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전자 역사 | 당신이 몰랐던 삼성(Samsung)의 역사 통합편[브랜드 스토리]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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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영어: Samsung Electronics Co., Ltd.)는 휴대폰과 노트북의 전자제품, 에어컨과 냉장고의 가전제품, 메모리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종합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
산업 분야 전자제품
창립 1969년 1월 13일
창립자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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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계 순위 1위 삼성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과도 많이 엮여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기업!
과연 삼성은 어떻게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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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회사소개 | Samsung 대한민국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과 혁신 제품, 창의적인 솔루션으로 전 세계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9. · 75형 마이크로 LED 세계 최초 공개 · 차세대 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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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amsung.com

Date Published: 1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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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 나무위키

1968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고[21] 이에 따라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으며 1969년 12월 삼성전자-산요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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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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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에 대해 알아보자(역사와 현재)#1

삼성전자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를 수 없는 기업 우리나라의 유가증권시장의 약20%이상을 차지하는 거대기업이자 대한민국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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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b420.tistory.com

Date Published: 6/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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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반도체사업 40년, 도전과 창조의 역사

27년의 뒤쳐진 첫 걸음 ‘한국반도체 인수, 부품사업의 시작’ 1974년 12월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미 반도체산업의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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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amsungsemiconstory.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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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40년 성공비화 – 오늘의 삼성을 만든 5大 핵심 원동력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삼성전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 2010년 매출액 154조6300억원·영업이익 17조3000억원 달성한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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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nthly.chosun.com

Date Published: 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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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기록

삼성전자는 세계 방도체 시장에서 DRAM과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전제품과 영상가전, 및 휴대용 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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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neystudy.kr

Date Published: 9/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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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살기의 경제학] 삼성을 정점으로 올린 ‘반도체 … – 이코노믹리뷰

삼성전자 반도체의 역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미국과 일본은 각자가 개발한 반도체 칩들을 생산하며 세계 전자업계를 주도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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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onovill.com

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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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三星電子(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성전자㈜는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로 출발하였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로 사회 물의를 빚은 이른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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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5/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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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역사 – 부업하는 분석가

1938년 삼성의 설립자 이병철은 삼성을 한국에서 야채, 물고기, 과일 등을 중국에 수출하는 기업으로 시작했다. 그 후 10년 , 삼성은 밀가루나 사탕수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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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2nd-analysis.tistory.com

Date Published: 1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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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성 전자 역사

  • Author: 세상의모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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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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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성전자(영어: Samsung Electronics Co., Ltd.)는 휴대폰과 노트북의 전자제품, 에어컨과 냉장고의 가전제품, 메모리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종합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사업 분야 [ 편집 ]

2021년 12월 조직개편을 통해 CE부문과 IM부문을 DX부문으로 통합하였다.

삼성전자의 사업 분야는 제품의 특성에 따라 CE 부문(Consumer Electronics), IM 부문(Information technology & Mobile communications), DS 부문(Device Solutions) 3개의 부문, 전장부품사업 등을 영위하는 Harman 부문(Harman International Industries, Inc.과 그 종속회사)으로 나누어 독립 경영을 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표와 같다. (사업보고서의 I – 1. 회사의 개요 및 II. 사업의 내용 참조)[1]

부문 주요 제품 CE 부문 TV, 모니터,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의료기기 등 IM 부문 HHP, 네트워크시스템, 컴퓨터 등 DS 부문 반도체 사업부문 DRAM, NAND Flash, 모바일AP 등 DP 사업부문 TFT-LCD, OLED 등 Harman 부문 Headunits, 인포테인먼트, 텔레메틱스, 스피커 등

2017년 기준으로, 각 부문별 매출 및 영업이익, 총자산의 비중은 다음과 같다. 매출은 IM 부문에서 많이 나오나, 영업이익은 반도체 부문에서 많이 나온다. (사업보고서의 II. 사업의 내용 참조)[1]

부문 순매출액 영업이익 총자산 CE 부문 18.8% 3.1% 10.4% IM 부문 44.5% 22.0% 24.5% DS 부문 반도체 31.0% 65.6% 29.0% DP 14.4% 10.1% 15.4% 계 45.1% 75.2% 50.0% Harman 부문 3.0% 0.1% 3.2%

휴대전화

삼성전자에서는 스마트폰 분야에서 갤럭시 브랜드를 사용하는 휴대폰을 대표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의 전체 매출의 60%와 순이익의 약 70%의 비중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전망과 주가는 갤럭시 시리즈의 판매 실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2013년을 정점으로 판매 호조를 보이던 스마트폰 사업은 후발주자의 공세 등으로 2014년 들어 실적이 급감했고,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 또한 다소 어둡다.[2] 중저가폰 시장에서는 화웨이나 샤오미 등 중국 업체의 가파른 성장에 의해 더이상 점유율을 올리기 어렵게 되고 있고, 높은 가격의 폰 시장에서는 애플의 아이폰 시리즈와 대결해야하는 상황이라 다른 기업들에게 끼여 있는 상황이다.

가전 및 반도체

삼성전자의 제품은 텔레비전 등의 음향영상기기(AV),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가전제품, 스마트폰 등 각종 휴대전화,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의 컴퓨터 및 주변기기에서부터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소수의 제품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애플과 대비되고 있다. 가전제품 중 매출의 비중이 큰 것은 LED TV를 비롯한 다양한 TV 제품들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는 전세계적으로 TV와 휴대폰, 컴퓨터는 물론 각종 전자제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경쟁사인 애플도 삼성전자에서 메모리를 공급받고 있다.[3] 반도체 중 DRAM의 시장점유율은 2017년 3분기 기준 44.5%로 세계 1위를 지켜오고 있다. 27.9%로 2위를 차지한 SK하이닉스까지 합하면, 한국 기업의 DRAM 시장점유율은 72.3%로 압도적이다.[4]

TV 부문에서 삼성전자는 2013년까지 8년 연속 TV 판매량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5] 세계 LCD 패널 시장에서는 9년 연속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6]

역사 [ 편집 ]

필리핀에 위치한 삼성전자 매장

1938년 설립된 삼성물산을 모태로 삼성은 식품과 의복을 주력으로 해 오다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회동을 계기로, 1969년 삼성전자를 창립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하게 되며 똑같이 전자 사업을 하고 있는[7] LG그룹과 함께 첫 모체 진로그룹의 부도로 위기에 놓인 GTV 인수 물망에 거론됐으나[8] 가격 협상에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무산됐다.

이듬해인 1970년 삼성NEC가 설립되어 백색가전 및 AV 기기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였고 1980년에는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그리고 1983년 2월에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DRAM 사업에 진출한다는 ‘동경 선언’을 발표하였다.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64K DRAM을 개발하였다. 이때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투자는 1990년대와 2000년대로 이어지며 지금의 삼성전자 발전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된다.

삼성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계 상위권에 속하는 대한민국 내 여러 대기업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97년 불어 닥친 경제위기를 계기로 삼성은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통해 대한민국 내에서 재계서열 1위의 대기업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는 당시 경제위기로 대한민국 내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중 16곳이 부도를 맞아 해체된 것과 대비된다. 이후 애플의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삼성전자는 소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사용하여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9][10]

1980년대~1990년대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의 목표는 경쟁사인 일본 기업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 삼성의 세계 점유율은 평면 TV와 반도체 메모리에서 1위를 차지하며 모두 일본 업체들을 앞서고 있다. 또한 삼성은 2007년에는 휴대폰 부문에서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에 등재되었다.

스마트 헬스케어 분야에서 새 성장동력을 모색해오던 삼성은 2010년 12월에 메디슨을 인수함으로써 헬스케어사업부문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갤럭시 라인업을 발표하였으며,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지 2년만인 2011년 3/4분기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오른다. 삼성전자는, 2012년부터,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전체 휴대 전화 점유율 1위, 휴대 전화 부문 매출액 2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3년 2분기 기준으로 스마트폰 부분 영업이익 면에서도 애플을 추월하여 1위를 달성하였다.(SA조사, 2013년 2분기, 삼성 52억불, 애플 46억불) 또한 애플과 삼성을 제외한 다른 휴대폰 회사의 순이익은 삼성과 애플의 1/100도 안되는 수준으로 휴대폰 부분 전체 영업이익의 1%마저도 채 점유하지 못하고 있다.

2013년 판매호조를 보이던 스마트폰 사업은 2014년 들어 급격하게 수익이 악화되었다. 이는 스마트폰 시장이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있고,[11] 기술의 상향평준화로 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과의 경쟁 또한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의 전체 영업이익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삼성전자 전체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2] 2021년 1분기 전세계 매출 기준 스마트 폰 점유율도 17.5%로 45%를 차지하고 있는 애플에 크게 뒤쳐져있다.[13]

연표 [ 편집 ]

창업기 (1969년 ~ 1971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1969년 12월 삼성-산요전기 설립

1970년 1월 삼성NEC 설립

1970년 11월 흑백 텔레비전 생산 시작

가전 기반 성장기 (1972년 ~ 1982년)

1972년 11월 내수용 흑백 텔레비전 생산 시작

1973년 8월 수원으로 본사 이전, 생산과 관리업무의 합리화 추진

1973년 12월 가전제품 생산공장 준공

1974년 3월 냉장고 생산 시작

1974년 12월 세탁기 생산 시작

1975년 11월 모니터 생산공장 준공

1976년 2월 절전형 하이콜드 냉장고 생산 시작

1976년 4월 컬러 텔레비전 자체 개발

1978년 7월 미국 현지 판매법인 설립

1978년 12월 수출 1억 달러 돌파

1979년 6월 전자레인지 생산 시작

1980년 2월 CIP 시행

1980년 5월 에어컨 생산 시작

1982년 9월 포르투갈 최초의 현지 생산법인 준공

1982년 12월 “한국 전자통신(주)”에서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반도체 부문 태동기 (1983년 ~ 1990년)

1983년 3월 개인용 컴퓨터 생산 시작

1983년 4월 64K디램 개발.

1983년 8월 수출 5억불탑 수상

1984년 2월 “삼성전자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1985년 11월 영국 현지 판매법인 설립

1985년 12월 미국 현지 생산법인 설립

1986년 7월 1메가디램 개발

1987년 5월 미국 산타클라라, 일본 동경에 연구분소 설립

1987년 10월 영국 현지 생산법인 준공, 생산 개시

1988년 10월 프랑스 합작 판매회사와 태국 현지 생산법인 설립, 멕시코 현지 생산법인 준공, 생산 개시

1988년 11월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 흡수합병.

1989년 5월 4메가 마스크롬 개발

반도체 부문 성장기 (1991년 ~ 2003년)

1991년 세계 최초로 문자표시 카세트 생산 시판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디램 완전 동작 시제품 개발

1993년 제2창업 5주년을 기념해 현재의 CI로 변경 (타원 속 SΛMSUNG )

) 1994년 세계 최초로 256M 디램 개발

1996년 세계 최초 1기가 디램 개발

1996년 96광고캠페인 新현모양처 TV광고 개시

1998년 세계 최초로 고선명 디지털 VCR, 256M 디램(2세대), 4기가 반도체 전공정기술, 64M 램버스 D램 모듈 개발

1999년 홈오토사업 서울통신기술(주)로 H/A사업 이관

1999년 세계 최초로 256M 디램 양산과 텔레비전 폰 개발

2000년 9월 정보통신 전제품 세계 최초 TL 9000 인증 획득

2002년 7월 고급 백색가전 브랜드 “하우젠” 발표

2003년 12월 플래시메모리 전체, 첫 세계 1위 달성

스마트폰 및 TV 사업 성장기 (2004년 ~ 현재)

주요 제품 [ 편집 ]

TV [ 편집 ]

삼성 UHD TV

세계 TV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연이어 베스트셀러 제품들을 내놓고 있는 히트 제조기다. 2009년 삼성전자는 3,100만 대의 평면 TV를 판매해 4년 연속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2010년 초 삼성전자는 LED TV 1,000만 대와 더불어 총 3,900만 대의 TV를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가 다시 이를 28%나 늘어난 5,000만 대로 높여 설정했다 삼성전자는 핑거 슬림의 디자인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LED TV로 한발 앞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2009년 3월 세계 최초로 선을 보인 LED TV는 260만 대를 판매해 신시장 창출에 성공했다.삼성전자는 2006년 LCD TV, 2009년 LED TV 등 해마다 밀리언셀러 TV 제품을 탄생시키며, ‘5년 연속 밀리언셀러’ 히트 계보를 이어 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0년에도 8월 중 3D TV ‘100만대 판매’를 달성해 이 계보를 이었다. 삼성전자는 2009년부터 2014년까지 5년 연속 글로벌 점유율 20%를 넘었다.[18]

스마트 TV [ 편집 ]

TV 부문에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보는 TV’에서 ‘즐기는 TV’로의 변화다. 기존에 수동적으로 TV를 시청하던 소비자들은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콘텐츠를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하고 있다. 삼성은 이같은 수요를 파악하며 2007년 인터넷TV 출시로 TV를 시청하면서 실시간 인터넷 정보를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이른바 ‘스마트 LED TV’도 개발하고 있다. 2008년에는 ‘Power Infolink’, 2009년에는 위젯 기능으로 더욱 새로워진 ‘인터넷@TV’로 시장을 주도했다. 2010년에는 3D TV 출시와 함께 새롭게 선보인 ‘인터넷@TV 2010’ 기능으로 이용자가 뉴스•날씨•증권•UCC•영화 등 기존 인터넷 서비스 외에도 삼성전자의 세계 최초 멀티디바이스 애플리케이션 스토어인 ‘삼성 앱스’의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삼성 앱스는 2010년 하반기부터 한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내년에는 유럽지역까지 유료 프리미엄 서비스가 확대 실시됨에 따라 소비자들에게 국가별로 특화된 로컬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19]

3D TV [ 편집 ]

삼성전자는 3D 입체영상을 즐길 수 있는 3D TV를 출시 6개월 만에 100만대를 판매, 시장 주도권을 굳히고 있다. 이는 2010년 초 시장조사기관이 예측했던 전 세계 3D TV 수요 123만대에 근접한 수준이다. 안경이 필요 없는 3D TV도 개발 중이다.[20] 삼성전자는 3D 입체영상과 프리미엄 입체음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3D 홈시어터(HT-C6950W)도 처음으로 내 놓았다. 삼성전자는 3D 홈시어터까지 출시함으로써 3D TV뿐만 아니라 3D 블루레이 플레이어•3D 콘텐츠•3D 안경 등을 총 망라한 ‘3D 토탈 솔루션’을 구축하고 3D 엔터테이먼트 환경을 업계 최초로 완성했다고 말하고 있다.[21]

삼성전자는 3D TV에 3D 컨텐츠 스트리밍을 제공할 계획이다. 자체 온라인 앱스토어를 가진 삼성전자 3D TV는 훌루 플러스 및 냅스터 등의 프로그램을 사용자들이 직접 TV의 하드 드라이브에 다운로드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삼성 앱스토어는 개발자들이 실제로 새로운 앱 플랫폼으로부터 돈을 벌 수 있는 프리미엄 컨텐츠를 추가할 예정이다. 또한 앱스토어를 통해 3D 컨텐츠도 제공할 계획이다.[22]

LCD/LED 패널 [ 편집 ]

삼성 노트북3

삼성전자의 패널은 ‘더욱 얇게’ 기술 개발의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200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두께인 3.9mm의 40인치 LED TV용 초슬림 패널 개발에 성공했다. ‘Needle Slim’으로 이름 붙여진 이 패널은 두께가 약 50mm인 기존 LCD 패널의 약 1/12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패널의 두께를 크게 줄이면서도 풀HD급 해상도, 120 Hz 구동, 5000:1의 명암비 등 고화질 성능은 그대로 유지했다. [23] 삼성전자는 2007년 10월 두께 10mm인 40인치 LCD TV 패널을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10mm 벽을 최초로 돌파했으며, 2008년 10월에는 다시 7.9mm 두께를 기록하며 세계 최초 기록을 이어 왔었다. [24]

삼성전자는 LCD TV용 패널과 함께 24인치 LCD 모니터용 패널과 12.1인치 노트북용 초슬림 LCD 패널도 개발해, 초슬림 LCD 패널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모니터용 패널은 두께가 3.5mm이며, 노트북용 패널은 두께가 1.64mm에 불과하다. [23]

모바일 장치 [ 편집 ]

2009년 한 해 삼성전자의 휴대 전화 판매량은 2억 2700만대로 노키아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25]

2009년에는 북미 지역 6분기 연속 시장 점유율 1위, [26] 유럽 지역 시장 점유율 25% 상회 등 선진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했고, 신흥 시장에서는 제품 경쟁력 및 브랜드 인지도를 바탕으로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27] 삼성전자는 휴대 전화가 터치폰 시장으로 전환하며 더욱 선명하고 깔끔한 화질을 보여 줄 수 있는 디스플레이 화질 경쟁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AM OLED폰으로 ‘휴대 전화 화질경쟁’ 트렌드 경쟁을 벌이고 있다.[28]

2012년에는 휴대 전화 판매 점유율 1위에 올랐다.[29]

태블릿 컴퓨터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삼성 갤럭시 탭 시리즈 입니다.

