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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촬영일 :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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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튼 우즈 체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브레튼 우즈 체제( – 體制, 영어: Bretton Woods system, BWS)는 국제적인 통화제도 협정에 따라 구축된 국제 통화 체제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미국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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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튼우즈체제와 IMF | click 경제교육
브레튼우즈체제는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았는데, 어떤 통화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경제의 규모 확대에 맞춰 충분한 양이 공급될 수 있어야 하고, 통화가 세계적 …
Source: eiec.kdi.re.kr
Date Published: 1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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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도 – 나무위키
결국 미국의 입장이 받아들여져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을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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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튼우즈체제?? – 한경닷컴 사전 – 한국경제
2차 세계대전말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1944년 서방 44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 모여 만든 국제통화체제.
Source: dic.hankyung.com
Date Published: 3/4/2022
View: 5467
브레튼우즈 체제의 몰락… 달러의 굴욕 속 미래화폐 … – 주간조선
1944년 7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했던 세계화폐는 거부되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달러 중심의 금환본위제도가 확립되었다.
Source: weekly.chosun.com
Date Published: 9/10/2021
View: 6224
[오늘의 경제용어] 브레튼 우즈 체제
09/23(수) 18:12 달러 가치를 금에 맞춰 태환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통화의 환율은 달러에 고정시키는 금본위 제도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는 …
Source: www.sedaily.com
Date Published: 10/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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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 브런치
한마디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둔 통화체제인이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 이상의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7/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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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튼우즈 체제와 달러 패권 : 기원,전개 그리고 전망 조혁진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된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 달러 패권의 지속 가능성과 브레튼우즈 체제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新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 …
Source: web.yonsei.ac.kr
Date Published: 12/14/2022
View: 7305
브레튼우즈 체제 – 매일경제
브레튼우즈 협정의 핵심내용은 미달러화를 축으로 한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도’를 도입한 점으로 이 같은 국제통화제도를 관장하는 기구로 IMF와 세계은행이 설립됐다.
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8/1/2021
View: 4615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 옐로우의 세계
2차 대전 직후에 형성된 국제 통화 체제를 가리킨다. 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 서방 44개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여 입안했고, 그 …
Source: yellow.kr
Date Published: 3/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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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브레튼 우즈 체제
- Author: SWAN TV_부동산, 주식, 재테크 전문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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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5.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m3xU6OHrPI
브레튼 우즈 체제
브레튼 우즈 체제( – 體制, 영어: Bretton Woods system, BWS)는 국제적인 통화제도 협정에 따라 구축된 국제 통화 체제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 우즈에서 열린 44개국이 참가한 연합국 통화 금융 회의에서 탄생되었다. 이 협정을 브레튼 우즈 협정이라 부른다.[1]
주요 내용 [ 편집 ]
협정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설립되었다. 통화 가치 안정, 무역 진흥, 개발 도상국 지원을 목적으로 하며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미국 달러화를 기축 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의 실시 :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 외에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
조정가능한 고정환율 제도의 실시 : 원칙적으로는 상하 1% 범위 내에서 조정이 가능하며,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fundamental disequilibrium)이 있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상의 변동을 허용.
특별인출권의 창출
1930년대 이래의 각국통화가치 불안정, 외환관리, 평가절하경쟁, 무역거래제한 등을 시정하여 국제무역의 확대, 고용 및 실질소득증대, 외환의 안정과 자유화, 국제수지 균형등을 달성할 것을 목적으로 체결.
각국에 필요한 외화를 공급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전후부흥과 후진국개발을 위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창설.
1971년 12월 스미소니협정으로 이행하여 변질된 형태로나마 이어지던 브레튼 우즈 체제는 1973년 초 주요국이 환율을 유동화시킴으로써 IMF 체제는 브레튼 우즈 체제가 갖추었던 금환본위제라는 양대기본개념이 크게 변질된 새로운 국제통화제도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제1세계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달러 위기 [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후 피폐된 서구 각국에 대해 압도적인 금보유를 배경으로 한 미국 달러는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고 국제경제상 커다란 지위를 차지하는 한편 IMF 체제 아래서도 달러는 금의 대리(代理)라는 탁월한 지위를 인정받아 왔다. 또한 미국 달러는 전후 유럽, 일본 등의 부흥,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 등 자유세계의 번영기금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투하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서구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비해 미국경제는 정체하고 국제수지도 만성적이고 대폭적인 적자를 누적시켜 금 준비와 대외 단기달러채무 잔고의 비율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롯된 달러의 지위 동요는 1960년 가을에 표면화되어 그 후 이런 경향은 만성화되고 심각화되어 금융 위기인 달러 위기(dollar 危機)로 이어졌다.
붕괴 [ 편집 ]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전비조달을 위한 통화량 증가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일부 국가들이 금태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금태환 정지선언인 1971년의 8·15 닉슨 조치는 이런 달러위기의 타개를 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이 조치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 국제 통화제도는 혼란에 빠지고 세계무역은 축소화의 경향을 지지게 되며 한편 후진국에는 악영향을 주었다.
로베르 트리핀은 금본위제도가 유동성문제와 신뢰성 문제라는 양자의 딜레마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동성 문제란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 달러의 수요는 많아지나, 금의 생산량은 제한적이므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만약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의 공급을 증가시킨다면 달러 가치에 대한 신뢰성이 하락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딜레마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금환본위제는 국제수지 자동조절기능의 약화와 통화팽창 가능성이란 약점때문에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1931년 붕괴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무역정책을 보면 강력한 보호무역조치가 만연하는 경향이 나타났었다. 특히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국제통화질서를 회복하기 어려운 결정타를 가하였다. 주식시장의 붕괴는 급속히 전 세계로 확대되어 유럽각자의 연쇄적인 파산을 불러일으켰고, 그 후 미국마저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주요선진국은 일시적인 변동환율을 채택하게 되었다. 여기서 금본위제도는 붕괴되고 말았다.
붕괴 후 세계경제 동향 [ 편집 ]
금본위제가 붕괴 한 후, 세계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우선 각국이 보호주의를 강력히 추구하여 관세장벽을 높여가는 한편, 수입할당제, 수입허가세 등 비관세 수단에 의해 무역규제도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쟁적인 평가절하가 만연됐으며, 대영제국, 스칸디나비아, 포르투갈,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파운드 블록, 북중남미국가를 중심으로 한 달러블록과 같은 블록들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자유무역은 자취를 감추고 자유무역원리와 금본위제에 뒷받침을 받았던 20세기 경제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신 브레튼 우즈 체제 등장 [ 편집 ]
신 브레튼 우즈 체제는 아직 실체가 없는 시스템이다. 물론 신 브레튼 우즈 체제에 대한 논의가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 중심에 당시 유럽연합 순회의장국인 프랑스의 사르코지가 있다. 신체제의 창설을 처음 제안했던 쪽은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였다. 브라운 총리의 제안은 첫째, 금융위기 정보시스템, 둘째, 세계 30위권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강화였다.
