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을 떠나며 | [8.15 광복 후 일본인] 한반도에 남은 일본인의 최후 52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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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하고
36년간 한반도에 살던 수 많은 일본인이 있었다.
패전국의 국민으로 그들은 이제 어떤 운명을 맞이 해야할까.
#해방 후 일본인 #히키아게샤 #패전 후 일본 #역사

참고도서
이연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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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나무위키:대문

2012년 12월 5일 역사비평사에서 출판된 이연식 저작의 논픽션.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것과 같이 8.15 광복을 맞은 재한일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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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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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YES24

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 PDF ]. 이연식 저 | 역사비평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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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8/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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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알라딘

조선을 떠나며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은이) 역사비평사 2012-11-30. 정가. 14,800원. 판매가. 13,320원 (10% 할인) + 마일리지 74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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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7/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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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 교보문고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 『조선을 떠나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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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5/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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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도서 – 인터파크

조선을 떠나며.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李淵植) 저 역사비평사 2012.12.05. 판매지수 203. 별점9.7. 할인가. 13,320 원 정가14,800원 10%↓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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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ook.interpark.com

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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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픽션) 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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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rpia.co.kr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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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①

그런 면에서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은 그런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조명 …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다음날 소련은 일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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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ss.kr

Date Published: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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눔벵이의 행복한 책읽기 #12 이연식 ‘조선을 떠나며’ – 전북중앙

현재 일본의 열악하고 황당한 코로나 상황에 대해, 아는 분이 일본인은 데모도 못 한다고 혀를 차시더군요.그들도 열 받으면 무섭고, 아예 목숨을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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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jn.co.kr

Date Published: 7/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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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후 일본인] 한반도에 남은 일본인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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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을 떠나며

  • Author: 세기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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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1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4EJ3YPJhrc

조선을 떠나며

출판사 리뷰

1945년 그때,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하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저작, 역사비평사가 펴낸 역사 논픽션

식민지, 정치 예속, 경제적 침략과 수탈…

1910년 한일병합과 동시에 시작된 일제 35년간을 특징짓는 핵심 키워드들이다. 우리는 한일 양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시작된 불편한 만남과 그 이후, 즉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을 알고 있다. 또한 (아주 당연하지만) 해방을 맞은 조선의 다양한 표정과 조선인들의 신국가 건설 노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1945년 조선의 해방(일본으로서는 ‘패전’)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는 과정과 그 모습에 주목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식민자로 조선에 왔으니, 패전을 맞아 모국 본토로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돌아갔을까?

이 책은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이다.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공포요, 끔찍한 재앙이었다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중앙에 보고된 ‘불상사건不祥事件’은 총 913건이었다. 사건 내역을 살펴보면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서,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살상과 폭행 사건은 약 267건이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학교 교원, 행정기관의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 패전 후 벌어진 이 같은 사태에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 사진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한편, 각 지역 신사에 신속히 연락해 신령이 불경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위패를 불태우는 승신식昇神式을 거행하라고 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천황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류민에게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준 일상의 공간이자 일본 문화의 구현체였던 신사가 ‘불경’하기 그지없는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차마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건의 경중과 다과를 떠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며 집단적 공포에 시달렸다.

-본문 25~26쪽

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 조선 각지에서는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이 표출되었다.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동안 봉인되었던 해묵은 감정을 토해낸 것이다.

집단적 공포와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일본인들은 저마다 제 살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 창구로 몰려가고, 귀환에 앞서 가재도구를 팔기에 바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비상시국에서 조선총독부는 무능했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관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들은 ‘돈’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한꺼번에 쇄도하여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로 하여금 가급적 조선의 일본인들을 현지에 머무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치안 유지를 감당할 힘도 없고, 일본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며, 점령군에게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교섭도 벌여야 한 데다,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의 요청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조선총독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했다.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남쪽과 북쪽의 일본인들

집단 송환과 밀항, 그리고 억류ㆍ압송ㆍ탈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조선 땅에서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패전으로 인해 왜 자신들이 ‘낯선’ 땅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잔류파와 귀환파의 갈등이 크게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거센 추방 압력과 미군정의 송환 행정에 따라 조선에 남아 계속 살고자 했던 일본인들도 결국은 본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그들의 고민거리는 어떻게 일본으로 더 많은 재산을 갖고 가느냐였다.

