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무정부주의 –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maxfit.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maxfit.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KBS News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731회 및 좋아요 5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아나키즘(영어: anarchism /ˈænərˌkɪzə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정부주의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 무정부주의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프랑스에서 다섯 달째 이어지고 있는 노란 조끼’ 집회가 대규모 폭력 사태로 번졌습니다.
파리 고급 식당과 패션 매장이 약탈당하고 불에 탔는데 무정부주의 단체가 개입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파리 양민효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온통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파리 개선문.
지난 주말,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전쟁터로 변한 샹젤리제 거리, 바로 일주일 전 차분한 시위 풍경과는 다릅니다.
한동안 잠잠했던 노란 조끼 시위가 다시 폭력 사태로 격화되자, 프랑스 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주말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폭력 시위에 공권력 대처가 미흡했다면서, 단호한 조치를 마련해 강력 대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크롱/프랑스 대통령 : \”공화국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사태를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을 취할 수 있도록 대책을 내야 합니다.\”] 집회가 격화된 덴 극좌 무정부주의 단체가 개입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노란조끼 시위대 내부에서 제기됐습니다.
우리는 테러범도, 방화범도 아니라며, ‘블랙 블록’이란 극좌 세력이 평화 집회를 악용했고, 이를 막지 못한 건 정부의 무능력 탓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에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토요일 스키장에, 내무부 장관은 클럽에 있던 모습까지 공개되면서 잦아들던 시위에 불을 당겼단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 프랑스 신문의 제목들은 폭력 집회에 대한 우려로 가득합니다.
다시 격화된 노란 조끼 시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파리에서 KBS 뉴스 양민효입니다.
무정부주의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의 자기해방운동.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2/20/2021
View: 7510
무정부주의 (anarchism) – [노동자의 책 :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일반 원리를 부정하면서, 그러한 권위 없이도 사회질서가 이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이념과 운동이다.
Source: www.laborsbook.org
Date Published: 9/28/2022
View: 4007
아나키즘 – 교과서 용어 해설 – 우리역사넷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현재는 대부분 ‘무정부주의’보다는 ‘아나키즘’이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
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1/29/2021
View: 6040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이라고? – 오마이뉴스 모바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anarchy’는 “정부가 없음, 최고 권력이 없거나 비효율적인 데서 비롯한 무법 상태, 정치적 무질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
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11/26/2022
View: 8082
무정부주의
EtymologyEdit · Sino-Korean word from 無政府主義, from 無政府 (“anarchy”) + 主義 (“ism”). PronunciationEdit. (SK Standard/Seoul) IPA: [mud͡ʑʌ̹ŋbud͡ʑuɰi] …
Source: en.wiktionary.org
Date Published: 12/6/2021
View: 9055
박열의 무정부주의와 민족의식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박열이 사회변혁사상으로서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원인과 그를 무정부주의자로 판단하게 되는 면모를 첫째, 무정부주의자를 판단하는 기준인’개인’과’개인의 …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5/10/2021
View: 5771
#무정부주의 hashtag on Instagram • Photos and Videos
404 Posts – See Instagram photos and veos from ‘무정부주의’ hashtag.
Source: www.instagram.com
Date Published: 11/13/2021
View: 1441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무정부주의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무정부주의
- Author: KBS News
- Views: 조회수 731회
- Likes: 좋아요 5개
- Date Published: 2019. 3.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vhdD4Fhp94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나키스트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나키스트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나키즘(영어: anarchism /ˈænərˌkɪzə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 )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는 “주인과 군주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1]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명칭 [ 편집 ]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 dêmos(인민)과 krátos(힘)의 합성어 dēmokratía에서 나왔다. 이는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함과 함께 모든 민주주의 체제의 공통근간을 암시한다. 하나는 누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자인가,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의사를 강제할 힘이다. 단순히 말해서 이는 시민권과 치안유지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두개가 결합하여 정부를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데모스 즉 시민은 결코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여성, 노예, 이민자, 재산 없는 남성을 포함한 인구의 80~90% 가량의 사람들은 데모스에서 배제되어 정치 권력을 갖지 못했다.[2][3]고대 그리스에선 이 데모스와 크라토스라는 두가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를 ἀν-(無)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 즉 아나키라고 불렀다.[4] 이런 사실은 대중에게 다가가기보다(데이비드 그레이버 처럼) 순수한 아나키즘을 바라는 이들이 민주주의는 소수에 의한 것이든 다수에 의한 것이든 본질적으로 폭정이며, 아나키즘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알베르 리베르타드(Albert Libertad)는 다음처럼 언급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는 투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하는 다수가 되길 바라지 않으며, 복종하는 소수가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5]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이 용어가 아나키즘이 정부만 반대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사용하기를 꺼린다.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 역시 아나키즘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아나키즘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다. 아나키를 말 그대로 해석 하면 지배하는 이가 없음을 의미하며, 지배자, 억압자는 정부, 국가, 자본일 수도, 종교, 도덕과 각종 도그마, 성, 인종, 나이일 수도 있다.[6]
사상 [ 편집 ]
아나키즘은 그 특징 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적 아나키즘을 말하나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아나키즘 분파들이 존재한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보는데,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 같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도 대립된다(반레닌주의).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허무주의 운동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아나키란 지배의 부재를 의미한다. 과거의 국가주의자들과 권위주의자들은 지배받지 않는 대중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으로 보았고, 지배가 없는 사회를 혼돈이라 매도하며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 프루동은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규정했다. 프루동은 아나키는 혼돈이 아니라 진정한 질서라고(Anarchy is Order=Ⓐ), 위에서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세우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질서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에게 아나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질서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데이빗 위크(David Weick)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모든 계급적 지배(hierarchy)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해소하려고 하는 사회·정치사상을 집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확실히 정부(그리고 국가)가 비판이 중심이 되지만 단순한 반국가주의는 아닌 것이다. — Reinventing Anarchy, p. 139
따라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반정부와 반국가 운동이라고 하기 보다는, 주로 계급제( hierarchy)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위계질서(hierarchy)가 권력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조직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 계급제의 최고형태이므로, 아나키스트가 반국가인 것은 당연하지만, 반국가만으로는 아나키즘의 정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hierarchy)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브라이언 모리스(Brian Morris)의 말을 인용해보자.
아나키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서 유래하며 본질적으로는 「지배자가 없는」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정부형태나 강제적인 권력, 모든 형태의 계급제와 지배형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멕시코의 아나키스트 프로레스 마곤(Flores Magon)이 말한 국가·자본·교회의「사악한 삼위일체」라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권력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동시에, 다양한 수단을 통한 아나키의 상황을 확립하거나, 유도하려 하고 있다. 아나키 상태란, 억압적인 모든 제도가 없는 분권형사회,자발적 결합의 연합을 통해 조직된 사회인 것이다. — “Anthropology and Anarchism”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45, p. 38
아나키는 혼돈이 아니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혼돈을 포용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들은 혼돈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전제하고, 무엇이 질서있는 자유인가를 규정하는 문제가 ‘자유를 규정’ 하는 것이며 억압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계열의 철학자인 Feral faun(다른 이름 Wolfi Landstreicher)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적이 있다.
