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 너무 잘 만들어서 570년 전 인류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대규모 전쟁을 완벽히 그려냈다고 극찬받은 대박 명작 55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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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꿈 리뷰/ 소개/ 추천
설명: 동로마제국(비잔티움,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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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함락 – 1453년 – 옐로우의 세계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지중해 기독교세계의 동부 최전방인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연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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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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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최후 – 서울경제

두터웠던 성벽도 파괴돼 튀르크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최후를 맞았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찾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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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edaily.com

Date Published: 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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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 ( / ˌ K ɒ N 의 t æ N t ɪ N oʊ P는 əl / ; [5] 그리스어 :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Kōnstantinoupolis , 라틴어 : Constantinopolis , 오스만 터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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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mn.wiki

Date Published: 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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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UTZI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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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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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조감 복원 상상도(그래픽 재현)

콘스탄티노폴리스(라틴어: Constantinopolis,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콘스탄디누폴리스[*] , 영어: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 , 오스만 튀르크어: قسطنطينيه 코스탄티니예 )는 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30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던 비잔티움(라틴어: Byzantium 비잔티움[*] , 그리스어: Bυζαντιον 뷔잔티온, 비잔디온[*] ) 땅에 세웠다. 이 땅은 예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천연의 항만인 금각만을 끼고 있었다. 도시 이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뜻한다.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새로운 로마 (Νέα Ῥώμη)이자 ‘제2의 로마’라는 의식이 뿌리내렸다. 동로마 제국의 융성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 30~40만 명을 헤아리는 기독교 세계 최대 도시로 번영을 누렸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모든 도시의 여왕’, ‘세계의 부(富) 3분의 2가 모인 곳’이라고 불렸으며, 또 고대 건축물이 보존된 대도시로 위용을 떨쳤을 뿐 아니라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위치한 정교회의 중심지로 비잔틴 문화의 중심이었다. 도시의 수호 성인(守護聖人)은 성모 마리아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강고한 성벽으로도 유명했다. 동로마 제국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외부의 적이 공격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이는 도시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이후 콘스탄니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다만 공식 명칭은 ‘이스탄불’로 바뀌는 1930년대까지 줄곧 콘스탄티노폴리스었으며 오스만의 술탄 또한 스스로 로마 황제라 칭했다).

현재에도 동방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이스탄불에 두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정식 칭호는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및 세계 총대주교’로, 이 도시에 붙은 ‘새 로마’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름 [ 편집 ]

한국에서는 흔히 영어 이름인 Constantinople을 그대로 읽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읽으며(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고전 라틴어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고전 그리스어로는 ‘콘스탄디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고 읽었으며, 중세 그리스어 및 이를 계승한 현대 그리스어 문어에서도 이를 그대로 이어 읽었다.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읽고 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한 뒤, 현재의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터키어 이름보다는 ‘코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라고 불렀다.

동로마 자체적으로는 ‘도시들의 여왕(그리스어: 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새로운 로마(고전 라틴어: 노바 로마 Nova Roma, 고전 그리스어: 네아 로미 Νέα Ῥώμη)’, ‘그 도시(고전 그리스어: 이 폴리스 ἡ Πόλις)’ 등으로 불렸다. 외부에서는 러시아어 등 슬라브 계통의 사료 속에서 ‘차르그라드’(Царьград, 황제의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바이킹들은 고대 노르드어로 ‘미크라가르드’(Miklagarð, 위대한 도시)라고 불렸다. 한자로는 ‘황부’(皇府)에 해당하는 글자도 사용되었다.

도시 이름의 각국별 음차 표기 [ 편집 ]

고전 그리스어 재건음 중세 그리스어

근현대 그리스 문어 현대 그리스어 고전 라틴어 재건음 콘스탄티누폴리스 콘스탄디누폴리스 콘스탄디누폴리

콘스탄디누폴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영어 동방 정교회(미사 때) 러시아어 오스만어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폴리 콘스탄티니예

역사 [ 편집 ]

고대 말기의 번영(4세기~6세기) [ 편집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에 기원을 둔다. 그리스의 메가라 출신이었던 비자스(Byzas)가 창건했다고 하며, 초기 비잔티움이란 이름도 비자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했으며, 이미 고대로부터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잇는 동서교역의 요충지로서, 또한 천연의 항구인 금각만을 끼고 있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i Poli, “도시”)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존속했던 기간 대부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럽 최대 도시였고 제국인들이 세계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19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비잔티움은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했다. 당시 비잔티움은 천험의 지형, 다수의 함대,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의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군사들과 백성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간이나 농성했다. 도시가 함락된 후 비잔티움은 황제군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몇 년 후 배로 확장되었다.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 조치로 비잔티움은 페린투스(Perinthus)시의 일부로 격하된 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메세 가도가 놓였다.

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이후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의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도리어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에게 반격당해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간 포위 공격해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시 [ 편집 ]

하기아 소피아의 천정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콘스탄티누스 1세. 손에 든 것은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를 정면의 성모자에게 봉헌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발굴된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을 새긴 기념 주화.

내전이 종결되어 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았다. 324년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점령한 비잔티움을 공략했다.

처음에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이틀간의 전투 끝에 배 130척과 병사 5000명을 수장시킨 탓에 전세가 급격히 반전됐다. 바다를 장악해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결국 장악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 있는 군사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고,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 제국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은 거점이었다. 당시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324년에서 330년까지 6년 동안 비잔티움에 성벽을 세우고, 웅장한 궁전, 황제석으로 지어지고 청동 장식을 더한 원형 극장, 중앙에 티베리스강의 붉은 반암으로 만들어진 높은 원주 기둥이 있는 포룸, 아우구스테온 성당, 제욱시페라는 공중 목욕탕 등 여러 화려한 건축물들을 지어 옛 성곽과 연결하는 막대한 규모의 공사[1]가 끝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천도식(遷都式)을 거행했다.

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지정한 공식 명칭은 노바 로마(Nova Roma, 새로운 로마)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내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 황제들부터 외면하던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존재만으로도 지중해의 교역 상황을 바꿔 놓았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 교역으로 융성했던 발트해-흑해 무역로의 명성을 되찾아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보급되는 밀의 수송로를 바꾸었다. 5세기 동지중해에서는 남쪽에서 들어오는 식료품, 북쪽에서 들어오는 목재와 광물, 동지중해의 주요 도시로부터 들어오는 공산품(특히 직물)이 상호 거래됐다. 여기에 극동 지방의 비단과 향료가 추가로 거래됐다. 사산 제국이 징수하는 통행세 때문에, 주요 교역로로 북쪽에서는 흑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는 항로와 남쪽에서는 홍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항로가 이용됐다. 이집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정기 수송을 제외하면 해상 교역은 관례에 의거해 자유롭게 발전했다. 이러한 관례는 나중에 동로마 제국의 법 체계 내에서 ‘로도스법’으로 수정됐다. 해상 교역은 노미스마라는 금화를 통해 쉽게 이뤄졌다.[2]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이라는 요구에 맞추어 주요 건축물은 로마 시의 일곱 언덕을 본뜬 일곱 언덕에 배치되었다. 도심 중앙의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기점으로 도로망도 정비됐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바다로 둘러싸여 담수를 얻기 힘들었기에 식수 확보를 위해 광장 지하에 거대한 저수조를 만들었다.[3]

