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 정벌 | Kbs 한국사전 – 흑룡강의 200 전사, 신유 / Kbs 2007.8.25. 방송 최근 답변 10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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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6월 10일 흑룡강에서 조선 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격돌한다.
이른바 나선정벌! 나선정벌의 승리에는 탁월한 사격술을 지닌 200명의 조선 조총병, 그리고 조선의 명장 신유가 있었다!
조선의 원수와 힘을 합쳐 싸워야 했던 맹렬한 전투 현장에서 신유가 느낀 것은 무엇일까?
350년 후, 검은 강물이 흐르는 역사의 현장을 [한국사 傳] 제작진이 찾아가 보았다.
– 17세기 세계 최고의 전투력, 코자크와 맞서다
17세기, 러시아 남부에 용맹을 떨치던 코자크족을 활용해 러시아는 극동까지 진출해온다. 주요 수출품인 검은담비 모피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흑룡강 현지인들로부터 구원요청을 받은 청나라군은 코자크의 진지를 공격했으나 연전연패를 당하고 만다. 화력의 열세를 절감한 청나라군은 곧바로 조선에 조총병 파병을 요구하는데…
그리고 200명의 조총병을 포함한 260여 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조선 장수 신유는 원정길에 나선다.
– 1658년 6월 10일 흑룡강
신유의 조선군 260명을 비롯, 천여 명의 조청연합군을 태운 56척의 배가 11척의 러시아 전함을 향해 항진했다.
전투 초반의 포격전에서 승부를 내지 못한 두 군대. 그러나 뛰어난 사격술을 지닌 조선 조총병이 나서는 순간, 마침내 전투의 승패가 갈리기 시작한다. 200명의 조선 조총병이
나선정벌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 신유는 왜 조선의 원수를 도와야만 했는가?
청을 돕기 위한 파병군의 장수로서 신유는 청나라 대장군 사이호달의 명령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호달은 병자호란 때 부원수로서 조선을 침공했던 인물. 신유는 조선의 원수가 내리는 명령을 좇아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있었다.
치욕스러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던 효종.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벌정책을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내세우고, 조총병을 육성하기 시작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치기 위해 양성되었던 조선의 조총병, 그들은 왜 청나라를 도우러 간 것일까?
– 승리의 영광, 그리고 파병군 장수의 비애
파병군의 장수로서 지휘권마저 빼앗기고, 전투가 끝난 뒤에도 군량미 지원 없이 강제로 청에 머물러야 했던 신유와 조선 병사들. 약소국의 파병군을 냉대하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신유 장군은 러시아의 수석식 소총을 한 자루라도 입수해오기 위해 애걸하다시피 해서 마침내 한 점을 입수하게 된다. 조선의 화승총보다 뛰어난 성능의 러시아 소총을 들여와 조선의 군비강화에 일조하고자 한 것이다.
러시아 함대의 전리품을 탐낸 사이호달의 오판으로 부하 8명을 잃은 신유. 그는 조선의 법도에 따라 전사자들을 흑룡강가 언덕에 묻어준다. 350년 전, 수천 리 떨어진 흑룡강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군사들. 흑룡강에는 아직도 그들의 무덤이 남아있을까?
한국사전 10회– 흑룡강의 200전사, 신유 (2007.8.25.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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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 나무위키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여 조청 연합군이 벌인 전투. 나선정벌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청-러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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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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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羅禪征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변급조선시대 함경도병마우후,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예학유교문화를 의미하는 예법을 연구하는 학문. 봉하유고조선후기 무신 신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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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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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1654 – 우리역사넷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음역한 것이다.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대 청의 요청에 의해 러시아를 두 차례 정벌한 사건이다. … 1649년(인조 27) 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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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8/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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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정벌 – 우리역사넷

이 자료는 1658년(효종 9년) 청나라에서 나선 정벌(羅禪征伐)에 앞서 조선에 군량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나선 정벌은 조선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 조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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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4/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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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하지만 나선정벌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이 아니었고,실제 전투가 일어난 기간도 하루나 이틀에 불과한 단기전이었다. 그리고 당시파병된 병력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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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6/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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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료로 본 1650년대 흑룡강원정(나선정벌)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을 전하는 사료는 조선 측 자료가 거의 절대적이다. 원정을 주도한 청 측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정의 상대방인 러시아 쪽에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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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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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러시아 국경 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 분쟁의 배경 · 2 청나라 측 입장 · 3 러시아 차르국 측 관점 · 4 나선정벌 · 5 전후 처리 · 6 같이 보기 · 7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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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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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나선정벌의 추이와 그 동아시아적 의미

나선정벌은 3개국이 개입한 국제분쟁이며, 종족으로 보면 만주・몽골・한인・西蜀人・조선인・코사크인・러시아인 등에 더해 송화강과 흑룍강 일대의 원주민들까지 참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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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rm.or.kr

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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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史] 나선정벌(羅禪征伐) – 네이버 블로그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다. 나선정벌의 배경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분쟁이다. 지금의 중국과 시베리아의 국경 부근인 흑룡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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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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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에 전사한 코사크 대장 스테파노프 – 아틀라스뉴스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와 청나라 정규군과의 첫 전투는 1652년 3월 24일 벌어졌다. 예르페이 하바로프의 코사크 부대는 200명에 불과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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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tlasnews.co.kr