스마트 디바이스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삼성 갤럭시 입니다.

삼성전자의 스마트 디바이스 시리즈를 크게 나누자면, 플래그십(주력제품) 디바이스인 갤럭시 S 시리즈와 갤럭시 노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갤럭시 S II는 2012년 2월까지 출시 10개월만에 판매 대수 2천만대를 돌파하고, 6월까지 출시 13개월 만에 2천8백만대를 판매하는 위엄을 달성했다. 삼성 갤럭시 노트 역시 출시 7개월만에 700만대를 판매하였다.[30]

2014년 1월 20일 미국 경제 주간지 포천이 전문가 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13년의 마지막 4/4분기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삼성은 애플보다 3970만대 많은 9500만대의 갤럭시를 판매하였다고 밝혔다. 아이폰5s, 아이폰5c 출시 효과에 힘입어 애플이 지난해 4/4분기 약 5530만대의 아이폰을 판매했으나, 오히려 삼성은 갤럭시로 애플과의 판매량 격차를 작년의 2배로 늘렸다[31].

반도체 [ 편집 ]

삼성 메모리 DDR-SDRAM

창업주 이병철은 회사 내의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3년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병철은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의 자연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이 제2의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고 반도체 사업 진출 이유를 밝혔었다. 삼성전자는 그로부터 불과 10개월 만에 세계 3번째로 64K D램을 내놓음으로써 반도체 업계는 물론 한국 내외 경제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후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사업초기에 어려움이 컸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고, 1992년 64M D램을 최초로 개발, 마침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했으며, 1993년에는 드디어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로 올라섰다. 1994년, 1996년 256M과 1G D램을 연속 최초 개발, 반도체를 한국의 대표산업으로 키웠다. 2002년에는 낸드플래시 세계 1위에 올랐으며 2006년 세계 최초 50나노 D램과 2007년 30나노 낸드 등을 최초로 내놓으면서 삼성전자는 메모리업계 점유율 30%가 넘는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32]

삼성전자는 2010년 들어서도 ‘세계 최초’ 기록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30나노급 D램 양산도 삼성전자가 처음이다. 삼성전자는 30나노급 2Gb DDR3(Double Data Rate 3) D램을 7월부터 양산하기 시작했다. 30나노는 머리카락의 4천분의 1정도의 굵기 정도다. 30나노급 D램은 기존 40나노급 D램보다 60% 정도 생산성이 높다. 원가 경쟁력도 50~60나노급 D램의 2배 이상이며 소비전력도 50나노급 D램보다 최대 65% 이상 줄일 수 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에 의하면 D램의 호조세로 삼성전자는 2010년 2/4분기 D램 순위에서 시장점유율 선두를 고수했다. 가트너는 보고서에서 “삼성전자는 성장세를 타고 35%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해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고 전했다.[33]

삼성전자는 2010년 반도체에 대한 투자 규모를 11조원으로, 특히 메모리 반도체 시설투자를 당초 계획했던 5조5,000억원에서 9조원으로 늘렸다. 이 같은 움직임은 2010년에 삼성전자가 지속적으로 이들 부문에서 세계 최대 공급업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할 전망이다.[34]

삼성전자는 2011년 20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하였다.

한편 시장조사기관 IC인사이츠는 삼성전자가 2014년에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업계 1위로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1999~2009년간 삼성전자의 매출은 CAGR(연평균성장률) 13.5%를 보였고 인텔은 3.4%를 기록했는데, 이를 근거로 2014년 삼성전자의 매출이 인텔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했다.[35]

다른 또 하나의 관심은 삼성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파운드리 분야다. 이 분야에 진출한 지 5년이 지난 2010년 삼성전자는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 사업을 반도체 성장의 새로운 기둥으로 삼기 위해 공격적 행보를 취하고 있다.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순수 AP 시장에서 삼성전자 AP 점유율은 2011년 72.9%를 보였다. 2위 TI를 큰 폭으로 따돌렸다. AP+통신 통합칩까지 포함하면 24.5%로 퀄컴에 이어 2위다.[36]

생활가전 및 기타 [ 편집 ]

삼성 카메라 GX-10

생활가전 분야도 삼성전자가 강점을 발휘하고 있는 분야다. 2009년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서도 2008년보다 매출이 27%나 늘어나 업계 최고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37]

대한민국에서는 지펠 냉장고 등의 제품이 높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를 이어갔고, 북미와 유럽, 구소련지역에서는 프리미엄 냉장고와 드럼 세탁기, 에어컨 등이 호조를 보였으며, 스팀 오븐과 로봇 청소기 등의 혁신 제품 출시로 디지털 가전 기업의 이미지를 더욱 굳혔다. 삼성전자는 프리미엄 제품과 보급형 제품으로 양분화되고 있는 가전제품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심어주는 한편 신흥시장에서는 현지 생활과 문화에 맞도록 특화기술을 채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009년 삼성전자는 디자인과 첨단 기능, 휴대성을 모두 갖춘 3세대 프리미엄 미니 노트북 N310과 슬림 노트북 X420 등의 제품으로 모바일 PC의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며 노트북 600만 대 판매를 달성했다.

차세대 전략사업 중 하나인 프린터 사업 부문에서는 원터치 프린팅 기능을 장착한 모노 레이저 프린터 및 복합기, 통합출력관리서비스에 최적화된 기업용 초고속 디지털 복합기 등을 선보였다. A4레이저 프린터가 세계 시장점유율 2위에 올랐으며, 모노 레이저 프린터와 복합기, 컬러 레이저 프린터 및 복합기 등 각 분야에서도 세계 1, 2위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특히 레이저 복합기 부문에서는 최초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38]

2010년에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내세운 프리미엄 노트북 R580과 미니 노트북 N210을 비롯해 세계 최소형 모노 레이저 프린터 ML-1660과 컬러 레이저 복합기 CLX-3185 등 신제품 생활가전 고효율 에너지 제품, 친환경 제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분야도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분야다. ‘World’s First & Best’ 기능의 프리미엄급 카메라를 지향한 WB550과 듀얼 LCD를 적용한 ST550, 64GB SSD를 탑재한 Full HD 캠코더 HMX-H106을 출시했다. 2009년에 삼성전자의 카메라는 컴팩트 카메라 부문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3위를 기록했고 프리미엄 제품을 중심으로 매출 구조가 개선되었다. 하지만 결국, 디지털 카메라 및 캠코더 시장에서 철수했다. [39]

2010년에는 차세대 신개념 렌즈 교환식 카메라 NX10 등을 통해 신규 카테고리 시장의 주도권 확보 경쟁에 나섰으나, 결국 철수했다. MP3 플레이어 사업에서도 프리미엄 MP3 ‘M1’, 세계 초소형 DivX MP3 플레이어 ‘R1’ 등 멀티미디어 사용성을 강화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무선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개발해 2007년 국제 기술표준으로 채택된 모바일 와이맥스(Mobile WiMAX, WiBRO)가 세계 대형 이동통신 시장에서 본격으로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등에서 서비스 상용화에 성공한 이래 2010년 기준으로, 세계 75개국 139개 사업자가 서비스를 추진 중이며 아시아, 중남미, 동유럽 등 개발도상국의 신규 사업자를 중심으로 시장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40]

스토리지 분야에서는 2009년에 2.5인치 디스크 1장당 250GB급 HDD 신제품 출시 등으로 세계 시장점유율 10%대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에는 업계 최고 용량인 장당 320GB급 고성능 2.5인치 HDD 출시와 외장형 제품의 본격 판매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2011년 4월, 삼성전자의 하드디스크 사업부를 시게이트에게 매각하고 SSD에 집중하기로 한다.[41] 더불어 삼성전자와 씨게이트간에 특허를 공유하고 삼성 반도체를 씨게이트의 SSD에 공급하고 씨게이트의 하드디스크 제품은 삼성의 PC와 노트북에 쓰기로 하고 상호 포괄협력을 하기로 하였다.

시장 점유율 [ 편집 ]

브랜드 [ 편집 ]

단종 브랜드 [ 편집 ]

브랜드 가치 [ 편집 ]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가 2014년 발표한 혁신기업순위에서 구글에 이어서 3위에 올랐다.

미국 Brandiroty가 발표한 2013년 ‘Global 500 2013’에서 삼성은 2위로 선정되었다.

미국 포브스지가 발표한 2013년 ‘세계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삼성은 8위로 선정되었다. [56]

영국 컨설턴트 Millward Brown이 발표한 100개 기업리스트에 의하면 삼성은 2009~2010년 세계에서 가치 있는 브랜드로서 가장 많이 성장한 기업이다. 브랜드 가치는 80% 상승, 금액으로는 11.3억 달러로 세계 68위를 차지하였다. [57]

미국 컨설팅 업체 Ruputation Institute가 발표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평판 높은 기업’ 순위에서 삼성은 22위에 선정되었다. [58]

미국 비즈니스위크가 발표한 2010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는 11위에 선정되었다.[59]

영국 브랜드파이낸스가 발표한 2012년 500대 글로벌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는 6위를 차지하였다.

사명과 로고 [ 편집 ]

삼성전자의 기업명인 ‘삼성’은 ‘크고, 밝게, 빛나는 3개의 별’ 등이라는 뜻이다. 이 사명에서 ‘三’이라는 숫자는 한자어에서 ‘크고와 강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星’에는 ‘밝고, 높고, 빛나다’ 등이라고 하는 기원이 담겨 있다. 삼성 로고의 워드마크 디자인은 유연성과 단순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우주와 세계무대를 상징하는 타원을 비스듬하게 처리해 동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또 S자와 G자의 터진 부분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기운이 통하게 함으로써 세계와 호흡하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워드마크의 기본색상은 그 동안 계속 사용해 왔던 청색을 유지해 연속성을 가지도록 하였다. 삼성의 공통 색상인 청색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색으로 고객과 보다 친숙해지려는 의지를 담았으며,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상징한다고 한다. 영문 로고 디자인은 기술주의를 통한 고객지향 의지와 첨단기업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다.[60]

(삼성 SAMSUNG) 1969년 부터 1980년 까지 사용되었던 로고

(SAMSUNG) 1981년 부터 1992년 까지 사용되었던 로고

(SΛMSUNG 삼성전자) 1993년 부터 2014년 까지 사용되었던 로고

(SΛMSUNG) 2015년 부터 현재까지 사용되는 로고

슬로건 [ 편집 ]

앞서가는 새기술

(1974년 ~ 1983년)

(1974년 ~ 1983년) 풍요로운 미래창조

(1983년)

(1983년) 최초생산으로 기술인정 최다 수출로 품질인정

(1983년)

(1983년) 세계가 인정한 기술 세계가 인정한 품질

(1983년 ~ 1988년)

(1983년 ~ 1988년) 첨단기술의 상징

(1983년 ~ 1988년)

(1983년 ~ 1988년) 휴먼테크

(1985년 ~ 1990년)

(1985년 ~ 1990년) 인간과 호흡하는 첨단기술

(1989년 ~ 1992년)

(1989년 ~ 1992년) 新휴먼테크: 고객사랑 제품사랑 환경사랑

(1993년)

(1993년) 기술의 힘으로 세계와 겨루는 삼성전자

(1993년)

(1993년) 세계 1등 품질에 도전한다.

(1994년)

(1994년) 고객 신 권리선언 – 작은약속 큰실천

(1994년)

(1994년) 세계 1등 제품만을 만들겠습니다.

(1994년 ~ 1995년)

(1994년 ~ 1995년) 멀티미디어의 삼성전자

(1995년 ~ 1997년)

(1995년 ~ 1997년) Smart & Soft

(1996년 ~ 1997년)

(1996년 ~ 1997년) 또 하나의 가족

(1997년 ~ 2009년)

(1997년 ~ 2009년) How to Live Smart

(2011년 ~ 2012년)

(2011년 ~ 2012년) 자유롭게, 남다르게

(2016년 ~ 현재 )

(2016년 ~ ) Do What You Can’t

(2017년 ~ 현재 )

(2017년 ~ ) 가전을 나답게

(2020년 ~ 현재)

디자인 [ 편집 ]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 이후 소위 ‘디자인 경영’을 강화하며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43층 본사 빌딩 안에는 디자인센터가 있으며 창업 당시 2명이었던 디자이너가 현재는 900여 명으로 늘었다. 삼성은 2년 주기로 디자인을 재검토한다. 처음 1년 동안 유행을 분석하고 상품 전략을 계획, 2년째에 새로운 디자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삼성 측에서는 대한민국 내와 밀라노 런던 등 7곳에 운영하는 디자인 센터에서 현지 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산업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음을 홍보하고 있다.[61]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삼성전자는 디자인 관련 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2009년 IDEA에서 8개의 상을 받아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기업으로 올라섰으며 iF에서도 역시 최다 수상 기업이었다.

2010년 iF Material Award에서는 골드 어워드를 받은 외장형 하드 디스크를 포함 총 5개 제품을 수상했다. iF Material Award는 독일 하노버 International Forum Design Hannover가 주관하는 디자인 소재, 가공 분야의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이다. 2010년에는 가전, 가구, 산업 디자인 기업 등을 대상으로 총 42개의 제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삼성전자는 외장형 하드 디스크, 풀터치스크린폰 제트ㆍ햅틱 아몰레드, 양문형 냉장고, 콤팩트 디지털 카메라, 레이저 프린터 토너 등 총 5개 제품을 수상하였다.

2010년 iF Product Design Award’에서도 삼성전자는 21개 제품을 수상, 최다 수상 기업이 됐다. 또 iF에서 주최하는 5개 어워드(제품, 소재, 커뮤니케이션, 패키지, 콘셉트 분야)의 2년 간 실적을 누적 집계하여 발표하는 순위에서 디자이너들의 창의성과 누적 수상실적 두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14년 출시한 갤럭시S5는 디자인 면에서 호불호가 있었으나, 삼성의 스마트폰 사업 부진의 시작이라고 봐도 될 만큼 파급이 큰 디자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갤럭시S5 쿠퍼 골드”를 밴드에이드(일회용 반창고)에 비유하며 혹평하기도 했다.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폼팩터를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대, 최근 풀 메탈 케이스를 채택한 “갤럭시A” 금속 소재의 태두리를 사용해 변화를 준 “갤럭시 알파”를 출시 동반출시한 “갤럭시 노트 엣지”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변화에 이어 형태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환경 [ 편집 ]

현재 삼성전자는 2013년까지 매출액 기준 온실가스를 2008년 대비 50% 감축하고 제품 에너지 효율을 40% 향상한다는 목표로 녹색경영을 추진 중이다. 삼성전자는 녹색경영 비전으로 “Creating New Value Through Eco-Innovation(친환경 혁신 활동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을, 친환경 슬로건으로 “Planet First”를 발표했다. 이를 위해 핵심 추진 과제로 사업장과 제품 사용 시 온실가스 감축, 친환경 제품 출시 확대 등을 제시했다. [62]

특히 한국 사업장에 온실가스 감축설비를 도입해 2010년 상반기 기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31% 감축했고 LCD사업부는 7월 15일 SF6(육불화황)을 감축하는 CDM(Clean Development Mechanism; 청정개발체제) 사업의 UN 승인을 취득하는 등 지속적인 온실가스 저감을 실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8개, 해외 31개 전 생산사업장의 온실가스 인벤토리 구축을 완료하고, 세계적인 검증 기관인 삼일-PWC로부터 온실가스 배출량 검증서를 취득했다.