375년 도심과 서북쪽 베오그라드 숲에 있는 수원을 잇는 발렌스 수도교[4]가 건설되었다. 높이 약 20미터, 길이 1킬로미터가량의 이 다리는 19세기까지 약 1400년 동안 사용되었다.[3]

치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최초의 로마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년~395년)였다. 테오도시우스는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정비했다. 성벽과 항만을 건설하고, 성벽에 황금 문을 만들었다.[3]

380년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누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410년 로마가 서고트인 손에 약탈당할 때, 동쪽 국경에는 훈족이 도나우 강 북쪽에 다다라 있었다. 413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하여 완성했다. “병영 도시를 건설하는 데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던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 1000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5]

이후 로마가 급속히 쇠퇴한 것과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다. 4세기에 약 20만 명이던 인구는 5세기에 50만 명에 달했다.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 아야 소피아 등의 교회, 공중 목욕탕이나 극장 같은 공공시설이 많이 건설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서로마 황제가 공석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 이후 동로마 제국 사람들 사이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2의 로마” 또는 “제2의 수도”라는 의식이 싹터 있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이 망했다고 로마 제국 전체가 망한 것은 아니다.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제국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생겨나고 11세기에 서방 교회와 동방 정교가 나뉘는 대분열 때까지 이탈리아 반도 내부는 물론이고 로마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지배자들도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신들의 우두머리임을 의심치 않았다.[6]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에서는 매년 5월 11일 수도 탄생 기념 축제가 제국의 주요 기념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라는 의식이 정착했다.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융성을 맞이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크리스트교 최대의 도시이자 전 세계적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발렌스 수도교를 통해 끌어온 물을 담을 거대한 지하 수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8미터의 기둥을 4미터 간격으로 배치해서 가로 143미터, 세로 65미터, 넓이 9800제곱미터에 달하는 이 수조를 건설하는 데 노예 7000명이 동원됐다. 이곳에 물 8만 톤을 저장할 수 있었다. 수압에 견딜 만큼 두꺼운 외벽을 세우고, 석회를 이용해 방수층을 만드는 기술도 적용됐다. 대리석 기둥에는 아름다운 주두 장식을 두고, 천정은 4면으로 나누어 리브 볼트(ribbed vault)로 구성했다.[1] 터키인들은 이곳을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저장된 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식수와 생활 용수로 쓰이고, 목욕탕과 정원에 공급되었다.[7]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민들에게 빵을 무료로 지급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연일 열렸으며, 시민들은 경기에 열광했다. 고대 로마의 ‘빵과 서커스’라는 단어가 이 시대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암흑시대로부터 재흥까지 [ 편집 ]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했고 영토도 줄었다. 7세기에는 지배 계급과 주민 양쪽 모두 로마인보다 그리스인이 많아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3] 사산 제국과 이슬람 제국에 시리아, 이집트 등의 곡창 지대를 빼앗긴 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에게 지급하던 빵을 폐지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무적 함대를 이용해 황위에 오른 그는 반격에 나섰고, 626년에는 페르시아-아바르족 연합군에게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로 이끈 후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674년부터 67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슬람 해군에 의해 해마다 포위되었는데, 이 무렵에 비밀 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이용하여 이슬람 해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잇따른 전란으로 시민 수가 줄어들고, 수도나 공중 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도 버려져 시내는 텅 비다시피 하고 말았다.

8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각국에 영향력이 있는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가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충돌했고, 결국 11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가 완전히 갈라설 때까지 두 교회는 대립과 화해를 거듭했다.[3]

717년부터 718년 사이에 다시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황제 레오 3세가 이슬람군을 무찌르고, 차츰 동로마 제국도 국력을 회복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766년에는 인구 증가에 수반해 수도가 다시 복구됐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전차 경주에 열광하던 고대의 시민 대신 견직물, 귀금속 공예 등의 기술자나 동서 교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사는 상공업 도시로서 소생했다.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부의 대제국으로 부활한 9세기의 일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궁전, 교회, 수도원 등이 여럿 세워지고, 고아원이나 병원 같은 자선 시설도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이에 수반한 비잔틴 문화의 진흥도 이어졌다(마케도니아 조朝 르네상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동부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거점으로, 또한 러시아・불가리아・이슬람 제국・이탈리아・이집트 등 각지로부터 상인들이 방문하는 교역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제국의 전성기에는 인구 30만~40만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고, 전성기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 도시로, 교외까지 포함하면 인구가 100만 명 이상 인구가 거주했다. 11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프랑스의 순례자는, 유럽에서 최대 도시 10개를 합쳐도 이 도시만큼 인구가 많지 않다고 찬사를 보냈다.

11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약체화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번영도 잠시 쇠퇴했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 제국은 다시 강국의 지위를 회복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국제 교역 도시로서 번영을 되찾았다. 정교회 문화 역시 절정에 올라서 아야 소피아 등에는 화려한 성화(이콘) 등 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제국의 함락과 황폐화(12세기~13세기) [ 편집 ]

11세기 이후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상인들이 지중해의 운항과 통상을 주도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제해권과 무역 이권을 위협했다.[3]

1204년 4월 13일 제4차 십자군 침공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 라틴인에게 함락됐다. 과거 이슬람과 불가르족 등 여러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어도 천혜의 자연 조건 덕분에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던 도시였다. 그러나 라틴인은 상대적으로 성벽이 낮았던 바다 방면에서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갖 폭행과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다. 이들은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다스리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 드 에노를 황제로 내세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존립 기반이 약한 데다 베네치아의 해군력과 경제력에 의존했다. 57년 만인 1261년 7월,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을 이끌던 미카엘 8세는 수비병이 부재 중인 틈을 노려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다.[3]

그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미술품과 보물은 식량비 등으로 거의 베네치아로 옮겨졌고, 장려했던 궁전과 교회 등은 폐허로 변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는 50년 만에 4만 7000명으로 줄었고, 교역권도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에 장악되어 예전 같은 부를 누릴 수 없었다. 다만, 문화적 번영은 계속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비잔틴 문화의 중심이라는 지위는 유지했다. 비잔틴 문화의 번영은 당시 황실의 성이었던 팔라올로고스를 따서 ‘팔라올로고스 르네상스’로 불렸으며, 이는 서구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현재의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6월 7일)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육해군 13만 이상과 우르반의 거포라는 신무기를 동원해 이 도시를 압박했다. 동로마군은 외국 용병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일반 시민 모두를 합쳐도 고작 7000여 명밖에 안 됐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지휘 아래 있는 안간힘을 다해 약 50여 일간 항전했다.

