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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 나무위키:대문

원래 중국이라는 말을 일본에서는 하나의 ‘왕조’와 비슷한 개념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언젠가 또 다른 왕조 혹은 체제가 등장할 경우를 대비하여 아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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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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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나(支那)란 중국을 가리키는 호칭 중 하나이다. 원래는 역사상 최초의 중국의 통일국가로 알려진 진나라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현재 중국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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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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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 위키낱말사전

1. 중국 본토를 가리키는 말로, 내몽골이나 티베트 등은 제외된다.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진나라[秦]에서 유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파생어: 인도지나. 이 뜻의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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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tionary.org

Date Published: 9/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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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동이, 지나와 중국 – 경남도민신문

지나라는 말은 ‘가지되는 나라’라는 뜻이다. 중심이 아니라 곁가지의 나라라는 뜻이니 어원상 중국은 중국이 아니다. … 그것은 바로 대륙을 호령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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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ndomin.com

Date Published: 9/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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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지나(支那)”의 의미 – 다음블로그

중국에서 자주 말하는 “지부(支部)” “지대(支隊)”등응 모두 일본에서 수입한 단어이다. 일본어에서 “나(那)”라는 한자는 ‘지방’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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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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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추악한 중국인』 사라지나 – 중앙일보

자기 민족을 향해 독설을 퍼부은 대만 작가 보양(柏楊)의 작품 『추악한 중국인(丑陋的中國人)』을 둘러싸고서다. 1920년 중국 허난(河南)성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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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0/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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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부동산 위기? 한국도 흔들까? (김한진 박사)
중국 부동산 위기? 한국도 흔들까? (김한진 박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지나 중국

  • Author: 박종훈의 경제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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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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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21년 대만 유학생들의 졸업 사진, 본 사진에서는 대만에 유학하는 중국본토인을 ‘지나유학생’이라고 불렀다. 사진 출처는 국립 타이완 박물관

1939년 도쿄 依林서점 출판,〈장중북지 몽강상도(掌中北支‧蒙疆詳圖)〉

지나(支那)란 중국을 가리키는 호칭 중 하나이다. 원래는 역사상 최초의 중국의 통일국가로 알려진 진나라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현재 중국인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민들로 하여금 이 이름을 차별적, 경멸적인 호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1][2][3]

역사 [ 편집 ]

지나는 본래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인도 승려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당시 나라가 바뀌던 “중국”을 진나라의 후속으로 여기고 산스크리트어로 ‘지나’로 음역(音譯)한 것이 시초이다. 이 때에는 支那 외에 至那·脂那로도 썼다. 그 후 9세기경 일본에 한문 불경이 전해지면서 “지나”라는 호칭도 일본에 전해졌다. 18세기 일본의 난학자들이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면서 영어의 “차이나”(China) 및 서양 언어의 동계 명칭이 “지나”(支那)와 같은 어원(진나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가 일본의 국시가 되면서 중화 사상적 뉘앙스를 풍기는 “중국” 대신 지나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었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 호칭은 점차 쇠퇴해가는 중국을 경멸하는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중국을 부를 때 정식 국호인 “중화민국” 대신 “지나 공화국”(支那共和國) 등으로 호칭하는 일이 잦았으며 이는 중국인들의 불만을 샀다. 이후에도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 중일 전쟁을 “지나 사변”(支那事變) 등으로 표시하는 등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나온 일본의 지나 호칭은 다분히 경멸의 뉘앙스가 끼어 있었다.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중국을 공식적으로 “지나”라고 호칭하는 일은 없지만 일부 우익 성향의 정치가들(대표적으로 이시하라 신타로)은 여전히 중국을 지나라고 지칭하고 있어서 중국 정부의 항의를 받기도 한다.[1][2][3]

호칭의 오해 문제 [ 편집 ]

“지나”는 기본적으로 영어의 “차이나”(China)와 더불어 유럽 국가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진나라를 어원으로 하는 “시나”(Sina), “신”(Chin) 등의 국명과 같은 동계어이기 때문에, “지나”라는 호칭이 차별이냐 아니냐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호칭은 특히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동중국해(東シナ海)·인도차이나 반도(インドシナ半島) 등의 지명에 “지나”가 들어가는 것이 차별적 호칭인가 아닌가하는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자로 표기하는 “지나”(支那)를 차별어로 규정하여 IME 일본어 입력기에서도 이 한자는 자동으로 변환이 되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다. 대신 지명 등에 쓰이는 인도차이나, 동중국해 등의 “지나”는 가타카나 표기인 “시나”(シナ)로 바꿈으로서 지나가 서양 언어의 번역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그것도 지명 등지에 한해서만 쓰이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 민간에서는 라면을 “시나소바(支那そば)”라고 부르는 등 대중적 차원에서 완전히 이 명칭이 불식된 것은 아니며 중국과 일본 양국 네티즌의 인터넷 분쟁 등에서는 여전히 지나가 경멸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중극인들의 과잉 반응일뿐 현재에도 진시황(始皇帝, 중국어)이 세운 “차이나”(China, 秦)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1][3]

한국에서의 사용 [ 편집 ]

한국에서는 중국이라는 용어 대신 사용하여,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에서도 중립적 용어로 ‘지나인’이라고 표기하며 일본인과 지나인으로 구별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책에서 중국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중국을 지나로만 불렀다. 청나라와 동등한 관계를 강조하던 20세기에는 중국이라는 용어가 중화사상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중립적으로 지나를 용어로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중립적인 용어로 유럽의 명칭인 ‘차이나’처럼 ‘지나’를 사용하기도 한다.