삼성전자는 2009년 말부터 미주, 중국, 유럽, 동남아 등 글로벌 사업장의 온실가스 인벤토리 관리체계를 구축했으며 해외법인의 온실가스 담당자 양성 등 해외 법인 자체적인 기후변화 대응능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63]

글로벌 환경마크 수준의 Good Eco-Product(내부 기준) 개발율은 2010년 목표(80%) 대비 11%를 초과 달성했으며, 2010년 상반기 기준 글로벌 환경마크를 2,134개 모델에 대해 취득함으로써 4년 연속 친환경 제품 출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폐전자제품 회수•재활용 활동도 가속화해 2009년 전 세계 60개국에서 회수•재활용한 실적은 24만톤에 이른다. 특히, 미국에서 삼성전자의 자발적 재활용 프로그램인 “Samsung Recycling Direct”를 캐나다까지 확대했으며, 2009년 미국 환경 NGO인 ETBC(Electronics Take Back Coalition)로부터 ‘최고의 친환경 재활용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다. [64]

사업부문 및 경영진 [ 편집 ]

삼성의 사업부문은 크게 완제품 분야와 부품 분야로 나뉜다. 완제품 분야는 휴대폰과 PC, TV, MP3 플레이어, 프린터, 카메라, 그리고 에어컨, 세탁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군으로 이뤄져 있다. 부품 부문은 반도체와 LCD로 나뉜다. 반도체 분야는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 분야와 급성장 중인 시스템 LSI 부문, 스토리지 시스템 부문으로 이뤄져 있다. 삼성전자는 2010년, 디지털 이미징 사업부를 인수함으로써, 기존의 영상 디스플레이, IT 솔루션, 생활가전, 무선, 네트워크, 반도체, LCD 사업부를 포함한 총 8개의 사업부 체제를 구성하게 되었다. 또한 사업시너지 강화 차원에서 세트 사업조직을 재편하고, DAS (디지털 에어 솔루션) 사업팀과 2010년 초 합병한 삼성광주전자 (생활가전 및 에어컨 제조)를 생활가전사업부 산하로 통합했다. STB (셋톱박스) 사업조직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산하로 통합한 것도 눈에 띈다.

2009년 12월, 최지성 대표이사 단독체제를 선보였던 삼성전자는 이듬해인 2010년 12월, 최지성 대표이사 부회장과 이재용 최고운영책임자 사장의 투 톱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이번 인사는‘한층 젊어진 경영진’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이 같은 젊은 조직론에 발맞춰 임직원들이 염색을 하는 재미있는 일화도 보도된 바 있다.[65] 아울러 해외시장의 변화에 발맞춰 유럽지역과 영국 거점을 구주 통합법인으로 합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을 하나로 묶어 중국 통합법인을 출범시키는 등 해외영업 거점도 재편했다.

이사회 [ 편집 ]

삼성전자는 이사회 내 위원회로서, 경영위원회, 감사위원회,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 보상위원회를 설치 및 운영하고 있다. (정관 제28조의2) 또한 이사회 내 위원회는 아니지만, 사내이사 및 주요 팀장급으로 구성된 “사내평가보상위원회”를 두고 있다. 또한 별도의 지배구조위원회를 두고 있지 않으나, 사외이사추천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가 지배구조 개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66] 이사회는 사내이사 5인과 사외이사 6인, 총 11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법 제 542조의8에 따라 사외이사를 과반수로 구성하고 있다.[67]

구분 이름 직명 및 담당업무 / 약력 사내이사 이재용 회장 권한대행 겸 부회장 김기남 대표이사 부회장 (DS) 김현석 대표이사 사장 (CE) 고동진 대표이사 사장 (IM) 한종희 사업부장 사장 (VD) 최윤호 경영지원실장 사장 사외이사 박재완 이사회 의장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선욱 전 법제처장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박병국 전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한국공학한림원 일반회원, 정회원 김종훈 Kiswe Mobile 공동 창업자 & 회장 김한조 하나금융나눔재단 이사장

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 안규리 사단법인 라파엘인터내셔널 이사장

사단법인 생명잇기 이사장

사업장 [ 편집 ]

삼성전자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 내 사업장 위치는 다음과 같다.

본사: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 (매탄동)

서초사옥: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74길 11 (서초동)

구미1사업장: 경상북도 구미시 1공단로 244

구미2사업장: 경상북도 구미시 3공단3로 302

기흥사업장: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삼성2로 95

화성사업장: 경기도 화성시 삼성전자로 1

온양사업장: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배방로 158

천안사업장: 충청남도 천안시 번영로 465

광주사업장: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산단6번로 107 (오선동)

행정처분 [ 편집 ]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에 대한 방해 [ 편집 ]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 3월 18일 삼성전자에 조사방해를 이유로 역대 최고액인 4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2011년 3월 24일 이후 조사요원 진입저지, 자료삭제, 허위자료 제출 등의 방법으로 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드러났다.[68]

삼성전자는 2011년 3월 24일 오후 2시 20분 휴대전화 유통과 관련해 가격을 부풀린 혐의에 관해 조사를 나온 공정위 공무원들의 진입을 50분간 저지하였다. 그 동안 핵심 자료가 들어 있던 컴퓨터 3대는 텅빈 PC로 교체되었다. 이는 무선사업부 지원팀장 박 모 전무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또한 무선사업부의 부서장인 김 모 상무는 당시 수원사업장에 있었음에도 조사 공무원의 전화에 서울 본사에 출장 중이라며 조사를 거부하였다. 결국 조사요원들은 3시 10분에야 조사 대상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소득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요원들이 철수하자 부서장은 숨겨뒀던 PC를 가져와 파일삭제프로그램으로 조사대상 자료를 모두 없앴다. 삼성전자 보안담당 부서인 정보보호그룹은 이틀 뒤인 26일 열린 회의에서 24일의 조사방해에 대해 “대처를 잘했다”고 자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사건 이후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보안규정을 강화하였다. 조사공무원이 방문해도 사전연락이 없으면 정문에서부터 차가 못 들어오게 하고 바리케이드 설치, 주요 파일에 대해 대외비 지정, 영구삭제, 자료는 서버로 집중할 것 등이 보안규정의 골자다.

삼성전자의 조직적인 방해로 허탕을 친 공정위는 이후 조사공무원의 출입지연 사유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 부서가 속한 건물의 출입기록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2011년 7월 11일부터 두 차례 열린 대책회의에서당시 PC교체를 수행한 직원 이 모의 이름이 삭제된 허위 출입기록을 제출하기로 하였다.[69]

삼성전자가 조사방해로 과태료를 부과받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삼성전자는 2005년과 2008년 조사 방해로 5000만원, 4000만원의 과태료를 각각 부과받았다. 2011년 3월에 삼성전자의 조사방해가 있은 이후 민주당의 박선숙 의원은 조사방해 행위에 대한 벌칙을 종래의 과태료 부과에서 형사처벌로 강화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2011년 4월 7일 발의하였다.[70] 형사처벌 규정을 신설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012년 2월 27일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2012년 6월부터 시행된다.인용 오류: 열린 태그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가격 담합 [ 편집 ]

2012년 1월 12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세탁기, 평판TV, 노트북 PC 등의 판매가격을 합의한 삼성전자와 LG전자에 446억47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였다. 공정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2008년 7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수시로 만나 제품가격을 논의하고 생산중단 제품을 결정하는 등 치밀하게 담합을 실행해 왔다.[71]

세탁기와 관련해서는 지난 2008년 10월 서울 서초구 인근 식당에서 만나 10kg짜리 전자동세탁기 최저가모델을 단종하고 드럼세탁기 소비자판매가격을 60만원 이상으로 책정하기로 담합하였다. 2009년 5월과 8월에도 유통망에 지급하는 장려금 또는 상품권을 10만원 가량 축소하기로 합의해 가격을 맞춰왔다. TV의 경우에도 2008년 7월부터 판촉경쟁 격화에 따른 가격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영등포 인근에서 모임을 갖고 보급형TV의 가격을 인상하고 장려금을 축소하기로 담합하였다. 노트북의 경우 2008년 7월 센트리노2가 탑재된 노트북PC 신규모델의 출시를 앞두고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내 커피숍과 용산전자상가 등에서의 모임을 통해 정보교환을 하면서 사전에 노트북 모델별 신제품 출시가격을 합의하였다. 또한 2008년 9월부터 10월까지 환율인상에 따른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면서 노트북PC 가격을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실제로 당시 삼성은 두차례에 걸쳐 노트북 50개 제품의 가격을 8~28만원 올렸고, LG도 24개 제품 가격을 8만9000원~30만원 인상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전자에 258억1400만원, LG전자에 188억3300만원의 과징을 부과하였다. 이는 자진신고자 감면제도를 적용해 원래보다 과징금이 낮아진 것으로 알려졌다.[72][73][74]

사건 및 논란 [ 편집 ]

노조설립 방해 및 부당해고 논란 [ 편집 ]

2010년 11월 26일 삼성전자로부터 해고된 박종태는 자신이 사내 통신망을 통해 노조설립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종태는 2007년 11월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뽑힌 뒤 활동하던 중 브라질과 러시아로 장기 출장을 가라는 회사의 지시에 대해 건강상의 이유 등을 들어 거부했고 그 뒤 회사는 2010년 7월 비어 있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다 퇴근하는‘왕따 근무’를 한 달간 강요하였으며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1달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0년 11월 3일 사내 전산망에 “삼성전자의 경직된 기업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법에 보장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건설하는 게 사원들의 권리를 지키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내용의 글을 띄웠고 회사는 11월 26일 ‘업무지시 불이행, 허위사실 유포, 회사 명예실추’ 등의 이유를 들어 그를 해고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회사가 왕따를 시켜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는 것은 허위의 사실이며 해고 조치는 노조 문제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며 회사의 정당한 업무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을 물어 적법 절차를 거쳐 징계조치를 내린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번 사건에 대해 사내 노조 결성을 저지하려는 삼성의 일관된 정책이 반영된 조처로 보고 있다. 법외노조인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은 2011년 7월 이후 복수노조 제도가 시행되면 노조 설립 기회가 많아지는 걸 앞두고 삼성이 문제 사원을 솎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박종태는 이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해 2010년 12월 27일 해고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다.[75]

근로자 자살 사건 [ 편집 ]

2011년 1월 11일 삼성전자 탕정공장에서 근무하던 김주현이 회사 기숙사에서 투신해 자살하였다.[76] 삼성전자 근무 당시 김주현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근무에 시달렸다고 한다.[77] 김씨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진단을 받고 2개월여의 병가 휴직을 얻었지만 2010년 1월 복직을 앞두고 불안증세를 보여 3개월 추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생산라인으로 복직이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2011년 1월 11일 기숙사 13층에서 투신해 자살하였다.[78] 유족들에 의하면 삼성전자 측은 사망 당일 유족들을 장례식장 근처의 모텔로 데리고 가서 금전적 보상을 제시하며 빠른 장례절차 진행을 종용하였으며, 장례가 지연되면 보상이 없다면서 회유를 하려했다고 한다.[79] 하지만 유족들은 삼성전자 측에 공식 사과 등을 요구하였으며, 사건 발생 이후 3달 여만에 비공식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2011년 4월 17일에 장례식이 치러졌다.[78]

유령집회 신고를 통한 집회방해 [ 편집 ]

2011년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 동안 삼성 15개 계열사 22개 사업장 정문 앞 집회 신고 현황에 대해 해당 경찰서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결과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등 17개 사업장이 신고한 집회는 실제 개최율이 0%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10곳은 6개월 동안 매일 집회를 신고하고서 단 하루도 집회를 열지 않았다. 이들 사업장들은 대부분 백혈병·부당해고 등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사업장들이다. 해고노동자 박종태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백혈병 산업재해를 법원이 인정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을 비롯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인 화성사업장, 온양공장, 지난 7월 삼성 일반노조가 처음 탄생한 삼성에버랜드 등이 해당 사업장이다. 삼성전자 기숙사에서 투신자살한 김주현이 다니던 삼성전자 모바일 디스플레이 천안사업장에도 5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교통사고 근절 임직원 안전운전 결의대회’ ‘환경의 날 기념 임직원 환경정화운동 결의대회’들이 회사쪽에서 신고되었지만 정작 해당 대회는 열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건강한노동세상 사무국장은 삼성이 집회의 자유라는 시민의 권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삼성전자 관계자는 불법이나 편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집회를 신고하고도 집회를 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80]

반도체 공정 백혈병 논란 [ 편집 ]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의 여성 근로자 황유미 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백혈병 논란이 촉발되었다. 백혈병의 질환을 반도체 제조와 관련된 직업병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시작되었으며, 2008년 3월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발족하면서 분쟁은 본격화하였다.

이후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팀 등이 조사를 이어갔으며,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2012년 반올림 측에 대화를 제안하면서 ‘사과·보상·예방’을 둘러싼 양측의 기싸움이 오랫동안 벌어졌다. 2014년 4월에는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가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4년 12월 조정위원회가 구성되어 2015년 7월 1차 조정권고안이 발표되었으나 합의에 실패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삼성전자가 1천억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고 자체 보상안을 내놓았으나 10월 반올림이 자체 보상안을 거부하였고 천막농성을 시작하였다.[81]

한편 2014년에는 삼성전자 백혈병 발병 노동자 황유미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되었다.

