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7 웅 | [#하이라이트#] ‘전국 7웅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의 권력의 비결과 비참한 최후’ 풀버전#벌거벗은세계사 | Ep.6 | Tvn 210213 방송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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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칠웅 – 나무위키:대문

전국시대를 주도했던 진(秦)나라, 초(楚)나라, 제(齊)나라, 연(燕)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의 7개 국가를 이르는 말이다. 이 7개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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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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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칠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국 칠웅(중국어 정체자: 戰國七雄, 간체자: 战国七雄)은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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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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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5패와 전국7웅 – 네이버 블로그

오패라는 관념은 전국시대 중엽부터 발달한 오행(五行)설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 같다. …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7개 강국을 일컫는 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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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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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 중앙일보

COLUMN,HISTORY,김운회의 新고대사,주나라,고죽국,전국시대,발조선,도읍,사기,지역,역사, …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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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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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7웅

중국의 역사 한번에 다보기 (70분 순삭ver.) #중국역사 #하상주 #춘추전국 #한나라 #위진남북조 #당나라 #5대10국 #송나라 #원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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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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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 ChineseWiki

이처럼 전국시대는 전국7웅을 중심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시대 개요. 정치. 약육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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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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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7웅[ 戰國七雄 ] – 다음블로그

전국7웅[ 戰國七雄 ] …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7대 강국.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7개 강국을 일컫는 말로 동방의 제(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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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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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국력과 군사력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합종연횡편을 보면 이들 이론의 대표주자인 소진,장의가 전국 7웅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설득하는 과정에 전국7웅의 대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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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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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전국 7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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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국 칠웅( 중국어 정체자: 戰國七雄, 간체자: 战国七雄)은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시대에는 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 일곱 나라가 가장 강력했고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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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5패와 전국7웅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이후를 동주시대 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누어 진다.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BC 403년).

[춘추시대]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춘추(春秋)는 공자 가 엮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되었고, 전국(戰國)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 전국책 (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전국 7웅 ] 춘추전국시대 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춘추시대에 이미 독립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200여 개의 제후국들은 서로 공방전 을 거듭했다.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제후국들은 동주(東周) 왕실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그 결과 200여 개에 이르렀던 제후국들이 점차 몇 개의 국가로 통합되어 갔다.

춘추시대 중기부터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지닌 강국이 등장했다. 이들을 패자(覇者)라 했는데,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 초(楚)의 장왕(莊王), 오(吳)의 합려(闔閭), 월(越)의 구천(勾踐) 등을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한다. 춘추시대 중기부터 세력을 잡은 패자들은 작은 제후국들을 멸망시키고 현(縣)이라는 지방행정단위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전국시대에 와서는 대다수의 약소국들이 강대국 에 병합되고 소수의 강대국만 남게 된다. 읍제국가가 붕괴되고 영역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이들 강대국을 전국칠웅이라 한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다.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 에 힘썼으며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 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 은 사회조직 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 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 제자백가 (諸子百家)’ 또는 ‘ 백가쟁명 (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 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鞅)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 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한편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일부 사상(묵가 등)의 영향력이 쇠퇴하였고 그 대신 법가, 도가나 유가 등의 영향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사상과 학문이 좀더 폭넓은 계층으로 확산되며 발전해나가게 되었다.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적 의의라 할수 있을 것이다. 즉, 춘추전국시대 는 사회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지만 중국 문화의 골격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사(士) 계층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며 그 때까지 소수 귀족들에게 독점되던 지식과 학문이 일반 서민층에까지 확산되었다. // ////////////////////////////// 춘추5패 중국에서 제국간(諸國間) 혹은 제후간(諸侯間)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춘추오패는 춘추시대 5인의 패자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라 함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키는데, 한편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에는 대체로 진(晉) ·초(楚)나라 혹은 제(齊) ·진(秦)나라 등 대제후가 중심이 되어 서로 세력을 다투며, 회맹을 되풀이하였기 때문에 특히 5인에 한하여 패자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오패라는 관념은 전국시대 중엽부터 발달한 오행(五行)설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 같다. ///////////////////// 전국7웅 전국시대 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7개 강국을 일컫는 말로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한(韓)·조(趙) 나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춘추시대에는 독립된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으나 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국가가 형성되었다.