혼돈은 비방 받고 경멸되어 왔다. 심지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조차 스스로를 혼돈과 관련짓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살인과 환란과 동일시 되어왔다. 그럼에도, 이것이 질서의 세력에 의한 거짓 프로파간다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질서를 강제하는 역사는 전쟁, 살인, 강간, 환란과 억압를 증가시키는 역사였다. 혼돈이 아닌 질서는, 오직 모든 존재에게 그 형태를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파괴하길 욕망한다. 오직 혼돈의 화신이 되길 자처한 자만이, 이 살인적인 질서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돈이 살인과 환란이 아니라면,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무질서인가? 아니다. 무질서는 질서를 필요로 하지만, 혼돈은 모든 질서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무질서는 망가진 질서다. 우주는 자연적으로 혼란스럽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작은 부분에 질서를 부과한다면, 그 질서는 혼란스러운 우주와 충돌하게 될것이며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강제된 질서가 망가지는 것이 무질서다. 질서에 방해받지 않은 혼돈은 균형을 만든다. 이것은 저울과 무게의 인위적인 균형이 아니며, 살아있고 언제나 변화하는 야성적이고 아름다운 춤이다. 이것은 경이로우며 마법과도 같다. 이것은 모든 정의의 너머에 있기에, 이를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순한 은유에 불과할 것이며 그것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에로틱한 에너지를 결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7]
따라서 아나키즘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계급제(hierarchy)가 없는 사회의 창조를 지향하는 정치사상이다. 즉 아나키는 지배자가 없는 질서를 의미하며,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아나키스트들에게 받아 들여진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호적으로 자립하게 하고자 한다.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란 특권이자 불의이며, 자유 없는 사회주의란 야만이자 노예제라고 확신한다.[8]
인류사회의 역사가 이 점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평등이 없는 자유는 강한 자만의 자유를 의미하며, 자유가 없는 평등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 이외 그 무엇도 아니다. 한마디로 아나키즘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핵심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부에 대한 반대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벤저민·터커는 말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국가의 폐지와 부당한 이득의 폐지를 주장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도 중지되어야 한다.”[9] 모든 아나키스트는, 이윤·이자·지대와 집세를 부당한 이득(즉 착취)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정부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만들어 내는 상황에 반대하고 있다. 수잔 브라운(L. Susan Brown)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나키즘 안에 있는 연대의 정신은, 계급제(hierarchy)와 지배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며,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기꺼이 싸우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10] 국가나 자본가의 권력에 복종 당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아나키스트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계급제(hierarchy)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이 정부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 계급제에는 정치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제 관계, 사회관계에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프루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본은, 정치분야에서의 정부와 비슷하다. 자본주의 경제사상,정부와 권력의 정책, 교회의 신학사상은 완전히 동일한 사상이며, 여러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중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자본이 노동에 대해 하는 것, 국가가 자유에 대해 하는 것, 종교가 영혼에 대해 하는 것, 이 절대주의의 삼위일체는,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유해하다. 민중을 억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민중의 육체·의사·이성을 동시에 노예화하는 것이다. — Max Nettlau,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p. 43-44
CrimethInc.는 “어째서 혁명적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가”란 글에서 국가주의 좌익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아나키스트 용어로서의 “국가주의”란 비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 전체(맑시즘, 사민주의, 리버럴을 포함)를 가리킨다.
아나키스트들은 대리자에게 힘을 위임하는 것이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그 자체로서 국가를 만들어 내며 자유의 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반정치 성향(권력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며 따라서 중앙 권력을 매개하지 않는 자율적인 조직과 운동을 옹호한다. 아나키스트들이 거의 대부분의 좌익세력들과 떨어져서 따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모든 국가적 요소(법, 경찰, 감옥 등)를 제거하고자 하며, 자칭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면 어떤 아나키스트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법과 경찰이 사라지면 범죄가 치솟을 것이라고 생각할테지만, 바쿠닌이 “범죄는 국가만이 가진 특권이다.”라고 언급했듯이[14] 역설적으로 법이 사라지면 범죄도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의 질서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 전략이 혁명적 아나키즘이냐, 점진적인 이중권력(현 질서를 교란하는 대항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냐 라는 것이다.
모두의 개성을 최대한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자유, 평등, 연대라는 세가지 원칭을 바탕으로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서 이들 세가지 원칙은 서로 의존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개성을 발달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는 동시에 창의력과 개인의 책임감을 말살하며 획일성과 평범한을 만들어낸다. 자유가 개성의 발달에 필수라 한다면 평등은 참된 자유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권력과 부, 특권등으로 채워져 있는 계급(hierarchy)사회에 참된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제의 최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로울 뿐, 나머지는 노예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평등이 없으면 자유는 허울뿐인 속임수이다. 자본주의에서처럼 기껏해야 보스를 선택하는 자유만이 주어질 뿐이다. 개성은 다른 자유로운 개인과의 폭넓은 접촉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엘리트 계급에 속하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자유로운 개인이 적은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발달 가능성도 일부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15] 마지막으로 연대는 상호부조를 의미한다. 그것은 같은 목적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타자와 협력해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없이는 사회는 상층계급이 하층계급을 지배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경쟁하는 모든 계급의 피라미드가 되어 버린다. 자신들이 지금 있는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사회는 “지배 하던가 지배 받던가” “먹느냐 먹히느냐” “자기 것만 생각하는”것이다. 연대는 자기희생이나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모두 에고이스트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지적이고 교육 받았으며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형제가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에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 그러니 노예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 노예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어내는 것에 만족하며 그런 삶에 적응해버린 사람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며, 아나키스트가 될 수도 없다. — Life and Ideas, p. 23
아나키즘은, 아나키, 즉 “지배자가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한 사회의 건설을 제창하는 정치사상이다.
역사 [ 편집 ]
고대부터 아나키스트로 여겨지는 사람들(예수, 노자 등)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아나키즘의 탄생은 프랑스 혁명 때 등장했다.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흐름 [ 편집 ]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종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적 개념에서 사유재산 혹은 사적소유(Private Property)란 이윤을 만들어 내는 재산을 뜻하며, 도로, 공장, 토지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반대되는 개념은 동산(혹은 “개인적 소유”, Personal Property)이며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소유하여 사용하는 생산수단 아닌 재산(집, 차, 컴퓨터, 침대 “칫솔” 등)을 의미한다. 사유재산,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부르주아이며, 그렇지 못한 프롤레타리아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부르주아에게 고용되어 부르주아가 결정한 노동조건, 노동시간, 임금 등에 자유인으로서 자주적인 영향력(노동자 자주경영의 결여)을 행사하지 못한채 복종해야한다. 이는 계급분할이라는 불평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임금노예제(wage slavery)에 굴복을 요구함으로써 아나키즘의 핵심적 요소중의 하나인 자기소유권을 박탈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사유재산에 반대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부정, 혹은 공유란 생산 수단의 노동자 통제(Workers’ control)를 의미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오직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노동자 통제란 공장등의 생산수단이 거기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라고 불리는 것(국유화 등),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 등의 좌파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는 국가사회주의이며,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가 국가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경멸적으로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루돌프 로커는 사회민주주의 등의 의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6]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운동이 털끝만큼도 사회주의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지 못했지만, 이 방법 덕분에 사회주의는 거의 완전히 부서지고 무가치한 것으로서 비판받았다…… 의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주의 노동 운동에 교묘한 독약처럼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건설적인 사회주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더욱 나쁜 것은, 구원이 언제나 위 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파멸적인 망상 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이런 이유로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셰비즘을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성격을 가진다고 비판하면서 거부한다. 또한 아나키스트가 주체적으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무계급 무국가를 의미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생산수단의 공유의 결과로 계급과 국가와 화폐가 사라진 사회를 의미한다. 맑스주의자(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인)와 아나키스트 모두 궁극적으로 이를 공산주의라고 부르지만, 그 방법론에서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국가를 이용하는 중간단계(국가사회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사회주의를 죽일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오랜시간동안 충돌해왔다.[17]
상호주의(Mutualism)는 프루동이 주장한 경제적 견해로서, 사실상 정치사상으로서의 최초의 아나키즘이다(경제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정치사상 보다 철학에 가깝기 때문에). 상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를 옹호하며, 노동가치론에 기반을 둔 자유시장을 옹호한다. 이들은 임대등을 착취로 간주하며 국가와 정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18][19] 좁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이란 용어는 공산주의적 아나키즘과는 구별되는 이 “상호주의적 아나키즘”을 가리킨다. 상호주의는 투쟁과정에서의 실천의 괴리등의 문제로 바쿠닌 등의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 이외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경향이다. 아나키스트의 경제관은 상호주의 이거나 (아나코)공산주의 이거나 둘 중 하나다.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는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간에 차별을 유발하고 인류의 연대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국가주의를 정당화 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람의 경험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발명품이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형성하는 사람의 자율적인 행동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민족을 강조할 경우 이 변화를 거부하며 강제적인 힘을 이용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알트 라이트 리처드 스펜서는 네오나치라는 비판을 회피하기 위해서 “평화적인 인종청소”라는 주장을[20] 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민족 개념에 갇혀서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사실 앞에서 민족이라는 교조를 포기하지 않는 다면, 이를 강제로 실현시켜려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이른바 “내셔널 아나키즘”에 대하여 같는 시각과 동일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이들을 리처드 스펜서 같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한 태도로서 대우한다.