메메트 2세가 쳐들어오자, 동로마 제국은 폭이 약 800미터에 이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금각만에 굵은 쇠사슬을 쳐서 적함이 침입할 수 있도록 봉쇄했다. 그러자 메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함정 72척을 육로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대규모 함대를 끌고 해발 60미터 갈라타 언덕을 넘어서 해협으로 들어가서 바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3] 시민들은 너무나 열심히 싸웠으나 끝내 압도적 병력과 무기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고, 1457년부터 이스탄불로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많은 교회를 모스크로 고쳤다. 그 와중에 아야 소피아에 있던 그리스도상 모자이크화는 회반죽으로 덧칠했다. 다만 정교회 총대주교 자리는 계속해서 시내에 두었고, 17세기 이후에야 구시가지 북부의 성요르고스성당으로 옮기도록 했다.[3] 오스만제국 시대에도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르키예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고, 서구에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터키인들 역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터키식 이름인 콘스탄티니예를 선호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 훗날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막아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같이 보기 [ 편집 ]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 1453년 – 옐로우의 블로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Fall of Constantinople)은 비잔틴-오스만 전쟁(1265~1453)의 마지막 부분으로 1453년 4월 6일에 전투를 시작하여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존재해왔던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의 동지중해 및 발칸 반도로의 진출과 지배권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문화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고전학 연구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고 결국 유럽 르네상스의 새로운 연료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4차 십자군전쟁에 있었던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심각하게 쇠락했다. 14세기 중반 이후의 비잔틴 제국은 빈사상태에 있었다. 보다 전문적인 행정기구가 있다는 점에서 오스만 투르크나 슬라브족 경쟁자들보다 더 잘 조직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관용이나 외부의 대규모 원조 없이는 거의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가난하고 크기도 작았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함락되었지만 사실은 이미 50년 전에 투르크의 손에 떨어졌어야 했다. 1390년이 되자 대다수의 비잔틴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비잔티움은 실상 오스만 제국의 비공식적인 속국이었으며 제국의 공인된 일부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억지스러운 주종 관계는 14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침착하고 점잖던 무라드 1세(Murad I)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Bayezid)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바예지드는 이미 1402년에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난 7년간 델리와 다마스쿠스 같은 도시들을 유린하고 (거의) 모스크바까지 휩쓴 티무르의 엄청난 군대가 소아시아 동쪽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터키 역사 연구의 성과에 근거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오스만 투르크의 장기적인 포위와 공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비잔틴 제국 내부의 조화될 수 없었던 반(反)서양적 입장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보루가 내부의 분열로 파괴된 것이다. 실제로 서양 라틴교회가 비잔틴의 그리스 동방정교회에 대해 일관되게 취했던 확장과 장악 정책 때문에,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설사 터키인들에게 투항할지언정 서양 라틴교회와 동맹을 결성해 공동으로 터키 무슬림에 항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방정교회가 터키인들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태의 압박 때문에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을 거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서유럽 라틴교회의 통치하에서보다 터키인들의 진보적인 통치하에서 더욱 많은 자주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이 1450년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과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의 영역만을 가진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XI)가 이끌고 있었다. 이 도시를 건설한 황제도 같은 이름인 콘스탄티누스였다는게 아이러니하다.

1451년에 오스만 투르크의 왕좌에 오른 메흐메드 2세(Mehmed II)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결국 비잔틴 제국은 21세의 이 야심찬 청년 술탄에 의해 1453년 5월 29일, 1100여 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 1450년경의 동東지중해 지역으로 오스만 제국에 둘러싸인 멸망 직전의 비잔틴 제국

※ 지휘관과 병력

비잔틴 제국 오스만 투르크 –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e XI) – 루카스 노타라스(Loukas Notaras) – 죠반니 지우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 – 약 7,000 – 12,000명, 26척의 배 – 메흐메드 2세(Mehmed II) – 자가노스 파샤(Zaganos Pasha) – 술레이만 발토울루(Suleiman Baltoghlu) – 80,000 – 150,000명, 90 – 126척의 배

이미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지역 요새인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i)를 소유하고 있던 메흐메드 2세(Mehmed II)는 유럽 해안에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로 알려진 요새 건설을 시작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효율적으로 장악한 메흐메드는 콘스탄티노플을 흑해와 고립시키고, 흑해 지역의 제노바 식민지로부터 받을 수있는 원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원조를 호소했다. 동방정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의 수세기에 걸친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오는 서구유럽에서 도움을 청하기로 동의했지만 도와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서구유럽의 왕들과 제후들은 각자의 문제 때문에 동방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약해져있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은 레콩키스타의 막바지에 있었다. 독일의 선제후들은 서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비록 몇몇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서방의 원조는 오스만 제국의 전력과 견주기엔 너무나 미미한 정도였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453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서아시아 · 북아프리카 · 지중해 · 서유럽의 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지연 시각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터키 역사 연구의 성과에 근거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오스만 투르크의 장기적인 포위와 공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비잔틴 제국 내부의 조화될 수 없었던 반(反)서양적 입장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보루가 내부의 분열로 파괴된 것이다. 실제로 서양 라틴교회가 비잔틴의 그리스 동방정교회에 대해 일관되게 취했던 확장과 장악 정책 때문에,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설사 터키인들에게 투항할지언정 서양 라틴교회와 동맹을 결성해 공동으로 터키 무슬림에 항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방정교회가 터키인들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태의 압박 때문에 성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기적인 과정을 거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서유럽 라틴교회의 통치하에서보다 터키인들의 진보적인 통치하에서 더욱 많은 자주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보다 이전인 1385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편지를 보내, 터키인이 그리스교회에 충분한 행동의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만약 문명과 문화 혹은 종교의 역량이 더 컸다면,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분명 라틴교회와 동맹을 맺고 일치단결해 터키 이교도의 침략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이 두 교회가 믿은 것은 모두 기독교였을 뿐만 아니라 모두 삼위일체 형태의 기독교였기 때문이다(기독교 단성론파와 네스토리우스파도 이전에는 세력이 매우 큰 기독교 유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삼위일체설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이는 두 교회가 교리에서는 실제적인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차이는 단지 조직 문제, 즉 각자의 조직 기구를 인식하는 정체성에 있었다. 두 교회는 두 인류 집단을 대표했고, 또한 역대로 의견 대립도 있었다. 이 의견 대립이 신학에서의 의견 차이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근본 원인은 지연 정치적인 이해와 충돌이었다. 라틴교회와 그리스교회의 대립은 표면적으로는 신학 분쟁이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십자군의 동방 원정 시기에 서유럽 기독교도는 이교도의 징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오히려 동남 유럽의 비잔틴 기독교 동포들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때 신학 대립이라는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고, 이익만이 중요 동기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또한 인류 집단의 충돌에서 지연 이익의 요소가 문명 · 문화 · 종교의 형태 요소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십자가 초승달 동맹

– 이언 아몬드 / 최파일 역 / 미지북스 / 2010.06.15

한 사람의 승전이 다른 사람에게는 대학살이며, 누군가의 승리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파멸이 되는 것은 역사의 일반적 진리다. 쉽게 말해서 1453년은 많은 투르크인들에게 시작을 ,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끝을 의미했다. 이 장에서는 당시의 투르크인과 기독교도(카탈루냐, 그리스, 세르비아인)의 연이은 동맹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앞서 언급한 대립적인 역사관만이 이 지역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입증할 것이다. 정체성이란 하룻밤 사이에 변하지 않는다. 어떤 민족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정복당하더라도 말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투르크인들이 정복한 그리스어권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이는 오스만군에 압도적인 수의 기독교도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오스만 투르크의 문화와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래 요소와 문화를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들 속에 융합하는 오스만 문화의 혼종성이야말로 제국이 이룩한 성취의 일부라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셀주크 투르크인, 일한 투르크인들과 대대손손 함께 살면서 관습과 먹을거리, 심지어 성소까지 공유한 그리스인들, 즉 소아시아의 ‘변경’ 지대에 살던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들과 비잔티움의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역사적 투쟁으로 보는 견해는 고도로 복잡한 일련의 역사적 변천을 곡해하는 것이다. 투르크군의 절반이 기독교도였고, 비잔티움 제국 군대의 절반이 투르크 용병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도 함께 찾아야 한다.

