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실존주의 |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최근 답변 17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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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였습니다.
김재희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를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91xkgv04g\u0026t=4s
https://www.youtube.com/watch?v=MJ2PcOGvH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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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사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양식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인간존재론이다. 인간의 절대 자유를 주장하며, 인간은 자신의 결단과 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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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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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실존주의 – 브런치

실존과 윤리의 통합을 시도하다 | 1. 장 폴 사르트르와 2차 세계대전 사르트르는 대단히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실제로 그는 실존주의의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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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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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58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생글생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며 인간의 주체성 강조 인간은 선택을 통해 스스로 본질을 만든다는 거죠. 사르트르 문학가로 더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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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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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 나무위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는 20세기의 문학 및 철학 사조이다. 전후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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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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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창] 사르트르의 실존과 본질 – 시니어매일

프랑스의 소설가 장 폴 사르트르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부부 … 여기서 계약결혼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가치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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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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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 프레시안

사르트르는 어떻게 하면 자유를 잃지 않고, 자유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르트르 철학은 자유와 존재, 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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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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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장 폴 사르트르 | 문예출판사- 교보문고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사상이 담긴 | 철저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하면서 철저한 휴머니즘적 실존주의를 역설하는 샤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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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5/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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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이광래 – 네이버 블로그

이광래, 『프랑스철학사』, 문예출판사 – 에서 사르트르를 다룬 부분입니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實存哲學’. 1. 실존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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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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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르트르 실존주의

  • Author: 5분 뚝딱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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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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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 – 사르트르[1]

사르트르의 모습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양식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인간존재론이다. 인간의 절대 자유를 주장하며, 인간은 자신의 결단과 의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인간다운 삶이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삶이며, 윤리적인 삶이란 자유로운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신에게 철저하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제시한다.[2]

인간의 존재 [ 편집 ]

사르트르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은 왜 잔혹해졌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된다.[3] 사르트르 이전의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고전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것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인간 이성이 역으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즘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이었다. 이 때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주장하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를 향해서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4]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이라고 가정하면,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확정 지어지지 않았다. 즉,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 생각하여 혼자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다.[5]

자유와 책임 [ 편집 ]

자유는 우리와 별개의 것이어서 우리가 자유라는 속성 또는 성격을 우연히 소유할 수도 있고 결여할 수도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 있다는 점에서 자유는 우리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자유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는 하등의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존재이면서 처음부터 우리의 본성을 물들이는 것에는 자유 이외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기에 달려 있으면서 우리의 존재를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6]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단지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존재란 사명이다. 우리는 존재라는 사명의 수행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역시 우리의 책임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라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각자는 무엇이 올바르고 바람직한지를 홀로 결정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은 피하지 못한다.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책임도 본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7] 따라서 모든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에는 늘 불안이 함께하고 사르트르는 불안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되며, 불안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불안을 직시하고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안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어 한다.[8] 사르트르는 이렇게 자유로운 선택에서 회피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개인 안에서 책임을 찾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나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도 ‘나의 책임’인 것이다.[9] 책임은 맡거나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에게 완벽한 책임감이 없는 완벽한 자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좋지 않은 것은 스스로에게도 좋을 수가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모든 인류는 내딛는 한 걸음에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 사람의 행동은 전체 인류를 묶는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으로 자신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본보기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발걸음, 모든 행동, 모든 날은 중요하다. 이렇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남의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거나 주위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도 아닌, 처음부터 책임과 의무를 함께 생각하는 적극적 자유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의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주변을 함께 생각하는 참된 실존을 말한다.[8]

타인 [ 편집 ]

세상의 모든 것은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나뉜다. 바위, 나무, 짐승 등 생각이 없는 것들이 즉자적 존재다. 이와 다르게 대자적 존재는 생각하는 인간을 뜻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왜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밝혀야 한다. 즉, 실존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이때 다른 사람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10] 이와 관련하여 사르트르의 유명한 작품 희곡 ‘출구 없는 방’에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1965년 희극과 관련된 강연에서 사르트르는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1] 그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의존해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타인의 존재는 우리의 존재처럼 커다란 확실성이다. 우리는 자신을 인식하는 인간임을 발견하는 동시에 인간으로 간주하는 타인을 발견한다. 타인은 나의 존재를 위해, 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없어서는 안된다.[5] 다시 말해, 우리는 타인 즉 타자의 시선과 마주침을 통해 자기 의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자기의식인 ‘주체’는 수동적으로 출현한 것이다. 이는 자발적인 반성적 의식 속에서 나타난 주체와는 다르다. 반성적 의식 속에서 출현한 주체는 자기의 절대적인 자유의 상태를 확보하고 능동적인 자기 선택에 의해 그 내용과 본질을 채우지만, 타자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주체는 그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어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를 제한받기 때문이다.[12]

앙가주망 [ 편집 ]

앙가주망(Engagement)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가 자주 사용했던 용어로 좁게는 학자나 예술가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넓게는 인간이 사회, 정치 문제에 관계하고 참여하면서, 자유롭게 자기의 실존을 성취하는 일을 의미한다.[13] 직접 사회에 참여, 즉 앙가제(s’engager)하여 조금씩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 선택의 폭, 행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며, 이는 사르트르의 ‘행위주의’를 이루는 중심 개념이다. 다시 말해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켜라.’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으로 대변되는 실존주의적 윤리학의 궁극적 목적이자 모토였으며, 사르트르를 사회비판과 사회참여로 이끌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지구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대자존재’로서의 인간만이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며 행위, 사회참여, 즉 앙가제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르트르에게 있어 인간존재, 실존의 앙가주망이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탕은 곧 의식이라고 볼 수있다.[14]

자기기만 [ 편집 ]

‘자기기만’의 말 그대로의 뜻은 ‘(자기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다.[15] 도덕이 인간의 삶을 성공적인 삶과 실패의 삶으로 나누면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권하는 일을 그의 기능으로 한다면,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실패의 삶이란 자기기만의 삶인 반면, 성공적인 삶이란 자기기만을 극복하고 인간 본래의 자유를 쟁취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에서는 자기기만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구상하고 추구했던 도덕은 자기기만의 극복을 통한 인간 본래의 자유 쟁취를 겨냥한다.[16] 자기기만은 대자가 자신의 ‘사실성’과 ‘초월’, ‘세계의 한가운데 존재’와 ‘세계-내-존재’, ‘대사존재’와 ‘대타존재’ 등등을 자신의 형편이 되는 대로 이용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 맞짝들 중 어느 쪽이든 한편과 즉자적인 방식으로 합치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기만이 가능한 것도 자기기만을 하는 대자의 구조가 순간 <그것이 있어야 할 바의 것이지 않고, 그것이 있지 않아야 할 바의 것이다>라는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17] 쉽게 말하자면 보통 우리가 말하는 ‘핑계’와 비슷하다. 자기기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은 자기기만의 본질이 핑계임을 잘 알려준다.[15]