현재는 반중 감정을 가진 일부 한국인들이 중국을 “지나” 또는 “중공”(中共)이라고 호칭하는 일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중국”이라고 부르지만 “짱깨” 또는 “짱꼴라”라는 속어로 부르는 사람도 있으며 오랑캐라고 부르는 노인들도 있다. 중국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는 견해로 “가운데 중”(中)자를 쓰고 있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양에 알려진 “차이나”(China)를 따라 “지나”라고 부르기도 한다.[2][3]

같이 보기 [ 편집 ]

아침을 열며-동이, 지나와 중국

김진환/국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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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국학강사-동이, 지나와 중국동이의 뜻은 무엇인가. 동이는 지나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는 말로 지금의 옥편에는 오랑캐로 되어 있다. 심히 기분 나쁜 낱말이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도 ‘夷’자를 오랑캐라고 부르고 가르치고 있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동쪽에 사는 오랑캐 즉, 되먹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이성계를 위시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 소중국이라고 하면서 자기최면을 걸고 백성들의 삶에는 안중에는 없고 그저 명, 청나라에 굴종을 되풀이하면서 500여년을 보낸 듯싶다. 한심한 일이다.그런데 이 夷자가 오랑캐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약2000년 전에 만들어진 설문해자라는 책을 보면 이자는 고문동인 즉 어질 인자와 같은 의미라고 쓰여 있다. 이것으로 해석을 하면 동쪽에 사는 어진 민족이라는 뜻이다. 또한 夷자를 파자해보면 큰 대자와 활궁자로 되어 있으니 큰 활을 쏘는 강인한 민족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고.당 전쟁 때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눈을 철퇴궁으로 맞추기도 하였다. 중국의 사서에도 고조선의 맥궁이 유명해서 많은 나라에 수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 유전자를 이어받아 우리의 양궁기록도 세계신을 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맥궁제작기술은 고조선만 가지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중국이 얼마나 이를 두려워하였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중국은 고대로부터 자존심이 강하여 자기들의 나라 중심에 화를 두고 이를 중화라 불렀으며 동서남북에 북적, 남만, 동이, 서융, 즉 북쪽에 도적 같은 민족, 남쪽에 벌레 같은 민족, 동쪽의 오랑캐, 서쪽의 짐승, 개 같은 민족등으로 주변의 민족을 폄훼, 능멸, 무시하고 지냈다. 그런 시각은 지금은 여전하여 일대일로주의로 미국에 대항하며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으나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 이기심으로 아시아를 품겠다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며 낡은 사고이다.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과거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으로 통치된 고조선은 강력한 군사력과 밝은 문화를 가진 선진국임이 분명하다. 얼마나 나라가 안정되고 평안했으면 8가지 법만으로 나라를 경영했겠는가. 이렇게 좋은 나라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홍익의 법을 버리고 원리와 이치를 멀리하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여 나라가 쪼개어 지며 민족은 갈라졌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문을 닫은 후 우리의 힘이 분산되면서 夷라는 의미도 오랑캐로 변질되기 시작하였으리라 이 뜻을 온전히 회복하는 일이 우리 역사를 바로 새우는 첩경이다.중국을 영어로 CHINA이다 미국은 영어로 A로 시작하고 영국은 B이며 중국은 C이다 미국은 국명에서도 자국 우선주의를 묘하게 선택하여 다른 나라를 제압하고 있다. 양보나 배려 없는 미국의 문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는 엄청난 무기를 자랑하면서 자국 내에서는 아이들 총기관리도 제대로 못하여 그 아이 엄마에게 총격을 가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나라이다. 우리나라를 뜻하는 코리아라는 말이 고려에서 유래된 것처럼 차이나는 ‘지나’에서 유래된 것이다.지나라는 말은 ‘가지되는 나라’라는 뜻이다. 중심이 아니라 곁가지의 나라라는 뜻이니 어원상 중국은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 영어로 차이나라는 말이 중국을 지칭하고 있으니 중국이 지나보다 후에 쓰인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과거에는 중국을 지나라고 부른 것이다 이를 이어 바다명칭도 동지나해 남지나해가 표시되어 있다 지나라는 뜻은 따로 세운 나라라는 뜻으로 지사, 지점과 같은 ‘지’개념이니 지사에는 본사가 있고 지점에는 본점이 있듯이 지나의 본나라는 과연 어디였겠는가. 그것은 바로 대륙을 호령하며 찬란한 문명을 자랑한 바로 고조선이었고 당당히 47대에 걸쳐 2096년 동안 영속했다.그것도 장구한 우리의 환웅, 환웅시대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역년이니 이를 회복하는 역사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당면한 과제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일본은 자기들에게 없는 역사도 날조하여 지어내고 중국은 남의 역사도 문화도 마구 끌어다가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데 있었던 역사도 부정하고 신화로 전락시키고 있냐고 한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의 국력 중에 경제력은 탄탄한 편이나 역사의식은 여전히 일제잔재가 두툼하게 남아있는 상태이다.역사는 한민족을 단결시키는 정신문화이다. 정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미국, 이스라엘, 중국, 일본은 학생들에게 역사수업시간은 머리가 아주 맑은 오전에 배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국난극복사를 인물중심으로 그들의 혼을 가르친다.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도 암기위주의 역사공부가 주류이다. 역사시간에 졸지 않는 학생이 없을 정도이고 역사공부를 하면 괜히 기가 죽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영화 “명량”이 신기록을 세운 이유는 바로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졸들의 나라위한 혼불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혼불을 , 국혼을 전하는 역사 선생님이 많아졌으면 한다.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지나(支那)”의 의미

글: 임사운(林思雲)

일본인들이 “지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중국을 멸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지? 이것은 최근에 아주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신랑망(新浪網)이 “Sina.com”이라는 웹사이트명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일부 중국의 애국인사들의 성토대상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나”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왜 “지나”라는 말로 중국을 부르게 되었는지의 문제는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지나”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깊이있게 검토해보기로 한다.