7웅이란 이러한 강대국가를 일컫는 말로 각국은 더욱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이 중 진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 //////////////////////// 패자,패왕 패주(覇主) ·패왕(覇王)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공(莊公),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 등 ‘춘추(春秋)의 오패(五覇)’가 그 대표들이다. 본시 “인의(仁義)를 존중하는 왕도(王道)에 대해서 이것은 무력과 권모술수라는 패도(覇道)에 의해서 실력을 간직한 자”라는 맹자 등 유가(儒家)의 비난이 섞인 호칭이었으나, 전국(戰國) 말의 순자(荀子)가 그 존재를 인정한 것처럼, 그 후에 나타난 전국의 7웅(七雄)이나 진(秦) ·한(漢)의 황제 등, 시대의 필요성을 짊어진 군주의 명칭이기도 하다.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이것이 당시의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은 실체가 없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사기 에 충실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사기 의 미스터리다. 이런 기록은 ‘은나라와 기족의 역사를 제외하면 한국사는 BC 190년께 연나라에서 온 중국인 위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만 이전, 41대 왕까지 이어져 왔다는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왕궁의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시경(詩經) 의 주나라 선왕(BC

827~782) 때 일이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준 것은 그 추족과 맥족(貊族), 북쪽 땅을 받고 제후가 되었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大雅 )”는 기록이다. 이 한후를 상당수 한국 사학자들은 한국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한반도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毛<8407>)은 시경 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북방의 제후급 인물이 오랑캐를 토벌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했다. ‘한후’는 주나라 왕실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일 뿐 한민족과는 관계없다는 의미다. 한민족을 의미하는 한(韓)의 개념은 당시엔 형성되지도 않았다. 시경 에는 한후가 주나라 왕명을 저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하면 제후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구절과, “한후가 분왕(汾王) 조카딸과 결혼(韓侯取妻 汾王之甥, 大雅 )”한 후 그 제후와 연나라 백성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이다. 즉 주나라 제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시경 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 때 일’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한후(韓侯)가 아니라 맥족(貊族)이다. 맥족은 예족(濊族)와 더불어 고조선의 근간을 구성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예맥은 관자 에 처음 나타난다. 관자(管子) 의 “제나라 환공(桓公, ?~BC 643)이 북으로 고죽·산융·예맥에 이르렀다(北至於孤竹山戎濊貊, 小匡 )”는 기사가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죽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전연·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 엔 “진(秦) 북쪽으로 호(胡)와 맥(貊)이 접한다( 强國 )”는 기록이, 사기 엔 “진(秦)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진시황을 보필하여)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 李斯列傳 )”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맥은 현재의 내몽골이나 요서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 에는 “북해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능어(陵魚)가 난다(北濱之東 夷穢之鄕大解陵魚, 卷20)”라고 한다. 여기서 북해는 발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BC 3~2세기 무렵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본다”고 했다.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관자 에서 처음 나온다. 사실 ‘고조선’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가 만들어낸 말이다. 관자 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卷23)”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卷24)”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관자 는 BC 7세기께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 大匡 )고 했다. 고죽국이 멸망하고 이 일대는 연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위략(魏略) 에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 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 史記 匈奴列傳 )”고 한다. 삼국지 에는 “(조선왕의)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마침내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고 했다.(동호가 고조선임은 이미 1회에서 밝혔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삼국사기 에 따르면 “(645년) 진흙이 200여 리나 돼 인마가 통과할 수 없다… 대습지여서 당태종조차 말의 칼집에 장작을 메었다(寶藏王)”고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사기 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후’라는 말은 주로 동호(선비, 모용, 요 등)가 계승했다.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삼국지 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魏書 東夷傳 韓)”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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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戰國時代)는진(晉)의 3분을 기점으로 하는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전국이란 이름은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이 이시기의 역사를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취하였다고도 하며, 여러 제후국이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전국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전국칠웅