“자기기만의 첫째가는 행위는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존재하고 있는 바 그대로의 모습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15]

근본적으로 자신이 수행한 결정(선택)이 실은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핑계 대는 것, 자기는 ‘수동적’이었다고 변명하는 것, 더 정확히는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핑계 또는 거짓말이 지신이라고 스스로 믿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릇된 믿음, 즉 ‘자기기만’이다.[15] 자기기만은 자유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즉, 자기기만은 의식의 방어적 태도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기만을 하면서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해도 인간은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따라서 자기기만을 극복하여 자유를 쟁취해야만 한다.[16]

사르트르 실존주의

침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결국 죽기 전까지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라는 신념이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탓에 그의 실존주의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 2000년에 즈음 들어서라고 합니다. 그의 이념이 잘 드러난 사건은 그 스스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건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자가 수여하는 상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실존주의적 신념도 가미되어 있었는데, “그 누구도 죽기 전까지 평가받을 자격은 없다.”라는 말도 남겼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다른 오점(?)중 하나는 대단히 유명한 난봉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시라는 신체적 콤플렉스를 충분히 커버칠 수 있을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머감각이 뛰어났다고 하더군요. 그 탓에 이미 중학교 때 동정을 뗐다고 하며, 수많은 여배우들과 연애, 원조교제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 보부아르와 살 때는 그의 여제자와 셋이서 한 집에서 살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58)]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며 인간의 주체성 강조

인간은 선택을 통해 스스로 본질을 만든다는 거죠

사르트르

● 기억해주세요

사르트르는 ‘제도화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로 수상에 대한 거절 이유를 밝히긴 하였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권위에 의해 규정된 자신으로 살기보다 글을 통하여 자유롭게 의미를 창출하는 실존주의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의 실존주의 철학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명언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 한 문장에 실존주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느니만큼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실존주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르트르의 이 명언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물과 대비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사물의 존재 양식과 달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개념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이로부터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인간의 주체성을 이끌어내고 있다.그렇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먼저 그 반대인 ‘본질이 사물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교실의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교실에 존재하기에 앞서 그 책상을 제작한 사람의 머리 속에 그 본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무엇 때문에 이 의자를 만들며, 의자의 재료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와 같은 의자에 대한 구상이 제작자의 머리 속에 먼저 그려진 다음 그에 따라 의자는 제작된다. 이 경우 의자가 실재로 존재하기에 앞서 의자의 본질이 먼저 존재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의자에 있어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인간의 존재 양식은 사물의 그것과 다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은 사물과 달리 본질이 규정되지 않은 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는 곧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으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의 미래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을 통해 끝없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에 있는 C(Choice)이다”는 사르트르의 또 다른 명언이다. 물론 만일 신이 존재하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의 경우도 사물과 같이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마음 속에 인간을 창조하려는 의도와 구상이 앞서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은 인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만들어갈 뿐이다. 인간은 ‘지금 여기’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주체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동시에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한 말의 의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진정한 휴머니즘은 인간의 가치 자체보다 인간이 가치를 창출하고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말은 그저 주어진 대로 남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맞는 말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인간의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삶은 인간이 선택해 의미를 부여할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존적인 삶은 인간의 실존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선언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실존적인 삶에는 근원적인 감정인 불안이 내재해 있다. 비록 실존은 자유롭지만 실존적인 삶에는 선택, 책임에 따르는 불안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실존적 인간이 된다는 것에 따르는 부담의 무게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은 인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만들어갈 뿐이다.김홍일 < 서울국제고 교사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1960년대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1980년에 죽었지만 사르트르 동시대와 이후의 사상가들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경우처럼 현대에 주목받는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럼 지금 사르트르가 다시 부활하는 것인가? 부활의 여부는 모르더라도 확실한 것은 사르트르는 큰 저수지와 같은 존재로서 어디에도 물을 댈 수 있는 사상을 담은 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는 2013년을 사르트르와 함께 시작했다. 이순웅 교수는 이 강의를 통해 사르트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얘기를 담은 철학자임을 알려줬다. 사실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미진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실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사르트르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는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사르트르ⓒ위키피디아