1. 명치유신(메이지유신)전의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칭호

일본과 중국의 교류는 역사가 매우 길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본은 중국문화에 대하여 경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당이래로 일본은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를 중국에 보내서 중국문화를 배워왔다. 그 결과 일본은 세계에서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장 친밀한 국가가 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일본뿐이다(한국, 월남은 한자사용을 폐지했다). 일본문화는 중국고전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일본문화는 중국의 소수민족, 위구르족, 티벳족, 몽고족등의 문화보다 훨씬 한족문화에 접근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언어문화상의 유대로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언어문화상의 유대는 둘을 원수로 만들었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비록 중국은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이라는 명칭은 의외로 역사가 길지 않다.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이전에 중국의 정식명칭은 한번도 “중국”인 적이 없었다. 고대중국은 진, 한,…명, 청등의 왕조가 서로 다를 때마다 국호도 따라서 변해왔다. 예를 들어, 청나라때 중국의 정식명칭은 “대청” 또는 “대청제국”이었다. 비록 정식 국호로 ‘중국’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중국의 민간에서는 ‘중국’ 또는 ‘중국인’이라는 속어단어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중원지구를 가리키는 것이고, ‘중국인’은 바로 중원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신강, 티벳, 몽골의 변방주민과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중국’을 국가를 대표하는 용법으로 쓴 적은 없다.

일본은 중국과 밀접하게 접촉하였으므로 중국의 왕조명칭으로 중국을 불러왔다. 중국과 접촉이 적었던 서방국가는 중국이 무슨 왕조시대이건 간에 모두 일률적으로 China라고 불렀다. 일본은 수나라때는 중국을 “수”라고 부르고, 당나라때는 중국을 “당”이라고 불렀으며, 그래서 “견수사” “견당사”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이전의 일본은 중국을 통틀어 부를 때에는 중국을 “한토(漢土)”, “당토(唐土)”로 불렀다. 중국글자는 “한자(漢字)”라고 불렀고, 중국어는 “한문(漢文)”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고대에 ‘중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뿐아니라, “지나”를 중국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지도 않았었다.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일본의 근대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의 에도(江戶)말기와 메이지(明治)초기에 일본의 대외개방에 따라, 외래어가 아주 유행했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중국을 ‘한토’라고 부르지 않았다. 외국어 China의 음역(音譯, 발음나는대로 번역하는 것)에 따라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의문도 가질 것이다. 일본인들이 중국을 China의 음역으로 “지나”라고 부른다면, 거기에는 중국을 멸시하는 의미는 담겨있지 않지 않은가?

한자는 표의문자이고, 모든 글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자를 발음기호로 사용하면 어느 글자를 선택하여 쓰느냐는 것고 큰 문제이다. 한어에서의 “미국(美國)”은 “아름다운 나라”라는 좋은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미국’이라는 것을 무슨 존중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미국을 고쳐서 “매국(霉國, 중국어 발음은 mei guof로 같음. 재수없는 나라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이 표음문자였다면, “Sina”로 중국을 부를 필요가 없고, “China”로 중국을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도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자의 표의라는 각도에서 보면, “지나”라는 단어 본 뜻은 원래 무슨 멸시하는 뜻이 담긴 것은 아니다. 만일 문자옥(文字獄, 문인들이 쓴 글을 트집잡아 처벌한 사건)의 방식대로 한다면, “지나”라는 단어의 뒤에는 멸시하는 뜻이 담겼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본어에서 “지(支)”는 한자의 ‘말단’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 자주 말하는 “지부(支部)” “지대(支隊)”등응 모두 일본에서 수입한 단어이다. 일본어에서 “나(那)”라는 한자는 ‘지방’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지나’라는 것을 표의로 보면 ‘말단의 지방’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라는 단어는 ‘말단의 지방’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혹시 일본인들이 일부러 ‘지나’라는 글자를 골라 중국을 폄하하려 한 것일까?

그러나, “지나”라는 단어를 고증해보면, 최초에 중국을 “지나”라고 부른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 자신들이다. 고대에 인도인들은 중국을 cina라고 불렀는데, cina는 중국의 진(秦, 중국발음으로 친)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고로마에서는 중국을 Sinoa라고 불렀다(구약성서). 나중에 영문에서의 China와 불어에서의 Chine는 모두 이 로마어에서 왔다는 것이다. 현재 영어에서의 Chino와 Sino는 중국을 대표한다. 예를 들어, Sino-Japanese War는 “중일전쟁”이다. Sinology는 “중국학”이다. 중국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도입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아는 사람이 적다보니,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고성들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cina를 음역에 따라 “지나(支那)”로 번역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불경에서는 여전히 “지나”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불경이 일본에 들어온 후에 “지나”라는 단어도 일본에 들어왔다.

“지나”라는 단어를 발명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 자신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한자의 뜻을 가지고 일부러 중국을 폄하하기 위하여 ‘지나’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없다.

