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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서 유래하며 본질적으로는 「지배자가 없는」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정부형태나 강제적인 권력, 모든 형태의 계급제와 지배형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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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
결코 지워져선 안 될 그 이름은 ‘아나키스트’입니다.
KBS 청주 다큐멘터리 [다큐공작소]#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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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들의 상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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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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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 교과서 용어 해설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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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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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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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와 안아키스트, 누가 더 위험한가?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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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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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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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나키스트

  • Author: 딩가딩가 스튜디오 DGDG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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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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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나키스트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나키스트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나키즘(영어: anarchism /ˈænərˌkɪzə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 )은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이며, 이러한 사상가는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동은 그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는 “주인과 군주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언급했다.[1]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명칭 [ 편집 ]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 dêmos(인민)과 krátos(힘)의 합성어 dēmokratía에서 나왔다. 이는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함과 함께 모든 민주주의 체제의 공통근간을 암시한다. 하나는 누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자인가,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의사를 강제할 힘이다. 단순히 말해서 이는 시민권과 치안유지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두개가 결합하여 정부를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데모스 즉 시민은 결코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여성, 노예, 이민자, 재산 없는 남성을 포함한 인구의 80~90% 가량의 사람들은 데모스에서 배제되어 정치 권력을 갖지 못했다.[2][3]고대 그리스에선 이 데모스와 크라토스라는 두가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를 ἀν-(無)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 즉 아나키라고 불렀다.[4] 이런 사실은 대중에게 다가가기보다(데이비드 그레이버 처럼) 순수한 아나키즘을 바라는 이들이 민주주의는 소수에 의한 것이든 다수에 의한 것이든 본질적으로 폭정이며, 아나키즘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알베르 리베르타드(Albert Libertad)는 다음처럼 언급하기도 했다. “아나키스트는 투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하는 다수가 되길 바라지 않으며, 복종하는 소수가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5]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이 용어가 아나키즘이 정부만 반대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사용하기를 꺼린다.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 역시 아나키즘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아나키즘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다. 아나키를 말 그대로 해석 하면 지배하는 이가 없음을 의미하며, 지배자, 억압자는 정부, 국가, 자본일 수도, 종교, 도덕과 각종 도그마, 성, 인종, 나이일 수도 있다.[6]

사상 [ 편집 ]

아나키즘은 그 특징 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적 아나키즘을 말하나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아나키즘 분파들이 존재한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보는데,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 같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도 대립된다(반레닌주의).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허무주의 운동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아나키란 지배의 부재를 의미한다. 과거의 국가주의자들과 권위주의자들은 지배받지 않는 대중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으로 보았고, 지배가 없는 사회를 혼돈이라 매도하며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러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 프루동은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규정했다. 프루동은 아나키는 혼돈이 아니라 진정한 질서라고(Anarchy is Order=Ⓐ), 위에서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세우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질서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에게 아나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질서의 부재가 아니라 지배의 부재를 의미하고 있다. 데이빗 위크(David Weick)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모든 계급적 지배(hierarchy)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해소하려고 하는 사회·정치사상을 집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확실히 정부(그리고 국가)가 비판이 중심이 되지만 단순한 반국가주의는 아닌 것이다. — Reinventing Anarchy, p. 139

따라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반정부와 반국가 운동이라고 하기 보다는, 주로 계급제( hierarchy)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위계질서(hierarchy)가 권력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조직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 계급제의 최고형태이므로, 아나키스트가 반국가인 것은 당연하지만, 반국가만으로는 아나키즘의 정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hierarchy)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브라이언 모리스(Brian Morris)의 말을 인용해보자.

아나키라는 용어는 그리스에서 유래하며 본질적으로는 「지배자가 없는」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정부형태나 강제적인 권력, 모든 형태의 계급제와 지배형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멕시코의 아나키스트 프로레스 마곤(Flores Magon)이 말한 국가·자본·교회의「사악한 삼위일체」라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권력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동시에, 다양한 수단을 통한 아나키의 상황을 확립하거나, 유도하려 하고 있다. 아나키 상태란, 억압적인 모든 제도가 없는 분권형사회,자발적 결합의 연합을 통해 조직된 사회인 것이다. — “Anthropology and Anarchism”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45, p. 38

아나키는 혼돈이 아니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혼돈을 포용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들은 혼돈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전제하고, 무엇이 질서있는 자유인가를 규정하는 문제가 ‘자유를 규정’ 하는 것이며 억압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계열의 철학자인 Feral faun(다른 이름 Wolfi Landstreicher)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적이 있다.

혼돈은 비방 받고 경멸되어 왔다. 심지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조차 스스로를 혼돈과 관련짓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살인과 환란과 동일시 되어왔다. 그럼에도, 이것이 질서의 세력에 의한 거짓 프로파간다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질서를 강제하는 역사는 전쟁, 살인, 강간, 환란과 억압를 증가시키는 역사였다. 혼돈이 아닌 질서는, 오직 모든 존재에게 그 형태를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파괴하길 욕망한다. 오직 혼돈의 화신이 되길 자처한 자만이, 이 살인적인 질서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돈이 살인과 환란이 아니라면,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무질서인가? 아니다. 무질서는 질서를 필요로 하지만, 혼돈은 모든 질서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무질서는 망가진 질서다. 우주는 자연적으로 혼란스럽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작은 부분에 질서를 부과한다면, 그 질서는 혼란스러운 우주와 충돌하게 될것이며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강제된 질서가 망가지는 것이 무질서다. 질서에 방해받지 않은 혼돈은 균형을 만든다. 이것은 저울과 무게의 인위적인 균형이 아니며, 살아있고 언제나 변화하는 야성적이고 아름다운 춤이다. 이것은 경이로우며 마법과도 같다. 이것은 모든 정의의 너머에 있기에, 이를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단순한 은유에 불과할 것이며 그것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에로틱한 에너지를 결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7]