Date Published: 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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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전 – 흑룡강의 200 전사, 신유 / KBS 2007.8.25. 방송
KBS 한국사전 – 흑룡강의 200 전사, 신유 / KBS 2007.8.25. 방송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선 정벌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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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4.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Al_LM2imiI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기고수(旗鼓手) 등 50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厚通江)으로 내려갔다.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 적군은 7일 만에 도망갔다. 조선 군사는 전승을 거두고 5월 16일에 회군해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정벌이었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다. 6월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났다. 러시아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정벌이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다.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선정벌 조선 조총부대의 위용을 떨치다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음역한 것이다.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대 청의 요청에 의해 러시아를 두 차례 정벌한 사건이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 17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효종(孝宗)이다. 선왕 인조[조선](仁祖)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극히 소극적이고 현실 안주적 성향으로 변화, 반청론자들을 멀리하고 측근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대청 사대에 안주하였지만 젊고 패기 넘친 효종은 부왕과 전혀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두 차례의 호란도 겪었지만 8년간의 인질 기간 동안 청에 이끌려 명·청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고 이 과정에서 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청이 승리하였으나 정권 교체 직후 청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효종으로서는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걱정하였다. 이에 효종은 모든 변수들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군비를 증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부왕인 인조가 친청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왕자나 세자 시절에는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다. 물론 이는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도 하나로 맞물려 있었다. 결국 효종은 군비 증강과 왕권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청 복수’를 목표로 하게 되었으니 이른 바 ‘북벌론(北伐論)’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조선 왕실은 ‘대청 사대’와 함께 ‘대명 의리’를 병행하였는데 이중에서 ‘대청 의리’가 왕실의 입장이었다면 ‘대명 의리’는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 일반, 그중에서도 사림들의 여론을 이끌고 있던 산림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효종의 ‘대청 복수(북벌론)’ 노선은 산림들의 ‘대명 의리’ 노선과 상통하였기에 북벌론의 구현을 위해 효종은 선왕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새롭게 산림세력과 연합해야 했다.

효종은 즉위 후 곧 ‘대명 의리’를 주장해오던 산림과 척화대신을 불러들이게 되니 서인 산림인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와 서인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 남인 산림 권시(權諰)등이 그들이다. 효종의 개혁정치 표방에 고무된 이들 사림세력은 인조대 핵심 구신인 김자점의 비리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변화에 위협을 느낀 김자점은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에 효종이 선왕대의 구신을 몰아내고 북벌을 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인조 릉〔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제시하였다. 청이 곧 사신을 보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元斗杓) 등의 활약으로 김자점(金自點)의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은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을 제거하고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崇善君)을 추대, 역모를 일으켰는데 이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자점 일당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 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종래 중앙 군영의 병권은 대체로 국왕의 훈척신들이 장악해왔는데 효종은 이러한 관행을 깨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박경지(朴敬祉) 등 무과 출신의 참신하고 실력 있는 무장들을 중용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에 이어 훈련대장에 올라 효종대 북벌 정책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의 핵심 군영으로 인조대 군비증강을 위해서 설치된 어영청에 주목하였다. 어영청의 군사는 애초 7천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해 재정 문제를 극복, 3배수인 2만 1천명으로 증액되었다. 어영군은 1천명씩 21개조로 나뉘어 관리되었는데 도성에 항상 1천명의 어영군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어영청은 핵심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에 필적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禁軍)을 기병화(騎兵化)했으며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액을 6백명에서 1천명으로 증액하였다. 또한 최강의 중앙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기 위해 군액을 1만명으로 증원하고자 했으나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의 증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어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을 강화하였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대포 3백문을 설치하였으며 강화도에는 행궁을 수축했다. 또 능마아청(能亇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병법을 교육하였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을 제작하고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화포 제작 등의 무기도 개량하였다. 한편 인조대 설치 이후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여 있던 영장제(營將制)를 실시,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군비증강 결과 조선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는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 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나선정벌(羅禪征伐)시 조선군의 활약상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 조선군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의 결과라는데 이견이 없다. 또한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다.

17세기에 이르자 러시아인들은 흑룡강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그쪽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인근 원주민들과의 분쟁과 청 군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우수리강 하구에 성을 쌓고 송화강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에 청에서는 영고탑에 있는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해내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따라서 청에서는 조선에 조총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1654년(효종 5) 2월 청은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선인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3월 10일까지 영고탑 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효종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포수(砲手) 100명과 화병(火兵) 등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 군사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곧장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는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으로 내려갔다. 4월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하였다. 러시아군은 7일 만에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승리한 조선군은 5월 16일 회군을 시작하여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은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였고, 이에 대한 청 군사의 출정은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 군사와 합류, 흑룡강으로 나아갔다. 6월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맞닥뜨렸다. 러시아 군대는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진격하였고 육상으로도 군사를 진군시켰다. 이에 대해 청나라 군사는 감히 맞서지 못했지만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러시아군은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인해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러시아 군의 피해에 비하면 미미하였다. 이들은 청의 요청으로 얼마간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조선으로 개선하였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이 간접적으로 빛을 발한 결과였다.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지만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군의 사격술과 전술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효종은 치세말 북벌정책이 난관에 부딪히자 송시열을 통해 북벌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효종은 근시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행하였는데, 이때에도 효종은 ‘신하들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천시와 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니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기회를 봐서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 저들은 무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 천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변함없는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2개월여 만에 효종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을 오로지 북벌에만 매달리다가 41세 한창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효종은 귀밑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침을 맞고 급서하였는데, 이즈음 효종과 서인세력의 갈등이 극히 고조된 상태에서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던 점, 또 효종의 죽음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산림세력이 효종의 유지였던 북벌을 미련 없이 중지하였던 점에서 효종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효종에게 ‘북벌론’은 단순한 이념적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라 양란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는 젊고 열정적인 국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반면 집권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의한 예치국가 조선을 꿈꾸었으니 이러한 동상이몽은 오래갈 수 없었다. 결국 효종의 죽음과 함께 서인들은 예정된 북벌 파기의 수순을 밟아갔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1658년(효종 9년) 청나라에서 나선 정벌(羅禪征伐)에 앞서 조선에 군량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나선 정벌은 조선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공격한 싸움을 말한다. ‘나선’은 러시아 사람, 곧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16세기 말엽부터 영토의 팽창을 시작한 러시아는 주요 재정 수입원 중 하나인 모피의 확보를 위해 동진 정책을 계속하였다. 1643년 처음으로 러시아 원정대가 흑룡강 인근 지역에 들어와 탐사를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찍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수렵민들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들 원정대는 1646년 귀국하여 흑룡강 유역에 모피와 광물 등 자원이 풍부하다는 보고를 올렸다. 두 번째 러시아 원정대는 1649년 러시아 야쿠츠크를 출발하여 1650년(효종 1년) 흑룡강 서안의 야크사(雅克薩)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에 복속된 토착민인 다우르 족(達斡爾族, Daur)을 회유하여 러시아에 편입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들을 학살하고 이 지역을 알바진(Albazin, 러시아어: Албазин)이라 칭하였다. 아울러 요새를 쌓고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651년(효종 2년) 가을 러시아인들은 흑룡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烏蘇里江) 하구로 내려가 아찬스크(Achansk, 러시아어: Ачанск) 요새를 만들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모란강(牡丹江) 인근의 영고탑(寧古塔) 주둔 군사를 동원하여 러시아인들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652년 4월 아찬스크 요새 공략에서 청군은 우수한 무기를 갖춘 러시아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다음해 봄에 러시아 원정대는 스스로 아찬스크 요새를 파괴하고 철수하여 흑룡강 상류에 쿠마르스크(Kumarsk) 요새를 세우고 소수 부족에 대한 약탈 행위를 계속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남방에 집중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숙련된 총병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자 1654년(효종 5년) 2월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 조총 군사 100명을 뽑아 영고탑에 보내 주도록 요구했다. 조선은 청의 요청에 응해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의 지휘 아래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출병시켰다. 조선군은 4월 16일 영고탑에서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여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총 750명으로 구성된 조청 연합군은 28일과 29일 목단강이 송화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약 400명의 러시아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중화기가 없고, 청나라 군선은 숫자는 많았지만 크기가 작고 약하여 대형 범선인 러시아 배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강으로 나가지 않고 연안에 나무로 만든 방패를 세운 다음 청군이 강에서 러시아군의 주의를 끌면, 조선군이 방패 뒤에서 러시아 배를 집중 사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군은 5월 2일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연합군은 5일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살아남은 러시아군은 흑룡강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로 도망가서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이에 연합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철수하였다. 조선군은 사상자 없이 원정을 마쳤으며, 5월 7일 강에 토성을 쌓고 16일 회군하여 6월 21일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 정벌이다.

