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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One Nation
Assassin’s Creed Unity (어썌신 크리드 프랑스혁명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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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정리 – 네이버 블로그

프랑스혁명 정리 · 1. 프랑스 혁명의 원인. 1) 구제도의 모순.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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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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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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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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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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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프랑스혁명의 이념은’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신체,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규정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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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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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길드와 같은 동업 조합 폐지, 국내 관세와 통행세 폐지, 귀족 세력의 아성이. 던 고등법원 폐지, 구체제의 복잡한 행정구역과 사법 구역 정리, 새로운 행정. 구역과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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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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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똑똑

개념 정리: 역사1 – 제국주의 침략과 국민 국가 건설 운동 –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민 혁명과 국민 국가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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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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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ⅰ 프랑스 혁명의 원인

Ⅲ 정리하며. Ⅳ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프랑스 혁명은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난 혁명으로서, 부르주아 계급이 중심이 되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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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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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궁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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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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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정리

프랑스 혁명사

1. 프랑스 혁명의 원인

1) 구제도의 모순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앙시앵이란 ‘오래된’, ‘낡은’이라는 의미이며, 레짐은 ‘제도’또는 ‘체제’를 의미이다. 따라서 앙시앵 레짐은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가는 당시 상황에서 이미 낡은 제도, 즉 봉건적 신분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다.

당시 소수의 특권층인 제1신분 성직자의 수는 총인구 2700만명 중에서 극소수인 10만명 정도였지만, 전국토의 1/10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명 정도로서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받았고, 교회·군대·행정의 고위직에 앉아 연금을 받았으며, 지세인 타이유(taille)와 도로부역에서 면제되는 등의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칼을 찬다든지 하는 형식적인 명예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혈통귀족인 대검귀족과 법복귀족으로 나뉜다. 법복귀족은 부유한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 되었고 법관직이 많았으며 재산관리에 능하였다.

이들은 점차 혈통귀족과 거의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검귀족이 법복귀족을 경멸하였으나, 점차로 양자간의 차이는 사라졌다. 귀족은 막대한 토지 소유, 교회·군대·정부요직 차지·면세 특혜를 향유하였다.

특권신분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에 속하였다. 그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이 중에서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총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은 동유럽의 농민들과는 달리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영국의 농민들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노동자로 전락했지만 프랑스의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 규모는 살아가는 데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주에게 소작을 얻는 등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또한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1/10세, 인두세, 소득세 같은 직접세와 혁명 전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염세 같은 간접세)으로 그 수입의 절반은 빼앗겼으며, 이들에게 도로부역 같은 노동력 징발도 큰 고통이었다. 정부는 7세 이상은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하였는데, 정부에서 파는 소금은 실제 시세의 10배였다.

염세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또한 염세를 정부 관리자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에 청부를 주어 징수하였으므로 청부업자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제3신분 중 가장 중요한 계층은 시민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계급은 금융업자·상공업자·법률가·의사·문필가 등 자유업 종사자이다. 이들은 재력과 능력이 뛰어나 사회 발전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평민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특권귀족의 하위에 있었고, 정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경제면에서 봉건적 잔재 때문에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시민층은 소상인과 수공업자를 포함하는데 이들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할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신분은 불만을 가지고,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2) 재정의 위기

국가 전반의 경제 사정도 계속 악화되었다. 1786년 영국과 맺은 자유 통상 조약(이든 조약)으로 영국의 값싼 상품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는 영국에 원료와 식량을 수출했는데 오히려 생필품 값만 올라 사회 불안이 점점 심해졌다. 당시 파리 노동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50%나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경제적 위기와 함께 왕실 재정의 위기는 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루이 14세 이래 악화된 재정은 루이 15세 때 더욱 누적되었다.

이에 루이 16세는 1774년 중농주의 경제학자 튀르고를 등용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튀르고는 면세특권 계급인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 면세 혜택을 박탈하고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왕실 경비를 삭감하려다 왕비 및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에 파면되었다. 이후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가 1776년에서 1781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계속 돈을 빌리면서 사태를 꾸려갔으나, 미국 독립 전쟁 원조 때문에 재정상의 위기가 닥쳐왔다. 프랑스는 미국 전쟁 참여로 약 20억 루블이라는 엄청난 전쟁 비용이 들어가면서, 1789년에는 45억 루블의 빚을 지게 되는데, 당시 연간 세입이 약5억 루블 정도였으니 빚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세출내역 중에서 약 50%가 국채 이자와 상환이었다. 법복 귀족들은 왕실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 권력을 회복하고 절대 왕권을 제약하여 귀족 정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1302년에 창설되고 1614년이래 소집되지 않고있던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3) 계몽 사상의 영향

1789년 프랑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고통 상태에 있었으나 다른 유럽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절실하게 불행하다고 느꼈고 사회 비판 의식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사상의 영향이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비판과 분석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관습과 전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이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여기에 계몽 사상가의 주장을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프랑스 인의 지적·문화적 수준이 더해졌다.

계몽 사상의 내용은 ‘인간 이성의 힘과 그것에 의한 인류 진보로의 믿음’에서 논리가 전개된다. 계몽사상가들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계몽을 통하여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이성에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히 시정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현존하는 질서를 타파하려는 개혁사상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계몽 사상의 대표적 인물로는 볼테르(1694??1778), 몽테스키외(1689??1755), 루소(1712??1778)등이 있다. 제3신분 중에서 시민계급은 계몽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이 소유한 교육·재능·야망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우를 요구하여 봉건적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려 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배경에는 구제도의 모순과 국가의 재정상의 위기, 계몽사상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 앞서 미국에서 발생한 독립 혁명의 성공은 프랑스 시민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2. 프랑스 혁명의 전개

1) 삼부회의 소집

국가 재정상의 위기에 직면한 정부는 1781년 칼론느 개혁(모든 토지 소유자로부터 현물세를 징수하려고 왕실에 가까운 귀족과 성직자 대표자들로 명사회를 구성하여 협력을 얻으려함)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법복귀족의 아성인 고등 법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고등법원은 새로운 세금의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의 권한이라고 하여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의 이름 아래 삼부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들의 속셈은 왕실 재정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권력을 회복하고 절대왕권을 제약하여 귀족정치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파산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1788년 여름, ‘사표를 던지는’ 기분으로 1614년이래 소집되지않고 있던 삼부회를 다음 해 5월에 소집할 것을 선포하였다.

