 것을 모바일 미디어로 바꾸는 정도로는 안 되겠고 ‘본질부터 새로운 미디어’여야 한다는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까지는 목표를 명확하게 세우지 못하고 일종의 방황기를 겼었습니다. 애플을 벤치마킹해보자는 생각으로 일본과 함께 유코(Uco)라는 MP3 플레이어를 개발하려 시도했던 것이 그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품은 실패로 끝났고, 애플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우리만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제품을 통해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실현시켰다면, 우리는 공간, 공연, 전시, 건축을 통해 차별화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기로 마음먹었지요.디스트릭트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있어요. 우선 스트릭트(strict)는 엄격함을 뜻하지요. 그리고 ‘디’는 디자인(design)을 뜻하기도 하고, 반대(de-)를 뜻하기도 해요. 즉 디자인은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엄격하게 하되(design+strict),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얽매이진 말고(de+strict) 예술과 디자인, 기술을 자유롭게 넘나들자는 뜻이 담겨 있어요. 사고방식은 유연하게, 디자인은 철저하게.이번 칸국제광고제 세미나에서 ‘유니버설 프레임’과 ‘하이퍼 프레젠테이션’을 시연할 기회가 있었어요. DDB, 사치 & 사치(Saatchi & Saatchi), 사피엔트 니트로(Sapient Nitro) 등도 함께 발표했는데, 그중 작동에서 기술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 우리밖에 없었어요. 사피엔트 니트로 등의 디지털 설치물은 시연 도중 작동이 멈춰버렸고, DDB가 준비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시연을 못했어요. 이렇듯 뉴미디어는 아직 성숙이 덜 된 영역이고 해외의 쟁쟁한 회사들조차 애를 먹을 때가 있어요. 디자인이나 크리에이티브 영역과 달리 기술 영역은 안정성 검증이나 개발자 능력이 중요한데, 그것이 부족하니까 문제가 생기지요.2000년에 뉴틸리티를 설립한 지 3개월 만에 삼성전자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회사를 따로 세운 줄은 모르고 여전히 프리랜서로 생각하고 의뢰를 한 모양이에요. 그때 꽤 유명한 에이전시와 경쟁 입찰을 했는데 운이 좋게도 저희가 그 계약을 땄어요. 그 후 컴덱스(Comdex) 전시의 삼성전자 프로모션을 위한 마이크로 사이트 구축은 저희가 인터랙티브한 웹사이트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을 선보인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제시한 ‘마이크로 사이트’라는 개념은 현재 온라인 마케팅의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고요. 당시 삼성전자 측의 담당자도 무척 진취적이고 의욕적인 사람이라 계속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먼저 저희에게 지속적으로 관리해달라고 한 건 아니고, 무슨 네트워크가 따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삼성 글로벌 웹사이트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지속적으로 관계가 이어진 것이죠. 좋고 싫고를 떠나서, 삼성은 실력과 노력을 보여주면 그걸 알아주는 문화가 있다는 점에선 인정할 만해요.UX 설계와 관련된 프로젝트 중에서는 아까 얘기한 MP3 플레이어 ‘유코’ 외에도 SK텔레콤과 함께 했던 ‘G1’이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말하자면 아이패드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거였고, 우리는 거기 들어가는 서비스까지 컨설팅하며 새로운 역할 모델을 시도해보았지요. 결과적으로 이것 또한 실제 제품 양산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고 국내에서 이러한 사업 모델을 추구하기엔 아직 여건이 불충분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도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UX 컨설팅’이란 것을 해볼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시나 공간 연출로의 전환점이라면 2008년 12월에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했던 전시를 빼놓을 수 없죠.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족한 전시였지만, 2년 가까이 만들어온 결과물을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 쇼케이스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일정 공간을 빌려 결과물을 한꺼번에 전시해본 것도 처음이었고, 공간과 어우러진 UX라는 개념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습니다. 일반 대중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자신감을 얻은 계기도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때 관객과 클라이언트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 지금 저희의 포트폴리오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니, 저희에겐 큰 의미가 있는 전시였습니다.작년까지 뉴욕 지사는 영업 사무소 역할을 했어요. 우리 인력이 파견 나가서 삼성 온라인 관련 프로젝트를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현지 브랜드로부터 문의가 들어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올해부턴 현지에서 실제 제작도 할 수 있도록 인원을 충원해 ‘디스트릭트 USA’라는 이름으로 거듭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 광고 시장에서 매체 집행비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크리에이티브’에 들어가는 비용은 다 합쳐봐야 수천억도 안 할 거예요. 