전국칠웅

배경

주(周)나라는 전통적으로 봉건적 국가라고 불려 왔는데, 그 귀족제 하에 있는 도시국가군이 집합한 것이 춘추의 국가이다. 도시국가의 특색은 제정일치, 즉 제사를 행하는 자와 정치를 행하는 자의 일치, 즉 서구에서 말하는 신정국가다. 그러므로 국가의 지도원리는 종교적 관습 위에 입각한 예(禮)라는 질서였기에 도시국가는 각기 부족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를 지배했다. 따라서 춘추 때까지 도시국가는 서로 패권을 겨루는 전쟁을 했지만, 본래 종교적 권위에 의해 국가가 섰기 때문에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인 현상이 종교에 기초하고 있다는 신념이 희박해짐에 따라 점차 스스럼없이 타국을 멸망시켜 나갔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고 멸망과 탈취가 대규모로 행해진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형성과정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권위가 몰락하고 그 자리에 강력한 군사력을 쥔 패자(覇者)가 등장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 즉 춘추오패(제(齊), 진(晉), 초(楚), 오(吳), 월(越))는 춘추 말기가 되자 북의 진(晉), 남의 초(楚)가 그 권세를 잃게 되고 양쯔강 하류의 남쪽에 오, 월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급부상하게 된다.

북의 진은 초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고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했고 이렇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고사가 탄생한 오월전쟁이 발생, 수년간 되풀이되었다. 그 결과 오왕 부차가 패하여 오는 멸망하고 이후 월 역시 쇠망한다.

한편 북의 진(晉)은 내부의 분열로 조(趙), 위(魏), 한(韓) 3씨가 진을 3등분하고 주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는다. 이후 위(魏)가 강력해지고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과 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했다. 이렇게 비로소 중원은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결과

이렇듯 춘추말기부터 주 왕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하여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진(秦) 7대 제후들은 자신들을 왕(王)이라 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겸병 전쟁을 대규모로 전개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로 이끌었으며 이 일곱 대 제후국을 ‘전국7웅’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진(秦)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전국시대는 전국7웅을 중심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시대 개요

정치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전쟁은 만연하였고 각 국가는 군사적 힘을 키우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 이에 따라 군국주의(軍國主義) 정책을 썼고, 제후들은 능력있는 인재들을 등용해서 나라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관료제(官僚制)가 등장하였으며, 새로 얻은 땅을 제후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가 나타났고, 국가가 백성을 직접 지배하려는 제민지배(齊民支配)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전국시대에는 혈육중심의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왕의 중앙집권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사(士)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이게 된다.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고 군주가 각 분야의 책임자를 임명하여 선출했다. 그러므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장군이라는 직위가 새로 등장하여 전쟁을 할 때마다 군주가 장군을 임명하였다. 농민이나 일반 백성들 가운데 병사를 징집하기 시작하여 군사 확보에 중점을 두었고 전차군에서 보병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물리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외교정책도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였다.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장의의 연횡책(連衡策), 원교근공책 등의 외교정책을 통해 거대한 진나라와 다른 국가들 간의 첨예한 대립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권 강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회(李悝)의 중국 최초의 성문법, 농지개발과 신 재정정책, 오기(吳起)의 토지개혁과 신법제, 상앙의 변법이라는 혁신정책에 의해 법체계가 확립되었다.