통칭 “좌파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는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하나는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나, 내셔널 아나키스트등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사이비 취급하는 유형쪽에서 좌파가 아닌 아나키즘이 존재할 수 있다며 자신의 존재(자본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아나키즘과 호환될 수 있다면서)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다. 이 경우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이 용어와 개념 자체를 반동 세력의 트로이의 목마 취급하며 부정한다.[21][22][23][24] 또 다른 경우는 포스트 레프티스트(이들도 좌파의 일종이지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나키스트로서의 주체성 없이 ‘범좌파’ 담론에 휩쓸려 다니면서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이들을 맑스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을 “자본주의 좌파”라고 부르듯이, 경멸적(자칭 아나키스트, 잠재적 변절자라는 맥락에서)으로 “좌파 아나키스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미국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스트인 제이슨 맥퀸은 다음과 같이 언급 하기도 했다.
초기 아나키스트 운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운동과 동일한 많은 투쟁에서 나왔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른것과는 차별화되었다…… 아나키스트 사상은 언제나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착취에 대한 단순한 사회주의적 비판보다 더 깊고, 급진적이며, 전체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아나키스트 사상이 혁명 시대의 사회적 소요와 더불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소외와 지배를 폐지하고자 하는 개인의 비판적인 상상력 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의 사상은 부정할 수 없는 개인주의에 기반한 사회비판의 입장에서 언제 어디서나 오직 자유로운 개인만이 자유롭고 소외없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이 개인주의 입장의 토대는 어떤 개인에 대한 착취나 억압이라도, 모든 사람의 자유와 그 자신으로서의 완전함을 감소시킨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것은 개인을 끊임없이 평가절하하고 경시하며 부정하는 정치적 좌파의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것은 진실된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보호하고, 확산 시키기 위해 거리낌없이 대량 착취, 대량 억압, 그리고 빈번하게 대량 투옥과 학살을 자행했던 좌우 권위주의자와 중도 세력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를 택하지 않도록 하는 이유다. 아나키스트들은 오직 자신들을 자유롭게 조직하는 사람들만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권력을 추구하면서 개인이나 공동체를 희생하길 거부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호적인 기원을 고려할 때, 그들은 국제 노동운동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아나키스트의 이론이나 실천을 택하기도 했으며,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좌파 이론과 실천을 채택하여 자신들과 합성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좌파가 권력을 장악한 곳은 어디든지 최선의 경우 자본주의를 개량하는 것이였으며, 최악의 경우 새로운 폭정을 만들어내서 살인적인 정책들로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좌파의 국제적인 붕괴와 함께, 이제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좌파의 쇠퇴하는 잔재물로 만들어졌거나 지속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타협을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이 좌파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얻게 된 유용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제도에 대한 명목상의 반대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좌파의 점진적인 소실과 함께 증발하고 있다. 역사의 무대에서 좌파의 급격한 몰락은 국제적 아나키스트의 진영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유일한 혁명적 대안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지난 10년간 아나키스트 운동은 번성했으며, 이러한 성장의 거의 대부분은 아나키즘의 가시적이고 활발하며 우상파괴적 활동에 매혹을 느낀 불만 많은 청년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모든 좌파가 하룻밤 새 퇴색되거나 그들의 근본을 바꾼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前) 좌파들은 불가피하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좌파적인 태도와 편견과 습관을 가져왔고, 그들의 구 정치 환경의 구조화된 가정들을 가진 채로 아나키스트 진영에 들어왔다. 그러한 모든 태도와 습관과 가정들이 필연적으로 권위주의적이거나 반(反)아나키스트적인 것은 아닐 테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문제 중의 일부는 많은 전좌파들이 아나키즘을 단지 반국가주의 좌파로만 오해하면서, 이것의 부정할 수 없는 개인주의적 기반을 사회투쟁과 무관한 것으로써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소외를 폐지하고자 하는 자기 조직화된 운동과 단지 평등주의적인 형태로 생산을 재구성하려는 운동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부는 이를 이해하지만 여러 이유로 아나키즘 환경을 정치적 운동의 형태로써 개량하려 한다. 어떤 전좌파들은 사회적 소외의 폐지가 가망이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수행한다. 어떤 경우는 그들이 여전히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모든 개인주의적 요소(성적 요소이든 문화적 요소이든 간에)를 거부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행한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어떤 권력의 지위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깨닫고선 조작의 여지가 많은 협소한 정치 조직을 만들고자 한다. 계속해서 어떤 이들은 자율적인 사고와 실천에 익숙하지 않고, 단순히 아나키스트 전통의 여러 측면에 대해 불안과 불편함을 느끼기에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좌파의 그런 측면들을 밀어 붙이기를 원한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을 이끌어줄 명시적인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없이도 과거처럼 간부나 활동가의 역할을 이어 나가기를 원한다.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현재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끊임없이 이 모든 것들을 의식(신중하게 비판적으로)하고 있어야 한다.[25]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현재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끊임없이 이 모든 것들을 의식(신중하게 비판적으로)하고 있어야 한다.
아나키스트의 전자 도서관 중 가장 거대한 도서관인 아나키스트 라이브러리에선 아나키즘이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 한다.
넓다는 것이 무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정의는 국가와 자본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즉시 이른바 “아나코 캐피탈리즘”과 “내셔널 아나키즘”을 비롯한 비슷한 쓰레기들을 배제한다.[26] 우리가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상당히 넓은 것들을 의미하지만,기본적으로 이 정의는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즉시 이른바 “아나코 캐피탈리즘”과 “내셔널 아나키즘”을 비롯한 비슷한 쓰레기들을 배제한다.