미국 워싱턴에서 ‘G20’ 긴급정상회의가 열렸으나, 규제감독 강화와 경기부양에 관한 원칙에는 합의를 봤으나 초국가적 금융감독기구 창설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신 브레튼우즈 체제 대립구조 : 먼저 유럽연합 속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지만, 미국 쪽에서는 미국의 세계금융주도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주장 아래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해석 [ 편집 ]
피터 자이한은 그의 저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브레튼 우즈 체제의 본질은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안보동맹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안보동맹으로 미국은 반공산주의 진영을 세워 세계의 보안관 역할을 30년 동안 해왔으며 이 체제의 종식으로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미국이 입장을 바꿨다고 주장한다.[2]
같이 보기 [ 편집 ]
참조 [ 편집 ]
한경닷컴 사전
관리자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
2차 세계대전말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1944년 서방 44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 모여 만든 국제통화체제. 미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국제 결제 시스템인 달러화 금태환제의 도입, IMF(국제통화기금) 및 세계은행(IBRD) 창설 등이 핵심 내용이다. 베트남 전쟁에 따른 막대한 전쟁비을 이유로 미국이 1971년 달러 금 태환제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붕괴됐지만 여전히 국제금융의 기본틀로 남아있다. =>신브레튼우즈체제
신브레튼우즈체제(New Bretton Woods System)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주창한 국제금융시스템으로 1944년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를 한층 글로벌화된 현재의 상황에 맞게 전면 개혁하자는 것이다. 브라운 총리는 `신브레튼우즈 체제`의 핵심으로 국제표준의 새 회계기준 채택을 통한 투명성 확보와 국가별로 이뤄지는 현행 금융감독체제의 개혁 등을 꼽았다. 또한 그는 IMF를 포함한 새로운 국제금융감시기구를 만들어 금융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감독기능과 국가 간 조율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들어 자주 언급되는 이유=>
현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미국인데요, 미국은 엄청난 재정적자, 무역적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축통화를 찍어내는 국가이기 때문에, 나라와 가게가 빚이 많아도 풍요롭게 지내왔지요. 기축통화를 찍어내는 국가이기 때문에 전세계 금융자산의 상당액이 미국에 몰려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금융산업이 발전했고, 이는 역으로 미국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공고하게 하는 작용을 했지요.
그런데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전세계인의 부러움의 대상이되던 미국금융시스템의 취약성(관리하기 힘든 파생상품, 파생상품이 만들어낸 거품, 도덕적 해이 등)이 드러나면서 유럽, 아시아 등의 국가들 한테서 미국금융시스템과 달러가 그리 전지 만능한 체제나 화폐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 것이지요.
그래서 달러위주의 브레튼우즈체제를 뒤엎자, 혹은 개선하자 이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EU의 유로나 중국의 위안, 일본의 엔 등 어느 경제권의 화폐도 아직은 미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뼈가 부러지긴 했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호랑이이지요.
브레튼우즈 체제의 몰락… 달러의 굴욕 속 미래화폐 탐색
1944년 7월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했던 세계화폐는 거부되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달러 중심의 금환본위제도가 확립되었다. 35달러를 금 1온스로의 금태환을 보장하고 각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1% 범위 내에서 연동시켰다. 브레튼우즈 체제 초기인 1947년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금의 70% 이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과 서독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무역증대로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위상은 점점 축소되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으로 늘어난 국가채무, 통화팽창 등으로 달러가치는 1960년대 들어 심각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달러 모순을 보여주는 ‘트리핀 딜레마’
인플레이션의 근본원인은 통화팽창과 재정적자이다. 그런데 미국은 재정적자가 일어나야만 달러가 발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경상수지 적자가 되어야 달러가 해외로 공급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에 따르면, 1950년대 세계경제에 공급된 국제 유동성 85억달러 가운데 미국이 제공한 액수는 무려 70억달러에 달했다. 덕분에 미국은 만성적인 적자상태에 허덕여야 했다. 1950년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지자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또 미국이 경상수지 흑자로 돌아서면 누가 국제 유동성을 공급할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1960년에 이미 방만하게 공급된 달러는 외환시장에서 평가절하 압력에 시달렸다.
그러자 미국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 로버트 트리핀은 미국의 방만한 재정운용 정책이 지속될 경우 금태환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해진 1960년 트리핀은 미 의회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경상적자를 허용하지 않아 국제 유동성 공급이 중단되면 세계경제는 크게 위축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적자상태가 지속돼 달러화가 과잉공급되면 달러가치가 떨어져 준비자산으로서의 신뢰도를 잃고 고정환율제도도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달러화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태생적 모순을 가리켜 ‘트리핀 딜레마’라고 한다.
트리핀 교수가 제시한 해결책은 케인스가 제안했던 ‘방코르’와 유사한 세계화폐를 만들어서 국제 거래에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이 해결책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금값 안정을 위한 금풀 협정
1960년대 들어 유럽과 일본이 보유한 달러자산 총액이 미국이 보유한 금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의 금태환 능력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서 금값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런던 금시장에서 1960년 10월부터 금값이 온스당 40달러를 호가했다. 그러자 금이 미국에서 빠져나와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금값이 뛰자 미국은 1961년 12월에 주요국들이 달러를 갹출하여 금값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국가별 갹출 비중은 미국 50%, 프랑스·독일·이탈리아·영국 각 10%, 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 각 3%였다. 이렇게 모인 기금은 금값이 온스당 35달러 이상으로 오르려고 하면 금을 매도해 금값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다른 출자국들은 금풀(Gold Pool) 운영에 따른 손실액의 절반을 미국에 보상해주어야 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외화자산 결제는 주로 달러로 진행되었는데 브레튼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임에도 미국은 암암리에 달러 발행을 남발했다. 당연히 달러의 실질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달러에만 모든 결제를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64년 국제통화기금(IMF) 연례총회에서 달러의 독점적 위상을 반대하던 프랑스는 세계화폐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별인출권(SDR·Special Drawing Rights)’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세계화폐 개념은 새로운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통용되던 금이 바로 세계화폐라며, 국제체제의 평등성 회복을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미국의 금과 바꿀 의향을 밝혔다. 이러한 협박은 미국의 공식입장을 변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의 위상이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입장을 바꿔 드골의 특별인출권 창출에 동의했다.
결국 IMF가 케인스의 세계화폐 아이디어를 차용해 1969년 새로운 국제 준비자산을 만든 것이 특별인출권이다. 특별인출권은 IMF 회원국의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담보 없이 필요한 만큼의 외화를 인출해 갈 수 있는 권리이다. 쉽게 말해 특별인출권은 IMF에서 사용하는 가상의 준비통화로 달러를 보완하기 위한 세계화폐이다. 미국은 지금도 특별인출권의 존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 브레튼우즈 체제를 속이다
케인스가 우려했던 것이 전후 세계경제 흐름 속에서 차례차례 현실로 드러났다. 1965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베트남전쟁에 확대 개입하면서 경제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당시의 금환본위제를 위배하는 비도덕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에 금 보유와 상관없이 달러를 더 발행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 참가국들을 속이는 행위였다.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들은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해 화폐발행량을 늘렸다. 그러자 물가상승률은 6%까지 치솟았다. 이후 1970년대 미국 인플레이션은 두 자릿수를 넘나들었다.
1960년대에 미국의 금 보유는 전 세계 금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음에도 1971년 들어 달러 통화량은 10%나 늘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서독이 그해 5월 브레튼우즈 체제를 탈퇴했다. 그러자 달러가치는 마르크 대비 7.5% 하락했다.