하지만 같은 광고 시장이라고 해도 미국 시장에 가면 규모가 커질 수 있으니까 해외 진출을 노리게 된 거죠. 단지 디자인 분야의 자산만을 가지고는 한국 디자이너가 외국 시장에서 현지 디자이너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의 결합을 무기 삼아 해외로 진출하려 하고 있습니다.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시장 자체를 넓히겠다는 전략이라면, 광고뿐 아니라 전시, 건축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춰 사업 영역을 넓히겠다는 전략으로 조직 개편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간 디자인에 특화시킨 ‘디스트릭트 S’와 미디어 분야에 특화시킨 ‘디스트릭트 F’를 자회사 체제로 둘 계획입니다. 그리고 본사 격에 해당하는 디스트릭트 홀딩스는 미래 비즈니스를 개척하는 역할을 전담하게 될 겁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 수익을 추구하는 일이 섞여 있으니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대표인 제가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만 신사업이 추진되는 일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아예 그중 한 회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만 전담하는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저는 지금도 스스로를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 다만 과거엔 디지털 미디어를 디자인했다면, 지금은 디스트릭트라는 회사 전체를 디자인하는 식으로 디자인하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죠. 디자인이란 세상만사를 나의 철학으로 이해해 결과물을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디스트릭트를 디자인한다’는 생각은 5년 전쯤부터 해왔고, 경영인이 되면서 직접 크리에이티브를 만드는 일은 손에서 좀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지금의 역할에 적응했어요. 지금은 경영과 크리에이티브의 무게 중심을 반반씩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시간 배분도 하루 중 반은 외부인을 만나는 등 경영 관련 활동에 쓰고, 나머지 반은 디자인 결과물을 검수하는 등 크리에이티브 관련 활동에 쓰고요.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방식, 원천 기술을 상업적 필드로 끌어올리는 능력, 그리고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전략 등이 모두 디자인 영역의 일부임을 깨달았는데, 다행히 그런 것을 디스트릭트가 잘 해나가고 있는 듯하고, 저 자신도 그 모든 일을 좋아하지요. 회사 조직의 운영 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1본부, 2본부 하는 식으로 묶여 있는 게 아니라, 인원 전체가 태스크포스(TF)식으로 이합집산한다는 것이에요. 회사를 운영해보니 조직 간의 장벽이 무서운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따로 무슨 ‘센터’를 두는 대신 전체 인원이 혁신적인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디지털 디자인의 결과물이 잊혀지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죠. 첫 번째는 일정 기간이 지나 웹사이트가 문을 닫아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이것을 내가 했다’고 보여주기 어려워지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특히 선행 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자주 생기는 일인데, 제가 만든 결과물은 내부 참고용으로만 쓰이고 실제 시장에 나오는 결과물은 처음에 제안했던 콘셉트와는 다르게 만들어지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일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디지털 디자인에 거부감을 갖기도 하죠. 사실 공간과 결합된 경험 디자인을 만들고 싶었던 동기 중에는 ‘휘발되지 않고 만질 수 있으며 비교적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결과물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저에게 과거의 디자인이란 단순히 본받을 만한 형태 자체로서가 아니라 ‘왜 그 시대에 그것이 필요했을까’ 하는 것을 고민하게 해주는 의미가 더 커요. 가령 바우하우스를 예로 들면, 거기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디자인 스타일 자체가 아니고 과연 그 시대에 바우하우스가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나 하는 역사적인 맥락이란 거죠. 고전이라 불리는 과거의 디자인은 결국 그 시대 사람들이 원하던 것을 딱 잡아낸 거잖아요. 디자인을 기반으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우리에겐 혁신적인 요소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책장에 꽃힌 책도 예전에는 디자인 책이 많았지만 지금은 인문학, 공학, 예술 등의 책도 많아졌어요. 그중에서도 문학, 철학, 사회학 등 인문학적인 배경이 무척 중요해요. 이번에 아이패드 론칭 쇼 때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은 인문학과 예술의 교차로에 서있는 회사’라고 한 발언이 무척 화제가 되었잖아요. 반면에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은 아직도 ‘우리는 더 얇고 큰 액정을 만들어냈다’라는 식으로 발표회를 시작하죠. 