삼부회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벽촌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 삼부회의 제3신분대표의 선출에서는 선거 구민의 요구사항이 적힌 진정서가 작성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앙시앵 레짐의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3신분 대표에는 말주변이 좋은 법률가가 주로 선출되었고, 제2신분에는 귀족이지만 자유주의적인 대표들도 소수 선출되었다. 또한 제1신분에서는 하위성직자가 대표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므로 제3신분대표들은 귀족과 성직자대표 중에서 매우 많은 동조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관례에 따르면 각 신분은 각각 300명의 대표로 구성되며 신분별 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제3신분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3신분은 그들이 국민 대다수의 대표자이므로 대표수를 배로 증가할 것과 신분별이 아닌 머리수 표결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제3신분 대표수를 600명으로 증가시킬 것에는 동의하였으나, 표결방식에 관해서는 미결정 상태였다.

2) 혁명의 시작

테니스코트 서약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지양하고 국민의회를 선포하였다. 귀족들은 거부하였으나 성직자대표들 중 하위 성직자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회의 장소가 수리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실내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는데, 이를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고 한다. 국왕도 하는 수 없이 귀족과 성직자대표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삼부회는 사라지고 국민의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 루이가 진심으로 새로운 프랑스 창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은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는 파리 시민을 긴장시켰으며, 파리 시민들은 무력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하기 위해서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민중의 눈에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함락은 혁명에 민중과 폭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국민의회의 개혁

국민의회는 곧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고 8월 26일에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부조리의 타파를 염두에 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인권선언은 앙시앵 레짐의 사망증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왕 루이와 귀족 세력들은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사회는 혼란하고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올랐으며 실업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초, 서민 여인들이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이유로 행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국왕은 파리시민의 감시 하에, 국민의회는 파리시민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는 국민 의회는 교회 재산의 몰수하여 매각하고, 길드의 폐지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개혁을 위하여 수도원을 해체하고 모든 성직자를 선출제로 하여 국가가 봉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행정과 사법제도의 정비 등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가운데에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끊이지 않는 반혁명의 기운 속에서 혁명은 점차 과격해 졌다.

3) 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1791년 9월 국민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새 헌법 아래에서 참정권은 세금 납부에 따른 일부 시민에게만 부여하였으므로, 새로운 정치 체제는 유산계급 지배체제였다.

이 즈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로 혁명 전파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간섭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의용군이 파리에 모여드는가 하면 8월에는 혁명에 고무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여 방화하였다. 이에 입법 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보통 선거에 의한 국민 공회 소집을 결의하였다.

유산계급체제가 무너지고 수공업자와 소상점 주인 등의 소시민층 중심으로 한 혁명적 민중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민 공회는 곧 공화정을 선포하고, 다음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시켰다. 이에 놀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공격을 가해오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소시민과 민중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자코뱅파와 부르주아지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지롱드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지방의 반란이 빈발하는 가운데 1973년 6월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자코뱅당은 모든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국내외의 사정으로 그 실시는 보류되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 정부의 사실상의 행정부로서,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파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공정 가격제 등의 통제 경제를 실시하고 봉건 공납의 폐지, 혁명력의 제정 등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794년 7월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4) 총재정부

로베스피에르 타도 이후 혁명재판소가 해산되고 공안 위원회의 권한이 극도로 축소되었고, 통제 경제도 포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5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 즉 총재정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대외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동요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총재 정부의 허약함에 실망하였고, 그들을 지켜 중 강력하고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총재정부는 쓰러지고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5) 나폴레옹의 등장과 프랑스 혁명

1795년에 성립된 총재정부는 5인 총재의 합의제에 입각한 정부이므로 긴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어 이 무능함에 대해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에 부응하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었다.칼라일(CARLYLE)이 주창한 영웅 사관에 의하면 영웅이란 보통 사람이 가지지 못 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보통 사람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룬 사람을 말하는데 나폴레옹도 칼라일이 말한 영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던 20 세 때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다. 그는 군사적인 천재였으며 타고난 노력가였고 폭력을 사랑했으며 명예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지 못 하고 있다가 1793년에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진압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테르미도르 반란 후에 투옥이 되기도 했는데 1795년에 재차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재 등용되어 1796-1797년에는 이탈리아 쪽에서 침공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셋으로 나누어 1군과 2군은 명망이 있는 장군들이 사령관을 맡았던 것에 비해 약관의 나이인 나폴레옹이 3군사령관을 맡게 되어 노장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그는 1.2군사령관이 모두 패배한데 반해 그만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나폴레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테르미도르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국외로 돌리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영국의 오리엔트 식민지를 점령하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이집트 원정을 명령한다. 이 원정은 1798년 5월에서 1799년 1월까지 있었는데 원정군은 보 기병이 합해서 40000명 그리고, 학자가 200명 이 원정을 수행했으며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함대도 360척에 달하였다. 당시 영국의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던 넬슨은 지중해를 순회하며 프랑스 함대를 기다렸으나 우연히 나폴레옹은 넬슨의 예봉을 피하고 알렉산드리아에 무사히 상륙하였고, ‘피라밋 전쟁’을 통해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오리엔트를 프랑스의 세력 하에 두게 된다.