도주한 러시아군은 병력과 화약 등을 보충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1655년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여 공방전을 벌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1657년에도 송화강 내륙에 침투한 러시아군과 교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에 1658년(효종 9년) 3월 청나라는 다시 조선군 파병을 요청하여, 함경북도 병마우후 신류(申瀏, 1619~1680)를 대장으로 조총군 200명과 초관⋅기고수(旗鼓水)⋅화정(火丁) 등 60여 명이 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조선군은 5월 중 영고탑에 도착하여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였다. 48척의 크고 작은 배와 조선군을 포함하여 총 2500여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6월 5일 송화강 본류로 나갔으며 6월 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였다. 연합군은 배를 포위하고 처음부터 함포와 조총 사격을 집중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러시아 배가 단단해서 쉽게 부술 수 없었으므로 불화살을 이용한 화공(火攻)을 펼쳐서 7척의 선박을 불태우고 3척을 나포하였다. 이때 러시아군은 360명 중 220여 명이 전사하였고, 나머지는 날이 어두워진 틈을 타서 한 척의 배를 타고 도주하거나 실종되었다. 연합군 피해는 전사 120여 명(조선군 8명 포함), 부상 230여 명(조선군 25명 포함)이었다. 이것이 제2차 나선 정벌이다.

두 차례에 걸친 나선 정벌은 효종 시기 북벌 계획을 추진하여 군사력을 강화한 것에 대한 간접적 근거로 볼 수 있다. 조선군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청나라 군사에 비해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을 통해 확인된다. 이는 북벌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사격술과 전술에 대한 훈련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을 경험한 효종은 왕위에오른 후 인조의 대외정책인 ‘崇明反淸’에서 한 단계 진전된 청나라를 공격하는‘北伐政策’을 추진하였다.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보장되어야했다. 하지만 ‘적장자 상속’이라는 정통성 없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취약한 왕권을강화시키기 위하여 훈련도감, 수어청, 어영청의 중앙군과 금군이라는 자신의친위군 위주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청나라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삼남 지방에만 군사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키는 영장제를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분쟁이 발생하였고 청나라에서는 조선에 병력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차례에 걸쳐 100~200명의 포수를파병하였다. 사격술이 뛰어났던 조선의 포수들은 청나라와 연합하여 러시아군을물리쳤는데, 우리는 이 사건을 나선정벌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나선정벌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이 아니었고,실제 전투가 일어난 기간도 하루나 이틀에 불과한 단기전이었다. 그리고 당시파병된 병력은 효종이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던 중앙군이나 친위군이아닌 베 15필을 조건으로 모집한 용병이었다. 또한 조선의 자의에 의한 출병이아닌 청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파병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나선정벌은 우리에게 기억될만한 전투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과 치른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사실과 수석식 소총이라는 신형 무기를 확보한 점 그리고 조선과 군신관계를유지하던 청에게 조선의 군사력의 우수성을 보여준 점과 러시아와 청, 조선의국경지대의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사실 등은 소규모, 단기전, 강압에의한 출병만으로 기억되는 나선정벌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fter acceding to the throne, the King Hyojong with his eight-years-long experience at Chung Dynasty as a hostage carried forward a scheme to attack Chung Dynasty, which was a bit more radical than his father the King Injo’s ‘pro-Myung and anti-Chung’ policy. However, the King Hyojong, as he succeeded the throne without the right of primogeniture, strengthened his power centering around the regular army and the Royal Guards, which was called Geum-Gun. Moreover, in an attempt to avoid the surveillance of Chung Dynasty, he carried Young-Jang system into effect, in that the soldiers only in Jeonla, ChungCheong, Kyungsang provinces were arduously trained. In the meantime, a border dispute between Russia and Chung Dynasty broke out and Chung Dynasty demanded the dispatch of forces to Chosun Dynasty. Thereupon, Chosun Dynasty sent troops composed of 100 to 200artillerymen twice. These artillerymen who were highly skillful at marksmanship drove back the Russian army in association with Chung Dynasty, which we call the Conquest of Nasun. However, it should be admitted that the Conquest of Nasun was not a large-scale warfare such as the Japanese Invasion of Chosun in 1592 and Chung Dynasty’s Assault at Byungja Year, but simply one or two-days-long combats. And the forces sent were recruited with fifteen rolls of cotton cloth per solider with oppression of Chung Dynasty. Also Chosun sent the troops by Chung Dynasty’s compulsion. Considering these facts, some might think the Conquest of Nasun doesn’t seem so memorable. But it was the first combat won facing the enemies of west. Also, we acquired new rifle and showed our superiority of our combat capability, not to mention the eased border tension between Russia, Chung Dynasty and Chosun. Therefore, we should reconsider the Conquset of Nasun, which we degraded as a dispatch of troops in small scale and finished in short term only.