2. 신해혁명전의 ‘지나’ 칭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나”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명치유신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중국의 정식국호는 “대청”이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정식장소에서는 중국을 “청국” 또는 “대청제국”이라고 불렀다. 갑오전쟁도 “일청전쟁(日淸戰爭)”이라고 부르고, 의화단의 난도 “북청사변(北淸事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고, 일청전쟁을 ㅍ”일지전쟁(日支戰爭)”이라고 불렀고, 중국말을 “지나어”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이 중국의 정식국호 “대청”을 부르지 않고, “지나”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중국인들이 화를 냈는가? 그렇지 않았다. 원래 그 때의 중국한족들, 특히 중국의 혁명가들은 일본에 대하여 중국을 “지나”라고 부르는데,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 때, 중국의 한족들은 이민족의 통치하에 있었고, 일본은 암중으로 중국혁명을 지지했었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혁명가들의 낙원이 되었다. 동맹회, 광복회등 반정부조직이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 때 많은 한인들은 일본에 온 다음에 가장 먼저 하는 두 가지 일은 첫째는 변발을 자르고 더 이상 청나라조정에 대한 충성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을 ‘지나인’으로 부르고 자기가 ‘청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이라는 용어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으므로, 많은 혁명가들은 일본식의 칭호를 빌려 자기들을 ‘지나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902년, 장태염등이 일본 동경에서 <<지나망국242년기념회>>를 발기했고, “한족을 광복시키고, 우리 산하를 되찼고, 몸을 나라에 바치며, 성공한 후에는 물러나겠다”는 선서를 한다.(지나망국이라 함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한 것을 의미한다). 1904년, 송교인이 동경에서 <<20세기의 지나>>라는 잡지를 발간한다. 이것은 동맹회의 당보인 <<민보>>의 전신이다. 입헌파인 양계초 조차도 “지나소년”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강유위의 차녀인 강동벽도 시에서 “나는 지나제일인”이라고 하였다.

많은 중국의 혁명가들이 “지나”로 스스로를 호칭했다는 것은 일본이 “지나”라고 중국을 부른다고 하여 폄하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중국의 한인들에 대한 존중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일본인들이 당시의 중국국호인 “대청”으로 부르고, 중국인들을 “대청인”으로 부르며, 중국어를 “대청어”라고 불렀다면 중국의 한인들에게는 오히려 모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신해혁명전에 “지나”라는 단어는 중일 양국에서 모두 승인된 단어였고, 아무도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혁명후에 중국의 정식국호가 “대청제국”에서 “중화민국”으로 변경된 후, 이때부터 중일간에 “지나”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3. 신해혁명후의 “지나” 칭호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으로 중국은 새로운 정식칭호 “중화민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세계각국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청왕조가 멸망한 후, 중국에서는 내란이 발생하였고, 각 성이 독립하였으며, 남방의 혁명당은 남경에 “중화민국”이라는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의 범위는 그저 남방의 몇 개 성에 불과했고, 북방의 큰 땅은 ‘중화민국’에 속하지 않았다. 이 때는 청왕조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이미 중국을 ‘청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첫째, 당시 ‘중화민국’은 중국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었다(남북협상후 북방이 비로소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승인했다). 둘째, 일본정부는 당시 잠시동안 ‘중화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정부는 ‘청국’이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민간에서 많이 쓰이던 ‘지나’라는 말로 중국을 부르기 시작했다. 1913년 7월 일본정부는 명문의 규정으로 이후 중국의 국호가 어떻게 변화하든 일본은 모두 ‘지나’로 중국을 부르기로 한다.

1913년 10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정식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이 된 후에, 일본은 정식으로 “중화민국”을 승인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저 중문의 문서에서는 “중화민국”을 사용하지만, 일본어 문서에서는 “지나공화국”을 사용하였다. 일본이 이렇게 한 것에 대하여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수십년간 사용되었고, 중국인들도 이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15년 일본은 위안스카이정부에 “21조”를 제기했다. 이것은 중일관계악화의 기점이었다. 1919년 일본이 독일조계를 승계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시 “5.4운동”의 반일열기가 고조된다. 당시 애국인사들이 제기한 하나의 항일주제는 바로 일본이 중국을 “지나”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일부 애국청년들은 일본이 중국을 “지나”라고 부르는 것은 고의로 중국을 모멸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리하여 애국의 불길은 한꺼번에 크게 번졌다. 애국지사들은 줄줄이 정부에 글을 써서 일본정부가 “지나”와 “지나공화국”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항의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중화민국정부는 여러차례 일본정부과 교섭하였으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일본이 “중화민국”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상술한 1913년 7월 일본정부의 규정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중화(中華)”라는 단어가 일본을 경멸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 것때문이다. 원래 역사상의 “중화”, “중원”은 주변의 이민족국가와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단어이다. 이전의 중국은 동방의 이민족을 동이(東夷, 일본인과 한국인)라고 불렀고, 남방의 이민족을 남만(南蠻, 동남아인)이라고 불렀으며, 서방의 이민족을 서융(西戎, 서아시아인)이라고 부르고 북방의 이민족을 북적(北狄, 몽고족)이라고 불렀다. 중화와 오랑캐국가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조공관계였다.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이 스스로 “중국”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천하의 가장 존귀하고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중국을 “지나”에서 “중국”으로 고쳐부르는 것은 스스로른 “동이”의 조공국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고, 모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적은 일본이 “중화민국” 또는 “중국”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 내재적인 원인이다.