2018년 7월 24일, 반도체 공장 피해자를 대변하는 시민단체 ‘반올림’의 대표와 삼성전자 측 대표 양측은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내용에 서명했다. 이로써 11년 동안 있었던 삼성전자와 반도체 공장 백혈병 피해자 사이 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반올림 측은 다음날 해단식을 열고 삼성 서초사옥 앞 천막농성을 거두기로 하였다. 조정위는 9월 피해자 보상, 사과, 재발 방지, 사회공헌방안 등을 담은 중재안을 발표할 예정이다.[82]

화성 공장 불산 가스 누출 사고 [ 편집 ]

2013년 5월 2일 화성사업장에서 발생한 불산 가스(불화수소) 2차 누출사고 당시 공장 실내에 가득 찬 불산 가스를 대형 송풍기를 틀어 공장 밖으로 빼낸 사실이 경찰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삼성 갤럭시 노트 7 배터리 폭발 사고 [ 편집 ]

2016년 8월 2일에 미국에서부터 공식 발표하였던 삼성 갤럭시 노트 7의 배터리(리튬이온 전지)가 그 당월 중으로부터 폭발 사고가 발생하였다며,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대처하려는 삼성전자는 삼성 갤럭시 노트 7 판매를 공식 중단 조치를 내려 임시 대여폰 지급 서비스를 실시하였으며, 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미국 연방항공청(FAA)이 전 세계의 항공기 기내에서 삼성 갤럭시 노트 7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9월 15일부터 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가 삼성 갤럭시 노트 7을 이용하다 폭발 사고 화상 피해에 입은 제품을 삼성의 이전 제품(구제품)이나 타사의 신/구제품으로의 리콜 혜택으로 실시하고 있다. 10월 11일에는 삼성 갤럭시 노트 7을 생산 중단하겠다는 최후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결국 삼성 갤럭시 노트 7은 출시된 지 54일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에 뇌물 공여 의혹 [ 편집 ]

2017년 2월 28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국회에서의증언·감정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대한승마협회 회장)을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미래전략실장)을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장충기 삼성전자 사장(미래전략실 차장)을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황성수 삼성전자 전무(대한승마협회 부회장)를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83]

2017년 8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은 삼성 측이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최순실 측에게 72억원을 전달한 사실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16억 원을 후원한 사실을 유죄로 인정해 이재용에게 징역 5년, 최지성에게 징역 4년, 장충기에게 징역 4년, 박상진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황성수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등을 선고하였다. 불구속 상태였던 최지성과 장충기는 법정 구속되었다.[84]

2018년 2월 5일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 부장판사)는 삼성 측이 코어스포츠와 용역계약을 통해 최순실 측에게 36억원을 전달한 혐의를 인정하여 이재용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최지성, 장충기, 박상진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황성수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등을 선고하였다.[85][86][87] 구속 중이었던 이재용, 최지성, 장충기는 석방되었다.[88]

고용노동부의 삼성전자 기술 공개 논란 [ 편집 ]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측정 결과보고서를 국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결정함에 따라 논란이 생겼다. 찬성 측에서는 인체의 안전을 강조하는 반면, 반대 측에서는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고용노동부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에 위치한 삼성디스플레이 공장과 경기 용인·화성·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를 결정하였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해당 보고서들은 인체에 해로운 작업을 하는 작업장의 유해인자 노출수준을 측정해 기록한 근로자 보건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며 “설령, 해당정보가 기업의 경영·영업상의 비밀이더라도 ‘사업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위해로부터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돼야 한다고 판결난 바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은 “보고서엔 우리의 20년과 30년 노하우가 들어있다”며, “보고서를 공개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토로하였다. 동종 업계 또한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메모리반도체 사업이 주력인 A사 관계자는 “동종 업계로서 상황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며 “보고서가 제3자에게까지 공개되면 중국의 경쟁 업체가 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반도체 업체 B사 관계자도 “이 (업계) 바닥은 ‘총성 없는 전선’도 같다. 측정보고서엔 공정 순서와 공장 내부 배치도 등 기업 입장에서 대외비가 가득 담겨있다”며 “업체가 수년간 시행착오 끝에 축적한 노하우를 단시간에 빼앗길 상황에 놓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디스플레이 업체 C사 관계자는 “선례가 생겨 후폭풍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중국 등 경쟁 업계에 정보를 떠먹여주는 격”이라고 하였다.

한편 고용노동부가 법 해석을 자의적으로 확대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고용노동부의 이번 정보 공개 결정은 2018년 2월 작업환경측정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한 대전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대전고법이 판결을 내린 곳은 온양사업장으로, 이번에 고용노동부가 정보공개를 결정한 기흥·화성·평택사업장과는 별개라는 지적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온양은 반도체 후공정 공장으로 비교적 기술의 중요도가 떨어진다”며 “기흥·화성·평택 사업장은 3D 낸드플래시 등을 생산하는 최첨단 공장이 가동되는 곳으로 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더 크다”고 전하였다.[89]

그리고 공개를 결정한 고용노동부 정보공개심의회에 반도체 등 IT 전문가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4월 19일 장석춘 자유한국당 의원이 고용부로부터 제출받은 ‘정보공개심의회 구성 현황’에 따르면,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공개 결정을 내린 위원 총 26명 가운데 고용부 직원 13명과 산하 안전보건공단 4명 등 17명(65%)이 고용부와 산하기관 관계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9명은 법학 교수, 노무사, 반도체 등을 전공한 학계나 산업계 인사는 심의회에 없었다.[90]

산업통상자원부는 2018년 4월 17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측정 결과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9~2017년도 화성, 평택, 기흥, 온양 사업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 일부 내용이 국가핵심기술인 30나노 이하 D램, 낸드플래시, AP 공정, 조립기술 등을 포함하고 있다”며 “공정명, 공정레이아웃, 화학물질(상품명), 월 사용량 등으로부터 핵심기술을 유추할 수 있다”고 밝혔다.[91]

수원지방법원은 2018년 4월 19일 삼성전자가 고용노동부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경기지청장 등을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이 판결에 따라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집행정지 신청의 본안 사건인 정보부분공개결정 취소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보고서 공개 여부는 차후 행정소송(본안 소송) 결과에 따라 최종 결정된다.[92]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2018년 7월 27일 삼성 측이 “고용노동부의 작업환경 측정결과 보고서 공개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제기한 행정심판을 일부 인용했다. 중앙행심위는 “국가핵심기술로 인정된 내용과 그에 준하는 것으로 법인의 경영·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비공개하고 그 외 나머지는 공개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중앙행심위가 정보공개가 적법하다고 결정한 부분도 고용부가 곧바로 공개하지는 못한다. 이미 법원에서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고,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보공개를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고용부는 행정심판에서 기각된 부분에 대해 행정소송에서도 ‘공개가 적법하다’는 확정판결이 나오면 해당 정보를 공개하게 된다.[93]

또한 그 이외에 세월호 유가족을 조롱하는 단체에게 후원금을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적이 있다. (출처: MBCNEWS )

GOS 사태 [ 편집 ]

삼성전자가 출시한 갤럭시 S 시리즈에 깔려 있는 GOS(Game optimization service의 약자)가 게임으로 분류되는 애플리케이션의 성능(GPU 클럭 속도)을 저하시키면서 하드웨어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벤치마크에서는 원래대로 되돌려 치팅을 인위적으로 했고, Geekbench에 의해 사실로 판명되어 벤치마크 성능 비교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갤럭시 시리즈의 GOS 성능 조작 사건 참조.

직판점 [ 편집 ]

스포츠 스폰서십 [ 편집 ]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Samsung 대한민국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과 혁신 제품, 창의적인 솔루션으로 전 세계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9 · 75형 마이크로 LED 세계 최초 공개

· 차세대 AI 프로젝트 ‘삼성봇’ 첫 공개

· 새로운 CSR 비전 ‘함께가요 미래로! Enabling People’ 발표

· 상업용 디스플레이 시장서 10년 연속 글로벌 1위

· 5G 스마트폰 ‘갤럭시 S10 5G’ 출시

· 업계 최초 5나노 EUV 공정기술 개발

·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 투자-1만5,000명 채용

· ‘프로젝트 프리즘’으로 맞춤형 가전 시대 열어

· 업계 최초 12Gb LPDDR5 D램 양산

· 업계 최초 1억 800만 화소 모바일 이미지센서 공개

· 새로운 모바일 카테고리를 여는 ‘갤럭시 폴드 5G’ 출시

· 세계 최초로 TV에서 8K HDR10+ 콘텐츠 지원

·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개최 2018 · 세계 최초 모듈러 TV ‘더 월(The Wall)’, ‘QLED 8K’ TV 출시

· 경기도 화성에 최첨단 EUV 반도체 라인 착공

· ‘갤럭시 S9/S9+’, ‘갤럭시 노트9’ 출시

· 세계 최초 ‘3D 시네마 LED’ 상영관 선보여

· 국내외 태양광 패널 설치 등 중장기 재생에너지 확대계획 발표

· 세계 최초 ‘5세대 V낸드’ 양산, 세계 최초 ‘8Gb LPDDR5 D램’ 개발

· 향후 3년 간 180조 투자-4만명 채용, 경제활성화 방안 발표

· 한국·미국·영국·캐나다·러시아 등에 7개 글로벌 AI센터 개설

· 세계 최초 미국(FWA), 한국(NR 모바일)에 5G 네트워크 상용장비 공급

· 2028년까지 올림픽 후원 연장 계약

2017 · 삼성전자, 차세대 TV ‘QLED’ 전격 공개

· 삼성전자, 대외 후원금 운영 투명성 강화

· 삼성전자, 미국 하만 인수 완료

· 삼성전자, 세계 최초로 극장 전용 LED ‘시네마 스크린’ 공개

· 삼성전자, ‘갤럭시 S8’ ‘갤럭시 S8+’ ‘갤럭시 노트8’ 공개

· 삼성전자, 세계 최대 규모 평택 반도체 라인 가동

·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 세계 6위

· 삼성전자, 세계 최초 ‘2세대 10나노급(1y 나노) D램’ 본격 양산

2016 · 세계 최초 바람없는 ‘무풍에어컨 Q9500’ 출시

· 갤럭시 S7ㆍ갤럭시 S7 엣지ㆍ360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기어 360’ 출시

· IoT 냉장고 ‘패밀리허브’ 출시

· 세계 최초 15.36TB 서버 SSD 출시

· 차세대 인공지능 플랫폼 기업 미 ‘비브 랩스’ 인수

· 업계 최초 10나노 로직 공정 양산

· 미 전장전문기업 하만 인수(Harman) 계약

· 주주가치 제고 방안 발표 2015 · 10년 연속 세계 TV 시장 1위

· 수면 상태를 측정, 분석하는 IoT 헬스케어 ‘슬립센스(SLEEPsense)’ 최초 공개

· 업계 최초 원형 베젤을 채용한 스마트 웨어러블 기기 ‘삼성 기어 S2’ 출시

· 모바일 결제 서비스 ‘삼성 페이’ 출시

· 평택 산업단지 내 역대 최대 규모 반도체 생산라인 착공

· 업계 최초 14나노 모바일 AP 양산

· 대구-삼성 창조경제단지 착공

· 업계 최초 애벌빨래를 도와주는 혁신적인 세탁기 ‘액티브워시’ 출시 2014 ·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 평가에서 7위 기록

· 세계 최초 곡면 디스플레이 적용한 ‘갤럭시 노트 엣지’, 3G 통신이 가능한 웨어러블 기기 ‘기어 S’, 가상 현실 헤드셋 ‘기어 VR’ 출시

· 세계 최초 20나노 4Gb DDR3 D램 양산

·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2020년까지 올림픽 공식 후원 계약

· 세계 최초 2세대 3D V낸드 양산

· 프리미엄 주방 가전라인 ‘셰프 컬렉션’ 출시

· 세계 최초 85인치 벤더블 UHD TV 공개 2013 · 갤럭시 S4 글로벌 출시

· 세계 최초 20나노급 4Gb 초고속 모바일 D램 양산

· 세계 최초 3D V낸드 플래시 메모리 양산 2012 · 브랜드 가치 329억 달러로 세계 100대 브랜드 중 9위 차지

· 삼성 모바일 디스플레이로 LCD 비즈니스 이전 2011 · 7.5G LCD 제조 공장 건설 시작(중국 소주)

· 삼성전자-IBM 특허 라이선스 계약 체결 2010 · 세계 최대 전자회사 등극(매출액 기준)

· 의료장비 업체 메디슨 인수

· 20나노급 64Gb 3bit 낸드 플래시 메모리 양산

· 삼성 디지털 이미징 합병

·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갤럭시 스마트폰 시리즈 출시 2009 · 세계 최초 40나노급 D램 개발

· 인터브랜드 선정 ‘2010베스트 글로벌 브랜드’ 19위 2008 · 러시아 TV 공장 설립 2007 · 올림픽 공식 기술 스폰서 2006 · 세계 최초 40나노급 32Gb 낸드 플래시 메모리, 50나노급 1Gb D램 메모리 개발

· 장애인 올림픽 공식 스폰서

·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 1위 달성 2005 · 영국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 공식 스폰서

· 세계 최초 50나노급 16Gb 낸드 플래시 메모리 개발

디지털 시대는 글로벌 비지니스에 혁명적인 변화와 기회를 가져왔으며,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 경쟁력 있는 제품, 그리고 끊임없는 혁신으로 대응해 오고 있다. 2004 · 탕정 LCD 공장 설립

· 중국 시스템 LSI R&D 센터 설립 2003 · TFT-LCD 패널 생산을 위해 소니와 제휴해 S-LCD 설립

· 광학저장장치 생산 목적의 TSST 설립

· 슬로바키아 제조 자회사 SESK 설립

· 플래시 메모리 분야 세계 1위

· SGH-T100 휴대폰 누적 판매량 천만대 돌파(2002년 출시) 2002 · 전 세계 낸드 플래시 메모리 1위, 반도체 2위 2001 · 512MB 플래시 메모리 양산

· 월드 사이버 게임스 조직

· 디자인 경영 센터 설립 2000 · 컬러 TV 누적 판매량 1억대 돌파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해 거의 모든 한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삼성전자는 그 와중에서도 성장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디지털과 네트워크 기술 분야에서 선두 기업이었고 전자, 금융 그리고 관련 서비스에 지속적으로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1999 · 세계 최초 3D TFT-LCD 모니터 개발

· 무선 인터넷 폰(스마트폰) 개발

· 세계 최초 MP3 휴대폰 출시 1998 · 세계 TFT-LCD 시장 점유율 1위

· 세계 최초 디지털 TV 양산

· 완전 평면 TV 개발

· 나가노 동계 올림픽 공식 파트너

· 세계 최초 128MB SD램과 128MB 플래시 메모리 개발 1997 · 무선통신분야 올림픽 파트너로 선정

· 세계 최초 30인치 TFT-LCD 개발

· ‘신경영’ 2기 출범

1990년대 중반, 삼성전자는 ‘품질 우선’이라는 비전 하에 글로벌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고, 토털 고객 만족을 실천하며, 훌륭한 기업 시민이 되기 위한 일념으로 완전히 새로운 바람을 기존 비즈니스에 불어 넣었다.

이 기간 동안, 반도체에서 컴퓨터 모니터, TFT-LCD 스크린, 컬러 TV에 이르기까지 17개의 다양한 제품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5위안에 들었다. 이 밖에 12개 제품이 시장 1위를 기록했다. 1등 기업이 된다는 것은 사회 복지, 환경 보호, 문화 공연, 스포츠 등에서 사회적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삼성전자는 스포츠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열띤 노력의 결과로 1996년 7월, 당시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통해 삼성의 이미지가 세계 스포츠계를 후원하는 중요한 공헌기업으로 대폭 개선되었다. 1996 · 1G D램 개발 1995 · 삼성종합기술원, 세계 최초 실시간 MPEG-3 기술 개발

· 세계 최초 33인치 더블 스크린 TV 개발 1994 ·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 전자레인지 3천만 대 생산 돌파

· 64M D램 양산 개시

1990년대 초반 하이테크 기업들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경쟁과 통합이 범람하는 동시에, 합병, 제휴, 기업 매수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기업들은 기술과 서비스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했다. 비지니스는 국가와 기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시장의 요구에 보다 잘 대응하는 전략에 집중함으로써 이런 기회를 잘 활용했다. 1993 · 삼성종합기술원, DVD 리코더 최초 개발

· 삼성 그룹 신 CI 시행

· 삼성 그룹 ‘신경영’ 발표 1992 · 휴대전화 시스템 개발

·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 산업용 로봇 천만 대 생산 돌파

· 중국 생산 개시 1991 · 휴대전화 개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삼성전자의 핵심 기술 비즈니스는 다각화됐고 전 세계로 확장됐다. 삼성전자는 기술에 두는 비중을 계속적으로 늘렸으며, 2곳의 R&D 센터를 개소하게 된다. 이들 연구소를 통해 전자, 반도체, 광통신, 그리고 나노 테크놀로지에서 첨단 네트워크 아키텍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1980년에는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 간의 중요한 합병도 있었다. 1987년 삼성전자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작고했으며, 아들인 이건희 전 회장이 신임 회장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재임했던 기간 동안, 삼성전자는 세계 Top 5 전자회사라는 목표 하에 오래된 비지니스를 구조조정하고 새로운 비지니스를 하는 자발적인 도전 노력을 기울였다. 1989 · 컬러 TV 2천만 대 생산 돌파 1988 · 삼성 반도체통신과 삼성전자 합병. 핵심 비지니스 분야로 가전제품, 통신, 반도체 선정 1987 · R&D 목적의 삼성종합기술원 개원 1986 · 세계 최소형, 최경량 4mm 비디오테이프 리코더 개발 1984 · VCR 미국 시장 수출 시작

· 사명을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변경

· 매출액 1조원 돌파 1983 · PC 생산 개시 1982 · 한국 전자통신(주), 삼성 반도체통신(주)으로 상호 변경

· TVs 흑백 TV 생산 천만 대 생산

· 해외 제조 자회사 1호 포르투갈에 설립

· 반도체 비즈니스, 한국 전자통신(주)로 이전 1980 · 에어컨 생산 시작

· 수원 R&D 센터 개소

· 삼성 반도체와 합병

삼성전자에 대해 알아보자(역사와 현재)#1

삼성전자

삼성로고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를 수 없는 기업 우리나라의 유가증권시장의 약20%이상을 차지하는 거대기업이자 대한민국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기업 삼성전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창업주 이병철씨 생전모습

설립일:1969년1월13일

창업주: 이병철

업종:이동전화기,가전제품,반도체 제조업

본사: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매탄동)

시가총액(2020-3월24일기준):약280조2,813억원

.창사 이래로 세계시장에서 한국기업으로 전례없는 성공과 인지도를 쌓고 있으며, 쌓아 나갈 기업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사회적 영향력이 높은 기업으로 손꼽힌다.