바로 여기서 무엇을 자기 회사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차이가 드러나는 거예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까지 드러납니다. 애플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일단 제품을 만들어요. 그런 다음에야 사용자 평가를 받아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자 할 때, 아직 실체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자꾸 그 제품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하려 들어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기존에 없던 융합 상품이고 사람들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그에 대한 대답을 조사해 추리니까 뻔한 대답만 나오고 결과적으로 하향 평준화된 제품밖에 나올 수 없죠.과거의 사례를 돌아보면 결국 당대에 혁신적인 것을 만든 사람만이 성공했다는 걸 깨닫게 돼요. 대부분의 사람은 피카소를 입체파의 대가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피카소는 툴루즈 로트렉의 제자이기도 했고 후기 인상파에서 영향을 받은 적도 있으며 도예, 판화, 조각 등 미술의 전 분야를 섭렵했잖아요. 즉 피카소는 항상 시대가 원하는 바를 따라 장르를 바꾼 거예요.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을 수 있었죠. 반면 평생 큐비즘만 고집한 조르주 브라크 같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죠. 저는 시대를 읽어 그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잡아내는 것이 예술혼이고 예술가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는데, 디자인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이번에 디지로그 사물놀이를 준비할 때도 그랬어요. 이어령 선생님도 편집자였다가, 시인이었다가, 장관도 거치면서 평생 자신을 변화시키셨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디지로그 퍼모먼스를 함께 만들면서 공연 연출을 해보신 것이죠. 이어령 선생님의 ‘나를 바꾸겠다’는 의지는 참으로 대단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신 기술의 수용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거꾸로 ‘아티스트의 자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워해선 안 되지 싶어요. 제가 비교적 젊기 때문에 그나마 기술의 변화를 따라갈 수 있는 탓도 있겠지만, 피카소도 큐비즘을 하려다 조각을 시작했을 때 밑바닥부터 배워야 했을 테니 얼마나 어려웠겠나 생각하면 각오를 새롭게 다지게 되죠.그동안 디스트릭트는 광고 영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디자인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웹뿐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를 모두 합쳐도 우리나라의 총 광고 시장은 3조~4조 정도의 규모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공연, 전시, 교육, 건축 분야의 시장을 다 합치면 국내에서만도 160조가 넘는 거예요. 시장 규모를 보면 앞으로 우리가 진출해야 할 영역이 어디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게 됩니다. 이러한 미개척의 넓은 시장을 놔두고 굳이 광고라는 영역 내에서만 아웅다웅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미디어 파사드도 그러한 뉴미디어의 예가 되겠지만, 벌써 그것조차도 이미 낡은 개념이 되어가고 있어요. 이제는 단순히 건물 벽면에 LED를 설치하는 수준이 이나라 건물 자체가 미디어와 완전히 결합되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며 느끼는 경험 자체를 인터랙티브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많거든요. 그런 형태로 발전하면 인터랙티브한 디지털 미디어의 활용 폭이라는 것이 정말 무궁무진해지죠. 그리고 교육의 경우에는 공간 내에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고 교육 이벤트를 여는 등의 활용 방안을 생각할 수 있죠. 처음에는 막연히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청담동에 이러한 우리의 개발 성과를 전시하는 UX스튜디오도 만들었더니 이제는 다양한 분야의 클라이언트로부터 문의가 오고 있어요. 최근에는 7월 말에 라는 윤석화의 공연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중간쯤 되는 공연인데, 외국에서는 이미 이러한 결합이 트렌드처럼 떠오르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해외 유명 공연 그룹으로부터도 홀로그램과 혼합한 공연에 대한 문의가 들어와 현재 이에 대한 기획을 조정하고 있습니다.‘변화와 혁신’은 요즘 시대의 키워드이자 제가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해요. 저 자신도 ‘웹 디자이너’를 거쳐 ‘디지털 미디어 디자이너’, 그다음엔 다시 ‘인터랙티브 디자이너’로 역할을 계속 확장해왔거든요. 심지어 유네스코 교육문화예술대회 행사에서 저의 직함은 ‘프로듀서’였고요. 이렇듯 끊임없이 혁신적인 쪽으로 변화하고 싶은 욕구가 커요. 저 스스로는 저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강점이 있다면 저에겐 변화의 가능성이 있고, 계속 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겠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디스트릭트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 ‘새로운 것’이 한때는 디지털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었고, 지금은 ‘예술과 기술을 합치는 것’이 되었으며, 10년 뒤에라면 어쩌면 생명공학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최은석 디스트릭트 홀딩스 대표