나폴레옹의 저지에 실패한 넬슨 제독은 대신에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프랑스 선박들을 격침시켜 나폴레옹은 육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길이 막힌 채 이집트에 고립되게 된다. 그래서, 1799년 1월에 프랑스 정부는 비밀리에 선박을 보내 나폴레옹은 단신으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1799년11월에 부르조아층과 연합하여 Brumaire 쿠테타를 일으켜3명의 통령(Consule)으로 구성된 통령정부를 탄생시킨다. 이때의 3명의 통령은 나폴레옹과 탈레랑(Talleyrand) 그리고, Abee Sieyse 였다. 또한, 1804년에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프랑스 제 1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 쿠테타는 나폴레옹의 군사력과 부유한 부르주아층의 금력이 결합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것에 대하여 과연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계승한 사람인가 아니면 프랑스 혁명의 중단자인가 하는 문제가 학자들 사이에서 대립되었다.

3. 프랑스 혁명의 결과

프랑스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귀족, 성직자 주역의 정치형태를 중산층을 옹호하고 육성하며 이들의 자유, 평등을 확립하는 정치 형태로 전환하였다.

둘째, 경제적인 면에서 봉건제적 잔재를 제거함으로서 자유로운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영주의 토지소유 특권과 길드적 독점권을 없애고 교회 및 망명귀족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농민은 무상으로 봉건적 부담으로써 해방되었다. 그리고 토지를 유상으로 매각해 도시주변에 대토지 소유가 등장하게 되고, 농촌에서는 중산 농민층이 토지 소유를 확대해 농민층의 분화가 촉진되어 농업의 자본주의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셋째, 사회적인 면에서 앙시앵 레짐 하에서 신분제적이고 법적인 불평등과 특권적인 신분제도를 포함한 악습을 제거하고 귀족계급에 대하여 시민계급이 승리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주체가 되는 근대사회의 길을 열었다.

넷째, 사상적인 면에서는 고착된 종교적 이념을 배제하고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자유주의 이념이 제창되었다.

4. 프랑스 혁명의 의의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 혁명으로 평가된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으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또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전근대 사회의 낡은 사고 방식이 이성에 의거한 계몽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혁명은 모든 구별이나 차이를 넘어선 모든 사람의 자유를 뜻하는 자유, 법적인 평등에서 나아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을 포함하는 평등, 나아가 세계 평화의 이념인 박애의 이념을 내걸고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제도와 절대 왕정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다.

5. 프랑스 혁명의 한계

프랑스 혁명을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지만, 이 때의 시민은 부르주아지로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1차적으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셈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가 경제·정치를 장악하게 되었고, 선거는 제한 선거로서 유산자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앞장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참정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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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은 매년 7월 14일로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1]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한 1789년 7월 14일을 기리기 위해서 이듬해 1790년 7월 14일에 진행된 혁명기념 축제가 그 기원이다.

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 하에서 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심각한 경제불황은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마침내 흉작이 발생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민중혁명의 단계로 변화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 소식을 접한 피지배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에 고취되자 여러 민족을 거느린 유럽의 군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2]

프랑스 혁명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린 후 80년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결국 유럽에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 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기에 있어서 시민 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했으며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낸 최초의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다.[3]

배경 [ 편집 ]

루이 16세 (1754년~1793년)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년),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 (재위 1643~1715년)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와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 · 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이 각지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대귀족은 궁정 (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거의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결함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4]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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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제의 모순을 풍자한 만평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국가 재정 파탄 [ 편집 ]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견제하려고 미국 독립 혁명(1775~83년)을 지원하였으나 과도한 군사비 집행으로 인해 재정궁핍에 빠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실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1787년 2월,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안에 저항하였고 그로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기 위해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5]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1785년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도용하여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6] 재판을 통해 왕비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왕비의 사치가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는 오해를 퍼뜨리게 하였다. 결국 이사건으로 왕비는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혔고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 10월 16일 참수형에 처해지는 간접적 원인이 된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 [ 편집 ]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였다.[7] 프랑스 혁명 당시 노동자, 빈농, 인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명사회 개최 [ 편집 ]

명사회 (1787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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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빵의 품귀와 물가 폭등으로 민중의 불안이 증가했고 폭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1787년 2월 22일, 루이 16세는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8][9] 재무부 장관 칼론은 160년[10] 만에 소집된 명사회에서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등 세제 개혁을 제안했다. 또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에 대한 과세도 논의 주제로 삼았다. 면세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던 명사회의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다. 세제개편안 때문에 칼론은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공금유용등 비리가 폭로되자[11] 1787년 4월 8일에 루이 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8] 칼론의 후임으로는 툴루즈 대주교인 브리엔을 임명하였다.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하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혁명의 전개 [ 편집 ]

삼부회 소집 [ 편집 ]

베르사유 궁전의 삼부회 개회식 (1789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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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회는 제1, 제2신분인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되었기에 면세 특권층인 이들에게 징세추징을 위한 세제 개혁안을 승인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처에서 삼부회 개최에 대한 요구가 빈번했고 1788년 8월 8일, 재무부 장관 브리엔은 국왕으로부터 삼부회 소집을 허락받았다.[12] 8월 16일, 국고가 바닥나서 국가 지불 정지가 선언되었다. 8월 25일, 약탈과 폭동이 빈발하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다.