따라서 아나키즘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계급제(hierarchy)가 없는 사회의 창조를 지향하는 정치사상이다. 즉 아나키는 지배자가 없는 질서를 의미하며,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아나키스트들에게 받아 들여진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호적으로 자립하게 하고자 한다.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란 특권이자 불의이며, 자유 없는 사회주의란 야만이자 노예제라고 확신한다.[8]

인류사회의 역사가 이 점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평등이 없는 자유는 강한 자만의 자유를 의미하며, 자유가 없는 평등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 이외 그 무엇도 아니다. 한마디로 아나키즘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핵심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부에 대한 반대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벤저민·터커는 말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국가의 폐지와 부당한 이득의 폐지를 주장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도 중지되어야 한다.”[9] 모든 아나키스트는, 이윤·이자·지대와 집세를 부당한 이득(즉 착취)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정부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만들어 내는 상황에 반대하고 있다. 수잔 브라운(L. Susan Brown)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나키즘 안에 있는 연대의 정신은, 계급제(hierarchy)와 지배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며,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기꺼이 싸우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10] 국가나 자본가의 권력에 복종 당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아나키스트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계급제(hierarchy)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이 정부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 되어야 한다. 계급제에는 정치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제 관계, 사회관계에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프루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본은, 정치분야에서의 정부와 비슷하다. 자본주의 경제사상,정부와 권력의 정책, 교회의 신학사상은 완전히 동일한 사상이며, 여러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중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자본이 노동에 대해 하는 것, 국가가 자유에 대해 하는 것, 종교가 영혼에 대해 하는 것, 이 절대주의의 삼위일체는,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유해하다. 민중을 억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민중의 육체·의사·이성을 동시에 노예화하는 것이다. — Max Nettlau,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p. 43-44

CrimethInc.는 “어째서 혁명적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가”란 글에서 국가주의 좌익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아나키스트 용어로서의 “국가주의”란 비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 전체(맑시즘, 사민주의, 리버럴을 포함)를 가리킨다.

아나키스트들은 대리자에게 힘을 위임하는 것이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그 자체로서 국가를 만들어 내며 자유의 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반정치 성향(권력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며 따라서 중앙 권력을 매개하지 않는 자율적인 조직과 운동을 옹호한다. 아나키스트들이 거의 대부분의 좌익세력들과 떨어져서 따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모든 국가적 요소(법, 경찰, 감옥 등)를 제거하고자 하며, 자칭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면 어떤 아나키스트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법과 경찰이 사라지면 범죄가 치솟을 것이라고 생각할테지만, 바쿠닌이 “범죄는 국가만이 가진 특권이다.”라고 언급했듯이[14] 역설적으로 법이 사라지면 범죄도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의 질서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많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 전략이 혁명적 아나키즘이냐, 점진적인 이중권력(현 질서를 교란하는 대항적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냐 라는 것이다.

모두의 개성을 최대한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자유, 평등, 연대라는 세가지 원칭을 바탕으로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서 이들 세가지 원칙은 서로 의존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개성을 발달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는 동시에 창의력과 개인의 책임감을 말살하며 획일성과 평범한을 만들어낸다. 자유가 개성의 발달에 필수라 한다면 평등은 참된 자유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권력과 부, 특권등으로 채워져 있는 계급(hierarchy)사회에 참된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제의 최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로울 뿐, 나머지는 노예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평등이 없으면 자유는 허울뿐인 속임수이다. 자본주의에서처럼 기껏해야 보스를 선택하는 자유만이 주어질 뿐이다. 개성은 다른 자유로운 개인과의 폭넓은 접촉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엘리트 계급에 속하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자유로운 개인이 적은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발달 가능성도 일부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15] 마지막으로 연대는 상호부조를 의미한다. 그것은 같은 목적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타자와 협력해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없이는 사회는 상층계급이 하층계급을 지배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경쟁하는 모든 계급의 피라미드가 되어 버린다. 자신들이 지금 있는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사회는 “지배 하던가 지배 받던가” “먹느냐 먹히느냐” “자기 것만 생각하는”것이다. 연대는 자기희생이나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모두 에고이스트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지적이고 교육 받았으며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형제가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에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 그러니 노예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 노예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얻어내는 것에 만족하며 그런 삶에 적응해버린 사람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며, 아나키스트가 될 수도 없다. — Life and Ideas, p. 23

아나키즘은, 아나키, 즉 “지배자가 없는” 것을 원칙으로 한 사회의 건설을 제창하는 정치사상이다.

역사 [ 편집 ]

고대부터 아나키스트로 여겨지는 사람들(예수, 노자 등)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아나키즘의 탄생은 프랑스 혁명 때 등장했다.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흐름 [ 편집 ]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종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적 개념에서 사유재산 혹은 사적소유(Private Property)란 이윤을 만들어 내는 재산을 뜻하며, 도로, 공장, 토지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반대되는 개념은 동산(혹은 “개인적 소유”, Personal Property)이며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소유하여 사용하는 생산수단 아닌 재산(집, 차, 컴퓨터, 침대 “칫솔” 등)을 의미한다. 사유재산,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부르주아이며, 그렇지 못한 프롤레타리아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부르주아에게 고용되어 부르주아가 결정한 노동조건, 노동시간, 임금 등에 자유인으로서 자주적인 영향력(노동자 자주경영의 결여)을 행사하지 못한채 복종해야한다. 이는 계급분할이라는 불평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임금노예제(wage slavery)에 굴복을 요구함으로써 아나키즘의 핵심적 요소중의 하나인 자기소유권을 박탈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사유재산에 반대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부정, 혹은 공유란 생산 수단의 노동자 통제(Workers’ control)를 의미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오직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노동자 통제란 공장등의 생산수단이 거기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라고 불리는 것(국유화 등),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 등의 좌파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는 국가사회주의이며,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가 국가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경멸적으로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루돌프 로커는 사회민주주의 등의 의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6]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운동이 털끝만큼도 사회주의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지 못했지만, 이 방법 덕분에 사회주의는 거의 완전히 부서지고 무가치한 것으로서 비판받았다…… 의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주의 노동 운동에 교묘한 독약처럼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건설적인 사회주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더욱 나쁜 것은, 구원이 언제나 위 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파멸적인 망상 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셰비즘을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성격을 가진다고 비판하면서 거부한다. 또한 아나키스트가 주체적으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무계급 무국가를 의미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생산수단의 공유의 결과로 계급과 국가와 화폐가 사라진 사회를 의미한다. 맑스주의자(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인)와 아나키스트 모두 궁극적으로 이를 공산주의라고 부르지만, 그 방법론에서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국가를 이용하는 중간단계(국가사회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사회주의를 죽일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오랜시간동안 충돌해왔다.[17]