러시아 자료로 본 1650년대 흑룡강원정(나선정벌)

흑룡강원정(나선정벌)을 전하는 사료는 조선 측 자료가 거의 절대적이다. 원정을 주도한 청 측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정의 상대방인 러시아 쪽에서도 적지 않은 자료를 남겼다. 현지 지휘관이 상부에 보고한 패전보고서와 생존자들이 상부기관에서 진술한 신문조서 등이다. 러시아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650년대 흑룡강 유역의 러시아 부대에 대한 상부의 지원은 매우 열악하였다. 이런 상황이 바로 러시아 부대들이 송화강을 따라 남하를 거듭 시도한 주요 이유라 할 수 있다. 둘째, 러시아 병사들이 우수한 개인 화기로 무장한 덕분에 현지인들로부터 모피를 마구 징수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로 움직일 경우에는 현지인들과 충돌이 잦았고 인명 손실도 컸다. 이는 필연적으로 흑룡강 유역 현지와 상부 지휘소 사이의 소통에도 큰 장애였다. 셋째, 2차 원정 때 참패한 스테파노프 휘하 병력의 전사자 수는 220명 정도였다. 넷째, 스테파노프의 패전과 함께 흑룡강 일대의 러시아 병사들은 청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청의 후속 공세 가능성 및 최고 지휘관 파슈코프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은 그들의 공포감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물론, 이런 공포심은 청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방을 잘 몰랐기에 나타난 ‘미지의 공포’라 할 수 있다. 다섯째, 2차 교전 당시 러시아 측이 파악한 적군(청군)의 병력 규모는 매우 정확한 편이었고, 청군(연합군)이 파악한 적군(러시아)의 병력 규모도 마찬가지였다. 종합하면, 러시아 자료는 교전 자체보다는 교전을 전후한 상황을 잘 전해준다. 이는 이미 패퇴한 병사들로부터 전투 상황을 일일이 파악하기보다는 전투의 결과 및 그 대응책에 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상부기관의 입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측 자료가 주로 출병 동기, 청과의 관계, 교전 상황 등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과 대조적이다.

With the Manchu conquest of Ming China in the mid-1600s, Manchuria became a sparsely populated region: the majority of the Manchu population left their homeland and rushed into China. The Qing authority also concentrated all its energy on the military campaigns against Ming loyalists in the south. It was in this situation that new-comers began to infiltrate into northern Manchuria alongside the Amur (Heilung) River. In the early phase of the Manchu-Russian conflicts, the Manchu suffered some successive defeats because they were surpassed in firepower and mobility. In the 1650s, for this reason, the Manchu authority demanded twice that Chosŏn send some troops armed with Korean-type muskets. A variety of Korean sources provide the details of the expeditions from a Korean perspective, while few Chinese sources tell the expeditions. Some Russian sources such as combat reports and survivors’ statements also provide the various activities of the Cossack-Russians as well as the conflicts per se. Yet they were hardly used among scholars so far. Referring to Russian sources, this paper recasts the expeditions from a Russian perspective with emphasis on the Cossack-Russians who survived the battles.

청-러시아 국경 분쟁

청-러시아 국경 분쟁(러시아어: 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 중국어: 雅克薩戰役, 영어: Sino-Russian border conflicts)은 1652년부터 1689년 사이에 코사크가 아무르 강 이북의 청나라 영토를 점유하려고 시도하여, 러시아 차르국과 청나라 사이에 불거진 일련의 간헐적인 소규모 군사 충돌이다. 1686년에 청군이 알바진의 코사크 요새를 공략하고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적대적 행위는 막을 내렸다.

분쟁의 배경 [ 편집 ]

시베리아의 남동쪽 구석, 스타노보이 산맥의 남쪽 지역이 분쟁의 배경이 되었다. 수문학(水文學)적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남쪽으로 흐르는 아무르 강을 나누는 분수령이 된다. 생태학적으로 이 지역은 시베리아 타이가의 남동쪽 끝부분으로, 농업에 적합한 구역이 다소 섞여 있다. 사회적·정치적인 면에서는 기원후 약 600년 경부터 여진의 근거지에 속했다.

1643년에 러시아 차르국의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 산맥 일대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1689년까지 청나라 당국에 의해 모두 쫓겨났다.

1859년에서 1860년에 걸쳐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했고, 재빨리 러시아계 인구로 채워넣었다.

청나라 측 입장 [ 편집 ]

1639년 ~ 1643년: 청나라가 이 지역의 토착 지배자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실시함.

1639년 12월 ~ 1640년 5월: 원주민과 청의 제1차 전투 – 구알라르 전투: 청나라의 2개 연대 규모 군대와 예벤키족 지도자 봄보고르( 중국어: 博木博果尔 또는 博穆博果尔 , 병음: Bomboguoer )가 이끄는 500여명의 예벤키-다우르족 징집병 간에 전투 발생. [3] 또다른 원주민 지도자 바르다시( 중국어: 巴尔达齐 또는 巴尔达奇 , 병음: Bardači )는 중립을 지킴.

, )가 이끄는 500여명의 예벤키-다우르족 징집병 간에 전투 발생. 또다른 원주민 지도자 바르다시( , )는 중립을 지킴. 1640년 9월: 원주민과 청의 제2차 전투 – 야크샤 전투: 예벤키족, 다우르족, 어룬춘족 등 원주민과 청군 간에 교전.

1643년 5월: 제3차 전투. 원주민들이 청에 항복함.

1643년 ~ 1644년: 바실리 폴랴코프

1643년 겨울 ~ 1644년 봄: 바실리 폴랴코프의 코사크 기병대가 선도하는 러시아군이 영토확장을 기도하며 제야 강과 아무르 강의 지류를 탐사함.

1649년 ~ 1653년: 예로페이 하바로프

1650년 ~ 1651년: 하바로프가 아르바시( 중국어: 阿尔巴西 , 병음: Arbaši )가 이끄는 다우르족을 격파하고 알바진의 다우르족 요새를 빼앗음.

, )가 이끄는 다우르족을 격파하고 알바진의 다우르족 요새를 빼앗음. 1652년 3월 24일: 아찬스크 전투.

1654년 ~ 1658년: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

1655년 3월 ~ 4월: 코마르 공성전.