정통적 흐름 [ 편집 ]
사회적 아나키즘 [ 편집 ]
흔히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말은 거기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소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기에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회적 아나키즘 혹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생디칼리즘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아나키스트 사상계중 제일 많은 세력을 보유하고, 아나키스트들의 주요사상으로 남아있다. 보통 아나키즘하면, 이 사회적 아나키즘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며,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목표로한다. 사회적 아나키즘은 바쿠닌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제1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은 연방주의(Federalism) 구조를 지지하는데 아나키스트 이론에서 연방주의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형태의 조직의 연합체로서 구성원들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조직화 형태다.[27]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편집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상호주의(mutualism, 시장 사회주의) 흐름은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을 부정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가<>노동자간의 위계가 존재하며, 자본에 의한 여러 권위가 소유물을 지키가 위한 사회적 기관을 만들고 이는 결국 아나키즘에 반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를 부정한다. 다만 점유(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재산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개념[28])와, 생산수단의 상호주의적 소유 그리고 상호주의적 시장은 인정한다.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재산이란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임대가 있다. 상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소유는 도둑질이다”(이 말은 상호주의 아나키스트인 프루동의 주장이긴 하지만)라는 슬로건과 구별하여 “임대는 도둑질이다(rent is theft)”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도 한다. 에고이스트 성향의 이들은 일반적인 소유개념이나 시장을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로 파악하고 그 자체를 유령으로 간주해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크게 에고이즘 계열과, 시장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전자는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을 자들이고, 후자는 프루동 터커등의 사람에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다. 케빈 카슨(Kevin Carson)[29]이 오늘날 가장 유명한 시장 사회주의 계열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다. 유럽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는 대체로 에고이스트를 의미하며, 미국에선 시장 사회주의자들을 주로 의미한다.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최초의 아나키스트라 평가된다. 지식과 교육을 통해 권위에서 벗어나 아나키 사회에 도달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국내에선 잘못 알려졌지만 그가 특정한 아나키즘 분파를 형성하진 않았다.
에고이즘에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경향
이후 나타난 흐름들 [ 편집 ]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 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나코” 캐피탈리즘을 아나키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사장과 직원의 위계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의 위계관계, 집주인과 세입자과의 위계관계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국가권력을 폐지 하고자 하는 이유는, 국가가 자본가를 지키는 계급적 보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폐지 된다면, ‘사유재산을 보호할 경찰이 사라지고’ 그 때가 되면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점령하고 점유 해서 자주관리 하에 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코” 캐피탈리즘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적 경찰 등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국가 권력을 폐지가 아니라, 권력을 민영화 시키겠다는 이야기나 사실상 마찬가지이다.[30][31][32][33][34][35]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아나키즘이 아니다. 어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를 기꺼이 인정한다. 예를 들어서, 급진적 에고이스트인 아인 랜드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경직된 개인주의에 호의를 보이며 슈티르너의 공동적 개성을 명백히 부정했다. 로버트 노직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을 일축했다.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명백한 거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비친다… 그들 중에서는 라이프스타일과 민권에 관하여 집중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들의 사적인 영역, 즉 약물과 성생활의 문제에서 국가의 간섭을 없애길 원한다. 다른 파벌에서는 경제문제에 관심을 표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신고전 경제학의 자유방임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찬양하며 “자연적인” 자본주의를 오염시킨 국가를 비방한다. 이 두 집단 모두 국가를 경멸하지만, 그들은 결코 국가를 제거하길 원하지 않는다. 이 최소국가 체제에 대한 입장은 자유지상주의가 아나키즘으로 분류되지 않게 하는데 충분하며, 이런 결론은 랜드, 뷰캐넌, 호퍼(Hospers), 노직에 의하여 받아 들여졌다. 이 문제에서 더욱 드러나는 것은 어째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를 유지하길 원하는가이다. 그들은 항상 법과 경찰 군사같은 국가의 강압성을 유지하길 원하는데, 이는 아나키즘이 아닌 자유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가지는 특정한 견해에서 직접적으로 파생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사회의 여러 문제들(범죄, 빈곤 등)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탓으로 돌려버리며, 국가에 의한“공정한”강제력을 옹호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러하듯이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권력의 본질적인 기능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과 중앙집권화, 경제적 불평등, 계급제와 권위에 반대하지 않는다…. 이는 아나키즘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머리 로스바드라는 명백한 예외적 존재다. (우익) 자유지상주의 운동 안에서 로스바드는 국가의 완전한 제거를 원하는 소수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로스바드가 아나키스트라는 주장은 그가 오직 공적국가를 끝내길 원한다는 것이 밝혀지자 기각된다. 이후 그는 각 사람이 자본주의 판매상으로부터 자신의 사적 경찰과 군대, 법률체계 등을 보유한 수많은 개별 국가를 건립하는 세계를 옹호한다. 로스바드는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기에, 더욱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들이 오늘날 그러한것처럼 필연적으로 강력한 강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로스바드(혹은 다른 자유지상주의자들)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이용할때, 그는 언제나 극도의 취사선택인 태도로 그가 유리한 부분만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의 대부분의 교의의 핵심 원칙이 명백하게 반자유지상주의(anti-Libertarianism)적이라는 사실은 편리하게 무시되었으며, 그 결과 남은 것이란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공허한 자유와 결합한 허울뿐인 반국가주의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아나키”는 자유주의적(liberal)인 사기로 축소된다.[36]
결론 [ 편집 ]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아나키스트 [ 편집 ]
대한민국의 아나키스트로는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박열, 하승우, 김종진, 유림, 하기락, 구승회, 박홍규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국가에서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폿킨, 레프 톨스토이, 머레이 북친, 옘마 골드만, 놈 촘스키, 미셸 푸코, 막스 슈티르너, 벤저민 터커, 윌리엄 고드윈, 제프 몬슨, 루이지 루체니, 파울 파이어아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네스토르 마흐노, 에리코 말라테스타, 렌조 노바토레, 루이지 갈레아니, 사코와 반제티, 가에타노 브레시, 안테오 잠보니, 마리우스 자코브, 레프 체르니 등이 있다.
아나키스트 단체로는 흑색공포단,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노동동흥회, 흑전사, 선구독서회, 남화한인청년연맹, 흑기연맹, 흑로회, 흑우연맹 등이 있다. 한국의 초기 아나키스트로로는 이을규·이정규 형제, 장자명 등이 있으며, 이회영은 임정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
무정부주의 운동은 인류 역사를 일관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의 전통 속에서 하나의 자각된 이론으로 성숙한 것은 조선시대의 서경덕(徐敬德)에서 찾을 수 있다. 서경덕은 송나라 주희(朱熹)의 주리설(主理說)에 주기설(主氣說)로써 대립하였다.