상호주의(Mutualism)는 프루동이 주장한 경제적 견해로서, 사실상 정치사상으로서의 최초의 아나키즘이다(경제 문제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정치사상 보다 철학에 가깝기 때문에). 상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를 옹호하며, 노동가치론에 기반을 둔 자유시장을 옹호한다. 이들은 임대등을 착취로 간주하며 국가와 정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18][19] 좁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이란 용어는 공산주의적 아나키즘과는 구별되는 이 “상호주의적 아나키즘”을 가리킨다. 상호주의는 투쟁과정에서의 실천의 괴리등의 문제로 바쿠닌 등의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 이외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경향이다. 아나키스트의 경제관은 상호주의 이거나 (아나코)공산주의 이거나 둘 중 하나다.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는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간에 차별을 유발하고 인류의 연대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국가주의를 정당화 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람의 경험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발명품이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형성하는 사람의 자율적인 행동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민족을 강조할 경우 이 변화를 거부하며 강제적인 힘을 이용해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알트 라이트 리처드 스펜서는 네오나치라는 비판을 회피하기 위해서 “평화적인 인종청소”라는 주장을[20] 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민족 개념에 갇혀서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사실 앞에서 민족이라는 교조를 포기하지 않는 다면, 이를 강제로 실현시켜려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이른바 “내셔널 아나키즘”에 대하여 같는 시각과 동일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이들을 리처드 스펜서 같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한 태도로서 대우한다.

통칭 “좌파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는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하나는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나, 내셔널 아나키스트등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사이비 취급하는 유형쪽에서 좌파가 아닌 아나키즘이 존재할 수 있다며 자신의 존재(자본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아나키즘과 호환될 수 있다면서)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다. 이 경우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이 용어와 개념 자체를 반동 세력의 트로이의 목마 취급하며 부정한다.[21][22][23][24] 또 다른 경우는 포스트 레프티스트(이들도 좌파의 일종이지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나키스트로서의 주체성 없이 ‘범좌파’ 담론에 휩쓸려 다니면서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이들을 맑스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을 “자본주의 좌파”라고 부르듯이, 경멸적(자칭 아나키스트, 잠재적 변절자라는 맥락에서)으로 “좌파 아나키스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미국의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스트인 제이슨 맥퀸은 다음과 같이 언급 하기도 했다.

초기 아나키스트 운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운동과 동일한 많은 투쟁에서 나왔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른것과는 차별화되었다…… 아나키스트 사상은 언제나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착취에 대한 단순한 사회주의적 비판보다 더 깊고, 급진적이며, 전체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아나키스트 사상이 혁명 시대의 사회적 소요와 더불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소외와 지배를 폐지하고자 하는 개인의 비판적인 상상력 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의 사상은 부정할 수 없는 개인주의에 기반한 사회비판의 입장에서 언제 어디서나 오직 자유로운 개인만이 자유롭고 소외없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이 개인주의 입장의 토대는 어떤 개인에 대한 착취나 억압이라도, 모든 사람의 자유와 그 자신으로서의 완전함을 감소시킨다는 생각을 포함한다. 이것은 개인을 끊임없이 평가절하하고 경시하며 부정하는 정치적 좌파의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것은 진실된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보호하고, 확산 시키기 위해 거리낌없이 대량 착취, 대량 억압, 그리고 빈번하게 대량 투옥과 학살을 자행했던 좌우 권위주의자와 중도 세력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를 택하지 않도록 하는 이유다. 아나키스트들은 오직 자신들을 자유롭게 조직하는 사람들만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권력을 추구하면서 개인이나 공동체를 희생하길 거부한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호적인 기원을 고려할 때, 그들은 국제 노동운동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아나키스트의 이론이나 실천을 택하기도 했으며,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좌파 이론과 실천을 채택하여 자신들과 합성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좌파가 권력을 장악한 곳은 어디든지 최선의 경우 자본주의를 개량하는 것이였으며, 최악의 경우 새로운 폭정을 만들어내서 살인적인 정책들로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좌파의 국제적인 붕괴와 함께, 이제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좌파의 쇠퇴하는 잔재물로 만들어졌거나 지속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타협을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이 좌파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얻게 된 유용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제도에 대한 명목상의 반대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좌파의 점진적인 소실과 함께 증발하고 있다. 역사의 무대에서 좌파의 급격한 몰락은 국제적 아나키스트의 진영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유일한 혁명적 대안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지난 10년간 아나키스트 운동은 번성했으며, 이러한 성장의 거의 대부분은 아나키즘의 가시적이고 활발하며 우상파괴적 활동에 매혹을 느낀 불만 많은 청년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모든 좌파가 하룻밤 새 퇴색되거나 그들의 근본을 바꾼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前) 좌파들은 불가피하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좌파적인 태도와 편견과 습관을 가져왔고, 그들의 구 정치 환경의 구조화된 가정들을 가진 채로 아나키스트 진영에 들어왔다. 그러한 모든 태도와 습관과 가정들이 필연적으로 권위주의적이거나 반(反)아나키스트적인 것은 아닐 테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문제 중의 일부는 많은 전좌파들이 아나키즘을 단지 반국가주의 좌파로만 오해하면서, 이것의 부정할 수 없는 개인주의적 기반을 사회투쟁과 무관한 것으로써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소외를 폐지하고자 하는 자기 조직화된 운동과 단지 평등주의적인 형태로 생산을 재구성하려는 운동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부는 이를 이해하지만 여러 이유로 아나키즘 환경을 정치적 운동의 형태로써 개량하려 한다. 어떤 전좌파들은 사회적 소외의 폐지가 가망이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수행한다. 어떤 경우는 그들이 여전히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모든 개인주의적 요소(성적 요소이든 문화적 요소이든 간에)를 거부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행한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어떤 권력의 지위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깨닫고선 조작의 여지가 많은 협소한 정치 조직을 만들고자 한다. 계속해서 어떤 이들은 자율적인 사고와 실천에 익숙하지 않고, 단순히 아나키스트 전통의 여러 측면에 대해 불안과 불편함을 느끼기에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좌파의 그런 측면들을 밀어 붙이기를 원한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을 이끌어줄 명시적인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없이도 과거처럼 간부나 활동가의 역할을 이어 나가기를 원한다.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현재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끊임없이 이 모든 것들을 의식(신중하게 비판적으로)하고 있어야 한다.[25]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현재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나키스트들은 끊임없이 이 모든 것들을 의식(신중하게 비판적으로)하고 있어야 한다.