네케르는 공채발행을 통해 급한 위기를 수습하였고 1788년에 명사회를 다시 소집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12월 12일 해산하였다.[13] 1789년초가 되자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다.[14][15] 선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인쇄물이 늘어나고 정치토론이 활성화되었으며 여러 정치담론이 형성되었다.[16] 삼부회에 참석할 대표 선출은 신분별로 일정한 자격과 기준으로 선정된 대의원(선거위원)들이 신분별 회의를 통해 지명,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7] 또한 신분별 참석 인원수는 1614년의 선례에 따라 각 신분별 동일한 인원수로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평민대표의 인원은 2배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이 요구를 허락하였다.[18]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175년만에 삼부회를 베르사이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열었다.[19][20][21] 성직자 290명, 귀족 270명, 평민 58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22]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머릿수 표결과 신분별 표결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다. 신분별 표결방식은 각 신분별 의결후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는데,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기득권 수호를 위해 협력하므로 대부분 2대 1이 되어 제3신분인 평민이 불리했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또한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면세등 각종특권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 폐지등의 개혁을 위해 합동 회의를 통한 토론을 요구했다. 기득권 유지를 원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신분별 회의 진행을 주장했다. 결국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이어졌다.

테니스 코트 서약 [ 편집 ]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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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23]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23]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23][24]

회의장이 폐쇄되자 1789년 6월 20일 국민의회측(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에 대해 서약문을 작성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25][26][27][28] 국민의회에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29] 7월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30]

바스티유 습격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바스티유 습격 입니다.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31]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자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바이이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하였으며 민병대(국민군) 사령관으로 라파예트를 임명하였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킨후 7월 18일에는 파리를 방문하는등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32] 한편 혁명이 여파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격렬한 동요가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정치범 수용소, 요새, 성들을 장악하였다. 국왕이 임명한 지사나 군사령관들은 국민방위대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방임으로 일관했다.[33] 이로써 국왕의 권위는 지방에서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도시들은 상호 연맹을 맺고 협력하였다.[34]

농민반란 [ 편집 ]

인권선언 (1789년 8월 26일)

농민들도 혁명에 휩쓸려 봉기하였는데 이들은 총뿐만 아니라 낫,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매우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방법들을 행동으로 옮겼다.[35] 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을 억매었던 문서를 불살랐으며 영주와 지주들을 공격하였다. 이런 폭력적인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대공포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심각성을 띄었다.[35] 삼부회나 국민의회(제헌의회)의 활동 중에 농민과 도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발언권이 없었다.[36] 지방도시의 봉기에서 자치위원회나 국민방위대 조직시에도 무산계급(소작농과 노동자)는 배제되었다.[37] 혁명과 제3신분의 대표선출은 대부분이 부르조아 출신이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발언권은 묵살되었다. 권리요구의 완충지대가 없이 억눌렸던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프랑스 인권 선언 입니다.

제헌의회(국민의회)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며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한 무질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38] 봉건지대 유상폐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었으나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납부 등이 기본내용이었다.[39] 제헌의회(국민의회)의 개혁은 지속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40]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세웠다. 인권선언은 자연권 사상과 계몽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미국의 독립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41]

베르사유 행진 [ 편집 ]

베르사이유 여성 행진 (1789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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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는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의 재가를 거부하며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켰다. 파리에는 ‘인민의 벗’을 비롯한 많은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고[42]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헌법제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스티유 습격 사건과 봉건제 폐지 등으로 놀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오르기 시작했고[43] 귀족들로 인해 번성했던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 일거리가 사라지며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전년도의 기상이상으로 인한 대흉작은 밀 수확량을 급감하게 만들었고 파리의 빵값이 치솟으며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불만과 원망이 폭발 일보직전에 놓여있었다. 이런 파리의 시민들의 사정과는 달리 베르사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10월 1일 벌어졌는데 이때 군인들에 의해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색기가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42]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흥분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빵값 폭등으로 화가 난 여인들이 전면에 나섰다. 7천여명의 여인들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외치며 10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을 하였다. 약 20km가 넘는 이 행진에 국민방위대도 동참하였다.[42] 갑작스럽게 베르사유 궁전앞에 몰려든 군중을 보고 당황한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며 이들을 달랬다.[42] 그날밤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 여인들은 다음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군중들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후 국왕 일가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하였다.[42]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1790년에는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 개혁 작업 [ 편집 ]

아시냐 공채 (1792년 발행)

파리에 거주하게 된 루이 16세는 사실상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44] 정국의 주도권은 국민의회가 발휘하였다. 자코뱅 클럽과 같은 정치 클럽이 활성화 되면서 정치활동도 활발해졌다.[44] 1790년에 풍작으로[44]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고 민심도 안정화된 가운데 프랑스 사회의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로에 가까운 부채문제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유재산을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를 발행했다.[45]

교회에 대한 개혁작업은 1789년 11월 2일에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대해 국유화가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45] 수도원을 해체하고[46] 1790년 7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여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를 통해 사실상 교황을 대신하여 서임권을 행사하는 등 국가가 성직자를 관리했다.[47] 이를 위해 국민의회는 성직자 기본법의 준수에 대한 선서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교회의 일부 세력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등 저항하였고[46] 교황 비오 6세도 이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으며[47]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48]

이 밖에도 길드(동업조합)폐지, 재판제도 등 사법부 개혁, 조세제도를 개편하였고 행정구역을 재조직하여 전국을 83개의 도와 그 하위 행정구획으로 나누었다.[45] 재산 제한 선거제가 도입되어 일정 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45][49] 이러한 국민의회의 개혁작업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공채 아시냐는 단기간 내 재정 확보에는 기여를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경제를 악화시켰으며[46] 종래에는 가치가 하락하였다. 의회 내 개혁파 정치세력도 분열하는 흐름이 있었다.[50] 알자스에서는 독일 제후들과 영토분쟁이 있었고[51] 아비뇽 그리고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특권파 인사들이 소요도 있었다.[50] 또한 외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을 점차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망명파 프랑스 귀족들은 이런 불안감을 부풀리고 조장하기도 했다.