다른 나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제 각국은 달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각국이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를 원했다. 스위스가 가장 먼저 7월에 5000만달러를 미국으로부터 금으로 바꾸어갔다. 이어 프랑스도 1억9100만달러를 금으로 태환해갔다. 그러면서 1억5000만달러를 더 태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드골은 미국에 해군 함대를 보내 프랑스로 금을 운반하는 걸 대내외적으로 과시까지 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이어 스페인도 6000만달러를 금으로 교환해갔다. 이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달러어치의 금을 교환해간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금 보유고는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달러가치가 유럽 각국의 통화들에 비해 떨어지자 8월에 스위스도 브레튼우즈 체제를 떠났다. 1971년 8월 9일, 영국의 경제 대표가 재무부에 직접 와서 자그마치 30억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잘못하면 국가 부도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에 직면한 것이다.
그다음 주 13일 금요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돌연 행정부 주요 경제정책 담당자 16명에게 헬리콥터를 타고 자신과 함께 캠프 데이비드 군사기지로 가자고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이 모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금 고갈에 직면한 미국이 자신만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1974년 화폐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 그는 비트코인이 탄생하기 18년 전 컴퓨터의 바이트가 미래 화폐가 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photo 위키피디아
세계를 우롱한 ‘닉슨쇼크’
영국마저 대량의 금태환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은 결국 1971년 8월 15일 달러와 금의 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이른바 ‘닉슨쇼크’를 단행해 브레튼우즈 체제를 스스로 파기하는 비도덕적 배신을 감행했다. 닉슨은 투기꾼들에 의해 달러가 공격받고 있다고 하면서 일시적으로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발표 내용도 지극히 부정직했다. 이렇게 미국이 하루아침에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그간 금 교환권이라고 믿어온 달러와 또 그 달러에 연동되어 있던 전 세계 화폐 모두를 종잇조각으로 전락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그 뒤 세계경제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나서도 3~4년 동안 세계는 효과적인 국제 통화제도를 찾지 못했다.
닉슨쇼크와 동시에 미국 정부는 모든 수입품의 관세를 10% 올리는 보호무역을 단행하고, 국내적으로는 90일간 물가와 임금을 동결시켰다. 또 대외적으로는 달러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목표 금값을 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변경했다. 전형적인 ‘인근 궁핍화 전략’으로 다른 나라들이야 어떻게 되든 미국 혼자만 살아남겠다는 것이었다. 1972년에는 달러가치를 다시 금 1온스당 42.22달러로 절하했다. 금본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을 하던 1974년이었다.
사실 달러의 ‘인근 궁핍화 전략’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달러의 가치를 금 1온스당 20.67달러에서 하루아침에 35달러로 자그마치 69%나 일시에 평가절하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도 다른 나라들, 특히 수출 경쟁국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하이에크 ‘화폐의 탈국가화’ 주장
중앙정부가 돈을 발행하는 현재의 화폐제도에 대해 우려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가 있었다. 바로 시카고대학 경제학 교수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였다.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군 병사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던 하이에크는 빈으로 돌아와 초토화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부모의 저축은 휴지조각이 됐다. 이때 경험으로 그는 정부가 화폐공급량을 늘려 인플레이션으로 경기를 진작시키자는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하게 됐다. 또한 그는 스탈린이 반대세력 68만명을 사형시키고 63만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냈으며 같은 시기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죽이는 걸 보면서 정부의 권력강화가 얼마나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절감하고 자유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에크는 특히 ‘화폐와 경제 변동에 관한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 2년 후에 그는 ‘자유은행론’을 바람직한 금융제도로 주장하는 ‘화폐의 탈국가화(The Denationalization of Money)’를 출간했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정부는 일절 개입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들이 화폐발행권을 중앙은행이 독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제도가 재정팽창을 유발하고 경기변동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화폐의 탈국가화’에서 화폐 발행의 자유화를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중앙은행은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민간주체 누구나 화폐를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민간주체들이 자발적으로 발행량을 조정하며, 결국 경쟁에서 우수한 화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국가의 화폐발행권 독점 때문에 오히려 경제가 불안정해진다는 게 하이에크의 생각이다. 그래서 화폐의 국가 관리에 반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조정하지 않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이에크는 중앙은행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바람직한 세계라고 생각했다.
프리드먼, 미래 화폐 ‘바이트’를 예견하다
화폐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 또 한 명의 학자가 있다. 바로 1974년 화폐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또 다른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는 경제학에서 통화를 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강조하는 통화주의 창시자이자 시카고학파의 태두이다. 그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이나 대공황과 같은 심각한 경제교란은 대부분 급격한 통화 팽창이나 수축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다.
프리드먼이 주장한 화폐정책의 핵심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화폐발행량을 결정하지 말고 일정한 통화증가율을 사전에 공시하고 이를 준수하라는 것이다. 이를 ‘k% 준칙’이라 불렀다. 곧 화폐는 경제성장률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에서 발행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준칙만 지키고 나머지는 민간에 맡기면 통화량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경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경제주체들이 보다 합리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연방은행은 1974년부터 이 준칙을 지켜왔다. 독일 경제가 견실하게 성장한 배경이다.
프리드먼은 “모든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화폐적 현상이다”라고 말하며 ‘k% 준칙’을 위배하는 통화교란이 경기불안의 원천임을 밝혔다. 프리드먼은 1991년 그의 저서 ‘화폐경제학’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는 국가가 인플레이션으로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를 알려준다. 그는 책 서문에서 과거 화폐들의 발전 형태를 나열하면서 미래 화폐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면 미래의 화폐는 어떤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인가? 과연 컴퓨터의 바이트(byte)일까?”