아나키스트의 전자 도서관 중 가장 거대한 도서관인 아나키스트 라이브러리에선 아나키즘이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 한다.

넓다는 것이 무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정의는 국가와 자본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즉시 이른바 “아나코 캐피탈리즘”과 “내셔널 아나키즘”을 비롯한 비슷한 쓰레기들을 배제한다.[26] 우리가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상당히 넓은 것들을 의미하지만,기본적으로 이 정의는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즉시 이른바 “아나코 캐피탈리즘”과 “내셔널 아나키즘”을 비롯한 비슷한 쓰레기들을 배제한다.

정통적 흐름 [ 편집 ]

사회적 아나키즘 [ 편집 ]

흔히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말은 거기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소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기에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회적 아나키즘 혹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공산주의, 생디칼리즘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아나키스트 사상계중 제일 많은 세력을 보유하고, 아나키스트들의 주요사상으로 남아있다. 보통 아나키즘하면, 이 사회적 아나키즘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며,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목표로한다. 사회적 아나키즘은 바쿠닌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제1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은 연방주의(Federalism) 구조를 지지하는데 아나키스트 이론에서 연방주의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형태의 조직의 연합체로서 구성원들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조직화 형태다.[27]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편집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상호주의(mutualism, 시장 사회주의) 흐름은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을 부정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가<>노동자간의 위계가 존재하며, 자본에 의한 여러 권위가 소유물을 지키가 위한 사회적 기관을 만들고 이는 결국 아나키즘에 반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를 부정한다. 다만 점유(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재산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개념[28])와, 생산수단의 상호주의적 소유 그리고 상호주의적 시장은 인정한다.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재산이란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임대가 있다. 상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소유는 도둑질이다”(이 말은 상호주의 아나키스트인 프루동의 주장이긴 하지만)라는 슬로건과 구별하여 “임대는 도둑질이다(rent is theft)”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도 한다. 에고이스트 성향의 이들은 일반적인 소유개념이나 시장을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로 파악하고 그 자체를 유령으로 간주해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크게 에고이즘 계열과, 시장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전자는 슈티르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을 자들이고, 후자는 프루동 터커등의 사람에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다. 케빈 카슨(Kevin Carson)[29]이 오늘날 가장 유명한 시장 사회주의 계열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다. 유럽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는 대체로 에고이스트를 의미하며, 미국에선 시장 사회주의자들을 주로 의미한다.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최초의 아나키스트라 평가된다. 지식과 교육을 통해 권위에서 벗어나 아나키 사회에 도달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국내에선 잘못 알려졌지만 그가 특정한 아나키즘 분파를 형성하진 않았다.

에고이즘에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경향

이후 나타난 흐름들 [ 편집 ]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 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아나코” 캐피탈리즘을 아나키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사장과 직원의 위계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의 위계관계, 집주인과 세입자과의 위계관계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국가권력을 폐지 하고자 하는 이유는, 국가가 자본가를 지키는 계급적 보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폐지 된다면, ‘사유재산을 보호할 경찰이 사라지고’ 그 때가 되면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점령하고 점유 해서 자주관리 하에 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코” 캐피탈리즘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적 경찰 등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국가 권력을 폐지가 아니라, 권력을 민영화 시키겠다는 이야기나 사실상 마찬가지이다.[30][31][32][33][34][35]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아나키즘이 아니다. 어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를 기꺼이 인정한다. 예를 들어서, 급진적 에고이스트인 아인 랜드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경직된 개인주의에 호의를 보이며 슈티르너의 공동적 개성을 명백히 부정했다. 로버트 노직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을 일축했다.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명백한 거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비친다… 그들 중에서는 라이프스타일과 민권에 관하여 집중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들의 사적인 영역, 즉 약물과 성생활의 문제에서 국가의 간섭을 없애길 원한다. 다른 파벌에서는 경제문제에 관심을 표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신고전 경제학의 자유방임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찬양하며 “자연적인” 자본주의를 오염시킨 국가를 비방한다. 이 두 집단 모두 국가를 경멸하지만, 그들은 결코 국가를 제거하길 원하지 않는다. 이 최소국가 체제에 대한 입장은 자유지상주의가 아나키즘으로 분류되지 않게 하는데 충분하며, 이런 결론은 랜드, 뷰캐넌, 호퍼(Hospers), 노직에 의하여 받아 들여졌다. 이 문제에서 더욱 드러나는 것은 어째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를 유지하길 원하는가이다. 그들은 항상 법과 경찰 군사같은 국가의 강압성을 유지하길 원하는데, 이는 아나키즘이 아닌 자유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가지는 특정한 견해에서 직접적으로 파생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사회의 여러 문제들(범죄, 빈곤 등)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탓으로 돌려버리며, 국가에 의한“공정한”강제력을 옹호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러하듯이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권력의 본질적인 기능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과 중앙집권화, 경제적 불평등, 계급제와 권위에 반대하지 않는다…. 이는 아나키즘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머리 로스바드라는 명백한 예외적 존재다. (우익) 자유지상주의 운동 안에서 로스바드는 국가의 완전한 제거를 원하는 소수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로스바드가 아나키스트라는 주장은 그가 오직 공적국가를 끝내길 원한다는 것이 밝혀지자 기각된다. 이후 그는 각 사람이 자본주의 판매상으로부터 자신의 사적 경찰과 군대, 법률체계 등을 보유한 수많은 개별 국가를 건립하는 세계를 옹호한다. 로스바드는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기에, 더욱 많은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들이 오늘날 그러한것처럼 필연적으로 강력한 강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로스바드(혹은 다른 자유지상주의자들)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이용할때, 그는 언제나 극도의 취사선택인 태도로 그가 유리한 부분만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의 대부분의 교의의 핵심 원칙이 명백하게 반자유지상주의(anti-Libertarianism)적이라는 사실은 편리하게 무시되었으며, 그 결과 남은 것이란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공허한 자유와 결합한 허울뿐인 반국가주의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아나키”는 자유주의적(liberal)인 사기로 축소된다.[36]