1655년: 러시아 차르국이 ‘아무르 지역의 군사 총독’을 임명.

1657년: 샤르호디 전투.

1654년 ~ 1658년: 청-조선 연합군, 러시아에 대한 원정 실시

1654년 1월: 조선군이 닝안 시에서 청군에 합류.

1654년 7월: 후통 전투. 현대의 이란 현에 해당하는 숭화 강 하류에서 청-조선 연합군 1500여명과 400 ~ 500여명의 러시아군 충돌.

1658년: 닝안을 출발한 사르후다의 청군 함대(신류가 지휘하는 소수 조선군 포함)가 숭화 강을 따라 아무르 강 쪽으로 내려가고, 알바진 요새에서 기어나온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의 소규모 코사크 선단을 발견. 아무르 강상 전투는 송화 강의 하구에서 불과 몇 마일 떠어진 곳에서 발발(1658년 7월 10일). 11척의 배로 이루어진 러시아 차르국 측 전단은 궤멸하고, 배 한척만 탈출. 스테파노프 본인도 작전 중 사망.[4]

1685년 ~ 1687년: 알바진/야케사 군사행동

1685년 5월 ~ 7월: 알바진 공성전(우측 정보상자의 그림에 묘사).

1868년 7월 ~ 10월: 신(新)알바진 공성전.

현대의 국경선을 표기한 아무르 강 유역.

1860년의 아무르 강 유역 지도.

이 단락에서는 위의 이야기를 러시아 차르국 측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대부분의 내용은 제임스 포사이스(James Forsyth)와 브루스 링컨(W. Bruce Lincoln), 그리고 패트릭 마치(G. Patrick March)의 연구에 바탕한 것이다.[5][6][7]

러시아 차르국은 1582년에 시비르 한국을 정복하면서 시베리아로 팽창을 시작했고, 1643년에 오호츠크에 도달함으로써 태평양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예니세이 강의 동쪽 지방에는 농업에 적절한 땅이 거의 없었는데,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에 있는 다우리아(현대의 자바이칼)는 예외였다. 이 땅에는 9천여명의 다우르족, 1만 4천여명의 두체르족, 수천 명의 퉁구스계 예벤키족과 니브흐족이 살고 있었다. 다우리아에 대한 정보를 최초로 접한 러시아인은 1640년의 이반 모스크비틴과 막심 페르필레프로 추측된다.

1643년 ~ 1646년 폴랴코프: 1643년에 바실리 폴랴코프가 야쿠츠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제야 강까지를 탐사했다. 그리고 아무르 강을 따라 내려가 아무르 강 하구에까지 도착한 뒤, 오호츠크 해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3년 뒤에 야쿠츠크에 귀환했다.

1649년 ~ 1650년 하바로프: 1649년에 예로페이 하바로프가 아무르 일대로 향하는 더 좋은 길을 발견하고, 재빨리 야쿠츠크로 돌아가 이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무력행동 개시를 건의했다.

1650년 ~ 1653년 또다시 하바로프: 하바로프는 같은 해(1650년)에 돌아와 강의 북단의 알바진에 동계병영(winter quarter)들을 세운다. 다음해 여름이 되자 아무르 강을 따라 내려가 현대의 하바롭스크 지역에 아찬스크 요새를 건설한다. 러시아인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있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상국인 청에 도움을 요청한다. 1652년 3월 24일, 아찬스크는 많은 수의 청군에게 공격을 받는다. 청군은 닝안에서 출발한 여진족 600명과 약 1500명의 다우르족과 두체르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장군 해색( 중국어: 海色, 병음: Haise)[8] 또는 러시아 표기로 이제네이(Изеней or Исиней)[9] 가 지휘했다. 요새 공략은 실패했고, 해색은 그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다.[10] 강의 얼음이 녹자마자 하바로프는 상류로 철수하고[11] 현대의 후마 현 지역에 동계병영을 건설한다. 1653년 봄이 되자 드미트리 지노비에프(Dmitry Zinoviev)가 지휘하는 증강 병력이 도착했다. 하바로프와 지노비에프가 싸움을 벌이고, 하바로프는 체포되어 증언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1653년 ~ 1658년 스테파노프: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가 400 ~ 500여명의 병력과 함께 뒤에 남았다. 스테파노프의 코사크 군은 원주민들을 약탈하면서 청의 지방군을 격퇴했다. 청은 두 가지 정책으로 맞섰다. 우선 지역 주민들을 소개시켜 러시아인들이 탐내는 식량 생산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숭화 강 하구의 니에르보(Nierbo) 마을 출신인 경험 많은 장군 사르후다를 닝안으로 파견하여 수비대 사령관(garrison commander)으로 임명했다. 1657년이 되자 사르후다는 울라 마을(현대의 지린)에서 40척 이상의 배를 건조했다.[출처 필요] 1658년, 사르후다가 지휘하는 청 함대가 스테파노프를 추격하여 스테파노프 본인과 그 휘하 220명의 코사크인들을 잡아 죽였다. 탈출한 소수의 생존자들은 약탈을 하면서 연명했다.

1658년 ~ 1665년: 무인지대(No man’s land) 청군은 1658년까지 네르친스크 이남의 러시아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코사크 패잔병들이 숨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던 중 자신들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자신들이 먹을 식량마저 부족해지자 청군은 코사크를 더 쫓지 못했다. 1670년대에 청군은 북진하여 마야 강까지 올라감으로써 러시아인들을 오호츠크 해안 너머로 몰아내려 했다.

1665년 ~ 1689년: 알바진 1665년, 니키포르 체르니코프스키(Nikifor Chernigovsky)가 일림스크의 보이보다를 살해하고[12] 아무르로 도주한 뒤 알바진 요새를 차지했다. 이윽고 알바진 요새는 1670년에 공격받았으나 방어에 성공한다. 그러자 차르는 1672년에 사면령을 내리고 알바진을 공식적인 식민지로 인정한다. 한편 청군은 1673년에서 1683년까지 남부 지방에서의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북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1682년 또는 1684년에 모스크바에서 알바진의 보이보다가 파견되었다. 1685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청 제국은 알바진 요새를 공략하여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낸다.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네르친스크로 도망갔지만, 소수는 만주에 남아 페킹의 알바진 코사크가 되었다. 곧이어 청군이 남쪽으로 물러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알렉세이 톨부진(Aleksei Tolbuzin)이 이끄는 800명의 러시아인들이 또다시 몰려와 요새를 되찾았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그저 곡식을 얻는 것 뿐이었으나, 불행히도 1686년에 청군이 돌아왔다. 이 마지막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두가지 설이 있다. 먼저 공성전이 12월까지 질질 끌리다가 양국이 평화 조약을 맺어 흐지부지 되었다는 것과,[13] 18개월 동안의 공성전 끝에 톨부진이 전사하고 요새는 함락되었다는 것이 두 설이다.[14] 어찌 되었든 간에 전투가 끝났을 때 방어측 생존자는 100명이 채 되지 못했다.