1945년 12월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수십 년 동안 부산에서 ‘3거두巨頭’ 혹은 ‘4거두’ 소리를 듣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사람이 옹색하게도 자전거 튜브에 주식ㆍ채권ㆍ보험증서 등을 숨겨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해안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본문 88~89쪽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처음에는 송환행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다가 점증하는 조선인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반영하면서, 송환하는 일본인들의 소지금을 1인당 1,000엔, 화물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으로 제한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들고 가려 한 일본인들은 공식 송환선이 아닌 밀항선, 일명 도둑배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용했고, 미 군정에 각종 로비 행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브로커와 결탁한 갖가지 폐해가 성행했다.

한편 소련 점령지의 북한 내 일본인들은 바로 송환되지 못했다. 특히 식민 통치와 직결된 남성의 경우 점령군이나 새롭게 들어선 현지 정권에 의해 투옥ㆍ압송ㆍ억류되었다. 게다가 각종 공출과 곧 이어 시작된 재산 몰수에 따른 집단 공동생활은 남한의 일본인에 비해 훨씬 열악한 거류와 귀환 환경을 초래했다. 남성들이 시베리아 등지의 타지로 끌려가거나 압송된 상황에서 남겨진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피난하고 탈출해야 했기에 ‘국가 부재’와 ‘가장 부재’를 더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모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귀환자, 그러나 마침내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다

‘전쟁 피해자’에 담긴 정치적 수사

저자 이연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1945년 시점에서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 나갔는지, 본토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표정과 마지막 뒷모습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사와 마치 르포 같은 서술로 엮어내고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도 꼼꼼하게 챙겨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기구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갑남을녀의 일본인들이 실제 맞닥뜨린 패전의 공포와 어떡하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그뿐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미군정과 소군정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우며 처리하는 행정 체계, 그리고 귀환하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조선인 브로커의 모습도 실감난다. 이 때문에 논픽션으로서 이 책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아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와 같이 패전과 귀환 국면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분석과 평가를 과하지 않게 곁들인다. 이는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상을 읽으며 복잡다단한 사회상과 조선을 떠난 식민자의 두 얼굴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평가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크게 드러낸 곳은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가 ‘전쟁 피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전후 일본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서술한 부분에서이다.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이것이 ‘전쟁 피해자’라는 정치적 수사의 본질이었다.

-본문 211쪽

패전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들은 자국 동포로부터 식민지민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고, 대공습과 패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기 힘든 전후 일본 사회에 일자리를 위협하고 식량을 축내는 ‘민폐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이 떠나온 조선은 물론이고 모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청원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기에 이른다.

저자는 차분하게 문제 제기한다. 이들은 일본의 ‘해외 귀환자’이기 이전에 일본제국을 뒷받침하던 ‘식민자’였다고. 피해의 맥락에서만 이들을 바라본다면 식민자로서 행한 가해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고. 이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이 한일 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그리고 한일 양국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조선을 떠나며 – 교보문고