삼성본사(수원사업장 삼성 디지털시티)

필자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

삼성전자 로고의 변화

삼성전자는 간단하게 말해 로고의 변화가 곧 사업의 변화나 마찬가지였다.

1968년’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이에 따라 1969년 삼성전자공업 및 삼성-SANYO전기가 설립

→1970년 삼성-산요전기 측은 흑백TV를 생산해 이듬해 파나마에 처음 수출했고, 삼성전자도 1970년 백색가전 및 음향기기를 생산했다.

→1973년 삼성전자는 삼성일렉트릭스를 합병한 후 이듬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고, 1975년 삼성산요가 ‘삼성전기’로 바꿨다가 1977년 삼성전자에 합병되었다.

위의 사진은 라이벌 사 였던 금성 흑백 텔레비전’VD191’이다. 필자가 사진을 못구해서 이런식으로 생겼었다.. 정도만 참고해주길 바라며..

이후

1977년 흑백TV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1978년 업계 최초로 미국에 현지법인을 뒀고, 1979년 한국전자정보를 인수하며 국내 최초로 VTR과전자레인지를 생산 ㅡ> 1980년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후 반도체개발에 적극 나서며 1982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했고,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주)로 변경했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우며 같은 해 세계 최소형/최경량 4mm VTR을 개발했고, 1987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에 삼성종합기술원을 열었다.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하고 1989년 부문별 사장제 개편 후 광주전자를 설립하였다. 1991년 휴대폰 개발 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했고, 1994년에 256M D램, 1996년에 1G D램도 최초로 개발했다. 1997년 30인치 TFT-LCD를, 1998년 128MB SD램 / 128MB 플래시 메모리. 1999년에 MP3 휴대전화 및 3D TFT-LCD 모니터를 세계 최초로 각각 개발해냈다. 2010년 삼성디지털이미징과 광주삼성전자를 합병한 후 2013년 삼성광통신도 합병했고, 2016년 프린팅솔루션사업부를 에스프린팅솔루션으로 분사시켰다.

그리고 현재

크게 반도체, LCD, 휴대폰, 가전 부문으로 사업부가 나뉘었으나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불어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응해 반도체와 LCD로 대표되는 부품 부문과 TV와 휴대폰, 냉장고로 대표되는 완제품 부문으로 사업부를 통합했다. 분야가 완전히 달랐던 삼성테크윈의 디지털 카메라 부문과 삼성SDI의 플래시 메모리, 낸드플래시도 통합되었고 그 외 삼성전기 LED 사업부도 통합되었다.

2015년 10월 11일 기준으로도 200조 원을 넘어 2015년 10월 11일 기준 시가총액 2위부터 5위까지 차지하는 나머지 기업들의 시가총액을 합쳐도 삼성전자를 절대 넘길 수 없고, 삼성전자 보통주를 제외한 10위까지 포진한 기업들까지 합쳐도 넘길 수 없다.

2015년 기준으로 이미 삼성전자의 덩치는 다른 종목이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세계 시장에서 DRAM, 플래시 메모리및 하드디스크, SSD, 메모리 카드등의 반도체 부분과 LCD디스플레이, PDP 디스플레이, OLED 디스플레이 등의 디스플레이 부분, 그리고 TV, DVD 플레이어, 블루레이 플레이어 및 홈시어터 시스템, 셋톱박스 및 프로젝터 등의 영상가전 부문, 휴대폰, MP3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등의 휴대용 가전, 데스크탑과 모니터, 노트북, UMPC, ODD기기, 프린터및 복합기, 팩스, 테블릿 컴퓨터 등의 컴퓨터 사업부문,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전기오븐, 진공 청소기와 에어컨 등의 가전부분 등 60종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은 이병철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 순으로 3대가 삼성을 이끌어가는 중이다.

삼성 반도체사업 40년, 도전과 창조의 역사 – 삼성반도체이야기

■ 27년의 뒤쳐진 첫 걸음 ‘한국반도체 인수, 부품사업의 시작’

1974년 12월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미 반도체산업의 성장궤도에 올랐던 미국과 일본보다 27년의 뒤쳐진 출발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는 컴퓨터와 반도체가 화두였습니다. 미국은 1947년 ‘윌리암 쇼클레이’에 의해 세계 최초로 TR(트랜지스터)를 개발하고 이 후, 1959년 페어차일드사가 IC(집적회로) 개발을 하면서 세계 반도체산업의 문을 열었습니다.

▲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반면, 우리나라는 1965년 미국 코미그룹의 투자로 설립된 고미반도체를 시작으로, 1974년 1월 KEMCO와 미국 현지법인인ICⅡ가 합작하여 선진국형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웨이퍼 가공생산을 위해 ‘한국반도체’가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세계 오일 파동으로 경영난을 겪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이건희 회장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자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핵심부품인 ‘반도체의 자급’이라 판단, 1974년 12월 삼성전자는 공장 설립 과정에서 파산 직전인 ‘한국반도체’를 인수 합니다. 반도체 투자에 대한 내부 반대의견이 많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야말로 삼성전자의 미래 씨앗이 될 것이라 확신하며 과감한 선행투자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한국반도체를 반도체사업부로 흡수?개편을 단행하며 내실을 기하지만 자체 기술이 없는 반도체사업은 나날이 고전을 겪게 됩니다. 자본금을 모두 잠식한 채 가까스로 몇 번의 위기상황을 넘겼지만, 이미 삼성반도체는 그룹의 미운 오리로 낙인 찍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도체사업의 부진을 경험부족이라 판단, 故이병철 선대회장은 삼성보다 훨씬 앞서 반도체사업을 해 온 A사의 B회장에게 자문을 구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B회장의 거절은 역으로 삼성전자가 반도체사업을 진출하게끔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하였고 故이병철 선대회장은 반도체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조립 위주로 발전되어온 한국의 반도체사업,’누가 뭐라고 해도 반도체,해야겠습니다’

1983년 2월 8일은 오늘날 삼성의 운명을 바꿔 놓은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故이병철 선대회장은 오랜 고심 끝에 동경에서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심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삼성은 반도체사업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공식발표 하지만,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등 재계의 반대 여론과 업계의 냉소가 뒤따랐습니다.

반도체사업은 인구 1억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 되어야 가능한 사업이지만, 당시 한국의 실정은 이 중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성은 반도체사업은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업, 즉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산업이라 확신했고, 정면 돌파에 나섭니다.

■ 기술확보를 위해 몸으로 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언과 동시에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한다는 발표였습니다. 당시, 국내 반도체사업은 반제품을 들여다 가공, 조립 하는 수준으로, 삼성의 경우 가전제품용 LSI (고밀도 집적회로)를 간신히 생산하는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선진국형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D램 생산은 무모한 도전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64K D램 개발을 발표하기까지 삼성전자는 수 차례의 시장조사와 사업구상, 인재영입과 육성을 통해 반도체사업의 미래를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 6개월 만의 신화, ’64K D램 개발 및 기흥공장 완공’

1983년 반도체사업 진출 선언과 함께 삼성은 첫 번째 메모리 제품 사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D램을 선택하고,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인 64K D램 개발을 그 해 5월부터 착수합니다.

▲ 1983년 64K D램 개발 성공

그리고 불과 6개월 만인 1983년 12월 1일,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격차가 났던 반도체 기술을 4년 정도로 단축시켰습니다. 이는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한 기적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반도체 사업 초기는 기술 확보 싸움이었다. 일본경험이 많은 내가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것을 배우려 노력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 1987년 8월, 3라인 착공식

또한, 기흥 지역을 공장부지로 최종 확정하고 일반적으로 2~3년이 소요되는 공사를 착공 6개월 만에 완공하며 국내 반도체산업의 메카 ‘기흥밸리’를 탄생시키는 기적을 이룹니다.

64K D램의 호황이 끝나기 전에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설계와 시공 등 모든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동기화(同期化) 전략’을 펼치며 전 임직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착공에 힘을 모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 10년 만에 메모리업계 세계 정상을 오르는 첫 걸음이었을 뿐입니다.

■ 20년 간 지속되는 신기록 역사, ‘시장이 없으면 만든다’

이후 1992년 삼성전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선두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1994년 256M D램, 1996년 1Gb D램을 세계 최초로 연달아 개발하면서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게 됩니다.

▲ 2007년 Flex-OneNANDTM 개발

2002년에는 손가락 마디만한 USB 메모리의 대중화, OneNANDTM(낸드플래시+노어플래시) 개발, 2006년 차세대 메모리 사업 육성을 위한 OneDRAMTM 개발, 2007년 대용량?초고속의 Flex- OneNANDTM 개발로 고성능 스마트폰에서 퓨전 메모리 시대를 열어 나가고 있습니다.

■ 반도체사업의 차세대 성장동력, 시스템LSI ‘모바일 솔루션’

삼성전자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스템LSI 분야를 반도체 신성장 동력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멀티미디어용 정지화상과 동화상을 압축, 재현할 수 있는 세계 최고 DSP(Digital Signal Processor)의 국내 최초 개발을 시작으로, 1GHz 차세대 듀얼코어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출시와 모바일 AP브랜드 ‘엑시노스(Exynos)’ 론칭으로 시스템LSI 사업의 글로벌 위상을 제고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고성능 저전력 Exynos 4212, 세계최소 120만 화소 CIS

또한, CMOS 이미지 센서는 2년 연속 휴대폰용 센서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감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이면조사형 센서 기술에서도 앞서가고 있습니다.

한 발 앞서 세계 최초, 최고의 제품을 선보이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포용하며, 흔들림 없는 미래를 선도하는 그 신화는 계속 될 것입니다.

삼성전자 40년 성공비화 – 오늘의 삼성을 만든 5大 핵심 원동력

눈앞의 기름진 음식만 즐기다 뚱뚱해진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꾸준히 연구·개발해야 한다. 디지털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아날로그 감성이다. 세상은 인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삼성전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 2010년 매출액 154조6300억원·영업이익 17조3000억원 달성한 세계 최대 IT기업

⊙ 1969년 종업원 수 36명으로 시작, 2010년 말 현재 국내외 인력 19만여 명

⊙ 한국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10%대. 無形 파급효과는 그 이상

우리 사회에서 삼성전자는 어떤 존재일까. 국내 최고 IT기업, 글로벌 전자회사,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고연봉(高年俸) 업체, 일 많이 시키는 곳…. 수식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성전자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단일 기업으로서 대한민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각종 지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54조630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영업이익은 17조3000억원, 순이익은 16조1500억원.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IT기업이다. 수치로 볼 때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국내 전체 기업이 낸 총 이익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국내 수출액의 10%도 삼성전자 몫이다. 직원 수는 국내외 모두 합쳐 19만여 명.

삼성전자는 한국을 넘어선 글로벌 기업이다. 삼성전자 매출액의 83.3%가 수출에서 이뤄졌다(2009년). 제품 생산은 34개국에서, 판매는 49개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연구소를 비롯한 해외 거점은 200여 곳이다.

삼성전자의 주당 가격은 100만원 선. 2011년 2월 7일 현재, 시가총액 158조400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주식시장의 전체 시가총액 대비 13.65%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세계 상위 1000개 기업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 일본의 노무라증권 금융공학연구센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0년 12월 31일 삼성전자는 2009년 말보다 12계단 뛰어오른 37위(1222억 달러)를 차지했다. 이 수치는 일본 최고 기업인 도요타자동차(32위·1368억 달러)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객관적인 지표 그 이상을 차지한다. 대한민국 경제의 상징인 셈이다.

“창조와 혁신으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자”

삼성전자는 1969년 매출 3700만원, 종업원 수 36명으로 시작했다. 출발은 미약했지만 지금은 창대(昌大)하다.

1975년 세계 3번째, 국내 최초의 순간 수상 방식 TV인 이코노TV를 선보였고, 1983년 첨단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에는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94년에는 LCD 크기 표준을 주도했다. CDMA 이동통신시스템과 양문형 냉장고, 1기가 낸드플래시메모리, TFT-LCD 장착 컬러 휴대폰 등으로 첨단기술의 장을 열었다.

삼성전자는 “변하지 않으면 고사(枯死)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변신을 거듭해 왔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2011년도 신년사에서 “창조와 혁신, 동반성장으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자”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10년은 100년으로 나아가는 도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 제품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인재를 키우고 유망 기술을 찾아내야 합니다. 창의력과 스피드가 살아 넘치고 부단히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문화도 구축해야 합니다.”

삼성전자의 40년 성공비결은 미래를 내다보는 오너의 안목(眼目), 인재(人材) 중심의 경영전략, 끊임없는 위기의식과 자기성찰, 거듭된 혁신, 현지화 전략으로 요약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삼성전자 40년사》를 발간했다. 《도전과 창조의 역사》, 《도전과 창조의 유산》 2권으로 구성된 사사(社史)는 2010년 4월 제작을 완료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배포가 미뤄졌다.

김정현 사사편찬팀장은 “회사 창립 40주년이었던 2009년 11월에 발간하려다 2010년 4월에서야 마무리됐는데 배포는 그 이후에 이뤄졌다”며 “최근에 대학과 국공립도서관에만 배포했을 뿐 언론에는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삼성전자 40년사》에는 반도체, 애니콜 신화, 보르도TV, 와이브로 등 세계 최고 제품들의 탄생비화가 담겨 있다. 디자인, 특허, 상생 등 삼성전자의 경쟁력이자 성공의 원동력도 들어 있다. 그 비화(秘話)를 소개한다. 제2, 제3의 삼성전자를 기대해서다.

挑戰, 길을 나서다

선진 한국을 향한 출발, 64K D램 개발

삼성반도체 사업의 투자의 결단을 내린 故 이병철 회장과 사업의 토대를 다진 이건희 회장. 1983년 2월 8일. 물끄러미 호텔 창 밖을 내다보던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깊게 팬 주름에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도쿄의 밤 풍경은 그의 머릿속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진출할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매년 일본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삼성그룹의 진로를 모색해 온 이병철 회장은 기업의 운명을 바꾼 이른바 ‘2·8 동경구상’에 몰입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홍진기(洪璡基)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도체, 해야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이 사실을 공표해 주세요”라고 전했다. 당시 국내 재계는 반도체 사업에 부정적이었다. 일본의 최고 기업들조차 힘겨워하는 반도체를 우리 실력으로 만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반도체 사업의 진출 선언은 한마디로 도전 그 자체였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산업이라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은 언제나 새 사업을 준비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현 단계에서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심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 삼성전자는 오래전부터 반도체 회사를 갖고 있었다.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 달러에 인수한 상태였다. 나머지 50%의 지분은 미국 소규모 벤처기업인 ICII 소유였다.