▲ 존재와 무ⓒwww.library.usyd.edu.au

▲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음 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0강 : 2013년 1월 29일 레비나스 :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문성원, 부산대 교수)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사르트르의 철학에는 베르그송의 영향이 많았다. 지속의 개념이 그것이다. 공간화한 규칙적 시간은 의식 속에서 느끼는 참된 시간(지속)과 다르다는 것은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세계를 설명할 때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으로 설명한다.사르트르 철학은 넓게 보면 의식의 철학이고 주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현상학은 대상을 향해 있는 의식으로서 대상과 관계 맺는, ‘무엇인가와 관계 맺는 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코기토(cogito)’ 명제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자동사의 ‘think’가 아닌, ‘~에 대해서 생각’하는 ‘think of’의 의미이다. 이후 사르트르의 현상학에서는 후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사르트르와 관련하여 궁금한 부분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사르트르의 철학이 퇴색 되었는지의 문제이다. ‘구조주의(Structuralism)’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다.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 구조주의이다.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는 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는 것인데 이순웅 교수는 ‘post’를 ‘후기’로 번역할 때와 ‘탈(脫)’로 번역할 때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후기 구조주의’로 번역하면 주체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주체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럴 경우 주체가 없어 자칫 허무하고 공허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탈구조주의’는 ‘주체’를 상대적으로 중요시 하여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을 얘기한다. 지젝(Slavoj zizek, 1949~)이나 바디우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구조를 장악하지 못하면 인간의 주체에 대해서도 장악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사르트르 철학의 중심은 인간이다. 사르트르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은 왜 잔혹해졌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잔혹한 존재인가?’ 그리고 ‘잔혹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사르트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집중을 하게 된다.그런데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 간의 싸움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은 유럽을 위시한 서구 제국주의 사이의 대결이었고 식민지라는 시장을 쟁탈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 전쟁에서 제국주의의 대상이 된 식민지 국가의 입장은 배제되어 있었다. 결국 지배국가인 자본주의국가 간의 싸움이었지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쉽게 읽었던 것처럼 정의의 연합군과 세계를 지배하려던 악마 같은 독재국가의 대결이 아니다. 결코 선과 악의 대결은 아니었던 것이다.사르트르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은 과연 어떤 인간이며 자본주의를 사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런 면은 사르트르가 소련의 스탈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았고 이 계기가 인간의 문제에 대해 천착해 가는 과정이면서 기폭제가 되었다. 『존재와 무』(1943)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잔혹한 존재라서 절망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끈을 놓지 않는다. 그의 책에는 이런 이중적인 문제의식이 보인다.『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관은 그 이전의 저작인 『구토』(1938)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평생 몸 편히 살 수 있는 ‘이자 생활자’인 주인공 ‘로캉탱(Roquentin)’이 자기 존재의 ‘무상성(無償性)’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주인공은 이른바 이중적 상태의 인간이다. 이자만 타먹는 무노동의 밥벌레와 같은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노동을 할 수 있는 도시 속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사르트르는 이런 인간은 ‘죽은 인간’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주인공 로캉탱은 여기서 벗어나려는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는 여기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정신적 자유의 무상성과 의식의 명석함을 자각하는 과정에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인간을 정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자각하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conscience적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구토’는 이 의식이 ‘존재’ 그 자체와 대면한 때에 반응하는 것이다.’현상학(phenomenology)’에서 말하는 의식은 ‘무엇에 관한 의식’이다. ‘의식’과 ‘의식의 대상’이 있다. 이 둘의 관계를 규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또는 존재를 ‘지향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에는 ‘지향성’이 있는 것이다. 의식은 ‘존재’가 있는 한 ‘존재’를 지향하는 의식이기도 해서, ‘구토’는 ‘존재의 출현’과 ‘존재를 지향하는 의식의 출현’ 두 가지가 서로 겹쳐진 체험이 된다.존재의 우연성이란 필연성과 반대의 의미이다. 미리 정해져 있는 방향에 의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진리의 체계와 법칙을 상징한다. 간단한 예로 우리가 알고 있는 3단 논법의 체계가 필연성의 체계를 축약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변화와 유동적인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연성의 세계는 유신론적 세계질서와 관계한다.이쯤에서 신이 미리 세계를 ‘설계(design)’했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이순웅 교수는 “신 존재 증명에는 ‘목적론적 증명’이 있는데 어떤 사물의 설계자를 상정하고 그 사물의 완성을 ‘end’라고 할 때, ‘end’의 어원은 ‘목적’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이란 ‘신의 목적’에 도달했다는 뜻이 된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결국 신의 목적을 향한 기독교인들의 ‘기다림’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한 때 유행했던 ‘휴거(携擧, rapture)’ 따위의 소동이 바로 이것이다.사르트르는 신이 설계한 세계의 특성으로서 목적, 본질은 없으며 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 사르트르는 보통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인간이 우연 그 자체인 어떤 존재와 만나고, 인간은 한결같이 우연을 지향하는 의식 그것으로 있으며, 따라서 인간도 또 우연으로서 무상인 것이 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존재에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없다. 존재에는 원인도 없으며 목적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우연과 무상적 존재로서 인간이다. 인간은 정해진 길을 따라 순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선택하고 결단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르트르에게는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사르트르는 어떻게 하면 자유를 잃지 않고, 자유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사르트르 철학은 자유와 존재, 사실(거기에 있는 것)과 초월(transcendance, 무언가 되기 위해 자신을 만드는 능력)의 결합을 얻으려는 것이다.사르트르는 “자유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유일한 입법자라는 것을 알고 인간은 늘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며 살아가며 자신을 둘러싼 대상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유는 이 ‘초월성’과 ‘주체성’의 결합으로 성립하며 이 두 가지의 결합이야말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헛된 ‘기투(企投 또는 投企, projeter)’라고 사르트르는 명명한다.사르트르는 초월을 추구하지만 초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초현실주의는 다만 부정만 할 뿐, 건설할 만한 적극적인 제안을 갖고 있지 않다. 주관과 객관 둘 다 부정하며 그 두 가지를 교차시켜 ‘혼합’시킬 뿐, 조금도 ‘종합’하려 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며 그저 ‘불가능’을 꾀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후설에 의하면 “의식이란 그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찾고 지향하고, 무언가를 향하려고 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의식이란 그 본성상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후설의 지향대상은 의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의식의 내용도 의식 내부에 있는 것, 의식에 내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생각에 반대한다. 대상이 의식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의식 바깥에 있다. 이것이 후설과 사르트르의 현상학 입장에 대한 차이이다.사르트르에 따르면 대상은 의식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의식으로부터 불거져 나온 쓸모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의식의 본질에 규정되지 않은 우연·무상인 것이다. 누가 결정했든지 간에 (신이든 인간이든) 어떻게 어떤 일이든 먼저 일반적인 본질이 있고, 거기에 맞추어 삶의 방법을 생각하는 본질주의 그 자체를 거부한다.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후설과 구별되는 사르트르 현상학의 특징은 ① ‘대상이 의식 밖에 있다는 것’, ② ‘본질에 대한 거부’, ③ ‘본질적인 직관(intuition: 실험, 관찰을 통한 감각적 경험을 작동시켜 알아내는 앎의 상태)에 대한 반대’ 등을 들 수 있다.사르트르는 존재에 있어 세 가지 영역을 설정한다. 먼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즉자존재(卽自存在, Being-in-itself)’와 ‘대자존재(對自存在, Being-for-itself)’가 그것이다. 인간은 ‘즉자존재’로도 살 수 있고 ‘대자존재’로도 살 수 있다. 『구토』에서 로캉탱처럼 즉자의 무상성을 취한 채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자유로이 사는 것도 가능하고, 반면 인간은 즉자존재의 우연성에 도전하여 이 우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마주 놓고,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스스로 입법하고,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 가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간단히 이 세상의 존재를 나누어 볼 때, ‘인간(나, 타자)-사물’로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나-타자-사물’로 보면 세 가지가 된다. 즉자존재는 타자를 설정하지 않아서, 예를 들어 속이 꽉 찬 쇠구슬에 비유할 수 있는데 자기라는 존재가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서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개는 의식이 없어서 고민도 없다. 이것은 즉자존재다. 반면에 대자존재로서 인간은 텅 빈, 비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그렇다면 대자존재는 무엇인가? 대자존재는 ‘자기를 존재 바깥에 두는’ 존재이다. 비어있다는 것이 중요한데,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순웅 교수는 ‘의식’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비어 있는 결핍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자’ 존재는 늘 ‘결여자’이며 동시에 ‘가능성’과 짝이 되어 존재한다. 인간은 내가 나를 항상 변신시켜 나가고, 바깥으로 던져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존재가 타자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구토』에서 로캉탱이 대자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상업도시’를 바라보며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삶이 없음을 자각하고 ‘구토’를 통해 그 자각에 대해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순웅 교수는 “‘need’라는 말은 필요를 의미하지만 ‘결핍’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어서 결핍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변화, 운동, 미래, 발전은 없다”고 한다. 즉 우리는 결핍을 알기 때문에 필요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또 대자존재의 대자의 번역인 ‘對自’와 ‘Being-for-itself’의 ‘for’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내 던지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존재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존재·실재·현존이라는 의미의 ‘existence’의 어원은 라틴어 ‘existere’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ex(~로 부터)’+’sistere(서다, 존립하다)’의 합성어이다. 자기 자신을 자기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본래 의미이다.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태로, 대자의 가능성을 잃는 법 없이, 동시에 즉자의 존재성과 일치하는 상태, ‘대자-즉자’의 상태를 바랐다. 그러나 인간은 기투가 실현되었다고 해도 기투의 실현과 동시에 가치를 잃는다. 따라서 대자인 채로 즉자인 것, 가치를 보존하면서 실현을 쟁취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실현의 어느 부분에는 가치가 없고, 가치의 어느 부분에는 실현이 없다. 존재와 가치가 일치된 것은 신의 경우이다. 신은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존재인데, 인간은 이 상태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대자-즉자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유를 향한 기투를 멈출 수 없고, 가치의 존재성을 바라는 것을 그칠 수 없다. 실현을 기대하지 않는 이 이로움 없는 노력을 두고 사르트르는 ‘인간은 하나의 이롭지 못한 수난(passion)’이라고 했다.마지막으로 ‘대타존재(對他存在, Being-for-Others)’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로서의 존재를 말한다. ‘타인’은 ‘타자(他者)’ 자체로서 떨어져 나간 존재가 아니다. ‘타자’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타인이란 나와 똑같은 개체로 자유로운 주체이다. 그래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이 때 자유로운 가능성을 가진 두 주체는 ‘시선’을 주고, 받는 것의 대립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일종의 투쟁 관계이다. 사르트르는 이 경우 다른 한쪽의 인물은 ‘시선’의 대상이 되어 ‘물화(物化)’되고, 사물과 같은 것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경우 두 개체의 자유가 공존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이순웅 교수는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나는 지금 방 안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을 보고 싶다는 유혹에 져서,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 나는 열중해 있었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소리가 들려와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서서 나에게 ‘시선’을 주며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순간적으로 전신이 부끄러움 덩어리로 바뀐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타자’가 서 있었다.”이순웅 교수는 여기서 말하는 ‘시선’이 푸코(Michel Paul Foucault, 1926~1984)가 말하는 시선과 유사하다고 한다. 근대인은 자발적 복종을 오히려 자유롭다고 여기는데 권력자가 누구보다 먼저 ‘시선’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내가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의 실상이다. 이 때 타자는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 주는 필수불가결한 매개자가 된다. 인간은 여기서 내가 타자와 동화되거나 타자를 초월하거나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대타존재에 대한 논의는 사르트르의 도덕론을 내포한다.대타존재에 있어서 가령 남성이 ‘시선’을 독점하고, 자유를 독차지한다면, 여성은 ‘물(物)’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르트르는 “마치 ‘지옥이란 바로 타자를 일컫는 것’이다”라고 했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은 대타존재로서의 인간이 권력구조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구도가 사르트르에게는 인간과 인간의 차원에서 서로 시선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려는 개체의 투쟁으로 해석되는 것이고 푸코로 계승되면서 권력과 시선의 주체 관계로 해석되는 것이다.사르트르는 철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지난 한 세기 동안 문화의 아이콘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르트르의 철학 강의나 그가 행보하는 자리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고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와는 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많은 변화를 유발시키기도 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사르트르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사실 사르트르는 극복되지 않았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나 푸코의 얘기들도 모두 사르트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주체의 문제도 그렇다. 현대철학에서는 주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죽었다고 말했고 포스트구조주의도 주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후사건적 주체(後事件的 主體)’라는 말로 어떤 사건 이후 형성되는 주체에 대해 언급한다.예를 들어 세계대전의 경우 이기적 욕망으로 계산적 이성을 가진 자들끼리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전쟁 자체를 통해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고 비약적인 발전도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 전반의 모든 내용을 화해와 담합이라는 봉합 없이, 끝까지 놓지 않고 계속해서 재평가의 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이 중요하다. 폭 넓게 보면 과거 동학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의지의 인간들이 이런 일을 수행하고 이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중심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상은 이들로부터 올 수 있다. 이런 부분 역시 사르트르의 영향이 없지 않다.사르트르가 얘기한 자유와 초월은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가 그린 ‘마르시아스((Marsyas)’의 표정에 나타나는 듯하다. 신에게 도전하여 살갗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고 있는 마르시아스의 표정은 역설적으로 아주 평온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1905년 북경에서 찍혔다고 전해지는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cent morceaux)’이라는 사진에서 형벌을 받는 죄수는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 초월하여 황홀경에 빠진 듯하다.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인가?이순웅 교수는 사르트르의 ‘대자-즉자적 삶’은 사실 고문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어려운 사안일 것이라고 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늘 피할 수 없는 선택과 결단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의 의식이 깨어있어 이런 어려운 선택과 결단을 할 수 있는지 그 상태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아마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의 경지가 아닐까, 말하자면 목적과 본질이 없어 끝이 없는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교보문고