주희의 주리설은 이상기하(理上氣下) 이주기종(理主氣從)의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였다. 이에 대해 서경덕은 “기의 밖에 따로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라는 것은 기 가운데 있는 자기통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통제한다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이를 주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작용이 스스로 능히 그러함의 똑바른 것을 잃지 않음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기는 운동력이요, 생산력이다. 기는 자기의 운동법칙을 자기 스스로의 속에 포함한다. 이 말을 인간 사회로 옮겨놓으면,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한 생산 활동의 자율적 통제, 즉 자주관리(自主管理)를 의미한다. 이 밖에 백성 위에서 백성을 지배하는 계층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경덕의 철학적 주기설을 사회·경제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 정약용(丁若鏞)의 여전제(閭田制)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하는 자는 토지를 얻고 농사를 하지 않는 자는 토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자는 상업이나 공업을, 혹은 농사 시험이나 농공업 또는 교육에 종사할 수 있도록 직업 선택의 여지를 두었다. 그러고 원칙적으로 놀고 먹는 착취계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구 밀도 및 토지 생산력의 차이로 인해 여(閭) 상호간에 빈부격차가 있는 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이 문제가 사람들의 자유로운 전출과 전입으로 자연히 조절될 것으로 보아 “백성이 이로운 것에 따르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경작지는 많은데 일손이 모자라거나 경작지는 적은데 주민이 너무 많거나 하면,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이 행정적 강제가 없어도 전출입이 이루어져 인구 밀도는 저절로 고르게 조절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일체의 독점적 소유와 강제적 권력을 배제했다.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한 직업의 선택, 그리고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전형적 표현이었다. 이 제도는 현대 산업사회에 더욱 적절히 적용될 것이다. 대규모의 생산시설이야말로 일련의 공동 작업과 공동 관리를 불가피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이념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1894년의 농민혁명이다. 최제우(崔濟愚)의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人乃天 事人如天).”는 이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상(班常)·적서(嫡庶)·노주(奴主)·빈부(貧富) 등 일체의 차별이 용납될 수 없다. 농민군이 표방한 “보국안민 광제창생(輔國安民 廣濟蒼生)”은 곧 반봉건·반강권(反强權)·반착취의 선언이었다.
1894년 4월 전봉준(全琫準)의 창의문(倡義文)에서는 “공경(公卿) 이하 방백(方伯)·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급은 개의치 않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윤태(潤態)에만 혈안이 되어 과거(科擧)의 문은 돈벌이의 길로 통하고 응시의 마당은 교역의 시장으로 변하였다.……나라의 누적된 빚은 아랑곳없이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작태로 쉴 날이 없으니, 팔로(八路)의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우리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遺民)이라 할지라도 토지를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인지라 나라의 위망(危亡)을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팔로가 마음을 함께하여 백성의 뜻을 모아 지금 여기에 보국안민의 의기(義旗)를 올려 생과 사를 맹세하노라.” 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나라 2,000년 역사를,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가해지는, 왕권으로 대표되는 토지지배층의 수탈관계라는 관점에서 개관해볼 수 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몇 번의 왕조 교체는 단지 토지 지배층의 재편성을 의미하였을 뿐, 수탈관계 자체에는 아무런 본질적 변동이 없었다.
이 사실을 고발한 것이 서경덕의 주기설과 정약용의 여전제요, 갑오농민군의 의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노쇠하고 부패한 지배층은 농민의 혁명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타민족의 침략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색다른 지배자 아래 다시 반세기의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으로부터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해 점차 국내로 스며 들어왔다.
주 01)’으로써 우리 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막이 열렸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렬(朴烈) 등의 세칭 ‘ 대역사건(大逆事件) ’으로써 우리 나라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막이 열렸다.
1910년대의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직후 자본주의 열강의 침식이 계속되었다. 이 난국은 민족의 단결,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근대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서세동침(西勢東侵)을 막아 한족(漢族)의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염원으로 나타났다.
중국 무정부주의자들도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만 이 과업 수행에 무정부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이러한 공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이 공통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었다.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1900년대에 일본은 이미 약 반세기의 근대 화과업을 성취하고, 청일전쟁(1894)·러일전쟁(1905))에서 승리한 후에는 점차 제국주의의 단계로 넘어가 자본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저절로 민족해방전선을 계급해방투쟁에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중국 내의 우리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급해방전선보다 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통일공동전선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후자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짙게 하고 있었음에 비해, 전자가 일본의 노동운동과 결속하여 현저히 좌경화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정치적·사회적 정세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국내운동의 성격은 해외에서 성장한 두 조류가 흘러 들어와 서로 합류하는 데서 규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해방전선과 계급해방전선이 상호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약 반세기간의 우리 나라 무정부주의 운동은 1945년 8월을 고비로 양분되어 현저히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즉, 민족항일기에는 시종일관 반제(反帝)·반군국(反軍國)·반강권·반정부·반국가의 전면적 저항과 파괴를 강행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저항의 대상이요, 파괴의 목표였던 일제가 패퇴한 1945년 8월 이후에는 우리 나라 무정부주의자들은 새 나라의 건설에 어떻게 무정부주의를 적용할 것이냐 하는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주 02)를 세워 둔전양병(屯田養兵)을 꾀하고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만주로 탈출한 이회영(李會榮) 일가는 만주에 이주한 동포들을 모아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를 세워 둔전양병(屯田養兵)을 꾀하고 있었다.
이회영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국경을 넘나들면서 국치 후 10년동안 인심 세태의 변천을 경험하였다. 이회영은 세태가 변했기 때문에 운동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질적인 파벌싸움을 지양하고 일치단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회영은 운동의 구심점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정부 형태로 만드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필요한 조직은 행정체제로서의 정부가 아니라, 각 계열의 각 파가 협력할 수 있는 연합기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잠정적 임시정부라 할지라도 자리 다툼과 세력 싸움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적잖은 지장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 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를 만드는 데로 대세가 기울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회영은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인민에게 평등한 의식주를 보장해준다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런 식의 평등한 생활은 실상 일일삼식을 고루 나누어주는 감옥생활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물론 평등해야 하겠으나, 그런 위에 다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라 하건 혁명운동이라 하건 이 조건을 결(缺)한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이회영과 신채호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회영이 신채호·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巖) 등과 민족의 자주독립과 새나라 건설에 대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한 사회가 장차 세워져야 할 조선의 이상적 모습으로 뚜렷이 인식하였다.
이 때 백정기(白貞基)도 일본을 거쳐서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1923년 4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백정기 등은 1924년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정의공보 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 신채호는 중국 및 대만동지들과 협력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1929년 7월 난징(南京)에서 조선·중국·필리핀·일본·대만·안남(安南) 등 각국 무정부주의 대표자들에 의해 동방무정부주의연맹으로 확대되어 기관지로서 《동방 東方》을 발행하였다.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종진(金宗鎭)은 스터우허쯔(石頭河子)의 김야봉(金野蓬), 산시(山市)의 이달(李達)과 이덕재(李德載), 하이린(海林)의 이붕해(李鵬海)와 엄형순(嚴亨淳), 신안전(新安鎭)의 이준근(李俊根), 미산(密山)의 이강훈(李康勳)과 김야운(金野雲) 등과 더불어 1929년 7월하이린소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위원장 김종진이 신민부 대표 김좌진(金佐鎭)과 협의한 결과 신민부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김좌진이 “우리(신민부)와 그들(연맹)이 표리가 되고 이신동체(異身同體)가 되어…… 교육과 사상지도 및 생활개선은 연맹에서 맡도록 하고 개편되는 총연합회에는 그들 전원이 참가하도록 하자.”고 제의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두 단체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대강(組織大綱)을 보면, 의결기관이 있고 집행부가 있어 그것은 일종의 정부였다. 그러나 타민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고, 전자본을 국유화하여 관료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공산당식의 국가자본주의적 정부도 아니다.
이 정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들 자신의’ 무강제(無强制)·무지배·무착취를 보장하는 무정부라고 할 수 있었다. ‘무정부’라는 역설적 표현보다 차라리 인민의 자치기관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족총연합회 조직은 재만교포들의 환영리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예기한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살길을 찾아 이주한 백만 동포가 있고, 식민지통치의 직접적 지배를 벗어난 신천지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갑오농민혁명의 해외판 부활이라고 할 수 있고, 무정부주의 사회의 실현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다시 한번 입증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만주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이회영에 의해 착수되고 끝을 맺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라는 전투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연맹은 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 섬멸작전이 임무였다. 1937년 10월 중일전쟁 때는 두 개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 활동하였다.