당시 한국반도체 인수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에서는 컴퓨터와 반도체가 화두였다. 이건희 이사는 그 흐름을 주목했고 삼성전자 임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IBM을 분석하세요. IBM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IBM의 움직임을 잘 봐야 합니다. 반도체 시장의 판세를 거머쥐고 있는 IBM을 읽으면 사업의 맥을 짚어나갈 수 있습니다.”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種子)였다. 이건희 이사의 이 같은 결정은 결과적으로 ‘반도체 신화’의 씨앗이 됐다.

그러나 반도체 회사 인수 당시 기술수준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가장 큰 약점은 자체 설계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반도체는 그룹의 미운 오리로 낙인 찍혀 있었다. 심지어 삼성반도체로 발령이 나면 회사를 퇴직하겠다는 직원들도 많았다. 모든 것이 악순환이었다.

이건희 회장. 보다 못한 이병철 회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삼성반도체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경험부족’을 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반도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손자(孫子)는 “패할 수 없는 싸움, 필승이 보장된 싸움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명장(名將)”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이 그랬다. 자신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을 직원들에게 철저히 검토시킨 후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사업을 시작했다.

1983년 3월 15일, 이병철 회장은 언론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기흥부지를 확보하고 언론 홍보를 통해 범국가적 지원 체제를 유도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의 첫 번째 메모리 제품으로 ‘D램’을 택했다. 규모의 생산력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이재용 사장. 이 회장은 곧바로 삼성석유화학에 근무하던 성평건 소장을 기흥반도체 초대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이 회장은 성 소장에게 “6개월 만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6개월은 불가능한 공사기간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당시 64K D램은 세계 시장에서 없어서 못 팔 때였다. 이 회장은 호황이 끝나기 전에 시장에 진입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수완이 발휘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어느 날 공장 건설 현장을 불쑥 방문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장비를 운반해 오던 배가 만약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침몰했을 때 자네들은 어떻게 할 텐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럴 때 바로 회의가 필요한 거다. 대체할 만한 장비가 다른 곳에 있는지, 없으면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한다. 급할 때일수록 회의가 유용한 법이다.”

그해 12월 1일, 삼성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회견 장소에 속속 도착했다.

“설마 64K D램? 아니겠지? 6개월밖에 안됐잖아.”

잠시 후 강진구 사장이 준비해 온 보도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64K D램을 개발했습니다. 6개월 만에 생산·조립·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으로 좁혔습니다.”

삼성의 64K D램 개발 성공은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한 기적 같은 소식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업 기반을 확보한 미국과 일본 업체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기에는 미국 현지법인 이상준 박사와 이종길 박사, 이승규 부장 그리고 국내의 연구진 등 20명으로 구성된 64K D램 프로젝트 팀의 숨은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64K D램 개발은 우리도 반도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첫 번째 대(大)사건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염원이었던 사업보국의 꿈을 실현할 반도체 신화의 웅장한 서막이었다.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삼성’을 알린 삼성産 전자레인지

삼성전자는 기흥공장 착공 6개월 만에 반도체 1라인을 완공했다. 2~3년이 걸린다는 업계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성과였다. 사진은 1980년대 중반 기흥사업장. 1977년 봄,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를 이끌어갈 차세대 먹을거리로 ‘전자레인지’를 택했다. 당시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는 세탁기와 선풍기, 전기밥솥, 믹서 등을 생산·수출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주력상품이 없어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이건희 부회장의 특명을 받은 박경팔 사업부장은 일본 가전업체 마쓰시타(松下)의 나카가와 사업부장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나카가와 사업부장의 반응은 절망적이었다.

“전자레인지는 1초에 무려 24억5000만 번이나 전기장의 방향이 바뀌는 마이크로 웨이브(초단파)를 이용해 식품을 가열하는 첨단제품입니다. 초단파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기술이에요. 지금 당신 회사의 기술 수준으로 제품을 만들었다가는 자칫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요.”

일본 측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사업을 밀어붙였다.

먼저 마쓰시타의 전자레인지를 들여와 부품 분석에 들어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부품은 20%에도 못 미쳤다. 가장 큰 문제는 핵심부품인 마그네트론. 돈을 주고도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마그네트론을 생산하는 업체는 도시바와 마쓰시타였다. 박경팔 부장은 마쓰시타에 구입 의사를 타진하고자 수십 차례 미팅을 요청했다. 마쓰시타 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팅을 요청한 지 6개월 만에 첫 실무면담이 이뤄졌다. 예상대로 마쓰시타 측은 ‘판매 불가(不可)’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 부장의 끈질긴 협조요청에 마침내 마쓰시타 측이 손을 들었다. 박 부장은 상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그네트론을 제외하고 우리는 전자레인지 개발을 모두 마쳤습니다. 도시바가 아니라 마쓰시타 마그네트론 사양에 맞춰 개발했기 때문에 가격 불문하고 마쓰시타의 부품을 구입하겠습니다.”

사실 당시 삼성전자 전자레인지 사업은 사업성 여부를 검토하는 초기단계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마그네트론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에 박경팔 사업부장은 초강수를 뒀던 것이다. 10여 분의 정적이 흐른 후 나카가와 마쓰시타 사업부장이 입을 열었다.

“만약 삼성전자가 전자레인지를 개발하게 된다면 어느 나라에 판매할 계획입니까?”

“미국입니다.”

당시 마쓰시타는 미국 전자레인지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시장을 뚫겠다는 박 부장의 말에 나카가와 부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서를 쓰세요. 마쓰시타가 판매하는 곳에서는 삼성전자의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각서요. 그러면 박 부장의 회사에 마그네트론을 판매하겠소.”

박 부장은 또다시 강수를 뒀다.

“저는 마그네트론을 구입하러 온 것이지 거짓말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마쓰시타의 거래선도 모르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약속부터 할 순 없습니다. 만약 나카가와 부장님이 지금 저의 입장이라면 이 각서를 쓰시겠습니까?”

박 부장의 항의에 나카가와 부장은 미소로 답변했다.

“박 부장이 각서를 썼다면, 저는 삼성전자와 거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보여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삼성전자는 마쓰시타의 파트너입니다.”

나카가와 사업부장은 당시 ‘경영의 신’이라 불렸던 마쓰시타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로부터 경영을 배운 일본의 정통 기업인이었다. 고노스케 회장은 ‘성장은 솔직함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직원을 채용할 때 ‘스나오(素直, 순수·솔직)’정신을 제일 우선으로 뒀다. 그를 스승으로 섬긴 나카가와 사업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레인지의 핵심부품인 마그네트론을 확보한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개발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1979년 가을, 국내 최초의 전자레인지 ‘RE-705D’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12·12사태로 전자레인지 개발 소식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1년 후 전자레인지 사업팀은 미국 시장을 뚫기로 했다. 미국의 대규모 소매업체 제이씨 페니(J.C. Penney)가 관심을 보였다. 페니 측은 “149달러짜리 5만 대를 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건비를 제외한 자재 값만 169달러였다.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삼성 측은 페니 측을 설득해 169달러에 5만 대를 팔았다. 1981년 10만 대 수출을 달성한 후 이듬해 80만 대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한 마쓰시타는 삼성전자에 마그네트론 부품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때 삼성전자에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카가와 사업부장이었다. 그는 고노스케 회장에게 이렇게 직보했다.

“삼성전자가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배신한 것은 우리 내부의 ‘자만’입니다. 삼성전자는 우리보다 두 배나 더 비싼 가격으로 마그네트론을 구입해 저렴한 전자레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저들의 성공을 탓할 게 아니라 나태했던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고노스케 회장은 후발 회사에 거래선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나카가와 사업부장을 교체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때 고노스케 회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의 굴욕은 뼈아프지만 후배가 선배보다 월등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

이 말은 지금도 삼성전자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1983년 삼성전자 전자레인지 사업부는 100만 대를 생산했고 1999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2004년에는 최단기간 누적생산 1억 대를 돌파하며 전 세계 전자레인지 최강자로 부상(浮上)했다. 전자레인지는 세계 시장에 삼성전자라는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 성공 신화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활용되며 조리기기 사업의 바이블로 전해지고 있다.

神話 역사를 새로 쓰다, 애니콜

1981년 J.C. Penney 공급을 시작으로 미국시장 진출에 물꼬를 튼 삼성전자 전자레인지는 이듬해부터 급속도로 성장했다. 1985년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판매했던 카폰모델은 삼성전자 무선(無線)사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모토롤라는 국내외 휴대전화 시장을 독점해 갔다.

휴대전화 개발팀은 경쟁제품의 외관, 기능, 통화품질의 장단점을 분석한 후 삼성 휴대폰과 꼼꼼히 비교했다. 개발팀원들은 휴대폰을 던지고 밟고 부수고 떨어뜨리는 작업을 수백·수천 번 해댔다. 고가(高價)인 휴대폰의 견고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삼성 휴대폰은 하중 100㎏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과자처럼 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곤 했다.

개발팀은 밤이고 낮이고 튼튼한 휴대폰 개발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기술설계 담당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휴대폰 아래 위 사이에 기둥을 10개 넣었습니다. 만약 200㎏ 힘으로 누른다고 해도 각각 기둥이 20㎏씩만 버텨주면 괜찮을 것 같아 실험을 해봤습니다. 끄떡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동차가 지나가도 문제가 없는 휴대폰이 세상에 나왔다.

SH-770이 출시되던 1995년 여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개발팀 직원들은 전국 대리점을 돌며 “삼성 휴대폰은 한라산 정상(頂上)에서도 터진다”는 사실을 알렸다.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경쟁사와의 통화품질·견고성·디자인 경쟁에서 한번 붙어볼 만했던 것이다.

며칠 후 삼성전자 대회의실에서 특별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SH-770 론칭에 대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기지국이 많으면 전국이 산악지형이라 해도 큰 문제가 안 되지만 그 수가 제한된 현재 상황에서는 휴대폰 성능을 높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이번 제품은 산악지형에서도 통화가 원활하도록 전파강도를 대폭 높였습니다.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디자인도 개선했습니다.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일부 조건에서는 더 우월한데 이런 점을 고려해 마케팅 방향을 잡아주십시오.”

특별회의 참석자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마침내 그 유명한 ‘애니콜’ 브랜드가 탄생했다. 그동안 ‘삼성 휴대폰’으로 불리던 것이 ‘애니콜’로 변경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전화가 터진다는 의미였다. ‘한국지형에 강하다 애니콜!’이라는 광고 카피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 경쟁사가 삼성전자를 과장광고로 제소했다. 광고심의위원회에 불려나간 천경준 당시 개발실장은 애니콜이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문구의 근거를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소비자들이 휴대폰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국산(産)을 먼저 떠올리던 때에 삼성전자가 미국산을 능가하는 제품을 내놓았다는 데 대해 심의위원들도 반신반의했다. 천 실장은 심의위원들에게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파 장애를 해소하기 위해 성능이 좋은 안테나를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었다”며 안테나 성능을 기술적으로 설명했다. 마침내 나정웅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애니콜의 안테나 성능을 인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애니콜은 1994년 첫 출시 후 이듬해 경쟁사의 10년 아성을 깨뜨리고 시장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년 국내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한 애니콜은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신화’를 써갔다.

變化, 등불을 켜다

트렌드의 중심에 녹아들다

삼성전자는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외국산 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섰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크든 작든 세계 어느 기업도 간과할 수 없는 곳이 미국시장이었다. 미국은 다른 모든 곳의 트렌드를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삼성이 미국에서 1등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먹은 만큼 쉽게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곳이 또한 미국이었다. 삼성 역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진출 초기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2003년, 북미총괄 자리에 오동진 사장이 발령났다. 그는 직전 2년간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총괄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성과를 달성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북미총괄이라….”

액션플랜을 수립한 오 사장은 그때부터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며 일을 벌여 나갔다.

오 사장은 미국 전자제품 소매업체 베스트바이(Bestbuy)를 첫 번째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트북을 직접 들고 베스트바이 창업자인 딕 슐츠 회장을 찾아갔다. 브리핑에 앞서 슐츠 회장이 말문을 먼저 열었다.

“삼성이라면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지금도 저희 매장에 납품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맞습니다. 오늘 어렵게 회장님을 만나뵙자고 한 건 저희 삼성제품을 베스트바이 모든 매장에 본격적으로 들여놓고 싶어서입니다.”

슐츠 회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무턱대고 자사(自社) 제품을 모든 매장에 들여놓고 싶다고 말하는 거래업체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음…. 저희 매장은 납품하고 싶다고 납품할 수 있는 매장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저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오동진 사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바쁘시겠지만 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먼저 봐주십시오. 저희 삼성이 앞으로 베스트바이와 함께한다면 미국 내 1위 기업이 될 것입니다. 베스트바이 또한 유통사로서, 삼성의 파트너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사장은 슐츠 회장에게 삼성의 ‘비전’을 강하게 심어줬고 마침내 베스트바이 전 매장에 ‘삼성전자 제품 공급’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음 목표는 ‘시어즈’라는 유통사였다.

북미총괄 TV마케팅팀에 있던 이윤 과장은 32인치 HDTV를 시어즈에 공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어즈 측은 “삼성과는 볼 일이 없다”며 약속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윤 과장이 몇 번을 찾아갔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시어즈 담당자의 동선(動線)을 파악한 이윤 과장 일행은 50㎏이 넘는 무거운 32인치 브라운관 HDTV를 들고 시어즈 본사로 무작정 찾아갔다. 커다란 물건을 들고 정문을 들어오는 이들을 경비원이 제지했다. 이윤 과장 일행이 안쓰러웠는지 경비원은 출입을 허락했고 시어즈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윤 과장은 품질과 가격, AS 면에서 타사(他社)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한 후 간신히 가계약을 체결했다.

매장에 불꽃이 붙었다. 삼성제품의 저렴한 가격, 손색없는 품질은 고객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판매실적이 무색할 정도로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국 유통사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였다.

전자제품 시장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삼성전자 제품은 품질 면에서 월등한 성능을 보여줬다. 실용적인 제품이 속속 출시되면서 미국시장은 삼성전자 품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시장의 가전제품 1위 자리는 오랫동안 S사의 것이었다. 삼성이 처음 미국시장에 진출했을 때 S사는 30%를 넘는 브랜드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삼성은 1%에 불과했다. 오동진 사장은 “미국시장에서 오래가는 강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어릴 때부터 사용하는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때가 돼야 영원한 1등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시장에서 초기 삼성전자의 모습은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좀 더 많이 파는 것에 치중했다. 현지인의 생각이나 문화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삼성 제품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어린 시절 삼성과 함께했어요”라는 인식을 주며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디지털기술의 성공은 아날로그적 感性에 좌우

세계 유수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는 TV시장에서 삼성 브랜드를 알리고 수익을 내기 시작한 모델은 대형 프로젝션TV였다. 그중 2004년 출시한 ‘L7’은 원통에 벽걸이TV를 걸어놓은 듯한 디자인으로 사각형 디자인 일색인 프로젝션TV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삼성전자 TV는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 TV시장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CRT시대를 지나 PDP, LCD 기술을 만나면서 디지털TV로 바뀌고 있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디자인이 새로운 흐름으로 물길을 돌렸지만, 후속 모델의 디자인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평범해서도 안 되고, 너무 튀어도 소비자에게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TV디자인은 프레임에 머물렀다. 변용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지털기술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아날로그 감성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디자인을 모색하던 어느 날 한 디자이너의 눈에 와인글라스가 들어왔다. 동료가 마시다 남은 와인이 글라스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시간이 흘렀다.

“저 와인글라스, 자줏빛 몽롱한 환상을 담는 레테의 강.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로렐라이 처녀….”

우연은 의도하지 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그날 밤 TV디자인팀은 새로운 스케치에 매달렸다. 와인글라스를 닮은 TV디자인이 수백 장 그려졌다.