몽골인부터 투르크멘인과 헝가리인까지, 베르베르인부터 비잔티움 황제의 시위대를 이루던 앵글로 색슨인, 바랑인Varangian(발트해 연안에서 기원한 노르만의 일족)까지, 이 시기와 관련된 민족 및 인종 집단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하지만 이 장에서 다루는 유력 집단은 크게 투르크인, 비잔틴인, 라틴인의 세 집단이다. 세 집단은 모두 내적인 차이와 다양한 민족 구성,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와 문화 등으로 인해 내분이 끊이지 않던 복합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티움 황제가 자신의 딸을 투르크의 술탄에게 선뜻 내어주고 결혼 피로연에도 나흘씩이나 머물며 축하했던 까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역사의 장에 참여한 ‘주요 배역’들의 활동 배경을 차근차근 살펴봐야 할 것이다.

……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함락되었지만 사실은 이미 50년 전에 투르크의 손에 떨어졌어야 했다. 1390년이 되자 대다수의 비잔틴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비잔티움은 실상 오스만 제국의 비공식적인 속국이었으며 제국의 공인된 일부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억지스러운 주종 관계는 14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침착하고 점잖던 무라드 1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드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바예지드는 이미 1402년에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난 7년간 델리와 다마스쿠스 같은 도시들을 유린하고 (거의) 모스크바까지 휩쓴 엄청난 군대가 소아시아 동쪽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태멀레인Tamerlane(티무르)이라는 이름으로 악명 높은, 바예지드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도착한 것이다.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소아시아로 떠날 때 두 번 다시 그 도시를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티무르와 앙카라 전투 : 바예지드의 충성스런 세르비아 군대와 불충한 투르크 군대(1402년)

발칸의 역사

– 마크 마조워 / 이순호 역 / 을유문화사 / 2006.05.25

발칸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그리스 문화의 지배력은 13세기와 15세기 동안 일어난 비잔티움의 붕괴로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의 성격은 새로운 민족-투르크어를 쓰는 무슬림-이 출현함으로 변해갔다. 이 투르크 세력은 남동부유럽의 여러 기독교 세력-비잔티움은 물론, 세르비아, 제노바, 헝가리, 베네치아, 그 밖의 다른 왕조들까지-을 격파하고 격파한 지역들을 하나의 정치, 경제적 제국으로 통합하여 5세기 동안 지배했다. 하지만 투르크족의 발칸 정복은 느닷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복하기 전부터 이미 그 지역에서 기독교 세력의 동맹자 혹은 원조자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그것이 정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투르크족은 기독교 병사들을 계속 이용했고, 그 같은 상황은 특히 아나톨리아와 중동 원정 때 두드러졌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관계는 여러 세대가 교류하는 것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정복과 협력의 형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보다는 오히려 영국의 인도 탈취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심지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었다. 15세기의 한 그리스인 대주교는 “돈 벌 욕심과 유력 인사가 되어 호화롭게” 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이들을 역겹다는 듯 언급하기도 했다. 16세기 초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들의 수는 이미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

– 워렌 트레드골드 / 박광순 역 / 가람기획 / 2003.05.26

술탄 무라드가 황제로서의 콘스탄티누스와 펠레폰네소스의 예하 통치자로서의 그의 두 동생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였다. 비잔티움으로서는 불행하게도 1451년에 무라드가 사망하고, 1년 안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르나에서의 십자군의 실패에 크게 낙담했지만, 그중 일부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소로 약간의 병력을 파괴했다. 주로 베네치아 인과 제노바 인들이었다. 1453년에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공격하면서,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도시의 성벽이 여느 때와 거의 마찬가지로 튼튼했지만, 메메드에게는 여러 문의 대포가 있었다. 그것들은 최근에 개량되어 요새를 공략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두 달에 걸쳐 포격을 가한 뒤에 오스만 투르크 군은 성벽을 뚫고 도시로 돌입했다. 비잔틴의 수비군은 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웠다.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자 다수의 이탈리아 인들이 배를 타고 도망쳤다. 술탄은 도시의 대부분의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사로잡은 비잔틴의 관리들을 처형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수도로 삼고 이곳을 재건하고 재식민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새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잠시 콘스탄티누스의 두 동생이 자신의 봉신으로서 계속 펠레폰네소스를 통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타협책에 싫증이 나서 메메드는 1460년에 그들의 영지를 그냥 병합해버렸다. 다음해에 술탄은 비잔티움의 마지막 남은 조각인 트레비존드 제국을 점령했다.

……

흑해 교역의 팽창으로 베네치아 인이나 제노바 인뿐만 아니라 비잔틴 인까지 이득을 보았다. 킵차크의 몽골 칸 통치령의 곡물과 모피, 노예가 예로부터의 비단길을 따라 도착하는 중국산 물품에 추가되었다. 이 교역품들은 대부분 크리미아나 트레비존드의 항구를 거치고, 거의 모두 콘스탄티노플의 항구를 통과했다. 콘스탄티노플이 1203년의 크기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성장한 여러 국가의 덜 중앙 집권화된 경제가 테살로니카와 아드리아노플, 미스트라, 트레비존드, 아르타와 같은 다른 도시의 성장을 촉진했다. 하지만 비잔틴과 트레비존드의 영토를 통과하는 교역품의 양은, 흑사병이 비잔티움과 트레비존드에 불균등한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강국들은 대부분 악성 돌림병에서 곧 회복하고 다시 성장해나가기 시작한 반면에, 고통을 덜 겪은 오스만 투르크 인들은 더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정복을 통해서 비잔틴의 회복을 앞질러 방해했다.

……

1204년 이후 예전의 제국의 영역에 걸쳐 있었던 비잔틴 사회와 문화가 1453년 이후에도 같은 지역에 존속하고 있었다. 많은 비잔틴적인 태도나 관습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어도 여전히 이전의 비잔틴 땅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어나 투르크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에 의해 다소 변하거나, 아나톨리아 중부의 투르크화에 의해 얼마간 그 사용권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리스 어는 그리스와 트라키아, 에게 해의 도서지방, 키프로스, 아나톨리아의 연안지대의 주요 언어였다. 언어보다 훨씬 더 많이 비잔틴의 전통을 보존해온 비잔틴 교회도 훨씬 덜 축소되거나 변한 채 존속하고 있었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온갖 격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지도권을 유지했고, 또 대부분의 러시아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루지야 그리스도 교도들도 충성스런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비잔티움과 서방교회의 재통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사들은 라틴 제국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 일을 해내는 데 훨씬 더 크게 실패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1453년 오스만 터키(Ottoman Turkey)에 의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에 따라 서유럽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첫째는 동로마(주로 그리스인) 학자들과 학문의 유입이었다. 새로운 학문은 서유럽 엘리트들을 각성시켰다. 이는 결국 학문과 제도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는 초강대국 오스만 터키에 의해 중동과 인도, 중국으로 향하는 육상 통로가 사실상 차단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오스만 터키를 우회하여 인도와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해로海路를 찾게 되었으며, 이는 남·북 아메리카의 재발견과 그 곳에서 산출된 재화의 서유럽 반입을 가져왔다. 재화의 서유럽 반입은 서유럽 국가들의 국부의 증대와 함께 산업혁명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유럽인들은 또한 중국에서 전래된 종이 제조법과 인쇄술을 기계화했으며, 화약을 개량하는 한편, 고성능 대포도 제작했다. 그들은 지식과 노하우(know-how)를 지속적으로 축적하여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14세기 후반과 15세기에 제노바의 추세와 사건들은 이런 제노바의 원거리 교역망에 대한 압박에 의해서,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중해 세계경제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체계에서 제노바의 권력지위의 하락에 의해서 심대하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으로 가는 제노바의 중앙아시아 통로의 급속한 폐쇄, 오스만 투르크, 베네치아, 카탈로니아-아라곤 권력이 제노바의 지중해 교역으로 쇄도한 것, 제노바의 대도시 영역을 둘러싼 모든 강력한 도시국가들의 부상, 이러한 상황 형세가 제노바인들에게는 매우 희망 없어 보였을 것이다.