“중국”이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이 그것을 ‘중앙의 나라’라는 단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글자 자체로서 중국이 중앙에 있는 나라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당연히 ‘중화민국’을 국호로 사용할 때, 일본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지나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중국을 모욕하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는 표의문자이고, 한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한자단어에서 트집을 잡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여러차례 문자옥이 일어났던 것이다.

청나라의 어느 대신은 “청풍(淸風)은 글자도 모르면서, 왜 책은 어지럽게 넘기고 있는가”라는 시를 썼다. 바로 문자옥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청풍”은 바로 “청나라 사람 즉 만주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그 결과 그 대신은 목이 잘렸다. 근대 중국과 일본의 애국지사들은 문자옥을 국제무대에까지 들고 나왔다. 중국인들은 일본이 ‘지나’라고 하는 것이 중국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일본인들은 중국이 스스로 ‘중화’라고 하는 것이 일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단어가 가진 뜻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인하여 국제분쟁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방인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여러 차례의 항의와 재촉하에, 1932년, 일본정부는 마침내 정부공문서에서 더 이상 ‘지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중화민국’으로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간신문에서는 여전히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일본의 패전후 1946년, 일본정부는 전국에 반포한 <<'지나'칭호의 사용을 회피하는 데 관한 건>>의 통보를 통하여 이후 ‘지나’라는 단어는 일본정부의 공문서, 교과서, 신문, 잡지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중일간의 중국국호를 둘러싼 분쟁은 일본전패후 일본의 전면적인 타협으로 철저히 해결되었다.

4. 현재의 “지나” 문제

일본의 패전후 중국의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여,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더 이상 “지나”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지나”라는 단어는 중국인들에게 잊혀졌다. 1960년대 미국이 월남에 파병하면서 중국대륙의 신문에서는 다시 “인도지나(印度支那)”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원래 유럽인들은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있는 지역을 “인도지나”라고 불렀다. 월남등의 국가가 소재한 반도는 “인도지나반도”로 불렀다. 중국의 대륙에서는 서방의 칭호인 “인도지나”를 따라서 썼다. 당시 대륙사람들은 “지나”라는 단어에 대하여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대만의 국민당정부는 “인도지나반도”를 “중남반도(中南半島)”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1990년대이후, 대륙의 반일감정이 드높아지면서, “지나”라는 단어를 다시 중국인들이 기억해 냈다. 그래서 일본이 중국인들을 모욕하는 죄악중의 하나로 거론되었다. 현재 일본의 주요한 매체에서는 “지나”라는 단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우익분자들은 자주 이 주제를 끄집어 내고 있다. 동경도지사인 이시하라(石原)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지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로써 중국 애국인사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이시하라는 “지나인”이 중국인을 폄하하는 단어가 아니라 중국인을 존중하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지나’라는 단어는 최초로 중국인들이 발명한 것이고 중국인들이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시하라의 말은 억지였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왜노(倭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분명히 멸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고대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왜노”라고 부른 적이 있고, 중국의 한자로 된 기록에는 “왜노국”이라는 기재가 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한나라 황제가 하사한 “왜노국왕”의 금인이 발굴된 바 있다(금인에는 “한왜노국왕”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만일 현재 어떤 사람이 이시하라를 “왜노”라고 칭한다면, 이것은 이시하라를 존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왜노”라는 단어는 최초로 일본인들이 발명한 것이고 일본인들이 승인한 것이지만 이시하라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일부 일본의 우익인사들은 고의로 이 주제를 끄집어내고 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이슈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애국인사들이 일본은 욕하는데 대한 ‘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애국인사들은 웹사이트에서 매일 “왜노” “귀자(鬼子)” “소일본(小日本)”등의 일본을 욕하는 칭호를 쓰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애국주의자들의 반격을 불러올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지나”라는 중국인들이 화를 내는 중국을 욕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이 “왜”라는 용어를 써서 일본인을 욕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역사상 매번 반일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동일한 일은 반복되었다.

1919년 “5.4운동’의 반일열기중에 1919년 11월에 출판된 왕공벽의 <<동유휘한록>>은 당시 아주 선동적인 글로 유명했다.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왜의 최근 50년년이래의 외교진상은….신문계에서와 저작에서 모두 “지나”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고 있고, 정부공문은 중국 민국의 글자를 쓰지 않고, ‘지나공화국’이라는 다섯 글자를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하여 국제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이고, 국가로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중화민국성립 8년이 지났지만, 왜인들은 아직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글 중에서 작자는 한편으로 일본신문이 “지나”라는 칭호로 중국을 부르는 것이 중국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항의하면서 작자는 스스로 공개된 출판물에서 일본을 “왜” “왜인”이라고 능멸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 “지나”라는 모멸적인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하면서 왜 일본인들도 “왜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중국인들이 일본인의 “지나”라는 단어로 중국을 차별하는 것에 항의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이 ‘지나’라는 말을 쓰는 것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왜인’ ‘귀자’, ‘소일본’등의 차별적인 문구를 써서 일본인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한 말중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이라는 말이 있다. 만일 중국인이 일본인에게 “왜인” “귀자” “소일본”으로 부를 권리가 있다면, 왜 일본인들이 마찬가지로 중국인을 “지나인”이라고 부를 수 없단 말인가. 만일 중국인들이 이런 차별적인 언어로 일본을 모멸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찌 일본인들이 ‘지나’라는 말을 써서 중국을 모멸하는 것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나”라는 단어가 도대체 중국에 대한 멸칭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그렇다면, 경멸하는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 위에서 본 상황으로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본은 에도시기말기부터 ‘지나’라는 단어로 중국을 불렀다. 당시 일본이 ‘지나’라는 칭호로 중국을 부르는데는 중국을 모욕하는 의도가 없었다. 중국인들 자신도 ‘지나’라는 칭호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혁명후의 중국이 국호를 변경한 후에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정식국호는 ‘중화’ 또는 ‘중국’이었다. 일본인들은 그것이 일본등의 ‘예전 조공국’에 대한 오만한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을 ‘중국’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 않았고, 계속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때 일본인들이 ‘지나’라고 부르는데는 중국인들에 대한 약간의 경멸의 의미가 있다고는 볼 수 있지만, 그 정도가 크지는 않았다.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귀자’ ‘소일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훨씬 약했다. 예를 들면, 중국인들은 흑인들을 왕왕 “노흑(老黑)”이라고 부르는데, “노흑”에는 약간의 경멸의 뜻이 있지만, 그다지 강하지는 않다. “흑귀”보다는 훨씬 약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지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인들이 흑인을 “노흑”이라고 부르는 느낌과 비슷하다. 특별히 악독한 차별적인 언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약간은 미묘한 경멸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나” 문제는 주로 중곡과 일본간에 “지나”와 “중화”의 한자 의미해석이 다른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문자옥의 변형적인 산물이다. 일본의 패전후 어쩔 수 없이 “중국”의 국호를 인정했는데, 현재의 일본인들은 “중국”을 그저 보통의 국명으로 인식하고 있고, “중국”에 대하여 “중앙의 나라”라는 오만한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국인들이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2004년 3월 8일 일본에서)