이름은 ‘보르도TV’로 정해졌다. 디자인팀과 기술개발팀은 시제품을 만들어 최지성 당시 사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최 사장은 개발팀을 무척 나무랐다. 시제품의 두께(110㎜)가 당초 디자인팀이 제시한 두께(80㎜)보다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 역사 이래 기술개발의 기둥으로 대우를 받았던 엔지니어들은 디자인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디자인을 따라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 달 후 개발팀은 당초 시안대로 80㎜에 맞췄다. 실제 두께는 1㎜ 얇은 79㎜. 자존심이 강한 자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처럼 디자인팀은 개발팀의 자존심이 1㎜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외감을 표시했다.

보르도TV는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의 새로운 흐름을 읽는 계기가 됐다. 기술과 디자인은 함께 간다는 사실을…. 어쩌면 기술이 디자인을 계속적으로 따라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제품 경쟁력을 강화하는 요소로 디자인의 위력은 ‘보르도TV’에서 증명됐다. 보르도는 삼성전자의 대표 TV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누볐다. 이를 발판으로 삼성전자는 세계 TV시장에서 선두가 됐다. 보르도TV는 TV시장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革新, 초일류로 가다

시장은 없다, 만들어갈 뿐이다

2005년 출시된 보르도TV. 삼성전자를 세계 1위로 올려놓는 데 현격한 공을 세웠다. 2001년 8월, 도쿄(東京) 오쿠라호텔에 윤종용(尹鍾龍) 부회장, 이윤우(李潤雨) 반도체총괄사장,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 황창규(黃昌圭) 메모리사업부장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했던 그 호텔이었다.

“시장할 텐데 음식점으로 갑시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건희 회장은 ‘자쿠로’라는 호텔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장이 삼성전자 핵심수뇌부를 긴급 호출한 까닭은 일본 T사가 극비리에 제안한 ‘합작개발’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선을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낸드플래시(전원이 없어도 데이터를 계속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의 일종) 원천기술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시장 점유율 46%를 차지하고 있던 T사의 제안은 2위 업체였던 삼성전자(메모리 세계시장 점유율 26%)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노심초사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수뇌부들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가 수종(樹種)사업으로 키워온 프로젝트입니다.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곧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자쿠로 회동’이라 불리는 이날 모임은 삼성전자의 새로운 수종사업으로 떠오른 플래시메모리 사업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미팅이었다. 이날 회동은 ‘D램 신화’에 이은 ‘플래시메모리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1년 만에 도시바를 추월했고, 3년 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58%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쿠로 회동’ 때 힘을 발휘한 경영진의 놀라운 결단력 때문이었다. 그룹 핵심 인사들의 선견력이 없었다면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일본의 그늘에 눌려 있었을 것이다.

플래시메모리의 신화는 삼성이 자체 양성한 해외박사 1호인 임형규 수석에서 비롯됐다. 그는 1984년 7월 플래시메모리의 원조(元祖)격인 16K EEP를 개발했다. 이후 시장성 있는 기술에 눈을 돌린 임형규 수석은 마스크롬(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에 주목했다.

임 수석이 기술의 사업성을 항상 염두에 둔 것은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평소 지론 때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기술적으로만 완벽한 제품이 아니라 사업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연구원이라고 해서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했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연구원들도 사업을 알아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1기가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다 팔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 9일, 이건희 회장 주도로 열린 ‘반도체 특별 전략회의’는 반도체 사업의 세대교체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회의였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본격적으로 모바일형 복합 메모리칩 개발에 들어갔다. “삼성전자 없이 모바일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업을 추진해 나간 것이다.

2006년 12월 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한 세계적 반도체학회인 ‘IEDM(국제전자소자학회)’에서 반도체 총괄을 맡고 있던 황창규 사장은 “D램과 S램을 하나로 합친 512메가 원디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플렉스-원낸드 메모리를 개발했고 모바일 시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플렉스-원낸드 개발소식을 접한 세계적인 IT기업 관계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삼성전자를 방문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들에게 비빔밥을 대접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면 흔히 김치와 불고기를 꼽지만 비빔밥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다양한 재료를 선택적으로 넣을 수 있는 비빔밥은 한국 문화가 반영된 고객친화적 음식입니다. 소문난 비빔밥 집은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섞어 가며 더욱 맛있는 비빔밥을 창조해 냅니다. 식생활이 다른 외국인을 고려해 그들 문화의 비빔밥도 만들 수 있어요. 삼성전자가 퓨전반도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배경도 이와 같습니다.”

플래시메모리는 디지털카메라가 필름 대신 플래시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MP3와 모바일기기가 대중화되면서 플래시메모리 시장은 더욱 커졌다.

최근 들어 삼성전자는 꿈의 저장장치라 불리는 SSD(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 비해 빠른 속도와 소형화가 가능한 저장장치)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SSD 수요처가 기존 PC에서 디지털기기로 다양화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삼성전자는 시장의 창조자이자 개척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 눈앞의 기름진 음식만 즐기다 뚱뚱해진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역사의 유럽에서 ‘名品’으로 인정받다

낸드플래시는 USB메모리,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고용량 휴대폰, SSD 등으로 상품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신시장을 개척했다. 1988년 당시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은 ‘KED’라는 프랑스 수입회사와 합작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20년 후인 2007년 6월, 프랑스법인은 휴대폰과 LCD TV 등 5개 부문에서 프랑스 현지시장 1위를 차지했다. 기업순위도 150대 기업에 진입했다. 이제 ‘SAMSUNG’은 아무에게나 미소를 보내던 값싼 브랜드가 아니라 명품(名品) 대우를 받는 최고의 브랜드로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다.

유럽의 전자 유통시장은 무혈(無血)의 전쟁터와 다름없다. 대형 유통매장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럽에서는 제품이 어느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많이 진열되느냐에 따라 매출이 좌우된다.

프랑스법인의 성공은 대형 유통업체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판매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한 결과였다.

유럽 최대의 전자 유통업체인 ‘다티(Darty)’의 매장 로열석에는 언제나 삼성전자 제품이 진열돼 있다. 매장 직원들이 제일 먼저 고객에게 추천하는 제품 역시 삼성전자 제품이다. 이 같은 결과는 20년 동안 끊임없는 노력으로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티의 판매이사 블라디미르 라임즈는 삼성전자와 첫 거래를 시작할 당시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최고경영자의 지시로 삼성전자 제품을 들여놓긴 했지만 그 같은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삼성 TV는 AS센터의 골칫거리였습니다. 판매량보다 AS가 더 많았죠.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삼성과 계속 거래를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당시 현장 직원들의 이 같은 불만에 대해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삼성 제품을 계속 취급하라고 지시 내린 이유는 삼성 사람들의 열정 때문이다. 삼성 제품이 지금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품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럽시장, 특히 프랑스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고 점차 개선되고 있다. 나는 삼성 제품보다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신뢰가 생겼다. 삼성은 크게 성공할 브랜드라는 확신이 섰다.”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은 현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리를 마케팅에 접목해 ‘삼성’이라는 이름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삼성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라임즈 이사는 불과 1년 만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삼성 제품이 현지화하면서 판매량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임즈 이사의 삼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2000년 한국을 방문해 최지성 당시 부사장을 만나고 나서였다. 최 부사장은 라임즈 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기술을 넘어 디자인에서도 최고가 될 것입니다. 여성들도 전자제품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삼성의 전략은 특히 유럽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제품으로 거듭날 겁니다. 우리 삼성을 믿고 유럽에서 함께 넘버원이 되도록 합시다. 라임즈 이사는 고객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파트너입니다.”

삼성전자의 제품이 차지한 곳은 다티의 진열대와 고객의 거실만이 아니었다. 2005년 12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엄궁에 삼성전자 LCD TV를 들여놨다. 영국 여왕도 인정한 명품이 된 것이다. 2008년 5월에는 프랑스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에도 삼성전자 TV가 입성했다. 프랑스처럼 치즈 종류가 370여 가지에 달하는 자존심 강한 나라를 정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創造, 백년기업을 향하다

특허라는 양날의 칼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삼성전자는 64K와 256K D램의 로열티로 8500만 달러를 우리에게 지급하시오.”

1985년 어느 날, TI(Texas Instruments)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미국인이 삼성전자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회사가 보유한 반도체 D램 특허권을 삼성 측이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금액은 당시 삼성전자 한 해 영업이익의 85%가 넘는 액수였다.

1년 뒤 삼성전자가 이 혹독한 조건을 수락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1986년 TI는 미국 댈러스 지방법원과 워싱턴 소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에 소송을 제기했다. TI는 일본의 7개 회사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 무렵 일본 기업들은 TI의 특허가 기본특허임을 간파하고 8개월을 버티다가 TI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다. 삼성전자만 끝까지 버텼다.

마침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삼성전자의 D램 미국수출을 금지했다. 사업을 중단할 수 없는 삼성전자는 그로부터 6개월을 더 버티다가 TI의 요구를 100% 받아들였다. 8500만 달러를 고스란히 지불한 것이다. 특허의 위력을 배운 수업료치고는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

1987년 경영권을 승계받은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자율경영·인간존중과 함께 ‘기술 중시’를 21세기 초일류 기업을 향한 비전으로 내세웠다. 이 회장은 “남보다 앞선 기술 없이는 미래에 먹고살 길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의 특명에 따라 삼성전자는 연구개발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고 미래사업을 위한 씨앗 심기에 주력했다. 삼성의 브레인 ‘종합기술원’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회장은 연구개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연구개발은 보험과 같습니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농부가 배고프다고 뿌릴 종자를 먹어버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삼성전자는 1987년 ‘비싸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후 특허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독자기술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0년 동안 상당수의 특허를 확보했다. 1998년 미국 특허등록 건수는 1306건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2000년 들어 ‘특허 내실화’에 주력했다. 특허로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삼성전자는 MPEG(동영상 파일 압축 기술) 관련 특허로 한 해 동안 2500만 달러의 로열티 수입을 올렸다. 2009년 현재, 세계 1400개 업체가 삼성의 MPEG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10년간 1조원에 달하는 로열티 수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허의 중요성을 깨달은 삼성전자는 2007년 12월 이상한 특허 소송에 휘말렸다. LCD 패널과 LCD TV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양강(兩强)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의 S사가 도쿄지방법원에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S사는 “삼성전자가 자신의 회사 특허 5건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LCD TV와 LCD 모니터의 일본 판매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름 ‘체력’을 키워온 삼성전자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S사가 소송을 제기한 지 한 달 뒤 맞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는 “S사가 LCD 모듈 관련 4건의 삼성전자 특허를 침해하고 있다”고 역공을 취했다.

결과는 삼성전자의 승리였다. 도쿄지방법원은 “S사가 생산하고 판매하는 LCD TV 제품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삼성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국내기업이 일본 현지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사건이었다.

삼성전자의 역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S사가 삼성전자의 특허 2건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 법원은 삼성전자의 요구를 수용해 S사가 생산한 LCD TV와 휴대전화의 판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지난 20여 년간 모진 풍파(風波)를 이겨내고 독자기술을 확보한 결과였다.

2008년 12월,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출원·등록 특허 7404건을 기록하면서 만년 1등이었던 IBM을 제치고 미국 내(內) 1위 자리에 올랐다. 특허경영 역사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유럽에서도 3위(1475건)를 차지하며 비유럽 국가의 회사로서는 유일하게 ‘톱10’에 입성했다. 특허제도는 천재(天才)의 불꽃에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 제도였다.

두뇌 전쟁 시대를 위하여

1991년 시작된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은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IT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컴퓨터 천재들, 특히 소프트웨어 인재를 뽑아 오세요.”

컴퓨터 부문 인사팀에 비상이 걸렸다. 1991년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이건희 회장이 직접 국제전화로 지시를 내린 것이다. 1987년 반도체 사업에서 첫 흑자를 낸 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사업구상에 전념했던 이건희 회장은 컴퓨터 사업에 관심이 컸다.

인사팀 김성재 이사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인사팀의 안테나에 유니코사(UNICOSA·전국대학컴퓨터서클연합)가 포착됐다. 유니코사는 고려대 등 7대 대학 컴퓨터 동아리가 조직한 연합회였다. 유니코사 회장을 지낸 송길섭 사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유분방한 대학생들. 그들을 위해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이라는 새로운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삼성의 멤버십 프로그램은 컴퓨터를 다룬다는 대학생들 사이에 금방 입소문이 났다. 소위 ‘모범생 인재’를 선호하는 삼성전자가 학점이나 학교를 보지 않고 컴퓨터 재능만을 보고 회원을 뽑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였다.

제1기 멤버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생 회원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대졸 신입사원에 비해 실력이 2~3년 앞서 있었던 것이다.

멤버십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삼성전자는 대학 졸업을 앞둔 회원 중 10여 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학점과 삼성직무검사(SSAT)의 결과였다. 멤버십 회원들의 학점이 대부분 ‘선동열 방어율’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인사팀의 노력으로 멤버십 회원들은 학점과 상관없이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면접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컴퓨터 실력과 면접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컴퓨터 고수(高手)들 사이에는 흔히 말하는 ‘계보’가 존재했다. 실력에 따라 증손자, 손자,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라고 서로를 부르곤 했다. 그런데 면접 결과는 증조할아버지가 떨어지고 증손자가 합격하는 꼴이었다.

천재급 인력을 모아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삼성전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안승준 당시 인사팀 부장은 면접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황을 설명했다. 마침내 삼성전자 최초로 면접 결과를 뒤집는 ‘혁명’이 벌어졌다.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바둑 1급짜리 10명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어도 바둑 1단 1명을 이기기 힘든 것과 같은 원리다. 최고의 인재를 발굴하는 삼성전자의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기록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해서 이번글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삼성전자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삼성 전자는기존에 여러가지로 나누어져 있던 삼성계열사를 통합해서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반도체와 휴대폰, 그리고 가전 부분과 lcd 분야로 각각 별도로 운영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부품파트와 완제품 파트로 사업부를 통합하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삼성 전자는 삼성의 메인 사업부로써 시가총액이 600조원을 넘을 정도로 거대하며 삼성의 나머지 계열사보다 훨씬 더 큰 매출액을 가지고 있는 국내 굴지의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방도체 시장에서 DRAM과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전제품과 영상가전, 및 휴대용 가전, 컴퓨터 등 전자부품이 들어가는 거의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럼 삼성전자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삼성전자의 역사

삼성전자는 1968년을 기점으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었던 이병철 회잔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한 다음부터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1969년에 산요전기와 합작을 해서 삼성-산요 전기가 설립되었습니다. 삼성은 그 당시 동양방송이라는 방송사도 소유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텔레비젼을 더 많이 구입하고 시청할 수록 방송을 통한 수입도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구글이 인터넷 이용자를 더 많이 확보할 수록 전체적인 구글의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성은 이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수익 창출을 하게 됩니다.

1970년대 삼성전자

1970년대에는 처음으로 흑백TV 수출까지 진행하게 되구요, 백색과정과 음향기기 생산에도 뛰어듭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반도체의 시작은 1973년에 삼성일렉트릭스를 합병하고 1974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삼성-산요는 1975년에 삼성전기로 이름을 한차례 바꾼다음 1977년에 삼성전자로 완전히 합병이 됩니다. 삼성전자는 한국최초의 전자제품을 여러가지 만들어 내면서 본격적인 전자제품 회사로서의 입지를 굳혀가게 됩니다.