결론 [ 편집 ]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아나키스트 [ 편집 ]

대한민국의 아나키스트로는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박열, 하승우, 김종진, 유림, 하기락, 구승회, 박홍규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 국가에서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폿킨, 레프 톨스토이, 머레이 북친, 옘마 골드만, 놈 촘스키, 미셸 푸코, 막스 슈티르너, 벤저민 터커, 윌리엄 고드윈, 제프 몬슨, 루이지 루체니, 파울 파이어아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네스토르 마흐노, 에리코 말라테스타, 렌조 노바토레, 루이지 갈레아니, 사코와 반제티, 가에타노 브레시, 안테오 잠보니, 마리우스 자코브, 레프 체르니 등이 있다.

아나키스트 단체로는 흑색공포단,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노동동흥회, 흑전사, 선구독서회, 남화한인청년연맹, 흑기연맹, 흑로회, 흑우연맹 등이 있다. 한국의 초기 아나키스트로로는 이을규·이정규 형제, 장자명 등이 있으며, 이회영은 임정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아나카스트들의 상징물이나 기(旗)에 대해 다룬다.

검은 깃발 [ 편집 ]

검정 깃발

검은 깃발은 1880년대부터 아나키즘과 보편적으로 관련되기 시작했다.

역사 [ 편집 ]

검은 깃발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1871년 파리코뮨 시대의 혁명가 Louise Michel이 그 시조가 아닌가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1882년 3월 18일 파리 코뮌을 기념하기 위한 공개 회의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붉은 깃발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고통의 검은 깃발을 들어 올리자.”[1] 다음 해 그녀는 그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에 따르면 1883년 3월 9일 프랑스 파리 실업자들의 시위에서 그녀는 검은 깃발을 들고 등장했다. 실업자들의 야외 시위는 500여명의 규모였고, 미셸은 검은 깃발을 들고 “빵과 일이 아니면 총알을!”(Bread, work, or lead) 이라고 외치며 생제르망 도로를 시위대의 가장 앞에 서서 행진했다. 그리고 군중은 경찰에게 공격 당하기 전에 3개의 빵집을 공격했다. 그녀는 구속되어 6년의 독방 감금형을 선고 받았으나, 공공의 압력에 의해 곧 사면 되었다.[2] 같은 해 8월 출판된 리옹 지역 아나키스트 신문 Le Drapeau Noir(The Black Flag)은 검은 깃발은 아나키스트 그룹 사이에서 유명한 심볼이 되었다고 보고 했다.[3] 하지만 검은 깃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보편적으로 흑적기를 그들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폴 에브리치에 따르면 1884년 11월 27일, 아나키스트 데모에서 검은 깃발이 펄쳐졌다. 폴 에브리치에 의하면, 헤이마켓의 순교자 중 한명인 어거스트 스파이스(August Spies)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검은 깃발이 미국에 펄쳐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다음해 1월의 미국의 혁명적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연출 되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의 깃발을 사용하는 가두행진과 대규모 야외 시위는 선전의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이였다.” 1885년 4월 시카고 시위 행렬에서는 루시 파슨스( Lucy Parsons)와 리지 홈즈(Lizzie Holmes)가 시위대를 이끌었는데 각각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을 쥐고 있었다.[4]

한편 러시아에서는 1905년 ‘Chernoe Znamia'(black banner) 운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검은 깃발이 쓰이지 않은 걸로 보인다. 그 해의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혁명이 좌절된 이후 아나키즘은 또 다시 지하로 숨어들어가야 했다. 1917년의 혁명 동안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은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 해 2월, 페트로그라드의 차리즘 타도 시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검은 깃발에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새기고서 참여했다. “권위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 활동의 일환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의 반혁명 시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 무장 분견대를 결성했고 이들은 ‘검은 수비대'(Black Guards)로 불렸다. 그리고 조금 암울한 기록이 있는데, 1921년 2월에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 소련에 나타났다. 그 달엔 표트르 크로폿킨의 장례식이 모스크바에서 열렸었다. 2만여명의 참석자들이 그의 명예를 위해 검은 깃발을 들고서 행진 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권위가 있는 곳에 자유는 없다.”[5] 크로폿킨의 장례식으로부터 ‘고작’ 2주만이 지나서 크론시타트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고, 아나키즘은 소련에서 삭제되었다.[6]

상기한 사건들은 역사상에서 검은 깃발의 유명한 사용사례이지만, 정확한 기원인 것은 아니다. 알려져 있는 여러 아나키스트 단체들은 검은색과 관련하여 그들의 이름을 짓곤 했다. 1881년 7월 Black International(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가 런던에서 창립하였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 해체에 따른 아나키스들의 조직이다. 같은해 10월 미국에서도 국제노동자 연합이 창립되어 런던의 Black Internation과 연대하였다.[7] 이 두 조직은 Michel의 시위와 시카고의 검은 깃발을 따랐다.[8] 이 두 조직은 Michel의 시위(1883)와 시카고의 검은 깃발을 따랐다.