……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위기에 대응하여 제노바의 교역 및 축적망은 근본적으로 구조조정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제노바 상인 은행가들을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가계급으로 바꾸어 놓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

간단히 말해서 15세기 제노바 자본가계급은 근본적 난관에 빠져 있었다고 묘사될 수 있다. 한편에서, 앞선 시대의 원거리 무역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윤에 손상을 주는 경쟁, 싸움과 끝없는 분란이 일어났고, 또한 세계경제 전역에 흩어져 사용되지 않고 사용될 수 없는 사업망은 소실되어 같다. 다른 한편, 이런 경향들을 반전시키기에 충분한 규모의 새로운 원거리 무역의 기회를 개방하려면, 그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계산불가능하기도 한 위험, 따라서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업의 지평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윤형성의 논리 그 자체가 제노바 자본의 자기 팽창을 제약했고, 이로써 자기 파괴의 위협을 불러왔다.

이런 난관에서 벗어나는 가장 분명한 길은 이베리아인 같은 영토주의적 통치자들과 정치적 교환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계산 가능한 이윤 이외의 동기에서 새로운 상업적 공간을 개척하려 추동되었고, 이들은 또한 제노바 자본가계급이 가장 잘 제공해 줄 수 있는 종류의 서비스, 즉 적절한 통화 및 상품 거래를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공인되지 않은 해역으로 이베리아가 팽창할 때 십자군정신은 금전적 비용과 이득에 대한 끊임없는 합리적 계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보증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정신에 대한 집착은, 그 팽창의 추진자이자 조직자들이 그 당시 가장 크고 가장 자금이 풍부하고 가장 연결고리가 많던 상인계급-더욱이 이 계급은 이미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자리를 잘 틀었다-과 연합하는 이점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해줄, 마찬가지로 훌륭한 보증이었다. 이 연합이 형성되고 이른바 신대륙 발견이 이를 공고화하자, 제노바 자본주의는 마침내 그 장기 위기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대팽창의 계기를 향해 진격하였다.

비잔틴제국 – 천 년의 명암

– 진원숙 / 살림 / 2007.04.30

오스만제국은 마침내 비잔틴제국에 최후의 공격을 했다. 젊은 나이에 술탄이 되었지만 술수와 영도력을 갖춘 메흐메드 2세(재위 1451~1481)는 친위군단 예니체리를 지휘해 아나톨리아의 반란 세력을 진압한 뒤 비잔틴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서유럽에 투르크와 싸울 십자군을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서유럽은 동방정교회의 로마교회와의 통합을 십자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고, 비잔틴 황제는 터번을 쓴 투르크인들에게 머리를 숙일지언정 교황에게 머리를 숙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한 노력도 헛수고가 되었다. 그 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위급함을 호소했으나 교황 니콜라우스 5세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기다 내분 상태의 신성로마제국(독일), 백년전쟁의 뒷마무리에 열중해 있던 프랑스, 30년 장미전쟁(1455~1485) 직전의 잉글랜드 등은 비잔틴제국을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다. 20여 년 간 계속 전쟁을 해 온 이탈리아반도의 경우도 비잔틴제국의 안위를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가 1454년과 1455년에야 각각 ‘로디평화조약’과 ‘이탈리아동맹’을 맺었고, 그로 인해 불안하지만 겨우 정치가 안정된 상황이었다.1)

베네치아만이 무슬림들과 싸워 자국의 전통 교역로를 보호하고, 비잔틴제국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베네치아는 지중해가 무슬림들의 무대가 된 다음에도 줄곧 비잔티움‒흑해 혹은 크레타‒로도스‒키프로스를 잇는 해로를 확보하고 활발하게 교역해 왔다. 남부 프랑스,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알제이 등과 교역한 것은 물론 대서양 연안 해로를 따라 플랑드르까지 진출한 베네치아는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비잔틴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베네치아는 제국의 원군 요청에 응해 1452년 8월에 크레테섬에 주둔하던 해군을 출동하게 했다. 제노바도 소수의 함선을 보냈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오스만제국은 13세기 후반 오스만 1세가 이끌던 투르크 유목민이 아나톨리아반도-오늘날 터키-를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14세기 오스만 1세의 후계자들은 화약을 이용한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고 노예들로 구성된 막강한 부대인 예니체리를 동원하여 이집트에서 맘루크족을 몰아냈다. 전 국민이 이교도와 싸우는 종교전사가 되기를 갈망했던 오스만제국은 비잔틴제국이 발칸반도에 세운 기독교왕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1389년에 세르비아를 정복하고 1400년에는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가장 큰 수확은 기독교왕국-비록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닌 동방정교회였지만-의 동부 최전선이자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이다. 보스포루스해협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동부와 흑해의 무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동방정교회와 비잔틴제국은 오스만제국과 이슬람세력의 서부 진출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453년 마침내 이 기독교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이스탄불로 개명했고 성 소피아성당을 이슬람사원으로 개조했다. 오스만제국은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아 그리스와 알바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정복했고 에게해의 크레타섬과 항구도시 제노바를 장악한 후 로마까지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지중해 기독교세계의 동부 최전방인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대한 십자군원정의 교두보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수복을 고대하는 수많은 기독교도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이슬람세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럽이 자칫 세계의 주류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동부로 이르는 경로를 봉쇄하면서 유럽은 중국과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로를 잃었다. 결국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부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경로를 찾아야만 했다.

……

1453년 오스만투르크는 강력한 대포를 앞세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프랑스도 영국군을 영국해협 너머로 쫓아내면서 기나긴 백년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1453년 대포는 유럽 전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그 위력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 후 스페인의 ‘가톨릭 왕’ 페르난도와 이사벨라는 무려 180문의 대포를 이끌고 공성포열을 갖추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음모와 반역의 천년제국

– 타임라이프 북스 / 권경희 역 / 가람기획 / 2004.12.10

설령 적이 첫 번째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 육로 성벽들은 지난 1,000년 동안 적들의 바퀴 달린 차로 움직이는 탑들, 투석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전쟁 기계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제 투르크 인들은 바위를 돌가루로 분쇄시키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신종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대포의 위력을 생각할 때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바로 황제였는데, 이 대포의 발명자인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이 애초에 이 신무기를 황제를 위해 만들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아마도 돈이 모자라서 그랬겠지만, 이 기술자가 부르는 가격을 맞춰줄 수 없었거나 맞춰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르반은, 역사에 등장하는 무기 거래상들이 다 그렇듯이,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의 발명품을 황제의 적에게 팔아넘겼다.