오프라인에 비해 수명이 짧은 멀티미디어 디자인.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창의성과 자기 혁신이 생명인 이 일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말한다.

런던 국제광고제 금상과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2006’ 수상

동갑내기인 공동대표 김준한 씨(왼쪽)와.

사진 : 이창주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최은석. 그는 2006년이 끝나가는 때 굵직한 상 2개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 ‘디스트릭트 홀딩스’의 개편 홈페이지가 런던 국제광고제에서 금상을 받은 데 이어 그가 디자인 책임을 맡은 현대자동차 LUV 베라 크루즈의 온라인 카탈로그가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2006’에서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부문에 뽑힌 것.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역삼동 디스트릭트 홀딩스 사옥을 찾았다. 현관문 옆에 직원들 이름을 가나다라 순으로 적어놓은 문패가 있었다. 어디에도 직급 구분은 없었다. 한참 뒤쪽에 자리 잡은 ‘최은석’의 구내번호로 전화를 하자 그가 직접 받아 문을 열어준다. ‘freight’란 표시가 붙어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그는 “찬 것, 뜨거운 것 중 어느 걸로 드실래요?”라며 음료 주문을 받는다. 그가, 우리나라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중 1인자로 꼽히고, 100명 가까운 직원을 둔 디자인 회사의 대표다.“일할 때는 위계질서가 필요해요. 팀을 이뤄 일하는 작업에서 누군가 방향을 잡아가야 하니까요. 그 외에는 권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각자가 자신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디렉터이고, 저는 그들에게 박수를 치거나 비평을 해주는 존재지요.”각 디자이너들의 개인 공간이 널찍한 데 비해, 대표인 그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진두지휘하는 그는 정식 교육기관에서 디자인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집안 반대로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경희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몇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전산병으로 군대에 다녀온 후 ‘앞으로 멀티미디어 세상이 열리겠구나’ 직감했고, 멀티미디어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유학도 생각해 봤지만, “일단 일부터 해보자”며 뛰어들었다. 군대를 제대한 1994년, CD-Rome 타이틀 디자인부터 시작했다.“어머니가 화가셨어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죠. 사람들과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웹 사이트, 휴대전화, 디지털 TV 등 사람들이 하루 종일 곁에 두는 멀티미디어 세상을 디자인하고 있으니, 그의 꿈대로 된 셈이다. 그가 제일 처음 디자인 책임을 맡아 진행한 프로젝트가 1995년 청와대 홈페이지 개편 작업이었다. 그 후 검찰청, 국가정보원, 경찰청, 재경부 등 관공서 홈페이지를 도맡아 작업하다시피 했다.“청와대 홈페이지를 만들 때 한 비서관이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백두산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한라산에서 알을 낳고 인왕산 청와대 쪽으로 날아왔다는 거예요. 당시 기술로는 홈페이지 안에 동영상을 넣을 수 없었지요.”1998년 그는 새로 개발된 ‘드림위버’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멀티미디어를 접목시켰다. 