북친(Murray Bookchin)에 의하면 1870년 6월 스페인 아나키스트 혁명 연설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검은 깃발을 그 상징으로서 채택했다고 말했다.[9] 하지만 당시에도 아나키스트들은 붉은 깃발을 널리 이용하고 있었다. 아나키즘의 상징으로 검은 깃발이 확실히 자리잡은 기간은 아마도 이때 이후였을 것이다.

붉은 깃발의 사용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표트르 크로폿킨의 글에서(1880~1882)의 내용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우드콕이 언급했듯이 “크로폿킨을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주의자로서 붉은 깃발을 사용했던 것에서 보면, 이때까지도 검은 깃발은 아나키스트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10] 또한 우리는 1880년대에 시카고 아나키스트들이 검고 붉은 깃발을 모두 사용했던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흑기를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상징물로 만드는데 기여한 :en 루이즈 미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적이 있다.

검붉은 깃발이 분노의 바람에 휘날릴때, 얼마나 많은 분노한 인민들과 청년이 우리와 함께할 것인가? 그 검붉은 파도가 오래된 난파선에 몰려들 때, 그것은 해일이 되어 낡은 잔해를 쓸어버릴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깃발이 우리의 피에 붉게 물들어 사형 집행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들과의 투쟁으로 죽어간 자들의 피가 겹겹이 쌓여 이제 붉은 깃발은 검은 깃발이 되었다. 그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은 우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새로운 희망의 여명을 향하여 휘날릴 것이다.

— The Red Virgin: Memoirs of Louise Michel, pp. 193-4

하워드 에를리히(Howard Ehrlich)는 흑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왜 우리의 깃발은 검은색인가? 이것은 ‘거부’라는 그림자의 색이다. 검은 깃발은 모든 깃발에 대한 거부이다. 이것은 인류의 화합을 가로막고 대립시키는 국민성에 대한 거부이다. 검은색은 국가와 집단에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인류에 자행되는 끔찍한 범죄에 대한 분노이자 울분이다. 이것은 가식과 위선, 그리고 정부의 비열한 속임수에 은밀하게 모욕되는 인간 지성의 분노이자 울분이다. 검은색은 또한 비탄이다. 검은 깃발은 안정과 위대한 영광을 위해 기꺼이 피를 마신 조국에 대한 거부이며, 국가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살해된 샐 수 없는 희생자들의 비탄이다. 이것은 노동의 결과가 강탈되어, 또 다른 인간을 도살하고 억압하는데 쓰이게 되는 현실에 대한 비탄이다. 이것은 폭압적인 계층 사회 안에서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병들어 버린 현실에 대한 비탄이며, 세계를 밝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꺼져버린 수많은 이성의 눈물이다. 이것은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의 색이다. 그러나 검정은 또한 아름답다. 그것은 결단, 의지, 힘의 색깔이다. 검정은 신비로운 어둠속에 둘러 쌓여 발아하는 새로운 생명의 온상이며, 늘 새로워지고 다시 창조하게 하는 비옥함이다. 검정은 그 깊은 대지에 비밀스럽게 씨앗을 심어서 새로운 창조의 여정과 성장을 둘러싸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니 검정은 부정, 분노, 격분, 애도, 아름다움, 희망이며 인간 삶의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다. 검은 깃발은 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치켜올릴 것이다. 검은 깃발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그날이 올 때까지…”

— “Why the Black Flag?”, Howard Ehrlich (ed.), Reinventing Anarchy, Again, pp. 31-2 그러니 검정은 부정, 분노, 격분, 애도, 아름다움, 희망이며 인간 삶의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다. 검은 깃발은 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치켜올릴 것이다. 검은 깃발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그날이 올 때까지…”

흑적기와 반흑기 [ 편집 ]

붉고 검은 깃발은 아나키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머레이 북친은 스페인에서 이 깃발을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붉은 색과 함께하는 검은 깃발은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 거친 아나키스트 행동의 표상이다. 1910년 CNT(스페인 전국노동총연맹)의 창립에 있어서, 대각선으로 나누어진 검붉은 깃발이 채택, 사용되었다. 그러나 검붉은 깃발이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되었던 증거는 많이 있다. 다만 주로 스페인과 같은 라틴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11] 1920년 이탈리아 노동 대투쟁에서 검붉은 깃발이 사용되었다. 멕시코 혁명가 Augusto Sandino는 멕시코 혁명기간 동안 멕시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검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 역사학자 Donald C. Hodges은 Sandino의 검붉은 깃발은 생디칼리스트들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스페인 이민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깃발은 자유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어권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하는 검붉은 깃발은 원래 스페인 혁명과 1936년 내전이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지면서 함께 퍼진 결과이다. 이는 또한 검붉은 깃발이 대체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원인이다. 즉 검붉은 깃발은 아나코 코뮤니즘 보다는 아나코 생디칼리즘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Albert Meltzer의 말처럼 “노동운동의 색깔은 붉은 색이다. 그러므로 스페인 CNT은 검붉은 깃발은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의미한다.”[12] Donald C. Hodges도 “멕시코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동맹의 붉은 띠는 자본계급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며 검정은 직접투쟁의 행동을 의미한다.[13]”고 하였다.