그는 비트코인이 탄생하기 18년 전에 이런 자문자답을 했다. 컴퓨터 저장단위 ‘비트’와 ‘코인’의 결합이 비트코인이다. 프리드먼이 지금의 가상자산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생각한 미래 화폐의 형태가 맞았다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오늘의 경제용어] 브레튼 우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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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수) 18:12 달러 가치를 금에 맞춰 태환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통화의 환율은 달러에 고정시키는 금본위 제도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영 등 연합국 대표들이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 우즈에서 세계 대공황의 경제적 혼란과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피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다.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설립하고 이 두기관이 브레튼 우즈 체제의 중심역할을 맡도록 했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각국이 평가절하 경쟁으로부터 국제경제, 통화제도가 파탄되었던 사실의 반성으로 IMF를 통해 가맹국의 외환시세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각국은 금·달러 평가를 기준으로 하여 외환시세를 유지하고 그 시세가 위험할 때에는 개입할 의무를 지게했다. 미국은 달러를 금과 자유로이 교환해 준다고 보증했고 각국은 달러를 개입통화로 사용, 외환시세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71년 8월15일 미국 닉슨대통령이 금과 달러의 교환을 정지함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는 무너졌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IBRD와 IMF가 역할을 다했다며 신국제 질서 수립을 위한 신(新) 브레튼 우즈 체제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
첫 번째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전 글 읽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범지구적인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외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패전국의 해체, 특히 오스만 제국의 해체 후 이뤄진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역 위임통치는 유대민족과 아랍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여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행 중인 중동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국제 질서의 확립과 세계평화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 아래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의 취지와는 다르게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현재의 독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을 내림으로서 독일 국민들의 경제적 궁핍을 유발하였다. 오랜 궁핍은 독일 국민들에게 피해의식과 외세에 대한 강한 증오감, 적개심을 품게 하였고 이를 등에 업은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 정부의 독재화를 이뤄낸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세계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생략 가능한 내용 :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이 보복성을 짙게 띄게 된 이유는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독일의 배상 책임을 일부분으로 한정 짓고자 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프랑스는 전범국인 독일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 대표단으로 협상에 참여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전쟁으로 인해 지불능력을 상실한 독일에게 장기분할 부채상환(오랜 기간에 나눠 부채를 갚아나가는 것)은 한 세대 이상의 궁핍을 강요하여 강력한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주장해보지만, 전쟁으로 지게 된 막대한 채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케인스의 주장을 묵살하고 프랑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결국 1921년, 배상위원회는 최종적으로 ■1320억 “금”마르크에 해당하는 금액을 독일이 갚아야 할 전쟁배상금으로 책정하였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이냐면, 당시 독일의 세입 평균은 연 60-70억 마르크로 1320억 마르크를 온전히 갚기 위해선 독일 국민이 낸 세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20년간 지불해야만 하는 금액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패전국인 독일에겐 이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배상위원회의 무리한 요구에 독일은 ■디폴트를 선언하였고 배상금 문제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배상금 미지급을 이유로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가혹한 처벌에 분노한 독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였고 독일의 산업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매년 전쟁배상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독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인쇄기에 의존하여 돈을 찍어내는 것 밖에 없었다. 독일의 통화 공급량은 1921년부터 1923년까지 7500배가량 증가하였고, 말기엔 1달러가 4조 마르크와 치환되는 지독한 수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땔감 대신 돈뭉치를 화로에 넣는 여성과 돈다발을 쌓으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다 보니 아이들이 돈다발을 쌓으면서 놀고, 땔감 대신 돈뭉치로 난방을 하는 기이한 모습이 독일 내에선 당연한 일이 되었다. 독일에서 화폐는 신용을 잃었고 상인들은 마르크화를 받기를 거부했다. 이지경까지 와버리니 독일은 국가의 흥망이 아닌 존폐 여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마른하늘에도 비가 내린다고, 타개책이 보이지 않던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아주 작은 변화에 의해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변화는 통화 집행위원으로 임명된 얄마르 샤흐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샤흐트는 가치가 없어진 파피어 마르크의 발행을 중단하고 독일 각지의 농장과 공장을 담보로 발행하는 저당증권 형태의 렌텐 마르크를 새롭게 발행했다. 동시에 두 화폐를 1조 : 1의 교환비로 교환해주기 시작했다.
통화정책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 파피어 마르크를 바꾸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왔지만 독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시중에 풀리는 렌텐 마르크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그쳤다. 샤흐트는 초과수요라는 문제에 직면했고, 정부와 기업, 은행으로부터 렌텐 마르크의 발행한도를 늘리라는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렌텐 마르크가 저당증권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상 화폐의 발행한도엔 한계가 존재했으며, 샤흐트 본인도 농장과 공장의 한도에 따라 발행한도를 제한해야 화폐의 신용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샤흐트는 그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렌텐 마르크의 발행량을 철저하게 통제하였으며 렌텐 마르크는 샤흐트의 통제아래 안정적으로 시중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렌텐 마르크가 시중에 풀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보니 품귀현상이 빚어져 화폐의 신용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폐를 받는 것을 거부하던 상인들은 렌텐 마르크를 받고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 침체된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일 국민들의 경제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흐트가 옳았던 것이다. 샤흐트가 움직인 단 하나의 톱니바퀴는 무수히 많은 연쇄작용들을 일으켜 독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비록 호황기가 찾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망적이었던 독일의 경제에겐 가뭄속 단비와 같은 희망이었음은 분명해보였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가 독일의 배상급 미지급을 이유로 루르지방을 점거한 사건을 두고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게 되면서 독일에 대한 동정 여론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평소 프랑스의 대독 정책을 비판하던 영국과 미국은 재정전문가 위원회를 설치해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게 미국이 8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차관을 제공함과 동시에 5년간 상환할 배상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지정하여 점진적으로 갚아나갈 수 있게 해 준다는 내용이 담긴 도스 안 [Dawes Plan]을 협상국 측에 제안하였다.
이 협상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연합국 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도스안에 의거하여 루르지방에서 철수하였고, 유럽 최대의 공업 지역으로 불리는 루르 공업 지역은 파업을 철회하고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호재가 겹친 독일의 경제는 매년 10~20억 금 마르크에 해당하는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을 강타하면서 전쟁배상금 문제는 매년 지불해야 하는 액수나 지불방식이 아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의 총액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 깨닫게 된다.
■1320억 “금”마르크 : 배상위원회는 처음부터 독일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예상하여 1914년 이후로 발행이 중단된 ‘금’마르크를 기준으로 배상할 것을 못 박아 뒀다. 배상액이 결정된 시기에 독일에 유통되고 있던 파피어 마르크로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축, 광석, 석탄, 농산물과 같은 현물을 통한 배상이 주로 이뤄졌다.
■디폴트 : 국가규모의 채무불이행을 의미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 물가상승률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단기간에 수백 % 이상 치솟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급격하게 늘리면서 발생하며 국가 경제의 혼란을 야기하고 실물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한다.
1939년 독일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시작된 두 번째 세계대전은 전쟁의 규모부터 여타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상자만 5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7000만 명에 육박하며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발생한 전쟁비용과 물적 피해는 그 규모를 산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전쟁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던 유럽의 열강들은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고 세계의 패권은 대영제국에서 전쟁의 승리를 주도한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동유럽 전체를 세력권에 편입시킨 사회주의 진영의 소련으로 넘어가며 양강의 냉전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유럽의 열강들 이 부족한 군수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조달하는 과정 속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미국으로 유출되었고, 종전 당시에는 전 세계 금의 70%를 미국이 보유하게 되어 세계의 통화체계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첫 번째 사건,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하는 신용화폐를 사용하고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가의 통화제도는 금본위제 아래에 있었다. 금본위제는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고정환율제도로 금화 본위제와 금지금본위제로 구분할 수 있다. 금화 본위제는 화폐를 금화로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금으로 화폐를 만들면 무게와 부피 때문에 유통에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나라는 일정량의 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보조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하는 금지금본위제를 채택하였다. 이 보조 화폐를 바꾸는 행위를 금태환, 바꿔주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는 기관을 태환성이라고 한다. 금본위 제도가 유지되기 위해선 경제규모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각 국가는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돈을 찍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난 유럽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실행할 충분한 양의 금을 갖고 있지 않았고, 연이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수많은 국가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겪은 국민들에게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하는 신용화폐의 사용을 강요할 만큼 세계의 정세가 안정된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두고 대책을 찾기엔 전 세계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이들에겐 하루빨리 통화질서를 세워 세계경제의 혼란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출범한 것이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각국의 통화체계와 금융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44개국이 참여한 통화 금융 회의에서 출범한 체제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지정하여 금을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각국 통화의 환율을 기축통화인 달러에 고정하여 1% 범위 안에서 조정할 수 있도록 한 패권국가 주도형 금본위제를 의미한다. 패권국가가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는 개방 경제 체제 아래에서 패권국가 주도형 금본위 제도는 환율에 대한 위험을 크게 감소시켜 자유무역을 통한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축통화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안정되어있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실제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 이후 미국은 압도적인 금 보유량을 바탕으로 달러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 진영 국가의 경제는 미국의 주도 아래 전쟁의 피해를 딛고 대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브레튼우즈 협약에 따르면 달러는 금에 고정이 되어있고 각국의 통화는 1%의 탄력성을 가지고 달러에 고정이 되어있다. 즉,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면 각국 통화의 가치도 떨어진다. 한마디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둔 통화체제인이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 이상의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면, 화폐의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브레튼우즈 체제하에서 대호황기를 누린 유럽과 6.25 전쟁의 수혜를 입어 전후 피해를 빠르게 복구한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과는 다르게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비 지출과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로 지속적인 금의 유출이 발생한 상태였다. 또한 세계경제가 브레튼우즈 체제하에서 대호황기로 들어서며 그에 따른 ‘달러화’에 대한 수요 또한 급격하게 늘어나 통화팽창 현상도 발생했다.