사회

전국시대에는 주왕(周王)의 권위가 급격하게 하락하였고,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독립을 하여 제각기 왕을 칭하기 시작하였다. 약한 제후는 강한 제후에게 잡아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이며, 하극상을 다반사로 여기는 시대였다. 때문에 제후국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야만 했다. 평민 가운데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재상이나 장군이 되는 포의장상(布衣將相)의 국면을 열게 되어 귀족 계급이 약화되었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가 많아 졌으며,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게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각국의 국군들이 인재를 다투어 초빙하는 풍조로 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각국의 국군을 찾아가 각자 나름대로의 부강의 법을 설파하면 관직을 얻고 후한 봉록(俸祿)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출신의 재상, 즉, 객경(客卿)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여불위(呂不韋), 장의(張儀), 상앙(商鞅) 등이 있다.

제후국 사이에는 자기 소유의 영토 개념이 나타나면서 국경이 명확해지고 본격적으로 영토국가(領土國家)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작은 촌토(寸土)라도 소유하려고 했으며, 이를 직접 관할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몰락하여 전쟁이 끊이질 않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서로 빼앗고 뺏기는 풍조가 만연하였고, 이에 따라 의협심이 강한 자객(刺客)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의로운 일에 자기의 생명을 던지려고 했기 때문에 ‘의사(義士)’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인물은 형가(荊軻)로, 연의 태자 단(旦)의 부탁을 받고 진왕을 칼로 찔러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유협들은 후에 그룹을 지었고 그 중 우두머리를 호협(豪俠)이라고 불렀다.

경제

전국시대의 화폐

토지의 사유화가 허락되면서 대토지 소유자가 등장했으며 귀족에게 예속되었던 상공업이 자유롭게 영위되면서 대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지조를 받고 타인에게 경작시켰으며 농사법에 있어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우경법(牛耕法)을 바탕으로 철제 농구를 사용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또 심경법(深耕法)이 도입되어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심지어 말을 이용하는 마경(馬耕)도 일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개의 장려 또한 농업의 발전을 더욱 촉진 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경작 방법의 개선으로 인해 토양을 구분하여 비료를 사용하였으며, 분뇨 이외에 풀과 불에 탄 나무의 재를 적당히 배합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이처럼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지고 생산 관계에 변화가 나타나 부세(賦稅)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원래 병역이나 군부(軍賦)는 국인의 부담이었으나, 전쟁이 빈번해지고 그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야인에게도 부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인과 야인의 구별이 점차 모호해지고 토지의 사유화 추세가 더욱 발전되었다.

철기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 기술의 개량은 수공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소금, 야철, 칠기 등의 신흥 수공업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철제 공구가 다양해지면서 서서히 청동제를 대체했다. 그 외에도 제련업, 제도업, 제염업, 칠기 도예 등의 다양한 분야의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농업의 부업으로서 자리 잡아 가정 수공업 이외에 관영과 민영 수공업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화폐도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교통이 발달됨에 따라 각 나라간의 무역이 발달 했다. 하지만 여러 제후들이 할거 하고 있어 상업 발달의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자급자족의 자연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춘추시대 후기부터 철기의 보급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철기의 보급으로써 철제 농기구가 사용, 보급되었고 금속화폐의 주조와 보급이 이뤄졌다. 철기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돌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했다. 철기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고 잉여 생산물의 양이 늘어났다. 그로 인해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의 성장에도 영향을 끼쳐 전반적인 경제력이 성장했다. 경제력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읍 공동체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이들을 장악하여 세역과 군역을 부과함으로써 직접 지배의 통치 형식을 갖출 수 있었다.

금속 화폐는 춘추시대부터 주조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금속 화폐의 주재료는 청동이었으며 초기에는 대도시 상인들이 주조했으나 후에는 제후국이 직접 나서 주조했다. 화폐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에서 주로 주조되었다.

진나라는 철기 보급을 이용해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생활에 필수적인 철제 농기구를 국가가 직접 생산하고 백성들에게 판매했다. 이로써 백성들에게는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하고 백성들의 잉여 생산물을 국가로 유입시켜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또한 화폐를 주조하여 통용함으로써 국가가 풍흉에 따라 화폐 공급을 조작하고 잉여 생산물을 국가 재정으로 회수해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진나라는 이렇게 늘린 국가 재정을 병사를 징발하고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했다. 강력해진 군사력을 기반으로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했다.