1910년 한일병합과 동시에 시작된 일제 35년간을 특징짓는 핵심 키워드들이다. 우리는 한일 양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시작된 불편한 만남과 그 이후, 즉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을 알고 있다. 또한 (아주 당연하지만) 해방을 맞은 조선의 다양한 표정과 조선인들의 신국가 건설 노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그런데 1945년 조선의 해방(일본으로서는 ‘패전’)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는 과정과 그 모습에 주목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식민자로 조선에 왔으니, 패전을 맞아 모국 본토로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돌아갔을까?이 책은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이다.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중앙에 보고된 ‘불상사건不祥事件’은 총 913건이었다. 사건 내역을 살펴보면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서,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살상과 폭행 사건은 약 267건이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학교 교원, 행정기관의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 패전 후 벌어진 이 같은 사태에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 사진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한편, 각 지역 신사에 신속히 연락해 신령이 불경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위패를 불태우는 승신식昇神式을 거행하라고 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천황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류민에게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준 일상의 공간이자 일본 문화의 구현체였던 신사가 ‘불경’하기 그지없는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차마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건의 경중과 다과를 떠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며 집단적 공포에 시달렸다.-본문 25~26쪽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 조선 각지에서는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이 표출되었다.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동안 봉인되었던 해묵은 감정을 토해낸 것이다.집단적 공포와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일본인들은 저마다 제 살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 창구로 몰려가고, 귀환에 앞서 가재도구를 팔기에 바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비상시국에서 조선총독부는 무능했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관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들은 ‘돈’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한꺼번에 쇄도하여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로 하여금 가급적 조선의 일본인들을 현지에 머무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치안 유지를 감당할 힘도 없고, 일본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며, 점령군에게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교섭도 벌여야 한 데다,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의 요청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조선총독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했다.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조선 땅에서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패전으로 인해 왜 자신들이 ‘낯선’ 땅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잔류파와 귀환파의 갈등이 크게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거센 추방 압력과 미군정의 송환 행정에 따라 조선에 남아 계속 살고자 했던 일본인들도 결국은 본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그들의 고민거리는 어떻게 일본으로 더 많은 재산을 갖고 가느냐였다.1945년 12월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수십 년 동안 부산에서 ‘3거두巨頭’ 혹은 ‘4거두’ 소리를 듣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사람이 옹색하게도 자전거 튜브에 주식ㆍ채권ㆍ보험증서 등을 숨겨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해안경찰에 체포된 것이다.-본문 88~89쪽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처음에는 송환행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다가 점증하는 조선인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반영하면서, 송환하는 일본인들의 소지금을 1인당 1,000엔, 화물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으로 제한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들고 가려 한 일본인들은 공식 송환선이 아닌 밀항선, 일명 도둑배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용했고, 미 군정에 각종 로비 행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브로커와 결탁한 갖가지 폐해가 성행했다.한편 소련 점령지의 북한 내 일본인들은 바로 송환되지 못했다. 특히 식민 통치와 직결된 남성의 경우 점령군이나 새롭게 들어선 현지 정권에 의해 투옥ㆍ압송ㆍ억류되었다. 게다가 각종 공출과 곧 이어 시작된 재산 몰수에 따른 집단 공동생활은 남한의 일본인에 비해 훨씬 열악한 거류와 귀환 환경을 초래했다. 남성들이 시베리아 등지의 타지로 끌려가거나 압송된 상황에서 남겨진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피난하고 탈출해야 했기에 ‘국가 부재’와 ‘가장 부재’를 더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저자 이연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1945년 시점에서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 나갔는지, 본토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표정과 마지막 뒷모습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사와 마치 르포 같은 서술로 엮어내고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도 꼼꼼하게 챙겨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기구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갑남을녀의 일본인들이 실제 맞닥뜨린 패전의 공포와 어떡하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그뿐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미군정과 소군정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우며 처리하는 행정 체계, 그리고 귀환하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조선인 브로커의 모습도 실감난다. 이 때문에 논픽션으로서 이 책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그렇다고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아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와 같이 패전과 귀환 국면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분석과 평가를 과하지 않게 곁들인다. 이는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상을 읽으며 복잡다단한 사회상과 조선을 떠난 식민자의 두 얼굴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평가하게 하기 위해서다.이러한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크게 드러낸 곳은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가 ‘전쟁 피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전후 일본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서술한 부분에서이다.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이것이 ‘전쟁 피해자’라는 정치적 수사의 본질이었다.-본문 211쪽패전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들은 자국 동포로부터 식민지민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고, 대공습과 패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기 힘든 전후 일본 사회에 일자리를 위협하고 식량을 축내는 ‘민폐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이 떠나온 조선은 물론이고 모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청원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기에 이른다.저자는 차분하게 문제 제기한다. 이들은 일본의 ‘해외 귀환자’이기 이전에 일본제국을 뒷받침하던 ‘식민자’였다고. 피해의 맥락에서만 이들을 바라본다면 식민자로서 행한 가해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고. 이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이 한일 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그리고 한일 양국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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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그때,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하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저작, 역사비평사가 펴낸 역사 논픽션