21세기 실존주의(實存主義)철학이 차지하는 공간은 20세기와 비교해서 흔적이나 있는지 모를 정도다. 마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덤불처럼 초라해 보인다. 분명 실존주의는 큰 바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씨조차 사라져 다시 피울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실존주의철학은 유용하다고 생각한다.19세기에 초에 태어나 4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 덴마크 루터교회를 비판하면서 자유주의 그리스도교를 외치던 코펜하겐의 종교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를 흔히 실존주의철학의 창시자로 추앙한다. 1846년 발표한 그의 저서〈철학 단상에 대한 결론적 비학문적 후기, 모방적 감상적 변증법적 구성, 실존적인 기고〉에서 그는 ‘정신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이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라고 주장했다. 후대 철학자들은 이 저서를 가리켜 현대 실존주의철학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한다.여기서 반드시 알아야하는 사항은 우리가 실존주의(實存主義)라 함은 ‘인간의 존재성격을 실존-현실존재-이라고 규정하고 이 실존을 자기 사상의 중심에 놓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실존주의철학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때 실존(實存)이란 사물(존재자)의 본질(존재)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인 현실존재의 존재 성격이며 이 현실존재를 실존이라 칭한다.실존주의 철학은 흔히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그 계보를 나누고 있다. 칼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을 유신론적 계보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를 무신론적 계보에 올려놓는다. 비록 유무의 분관(分觀)은 있지만 두 갈래 실존주의 철학의 공통점은 인간의 주체성에서 모든 것이 출발함을 공통적으로 사유한다.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를 통해 그의 실존철학의 핵심을 정리 요약한 것과 달리, 라는 책은 저자 사르트르가 추구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실존행위의 안내서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의 저서 의 요약을 이 책 속에서 찾으려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는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실존주의철학의 인식과 사유의 형이상학적 고찰이고, 이 책은 실존주의철학의 행동지침서에 가깝기 때문이다.1.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하는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신이 없다면 적어도 본질보다 앞선 하나의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는 있어야 한다.’그러한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이 먼저 있어야만 세상에서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다소 과격한 인간중심적 원칙으로 보이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을 실존주의 제일원칙으로 삼는다. 이것이 인간의 주체성(主體性)이다.그런 인간은 다음과 같은 지향(志向)에 의무를 가진다. 인간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존재의 주인이 되며, 인간은 다른 타인에 대해 책임을 가지게 된다.그런 실존적 인간은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며 인간은 당연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은 선택을 선택함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모범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실존적 인간이다. 그러나 무신론적 실존이라 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선(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로운 인간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주장한다.2.앙가주망.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유로운 결정을 하는 존재다. 그리고 현실은 인간의 행위 속에 있으며 인간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주체자이며 그의 행동의 전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그의 삶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삶에 뛰어들어 자기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그려내며 자기가 그리는 모습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사르트르에 따르면 사람이란 자기가 영위하는 것의 종합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존재다. 그런 인간은 결정이라는 선택 앞에 놓여 있으며, 인간은 ‘생의 적극적 참여’인 앙가주망 앞에 던져진 존재다. 인간은 항상 선택 앞에 놓여 있으며 인간이 알아야할 것은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역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택을 부르고 선택은 결과를 만든다. 여기서 인간은 선택에 앞서 자기의 시튜아시옹에 봉착하게 되며 그 시튜아시옹을 변명이나 구실로 도피하게 되면 불성실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인간은 자기참여인 앙가주망으로써 비로소 어떤 인간형을 선택하고 이에 따라 자기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고, 그 앙가주망은 어떤 시대에나 어느 누구에게나 항상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시절 그의 앙가주망 정신은 유럽 대학캠퍼스에 광풍을 몰고 와 학생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배경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적극적이고 실존적인 인생의 개척인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의 앙가주망은 나의 자유인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원해야 하는 것이다. 즉, 타인의 자유를 배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야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의 자유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유다.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사르트르에 따르면 휴머니즘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첫째가 인간을 목적으로 삼고 최고의 가치로 삼는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사르트른 이런 휴머니즘은 인간의 유아독존(唯我獨尊)적 휴머니즘이고 원치 않는 휴머니즘이라고 단정한다.둘째 딴 의미의 휴머니즘이다.이것은 사르트르식 실존 방법적 휴머니즘이다.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投射)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실존케 하는 휴머니즘이다.’ 이는 앙가주망적인 선택과 연관된 것으로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해방이든가 어떤 일정한 사건의 실현이든가 그러한 것을 자기 자신 밖에서 찾고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 정의한다.이것을 통해 사르트르가 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주장했는지 밝혀지는 것이다. 인간은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하며 그러기 위해 올바르게 선택하는 인간이 되어야하고 선택을 위해 시튜아시옹을 거부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하며 적극적 참여로 앙가주망적인 인간이 되며 이때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실현하는 것이 비로소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그의 실존주의가 왜 휴머니즘인지 밝혀지는 것이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자신 이외에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의 철학에 철저한 모습을 보여준다.이상이 이 책에서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논리 전개과정이 매끄럽지 않고 꼼꼼한 철학적 논리보다는 자기중심적 궤변(詭辯)과 아집에 가까운 변론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점이 아마도 장 폴 사르트르의 넘치는 매력일 것이다.호전적인 논객으로서 카뮈와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실존주의 문학가이자 철학자였던 그가 그의 앙가주망을 행동강령으로 표현하고자 쓴 책이 바로 이다. 언제나 적극적인 앙가주망을 외치던 그답게 현실문제에 대해 항상 행동하는 지식인의 양심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 사르트르다.실존주의 철학은 20세기를 풍미했던 특유의 사상이다. 그것은 19세기말 급변하는 환경과 일이차 세계대전으로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던 사람들을 위한 사상이며 유럽의 강한 전통이었던 합리주의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항의 사상이기도 하다. 이런 실존주의철학을 유럽전역에 강타하게 만든 책이 라는 사르트르의 강연을 탈고한 책 이다.사르트르는 그의 대작 를 발표할 때 자기의 사상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실존의 철학’이라고 했다. 칼 야스퍼스는 자기의 철학을 실존철학이라 명명했으며 자기의 실존해명은 실존을 대상으로 하는 실존주의는 아니라고 했다. 하이네만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에 담긴 사상을 실존철학이라 칭하며 처음으로 실존철학을 언급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즉각 거부하고 자신은 실존철학자가 아니라 ‘존재론자(存在論者)’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또는 실존철학은 철학자에 따라 그 뜻을 달리한다.사르트르는 가고 없지만 삶에 대한 그의 앙가주망적인 적극적 실존적 자세는 21세기에도 분명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이광래