술탄 메메드 2세는 우르반의 대포를 반기며 그가 요구한 금액의 4배를 주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발명품을 루멜리 히사르 성벽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즉시, 그것보다 2배 더 큰 대포를 다시 주문했다. 두 번째 신형 대포는 거의 8m 길이에 구경이 20cm가 넘는 거대한 청동 대포로, 벌어진 포구는 지름이 76cm에 무게가 500kg이 넘는 대포알들을 뱉어냈다. 아드리아노플에서 시험 포격이 있던 날, 포탄 하나가 1.6km를 더 날아가 땅에 약 2m 깊이의 웅덩이를 파놓는 것을 본 메메드 2세는 쾌재를 불렀다. 이것은 이제껏 보았던 대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메메드 2세는 부하들에게 그의 도시에서부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대포를 옮길 수 있는 길을 닦아놓으라고 명령했다. 200명의 일꾼들이 달라붙어 전속력으로 길을 포장하고 교량을 강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453년 3월이 시작되는 날, 마부들이 휘두르는 채찍 아래 60조의 황소들이 거대한 대포를 끌고 트라키아를 지나갔다. 또 다른 200명은 이 금속 괴물이 최종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3주일 후, 메메드 2세는 앞서 출발했던 7만~10만 명의 대군이 남긴 흔적을 따라 아주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4월 5일 목요일, 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 바깥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이슬람의 안식일, 그는 포격을 명령했다. 이로써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탄불 (동서양 문명의 교류)

– 이희수 / 살림 / 2004.06.30

1453년 5월 29일. 환희와 비극이 교차하는 이날은 길이 기억될 날이었다. 천 년을 이어온 동로마 제국이 종말을 고하는 날이었으며, 동양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인류에게는 중세가 마감되고 근세가 시작되는 대사건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이 임박하자, 동로마의 비잔틴 제국은 유럽과의 종교적 화해를 모색하면서 이교도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려 했다. 1452년 12월 12일에는 로마 교황의 사절이 도착하여 성 소피아 성당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의례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감은 여전히 차가웠다.

오스만 제국의 새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19살의 젊은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제국이 열어갈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러스 해협 양안에 룸 엘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라는, 마주보는 두 개의 성채를 축조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해상 보급로를 차단한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직접적인 공략을 서둘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음에도 항복을 하지 않자, 4월 12일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도심을 감싸고 있는 서쪽 외벽은 2중 3중의 두터운 방어벽이 있어서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골든 혼 내해쪽의 성벽은 수비가 허술했지만, 골든 혼의 좁은 입구를 쇠사슬이 막고 있어 함대가 진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를 육로로 날라 언덕을 넘어 골든 혼 내해에 진입시키는 전술을 계획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이었다. 4월 21일 밤, 70여 척의 함대가 골든 혼 바깥쪽의 톱하네에 집결하여 밤새 테페바시 언덕을 넘어 카슴파샤 쪽으로 이동해갔다. 골든 혼의 쇠사슬 저지선을 뚫은 것이다. 4월 22일 날이 밝자 오스만 함대는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16만의 오스만 군대는 약 5천 명의 군인과 3만 명의 주민이 결사 항쟁하는 비잔틴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5월 29일 아침, 치열한 전투는 오스만 군대의 마지막 총공세로 끝이 났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뚫리고 도시는 완전 장악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로마노스 문 근처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관련 그림>

–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 콘스탄티노플의 공성전(1453년4월6일~5월29일) 녹색의 오스만과 빨간색의 비잔틴 군의 배치도.

위의 배치도를 위쪽으로 90도 돌린 상태의 그림을 아래에서 보자.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Bertrandon de la Broquière)라는 인물이고, 제작연도는 역사적 전투가 끝난 지 불과 2년 뒤인 1455년이다.

삼각형의 푸른색 성곽으로 둘러싸인 이 기독교(동방정교) 천년고도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이끄는 이슬람군대에 포위돼 있다. 육지 쪽으로는 오스만 육군이, 바다 쪽으론 해군이 둘러싸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외부에서 군사적으로 공략하기 힘들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곽이었다.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건설한 이 성곽은 1024년 십자군에 의해 한 차례 함락됐을 뿐 10여 차례의 공성전을 막아 천년제국을 지켜낸 막강한 방어막이었다. 비잔틴군은 이 성벽을 더욱 보강해 놓고 이슬람군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철통방어의 둘째 요인은 위쪽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아래쪽으로 뻗은 긴 물길, 그림에서 왼편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골든 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수로였다. 이 물길의 양 끝을 육중한 나무 구조물과 쇠사슬을 이용하여 봉쇄해 놓으면 침략군은 이 도시를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방어체계를 메흐메드 2세의 군대는 어떻게 뚫을 수 있었을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오스만군대의 사령부가 위치한 아래쪽 금빛 막사 뒤로 포병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오스만군대가 자랑하는 초대형 대포가 시선을 끈다. 성곽의 파괴는 이 대포가 맡았다. 메흐메드 2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Urban)를 영입해 포신이 8m를 넘고 450㎏짜리 돌덩이를 1.5㎞ 이상 날릴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대포를 제작했다. 이 포는 사용 중 파열되고 말았지만 오스만군의 최신 대포들은 방어벽을 타격하기에 충분했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오스만 군. 오른쪽에 거대한 대포가 보인다.

그림은 Fausto Zonaro가 1903년

비잔틴 제국은 골든 혼 입구에 쇠사슬을 걸어놓아 오스만 제국의 배가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골든 혼 입구 바다를 가로질러 설치된 방재구역 쇠사슬은 아주 오래전부터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핵심적인 역활을 해왔다. 716년 이슬람 해군의 침입을 저지했는가 하면, 917년 러시아 왕자 올레그(Oleg)도 이 장애물 때문에 도성 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쇠사슬의 시작 지점인 갈라타 탑을 기습 공격, 철쇄(鐵鎖)를 끊음으로써 방재 구역을 장악하고 골든 혼 성벽까지 무너뜨리며 도성 진입에 성공했다. 그 뼈아픈 교훈을 살려 이번에는 갈라타 타워를 바깥으로 확장하고 쇠사슬은 적이 쉽게 성벽을 침투할 수 없는 곳에 설치했다. 제노바인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기술력으로 구축한 이 방재 구역의 관리 책임 및 지휘권은 제노바 출신 공병 바르톨로메오 솔리고에게 맡겨졌다. 쇠밧줄이 연결된 양쪽 끝은 골든 혼 입구 유게니우스 성문 근처 켄테나리오스 탑(현재 시르케지 지역, 사라이 부르누 조금 못 미친 지점)과 갈라타 성채 카스텔리온(현재 카라쿄이 지역의 예르알트 자미 자리)이었다. 양쪽 탑 사이의 거리는 550~600미터였다.

골든 혼의 방어막을 극복하기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더욱 획기적인 작전을 고안했다. 보스포루스해협의 전함을 육지를 통해 골든 혼으로 끌어오는 방안이었다. 땅 위로 2㎞에 가까운 목재 레일을 깔고, 그 위로 60~80척의 전함을 운반해 골든 혼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상상도 (http://panoramikmuze.com/)

– 터키 영화 ‘페티 1453(Fetih 1453)’에서 대규모 공성전을 볼 수 있다.