George Woodcock도 이 깃발의 유래로서 스페인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스페인에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깃발은 대각선으로 나누어진 검고 붉은 깃발이다. 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은 처음에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검정 깃발로 대체하였다. 검붉은 깃발은 인터내셔널의 민중적 요구와 아나키즘 정신을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14]”

그러나 검붉은 깃발이 처음 사용된 경우는 1874년 8월 이탈리아 폭동에서다. 비록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이 아나키스트들의 검붉은 휘장을 주목하였다. 1877년 4월 이와 비슷한 폭동이 이탈리아 작은 도시 Letino에서 일어났다. 아나키스트들은 검붉은 무늬의 옷을 입고 같은 깃발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전국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Ravindranathan과 Woodcock은 이러한 사건 현장에서 모두 똑같은 깃발-red & black flag-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기록하였다.[15][16]

이후 멕시코에서 검붉은 깃발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79년 12월 14일 멕시코 시티 콜럼버스 파크에서 아나키스트들은 5000명의 시위자들에게 검붉은 깃발을 갖추도록 요청하였다. 깃발에는 ‘La Social, Liga International del Jura’이 생겨져 있었고 연설자 연단에 세원진 거대한 검은 깃발에는 ‘La Social, Gran Liga International’이 새겨져 있었다. 멕시코와 유럽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는 매우 강력했다. 19세기 멕시코 시티 노동운동 세력은 유럽에 산재한 제1인터내셔널의 노동자 연합과 매우 긴밀한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17]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똑같은 깃발을 사용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곳은 모두 권력에 저항하는 인터내셔널로서 상호 밀접한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멕시코 아나키스트들은 제1인터내셔널에 동참하고 있었다. 두 곳은 스위스 바쿠닌의 쥐라 연합처럼 노동조합을 통한 직접행동(파업)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과 아나코 생디칼리즘이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상징물까지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포포트킨은 “생디칼리즘은 단지 인터내셔널의 부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18]

붉은색과 검정의 혼합은 논리적 발전의 결과이다. 검붉은 깃발은 1831년 리용에서의 폭동과도 관계가 깊다. 검붉은 깃발의 출현은 이들에게 전혀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급 투쟁에 있어서 파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디칼리즘과 권력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에 기반을 둔 아나키즘 간의 제휴는 자연적인 발전의 산물이다.

1870년대 후반 검붉은 깃발의 이러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검붉은 깃발이 널리 사용된 때는 30년 후 스페인 CNT의 창립 이후였다. 아나코 생디칼리즘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도 생디칼리스트가 아닌 아나키스트들은 검붉은 깃발을 즐겨 사용했다.

요컨대, 검붉은 깃발은 노동운동과정에서, 생디칼리즘과 제휴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의 경험에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검정은 자유지상주의적 사상과 직접행동을 상징한다. 붉은 색은 노동운동을 상징한다. 수년이 지난 지금 아나키를 상징하는 검정과 사회적 협동, 연대를 상징하는 붉은 색은 아나키스트 상징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검붉은 깃발은 아나키즘(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연대)의 목적을 상징하는 심벌일 뿐만이 아니라[19] 노동민중이 스스로 조직하여 저항하고 파업하며 연대감을 더욱 공고히하는 일련의 혁명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20]

즉 반흑기의 유래는 흑적기이며, 흑적기는 검은 깃발이 아나키즘의 상징으로서 여겨지기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흑적기는 단지 아나코 생디칼리즘이나 아나코 코뮤니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아나키즘의 줄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흑적기를 사용하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아나코 코뮤니스트나 생디칼리스트인것은, 아나키스트 거의 대부분이 그쪽 계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흑적기 이외의 깃발은 현실에서 보기 매우 어려우며 사실상 상징으로만 존재한다.

서클 A(circled-A) [ 편집 ]

서클 A는 아나키즘 심벌로서 (아마도) 검은 깃발이나 검붉은 깃발보다 더 유명하다. Peter Marshall에 의하면 “서클 A는 프루동의 격언 ‘아나키는 질서(Anarchy is Order)’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했다.[21] Peter Peterson 또한 원은 전세계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를 부르짖는 통합(연합)과 결단의 상징이라고 말했다.[22]

그러나 아나키스트 심볼로서 서클 A의 기원은 다소 불명확하다. 많은 이들은 1970년 펑크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다. 그러나 그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Peter Marshall은 “1964년 프랑스 조직, Jeunesse Libertaire가 ‘아나키는 질서다’라는 프루동의 슬로건을 내걸며 원 A을 만들면서 세계 각지에 퍼졌다고 주장한다.[23] 그러나 이것이 심벌의 시초는 아니다. 1956년 11월 25일, 브뤼셀에 있는 “the Alliance Ouvriere Anarchiste “(AOA)가 이 심벌을 취하였다. 이후 스페인 시민전쟁에 대한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아나키스트 시민군 한 멤버의 헬멧 뒤쪽에 장식된 원 A모양을 보여준 이후 원 A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24]

오늘날 서클 A는 전체 정치적 상징물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의 대단한 단순함과 솔직함은 1968혁명 이후 재부활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상징으로 수용되었다. 언어가 무수히 많고 다양한 세계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의 의사소통의 첫단계는 대문자 A를 보이는 것이다.[25]

기타 여러 가지 상징물 [ 편집 ]

각주 [ 편집 ]

교과서 용어해설

[내용]

어원은 그리스어 anarchos로, ‘지배자가 없다’는 의미이다.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아나키(anarchy)를 ‘정부 없는 사회’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게무야마 센타로가 1902년 『근세 무정부주의』라는 책을 펴내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뒤부터 대체로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현재는 대부분 ‘무정부주의’보다는 ‘아나키즘’이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을 권력과 사회 제도 및 국가로 본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사회 제도와 국가 등의 억압을 타파하고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때 국가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최대의 강제적인 권력으로 상정되는데,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타도할 때 민중의 직접 행동에 따른 사회 혁명의 방식을 추구했다. 소수가 지도하는 중앙집권적 조직도 또 다른 권력의 교체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아나키즘은 대체로 18세기 말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아나키즘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대체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분류할 수 있다. 전자는 개인의 절대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제한된 형태나마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 영국의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과 독일의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슈티르너의 경우 자신에 대한 어떠한 국가 권력과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는 권력의 횡포와 계급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사회 변혁에 강조점이 있으며, 재산의 공유를 주장한다. 프랑스의 프루동(Pierre J. Proudhon)과 바쿠닌(Mikhaill Bakunin), 크로포트킨 등이 대표적이다. 프루동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기업을 경제 단위로 지역과 국가로 연합되는 사회를 지향했다. 바쿠닌은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농민 단체의 연합이 생산 수단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소비재에 대해서는 사유를 인정했다. 크로포트킨은 소비재까지도 공유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의 경우 아나키즘은 1910년 국권 상실을 계기로 민족 해방 운동의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아나키즘은 당시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사상으로서 각광받았다. 그 과정에서 상호부조론이 수용되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최고의 강권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이들은 개개인의 자유를 추구한 것이었고,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했고, 공산주의 세력이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독재 또한 강권으로 규정하고 배격했다.