결국 통화팽창에 의한 달러의 가치 하락과 금 유출 현상의 장기화로 미국의 금태환 능력에 대한 불신이 국제사회에 확산되었고, 불안감을 느낀 일부 국가들이 미국에 금태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지경까지 와버리자 금태환으로 발생할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미국은 1971년, 달러 안정을 명분 삼아 일방적으로 금태환제의 폐지를 선언함과 동시에 금태환제 폐지로 발생한 환율 변동으로부터 자국 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수입품에 대하여 10%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로 인해 30년간 이어진 세계경제의 호황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실상 붕괴, 각국의 통화제도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들은 갑작스러운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한 금융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타개책으로 스미소니언 협정을 체결하여 각국 통화의 환율 조정폭을 1%에서 2.25%로 바꾸고 달러화를 평가절하해봤지만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지속되었고, 스미소니언 협정은 2년 만에 파기되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고정환율제도와 결별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투기꾼과 외환위기로부터 미국을 지키겠다는 명분 하에 이뤄진 금태환제의 폐지로 인해 닉슨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 퍼져있는 달러의 가치 하락은 가속화되어 전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73년, 약 19일이라는 짧은 시간 진행된 4차 중동전쟁이었다.
참고자료
1.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이 독일에 남긴 것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512&cidx=2204
2. Renew the Bretton Woods System
https://www.chathamhouse.org/expert/comment/renew-bretton-woods-system?gclid=CjwKCAiA44LzBRB-EiwA-jJipBF3GsEQsMx2jJA-t_GFoii2N1Zmk3516kv2HsrFtPNgIxDKwJw8dBoCVXEQAvD_BwE
3. 베르사유 조약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A5%B4%EC%82%AC%EC%9C%A0_%EC%A1%B0%EC%95%BD
4.Treaty of Versailles
https://www.history.com/topics/world-war-i/treaty-of-versailles-1
5.Creation of the Bretton Woods System
https://www.federalreservehistory.org/essays/bretton_woods_created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 1944년 – 옐로우의 블로그
1930년대의 금본위제 붕괴로 영국의 경제적 패권은 막을 내리고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에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알리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세계 질서,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에 의해 조직되는 질서를 성립시켰다. 브레튼우즈에서 새로운 통화 제도의 기초가 놓였고,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폭력 수단이 신질서의 군사적 토대를 증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가 건설과 전쟁 수행의 합법화를 규정하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이 유엔 헌장에 마련되었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하여 브레튼우즈의 일차적인 의미는 협정이 계획하고 있는 금달러본위제도도, 협정에 의해 설립될 국제 통화 기구들도 아닌, 대형 금융에서의 민간의 통제에서 공공의 통제로의 대체였다. 즉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킨 것이다. 미국 재무부장관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 Jr.)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고 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차 대전 직후에 형성된 국제 통화 체제를 가리킨다. 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 서방 44개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여 입안했고, 그 운영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만들어졌다.
이 체제에서는 미국의 달러만 금(金)과 고정 비율로 태환(兌換)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통화들은 금 태환 대신에 달러와 고정 환율로 교환할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달러는 기축통화였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대외 준비금으로 금이나 달러를 보유했는데, 금의 공급 증가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증가했다. 이 체제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확고한 경제적 우위와 달러 가치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국의 국제수지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자 미국은 1971년 달러화의 금 태환을 중지한다고 선언했고, 1973년에는 주요국들이 금과의 고정 환율을 포기함으로써 엄격한 의미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공식적인 국제 합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달러화가 세계의 기축통화로 기능하고 있어 사실상 브레튼우즈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친서방 국가들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 관련글의 ‘자본주의 황금기’ 참조
※ 국제통화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살펴보면;
– 금본위제도 : 1880 ~ 1914 (영국의 패권)
– 국제통화질서 혼란 : 1921 ~ 1936
– 브레튼우즈 체제 : 1944 ~ 1971 (미국의 패권)
– 국제통화질서 혼란 : 1967~1987
– ? 체제(현재) : 미국의 금융적 팽창, 신용화폐의 시대
◎ 금본위제도(고정환율) > 브레튼우즈 체제의 금환본위제도(고정환율) > 현재의 환본위제도(변동환율)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더버(Charles Derber)는 미국의 체제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제1차 법인체 체제(1865~1901) – 금장시대
존 D. 록펠러와 J.P. 모건이 집을 짓다.
진보적 체제(1901~1921) – 진보적 시대
테디 루스벨트가 제1차 법인체 체제라는 집에서 융성했던 트러스트(독점체)들을 붕괴시키다.
제2차 법인체 체제(1921~1933) – 광란의 20년대
하딩과 후버가 이 집을 거대한 기업체로 되돌려놓다.
뉴딜 체제(1933~1980) – 뉴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국민의 집을 설계하다.
제3차 법인체 체제(1980~?) – 레이건 혁명
전 지구적 법인체가 자신들을 위한 현재의 집을 짓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뉴딜 체제에 포함된다.
※ 관련글
– 1931년 영국, 1933년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 : http://yellow.kr/blog/?p=1090
– 자본주의 황금기 (1950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984
– 미국체제 위기 (1968년 ~ 1973년) : http://yellow.kr/blog/?p=582
– 닉슨, 달러-금 태환 정지 선언(1971년) : http://yellow.kr/blog/?p=1106
이 당시의 세계사 연표를 살펴본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944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아서 솔터(Arthur Salter) 경은 1932년에 스무트-홀리 법안()의 서명은 “세계사의 전환점”이라고 썼지만, 폴라니는 그런 전환점이 금본위제가 최종적으로 붕괴한 해인 1931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건 어쨌든 두 사건은 단일 붕괴, 즉 19세기 세계 질서의 최종적 붕괴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측면들이었다.