– 당시의 제노바, 베네치아의 무역로

– 보스포루스 해협의 2004년 위성사진으로 북쪽이 흑해, 남쪽이 마르마라해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 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 m이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네이버 지식백과(비잔틴제국-천 년의 명암) : 1453년의 일

술탄과 황제 (김형오)

[비주얼경제사] 비잔틴 천년제국의 최후 전투, 세계 경제를 뒤흔들다

네이버 지식백과(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 콘스탄티노플 함락

네이버 지식백과(동유럽사) : 발칸 반도의 정복 과정(1403~1481)

네이버 지식백과(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병품 1001) : 대포

2011-04-01 지중해를 무대로 벌어진 문명충돌

콘스탄티노플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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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5월 29일 새벽 1시 반. 갑자기 밤의 정적이 깨졌다. 나팔소리와 북소리, 오스만 튀르크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성당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며 적의 공격이 시작됐음을 온 도시에 알렸다. 한때 100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며 번성하던 콘스탄티노플에 남은 인구는 불과 5만 여명. 비잔틴(동로마) 제국이 긁어모은 군대는 4,983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베네치아와 제노아 등 외국인 2,000여명 을 합쳐도 7,000여명 안팎. 반면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 튀르크군은 17만명이 넘었다.콘스탄티노플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지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플은 해자와 3중 성벽을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니까. 일찍이 경험한 23차례 대규모 침공에서도 늘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싸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튀르크군이 공격을 개시한 게 4월 6일. 완전히 포위되고 주요 항구가 점령 당하면서도 53일째 버텨온 농성(籠城)에서 튀르크군의 본격 공격을 맞은 것이다.튀르크 군은 사흘 전 대규모 공격 날짜를 정하고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튀르크 군 진영에 있는 일부 그리스도교 병사들은 성벽에 정보가 담긴 화살을 날려 술탄의 계획을 알려줬다. 튀르크 군은 대놓고 해자를 메우고, 대포를 설치하며 투석기 등 공성 무기를 공격 위치에 배치했다. 예고했던 공격의 날 새벽 공기를 찢은 튀르크 군은 새벽 4시까지 파상 공세를 취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튀르크의 최정예 보병부대인 예니체리 병단이 출정할 즈음, 성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제노아 병력의 지휘관이 총에 맞자 후송하겠다는 제노아 용병들과 싸움이 한창이니 안된다는 그리스군과 의견 대립이 일어난 것. 튀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 망루 하나하나를 점령해 나갔다. 두터웠던 성벽도 파괴돼 튀르크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최후를 맞았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찾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330년)된지 1,123년 18일 만에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광대했던 영토가 쪼그라들며 콘스탄티노플 하나만 달랑 남아 사실상의 자유무역항으로 전락했지만 난공불락이라던 성벽은 왜 붕괴됐을까.콘스탄티노플은 안에서 무너졌다. 황원호 명지대 교수(사학과)의 연구논문 ‘중세 비잔티움 귀족 집단의 쇄신과 변천(7세기~12세기)’에 따르면 능력 위주의 인사 시스템이 망가진 상태였다. 비잔티움 상류사회는 적어도 11세기까지 외국 출신에게도 승진과 출세 문호를 개방했으나 이후부터 폐쇄된 특권 집단으로 전락해 제국도 활력을 잃었다. 부유층과 대신들의 자식들이 병역을 기피하고자 대거 외국 유학과 이민을 떠나고 무역 목적으로 거주하던 베네치아와 제노아인도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다. 동서교회 간 예배 양식과 성화나 성물에 대한 인식도 달라 그리스인과 서구인들은 서로 원수처럼 여겼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1776)’에서 “동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나를 묻기보다 오히려 어떻게 그토록 오래 존속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결정적으로 일체의 성화나 성물은 우상이라며 서로마교회와 화해·통합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떠난 게 화근이었다. 성화 반대파 1만 5,000여명은 튀르크군에 편입돼 콘스탄티노플에 창과 화살을 겨눴다. 최후의 방어전에서도 내부의 실수가 승부를 갈랐다. 그리스인과 제노아인들이 적전 분열해 튀르크군의 총공세를 받았지만 튀르크군 병사가 우연히 찾아낸 비밀 통로가 열려있지 않았다면 승부는 보다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내부의 분열과 작은 실수가 제국의 명줄을 딴 셈이다.과학기술 경시 풍토도 망국을 거들었다. 포신 8.2m짜리 ‘튀르크 대포’의 제작자 헝가리인 우르반은 당초 콘스탄티노플에 찾아와 이교도를 물리칠 대포를 제안했으나 쫓겨났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젊은 술탄은 우르반을 찾아내 원하는 금액의 4배를 주고 거대한 대포를 만들었다. 우르반의 튀르크 대포는 발사 속도가 느려 3시간 마다 한 발 밖에 쏠 수 없었지만 무게 609㎏의 포탄으로 견고한 성벽을 깨트렸다. 튀르크군은 배를 산으로 보내는 기발한 작전도 선보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내항 격인 금각만(Golden Horn)을 보호하는 쇠사슬에 막혀 함대의 진격이 막히자 술탄은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나무 침목을 깔아 전함들을 옮겼다. 산에서 내려오는 튀르크의 전투함은 콘스탄티노플의 전의를 꺾었다.비잔틴제국, 동로마의 멸망은 역사의 반전을 낳았다. 오스만 튀르크의 등장으로 향료와 도자기의 육로 수입 길이 끊긴 상인들은 뱃길을 찾아 나섰다. 서양을 세계사의 중심에 올린 대항해시대가 이렇게 열렸다.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한 학자들도 르네상스에 불을 붙였다. 두루마기 약 800 본 분량의 그리스 필사본을 베네치아로 옮긴 베사리온 신부를 비롯한 비잔틴 학자들이 갖고 온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의 번역판은 때마침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맞물려 지식을 빠르게 전파시켰다.튀르크의 대포에 놀란 각국은 총포와 화약 연구에 몰두했다. 튀르크 예니체리 병단(기독교 소년을 뽑아 직업군인으로 양성한 상비군)을 모방한 상비군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제 왕권이 싹트고 유럽은 근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과 동양에 대한 기독교의 보호막이던 콘스탄티노플의 최후가 서구의 발전을 자극한 셈이다. 단기적으로 최대의 수혜자는 합스부르크 가문. 중부 유럽은 발칸에 비해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을 덜 받았음에도 튀르크 위협을 과장하며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지위를 굳혔다.합스부르크 뿐 아니다. 온 유럽이 경쟁적으로 튀르크의 위협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각국마다 내부의 불만을 튀르크라는 외부로 돌렸다. 보편적 인간애를 강조했던 에라스뮈스마저 ‘에라스뮈스의 대화집(the colloquies of Erasmus’에서 튀르크 혐오론을 남겼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고 성찬은 의심받고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다가오고 있다. 온 세상은 알 수 없는 재앙으로 가득 찼으며 튀르크 인이 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더라도 결코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살해하는 튀르크군’ 삽화 등도 금속인쇄기로 널리 퍼지면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러시아도 영향 받았다. 루시(고대 러시아)의 블라지미드(978-1015)가 스스로 동방 정교로 개종하고 전 루시인들에게 세례를 받기 시작한 이래 500년 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러시아 교회는 비잔틴 멸망 이후 ‘제 3의 로마’를 자처하며 국가의 틀을 잡아나갔다. 비잔틴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황제를 상징하는 몇몇 기물은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로 옮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비잔틴 제국의 혈통이 섞였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겼다. 근대국가로 자신감을 가진 러시아는 ‘비잔티움을 계승한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 교회의 적통’이라며 교세를 넓혔다.숙원이던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은 술탄은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시내의 주요 성당은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변했다. 문제는 여기까지였다는 것.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래 오스만 튀르크는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승리에 취한 나머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안주한 탓이다. 이슬람 형제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고(레콩키스타, 1492년), 1차 비엔나 공방전(1529년)과 레판토 해전(1571년), 2차 비엔나 공방전(1683년)에서 잇따라 실패했어도 서구에 대한 우월감을 떨치지 못했다.오스만 튀르크의 속도 병들어갔다. 다양한 구성의 제국 신민들에 대한 종교적 자유와 문화에 대한 관용이 사라지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초기의 오스만 튀르크는 그렇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젊은 술탄 마흐메드 2세의 어머니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노예 출신이었다. 이은정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의 연구논문 ‘다종교·다민족다문화적인 오스만제국의 통치 전략’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시도된 중앙집권화와 어설픈 국민 통합이 제국 붕괴의 단초로 작용했다.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가 서로 협력하여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진보한 사회를 이뤘던 황금시대에 보편화했던 관용의 원칙이 사라지며 제국의 통치도 실패했다는 것이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오스만에 의한 동로마 멸망) 과 그 의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오스만에 의한 동로마 멸망) 과 그 의미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지금은 이스탄불입니다.