바렌 사건 [ 편집 ]

파리로 돌아온 국왕 일가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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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증가함에 따라 국왕이 의지할 국내세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세력간에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하자,[52]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온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53]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는 프랑스인들을 실망시킨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54] 의회 내 내분이 생기면서 7월 15일경 루이 16세의 권한을 복위시켰다.[54]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7월 17일에는 급진적인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cordeliers)라는 정치 클럽의 주도하에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국민방위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54][55]

한편 망명실패 소식을 접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왕비)와 부르봉 왕가의 신변안전과 왕권 복위를 돕고자 각국 군주들에게 파두아 회람을 돌려 프랑스의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56] 또한 프로이센과는 동맹을 맺고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를 외교적으로 압박하였다.[57] 그러나 필니츠 선언은 역효과를 발생시켜 파리시민들을 자극하였다.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국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만 커지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충성심이 사라져 버렸다.[55]

입법 의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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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9월 3일에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다.[58] 이 헌법을 바탕으로 그해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를 통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새로운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58] 입법의회에는 중도파가 340석,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가 240석, 국왕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130석을 차지했다.[58] 푀양파는 주로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고 자코뱅파는 주로 죄측에 앉았는데, 이로 인해 온건한 세력은 우파, 급진적인 세력은 좌파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58]

장교들의 반발 [ 편집 ]

군대의 모든 장교는 헌법과 의회에 새로이 맹세를 해야 했다. 모든 장교는 헌법을 수호하고 침략을 막아내며 의회의 법령에 의거한 것이 아닌 다른 명령은 따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자필로 서명해야만 했다. 이 맹세는 군의 분열을 초래했다. 당시는 귀족가문 출신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많은 장교들이 혁명을 반대하며 왕당파를 지지했고 입헌군주제를 반대했다. 결국 상당수의 장교들이 무더기로 전역을 한 후 망명귀족들과 합류해 국외로 탈출하였다.[59]

가톨릭의 저항 [ 편집 ]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다.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 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60]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란이 방데 반란이다.[61] 방데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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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포고 [ 편집 ]

프랑스 혁명 전쟁 (1792년 ~ 1802년)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각 계파간에 전쟁에 대한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다.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62]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 성전이라 생각했다.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에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원했다.[62]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에 동의했다. 1792년 4월 20일,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서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열광적으로 통과시켰다.[63][62][64] 프로이센에는 조금 늦은 7월 8일에 선전포고를 했다.[65][66]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9,000명의 장교들중 약 6,000명이 망명하였고[67][68] 병사들은 정치 클럽에 참석하는등 군기가 나태해졌다. 충원된 의용병들은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5월에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68] 오스트리아와 첫 전투중 자신들의 지휘관인 딜론 장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을 벌이는등[69] 사실상 프랑스 정규군은 와해수준에 놓였다.[68]

왕궁 습격 사건 [ 편집 ]

상퀼로트

다급해진 입법의회는 선서거부파 성직자의 추방, 국왕의 친위대 해산, 지방출신을 포함한 연맹군(국민방위대) 창설등의 법령을 통과시켰다.[68][70] 그러나 6월 12일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의 대신들을 해임했다. 시민들은 루이 16세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반발했으며 아울러 패전의 원인이 국왕 일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66] 결국 파리 시민들이 6월 20일,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하였다.[71][66] 비록 습격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66]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했다.[72] 왕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상퀼로트의 출현과 지방에 있던 혁명을 옹호하는 국민방위대가 파리로 집결하면서 혁명이 급진적으로 흐르게 되었고 공공 질서가 무너지며 발생했다.

상퀼로트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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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과 식량부족, 인플레 때문에 파리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해졌다. 공채 아시냐는 가치가 40% 폭락했고 물가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곡식판매를 거부했다.[62] 소요가 발생했고 도시민들은 당국에게 공정 가격제의 시행을 요구했다. 이런 혼란속에서 도시에서는 상퀼로트가 등장했다. 이들은 귀족 남성들이 입는 퀼로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대신에 긴바지를 입고 다녔기에 이런 이름이 부쳐졌으며 또 다른 특징은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녔다.[73] 이들은 도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조장하기 시작했다.[62]

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고 간 상퀼로트들은 대부분이 소생산자, 소상점주,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초기에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계급이 다수였으며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계층이다.[74] 이들은 자본집중 반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정치참여, 자유보다는 평등, 국왕 경멸, 국왕의 거부권 폐지, 공화제등을 요구하였다.[75] 이들의 활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로 인해 상퀼로트는 대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73]

8월 10일 사건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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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였다.[76]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는 국왕 루이 16세가 행사한 거부권을 무시한채 조직된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77] 7월 25일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 시민들이 또 다시 부르봉 왕실을 모욕한다면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협박성 선언을 하였다.[78]

이 선언은 역효과를 불렀는데, 파리 시민들은 왕실이 여전히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패전으로 인한 절망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였고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시위가 벌어졌는데, 소요사태가 커지더니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국가적 위기속에 혁명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면서 입법의회는 이미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지방에서 온 의용군 등이 파리를 장악하여 상황을 주도해 나갔다.[78]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8월 10일에 왕궁인 튀틀리궁으로 몰려가서 공격하였다.[79]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하였다.[80] 의회도 침입을 받아 군중의 압박속에 황급히 왕권을 중지시키고,[80] 국왕 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했다.[79] 또한 당통이 이끄는 6인 임시내각을 만들고 빠른 시일내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공회 구성을 약속했다.[78] 이 사건은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제가 시작되는 계기되었다.

9월 학살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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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학살 (1792년 9월)

파리는 상퀼로트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81]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혁명 단계에 들어갔다.[82] 상퀼로트들에 의한 자치체가 형성되어 이들의 압력으로 왕당파 신문들이 폐간되고,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가 실시되었다. 감시위원회,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의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등의 법령들이 통과 되었다.[82] 이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이 8월 19일 국경을 돌파하여 9월 3일 베르됭이 점령 당했다. 프로이센군은 곧 파리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패전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지자 자원 입대자가 증가하였다.