– 이광래, 『프랑스철학사』, 문예출판사 – 에서 사르트르를 다룬 부분입니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實存哲學’

1. 실존 철학자들

위대한 철학 사상이나 위대한 철학체계일수록 결코 끝나거나 완료되는 일이 없다. 위대한 철학은 언제나 연속적인 창조의 일익을 담당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시간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리고 자기 정신의 고도에 따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또는 새로운 철학적 변형들의 출현을 맞이할 뿐이다.

‘본질’, 또는 ‘이데아’들을 완전하고 참된 실재라고 간주한 플라톤의 본질주의도 역사와 실천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나 실존 및 현존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더불어 철학적 반대 명제로서 출현시켰다. 본질주의와 실존주의는 대립되지도 않고 대립될 수도 없다. 본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주의는 아주 깊은 연원을 갖는다.

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며, 또한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곧 자기가 믿는 확고한 진리를 위해 자기 자신의 실존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제는 그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정신이 시간과 환경을 달리할 때마다 어떻게 조율되는가 하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인간 사회의 성장의 각 단계에는 모두 사상과 신앙이 거기에 대응해 있다. 그것들은 그 강도가 여럿 이기는 하나 분명히 언제나 잠재해 있다가 그 어떤 순간에 이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태에 대한 수정이나 첨가로서, 또는 이 사회의 에토스적인 요소로서 등장하곤 했다.

그러면 실존주의의 현대적 형태는 이 시대와 어떻게 관계하면서 등장하는가?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그것은 철학에 있어서 한 유행으로 간주되었고, 실존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대학강단이 아닌 카페에서 토론했다. 모든 유행이 그러하듯이 실존주의도 잠깐이면 망각 속에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시, 회화, 신학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유 형식과 표현양식에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추진력을 획득했다. 짧은 기간 동안 실존주의는 현대의 어떤 철학사조보다도 폭넓은 호응을 얻으며 그 영향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세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쟁이 가져다준 비인간화 현상 때문이었다. 인간을 돕기 위해 발생했던 과학기술은 곧 나름대로의 추진력을 획득했고, 오히려 이제는 인간의 삶을 기계의 리듬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그것인 실존하는 인간적인 영역에 침투해서 인간을 기계에 속박시키고, 인간에게 조직화된 인간으로서 일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더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 특히 두차례의 세계대전은 삶에 대한 개인의 열망이나 열정을 무참하게 빼앗아 갔다. 제 1 차 세계대전은 250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특히 가장 우수한 청년의 대부분을 상실함은 물론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계기가 됨으로써 자긍심에 찬 프랑스인들에게 참기 어려운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제 2 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보다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전사한 병사와 점령 당시의 희생자,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식량부족으로 인해 굶어 죽은 사람 등으로 인구는 1939년 이전보다 훨씬 감소되었고 약 200만 호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대부분의 공장기계들은 철거되었고 프랑스의 젖줄이라 부르던 농업과 목축업이 농기구, 비료, 인력의 부족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점령비란 명목으로 독일인에게 빼앗긴 3천억 프랑의 전비지출로 감당하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을 맞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전생의 참상은 전 국토를 완전히 유린했으며 전국민의 삶의 욕망을 불안과 조절감으로 바꿔놓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개인적 삶은 그지없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불안의 심연에 빠졌으며, 스스로를 무감각하고