마우스 조작에 따라 인터액티브하게 움직이며 사용자들과 교감하는 그의 홈페이지 ‘오렌지 서핑’은 그해 인터넷 대상, 디지털 대상을 받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을 ‘오렌지 서핑’이라고 지은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관공서에서는 하나같이 배경을 파란색으로 해달라고 주문했어요. 믿음과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색이라고요. 제 홈페이지는 그것과 반대로 만들었죠. 파랑과 반대되는 활동적인 오렌지색에 사용자들로 하여금 파도 타는 것(서핑) 같은 역동적인 느낌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1998년 독립해 한동안 ‘제일 비싼 프리랜서’로 주가를 높였던 그는 2000년 멀티미디어 디자인 회사 ‘뉴틸리티’를 세웠다. 1973년생 동갑내기 김준한 씨와 함께였다. 같은 회사에서 잠시 함께 일한 적도 있다는 그들은 서로가 ‘짝’임을 금방 알아봤고, 지금까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김준한 씨는 최은석 씨를 처음 봤을 때 “한 마리 야수 같았다”고 말한다. 김준한 씨는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과 출신. 교과서적인 디자인 훈련을 받아온 그에게 최은석 씨의 작품은 “톡톡 튀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반면 최 씨는 김 씨의 ‘기본에 충실한 논리적 디자인’에 이끌렸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됐고, 김 씨의 후배인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출신들이 이 회사의 주축이 됐다. 이 회사는 적대적 M&A의 위기를 넘긴 후 2004년 디스트릭트 홀딩스로 새로 출발했고, 더욱 발전했다.삼성전자와 SK, 하나은행, 혼다, 야후, 다음 등이 주요 고객. SK 커뮤니케이션스가 인수한 싸이월드의 개편도 맡았다. 올 상반기 새로 론칭할 예정인데,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선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오프라인에 비해 수명이 짧은 멀티미디어 디자인.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창의성과 자기 혁신이 생명인 이 일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다들 어깨가 넓어 보이도록 일부러 교복을 고쳐 입던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반대로 어깨를 좁혀 입었다. ‘굳이 남들을 따라가야 하느냐’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촌스럽다고 야유했지만 굴하지 않았다고. 주위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 그의 오늘을 만든 셈이다.그의 일이 그랬다. 2개의 창이 동시에 열리면서 역동적인 화면이 연출되는 삼성전자의 3세대 휴대전화 홍보 플래시나, 클릭으로 창을 열던 방식에서 벗어나 마우스를 끌어오는(드래그) 방식으로 세부 내용이 열리게 하는 디스트릭트 홀딩스의 새 홈페이지나 모두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데서 디자인이 시작돼 “놀랍다”는 반응을 얻었다. 요즘은 새로운 형태의 MP3 개발에 열을 올리며 오프라인 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히려 한다. 그에게 “함께 일할 식구를 어떤 기준으로 뽑느냐?”고 물었다.“열정적이고 게으르지 않고, 무엇보다 정치적이지 않아야 합니다.”돈이나 입신양명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 면에서는 철저히 ‘코드 인사’인 셈이다. 김준한 대표와 그가 그런 면에서 서로 맞아 함께 일을 하게 됐다고. 김준한 대표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사내 결혼을 했는데, 30대 중반인 최은석 씨는 아직 미혼이다. “디자인업계의 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원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상향을 묻자 ‘가죽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란다. 멋을 아는 여자라는 뜻이다.