나선정벌 [ 편집 ]

당시 1654년과 1658년 사이 조선 또한 이 분쟁에 휘말려 참전했다. 1654년 3월 20일(음력 2월 2일)에 청나라에 다녀온 차사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돌아와 “조창(鳥槍)을 잘 쓰는 사람 1백여 명을 뽑아 보내라”는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했다. 이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효종이 ‘나선’이 어떤 나라냐고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 근처에 사는 별종들”이라고 대답했다. 한거원이 물러나자 영의정 정태화가 북우후(北虞候) 변급을 군사 인솔자로 추천했다.[15]

서울을 출발한 변급은 회령에서 8일만에 영고탑에 도착하고, 영고탑에서 다시 14일 가서 왈합에 도착하여 러시아군과 조우했다. 이때 러시아군은 큰 배가 13척, 작은 배가 26척이었다.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 하자 변급은 “이 작은 자피선으로 어떻게 저런 커다란 서양 배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부했고, 이를 타당하게 여긴 청군은 왈합 원주민 3백여 명과 청군 3백여 명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조선군에게는 포병으로 지원사격을 맡겼다. 공격이 계속되자 덩치는 크지만 노가 없는 서양 배들은 흑룡강의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가고 말았다.[16] 변급은 음력 7월경에 영고탑으로 귀환했다.[17]

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1658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일선(李一善)이 “나선을 다시 정벌하려 하니 다섯 달 치의 군량을 제공하라”는 청 측의 요구를 전달했다. 조선은 군말없이 따랐다.[18]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 차르국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7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차르국 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그 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기습공격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화장할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태울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신류가 인솔한 것으로 알려진 1658년 원정에 대해서는, 파병에 응했다는 것 이외에는 《조선왕조실록》 상에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19] 그러나 신류장군이 쓴 당시의 상황을 다룬 일기인 <<북정록>>이 남아있다. 다른 이본으로는 1869년에 신류의 6세손 호응(顥應)이 1869년(고종 6)에 펴낸 ≪통상신공실기 統相申公實記≫가 있는데 이 책에는 <북정일기 北征日記>로 되어 있으며, 이후 1980년에 현대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신류가 이끌었던 나선정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전투상황과 청-조선 연합군의 작전, 러시아군의 모습을 그린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20]

전후 처리 [ 편집 ]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고 러시아 차르국은 알바진을 포함하여 아무르 일대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청과 러시아 차르국의 국경은 아르군 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결정되었다. 1727년에 캬흐타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이 국경을 다시 한번 확정짓고, 러시아인과 중국인 사이의 교역을 규제했다.

알바진 요새가 함락되고 거의 2세기가 지난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는 마침내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의 영토를 손에 넣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애당초 17세기에 분쟁 대상도 아니었던 프리모르스키를 차지했고, 그 뒤로 지금까지 외만주는 러시아의 영토에 속해 있다.

같이 보기 [ 편집 ]

17세기 중반 나선정벌의 추이와 그 동아시아적 의미

羅禪征伐이란 17세기 중반 북만주로 남하하던 러시아(나선)를 저지하려던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선군이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1654년과 1658년에 걸쳐 두 차례 출정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선정벌의 추이와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개설서 수준의 이해에 머물 …

羅禪征伐이란 17세기 중반 북만주로 남하하던 러시아(나선)를 저지하려던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선군이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1654년과 1658년에 걸쳐 두 차례 출정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선정벌의 추이와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개설서 수준의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청의 요구에 따라 두 차례 원정을 감행한 점과 2차 원정 때의 한 전투에서 러시아 군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린 점을 강조하고, 그런 원정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데 조선이 기여했음을 부각시키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는 다분히 민족적・自國史 시각에 의한 설명으로, 원정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21세기 역사학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선정벌은 3개국이 개입한 국제분쟁이며, 종족으로 보면 만주・몽골・한인・西蜀人・조선인・코사크인・러시아인 등에 더해 송화강과 흑룍강 일대의 원주민들까지 참전한 多種族 사건이었다. 따라서 나선정벌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조선・청・러시아 3국의 관련 자료를 함께 놓고 분석해야 한다.

한편, 나선정벌은 러시아의 동진에 따른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청과의 충돌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단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서구 세력이 동쪽으로 접근한 세계사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선정벌과 유사한 몇 차례의 무력충돌 후에 그 유명한 네르친스크조약(1689)으로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이 사실상 확정되고 영토분쟁도 거의 종식되는데, 서구 학계에서는 네르친스크조약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런 조약의 체결을 가능케 한 이전의 무력충돌에 대해서는 그저 청과 러시아 사이의 일상적인 충돌로 볼 뿐이며, 그 실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특히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이 담당한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런 다양한 문제의식으로, 이 연구에서는 나선정벌을 명·청 교체에 뒤이어 동북아시아에 새롭게 등장한 러시아 세력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는 맥락을 만주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춰 살피고자 한다. 그동안 17세기 동북아시아 정세를 논할 때에는 의례히 청의 남방 공략 과정, 조선과 청의 새로운 관계, 일본의 쇄국과 서양과의 교통 등에 중점을 두어 살피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육로를 통해 동북아시아 권역에 진입한 러시아라는 새로운 변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국제질서는 이후 19세기의 서세동점 시에도 그대로 그 틀을 유지하며 작동했으며, 심지어 현재까지 그 기본 틀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한 17세기 중반에 발생한 나선정벌은 단순히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동북아의 역학 구도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선정벌의 정확한 추이와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에, 이 연구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의 추이를 상세히 살피고, 그 의미를 17세기 동북아시아라는 거시적 틀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데 목적을 둔다.