1930년대 초에 갑자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획기적인 사건들은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와 러시아의 5개년 계획과 뉴딜 정책의 개시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혁명과 독재 제국들의 길을 터준 국제 연맹의 쇠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19세기의 이상이 최고의 가치였고 그것의 힘이 그후 10년을 지배했지만, 1940년에 이르자 이 국제 체계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고 고립된 몇몇 곳을 제외하면 완전히 새로운 국제적 배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폴라니, 『거대한 전환』)
1940년의 국제적 배경은 사실 폴라니의 주장처럼 새롭지는 않았다. 열강들 사이의 군사적 대결은 전례 없는 규모나 잔인성과 파괴성을 제외하고는19세기 영국의 세계 질서를 성립시켰던 대결과 닮아 있었다. 이 대결은 곧 새로운 세계 질서,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에 의해 조직되는 질서를 성립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세계 질서의 주요 윤곽이 형성되었다. 브레턴우즈에서 새로운 통화 제도의 기초가 놓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새로운 폭력 수단이 신질서의 군사적 토대를 증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국가 건설과 전쟁 수행의 합법화를 규정하는 새로운 규범과 규칙이 유엔 헌장에 마련되었다.
……
…… 너무 좁게 뉴욕이 런던을 대신하여 세계의 제1금융 중심지가 되었고, 미국의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를 대신하여 세계의 제1통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금융과 관련해서는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 이동의 단연 가장 중요한 측면인 이 근본적인 단절에 대해 밝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리게 된다. 전쟁 전의 국내 뉴딜 정책이 미국의 국가 금융에 대한 통제를 민간의 손에서 공공의 손으로 이양하는 것을 전제로 했었듯이, 전쟁 후의 세계적 뉴딜 정책은 세계 경제의 수준에서 비슷한 이양을 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가 브레턴우즈 협정 때 주장한 대로, 안보 제도와 통화 제도는 가위의 양날처럼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유엔에 대한 지지는 IMF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사실 미국의 패권 수립과 관련하여 브레턴우즈의 일차적인 의미는 협정이 계획하고 있는 금달러본위제도도, 협정에 의해 설립될 국제 통화 기구들도 아닌, 대형 금융에서의 공공의 통제에 의한 민간의 통제의 대체였다. 모건소 스스로가 나중에 자랑했듯이, 그와 루즈벨트는 “화폐 자본을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옮겼고, 그래서 ‘대은행가들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옮김 / 그린비 / 2008.12.25
모든 앞선 세계화폐체계-영국의 것을 포함해-에서, 고도금융의 회로와 망은 이윤 획득을 위해 그것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적 은행가와 금융가들의 수중에 확고히 장악되어 있었다. 세계화폐는 이렇듯 이윤추구 활동의 부산물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브레턴우즈에서 수립된 세계화폐체계에서 세계화폐의 “생산”을 담당한 것은 주로 복지, 안보, 권력에 대한 고려에서 추동된 정부 조직들의 망-원칙적으로는 IMF와 세계은행, 실제로는 미국의 친근하고 중요한 동맹국 중앙은행들과 공조를 이루어 행동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었다. 이렇듯 세계화폐는 국가형성 활동의 부산물이 되었다. 1945년 헨리 모겐소가 주장했듯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안보 기구와 화폐 기구는 가위의 양날처럼 서로 보완적이었다(Calleo and Rowland 1973: 87에서 재인용).
모겐소가 자랑한 적이 있듯이, 루스벨트와 모겐소는 실로 세계 유동성에 대한 통제권을 사적 수중에서 공적 수중으로, 런던과 월스트리트에서 워싱턴으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턴우즈는 고도금융에 대한 루스벨트의 결별을 다른 수단을 통해 지속시킨 것이었다. 윌슨 행정부에서의 복무와 국제연맹에 대한 지지를 포함해 그의 국제주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뉴딜에 대한 루스벨트의 주된 추동력은 민족경제 회복을 목표로 한 미국 정책들을 런던과 뉴욕이 주장하는 건전화폐 원칙에서 자유롭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결정 중 하나는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국제 금 본위의 잔재를 파괴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의 정부를 동원하여 민족 경제 회복을 촉진하고 관리하였고, 미국 은행제도를 정밀 점검하였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인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여, 모건 가의 미국 금융시장 지배에 최종 일격을 가했다(Frieden 1987 : 54~5).
고도금융과의 결별이 거의 마무리된 것은 1933년 7월 루스벨트가 “이른바 국제 금융가라는 낡은 숭배물들”을 맹비난하고, 세계화폐 규제에 다소의 질서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런던 경제회의를 사보타주했을 때였다. 월가는 경악하였고, 제임스 워버그 같이 영향력 있는 은행가이자 국무부 자문역이었던 인물은 사직했다.
거대한 체스판
– Z.브레진스키 / 김명석 옮김 / 삼인 / 2000.04.01
특히 ‘국제적’ 금융 기구 같은 전문 기구의 세계망을 미국 체제의 일부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은 ‘세계적’ 이익을 대표하며, 그들의 지역구는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은 미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 기원 자체가 미국의 이니셔티브, 즉 1944년의 브레튼우즈 회의에 근거하고 있다.
경제독법
– 곽수종 / 원앤원북스 / 2009.09.01
이미 언급한 바대로 경제적으로 영국의 쇠락은 금본위제도의 해체과정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파운드화에서 미 달러 기축통화제도가 굳혀지기에는 모두 네 차례의 국제환율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1919년부터 1931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금본위제도상의 기축통화였다면, 미국의 대공황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는 미국의 달러화와 영국의 파운드화가 모두 기축통화로 받아들여졌던 이른바 복수기축통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원래 ‘권력’이란 것은 두 사람이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므로 세계의 기축통화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파운드화에서 미국 달러화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현대 국제금융사에 있어 1944~1945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융성했던 유럽경제의 세계경제 지배가 마침내 미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과 함께 1945년 설립된 IMF(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가 있다. IMF는 지금까지 국제금융시장의 주요한 감독기관으로서, 또 자금조달기구로서 그 역활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백승욱 / 그린비 / 2005.04.25
브레턴우즈 체제는 실제 집행과정에서 원안이 상당히 변형되긴 했지만 고도금융을 통제한다는 핵심 목표는 관철됐다. 그러나 금-달러 본위제에 입각해 지배적 경제인 미국의 정책에 따라 전후 금융질서를 수립하게 된 브레턴우즈 체제는 그 기반이 되는 달러의 안정성이 깨지면 국제금융질서도 붕괴될 우려가 있다는 취약함을 안고서 출발했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영국을 배경으로 금융자유화를 시도한 고도금융세력이 1960년대에 팽창한 유로 시장에서 부활을 위한 공간을 찾아냈고, 또 한편으로는 1947년 하이에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몽페를랭 협회가 이들을 위한 신보수주의적 경제이념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요컨대 브레턴우즈 체제에는 처음부터 균열의 요소가 많이 있었다. 균열은 1967~73년 미국 경제의 이윤율이 하락해 미국 헤게모니가 물질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 넘어가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분명해졌다.