한편, 의용군의 출병 후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 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결정되었다. 9월초부터 모든 감옥을 돌아다니며 반혁명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을 형식적인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하였다.[82] 또한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였고, 특별형사재판소의 약식 재판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자행되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명 정도로 추산된다.[73]

발미 전투 [ 편집 ]

발미전투 (1792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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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점령한후 파리를 목표로 아르곤느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가 뒤무리에와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과 1792년 9월 20일 발미(Valmy)에서 조우하였다.[83] 의용군을 포함한 4만 7천명의 사기 높은 프랑스 군과 프로이센군 3만 5천명이 8시간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포병대가 집중 포격을 쏟아부운후 켈레르만의 보병부대가 프로이센 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82]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퇴각하였다. 발미 승리후 프랑스 군은 국경을 넘어 사부아, 니스, 륀 등을 침공하였다. 1792년 11월에는 뒤무리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후[84] 벨기에를 점령하여 강제 병합하였다.

발미 전투에 의용병으로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 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은 승리로 인해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커졌다.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 갔다.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공화국 성립 [ 편집 ]

국민공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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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되는 루이 16세 (1793년 1월 21일)

국경지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9월 학살’ 과 상퀼로트의 다소 과격한 활동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기권율이 높았다.[85] 시민들이 겁을 먹고 감히 투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49명의 새 의원들이 뽑혔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함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85]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발미전투의 승리는 시기적절하게도 공화정의 출발에 큰힘이 되었다. 국민공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과업을 수행했다. 파리를 장악하고 코뮌을 통제하고 있던 상퀼로트의 압력과도 끓임없이 타협해야 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160석을 차지한 지롱드파였다. 이들은 공정가격제를 거부하고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다.[85] 도시의 부유한 부르조아 출신인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를 폐지하였고 공화정의 출발로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한 국왕 루이 16세(시민 루이)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하는 등 온건한 개혁을 선호했다.

루이 16세 처형 [ 편집 ]

급진화된 혁명세력이 장악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86]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87] 왕의 시신은 즉시 마들레느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왕의 무덤이 알려질 경우에 왕당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88]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불동맹 전쟁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입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 · 스페인 · 사르데냐 등을 포함한 11개국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적대시하며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국왕이 없어도 국가통치가 가능하다는 불온한 혁명사상이 자국민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정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했다. 금번 제1차 대불동맹은 피트수상이 이끄는 영국이 앞장섰다.[89] 이는 프랑스가 지난 92년 11월에 벨기에를 침공 후 합병하여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를 점령한 것이 영국의 대륙무역에 위협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군주들에 의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 혁명정부는 93년 2월 1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89] 대불동맹의 군대들도 신속히 움직여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국경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연패하자 다급해진 혁명 정부는 “30만명 모병”을 선포하였다.[90] 그러나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3년 3월 방데 반란을 일으켰고[61] 반란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91]

공포 정치 [ 편집 ]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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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6월 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7월 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92][93]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하여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 파를 숙청했고, 1793년 7월,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61] 등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 파는 8월 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해 반격에 나섰다.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94] 농민과 상인들은 수확과 상품에 대해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가택수색과 징발이 빈발했고 밀고자들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했으며[94] 혐의만으로 체포가 가능했다. 1794년 6월에 제정된 일명 《프레리알 22일 법》으로 인해 법률조력과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이 두가지 판결로 축소되었다.[95]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를레앙 공작, 뒤바리 부인,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수많은 반대파와 반혁명 혐의자들이 약식재판만으로 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공포정치로 인해 1년여 동안 파리에서만 30만명이 체포되고 약 15,000명이 처형당했다.[96]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에서는 1793년 8월 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 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했다.[97]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파는 1794년 2월 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97][98][99] 이렇게 루이지애나, 기아나, 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 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 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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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으나 부르주아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 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 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에서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에는 “혁명은 모든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모든 책임을 묵묵히 떠맡았던” 반면 반동 이후에는 “혁명은 부당한 일을 한 적도 있다는 것을 소심하게 인정하고 지도자들은 혁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100]

총재 정부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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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1795년 10월 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01]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통령 정부 [ 편집 ]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인해 10여년만에 단명하며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식민지 노예해방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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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의 산도밍고(현재 아이티 공화국)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당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여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소식을 전해들은 50 여만명의 흑인노예와 혼혈인들이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산도밍고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102] 하지만 프랑스 혁명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이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흑인 노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103][98][104] 1개월간의 혈전으로 백인 1천명, 흑인 1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농장이 파괴되었으나 흑인들의 승리로 이어졌다.[102]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중이던 영국이 개입하여 함대를 파견했으며[102] 스페인도 침공하였다. 침공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대표는 산도밍고에 있는 물라토(혼혈인)와 흑인 모두를 자유인으로 선포하며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가지도록 하였다.[97] 1793년 8월에 산도밍고의 저항군은 영국함대를 격퇴시켰다.[105] 산도밍고 흑인들의 승리는 전 식민지로 확대되었다. 1794년 2월 4일 프랑스 국민공회는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97][98][99]

이후 산도밍고는 프랑스와 갈등끝에 프랑스 관리들을 몰아내고 1801년 7월에 헌법을 제정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제1통령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명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를 부활시켜려 했다.[106] 아이티(산도밍고)는 투쟁끝에 프랑스 군을 몰아낸후 1804년 1월1일 정식으로 독립하였다.[107][108] 이로써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108]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하였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 아이티 혁명과 독립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 중남미의 탈식민지와 노예제도 폐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혁명 정신 [ 편집 ]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와 평등, 박애였고[109],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와 평등, 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110].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널리 확산된 혁명 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 1793년 파리 집정관 회의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 ‘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 박애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관련 예술 작품 [ 편집 ]

문학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정상원 (옮긴이), 이화북스, 2019년

《소설 프랑스 대혁명》앙드레 까스텔로 소설

《소설 프랑스 혁명》사토 겐이치 소설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피에르 시프이 소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주명철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박광자 & 전영애(옮긴이), 청미래, 2005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캐서린 래스키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안토니아 프레이 전기소설