[戰史] 나선정벌(羅禪征伐)

[戰史] 나선정벌(羅禪征伐)

한편에 그렇게… 숨은 조선의 힘 확인은 했지만…그대로… 묻혔네.

조선군 지휘관 탁월한 능력 선보여 잠재력 지속적 개발 여건 있었으면 韓末 치욕의 역사 크게 달라졌을 것.

신유의 북정일기.

▣ 특별한 원정

17세기 일본이 쇄국으로 가고, 청나라에 의해 만주와 중국이 하나가 되면서

동북아에는 거대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 시기에 특별한 해외원정이 하나 있다.

소위 나선(羅禪)정벌로 알려진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다.

나선정벌의 배경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분쟁이다.

지금의 중국과 시베리아의 국경 부근인 흑룡강 유역에서 청과 러시아는 영토문제로 예민하게 대립했다.

몇 차례 충돌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정식으로 군대를 동원해 국경 방어에 나섰다.

그리고 조선에 출병을 요청한다.

1차 원정은 함경도 병마 우후 변흡이 조총병 100명과 장교 5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2차 원정이 좀 더 규모가 컸는데, 혜산 첨사 신유가 총병 200명, 장교 60명을 인솔했다.

신유는 이 2차 원정의 경과를 ‘북정일기’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 원정의 배경

나선정벌에서 하나의 의문은 청군이 왜 조선에 출병을 요청했느냐는 것이다.

조선 측 기록에는 청군이 여러 차례 러시아군에 패배하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고 돼 있다.

조선은 북방의 오랑캐(러시아)가 우리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원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

러나 이 서술은 둘 다 의문스럽다.

그러나 병력은 겨우 중대규모였고, 시베리아의 척박한 환경에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청은 러시아인들이 조금씩 이 지역에 출몰하는 사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흑룡강은 진로가 자주 바뀌고, 지리가 불확실했다.

사실 흑룡강은 대단히 애매한 명칭으로 수많은 지류를 포함하고 있어 현재의 지명으로 보면

다양한 강 이름으로 나뉘어 있다.

게다가 여진족이 대거 중원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이 지역은 무인지대로 비어 있었다.

청나라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에 일종의 무력시위를 위해 토벌대를 조직한 것이다.

병력은 연대, 여단 규모였다.

조선군은 정예병이기는 했지만, 아주 소규모였다.

청은 군사적 원조가 절실했다기보다는 반청감정이 농후한 조선을 길들이고, 의중을 떠보고,

조선군의 군사력도 파악하기 위해 원정에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 흑룡강(목단강) 전투

신유의 병력은 현재의 길림성 영고탑에 도착해서 청군 본대와 합류하고

육로와 강의 수로를 번갈아 이용하며 전투지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약소국의 처지를 단단히 경험했다.

청군 지휘관 중에는 원칙을 지키고 조선군을 우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못되게 구는 인간도 있었다.

대개 이러면 설움이 큰 법이다. 장거리 원정으로 조선군은 식량 수송에 커다란 애로를 겪었다.

청나라는 화폐가 발달해서 현지에서 구입하기도 했지만,

조선은 처음부터 현물로 챙겨갔기 때문에 운반에 고생했고,

병사들이 먹은 쌀보다 운반비로 소모한 쌀이 몇 배가 됐다.

신유는 이 원정에서 상업과 화폐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소감을 일기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동 중에 청군은 주기적으로 조선군에게 사격시범을 요구했다.

60보(72m) 거리에서 3발을 쏘는데, 1발을 맞히는 사람이 25~32% 정도였다.

2발 명중자는 4~7%로 떨어지고, 3발 명중자는 1% 정도였다.

현대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명중률이지만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25~50m 정도였으므로 이는 대단히 우수한 것이었다. 조

선군의 사격실력은 청군보다 뛰어났다. 그

러나 이런 총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장소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전투 자체는 강 위에서 해전 형식으로 벌어졌다.

러시아군의 배는 11척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그들은 강변에 배를 대고 배 안에 엄폐해 사격을 가했다.

조청 연합군은 배를 포위하고 포격과 사격을 가하며 적을 압박했다.

하지만 러시아 배는 단단해서 포격이 전혀 소용없었다.

신유는 화공으로 배를 불사르려 했지만, 배를 노획할 욕심에 청군이 화공을 금지했다.

배를 거의 붙인 상태에서 벌어진 사격전으로 연합군의 피해가 속출했다.

그제야 청군이 화공을 허락했고, 조선군은 화전으로 적선을 불살랐다.

러시아군 40명이 1척의 배에 올라타고 강행돌파를 감행했으나 조선군의 추격에 다시 나포돼 전멸했다.

생존자는 숲으로 달아났다.

조선군의 사망자는 8명, 부상자가 26명이었다.

승리는 했지만 신유는 러시아군의 무기에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군이 일찍 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몇 배의 병력으로도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판단대로 나중에 청군과 러시아군이 벌인 전투에서 청군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나선정벌은 조선군의 잠재력, 지휘관의 정확한 판단력과 지도력을 보여줬다.

인간과 사회는 잠재력과 어떤 계기를 통해 성장한다.

조선이 그 잠재력을 발휘할 여건을 계속 개발했더라면 한말의 비참한 역사는 훨씬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국방일보. 임용한 한국사 박사·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 2012.7.18.

아침안개 Tip : 나선정벌(羅禪征伐)

나선(羅禪)은 러시아(Russia)를 지칭한다.

1651년(효종 2) 러시아인들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진출하여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내려왔고,

이에 대항하여 청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격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이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연패하였고,

1653년 러시아는 이 지역의 경략을 국가 목표로 삼았다.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려 하였으나 무기 수준에서 낙후되어 불가능함을 알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사용하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1654, 효종 5).

조선에서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란강(무단장 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寧古塔/寧安)에 이르러

명안달리(明安達哩)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중류 지점)상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4월 28일).

결과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후에도 청나라는 단독으로 러시아군 거점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조선에 총수(銃手)의 파견을 요청하였다(1658, 효종 9).

조선은 혜산 첨사 신유(申瀏)에게 총군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주어 다시 파견하였다.