하룻밤에 읽는 경제학
– 마르크 몽투세 /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 중앙 / 2005.07.09
< 브레턴우즈 체제의 변화 >
브레턴우즈 체제의 개막 (1944년)
– 미국의 경제력과 달러의 태환성에 기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1960년대)
– 대외원조, 차관의 증가
– 미국기업의 해외 공장이전, 외국에 대한 직접투자
– 무역수지 적자(유럽과 일본의 등장)
– 적자 해결 위한 달러 발행 증가, 유로달러의 팽창
브레턴우즈 체제 신뢰도 하락 (1960 ~ 1970년대)
– 미국외 국가의 달러보유량이 미국의 금비축량을 추월
– 달러의 태환요구 증가, 달러의 신뢰도 하락
– 미국의 강한 달러정책 지속
브레턴우즈 체제 포기 (1970년대)
– 1971년 8월 닉슨 쇼크(달러의 비태환성 선언)
– 1971년 12월 스미소니언 10개국 회의에서 달러 평가 절하(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 이후 계속된 달러의 신뢰추락으로 각국 달러와 고정환율 포기
– 브레턴우즈 체제의 위기로 IMF의 역활 증가
지구화와 정치변화
– 오기평 / 오름 / 2000.05.12
19세기부터 시작된 정치체제 변동의 다이내믹은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식 복지국가의 형성으로 그 가닥이 잡혔다. 국가가 재정과 금융정책에서 독자성을 행사함으로써 시장의 지구화가 국내 정치 ·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흡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GATT의 무역자유화체제는 국가가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pegged and adjustable exchange rates)’를 채택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협약과 병행하여 실시되었다. 즉 국민국가 중심의 경제와 상호의존을 지향하는 국제경제 간의 상보관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복지체제를 제도적으로 결합시킨 케인스식 복지국가는 시장사회의 대치세력들에게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공존할 수 있는 터를 제공했다. 나라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수요의 촉진에 의한 경제성장과 고용확대, 생산의 합리화를 통한 포디즘과 산업자본의 집중, 국가와 사회세력들간 정책합의를 제도화한 코포라티즘(corporatism), 집중화 · 중앙화된 노동과 자본 간 단체협상 등은 케인스식 복지국가를 실천에 옮긴 제도적 기제였다(Garrett 1998, 796-98; Helleiner 1993, 20; Eichengreen and Flandrequ 1997, 1-2; Lash and Urry 1987).
1980년대 이후 지구화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되고 있다. 지구화는 거래 · 생산 · 금융시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 문화적 영역에 걸쳐 총체적 · 전방위(全方位)적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19-20세기에 겪었던 제1의 대변혁에 이어 제2의 대변혁이 21세기에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커런시 워
– 제임스 리카즈 / 신승미 역 / 더난출판사 / 2012.02.2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의 주요 강대국은 베르사유조약의 실수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세계 통화 질서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1944년 7월에 뉴햄프셔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 결과 제정된 규칙과 표준, 기관은 향후 30년 동안 국제 통화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44~1973년의 브레턴우즈 시대는 경기 후퇴기가 간간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통화 안정과 낮은 인플레이션, 낮은 실업률, 높은 성장, 실질 소득 상승을 이룬 기간이었다. 이 기간은 거의 모든 면에서 1921~1936년의 제1차 통화 전쟁 기간과 반대였다. 브레턴우즈협정에 따라 국제 통화 제도는 무역 상대국이 1온스당 35달러에 금으로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는 미국 달러를 통해서 금에 굳건히 기반을 두었고, 다른 통화와는 미국 달러 대비 고정 환율을 통해서 금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었다. 또한 브레턴우즈협정은 IMF가 무역 적자에 처한 특정한 국가에 단기 대출을 해주도록 했다. 각 국가는 IMF의 승인을 받을 때만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 있었으며, IMF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지속적인 무역 적자가 일어날 때만 평가절하를 허용했다.
많은 사람이 브레턴우즈협정을 원대한 국제협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았던 시절에 미국이 혼자 브레턴우즈협정의 구조를 좌지우지했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냉전 시기를 통틀어 최고 상태였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음에도, 1960년대 후반에 제2차 통화 전쟁의 시작을 1967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행 사건은 1964년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그의 ‘총과 버터’ 공약이었다. 총은 베트남 전쟁을 뜻하고, 버터는 빈곤과의 싸움을 비롯한 이른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화폐전쟁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옮김 / 코나투스 / 2007.04.13
화폐로서의 금의 지위를 배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미국 국내에서 유통 및 교환되는 금화를 폐지하고, 두 번째 단계는 세계적으로 황금의 화폐 기능을 없애는 것이다. 1944년에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른 달러 환전 시스템으로 두 번째 단계를 완성했다. 훗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가서야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 서미석 옮김 / 길 / 2007.10.25
브레턴우즈체제, 그것은 곧 ‘미국의 세기’임을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레턴우즈체제는 세 가지 핵심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국제수지 균형이 위기에 처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준비금을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둘째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위해 회원국 정부에 차관을 공여하는 세계은행(World Bank), 끝으로 ‘자유무역’의 조정된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합리적인 국제기구들이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영국과 미국을 위한 것들이었다. 특히 미국을 위한. 즉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내에서 실질적인 표결 통제권은 영국과 미국에 주어졌으며, 브레턴우즈체제는 근본적으로 ‘금본위제’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회원국의 통화가 달러화와 연동됨으로써 세계의 가장 강력한 통화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자국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전략적 이익을 통제하는 영국의 노선을 본받아 20세기 중후반 실질적인 패권국이 되었다.
달러의 경제학
– 애디슨 위긴 / 이수정 옮김 / 비지니스북스 / 2006.01.20
브레튼우즈 협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오늘날 상당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국제통화정책을 위한 모든 계회안이 세계 금본위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협약에 동의한 나라들은 금을 기준으로 소폭의 변동 폭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자국 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IMF가 설립된 이유는 일시적인 지급 불균형을 돕기 위해서였다.
… …
고정환율(금을 기준으로 고정된 통화가치)은 국가의 생산성과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한 분별있는 경제정책을 지지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따르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세력들 사이의 합의 하에 고정환율이 정해진다.
의도는 좋았지만, 사실상 국제통화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달러가 되었고, 다른 나라들은 금보다도 달러를 기준으로 자국 화폐의 환율을 고정했다. 결국 브레튼우즈 체제의 실제 성과는 금본위제를 달러본위제로 대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그 선의와는 달리 브레튼우즈를 통해 탄생한 협약과 체제는 전 후 유럽의 경제문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수년 동안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한편, 유럽으로부터 전쟁 채무 이자까지 벌어들이고 있었다. 미국의 준비금은 실로 막대했으며, 해마다 증가를 거듭하고 있었다.