제멋대로인 우주에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초인간적 존재인 신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또는 인간은 애당초부터 신과 무관하였으므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실존주의는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지녀온 종교적 믿음에 대한 붕괴를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실존주의자들은 절대자에게로 다시 돌아감으로서 상처받은 인간성을 치유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든 간에 그들이 취하는 공통적 태도는 인간과 사물의 표현만을 다루는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대한 거부이다. 그들의 주장은 유사점보다 차이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는 공통된 강령은 추상과 체계적 개념을 멀리하는 것, 또는 사물 그 자체에로 돌아가는 것, 아울러 의식의 매개되지 않은 자료, 곧 내적 삶의 실재적 흐름을 범주화, 일반화, 이전에 파악할 것, 그렇게 하여 인간에 대해 이해를 인간의 실존, 실존하는 개인의 조건과 특성에 대한 이해하에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2. 사르트르의 생애와 저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 ~ 80)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장교인 Jean Baptiste Sartre였으며, 어머니는 Anne-Marie Schweitzer였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사르트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으로 가서

1916년 어머니가 재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어린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독일어를 배우면서 문필과 학문을 숭상하는 명문 슈바이처

가문의 지적 분위기를 익혔다. 1916년 행양기사인 M. Mancy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라 로셀로가 의붓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지낸 4년 동안의 생활은 의붓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1924년 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ENS)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주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1928년, 그는 교수자격 국가시험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듬해 그는 시몬느 드 보봐르와 만났다.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은 세인의 주목 거리가 된 실험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해에 두 사람은 교수자격 국가시험에 응시하여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각각 1, 2등을 차지함으로써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29 ~ 31년까지 군복무를 마친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르 아브르에 있는 고등하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곳은 그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지명인 부비유의 모델이 된 도시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그의 유학기간이었다. 독일의 베를린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그는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그는 파리에 있는 꽁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1939년 그는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1940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 이듬해 풀려나자 그는 메를로-뽕띠와 함께

지식인 저항그룹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햇다.

1945년에는 「Combat」와 「Le Figaro」의 특파원으로 두 번에 걸쳐 미국을 여행하면서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특히 그 해에 그는 훈장의 수여를 거부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1945년은 그가 창간한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es」가 처음 출판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부터 그는 정치문제를 비롯한 현실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탄원서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스라엘의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선언문도 그 해에 나온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이 일어난 이후에 그는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에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 모택동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을 더해갔다. 1964년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여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68년 5월 학생소요 때는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모택동주의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74년 꽁도르세 고등하교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철학 교수로서 대학 강단에는 더 이상 섰던 적이 없다.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직접 토로하는 것 이외에는 평생을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사르트르가 출판한 최초의 저서는 1936년에 자아에 관한 문제를 다룬 『상상력』이라는 책이었다. 1938년에는 그의 유명한 소설 『구토』가 출판되었으며, 『정서이론의 스케치』와 소설집 『벽』이 그 이듬해 나왔다. 1940년 그는 독창적인 이마쥬론인 『상상력 : 상상력의 현상학적 심리학』을 출판했다. 그가 사병생활 시절 병영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대표적인 철학저서 『존재와 무』는 1943년에 출판됐다. 그 해에는 그의 희곡 『파리떼들』이 공연되었다. 1945년에는 두 권으로 된 소설『자유의 길』과 잘알려진 희곡 『닫힌 문』이 나왔다. 그의 유명한 강연인「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행해진 것도 같은 해였다. 1947년 그는 『보들레르 연구』를 출판했고, 그의 잡지 「현대」에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간의 논문을 모아 『상황들』이라는 논문집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집은 그 뒤 1948년, 49년, 64년, 65년, 72년, 76년에 걸쳐 10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집 가운데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2>, <68년을 전후하여>, <정치학과 자서전> 등이 실려 있다. 1952년 그는 Jean Genet의 저서에 대한 입문서인『성 쥬네 : 희극 배우와 순교자』를 출판했으며, 1950년 이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로 하여금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케 하여 1960년 그 첫 번째 결실로서『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제 1권을 그는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964년에는 그의 노벨상 수상작품인 『말』이 나왔다. 1971년 그는 플로베르에 관한 방대한 연구서인 『가문의 얼간이』의 출판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까지 세 권으로 완성했다.

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1)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야스퍼스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건 모든 실존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주체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실존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실존의 확고한 우위성을 철학적 전제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의 우위인가? 그것은 사실상의 우위인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까?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성을 제조과정에 있는 한 상품에 대한 묘사와 같은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이 자르는 칼의 제조과정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이를테면, 책이든가 종이 자르는 칼 같은 것은 생각할 경우, 그 물건은 기술자가

그의 머리 속에 있는 하나의 개념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즉 그 제조과정은 종이 자르는 칼에 대한 개념에 따른 것이며, 역시 그 개념의 일부분을 이루는 선행적인 제작기술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종이 자르는 칼은 일정한 방법으로 제조되는 것이며 동시에 한정된 효용을 가진 물건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물건이 무엇에 소용되는 것인지를 모르고서 종이 자르는 칼을 만드는 사람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자르는 칼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내 앞에 있는 종이 자르는 칼, 또는 어떤 책의 현존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에 대한 기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제작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종이 자르는 칼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사용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할 때에도 그와 같이 생각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제조자나 창조자, 또는 신의 산물로 간주해 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신을 최고의 기술자로 생각하고,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가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신의 정신 속에서의 인간의 개념은 기술자의 정신 속에서의 종이 자르는 칼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은 신의 오성 속에 있는 그 어떤 개념을 구별하는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들이나 칸트 같은 사람들도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는 생각이 부정된 것은 아니다. 우히려 그들은 인간은 본성을 소유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 했다. 칸트에게 있어서도 사람은 인간성의 소유자이다. 이 사실은 사람마다 누구나 인간이란 보편개념의 특정한 표본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이러한 보편성을 통해서 원시인이나 미개인이나 부르조아나, 사람이면 모두 다 마찬가지로 같은 정의에 얽매여 있으며 동일한 기본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인간의 본질이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만나는 역사적 실존에 앞선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역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일 신이 없다면, 본질보다도 앞서는 하나의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인간본성에 대한 개념을 먼저 지니고 있는 존재도 없을 것이므로 인간본성에 대한 주어진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미리 완전하게 전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실존하고 그후에야 그의 본질적 자아로 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나타나 존재하고 떠오르며, 그 다음에야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실존한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고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본성이란 본래 없는 것이거나 그것을 착상해낼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또한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2) 인간은 자유이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면 무엇이고 가능할 것이다’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려 ‘그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모든 신이 허용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어 고독하게 되어버린다. 우선 어떠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절대로 일정하고 응결된 인간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결론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운명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유의 선고를 받은 존재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이 아니므로 선고를 받은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유인 까닭은 그가 곧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자신의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행동이 격정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러한 격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격정들에 대해서조차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들도 그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자유는 또한 전율이다. 자유는 배후에서 나를 어떤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해주는 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나를 미래로 유혹하는 어떤 형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라는 실존주의 문학자 퐁쥬의 말에 부연하여 사르트르는 ‘다만 거기서 미래라는 것이 하늘에 쓰여져 있고, 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나는 실존하는 유일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우므로, 따라서 선택해야 한다. 즉 발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보편적 도덕률도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제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병을 창피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감추려고 생각하거나, 자랑거리 또는 실패의 정당화로서 내보이려고 생각하든가 하는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 한에서는 나는 병자일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이도록 되어 있기때문이다. 또한 자유는 선택하는 자유이지만 선택하지 않는