디스트릭트 최은석 대표 프로필, 사망원인

그러나 2016년 대표이사가 된 후에는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기도 빠듯했습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9억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자금을 토대로 제주도에서

아르떼 뮤지엄 개관에 나섰습니다

[Who Is ?]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이사

▲ 최은석 CJ제일제당 대표이사(오른쪽)와 정중규 HDC현대EP 대표이사가 2021년 6월24일 ‘바이오 컴파운딩 합작회사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함께 협약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LA서 과로사’ 39세 최은석대표는 누구?

↑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 이달 초 세계 최초로 4D 테마파크를 구현해 주목을 받았던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가 해외에서 과로사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디스트릭트 관계자는 “지난 주말 최은석 대표가 LA 출장중 호텔에서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면서 “현재 임원들이 LA 현지로 건너가 시신수습중이며 주말께 국내로 후송해 안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장례 절차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곧 부고와 함께 대표이사 사망관련 공식발표를 할 것이라고 회사는 밝혔다.

최은석씨는 국내 대표적인 웹에이전시인 디스트릭트의 대표로 3D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건물벽면을 다양한 이미지를 투사해 변형시키는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s) 사업을 전개해 주목을 받아왔다. 삼성전자, 티파니 등 기업들의 해외런칭쇼를 전개해 호평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이를 활용한 4D 테마파크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 설립하기도 했다.

최대표는 지난 연말 ‘2011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에서 차세대콘텐츠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디스트릭트 측은 대표이사 사망에도 불구 라이브파크의 국내, 해외 진출 등은 현지 파트너와 차질없이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달 초 세계 최초로 4D 테마파크를 구현해 주목을 받았던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가 해외에서 과로사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디스트릭트 관계자는 “지난 주말 최은석 대표가 LA 출장중 호텔에서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면서 “현재 임원들이 LA 현지로 건너가 시신수습중이며 주말께 국내로 후송해 안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자세한 장례 절차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곧 부고와 함께 대표이사 사망관련 공식발표를 할 것이라고 회사는 밝혔다.최은석씨는 국내 대표적인 웹에이전시인 디스트릭트의 대표로 3D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건물벽면을 다양한 이미지를 투사해 변형시키는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s) 사업을 전개해 주목을 받아왔다. 삼성전자, 티파니 등 기업들의 해외런칭쇼를 전개해 호평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이를 활용한 4D 테마파크를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 설립하기도 했다.최대표는 지난 연말 ‘2011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에서 차세대콘텐츠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디스트릭트 측은 대표이사 사망에도 불구 라이브파크의 국내, 해외 진출 등은 현지 파트너와 차질없이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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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 프로필 전대표 최은석 사망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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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이성호 대표 프로필 전대표 최은석 사망이유 ”

삼성역에 있는 파도가 치는 전광판을 아는지요?

모른다면 아래 영상부터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삼성역에 가서 저걸 안 보고 오면 서운하다는 말이 나올정도이니,,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 !!!

이런 4D의 영상물을 만든 업체가 바로 ‘디스트릭트’라는 업체인데,

디스트릭트의 대표인 이성호씨가 유퀴즈에 출연하여 그동안 어떻게 회사가 어려움을 겪었고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다가 점점 빠져들어 결국 다 보고 말았네요. 정말이지 인간승리라는 표현이 맞는 듯 합니다.

현재 디스트릭트는 코엑스에서 뉴욕까지 전세계 도심에 자신들의 콘텐츠를 설립하여 한국의 영상에 대한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엑스와 뉴욕에 설치된 웨이브 (WAVE) 작품은 사실상 회사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한 홍보작품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설치했다기 보다는 우리가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설치했다는 말이 더 멋있게 들리는것 같네요.

코엑스와 뉴욕의 전광판은 건물주와 회사 상호간에 돈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서로의 윈윈을 위하여 걸게되었다는 겁니다.