영화

만화

음악

처음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기리며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으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평가 및 영향 [ 편집 ]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은 환영을 했고, 영국의 워즈워스, 콜리지 시인등은 매우 열렬히 환영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가 프랑스에 출현하였고, 나폴레옹의 독재가 가능케 했다. 콜리지와 워즈워드 시인도 환멸을 느꼈고 본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영국의 감리교 창시자이자 잉글랜드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 신부는 처음부터 이 혁명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 혁명은 말세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도 두렵게 지켜보았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다수가 이 혁명에 대한 반감이 크게 일어났다.[112]

결과론적인 평가는 프랑스의 왕조를 부르봉 왕가에서 보나파르트 왕가로 바꿨을 뿐, 그 이외의 의미는 없는 혁명이었다. 따라서, 이 혁명의 유일한 수혜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단 한 명이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노원신문] 프랑스 혁명 이야기 (노원신문)

인문학의 숲 인지모 제58회 강좌 -양 희영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

인문학의 숲 인지모 제58회 강좌

프랑스 혁명 이야기

양 희영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

세계 3대 시민 혁명은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을 말한다.

1. 프랑스 혁명의 배경

1)구제도의 모순 – 절대주의 체제의 구제도(앙시앵 레짐, 봉건적 신분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다.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관직을 독점하였고 면세 특권을 누렸다. 제3신분(전인구의 98%-상인, 수공업자, 농민 등)은 봉건적 의무와 과중한 세금으로 수입의 절반을 빼앗겼다.

2)재정의 위기 – 왕실의 사치와 미국 독립 전쟁 원조 때문에 재정상의 위기가 닥쳐왔다.

3)계몽사상의 영향 – 계몽 사상가들은 이성에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히 시정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프랑스 혁명의 과정

1) 삼부회의 소집 –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의 3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 174년 만에 루이16세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소집하였다.

2) 혁명의 시작 – 삼부회의 표결방식에 반발한 제3신분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국민 의회를 결성한 후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국왕이 무력으로 탄압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무력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하기 위해서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민중의 눈에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함락은 혁명에 민중과 폭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3) 혁명의 과격화 – 국민의회는 입헌 군주제(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일정한 제약을 받는 정치 체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입법의회가 소집되었다. 이즈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로 혁명 전파될 것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간섭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의용군이 파리에 모여드는가 하면 혁명에 고무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여 방화하였다. 이에 입법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공회 소집을 결의하였다. 국민공회는 곧 공화정(복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 체제. 군주에 반대되는 개념)을 선포하고, 다음 해 루이 16세를 처형시켰다. 이에 놀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공격을 가해오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소시민과 민중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자코뱅당과 부르주아지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지롱드당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자코뱅당은 지롱드당을 숙청하고 공안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4) 공포정치- 자코뱅당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파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가격통제, 봉건 공납의 무상폐지, 귀족영지 국유지의 몰수 및 분배 등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으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5) 총재정부 –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 즉 총재정부를 규정하였다.

6) 통령정부 – 총재정부는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동요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총재 정부의 허약함에 실망하였고 그들을 지켜줄 강력하고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총재정부는 쓰러지고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3.프랑스 혁명의 의의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평가된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으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또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전근대 사회의 낡은 사고방식이 이성에 의거한 계몽사상으로 대체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혁명은 모든 구별이나 차이를 넘어선 모든 사람의 자유를 뜻하는 자유, 법적인 평등에서 나아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을 포함하는 평등, 나아가 세계 평화의 이념인 박애의 이념을 내걸고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제도와 절대 왕정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화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리: 김 재창(혜성여고 교사)

사진설명 : 프랑스 혁명 당시의 신분 구조는 성직자와 귀족을 위해 98%의 제3신분이 희생당했다.

<제 59회 인문학 강좌>

* 제목 : 사진으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Ⅱ

* 시간 : 2011년 9월 8일 (목) 오후 7시

* 장소 : 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 17층 강당

* 연사 : 성공회 대학교 한홍구 교수

* 주체 :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가는 사람들의 모임

노원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민중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최초의 혁명 ​

프랑스혁명이 근대의 여명기에 일어난 어느 시민혁명보다도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근대의 길목에서 일어난 그 어떤 혁명들 보다도 자유,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오늘날의 근대 민주주의가 비로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다수의 참여를 통한 다수의 판단이 소수 귀족이나 절대군주에 의한 판단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낡은 지배의 전통은 깨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혁명에 참가한 하층계급들의 모습이 미화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때로 무분별하고 잔인한 폭력의 행사, 종교와 도덕을 차갑게 멸시하는 반인륜적 범죄 집단과도 같이 보이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세력들에게 항상 극도의 경계대상이었고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혁명과정에서 반동의 물결의 흐름을 결정한 것도 다름 아닌 민중의 무리였다. 그랬기 때문에 지배세력들도 이제는 민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으며 지배 원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만 했다. 입헌군주제로 귀결된 초기혁명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는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이라 불리는 특권적 지배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이 거대한 특권을 매개로 결탁한 체제였다. 절대왕정은 한 때 유럽에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의 수행과 궁중 사치 그리고 특권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민생고와 재정 위기, 사회 불평등 심화라는 현상을 점차 고착화시켰다.