자유는 아니다. 사실상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택은 선택된 존재의 기초이지만 선택하는 행위의 기초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동시에 부조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롭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무가 아닌 한 순수하고 단순한 필연이다. 실존은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부조리적 존재이도록 되어 있다. 한편 개인의 자유는 전인류에게로 열려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만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선택한다.’ ‘나의 거동은 전인류를

관여하는 것이 된다. 좀더 개인적인 문제에서 보더라도 내가 결혼하여 자식을 갖기를 원한다면 설사 그 결혼이 다만 나의 처지나, 정열이나, 욕망에 달려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일부일처제와 관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나 자신과 모든 타인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즉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전적이고 심각한 책임의식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여기에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로운 앙가쥬망의 절대성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 앞에서 내가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자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그런 상황에 직면해 나는 어떤 태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선험적 가치도 나의 선택을 좌우할 수 없다. 나는 오직 나를 성실하게 관여함으로써 온 인류를 관여하는 선택의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때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실한 관여이다. 불성실성은 앙가쥬망의 전적인 자유를 은폐하는 것이므로 허위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존재의 두가지 양태

사르트르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이며, 우리가 저절로 갖게 되는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우리 자신의 의식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無로서의 의식이 한 자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우리가 對自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를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로 구분했다.

즉자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존재이며, 그 자신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의식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마치 돌멩이가 존재하는 방식과 다름이 없는 존재이다. 이에 반해 대자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의식을 떠나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를 돌멩이와 구별해주는 하나의 의식적인 주체임을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두가지 종류의 존재양태 가운데서도 대자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존재와 무』의 대분분을 할애했다.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인간의 자유문제라고 한다면 그의 자유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자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것, 즉 비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본래 존재의 부정이나 무화를 통해 생겨나야만 한다. 그가 보기에 즉자는 곧 자신과 일치하며, 따라서 사적, 폐쇄적, 과거적이며 완결된 존재이다. 즉자는 어떤 無도 품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자, 즉 의식은 일종의 활동과정이다. 대자는 즉자의 전체적인 무화이다. 대자는 존재의 무화 과정에서의 실재성 이상의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의식은 어떤 무엇에 의해 부정이나 무화가 야기되는 그런 것이다.

본질과 개입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전혀 없다. 의식 자체는 비존재이면서 무화 과정으로서의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종이 한 장을 인지한다 할 경우, 나는 나 자신을 그것 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거나 분리되는 것이다. 나는 그 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것 이외의 어떤 것도 부정함으로써, 즉 다른 현상들을 무화함으로써 그 종이를 출현시키며, 그것의 배경에 관여하지 않는다. 의식은 다른 것들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술전시관 안에서 내가 어떤 특정한 그림에 관심을 고정시킴으로서 다른 것들을 배제시킨다는 것과 같은 활동이다.

사르트르에 있어서 의식은 자신에 관한 실체적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 명백해질 때에 실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핍과 공허와 무를 자신의 중심부에 전제하는데 無란 의식이 즉자가 아니라는 바로 그 증명인 것이다. 의식은 無를 창조하며, 이는 의식이 無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無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며 ‘기생충처럼 존재의 가슴에 기생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無는 그 자신을 폐기하거나 무화되거나 한다. 따라서 無는 세상에 나타나게 된 수단적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는 결핍, 즉 일종의 無인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대자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즉자의 무화이다. 대자는 즉자의 무화에서 발생되며, 이는 즉자를 향한 기투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 무화된 즉자와 기투된 즉자 사이의 대자는 無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無적인 것을 목적하는 대자로부터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 의해 분리된, 또는 무화된 즉자를 소유한다. 즉 우리는 사실상 無적인 것에로 지향된 대자를 소유한다. 본래 즉자와 대자는 결코 합의될 수 없다. 그것들은 대자가 더 이상 대자이기를 그만 두고 즉자 속으로 떨어질 때만 결합될 수 있다. 무화된 즉자인 대자가 그것을 지향하는 대자와 융화될 때에만 완전한 전체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식이 결여된 채 응결된 즉자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존재와 분리되어 있는 대자(즉 의식)는 즉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의식적 존재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 실재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다. 다른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먼저 실존하고, 그 뒤에 본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도 인간의 본질을 설명한다. 인간은 기성품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

(4)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람은 자유로운 앙가쥬망의 바탕 위에서라면 무엇이고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어떠한 토대도 없이 형성되었다. ‘선택은 모든 이유가 자유선택에 의해 세계내에 존재하게 되는 충분한 이유에 대한 충분한 이유없이 이루어진다.’ ‘인생에 뜻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그 뜻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로서 여러분은 인간의 공통성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을 가치창조의 장본인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신은 구토에서 휴머니즘을 조롱까지 하고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휴머니즘을 운운할 게 뭐냐’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때의 휴머니즘은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나 말만이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내려 인간을 훌륭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개나 말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사르트르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실존주의는 이런 종류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이므로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 말은 인간에 중심을 두고 신을 포기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는 분명히 신에 반대하는 결단을 했다. 그는 니이체처럼 이미 미지의 신을 찾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존재라는 개념, 즉 자기원인적 존재는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을 거부하는 이유는 분방한 자유에의 열망에 있다. 그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고자 한다. 어떠한 신의 도덕률, 어떠한 선천적 가치, 어떠한 본체,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본질, 어떠한 본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은 실존할 뿐이지만 인간은 그가 되려고 하는 것, 그가 바라는 것, 곧 기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버려진 채 세게 안에 던져져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의 실존에 대해 홀로 책임지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상에 따라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가치를 선택하고, 선악을 결정하고, 헌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입법한다.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 부르는 것도 사람에게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입법자가 없으며, 그가 그 자신을 결정한 것은 그 초월 속에서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또한 초월성과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인간은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의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그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실존주의는 인간을 탈자적 존재로 간주하는 휴머니즘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있다. 인간은 자신을 외부로 투기하면서, 그의 밖에서 자신을 상실하면서 인간이 실존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자신이 그의 초월의 중심이며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탈자적 인간이 신으로부터 탈락한 데 대해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이 우주인 이상, 다른 우주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 초월, 인간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초월―신을 초월적이라고 할 때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이상의 것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과 인간은 그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적 우주 속에 현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주체성고의 결합을 우리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은 탈자적 존재론에서 행동과 윤리학으로 발전한다. 그에 의하면,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달라질게 없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있어 신의 존재 여부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유효한 증명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실존주의를 낙관론이 동시에 행동의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5) 실존주의적 마르크스