왜 이렇게 1000년 국가의 수도 이름이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건 기독교 국가에서 이슬람 국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입니다.

아래는 고대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로마 스타일인 전차 경기장과 비잔틴 양식의 소피아 성당이 보입니다. 소피아 성당은 지금은 이슬람화 되어 양쪽에 첨탑들이 세워져 있지요.

자세한 지역 이름들입니다.

1000년을 이어온 로마의 후계자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5월에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함락되는 이 큰 사건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1. 중세의 끝, 근대의 시작

그동안 중세는 말타고 달리는 기사들에 의한 전쟁이었으나, 유럽인 헝가리의 우르반에 의한 대포라는 신무기에 의해 성이 함락됨으로써 기사들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오스만의 속국인 세르비아의 기사들도 술탄 메흐메트2세의 강요에 의해 같은 기독교 인인 동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되지만, 타고온 말을 다 죽이고 보병으로 전환됩니다.

2. 카톨릭과 그리스정교의 화합 불가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서유럽의 원조를 애타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은 같은 기독교지만 종파가 틀린 동로마의 그리스 정교회가 로마 카톨릭 권위에 복종할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합니다. 황제는 받아들이지만 수많은 콘스탄티노플의 반대파로 인해 쉽지 않았고, 결국 충분한 군사적 지원이 늦어져,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은 무너집니다.

(200년 전 4차 십자군 전쟁때에는 이러한 종교 분쟁으로, 카톨릭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오스만의 함락때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국가가 먼저냐 종교가 먼저냐… 쉽지 않은 문제였지요.

동로마를 잃은 유럽은 동쪽의 최전선을 잃어 자신들이 위협을 느끼는 등,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3. 유럽의 동양과의 교역의 축소

콘스탄티노플에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서양간의 해상 무역 중심인 베네치아와 제노바라는 이탈리아 자치구가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오스만과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중립을 원칙으로 베네치아는 무려 동로마처럼 1000년이나 존재했지요. 하지만 오스만이 섬처럼 남겨져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결국 함락시킴으로써, 제노바의 흑해 무역은 더 힘들어지고, 베네치아는 이미 무역 거점을 크레타섬에서 연결되는 콘스탄티노플 연결선을, 크레타섬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쪽으로 바꿉니다.

결국,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부스는 동지중해를 버리고 스페인, 포르투갈로 가서 지중해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것이지요.

4. 르네상스 문화 융성화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질 시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무르익던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란 고대 로마로의 복귀를 말하는데, 동로마는 온실처럼 로마의 문화를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를 통해 간간히 그 문화가 연결되고 있었지요.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서 인적으로, 물건으로… 간직되어 있던 문화가 서구로 전달되어 르네상스를 더 풍요롭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위 내용은 시오노 나나미의 아래 책을 읽고 정리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함락 작가 시오노 나나미 출판 한길사 발매 2002.09.10. 리뷰보기

투르크 하면 우리 나라의 역사에도 나오는 돌궐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있다가 징기즈칸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지요. 터키가 우리나라와 형제라는 것도 이런 같은 문명권에 있었기 때문일것입니다.

이러한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2세는 1000년간이나 무너지지 않아 섬처럼 남은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릴 야심을 갖습니다. 알렉산더와 같은 전투 승부욕이 있었지요.

1453년 5월 수십만 대군의 오스만 육군은 대포를 이용해 아래와 같은 육지쪽의 3중 성벽을 무너뜨립니다.

현재 사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안쪽 벽과 바깥 쪽 벽 사이에는 이렇게 공간이 있습니다.

술탄은 장전 및 열식힘 시간 때문에 하루 7발 밖에 쏠수 없었던 대형 포 이외에, 금각만 안으로 해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가란타 지구와 반도 끝인 금각만 입구 양쪽을 물속으로 연결한 굵은 쇠사슬 때문에, 금각만 안으로 배를 옮겨오기 위해 육지로 나무레일을 깔아 옮기기도 합니다. 왜 이런 정신나간 무리수를 두었냐면, 유일하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 1000년 동안 한 번이 있었는데 바로 이 금각만에 접한 1중 성벽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는 그 사슬, 아래는 육지 쪽 사슬을 묶었던 곳

아래 지도에서 육지쪽은 겹선인데 3중 성벽을 나타내고 있고, 나머지 해안가에는 단일 성벽으로 둘러써여 있으며, 금각만 북쪽으로는 흑해 무역을 담당하던 제노바인들의 자치구 가란타 지역이 보이네요.

(붉은 부분이 금각만으로 들어오는 배를 막기 위해 쇠사슬을 연결했던 자리입니다.)

또한, 왜 다른쪽 1중 성벽쪽인 남쪽 바다쪽은 해군으로 공격을 하지 못했느냐…

물론 오스만 해군은 육군에 비해 약하기도 했지만, 흑해에서 불어오는 북풍 때문에 접근 및 작전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즉, 난공불략의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육지의 3중벽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로마의 방어군들도 무너진 3중벽을 보수하며 사력을 다했지만 메흐메트2세의 집요함을 넘질 못합니다.

무너지는 콘스탄티노플을 막던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도망가지 않고 백병전 속으로 뛰어들어 동로마 1000년의 최후와 함께 합니다.

(첨부화일은 메흐메트2세가 바라보는 관점의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세 군데 공격 방향이 표기 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사료들은 후대에 자세히 전해져, 그날의 생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도 그러한 많은 기록들을 통해, 이런 흥미로운 사건을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그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동로마의 1000년간의 영토 넓이 변화를 슬라이드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흥미진진한 전쟁은 영화로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Fetih(정복자) 1453’ 입니다.

정복자 1453 감독 파룩 악소이 출연 데브림 에빈, 이브라힘 셀릭콜 개봉 2012 터키 리뷰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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