하나는 정화암·유기석·유자명·이강(李剛) 등에 의하여 학도병 귀순공작과 포로구출작전을 담당하였다. 다른 하나는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김동수(金東洙)·이재현(李在賢) 기타 대원으로 구성되어 실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후자는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었다. 1940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진 뒤 1942년 10월 유자명과 유림(柳林)이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유자명은 제1분과(법제·청원·징계)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유림은 1934년 10월 제35차 의회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 개정안 작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9월 동경에서 박렬 등의 불령사(不逞社)의 세칭 대역사건에 관련된 홍진유(洪鎭裕)·서상경(徐相庚) 등이 예심에서 석방된 뒤 귀국하였다. 1924년 12월부터 흑기연맹(黑旗聯盟)의 조직을 추진하다가 이듬 해 5월 초 일제히 검거되었다.
1925년 9월대구에서도 진우연맹(眞友聯盟)이라는 무정부주의자 비밀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도 역시 불령 대역사건 관련자 서동성(徐東星)이 창립맹원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또, 창립맹원 방한상(方漢相)은 그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 수감 중인 박렬과 가네코(金子文子)를 위문차 방문하고 귀국 후 구호금을 모금해 송금하였다.
이런 일들이 경찰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여 1926년 진우연맹 맹원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같은 해 1월 허무당선언(虛無黨宣言)이 서울 시내에 배포되었다. 이 밖에도 1927년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리에서 김호구(金豪九)를 중심으로 흑전사(黑戰社)가 조직되었다.
1929년강원도 이천에서 이은송(李殷松)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청년이 비밀결사인 이천자유회(伊川自由會)를 조직하였다. 특히, 이천자유회는 단순한 사상적 계몽운동을 벗어나 대중의 조직적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5월 초부터 충청남북도 전역에 걸쳐서 일대 수사망을 펼친 경찰은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의 사원들을 검거해, 6월 8일 전원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하였고, 1930년 3월 5일 제1차공판이 열렸다. 사원들은 문예운동사는 순전히 문예운동단체라고 주장했으나, 검사는 무정부주의 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라면서 치안유지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 검사는 그들의 구형을 정당화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문예운동사는 피고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형식상 결코 비밀결사일 수 없었고, 순전히 문예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정부주의적 문예창작과 이론을 위한 기관지 운영에 있었고, 장차 국체의 변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문예운동사를 탄압했던 것이다.
한편, 무정부주의 운동의 자금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신현상(申鉉商)은 미곡상 최석영(崔錫榮)이 거래처인 호서은행에 상당한 신용이 있다는 데 착안하고, 1930년 2월 양곡거래조건으로 호서은행 본지점에서 15회에 걸쳐 5만 8000원을 인출하였다.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같은 해 5월 1일 톈진(天津)에서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유기석(柳基石)과 이회영이 백방으로 뛰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이 석방되었으나, 두 사람은 남은 돈과 함께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제주도에서도 무정부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7년 3월고병희(高秉禧)는 조대수(趙大秀)·강기찬(康箕贊)·김형수(金炯洙) 등과 우리계(宇利稧)를 조직하였다.
제주도의 젊은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제약의 범위 내에서나마 우리 나라 전통의 습속을 살려 최대한의 상호부조적 자유사회를 실현해보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우리계를 조직했는데 비밀결사도 아니었고, 혁명을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경찰관을 제외한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공무원과 각종 실업가 기타 도민 유지들이 제주도 일원의 12포(浦) 별로 총망라되어 있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65명을 검거할 계획이었으나 사건을 축소해 15명을 검거하고 고병희 외 5명을 주모자로 기소하였다. 이 조직은 국체의 변혁을 계획한 음모 조직도 아니고 사유재산제도의 전복을 획책한 혁명 조직도 아니었다. 계원들은 다만 식민지통치의 제약 하에서나마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유연합적 상호부조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관서·관북 지방에서도 1926년 이래 원산청년회, 원산본능아연맹(本能兒聯盟), 원산 일반노조, 평양·안주·철산·단천 등 각 지방에서 흑우회(黑友會)가 조직되고 있었다. 평양의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는 1929년 8월 8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11월 10·11일 이틀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지자 평양경찰서는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각지에서 평양으로 온 동지들의 기대가 컸으나 일본 경찰의 체포·구금·추방 등 극심한 탄압으로 대표자들은 대면조차 못한 채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전열을 다시 정비해 같은 해 11월 10일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그러나 1931년 4월 조직이 탄로되어 연맹원 최갑룡(崔甲龍)·조중복(趙重福)·이홍근(李弘根)·임중학(林仲鶴)·강창기(姜昌磯)·안봉연(安鳳淵)·유화영(柳華永)이 잡혔으며, 김대관(金大觀)은 원산청년회사건으로 이미 구속 중이었다.
박렬·정태성(鄭泰成)·김중한(金重漢)·홍진유·최규종(崔圭淙) 등이 불령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불령선인 不逞鮮人》을 발행하였다. 이 모임에는 일본인 구리하라(栗原一男)·노구치(野口品二)·오가와(小川茂)·가네코·아라야마(新山初代)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1923년 9월의 동경대지진 당시 이들은 전원 세칭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었다. 박렬과 가네코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렬은 22년 뒤 1945년 10월 맥아더사령부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가네코의 옥중 변사는 한때 일본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밖에 동경과 대판(大阪)을 중심으로 흑우연맹·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 기타 각종 무정부주의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흑색신문 黑色新聞》·《자유코뮨》·《토민 土民》 등이 창간·발매금지·폐간·복간·재발간을 되풀이하였다.
무정부주의 (anarchism)
마르크스주의 | 인물 | 정치경제학 | 미학 | 철학 | 한국현대사회운동 | 한국사회주의운동가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 의견바로가기 [무정부주의 ] (anarchism)
무정부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일반 원리를 부정하면서, 그러한 권위 없이도 사회질서가 이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이념과 운동이다. 무정부주의는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핵심적 요소들, 즉 국경선 개념을 수반하는 국가의 영토, 국경선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국민과 재산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포함하는 국가의 주권, 내부적·외부적으로 그 주권의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물리적 강압수단들의 국가적 독점, 다른 법률과 관습들보다 우월한 국가의 실정법 체계, 그리고 최고의 정치적 공동단체로서의 국가 관념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무정부주의는 ‘자연 상태의 사회'(natural society), 즉 개인들과 자유의사로 결합된 집단들의 자율적 사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비록 무정부주의가 풍부한 지적인 바탕, 특히 국가와 사회의 구분에 의존하고 있지만, 무정부주의의 다양한 특성 때문에 무정부주의 사상 내의 학파들을 분명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는 그 중요한 하나의 구분선이 된다. 전자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주권, 사적 재산과 소유의 중요함 및 모든 독점 행위의 악(惡)을 강조한다. 그것은 극단적 결말에 이른 자유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Anarchocapitalism)는 이 학파의 현대적인 한 변종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의 중요한 원인으로서 국가와 사적소유를 함께 거부한다. 만인의 최대한의 개인적 자유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공동체 속의 개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융합, 즉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나타난다.