식민지, 정치 예속, 경제적 침략과 수탈…

1910년 한일병합과 동시에 시작된 일제 35년간을 특징짓는 핵심 키워드들이다. 우리는 한일 양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시작된 불편한 만남과 그 이후, 즉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을 알고 있다. 또한 (아주 당연하지만) 해방을 맞은 조선의 다양한 표정과 조선인들의 신국가 건설 노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1945년 조선의 해방(일본으로서는 ‘패전’)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는 과정과 그 모습에 주목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식민자로 조선에 왔으니, 패전을 맞아 모국 본토로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돌아갔을까?

이 책은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이다.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공포요, 끔찍한 재앙이었다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중앙에 보고된 ‘불상사건不祥事件’은 총 913건이었다. 사건 내역을 살펴보면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서,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살상과 폭행 사건은 약 267건이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학교 교원, 행정기관의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 패전 후 벌어진 이 같은 사태에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 사진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한편, 각 지역 신사에 신속히 연락해 신령이 불경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위패를 불태우는 승신식昇神式을 거행하라고 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천황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류민에게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준 일상의 공간이자 일본 문화의 구현체였던 신사가 ‘불경’하기 그지없는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차마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건의 경중과 다과를 떠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며 집단적 공포에 시달렸다.

-본문 25~26쪽

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 조선 각지에서는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이 표출되었다.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동안 봉인되었던 해묵은 감정을 토해낸 것이다.

집단적 공포와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일본인들은 저마다 제 살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 창구로 몰려가고, 귀환에 앞서 가재도구를 팔기에 바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비상시국에서 조선총독부는 무능했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관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들은 ‘돈’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한꺼번에 쇄도하여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로 하여금 가급적 조선의 일본인들을 현지에 머무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치안 유지를 감당할 힘도 없고, 일본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며, 점령군에게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교섭도 벌여야 한 데다,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의 요청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조선총독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했다.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남쪽과 북쪽의 일본인들

집단 송환과 밀항, 그리고 억류ㆍ압송ㆍ탈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조선 땅에서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패전으로 인해 왜 자신들이 ‘낯선’ 땅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잔류파와 귀환파의 갈등이 크게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거센 추방 압력과 미군정의 송환 행정에 따라 조선에 남아 계속 살고자 했던 일본인들도 결국은 본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그들의 고민거리는 어떻게 일본으로 더 많은 재산을 갖고 가느냐였다.

1945년 12월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수십 년 동안 부산에서 ‘3거두巨頭’ 혹은 ‘4거두’ 소리를 듣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사람이 옹색하게도 자전거 튜브에 주식ㆍ채권ㆍ보험증서 등을 숨겨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해안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본문 88~89쪽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처음에는 송환행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다가 점증하는 조선인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반영하면서, 송환하는 일본인들의 소지금을 1인당 1,000엔, 화물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으로 제한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들고 가려 한 일본인들은 공식 송환선이 아닌 밀항선, 일명 도둑배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용했고, 미 군정에 각종 로비 행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브로커와 결탁한 갖가지 폐해가 성행했다.

한편 소련 점령지의 북한 내 일본인들은 바로 송환되지 못했다. 특히 식민 통치와 직결된 남성의 경우 점령군이나 새롭게 들어선 현지 정권에 의해 투옥ㆍ압송ㆍ억류되었다. 게다가 각종 공출과 곧 이어 시작된 재산 몰수에 따른 집단 공동생활은 남한의 일본인에 비해 훨씬 열악한 거류와 귀환 환경을 초래했다. 남성들이 시베리아 등지의 타지로 끌려가거나 압송된 상황에서 남겨진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피난하고 탈출해야 했기에 ‘국가 부재’와 ‘가장 부재’를 더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모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귀환자, 그러나 마침내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다