[오목대] “지나(支那)”

장세균(논설위원)

일본, 중국과 대만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열도 인근 해역에서 일어났던 일본 순시선과 중국 어선의 접촉 사고로 빚은 양국의 기(氣)싸움은 중국의 일방적 승리로 막을 내렸다. 21세기 중국의 파워를 다시한번 실감케 한다. 중국 즉, China라는 단어의 의미도 다시 보게된다. China라는 말은 “지나(支那)”라는 한자에서 음을 빌린 말이다. 중국이나 대만 사람들은 “지나(支那)”라는 표현을 아주 싫어한다. 특히 일본인이 중국을 “지나”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중국철학’도 ‘지나철학’라고도 부른다. 심지어 일본 거주, 중국화교들이 책방에 난입하여 ‘지나’라는 말이 쓰여진 책들을 내동댕이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미국을 아름다울 ‘미(美)’자를 붙여 부르는데, 해방 후 미국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기에 고마워서 아름다울 미(美)자를 붙였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일본은 미국을 표기할 때 우리와 달리 ‘쌀미(米)’자를 붙이는데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본에 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도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말 개화기 때 외국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이름의 음(音)만 따와 한자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중국 청나라가 하던 표기법을 우리도 따랐다. 미국의 경우는 America를 음만 따와 한자로 적은 ‘미리견(美利堅)’을 줄인 말에다 ‘나라 국(國)’자를 붙인 것이다. 일본에서 미국을 미국(米國)이라고 쓰는 이유는 일본이 America를 음만 따와 부를때 ‘아미리가(亞米利加)’였는데 이를 줄여서 미국(米國)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국(英國), 역시도 청나라에서 England의 첫소리인 ‘Eng-‘을 비슷한 소리인 ‘영(英)’로 쓰고 나라 국(國)자를 붙인 것이다. 중국의 국명을 나타내는 ‘지나’라는 말의 어원은 인도의 불전(佛典)에서 왔다고 한다. 불전속의 ‘지나니사(支那泥舍)’라는 말을 줄인것인데 그뜻은 ‘사유(思惟)’라는 좋은 뜻이다. 인도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 사려가 깊다고 보았다는 설도 있다. 기실, 중국 사람들이 ‘지나’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 청일전쟁 이후 일본 사람들이 중국을 ‘지나’로 불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나’라는 이름속에도 중일관계의 명암이 실려있다.

일본, 중국과 대만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열도 인근 해역에서 일어났던 일본 순시선과 중국 어선의 접촉 사고로 빚은 양국의 기(氣)싸움은 중국의 일방적 승리로 막을 내렸다. 21세기 중국의 파워를 다시한번 실감케 한다.

중국 즉, China라는 단어의 의미도 다시 보게된다. China라는 말은 “지나(支那)”라는 한자에서 음을 빌린 말이다. 중국이나 대만 사람들은 “지나(支那)”라는 표현을 아주 싫어한다. 특히 일본인이 중국을 “지나”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중국철학’도 ‘지나철학’라고도 부른다.

심지어 일본 거주, 중국화교들이 책방에 난입하여 ‘지나’라는 말이 쓰여진 책들을 내동댕이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미국을 아름다울 ‘미(美)’자를 붙여 부르는데, 해방 후 미국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기에 고마워서 아름다울 미(美)자를 붙였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일본은 미국을 표기할 때 우리와 달리 ‘쌀미(米)’자를 붙이는데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본에 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도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말 개화기 때 외국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이름의 음(音)만 따와 한자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중국 청나라가 하던 표기법을 우리도 따랐다. 미국의 경우는 America를 음만 따와 한자로 적은 ‘미리견(美利堅)’을 줄인 말에다 ‘나라 국(國)’자를 붙인 것이다.