문화

제자백가 계보도

전국시대의 문화는 제자백가와 철기문화 두 가지를 가장 주목해 볼 만 하다.

전국시대 군주들은 자신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다수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민간교육이 등장하였으며 대표적인 예로 공자와 묵자의 학단이 있다.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상을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전달하였고, 그 제자들은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러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는데, 제 선왕이 전국 각지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만들어 자유로운 학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부른다. 제자백가에서도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은 인도주의의 유가, 엄벌주의의 법가, 겸애와 비공론을 주장하는 묵가이다. 도가는 당시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제후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참고문헌

늘푸른 자연(自然)속에서

전국7웅 [ 戰國七雄 ]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툰 7대 강국.

전국시대에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7개 강국을 일컫는 말로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한(韓)·조(趙) 나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춘추시대 에는 독립된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으나 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국가가 형성되었다.

7웅이란 이러한 강대국가를 일컫는 말로 각국은 더욱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이 중 진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춘추 말기부터 주 왕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 역할을 상실하여 존왕이라는 구호를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제·초·연·한·위·조·진 7대 제후들은 춘추 시대의 제후와 달리 왕(王)이라고 칭하였으며, 토지와 인구를 빼앗기 위하여 춘추 시대보다도 더 격렬한 겸병 전쟁을 대규모로 전개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일곱 대제후국을 가리켜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전국 7웅

7국은 진이 서쪽에 있고, 다른 6국은 동쪽에 있어 동쪽의 6국과 서쪽의 진이 대치되는 국면이었다. 이는 춘추 시대 남쪽의 초와 북쪽의 제·진 등과 대치되었던 형세와 달랐다. 7국의 상황은 초의 영토가 가장 넓기는 하였으나 방어와 수비가 쉽지 않았고, 공격해 나가기도 불리한 곳이었다. 또, 한·위·조는 교통의 요지에 있어 쉽게 공격받을 수 있었으며, 연은 벽지에, 제는 바다를 끼고 있어 발전이 쉽지 않았다. 반면에 진은 서쪽에 치우쳐 있어 동쪽으로 진출하기가 쉬웠고, 물러서게 되면 방어하기에 쉬운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출처 : 중국사, 신승하, 2008.6.20, 미래엔출판사)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국력과 군사력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합종연횡편을 보면 이들 이론의 대표주자인 소진,장의가 전국 7웅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설득하는 과정에 전국7웅의 대체적인 국력을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소진이 먼저 강대국 진(秦)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6열국들의 합종을 주장하고 이들 국가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을 합니다. 반대로 후에 장의가 진(秦)을 중심으로 한 연횡론을 전파하기 위해 이들 국가들을 다시 찾아 오죠.

아믛튼 소진은 제일 먼저 전국 7웅중 북방 소국인 연(燕)의 혜왕을 찾아가 진에 대항해 6열국의 합종을 위한 설득을 시작합니다. 소진은 연의 혜왕에게 당시 중원을 위협하던 진에 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합니다.

“진 (秦) 을 제외한 여섯 열국의 국토면적은 진나라의 5배, 군사는 진나라의 10배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전국7웅의 국력판도는 이 말이 가장 맞다고 봅니다.

B.C~4~5세기 무렵 전국시대(戰國時代 )초,중반 중국의 전국 7웅들의 형세.

당시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을 공포에 떨게 만든 진(秦)나라의 국토면적과 인구등 국력이 군사력에 비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초(楚)나라와 제(齊)나라가 당시 전국 7웅 중 인구가 압도적으로 제일 많다는걸 감안하더라도, 진나라의 인구 규모나 국토는 당시 전국 7웅 중 소국에 속하는 연나라,위나라,한나라와 비슷한 규모나 살짝 위가 고작이었을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秦)나라는 그들이 위치한 산악중심의 척박한 국토여건을 감안하면 인구대국은 절대 아닙니다.