‘철학이 달성하려는―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을 그것을 명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처럼 철학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마르크스주의는 자유와 개인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유물론으로서의 그것은 인간에게 일종의 현기증 나는 책임을 부과한다.’ ‘생동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실존주의자의 탐구를 구제해야 하며, 그것을 질식시키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 이상의 인용문은 『존재와 무』에 대한 메를로 뽕띠의 서평에 나오는 글들이다. 이 구절들은 아마도 그 서평에 나오는 것들 가운데서 사르트르의 생각에 가장 자극을 주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메를로 뽕띠의 말대로 『존재와 무』에서 겪은 허무한 관념론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에다 실존주의적 토대를 삽입해보려는 사르트르의 자구책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역사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인간을 쓸모없는 정열로서가 아니라 역사 창조의 의미 있는 참여자로서 간주하게 해보려는 시도였다. 사르트르도 실존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 반면에 현대를 지배하는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실존주의를 ‘자신이 처음에는 대항하다가 이제는 자신이 통합되기를 운하는 한 지식체계의 외곽에 살고 있는 기생적 체계’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에서 『존재와 무』에 표현된 견해들과 마르크스주의의 조호를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그것은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고립을

파기하며, 공존의 확실한 의식을 발전시키며,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순수히 무화하는

자유로서가 아니라 타자의 자유를 반영하며, 그것에 의해 반영된 자유로서 간주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또한 거기에는 타자의 자유의 실존의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할 행위, 또는 실천을 유발하는 역사적 힘들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의도도 담겨져 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통해서 모든 의미의 원천으로서 대자를 나타내려 했다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통해서는 즉자로서의 역사를 과학적 지식을 나타내는 인간 정신에 의해 식별 가능한 것으로 해독하려 했다. 사실상 그가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1946년 「현대」에 실린 <유물론과 혁명>에서 이미 그는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과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한 바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노동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겼다고 푸념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노동의 의미까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를 위해서 생산하지만 그 사회와의 연대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계공이라도 좋고 인부라도 좋다. 그는 자기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의사나 법률가의 일은 그 질에 의해서 평가되지만 노동자의 일은 오직 양에 의해서 평가된다. 그가 놓여 있는

상황의 여러 국면에서 그는 자기가 동물학의 어느 종족에 속하는 짐승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가 여러 국면에만 머물러 있는 한 그의 조건마저도 자연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의 인간소외 현상은 결국 혁명의 조건이 된다 사르트르가 생각하기에 혁명가는 이러한 상황을 초월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전계급을 위해서 변혁하려고 한다. 그에게 신성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조직을 변혁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그 사회조직의 구성을 관할한다는 생각부터 배격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혁명가의 사상을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이 모든 혁명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혁명가는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권리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며,

그는 그것을 습관과 권력의 산물로 보았다. 그의 휴머니즘은 인간적 위신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떠한 특정한 위신도 부정하고, 그가 자기와 그의 동족을 섞어버리는 통일은 인간의 지배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인간적 종족으로서의 통일이다. 그가 보기에는 하나의 인간 종족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한 출현이다. 단지 그 발전의 여러 사정들이 인간에게 일종의 내적 불균형 상태를 극복하고 더욱 합리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처럼 마르크스의 소외이론과 혁명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유물론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의 주장에 다르면, 유물론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더구나 종래의 유물론에서는 인간을 자유로운 자기 초월적 주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들의 유물론을 변증법적이라 주장하면서 그것을 과거의 유물론과 구별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관념론이 기존의 권리와 가치를 내세워 인간을 속박하고 기만하듯이 유물론도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으면서 인간을 속이고 있다. 혁명가는 그러한 기만적 학설들이 주장하는 것 가운데서 특히 자유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예언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인간을 속였다. 스토아학파의 자유, 기독교의 자유, 베르그송의 자유도 쇠사슬이

없는 척하면서 인간을 훨씬 더 강한 쇠사슬로 동여맸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은

모두 다 내적 자유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전한 관념론적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자유를 행동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유물론이 약자에 의한 강자의 설명으로서 우리 사회의 실제적인 구조에 대한 적절한 영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낱 플라톤적 의미를 가진 시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혁명가는 현재의 상황에 상징적 표현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 혁명가는 그것보다도 그로 하여금 미래를 만들게 하는 사상을 요구한다. 강자도 약자도 없을 계급 없는 사회에서 유물론의 신하는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관념론과 유물론을 부정하는 혁명의 철학으로 초월의 철학을 요청한다. 그는 열광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요구한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부르조와의 관념론적 사상은 물론 일시적이지만 피억압 대중에 접합할 수 있었던 유물론적 신화를 동시에 초월하여 인간 일반의 철학이 될 수 있는 혁명의 철학이다. 한편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소외이론과 혁명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용하고 있는 변증법적 이성도 수용하려 했다. 물론 그는 그것을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보면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만이 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이라고 말했고, 지금 다시 되풀이하여 말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위해 우선 분석적 이성주의와 변증법적 이성주의를 구별한다. 18세기의 이성주의와 실증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분석적 이성은 구경꾼의 입장과 같은 객관적 입장을 취한다. 더구나 그것은 새로운 사실들을 과거의 사실들로 환원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움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이성은 새로운 것을 묵은 것에 환원시키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부분에로 환원시킴으로써 전체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움의 출현을 지향하는 불가역적 운동을 표현한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환원 불가능한 새로움에 대한 절대적인 인지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다. 도한 그것은 완성된 전체성의 입장에서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전체호의 진행고정이라는 입장에서 부분을 특정한 역사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사고에 의해서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방법이라는 의미와 사유 대상 속에 있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의미도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그는 보았다.

사실상 변증법적 이성은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은 동시에 역사운동의 기본구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이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역사로서 파악될 수도 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사르트르가 시도하는 것도 인간의 활동은 선행조건에 속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제한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역사를 만드는 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변증법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에 관해서도 여전히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만이 유일하게 옳은 역사해석을 제공한다고 믿는 동시에 실존주의가

현실에 대해 유일하게 구체적인 태도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확언하는 것은 루카치가 이 점을 결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이러한 양면적인 요구의 압박에 시달리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한때는 마치 달이 만물을 끌어들이듯 우리를 매혹시켰던 마르크스주의가 갑자기 우리의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우리의 인식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특수한

영역에 대해 아무런 새로운 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발전 도중에

정체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존재라는 개념을 다시 도입하고 개인의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하려 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평이 뉴턴 물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과 같은 것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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