일본에서 미국을 미국(米國)이라고 쓰는 이유는 일본이 America를 음만 따와 부를때 ‘아미리가(亞米利加)’였는데 이를 줄여서 미국(米國)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국(英國), 역시도 청나라에서 England의 첫소리인 ‘Eng-‘을 비슷한 소리인 ‘영(英)’로 쓰고 나라 국(國)자를 붙인 것이다.

중국의 국명을 나타내는 ‘지나’라는 말의 어원은 인도의 불전(佛典)에서 왔다고 한다. 불전속의 ‘지나니사(支那泥舍)’라는 말을 줄인것인데 그뜻은 ‘사유(思惟)’라는 좋은 뜻이다. 인도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 사려가 깊다고 보았다는 설도 있다. 기실, 중국 사람들이 ‘지나’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 청일전쟁 이후 일본 사람들이 중국을 ‘지나’로 불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나’라는 이름속에도 중일관계의 명암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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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중국, 부채 폭탄 터지나…부동산업체·지방은행 부실 ‘눈덩이’

[초점] 중국, 부채 폭탄 터지나…부동산업체·지방은행 부실 ‘눈덩이’ 이미지 확대보기 저장성 중앙인민은행 지점 앞에서 예금자들이 7월 10일 지방 소규모은행의 예금 동결조치에 항의하고 있다.

올해 4월 허난성 내 여러 소규모 은행의 부실로 중국 은행들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약 400억 위안(약 60억 달러)의 자산과 약 40만 명의 고객 수로 볼 때, 문닫은 시골 은행은 중국 금융시스템에 비춰 작은 규모다.감독 부실과 부정부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이러한 금융 기관들의 파산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방 당국이 그 여파를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보면 중국 정치를 지겹게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정부 규정에 따라 최고 50만 위안까지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예금자들에게 보상하는 대신, 허난성의 관리들은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이들은 당초 스마트폰의 코로나 검사 코드를 빨간색으로 돌려 예금자의 이동을 제한했고, 이로 인해 사실상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가용 운전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일반 대중의 격렬한 항의로 허난성 정부는 이 학대적인 조치를 포기하게 되었다.그러나 7월 10일 허난성의 수도 정저우에 있는 인민은행 지점 앞에 파산한 은행들의 예금에 접근할 수 없는 수백 명의 예금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지방 관리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력배들을 대거 투입해 예금자들을 악랄하게 폭행했다.이번 사태는 단순히 이런 사태를 은폐하려는 지방 당국의 잔혹한 조치 때문이 아니라 이 작은 은행들이 실패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투자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할 것이다.2009년 중국 정부가 성장 촉진을 위해 흥청망청 빚내기를 시작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그 파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약세 전망가들 사이에서 금융위기에 대한 예측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은행 시스템은 GDP 대비 부채비율 264%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아마도 중국 정부가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이 가져올 중력같은 무거운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부풀어 오르는 부채가 시스템적인 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요즘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이 곧 부채라는 죄값을 치러할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경고 신호들이 나오고 있다.허약한 감독, 부실한 위험 관리, 그리고 허난성의 작은 시골 은행들을 지급불능사태로 몰아넣을 것 같은 부정부패 문제가 14조 달러에 가까운 자산을 가진 거의 4000개의 중소 은행들 사이에서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다른 유사 은행들도 조만간 도산할 가능성이 높다.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 허난성 당국이 은행 도산의 희생자들을 단속하고 있을 때, 상하이 당국은 내몽골에 있는 중간 규모의 은행을 통제하면서 여러 가지 불법적인 계획에 자금을 대도록 한 전직 억만장자를 비밀리에 재판에 회부했다. 2019년 정부가 그 파산한 은행을 압류했을 때, 구제금융에는 몇 십억 달러가 들었다.대다수 소규모 은행이 함께 도산할 경우 이 같은 사건은 금융부문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소규모 은행의 거래 상대방과 대출기관, 특히 더 큰 은행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소규모 은행들이 더 높은 금리로 자금을 끌어모으는 중국의 그림자 은행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증발할 가능성이 높다.오늘날 그러한 금융 붕괴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다. 중국이 지난 10년간 금융위기를 피한 이유 중 하나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6.8%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면 일반적으로 부채 부담을 더 쉽게 관리하거나 심지어 은폐할 수 있다.그러나 중국 경제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는 중국 정부의 제로코로나 정책 때문에 급속히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부채 폭탄은 훨씬 더 큰 소리로 울리고 있다.가장 불길한 경고등은 분명히 부채가 많은 중국의 부동산 부문이다. 3000억 달러 이상을 차입해 온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인 중국 헝다그룹이 채권에 대해 이미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더 많은 디폴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중국의 개발전문기업들이 올 하반기에 130억 달러의 달러 표시 채권 상환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중국의 부채가 많은 지방 정부들 또한 암울한 전망에 직면해 있다. 부동산 부문의 위기로 인한 토지 매매 소득 감소와 세금 수입 감소는 올해 지방 정부 세입에서 약 9000억 달러인 6조 위안의 부족 사태를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렸거나 채권을 발행한 지방 정부의 자금 조달 부서들은 채무상황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중국의 대형 은행들도 어려움에 처해 있다. 중국의 야심찬 일대일로 계획의 일환으로 가난한 나라들에게 수백억 달러를 빌려준 대형 은행들의 신용 포트폴리오의 상당 부분이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해 대출 국가들이 부채를 상환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부실해질 가능성이 있다.최근 스리랑카 경제 및 정부의 붕괴로 중국 은행은 대출금의 많은 부분을 탕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중국 대형은행들이 해외에서 부실채권 증가에 직면하면 국내 부실 중소은행들의 구제금융을 도울 수 없게 된다.중국 정부가 이번에도 또 다른 금융 붕괴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방 관리들이 돈을 돌려받으려는 은행 고객들을 공격하기 위해 폭력배들을 고용해야 한다면, 투자자들은 중국 은행 부문을 위해 미리 훨씬 더 나쁜 날들에 대비해야 한다.이진충 글로벌이코노믹 명예기자 [email protected]