‘전쟁 피해자’에 담긴 정치적 수사

저자 이연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1945년 시점에서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 나갔는지, 본토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표정과 마지막 뒷모습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사와 마치 르포 같은 서술로 엮어내고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도 꼼꼼하게 챙겨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기구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갑남을녀의 일본인들이 실제 맞닥뜨린 패전의 공포와 어떡하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그뿐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미군정과 소군정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우며 처리하는 행정 체계, 그리고 귀환하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조선인 브로커의 모습도 실감난다. 이 때문에 논픽션으로서 이 책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아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와 같이 패전과 귀환 국면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분석과 평가를 과하지 않게 곁들인다. 이는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상을 읽으며 복잡다단한 사회상과 조선을 떠난 식민자의 두 얼굴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평가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크게 드러낸 곳은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가 ‘전쟁 피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전후 일본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서술한 부분에서이다.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이것이 ‘전쟁 피해자’라는 정치적 수사의 본질이었다.

-본문 211쪽

패전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들은 자국 동포로부터 식민지민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고, 대공습과 패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기 힘든 전후 일본 사회에 일자리를 위협하고 식량을 축내는 ‘민폐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이 떠나온 조선은 물론이고 모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청원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기에 이른다.

저자는 차분하게 문제 제기한다. 이들은 일본의 ‘해외 귀환자’이기 이전에 일본제국을 뒷받침하던 ‘식민자’였다고. 피해의 맥락에서만 이들을 바라본다면 식민자로서 행한 가해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고. 이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이 한일 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그리고 한일 양국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역사 논픽션) 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제품소개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

저자 이연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1945년 시점에서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 나갔는지, 본토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표정과 마지막 뒷모습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사와 마치 르포 같은 서술로 엮어내고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도 꼼꼼하게 챙겨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기구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갑남을녀의 일본인들이 실제 맞닥뜨린 패전의 공포와 어떡하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그뿐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미군정과 소군정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우며 처리하는 행정 체계, 그리고 귀환하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조선인 브로커의 모습도 실감난다. 이 때문에 논픽션으로서 이 책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아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와 같이 패전과 귀환 국면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분석과 평가를 과하지 않게 곁들인다. 이는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상을 읽으며 복잡다단한 사회상과 조선을 떠난 식민자의 두 얼굴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평가하게 하기 위해서다.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①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로 일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에 남아서 생활했고,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 귀환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은 그런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책 내용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그려진 회고담이다.

여기서는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약간씩 발췌, 각색해서 올려본다. 좋은 책이니 관심 있으면 내용 전부를 보았으면 한다.

38선 이남의 일본인들

패전 당시의 일본인

1945년 8월 9일 함경도 회령 : 소련의 8월 폭풍 작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다음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지역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 수뇌부는 곧바로 열차를 동원해서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 가족을 서둘러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만주 현지에 있던 1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떠한 대피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때문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소련 지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많은 자들이 희생되고 고아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흘 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함포사격에 이어 시가지 상륙을 개시하자 함경북도를 관할하던 일본 군부는 서둘러 열차를 수배하여 군인 가족들만 태우고 경성으로 출발해 버린 것.

그러는 동시에 조선인들과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대적으로 소집영장을 띄워서 회령에 있는 군부대로 모이게 했다. 군부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비료공장에 다니던 사바타 겐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바타 겐조 (대역)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회령의 군부대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무기 대신에 삽 한 자루씩을 쥐여주고선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삼으려 했다.”

1945년 8월 15일 부산의 한 관공서 : 예상된 항복 발표

상부로부터 정오에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공무원들이 들어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항복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일본이 4년 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부터 시작된 부산 지역의 등화관제가 해제된 날이었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야경을 만끽하며 비로소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비추는 환한 불빛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

1945년 8월 15일 경성전기회사

덴노(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경성전기회사의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는 황급히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갔다.

호즈미 신로쿠로 (대역)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직원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임하도록 .”

그는 위급한 시국에 정전사태라도 발생하게 되면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중순 부산항: 밀항선

돈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빨리 밀항선으로 귀국했다.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이라는 애국심은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또 조선 땅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 후지와라 지즈코

조선인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심

1945년 8월 16일: 만세를 외치는 군중

사무실 밖으로 조선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경성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경성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

8월 15일 이후 1주일간의 폭행 사건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은 총 913건이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은 총 26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당시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여서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일본인 상관들은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했지만, 일본인 상관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징발에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에게 악감정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총독부

이날 조선총독부는 각 기관에 급하게 전달한다.