전광판에는 일정한 부분은 공익의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법안이 있어, 그에 맞추어 이렇게 기획을 했다는 겁니다.

뉴욕의 전광판, 폭포 워터폴의 경우는 삼성전자가 설치한 LED 스크린에 디스트릭트가 작품을 만들어 올리는 식으로 했으며, 처음에는 2천만원의 비용을 내고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협약을 맺었지만, 향후 건물주가 한달간 무료로 더 상영하게 해달라고하여 무료로 공간을 사용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유퀴즈에서는 유재석이 이렇게 회사를 알리는 홍보용으로 설치가 된거라면 대체 수익은 어디서 나는거냐고 물었는데요, 이는 저도 궁금한 부분이었습니다.

디스트릭트는 웨이브 프로젝트 시작전에 이미 제주도에 아르떼 뮤지엄 전시회 사업을 하고 있었고, 작년 9월부터 오픈하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1년동안 85만명이 방문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디지털 전시사업이여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에서도 협업요청이 들어와서 현재 작업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회사입니다.

디스트릭트가 처음부터 승승장구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2년 당시 과감한 금액를 투자하여 세계 최초로 실내 미디어 아트파크 사업을 시작했는데, 자금난에 어려워지다가 결국 창업주인 최은석 대표가 사망하게 되면서 회사가 더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최은석 대표의 얼굴을 보고 투자를 하고 협업을 하던 모든 끈이 없어지고 회사가 몇년간 암흑기를 달렸다고 합니다.

최은석 대표가 갑자기 사망한 건에 대해서는 아래글에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성호 대표에 따르면, 최은석 대표는 세상에 없지만 아직도 디스트릭트 직원들 마음속엔 남아 있는 대표라고 합니다.

전 대표에 대한 직원들의 애정이 크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떠나간 최은석 대표역시 행복했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호 대표에 대하여

2004년 설립된 디스트릭티는 원래는 웹디자인을 제작하는 업체로 시작하였으나, 2009년 이후부터 미디어 콘텐르를 만드는 회사로 변신을 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디스트릭트가 세계 최초로 4D 아트파크를 선보이는데, 1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봅니다.

이때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던 찰나에 전문경영인의 필요성이 느껴져, 2009년 사업개발본부에 공인회계사로 입사하였던 이성호 대표를 2016년부터 대표이사로 추대하여 회사의 경영을 맡기게 됩니다.

이에 이성호 대표는 B2B 사업에서 B2C 사업으로 확대하는데 집중하였으며, 이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추진한 사업이 바로 전시관 사업입니다.

이성호 대표는 회계사 출신이며, 원래 다니던 삼일회계법인이라는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방위산업체로 근무하였던 디스트릭트에 남아 계속 일을 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회계사로서 일을 계속 했다면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었겠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스타트업에 남은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 합니다.

최은석 전대표의 죽음에 대한 공방

최은석 전대표는 디스트릭트를 만든 장본인이며, 한국의 영상분야게서 가장 뛰어난 크리에이터로 인정 받던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디스트릭트 직원들에게 “우리같은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 비지니스를 할 수 있는 회사” 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최은석 대표는 대학을 중퇴 후 한국의 멀티미디어 디자인의 1인자로 자리를 매김하며 성장한 이쪽 분야에서는 레전드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뉴틸리티’라는 멀티미디어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2004년 디스트릭트 홀딩스로 회사명을 바꾸며 3D홀로그램 기술을 개발하여 건물에 벽에 투사하여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술을 선보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미국 출장중이던 최은석 대표는 초기 심장마비로 인한 쇼크사로 알려졌었으나, 향후 경찰 조사 결과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사업을 확장하며 사업의 진행에 대한 부담감이 컷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서는 따로 발견되지 않았으나, 최은석 대표가 선보인 라이브 파크의 성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타까운 한명의 인재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우며, 디스트릭트의 직원들이 아직도 최은석 전대표의 의지를 받아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동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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