무정부주의에 대해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견해를 밝힌 사람은 윌리엄 고드윈(1756∼1836)이었는데, 그의 사상의 일부는 오웬류의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비록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보다 광범한 사회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고전적 무정부주의는 원래 푸루동의 공생주의적 및 연방주의적인 견해에 의해서 고무된 것이었다. 푸루동은 본질적으로 조합주의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에 접근하였으나, 그는 자본의 권력과 국가권력은 동의어이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국가권력을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푸루동의 견해는 바쿠닌에 의해서 정력적으로 선전되었고, 그의 지도 아래 무정부주의는 1860년대 후반에 국제적 차원에서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푸루동과는 다르게 바쿠닌은 자본주의적 소유와 토지소유권을 폭력적이고 혁명적으로 수용하여 집산주의 형태로 이끄는 것을 옹호하였다. 바쿠닌의 후계자인 크로포트킨(1842∼1921)은 사회진보의 한 요소로서 공공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주된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것은 만인에 속하며’, ‘분배는 전적으로 필요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 그 역사적 역할’ 이라는 논문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혐오하는 것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분석하였다.
바쿠닌의 전략은 피억압계급, 즉 산업노동자 및 농민들의 자연발생적 봉기와 광범위하게 만연된 반란과정에서 국가는 폐지되고 지역적, 국민적, 국제적인 차원에서 연방적으로 결합되는 자치적인 코뮨들에 의해서 대치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바쿠닌이 ‘대담하고 솔직한 국가의 부정’ 이라고 격찬한 1871년의 파리코뮨은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혁명 모델에 근접하였다. 파리코뮨이 무너지자, 엥겔스는 그 실패의 원인을 코뮨의 중앙집권화와 권위가 결여되었으며, 그 위압적 권위를 충분히 자유롭게 행사하는 데 실패하였던 점에서 찾았다. 그 뒤 맑스주의자와 개량주의적 변종 양자가 국가 사회주의 쪽으로 쏠리는 추세가 확고해졌다. 당시 몇몇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을 암살하고 시민계급에 테러를 가하는 ‘행동에 의한 선전’ 전술을 채택하여 대중폭동을 고무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운동에 억압이 가해지자 다른 무정부주의자들은 그 대안으로 생디칼리즘과 결합한 전략을 발전시켰다. 이 사상은 대(對) 시민계급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수단으로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 질서의 기초 단위로서 코뮨보다는 조합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혁명은 총파업 형태를 띌 것이고, 총파업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생산과 분배 및 교환의 수단들을 장악하고 국가를 폐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생디칼리즘을 통해 1895∼1920년 사이의 무정부주의는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그 영향력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내란기(1936∼39)에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들이 자신들의 혁명사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생디칼리즘이 쇠퇴해버린 이후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에 다만 제한된 영향을 끼쳐 왔으나, 1960년대 신좌익 운동에서, 반드시 그렇다고 인정되지는 않지만, 무정부주의적 이념과 경향의 주목할 만한 부활이 나타났다. 기독교 무정부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지만, 마하트마 간디(1869∼1948)에 의해서 보편화된 비폭력 직접 행동방식에 보다 많은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무정부주의는 서구 평화운동 내에서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1805∼56), 푸루동 및 바쿠닌에 의해 상징되는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 양자는 맑스와 엥겔스의 폭넓은 비판을 받을 만큼 매우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다. 대체로 그들은 무정부주의를 소시민계급적 현상으로 이해하였고, 바쿠닌의 경우에는 그것이 모험주의와 혁명적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몰락한 지식인 및 룸펜 노동자계급의 특성과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운동 내의 조류에 뒤떨어진 하나의 분파적 흐름으로서 무정부주의는 시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대규모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소시민계급의 저항을 반영하였다. 그들의 저항은 실재하는 모든 국가뿐만 아니라, ‘추상적 국가, 국가 그 자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국가’ (《사회민주주의 연합과 국제노동자협회》, 1873, s. Ⅱ)에 대한 부정의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났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무정부주의가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본질적인 것, 즉 정치권력의 즉각적 파괴가 아닌, 정치권력의 획득을 가져오는 독립된 노동계급 정당에 의한 정치적 행동을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엥겔스가 설명했듯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의 폐지는 모든 계급들이 폐지된 필연적 결과이며, 국가의 소멸과 함께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권력을 조직할 필요성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Marx, Engels, Lenin 1972, p. 27).
무정부주의는 그러한 비판 속에서도 살아 남아 맑스주의 이론, 특히 맑스주의적 실천을 비판하는 주요한 원리로서 존재하고 있다. 맑스주의적 및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계급과 국가 없는 사회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달리 한다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적절한 것 같지 않다. 보다 높은 수준에서 볼 때 그 불일치는 국가의 본질, 사회와 자본에 대한 국가의 관계 및 소외의 한 형태로서의 정치운동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관련자료]Apter, David and Joll, James eds 1971: Anarchism Today
Guérin, Daniel 1970: Anarchism
Kropotkin, P. A. 1970; Selected Writings on Anarchism and Revolution.
Marx, Engels, Lenin 1972: Anarchism and Anarcho-Syndicalism.
Pennock, J. R. and Chapman, J. W. eds 1978: Anarchism.
Thomas, Paul 1980: Karl Marx and the Anarchists.
Woodcock, George 1963: Anarchism.
■ 인접어
모스크바 선언과 모스크바 성명
모택동
모험주의
무신론
무장봉기・군사문제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
문학
문화
물신숭배
물질
뒤로 ■ 의견
-말머리선택- 문제제기 이의 보충 기타 로그인 하신 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 용어해설
[내용]어원은 그리스어 anarchos로, ‘지배자가 없다’는 의미이다.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아나키(anarchy)를 ‘정부 없는 사회’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게무야마 센타로가 1902년 『근세 무정부주의』라는 책을 펴내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뒤부터 대체로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현재는 대부분 ‘무정부주의’보다는 ‘아나키즘’이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권력과 사회 제도 및 국가로 본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사회 제도와 국가 등의 억압을 타파하고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때 국가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최대의 강제적인 권력으로 상정되는데,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타도할 때 민중의 직접 행동에 따른 사회 혁명의 방식을 추구했다. 소수가 지도하는 중앙집권적 조직도 또 다른 권력의 교체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아나키즘은 대체로 18세기 말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아나키즘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대체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분류할 수 있다. 전자는 개인의 절대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제한된 형태나마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 영국의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과 독일의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슈티르너의 경우 자신에 대한 어떠한 국가 권력과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는 권력의 횡포와 계급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사회 변혁에 강조점이 있으며, 재산의 공유를 주장한다. 프랑스의 프루동(Pierre J. Proudhon)과 바쿠닌(Mikhaill Bakunin), 크로포트킨 등이 대표적이다. 프루동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기업을 경제 단위로 지역과 국가로 연합되는 사회를 지향했다. 바쿠닌은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농민 단체의 연합이 생산 수단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소비재에 대해서는 사유를 인정했다. 크로포트킨은 소비재까지도 공유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의 경우 아나키즘은 1910년 국권 상실을 계기로 민족 해방 운동의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아나키즘은 당시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사상으로서 각광받았다. 그 과정에서 상호부조론이 수용되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최고의 강권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들은 개개인의 자유를 추구한 것이었고,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했고, 공산주의 세력이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독재 또한 강권으로 규정하고 배격했다.