아베 노부유키 (대역)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의 사진을 모두 불태워라!”

“또 각 지역의 신사에 연락해 위패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라!”

그들은 행여나 조선인들의 심기를 상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뜻밖의 공포: 조선인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

일본인 촌: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조선인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일본인촌에는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의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고, 경찰, 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평소 조선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증언: 여기 일본 아니었어?

당시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이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마쓰나가 아쿠오 (대역)

“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나카무라 기미 (대역)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 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갑자기 달라진 세상

돈을 인출하려는 일본인들

요즘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편예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바람에 출금 업무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스미코. 충무로 경성우편국 근무

은행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는데,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곧 은행은 파산이 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예금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수많은 예금자들은 화가 나서 은행을 때려 부수려 할 것이다.

때문에 8월 17일부터 총독부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미즈타 나오마사 (대역)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으니 안심들 하삼. 지금 큰돈을 인출했다가 공연히 도난 사건에 휘말리지 마시고…”

하지만 하루빨리 재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

강탈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인출을 하고 돌아오다가 돈을 강탈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은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없다며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거리마다 넘쳐나는 물자

패전 후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중에 전례 없이 물자가 풍족해졌다는 점이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다음 날 남대문시장에는 거짓말처럼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 수행 중에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각종 물자가 한꺼번에 시중에 풀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바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살림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세간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당장 배를 타고 항구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 일본인들의 심리를 꿰차고 아예 조선인 고물상들은 일본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전과 같은 지역에서는 쓸만한 물건을 사려는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전에 없던 시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 비난: 조선의 재산을 함부로 팔지 말라

한편 조선인 지도층들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일본인이 소유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조선인을 부려서 일군 것’

때문에 일본인 재산은 그 형태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인들 재산을 매입하는 행위는 해방 조선의 부를 유출하는 이적 행위요, 공공의 재산을 개인의 것으로 독점하는 반사회적 악덕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게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에 대해 조선 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미군정 또한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갈 짐에는 중량을 제한했으며 현금은 1,000엔 이상의 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제한 조치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어떤 짐을 가져가고, 또 가재를 팔아 마련한 돈을 어디에 숨겨 가야 할지 저마다 고민하고 있었다.

귀환 열차 속의 풍경

귀환 열차에 오르다가 넘어진 앞사람이 무거운 배낭 때문에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그 모습이 비참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열차에 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무거운 짐 때문에 하나같이 중풍 환자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등에 짐을 짊어지고 젖먹이 아기까지 감싸 안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보자니 씁쓸했다.

“고작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일하여 얻은 전 재산의 말로구나!”

─ 고타니 마스지로 인천일본인세화회장

당시 남한과 북한이 달랐던 점

돈을 허리춤이나 옷섶에 넣어 보이지 않게 다시 꿰매거나 커다란 붓 속에 지폐를 말아 넣는 등의 방법은 이미 낡은 방식이 되면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다양하고 기발한 수법이 끊임없이 동원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간 남한의 일본인들은 북한에서 돌아간 사람들과 비교해보자면 훨씬 상황은 나았다.

북한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의 경우는 자전거, 라디오, 축음기, 재봉틀, 서적류는 물론 심지어 이불과 개인 화장품까지도 공출 대상이었다.

일본인들이 느낀 패전 후 몇 달간의 변화

1945년 8월 16일: 독립만세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9월 5일: 조선에 남고 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 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미래가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가을: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 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 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 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겨울: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②」에서 계속됩니다.

눔벵이의 행복한 책읽기 #12 이연식 ‘조선을 떠나며’

현재 일본의 열악하고 황당한 코로나 상황에 대해, 아는 분이 일본인은 데모도 못 한다고 혀를 차시더군요.

그들도 열 받으면 무섭고, 아예 목숨을 건다고 말해주었더니 안 믿으시더군요.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책 얘기를 해드렸습니다.

첫 책은 경술 국치와 만주 점령 이후 당연히 일본 본토에서 사람들이 이주했고, 2차 대전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눈물어린 과정과 돌아가서의 삶에 대한 책입니다.