프랑스혁명은 루이 14세 이래 각종 전쟁의 수행으로 깊어지기 시작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새로운 조세 수입원을 찾기 위해 1789년 5월 국왕이 소집한 삼부회가 발단이 되었다. 삼부회의 소집은 당시 불만이 팽배해 있던 부르주아지계급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물꼬를 터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삼부회 의원들은 의회에서 신분적 특권을 없앤 개인별 투표 방식 채택을 요구하고 그 외에도 성직자와 귀족의 면세특권 철폐, 명문헌법의 제정에 의dd한 자의적 체포 금지,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국왕과 귀족들에 맞서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에 국왕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하층계급의 봉기가 없었다면 혁명은 아마 여기에서 중단되었을 것이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중심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주도하던 혁명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저항이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문제와 같은 민중들의 사회적요구가 개진되기 시작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했지만 왕정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동원을 불가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은 여기서그치지 않고 농민혁명으로 확산되었다. 흉작과 무거운 세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영주의저택을 습격하여 봉건문서를 불태우고 고리대 상인들과 관리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선언했고 이어‘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입각하여 국민의회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 길드 폐지, 행정과 사법제도 정비 등을 단행했고 1791년 9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791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국민의회 내부에는 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는 파에서부터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급진적 공화정을 주장하는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등의 다양한 정치적 색조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791년헌법은 권력분립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규정했다. 여기에서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시민들에게 만참정권을부여했고새롭게구성할입법의회를간접선거로구성하기로결정했다. 혁명의 진전과 공포정치의 명멸 프랑스혁명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 계기는 반혁명의 위협이었다.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귀족들이 국경지대에서 계속 반혁명의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국왕 또한 입헌군주제를 내심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외국의 왕정들과 비밀서신을 주고받았다. 이런 중에 국왕은 1791년 7월 20일외국으로탈출을시도하다발각되어파리로끌려오는사건이발생하기도했다.

자국으로 혁명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군주는 1791년 말 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패전을 거듭했다. 파리는 반혁명군의 일촉즉발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의 혁명적 열정이 폭발했다. 7월 11일에는‘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발표를 듣고 전국 각지에서 의용군이 몰려들었다.

마침내 민중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힘입어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혁명적 열정의 폭발은 급진파의 득세를 가져왔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과 같은 자코뱅파 인사들이 부상했다. 8월 10일 파리 민중들은 왕궁을 습격했고 의회는 왕권의 행사를 정지시키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로운 의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입법의회를 대신하여 국민공회가 출범하였다. 민중들의 정치적 동원이 시작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제 1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로베스 피에르 1793년 12월 새로운 혁명정부가 조직되었다. 혁명정부를 주도한 것은 공안위원회라는 기구였다. 공안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12명이 구성되었다. 공안위원회는 비상독재체를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혁명정부는 도시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최고 가격제와 징발제 등 혁명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1793년 말부터 전세가 호전되었고 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국이 안정되면서 공포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국내외 정세의 안정은 공포정치의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공포정치의 지속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정부 주도자들과 민중운동의 유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틈을 타서 1794년 7월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켰다.

부르주아지공화정 수립과 좌우로부터의 도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로베스피에르의 처형과 함께 혁명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1795년에는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보통선거를 폐지하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거권을 줄 것을 규정하였다. 또 영국을 본떠 양원제를 도입하고 1인 독주를 막기 위해 5인 총재단의 집단지도체제를 규정하였으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총재정부는 혁명파와 반혁명파 양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식량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민중의 저항운동이 재개되고 이와 결합한 산악파 잔여세력이 국민공회 의사당에 침입하여 국민공회가 이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대외전쟁으로 인해 경제난과 재정난이 가중되고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사회불안은 계속되었다.

1797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전쟁의 지속은 프랑스 사회에서 군대의 지위를 크게 강화시켰다. 전쟁이 체제를 먹여 살렸고 그와 함께 군대는 공민정신에 투철한 혁명군에서 장군을 추종하는 정복군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전쟁 속에서 군대의 지위 강화와 함께 야심가가 출현했는데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보나파르트는 1797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여 민중들의 환호를 받게 되었다. 급기야는 1799년 11월 18일 보나파르트가 의회 내부의 보수파 세력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에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 세력의 사회적 우위가 확립되고 혁명의 시기가 종언을 고했다 .

보나파르트 독재와 프랑스혁명의 전파 ​ 나폴레옹의 대관식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보나파르트는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정정부를 수립했다. 보나파르트는 비록 보수파 세력과 협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한 후 프랑스혁명의 성과들을 제도화하는 여러 조치들을 단행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하고 경제적으로도 프랑스은행을 설립, 관세제도를 개혁하였다. 또 나폴레옹법전을 편찬하여 사유재산권 보장, 신앙의 자유, 노동과 계약의 자유 등을 명시한 새로운 시민 사회의 원리를 법적으로 성문화함으로써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고자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전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당시 싹트고 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1802년 종신집정으로 취임하고 1804년에는 국민투표로 제정을 수립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황제 즉위 후에도 그는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한 때는 7왕국, 30공국을 지배하는 유럽의 제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들에 대한 대륙봉쇄령의 무리한 강요와 프랑스 압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각 나라에서 일어나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근대 민주주의의 문을 연 프랑스혁명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

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혁명의 가장 철저한 수준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이라고 불리는‘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에서도 나타나듯이 프랑스혁명은 경제적 개인주의에 주로 편중되어 있던 종래의 자유 이념을 평등, 우애의 이념과 결합시켜 훨씬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만들어 내었다. 철학자 루소(1712~1778)는 프랑스혁명에 중요한 이념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사회계약론』 이라는 저서에서‘국가는 그 전체 구성원과 계약을 통해 성립되며 그 사회 안의 모든 개인은 사회구성원 전체 의사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 구성원 전체 의사를 일반의지라 불렀고 그것의 표현이 바로 법이며 정부는 이를 집행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루소의 사상은 인민주권론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쟝 자크 루소 프랑스혁명의 이념은‘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신체,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인민주권의 원칙(선언 제3조), 모든 공직의 선거(선언 제6조), 권력분립에 입각한 대의제(선언 제16조)와 같은 폭넓은 정치적 권리를 천명하였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은 평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함께 평등에 의해서 보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글/고원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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