신유는 영고탑에서 사이호달(沙爾瑚達)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6월 10일).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화전(火箭)으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 모두 패퇴 전멸하였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나선정벌에 전사한 코사크 대장 스테파노프

조선, 청의 요청에 파병…전투에서 우수한 조총술 과시, 코사크 제압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와 청나라 정규군과의 첫 전투는 1652년 3월 24일 벌어졌다. 예르페이 하바로프의 코사크 부대는 200명에 불과했고, 청나라 장수 하이세(海色)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코사크부대의 무기가 청군에 비해 우수했다. 하바로프의 원정대는 전원 총으로 무장한데 비해, 청군에겐 대포 6문과 장총 30정에 불과했다. 총과 칼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화력이 우수해도 병력수가 10배나 되었기 때문에 청군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청군 장수 하이세의 무능이다. 코사크들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찬스크 요새에 집결해 있었다. 청군은 목책을 부수고 요새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순간 재빠르게 코사크들을 섬멸했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세는 코사크를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그 틈을 이용해 코사크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짓밟았다. 청군은 670명이 사망하고 830필의 말을 잃은데 비해 코사크의 손실은 10명 전사에 78명 부상자였다.

청 황제 순치제는 패장 하이세를 사형에 처하고 사르후다(沙尔虎达)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사르후다는 만주족 8기군 출신으로, 도르곤을 따라 만리장성을 넘고 베이징 공격에 가담한 정예장교 출신이었으며, 아무르강 지류인 쑹화강에서 태어나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사르후다는 유능했다. 그는 패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책을 수립했다. 첫째는 장기전으로 돌입하기 위해 코사크를 굶게 하는 것이다. 사르후다는 다우르족과 현지 부족에게 먹을 것을 싸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둘째는 코사크가 배를 타고 아무르 본류와 지류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해야 했다. 사르후다는 지린(吉林)에서 배 40척 이상을 건조했다. 셋째는 코사크에 비해 열등한 화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사르후다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조총을 잘 다루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즉시 베이징 조정에 조선군의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 불똥이 튄 것이 두차례의 나선정벌 이다.

17세기 중엽 아무르강 일대 청군과 코사크의 전투지역 /위키피디아

1654년 2월 베이징에 사신을 다녀온 한거원(韓巨源)이 효종에게 조총을 잘 쏘는 병사 100명을 선발해 파병해달라는 청의 요구를 보고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를 모르고 있었다. 중국에서 들은 대로 러시아(Russian)를 나선(羅禪)이라고 했다. 효종실록 에 임금이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하고 묻자, 한거원이 “영고탑(寧古塔)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고 아뢰었다. 영고탑은 지금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이다. 효종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수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정벌군을 편성, 파견했다.

러시아에서도 아무르강 책임자가 바뀌었다. 하바로프는 원주민을 방화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차르의 명령을 어겼다는 혐의로 1653년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그의 부관이었던 오누프리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가 아무르 코사크 부대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스테파노프에게 남겨진 병력은 320명에 불과했다. 청 장군 사르후다의 전술에 의해 먹을 것이 부족했다. 요새를 짓거나 배를 건조할 나무도 모자랐다. 결국은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대는 배를 타고 쑹화강과 아무르 하류를 돌아다니며 원주민을 찾아 나섰다. 원주민들은 다우르족과 길랴크족 등 현지 부족들은 식량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스테파노프는 쑹화강 유역에 흩어져 개별활동을 하던 코사크 무리들을 흡수해 병력을 보충했다. 그의 부대는 그럭저럭 400~500명을 헤아렸다.

1654년 4월 28일 스테파노프 부대는 아무르에서 쑹화강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조청연합군을 마주쳤다. 청나라 군대는 수전으로 코사크부대를 막아서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적군을 사살했다. 청군의 배가 코사크의 배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수전에서 연합군은 밀렸지만, 조선군의 우수한 사격술로 코사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코사크들은 수세로 몰려 도주했다. 청군의 함선은 나흘동안 코사크를 추격했다. 7일간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한명도 사상자를 내지 않았고 6월 13일 영고탑으로 돌아와 귀국했다.

스테파노프의 코사크들은 헤이룽장성 후마현(呼瑪縣)에 있는 쿠마르스크(Kumarsk) 요새에서 집결했다. 1655년 3월 청군은 1만명이 쿠마라스크를 에워싸고 한달 가까이 공격했으나 코사크의 포격을 이겨낼수 없어 항복을 받는데 실패했다. (이 요새는 중국쪽 강변에 있기 때문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중국에 귀속되었다.)

스테파노프의 부대는 모스크바로부터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군에 쫓겨 다녀녔다. 코사크는 아무르 하류에 요새를 짓고 길랴크 부족들에게서 담비와 붉은 여우, 은빛 여우의 모피를 야삭을 받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주민들에게서 식량을 약탈했기 때문에 원주민의 궁핍도 가속화되었다. 코사크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부 농사를 짓기도 했다.

스테파노프 일당의 토색질이 계속되자, 1658년 청 조정은 아무르 일대의 코사크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사르후다는 이번에도 조선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효종은 또 군대를 파견했으니, 제2차 나선정벌이다.

조선은 혜산참사 신유(申瀏)를 파병대장으로 삼고, 조총수 200명, 기고수와 초관 등 총 260여명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5월 2일 두만강을 건너 6월 10일 쑹화강과 아무르강 합류 지점에 도착했다.

6월 30일 500명의 코사크는 11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이동하다가 사르후다가 이끄는 49~50여척의 함대와 1,400명의 조청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코사크는 절반이 넘는 270명이 전사했다. 또 코사크의 사령관 스테파노프도 전사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군의 뛰어난 조총술이 전세를 판가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는 이 전투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코사크 병사 270명이 전사했다.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 등을 실은 배가 모두 침몰했다.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에 95명이 올라타 간신히 탈출했다.”

스테파노프가 사망한 후 아무르강의 코사크 부대는 해체되었다. 잔당 222명은 도주했으며, 그중 180명은 불법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아무르 일대를 어슬렁거리다가 1660년대에 청군에 소탕되었다. 러시아의 코사크가 조선의 2차 나선정벌군이 참여한 연합군에 대패한 이후 15년간 아무르 일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Onufriy Stepanov

Wikipedia, Sino-Russian border conflicts

Wikipedia, Battle of Hutong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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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KBS 한국사전 – 흑룡강의 200 전사, 신유 / KBS 2007.8.25.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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