[중국읽기] 『추악한 중국인』 사라지나

중국과 대만의 양안(兩岸) 사이에 바람 잘 날이 없다. 대만해협 위로 중국과 대만의 전투기만이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하는 게 아니다. 문학 작품을 두고도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진다. 자기 민족을 향해 독설을 퍼부은 대만 작가 보양(柏楊)의 작품 『추악한 중국인(丑陋的中國人)』을 둘러싸고서다. 책이 나온 건 1985년의 일이다. 1920년 중국 허난(河南)성에서 태어나 49년 대만으로 건너온 보양이 대만 관리의 치부를 파헤치는 글을 써 9년 옥살이를 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고 환갑이 넘어 65세 때 쓴 작품이다. 책은 중국인의 노예근성을 지적한 루쉰(魯迅)의 『아Q정전』 이래 가장 통렬하게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를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인의 치부 들추기에 나선 보양은 중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더럽고 무질서하며 시끄럽다(髒, 亂, 吵)”고 일갈한다. “중국인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는 부엌을 살피면” 되고 “시끄럽기로 말하자면 천하무적”이라고 꼬집는다. 두 번째 특징은 ‘둥지 안에서 싸운다(窝里鬪)’는 내분이다. 중국인 개개인은 모두 용과 같지만 “세 사람, 즉 세 마리 용이 모이면 돼지나 벌레가 되고 만다”고 탓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死不認錯) 태도”를 꼽았다. “잘못을 덮기 위해 중국인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거짓말을 하는 등 더 많은 죄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보양은 그러면서 중국인을 ‘폐병 3기 환자’에 비유했다.

그럼 중국인은 왜 폐병 환자가 됐나. 보양의 진단에 따르면 중국의 ‘장독(醬缸) 문화’ 때문이다. “중국 문화는 춘추전국시대 가장 찬란하게 발전했으나 점차 유교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 후한시대 이르러 조정은 모든 지식인의 발언이나 문장은 스승의 가르침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게 ‘사승(師承)’이다. 사승을 넘어서면 학설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으로 규정됐다. 이렇게 해서 중국 지식인의 사고력이 말살됐다. 자연히 공자 이후 2000년 넘게 단 한 사람의 사상가도 나오지 못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은 공자의 학설에 주를 달 뿐이다. 그렇게 깊이 고인 물에서 생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깊은 연못, 즉 죽은 물이 바로 중국 문화의 ‘장독’이다. 장독에서 나는 냄새가 중국인을 못나고 속 좁게 만들었다”는 게 보양의 주장이다.

외부의 물건도 중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변질되는 데 예를 들면 중국의 민주는 ‘너는 민(民), 나는 주(主)’ 이런 형태라고 보양은 말했다. 책이 출간되자 보양 인터뷰에 나선 일본 기자들이 빈정거리는 투로 질문했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더 깔보게 됐다. 동포에게 미안하지 않은가”라고. 그러자 보양은 “중국인의 단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엔 반성할 줄 아는 신세대 중국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반격했다. 책은 86년 중국 대륙에서도 출판돼 격렬한 문화적 자성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대륙에선 이듬해 금서로 지정됐다가 2004년에야 해제됐다. 500만 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진다.

보양은 2008년 사망했는데 그로부터 13년 뒤인 최근 이 책이 다시 양안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발단은 대만에서 책을 출판해온 위안류(遠流)출판사가 책의 일부 내용을 대만 중학교 1학년 교재에 수록했으면 한다는 제안을 받으면서다. 교과서에 내용이 들어가는 건 명예로운 일이지만 보양의 사망 이후 대신 판권을 행사하는 부인 장샹화(張香華)가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역사를 아는 성인을 대상으로 쓰인 책인데 아직 국가관이 확립되지 않은 청소년에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실제는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 정부가 2016년부터 계속해서 이 같은 제안을 해오고 있는데 그 의도가 중국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시인이기도 한 장샹화는 대만 정부가 ‘중국사’를 동아시아 역사의 관점에서 가르치는 것에 불만이다. 대만 정부가 중국과는 별개라는 입장을 고취하는 것에 남편 보양의 작품이 이용되는 게 싫다는 것이다.

그러자 신이 난 건 중국이다. 신화사(新華社) 등 중국 관영 매체들이 재빨리 장샹화 인터뷰에 나서며 『추악한 중국인』이 출간 50년 만인 오는 2024년이면 완전히 절판될 것이라는 소식을 내보내고 있다. 장샹화에 따르면 보양은 생전에 “중국이 발전하면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는데 중국 대륙이 이제 어느 정도 가난 구제(扶貧)에 성공해 먹을 밥이 있고, 뒷일을 볼 화장실이 있는데 더는 책을 발행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는 이유에서다. 현재 책은 대만에선 위안류출판사, 대륙에선 인민문학출판사가 발행하고 있으며 2024년으로 계약이 끝난다. 이후 더는 출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덩치가 커지며 또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모양새다. 그러나 궁금증은 남는다. 책의 절판과 함께 현실 세계에서의 ‘추악한 중국인’도 완전히 사라질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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