첫 책의 저자는 한국의 사회학자여서 우리 입장에서 화날 말은 없고, 화날 일도 우리 입장 위주로 쓰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당연히 교사, 경찰, 대학 교수 등이 많이 왔는데 상당수가 혼슈의 도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사이의 사람 보다는 도호쿠(東北)나 큐슈 쪽이 많았답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실세는 아니었다는 거죠.

농민이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일본 내에서 소유 농지가 없거나 소작농들이었고 일본 정부의 권유로 이주했습니다.

경술국치 이전에도 용산 등지에서 경부선 철도를 깔 때, 한국 농민의 땅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수용해서 철로를 깔고 항의하는 조선의 땅주인을 죽지 않을 만큼 구타하는 일이 빈번했답니다.

그리고 역이 부설된 지금의 서울 명동, 후암동, 용산이 그들의 집단 거주지였답니다.

당시 서울도 아닌 함경도 원산에 살던 어느 일본 학생은 단 한 번도 광복 이전에 조선인을 본 적이 없는 경우까지 있었다는 군요.

안락한 만주와 조선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38선 이북에서 오는 경우 소련군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북 어디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성범죄는 없었습니다.

어느 극우 여성이 조선인에게 성폭행 당하는 상황을,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묘사한 ‘요코이야기’라는 소설을 썼는데 아주 악랄한 의도라고 봅니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도착했는데, 한국전쟁 이전의 일본의 현실엔 맨손으로 귀환한 그들이 전혀 달갑지 않아 고민거리였답니다.

국가가 강력 권유하여 이주하였는데 패전 후 돌아왔다고 나몰라라 하는 상황이라 정부에의 감정의 골이 깊었습니다.

그들을 히키아게샤(引揚者)라고 불렀는데 죽은 시신을 물에서 건지는 것을 인양한다고 하니 얼마나 화나는 대우였을까요.

복귀자들은 그렇게 본국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첫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생활이 어려운 일부 히키아게샤들의 일부는 지바현의 황실 말목장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받습니다.

정착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초고도 성장으로 하네다공항의 과포화가 다가오는데 마치 마요네즈같은 하네다공항 주변 지반의 문제로 당시 기술로는 활주로 증설이 벽에 부딪칩니다.

바로 그 말목장 부지에 나리타공항을 국제선 전용으로 만들려다가 대형사고가 터집니다.

두번째 책인 만화가 ‘오제 아키라’의 <우리 마을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우 의식 있는 만화만 그립니다.

하지만 히키아게샤 주민이라는 사실은 빼고, 주민들이 정부의 일방적인 수용에 반대하다고 설정하는 정도만 사실 관계와 다릅니다.

물론 쥐꼬리 만큼 이주 보상비는 주어지지만, 땅 자체가 황실 소유이니 재산권도 없이 쫓겨가야 하는 상황에 몰린 히키아게샤라 불리던 주민들의 심사가 어떻겠습니까.

자민당 정부에 대해 이를 갈던 주민들이 이에 반대하고, 68세대라는 당시 대학생 운동권과 연합하여 사상 최강의 반발을 합니다.

화염병 투척, 망루 시위, 쇠사슬로 몸을 묶어 저항, 땅굴파기 등등, 총칼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거의 백병전에 가까운 전투를 경찰과 벌입니다.

전 할 줄은 모르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테란’이라는 전투종족이 있다는데요.

‘테란’이라고 불릴 정도로 저항했고, 그래서 아직도 나리타공항 제 2활주로는 반의 길이 밖에 안됩니다.

끝엔 神寺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자민당이 얼마나 고민했을지요.

나무위키 검색해서 나리타공항 보시면 만화에 나오는 살벌한 전투 영상이 그대로 나오는데 ‘허허!’ 소리 밖에 안 나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나리타 공항 상황을 못 본 채 한다는군요.

무서워서 피하는 거죠.

만화는 몰라도 책은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우파 정권이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고 합리성 만을 추구하면 얼마나 악랄해지는지…

그리고 일본인들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도…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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