글로벌 불균형
– 배리 아이켄그린 / 박복영 역 / 미지북스 / 2008.11.05
이 책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요즘 금융 분석가, 시사평론가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다시피 한 것처럼 최근의 글로벌 불균형을 1950 ~ 1960년대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비유하는 것은 늘 치명적인 오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유는 밝혀내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은폐하기도 한다. 그런 비유 때문에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지속 가능성과 달러의 안정성에 관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만심이 생겨나고 있다. 널리 퍼져 있는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미국은 브레튼우즈 통화 체제의 전성기에 최고의 기술 선진국이었고 달러는 압도적인 준비 통화였기 때문에 무역 수지와 경상 수지의 적자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브레튼우즈 방정식의 다른 변에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추격 경제’ 즉 유럽과 일본이 있었는데, 2차 대전 직후 이 두 지역의 소득 수준은 미국의 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나라들은 수출 주도 성장을 추구하면서 달러에 비해 자국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경제 규모의 증가에 비례하는 대외 준비금 축적을 위해 경상 수지 흑자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제 수지 적자를 봐서 좋은 ‘중심부’ 미국과 흑자를 봐서 좋은 ‘주변부’ 유럽과 일본 사이의 금융적 상호 의존이 20년간이나 균형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결국 1971년에 달러는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런 종말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브레튼우즈의 경험을 보면 계속 증가하는 미국의 경상 수지 적자나 그것과 쌍을 이루는 1990년대 말 이후 아시아의 흑자는 분명히 지속 가능한 수준이며 20년 정도는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브레튼우즈 때처럼 지금도 외국 중앙은행이나 정부는 달러를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미국은 그런 달러를 공급하는 비정상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생산한 것 이상으로 소비하며 분에 넘치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역시 브레튼우즈 때와 똑같이 고성장을 하는 ‘추격 경제’ 그룹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인 이 그룹은 수출 주도 성장의 촉진을 위해 달러 대비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고 대외 준비금을 쌓아가는 데 열중하고 있다. 미국이 경상 수지 적자를 기록해서 행복한 것처럼 이 나라들도 흑자를 기록해서 행복해한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불균형을 세계 경제나 세계 금융에 대한 위협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사실은 역사 분석에서나 정책 함의에서나 이런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세심한 분석이 아니라 캐리캐처에 가깝다. 브레튼우즈 국제 통화 체제가 허약하고 단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체제는 20년(1950년대와 1960년대) 동안 국제 통화 및 금융 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이 경상 거래에 대한 통제를 철폐한 1959년 초에야 실제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경상 계정 태환성을 회복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962년이었다. 그리고 1960년에 이미 달러는 외환 시장에서 압력에 시달렸다. 달러가 다른 통화에 대해 평가 절하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외국 중앙은행이나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62년에 만들어진 것이 소위 골드풀이다. 골드풀은 오늘날의 G10의 기원이었는데 이 나라들이 당시 개입 조정에 참가한 주역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小史에 불과해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소사이다. 그런 역사적 경험은, 브레튼우즈 체제하의 중심국의 만성적 적자는 균형의 결과라는 시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더욱이 1960년대에 ‘주변부’라는 하나의 응집적인 추격 경제 블록이 있었다는 관념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다. 독일과 같은 몇 나라는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기피했으며 통화절상을 허용할 의사도 있었다. 반면 영국과 같은 나라는 만성적 흑자는 커녕 만성적 적자를 겪고 있어서 달러에 대해 평가절하를 해야 했다. 프랑스 같은 나라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달러 지지에 덜 적극적이었다. 이런 사실 역시 더 어슴푸레한 역사적 소사에 지나지 않지만, 브레튼우즈 체제가 왜 유지되었으며 언제 그리고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이해라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05.12.11
1971년에 이르러 베트남 전쟁은 다른 선진 공업국들과 비교하여 미국을 경제적으로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닉슨 행정부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해체시켰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조직해온 이 체제 하에서 미국은 세계의 은행 노릇을 했습니다. 이 체제는 미국 달러를 금과 연계된 글로벌 준비 통화로 만들었고, 수입 쿼터 철폐에 대한 조건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닉슨은 이 체제를 실제로 와해시켰습니다. 금본위제도를 철폐했고, 달러의 태환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세를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는 감히 이런 조치를 취할 힘이 없었지만 닉슨은 그것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힘 있는 적들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국적기업과 국제은행은 브레튼우즈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해체해 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를 면밀히 연구해보면 닉슨이 그 당시에도 『월 스트리트 저널』같은 신문에서 공격당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바로 이때부터 힘 가진 사람들이 그를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워터게이트는 그 기회를 제공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2.11.18
브레턴우즈 협정은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 영국과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를 창설했을 때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理想,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자본의 이동을 규제해야 했습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서 제멋대로 이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언젠가 금융기관과 투자가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게 될 것이란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는 ‘실질적인 의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그들이 자본을 회수한다거나 그 밖의 다른 금융조작으로 국가를 위협하면서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고 악의적인 투기와 자본 유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교환율을 조절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켜낼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가 1970년대 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민간 기업, 특히 금융자본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자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금융자본의 이동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현상이 전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공공 서비스의 질이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왜곡되고, 실질임금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늘어나고 노동조건도 악화되었습니다 ….
불량국가
– 노암 촘스키 /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10.15
개발도상국가의 경우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의 시대는 전반적으로 볼 때 재앙이었다. 몇몇 국가들은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시장은 전지전능하다는 ‘신앙’을 거부함으로써 단지 잠정적으로만 재앙을 피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동아시아의 기적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방된 공식으로부터 상당히 거리가 먼 정책들을 취함으로써 이루어 낸 결과였다. 다만 동아시아의 떠오르는 스타인 한국은 1990년대 초 자본 자유화에 동의한 이후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다.” 그와 그 밖의 많은 분석가들은 자본 자유화가 한국이 겪은 금융 위기의 핵심 요인이고 ‘라틴 아메리카화’되어 가는 첫 단계라고 분석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엘리트들은 훨씬 더 심각한 부의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허약한 공동체 의식”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또 “외국의 고급 금융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럽과 미국식의 소비와 하이컬처(고급 소비 문화)를 탐욕스럽게 추구하게 하는 요인들이라고 국제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펠릭스는 지적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재산가들은 재산의 이동을 통해 누진 세금을 거부했고 기초 및 중등교육을 위한 지출을 제한하면서도 재정 위기를 겪을 때는 ‘관대한 나라’의 공공 구제금융을 끌어다 썼다. 이는 수세기 동안 자유시장 정책이 보여 온 전형적인 특징이다.”
매드 머니 Mad Money
– 수잔 스트레인지 / 신근수 옮김 / 푸른길 / 2000.06.01
1965년 2월에 드골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브레턴우즈 협정 하에서 설립된 국제적인 금본위제에 있어서 달러의 ‘무지막지한 특권’을 공격했다. 그는 전통적인 금본위제와 비교하여 이 제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유럽 공동 전선이 미국과 전능의 달러에 대항한다는 그의 꿈은, 국제 금융 개혁과 관련된 논쟁에서 서독이 프랑스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서독은 소련이라는 적군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안전 보장으로 미국에 의한 핵우산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독은 이에 대해 미국이 몇 번이나 확인한 바와 같이 암묵의 거래로 NATO에의 가맹과 지지, 금융 재정 운영에 있어서의 미국의 이해에 대한 추종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관련 그림>
– 당시 회담 장면
– 왼쪽의 미국 대표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영국 대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유대인인 화이트 뒤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 브레튼우즈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
– 1954년부터의 미국 기준금리(파란색)와 그 전의 기준금리 데이터가 없어 비슷한 3개월 채권금리(빨간색)로 1934년부터의 기준금리를 유추할 수 있다. 1981년까지는 상승하고 이후 지금까지 하락하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금리는 0%대로 내려와 1930~40년대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달러와 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위키백과 : 브레튼 우즈 체제
네이버 지식백과(경제학사전) : 브레튼우즈체제
2015-12-11 中 군사전략가의 美 금융제국 비판 <上>
2009-11-16 달러몰락 재촉…金의 반격
키워드에 대한 정보 브레튼 우즈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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