즉 진나라는 비슷한 시기 서양 그리이스의 최강 군사대국으로 비옥한 메세니아를 병합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엄격한 병영국가가된 스파르타와 비슷하게 강력한 상무국가 내지는 병영국가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당시 그리이스에도 스파르타 보다 인구가 많고 큰 나라는 많았습니다.

그려면 진나라가 어떻게 초,제등 거대국가에 앞서 유일한 군사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서쪽 변경에 위치한 진나라는 태생상 동쪽을 제외한 국토 3면이 강력한 이민족(서융,북적,남만)들에 둘러 싸여 강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지형적 위치를 갖고 거칠게 커 온 국가입니다.

더구나 진나라에는 7국간 합종,연횡 논리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직전 상앙 이라는 걸출한 법가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합니다. 상앙(商鞅은 엄격한 형법로 국가체계까지 바꾸어어 가뜩이나 강력한 병영국가인 진나라를 더욱 단합이 잘되고 군사력 투사에 매우 유리한 국가로 만듭니다.

상앙(商鞅). 원래 이름은 공손앙(公孫鞅)으로 서출이지만 위나라 왕족 출신. B.C 4세기 중반 진 효공(孝公) 강력한 지원을 바탕으로 신상필벌의 강력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 쌈만 잘 하는 나라인 변방의 야만국가 진(秦)을 진목이래 300여년만에 다시 언터쳐블의 초강국으로 올려 놓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법령은 너무도 엄격하여 정치가나 백성들은 싫어하였다고 함. 특히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유가들과는 아주 상극.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은 몸에 쓴 법이죠. 진(秦)나라는 상앙 몰락 이후에도 그가 만든 법령을 계속 실행하였고 진시황때 한비자,이사가 상앙의 법가사상의 바톤을 이어 받아 더욱 갈고 닦아 중국을 통일하고 맙니다.

상앙전후 진나라는 중원 제일의 군사강국이 됩니다. 상앙에 이어 진시황때 한비자,이사가 등장해 이런 엄격한 국가체계를 더욱 갈고 닦아아 결국 진의 통일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국민들 특히 기득권층인 귀족층은 이런 엄격한 법리를 싫어하죠. 성선설로 인간은 스스로 교화 될 수 있다는 헛된 포퓰리즘적 믿음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상앙은 진효공 사후 실각하지만 상앙이 만든 엄격한 법가주의는 진에 그대로 적용 운영이 됩니다.

사마천을 비롯한 후세의 유가를 중심으로 한 석학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법령 때문에 상앙을 비정한 사람이자 실패한 인물로 깍아 내리지만 사실 진은 상앙 때문에 중국을 통일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

아믛튼 소진이 6열국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언급하는 전국시대 후기 중원국가들의 국력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연 (燕) 나라 : 중원 동북방 변방에 위치한 국가, 국토는 비교적 넓은 편이나 국력은 미미. 그 혼란한 전국시대에도 제나라외에 강대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를 않아 전국시대 말 까지 나름 평온하게 지냄. 소진이 제일 먼저 찾은 나라가 바로 연나라.

국토면적 사방 2천리, 갑사(무장병) 수십만, 전차 6백대, 기마 6천필

– 조 (趙) 나라 : 소진은 당시 진나라를 대적 할 유일한 강대국으로 조나라라고 조왕을 추켜 세움니다. 조나라왕을 설득하는 과정이라 일부 과장이나 아첨도 있겠습니다만, 실제 당시 진(秦)과 맞설수 있는 국가 역량을 갖춘 나라는 초나라,제나라,조나라 였음은 사실입니다. 개인적 평가론 조나라는 북방의 이른바 북적 계통 이민족들과 싸우며 영토를 키워 온 국가라 나름 터프하고 병사들의 전투력도 매우 좋습니다.