일제 시기 한인 아나키스트 내부에도 방법론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의열 투쟁을 통한 직접행동론이다. 의열 투쟁은 민중을 각성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서 의열단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는 혁명 근거지 건설론이다. 이는 농촌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농민 자치의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해 민족 해방 운동과 아나키스트 혁명의 근거지로 삼아 주변으로 확산시키려는 방법이다. 이는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실천했다. 셋째는 파업과 태업 등 경제적 직접행동론과 일상투쟁론이다. 이는 국내나 재일본 아나키스트들이 주로 실천했다.
그러나 의열 활동에 대한 계속된 검거는 운동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고, 혁명 근거지 건설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일상투쟁론도 소수의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1930년대 후반 민족전선론을 제기하면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국가 수립을 우선시하며 국가 수립 이후에 아나키스트 사회를 달성하자는 단계혁명론을 견지했다. 또한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다.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이라고?
큰사진보기 ▲ 때로는 현실의 권력이 의미를 좌우하기도 한다. ⓒ sxc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손병관 기자
‘무정부주의’라고 쓰면 안 돼! ‘anarchism’은 ‘아나키즘’이라구!무정부주의(아나키즘)를 다루는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주장을 흔히 접할 수 있다(이를테면 에 실린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라는 서평 기사).물론 ‘아나키즘’은 ‘일체의 정치 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는 사상'(표준국어대사전)이지, “정부가 존재하지 않”(무정부)거나 “아무런 통일적인 제도와 질서가 없이 혼란한”(무정부적) 상태를 지향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며칠 전까지는 ‘무정부주의’보다는 ‘아나키즘’이 더 나은 번역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현 정부의 상태가 일종의 ‘무정부'(아나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anarchy’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봤는데, ‘anarchy’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키아’로, 지도자(아르코스ἀρχός)가 없는(안ἀν)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의 상태를 뜻한다.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anarchy’는 “정부가 없음, 최고 권력이 없거나 비효율적인 데서 비롯한 무법 상태, 정치적 무질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어 ‘anarchism’은 ‘anarchy-ism’, 즉 ‘아나키주의’, …… 바로 ‘무정부주의’다!하긴 ‘anarchist’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처음 쓰인 것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 때였는데 이때는 왕당파가 의회파를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이 용어는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참고: 위키백과 ). 영어 ‘anarchism’은 말 그대로 ‘아나키주의’, 즉 ‘무정부주의’인데 한국어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으로 쓰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영어는 되는데 한국어는 안 된다는 걸까?영어 화자는 ‘anarchism’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이것을 ‘anarchy’와 ‘ism’으로 분해할까, 아니면 한 덩어리로 인식할까? 만일 분해한다면 영국인과 미국인에게도 ‘anarchism’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이고,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면 한국어에서도 ‘무정부주의’는 ‘무정부 + 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일 뿐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한국어 ‘아나키즘’은 위상이 독특하다. ‘아나키 + 이즘’으로 분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인 ‘아노미’와 달리 ‘아나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그 자체로도 한국어 생태계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아나키즘’은 영어 ‘archichism'(또는 프랑스어 ‘l’anarchisme’)의 번역어로서만 존재한다.그렇다면 한국어 ‘아나키즘’의 의미는 이 단어를, 또는 개념을 수입한 사람들이 결정한다(영어 사전에서 ‘anarchism’을 찾으면 되지만, 한국어로 사유하고 소통하려면 누군가 이를 번역해야 한다). 김춘수의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나키즘’은 “내(아나키스트)가 그의 몸짓을 정의하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다시 말해서, 명명되기 이전의 꽃이 기표 없는 기의라면 정의되기 이전의 ‘아나키즘’은 기의 없는 기표다(이 문장에서 ‘꽃’을 따옴표로 묶지 않았으되 ‘아나키즘’은 묶은 것에 유의할 것). 텅 빈 기표를 채우는 사람이 권력을 얻는다. 문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이 신비한 기호의 의미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사제만이 알고 있었다. 사제의 권력은 기호의 의미 없음(또는 의미 독점)에서 비롯한다.텅 빈 기표의 권력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 대화에서 상대방이 잘 모르는 전문 용어(또는 은어)를 구사할 때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대해 권력자가 된다. 물론 이 권력은 사이비 권력이다.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이를테면 교수 앞에서 논문을 방어하는 대학원생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전문 용어를 주워섬겼다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다시 설명해주시겠어요?”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여담이지만, 진짜 모르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데 반해 아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화 상대방에게는 나를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 물론 내가 ‘대상 청자’가 아니라면, 즉 화자가 대화 상대로 의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해의 의무가 나에게 부여될 테지만.때로는 현실의 권력이 의미를 좌우하기도 한다. ‘역학’은 “물체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물리학의 한 분야”(역학02), “주역의 괘(卦)를 해석하여 음양 변화의 원리와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역학03), “어떤 지역이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원인이나 변동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역학05) 등의 뜻이 있는데, ‘역학05’를 ‘역학02’로 오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학계에서는 영어 ‘epidemiology’를 ‘역학’으로 번역하지만 일반인은 ‘전염병학’이라는 용어에 친숙하다.’역학 조사’라고 하면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역학적 특성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전염병의 역학 관계를 조사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역학자들로서는 땅을 칠 노릇이다. 하지만 역학05를 다루는 단체와 개인의 힘이 지금보다 커진다면 역학05가 역학02나 역학03 취급을 받는 일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물론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동어 반복이 아니다. 이것 자체가 ‘아나키즘’의 개념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언어적 실천이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적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논문 인용하기 닫기
박열이 사회변혁사상으로서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원인과 그를 무정부주의자로 판단하게 되는 면모를 첫째, 무정부주의자를 판단하는 기준인‘개인’과‘개인의 자유’, 그리고‘국가’로 통칭될 수 있는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고찰하고, 둘째, 박열의 사상∙의식 속에 혼재되어 있거나 또는 의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그의 항일‘민족의식’을 통해서 그의 무정부주의와 민족의식 간의 상호관계를 규명하고자 하였다.박열에게 무정부주의는 일제하 한국 민족의 식민지사회현실을 타개할 사회변혁∙민족해방의 이념이자 민족해방 이후 변혁된 한국사회를 전망할 미래지향적 이념이었다. 박열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정치혁명∙정치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입각한‘국가의 부당성 및‘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에 대한 지향 속에내재되어 있다. 무정부주의자 박열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자유’의 확보와 그 개개인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며 자율적으로 사회질서가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무지배∙무권력의 사회였다. 박열은 지향 하는 무정부사회의 초석이 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어 허무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역설적인 허무주의적 사유 속에서 항일민족의식∙대일증오감을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무정부주의 이상주의자였다.
Anarchism was an ideology not only to liberate and reform the nation under Japanese control but also an future-oriented ideology to present a blueprint for the reformed Korean society after liberation for Park Yeoul. His cognition of anarchism can be found in his critics on political revolution and political movement, insistence on mproperness of ‘state’, and orientation for the liberal and equal individuals. The ultimate purpose of Park Yeoul as an anarchist was to establish an utopian society without governing and power in which the liberty of individuals are secured and armonious with each other so that autonomically the social order, too. However, he was inclined to nihilism when he lost his credit on the humanities which should be the footstone of his utopian society. Nevertheless, he was an anarchic idealist who would not but put into practice his national consciousness and hatred against Japan via self-sacrifice.
키워드에 대한 정보 무정부주의
다음은 Bing에서 무정부주의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 NEWS
- KBS
- 뉴스7
- KBS 뉴스7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YouTube에서 무정부주의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터 된 샹젤리제…‘무정부주의 단체’ 개입 논란 / KBS뉴스(News) | 무정부주의,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