1980년대 삼성전자

1980년대는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집중하게 됩니다. 1980년에 삼성반도체 합병, 한국전자통신인수, 그리고 1988년 미국 마이크로 파이브 사 인수 등 회사들을 인수하며 기술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성종합기술원을 1987년에 설립하면서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1990년대 삼성전자

1990년대는 휴대폰 개발과 세계최초 64메가 D램을 개발하게 됩니다. 이 때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94년에는 256메가 D램을 개발하고 96년에는 1기가 D램을 개발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메모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99년에는 MP3 휴대전화와 여러가지 기술을 개발하면서 인텔에게서 투자를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삼성전자

2000년대부터 삼성전자는 국내 기업 시가총액 1위를 차지하면서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가게 됩니다. 2천년대 초반까지는 소니와 경쟁관계였지만 점차 소니를 제치게 되었으며 2007년 경에는 모토로라 까지 제치고 세계적인 휴대폰 제조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애플 다음으로 삼성이 위치할 정도로 엄청난 매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2010년대 삼성전자

2010년대는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요, 삼성전자는 갤럭시 시리즈를 히트시키면서 애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펼치게 됩니다. 애플의 반대편에 서있는 안드로이드 진영의 선두주자격으로 삼성이 포지션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속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투자를 해서 파운더리 업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감한 기술 개발과 마케팅의 성공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2010년대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만들어 납니다. 2019년에는 포브스 선정 전세계 기업중 13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지도 높은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삼성과 LG 관계

삼성과 LG는 여러가지 전자 제품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놓여있습니다. LG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면서 전자산업 분야에서 인정받는 회사이기 때문에 두 회사의 경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LG는 삼성보다 더 일찍부터 전자분야에 진출해서 사업을 하던 회사였습니다. 이 때문에 삼성의 전자분야 진출로 인해서 LG는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삼성은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히 발빠르게 움직이면서 시장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신들의 이익 창출에 힘써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LG 는 그에 비해서는 비교적 우직하게 시장을 공략하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결국 삼성은 기업 가치에서 LG를 압도하면서 국내에서 1위 기업이 되게 됩니다. 삼성과 LG는 사돈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 인 것 같습니다.

삼성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잘 선택해서 스마트폰 시장을 공략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 시장이 어느정도 상향평준화 되면서부터 폴더폰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선도적으로 개발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분야에서도 파운더리 업계에서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면서 새로운 미래 동력을 개척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업의 성장과정에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삼성은 특유의 미래에 대한 안목과 가치 투자를 성공적으로 과감하게 진행하면서 현재의 성공을 이끌어 낸 것 같습니다.

[필살기의 경제학] 삼성을 정점으로 올린 ‘반도체’

▲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현장을 점검하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출처: 삼성전자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약 300조원(7월 14일 종가 기준 321조1743억원)이다. 2020년 우리나라의 연간 국가예산이 약 513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삼성전자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단순히 규모만 큰 회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통하는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7월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Forbes)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브랜드 Top 100의 순위를 발표했다. 포브스는 매년 전 세계 주요 기업들의 브랜드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해 순위를 매긴다. 이 조사에서 삼성전자는 브랜드 가치 531억달러(약 64조651억원)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코카콜라에 이어 전체 7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7위가 과연 충분히 의미 있는 높은 순위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보다 순위가 낮은 기업들을 보면 된다. 8위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잘 알려진 마블 스튜디오의 주인 월트 디즈니, 9위는 일본의 ‘국민 기업’ 토요타 자동차, 10위는 세계 최대의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날드다.

‘영화 같은’ 역사의 시작

현재 삼성전자의 사업은 크게 CE(생활가전), IM(IT·모바일), DS(반도체), HARMAN(전장부품) 등 4개 부문으로 구분돼 있다. 각 사업부문들이 생산하는 제품들은 현재 모두 글로벌 시장에서 일류 브랜드 취급을 받고 있으며, 대중적으로는 스마트폰 갤럭시(GALAXY)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글로벌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은 반도체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역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미국과 일본은 각자가 개발한 반도체 칩들을 생산하며 세계 전자업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부가가치가 있는 반도체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1월 KEMCO와 미국 현지법인 ICⅡ의 합작으로 ‘한국반도체’가 설립된 이후부터다. 당시 삼성전자의 주력제품은 가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전 세계 경제를 강타한 오일쇼크로 가전 수출길이 좁아지면서 삼성전자 역시 어려움을 맞았다. 이 때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고, 이를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는 첨단기술의 핵심인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것에 삼성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주장했고, 삼성전자는 1974년 12월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큰 부가가치를 내지 못했고, 부진한 실적으로 그룹의 ‘돈 먹는 기계’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본인 스스로 반도체 공부를 해나가는 한편 실리콘밸리를 돌며 현지의 유능한 인재들을 파격적으로 영입했다.

1983년 2월 8일 삼성은 물론 한국 반도체 역사의 이정표를 세우는 대형 이벤트가 벌어진다. 이병철 회장이 일본 동경에서 “반도체에 투자만 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여론은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반도체는 무슨…” 이라면서 냉소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달랐다. 그해 12월 삼성전자는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 성공을 시작으로 영화같은 반도체 성공신화를 써 내려간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TrendForce)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1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세계 D램 반도체 점유율은 44.1%로 이는 전체 순위 1위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2019년 미국 인텔(Intel)에 내주기 전까지 글로벌 반도체 업계 매출에서도 1위 자리를 지켜왔다.

▲ 삼성 반도체 평택캠퍼스 P2 라인 전경. 출처: 블로그 삼성반도체이야기

코로나 위기, 저울질과 강공(强攻)

코로나19 팬데믹은 삼성전자 반도체 수출 여건에도 악재가 됐다. 특히 삼성전자 반도체의 가장 큰 수요처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자칫 잘못하면 반도체의 수요가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악재가 될 수 있는 외부 여건들을 차분히 조율하면서 동시에 최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매일같이 코로나19 검진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중국 사업장으로 직접 향해 현장의 분위기를 살핌과 동시에 미국과의 갈등으로 격앙된 중국을 진정시켰다. 그러면서도 미국을 포함한 서구 시장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음으로 저울질을 했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반도체 개발을 위한 투자도 지속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코로나19 악재 가운데서도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산학협력 연구 지원의 규모를 2배 이상 확대하며 올 한 해 동안 약 1000억원을 투자했다.

반도체 부문에 대한 삼성전자의 전략적 대응은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2020년 2분기 호실적으로 ‘필살기’의 강함을 증명했다. 투자계는 코로나19의 악재를 감안해 올해 2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을 6조원대로 예상했다. 지난 7일 발표된 2분기 잠정실적 공시에서 삼성전자는 당기 영업이익이 8조1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판매가 부진했던 가전과 스마트폰의 영업이익 감소분을 반도체가 만회하고도 남았다.

물론 하반기에는 반도체 업종 전반이 어렵다는 불안감도 크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는 한편 공격적인 파운드리 시장 진입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삼성 반도체 2030을 가동하는 한편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도 나서는 중이다.

삼성전자㈜(三星電子(株))

삼성전자㈜는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로 출발하였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로 사회 물의를 빚은 이른바 ‘한비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는데, 1968년 경영복귀와 함께 전자산업에 참여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69년에 삼성전자공업㈜과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하였다.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한 삼성·산요전기㈜는 1970년 흑백 TV 생산을 개시하였다. 삼성전자공업㈜도 1970년부터 백색가전 제품 및 AV 기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삼성전자공업㈜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였으며, 세탁기와 냉장고 생산을 개시하였다. 1975년 삼성·산요전기㈜는 ‘삼성전기’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1977년에는 삼성전자공업㈜에 흡수·합병되었다. 이미 1971년부터 흑백 TV를 파나마에 수출한 삼성전자공업㈜은 1977년에 컬러 TV 양산을 시작해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1978년 최초로 미국에 해외사무소(SEA)를 설립하였으며, 세계 최다 수량인 흑백 TV 400만 대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1979년에는 한국전자정보㈜를 인수하고, 전자레인지 양산에 돌입하였다.

한편 한국반도체㈜는 1978년에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하였는데, 1980년에 삼성전자공업㈜이 이 회사를 합병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82년 이병철 회장은 3남인 당시 이건희 부회장의 권유로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시찰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을 시행하였다. 삼성전자공업㈜은 1983년 초부터 최첨단 반도체(VLSI) 양산공장 건설에 착수하였고, 향후 5년간 사설 투자 4,400억 원 및 연구 개발비 1,000억 원을 투입하여 첨단 기억소자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연간 1억 개 이상 생산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한편, 삼성전자공업㈜은 1982년에 흑백 TV 1,000만 대 생산을 돌파하였으며, 1983년부터는 PC도 생산하였다. 그리고 1984년 2월 현재의 상호인 삼성전자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이때부터 미국시장에 VCR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에는 세계 최소형·최경량의 4㎜ 비디오테이프 리코더를 개발하였다. 1987년에는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한 삼성종합기술원을 개원하였다.

1987년에는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자 2세 경영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1988년에 삼성전자㈜는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하여 가전제품·통신·반도체를 3대 핵심 비즈니스 분야로 선정하였다. 삼성전자㈜는 1991년에 휴대전화를 개발하였으며,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93년에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신경영’을 발표하고, 영문으로 된 새로운 CI를 선포하여 글로벌 시장 선점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1993년에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으며, 1994년부터는 64M D램 양산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 256M D램을, 1996년에 1G D램을 최초로 개발해 반도체를 국내 대표산업으로 키우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90년대 이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신제품이 많았다. 1997년 세계 최초로 30인치 TFT-LCD를, 1998년에 세계 최초로 128MB SD램과 128MB 플래시 메모리 개발을, 1999년에 세계 최초 MP3 휴대전화와 3D TFT-LCD 모니터를 개발하였다.

2000년대에 삼성전자㈜는 컬러TV 누적 판매 1억 대를 돌파하였다. 2001년에는 512MB 플래시 메모리 양산 체제에 돌입하였고, 2002년에는 전 세계 낸드 플래시 메모리 1위, 반도체 2위를 달성하였다. 2003년에도 플래시 메모리 분야 세계 1위를 차지하였으며, 2004년에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탕정 LCD 공장을 설립하였다. 2005년에 세계 최초 50나노급 16Gb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2006년에 세계 최초 40나노급 32Gb 낸드 플래시 메모리와 50나노급 1Gb D램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 삼성전자㈜는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였으며, 2007년에는 휴대 전화 부문에서 모토롤라를 제치고 세계 2위의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되었다. 2008년에는 러시아에 TV 공장을 설립하였고, 2009년에는 세계 최초 40나노급 D램을 개발하였다. 또한, 2009년에 삼성전자㈜의 휴대 전화 판매량은 2억 2,700만 대로 노키아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0년에는 드디어 매출액 기준 세계 최대 전자회사로 등극하였다.

삼성전자㈜는 2012년 브랜드 가치 329억 달러로 세계 100대 브랜드 중 9위를 차지하였다. 2013년에는 세계 최초 20나노급 4Gb 초고속 모바일 D램, 세계 최초 3D V낸드 플래시 메모리 양산 체제에 돌입하였다. 2014년에도 세계 최초 20나노 4Gb DDR3 D램, 2세대 3D V낸드 양산체제를 구축하였다. 2015년에는 10년 연속 세계 TV 시장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15.36TB 서버 SSD를 출시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갤럭시 S7, 갤럭시 S7엣지, 360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 ‘기어 360’ 등의 신제품도 선보였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특성에 따라 CE(Consumer Electronics) 사업부문, IM(Information technology &Mobile communication) 사업부문, DS(Device Solutions) 사업부문 등 3개 사업부문으로 나누어 독립 경영을 하고 있다. CE 사업부문은 TV·에어컨·냉장고·세탁기 등 백색가전제품 분야인데, 특히 평판 TV와 모니터는 뛰어난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2006년 세계 시장에서 1위에 오른 이래 절대 강자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IM 사업부문은 휴대폰·PC·카메라 등 정보 모바일 분야의 제품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부문의 기술력은 전 세계 4억 대 이상의 휴대폰을 판매할 정도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정보통신 부문 장비와 솔루션 또한 지구촌 곳곳의 4G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DS 사업부문은 DRAM·낸드플래시 등 메모리와 모바일AP·주문형 반도체 등을 제조하는 반도체 사업, 그리고 LCD패널·OLED패널 등 액정화면표시 장치인 디스플레이 패널을 생산·판매하는 디스플레이 사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메모리 부분에서는 절대적인 기술 우위와 원가 절감을 바탕으로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모바일 중심의 고수익 차별화 제품을 확대하고, 차세대 신제품 개발에도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역사

초기 삼성전자의 역사는 다른 전자기기 회사들과 달리 전자제품과 관련이 없었다. 1938년 삼성의 설립자 이병철은 삼성을 한국에서 야채, 물고기, 과일 등을 중국에 수출하는 기업으로 시작했다. 그 후 10년 , 삼성은 밀가루나 사탕수수 빻는 기계를 만들어 1951년에 비로소 주식회사가 되었다. 작은 회사로 시작헀지만 1958년부터 삼성은 산업을 확장해 파이낸셜 미디어, 화학산업까지 넓혔으며 조선회사를 1970년에 세웠다.

삼성전자는 1969년에 가장 삼성이 잘만들기로 유명한 휴대폰, tv, 라디오 , 컴퓨터 등을 제조하는 회사로 설립된다. 1987년 설립자이자 회장인 이병철이 죽고 이건희가 회장자리를 차지했다. 이건희 회장이 맡은 삼성은 1990년대 들어 1997년도까지 글로벌 기업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독일, 대만, 멕시코, 스페인 그리고 중국 등에 공장을 세웠다. 1997년 초 IMF가 한국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한국 기업이 가라앉았지만 삼성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빚을 덜기위해 사업을 팔았고 50,000명이나 되는 직원을 해고했다. 하지만 전자산업은 다행히도 최선을 다해 어려운 길을 빠져나와 성장을 지속했다. 이후 삼성과 모바일 폰의 역사는 10년 동안 지속된다. 1993년 삼성은 ‘가장 가벼운’ 핸드폰을 시장에 내놓는다. 그리고 핸드폰과 mp3플레이어와 결합 하한 스마트폰 개발을 2000년대까지 이어간다. 비디오 기능까지 탑재하여 빠른 핸드폰을 만들며 고객에 요구에 발맞췄다. 삼성은 모바일 폰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하며 최근에는 시장 2위인 노키아 대비 100% 성장 차이를 보인다.

삼성의 성공적인 성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시작은 수출회사였고 다양한 제품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 하하며 성장했다. 설립자 이병철 회장은 1938년 삼성을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기업이 될 거라고 얘측했고 삼성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세계에서 ‘별’이 된다는 의미다. 그 이름은 다른 종류의 산업과도 연관되는데 삼성은 전자제품, 정보기술과 개발과 분야에 발을 넓힌다. 1969년 삼성이 탄생했을 때 그때부터 이미 병원, 제지, 보험, 백화점 등 다양한 산업을 취하고 만들고 있었다. 그 삼성은 결국 모국인 한국에서 시작해 이름을 따라 많은 세계로로 뻗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성전자는 70년대 들어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삼성의 기술 제공자로서의 성장을 지속하며 80년대까지 반도체와 전자통신의 합병을 이어나갔다. 하이 테크놀로지 제품은 국제시장에서 비로소 각 분야에 주요 제품이 되었다. 이후 개발은 이후 10년 동안 이어졌고 비즈니스를 재건축하여 글로벌 시장을 포용할 계획으로 이어졌다. 또한 새로운 매니지먼트 형태를 받아들여 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그들의 제품이 왜 시장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고 삼성이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Tv-LCD나 사진, 다른 하이 테크 제품은 높은 품질 때문에 비로소 인기 있는 제품이 된다. 삼성이 LCD 산업에 뛰어든 1993년, 그들은 세계 최고가 된다.

2006년 삼성의 LCD 기업은 안정적인 LCD 패널 공급을 위해 여러 벤처기업들의 합작으로 소니와 삼성 사이에 세워졌다. LCD는 삼성과(50%) 소니(50%) 반반의 소유였으며 공장은 국내에 있었는데. 경쟁자들 사이에서 삼성은 가장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여겨졌다. 삼성전자는 제품을 확장시키며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큰 DRAM 칩, 메모리 만드는 제조사가 되었고 2010년까지 판매량을 두배로 늘려 20곳의 제조사 중 최고가 된다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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