국토면적 사방 2천리, 갑사(무장병) 수십만, 전차 1천대, 기마 1만필

– 한 (韓) 나라 : 한나라는 조,위,한 이렇게 진(晉)이 분열돼 생겨 난 이른바 3진 국가들중 제일 외소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중원 중심권에 위치한 관계로 인구밀도가 매우 높고 활,쇠뇌등 각종 군수품을 비롯 산업이 이웃 주나라와 함께 제일 융성한 선진국가가 바로 한나라입니다 (비슷한 위치에 과거 존재했던 정나라가 이랬습니다).

평온한 지역이라 터프함이 없어 군사력은 그다지…

국토면적 사방 9백리, 갑사(무장병) 수십만, 전차 ? 대, 기마 ? 필 ( 군사력의 측정지표인 한나라의 전차와 기마의 숫자는 소국인 연,위와 비슷하거나 이 두 국가에 살짝 못 미쳤을 것으로 추측)

– 위 (魏) 나라 : 인구밀도가 높고 교통이 발달한 국가(소진의 주장), 군사수가 30만을 넘지 못하며, 진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사방이 평지로 되어 있어 방어에 매우 취약한 국가 (장의의 주장)

국토면적 사방 1천리, 갑사(무장병) 수십만, 전차 6백대, 기마 5천필

– 제 (齊) 나라 : 인구밀도가 높고 즉묵등 풍부한 곡창지대까지 갖고 있는 부유한 거대국가. 거기다 남쪽으로 태산, 동쪽으로 낭야산, 북쪽으로 발해등 3면의 천혜의 장벽까지 갖춤. 개인적 평가로 제나라는 국가 여건은 더 할 나위없이 좋으나 그 때문인지 야성이 없어 이민족들에게 시달리지 않아 군사력은 숫자외엔 약골. 3진 국가(조,위,한)은 제나의 군사들을 멸시 했다고 함. 그래도 강국.

국토면적 사방 2천리, 갑사(무장병) 1백만, 전차 1천대, 기마 1만필

– 초 (楚) 나라 : 초거대 국가. 남방국가라 기후도 온화하여 군량도 풍부. 중원 면적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국가가 초나라죠. 초나라는 춘추시대때와는 달리 전국시대에는 거대국가임에도 상무정신이 많이 약화되서 진나라와 제나라등에 오히려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전국시대엔 덩치만 크고 약골.

국토면적 사방 5천리, 갑사(무장병) 1백만, 전차 1천대, 기마 1 만필

– 진 (秦) 나라 : 사방이 산악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국가로 방어에 유리. 국가법률이 엄격하여 국론통일이 용이하고 3면이 이민족들에 둘러 쌓인 관계로 병사들의 개인 전투력도 매우 높음. 장의는 진나라가 천하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군사는 4국과 맞먹는다는 언급을 사기에서 하지만 이는 당시에는 사실이 아니죠. 통일직전 진나라 였다면 모를까 절대 사실이 아님. 후대의 가필일것으로 추측됨.

국토면적 사방 2천리(?), 갑사(무장병) 1백만, 전차 1천대, 기마 1 만필

결론

숫치상으로만 본다면 초나라,제나라, 진나라 ,조나라는 국력의 크기가 비교적 비슷합니다. 이에 반해 비슷한 국력을 가진 연나라,위나라,한나라는 앞 선 4강국에 비해 50~60% 정도의 군사력 내지는 국력을 가짐.

초나라>= 제나라>= 진나라>= 조나라>>>>>>>>>>>연나라>= 위나라>= 한나라

그럼에도 전국시대 중기부터 진나라는 이들 6국들을 군사적으로 압도합니다. 엄격한 법가체계를 바탕으로 한 통제사회와 개개인 전투력이 나머지 국가들에 비해 매우 압도적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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