일제 시기 한인 아나키스트 내부에도 방법론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의열 투쟁을 통한 직접행동론이다. 의열 투쟁은 민중을 각성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서 의열단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는 혁명 근거지 건설론이다. 이는 농촌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농민 자치의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해 민족 해방 운동과 아나키스트 혁명의 근거지로 삼아 주변으로 확산시키려는 방법이다. 이는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실천했다. 셋째는 파업과 태업 등 경제적 직접행동론과 일상투쟁론이다. 이는 국내나 재일본 아나키스트들이 주로 실천했다.

그러나 의열 활동에 대한 계속된 검거는 운동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고, 혁명 근거지 건설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일상투쟁론도 소수의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1930년대 후반 민족전선론을 제기하면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국가 수립을 우선시하며 국가 수립 이후에 아나키스트 사회를 달성하자는 단계혁명론을 견지했다. 또한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다.

일상에서 아나키즘 실천하기 –

대한민국 청년, 유럽의 아나키즘을 만나다.

지난 학기에 휴학을 하고서도 뚜렷한 목적지를 몰라 늘 어두운 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고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을 만났다.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 대신 국가에 대한 ‘분노’를 생각하게 해 준 이 책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우연으로 만나 삶의 선물이 되어준 이 책은, 언론인을 꿈꾸며 글을 쓰고 국가에 대해 고민하곤 했던 나의 정치적 감수성을 되찾아 주었다. 개념이 생소하고 내용도 쉽지 않았지만 나에게 그렇게 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나키즘 그 자체를 넘어서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말하고, 대한민국 청춘들을 힘들게 하는 ‘대한민국’을 말했으며,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기억해야 할 ‘조언’을 건넸기 때문이다.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과거 유럽의 아나키즘을 불러와야 할 때

부끄럽지만 그동안 ‘아나키즘=무정부주의’로 착각해 왔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중대한 사실은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고 국가의 폐지 혹은 절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그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존재를 반대한다. 즉, 모든 권력에 반대한다. 권력은 국가를 작동시키는 핵심이기 때문에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도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와 정치가 없는 사회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이 현대사회에 ‘왜’ 필요한지 아는 것과 그 실천적 ‘대안’ 을 찾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전통주의 아나키즘에 대해 읽으면서 아나키즘이 그동안 왜 빛을 잃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 이유를 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발견했다. 봉건적 제도를 타도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던 19세기에는 아나키즘의 ‘정신’이 필요했지만, 그 정신을 기초하던 근대 철학적 관념은 현 시대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만나자 오히려 더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를 만들었다.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초는 자연법에 있고,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은 인간의 이성 토대 위에 존재한다.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는 고드윈은 인간의 ‘이성인’으로서 완전가능성을 신뢰하며, 인간 스스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자유사회인 동시에 이성인이 집합된 사회다. 이처럼 근대철학의 정신은 19세기 이후 인간 ‘이성’을 제외한 일체의 권위를 해체하려 했다. 인간의 절대적 이성에 근거한 주체 철학을 완성시킨 근대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주체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개개인이 하나의 우주이다. 따라서 나 자신의 법칙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자율성을 가지 고 있다. 근대적 개인의 의미인 나 자신만 이 나의 행동에 책임질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아나키즘 사상적 기초의 연장선인 근대적 관념에서 인간 행위란 인간 주체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행동이다.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앞세운 철학과 관념, 그로부터 나온 혁명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맞은 오늘날, 우 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성을 가진 주체로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성적이 낮고, 취업을 하지 못하면 더 열심히 하지 않은 나를 탓한다. 19세기 근대 관념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날의 주체를 만들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만나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더욱 옥 죄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국가는 ‘처벌’이 아니라 ‘훈육’이라는 방법으로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헤게모니를 형성하여 우리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와 다르게 현대국가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며 우리를 관리한다. 그 권력 아래서는 지배자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착취’가 작동한다.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 ‘나 자신’에 실망하고, 나보다 잘난 ‘타인’을 힐난하기만 한다.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분노를 잃었다. 정치적으로 직접 행동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관용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에서 신분제도와 외적인 통제는 없어졌지만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통제하는 덫에 갇히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말로 유한한 능력을 마치 무한한 능력처럼 착각하게 하고 끝없이 욕망을 확장시켜 결국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 없음’을 깨닫고 허무주의에 빠져버리기 쉽다. 우리가 맞서 야 할 것은, 성과사회의 끊임없는 자기착취와 현대인들의 ‘무기력함’이다. 무기력, 허무, 타인과의 비교 등 보이지 않는 권력이 우리를 통제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을 불러와야 하는 이유다. 19세기 아나키스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나’ 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저항하고 불복종했다. 그리고 ‘직접 행동’했다. 이들처럼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겼던 그들의 정신을 불러와, 보이지 않는 권력에 저항하고 분노해야 한다. 소중한 ‘삶’을 ‘생존’으로 만드는 정치권력에 분노하자. 그렇다면 아나키즘 정신으로 작금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아나키즘을 실천하기

뜨거운 감성과 냉철한 이성, 용기를 가진 21세기의 아나키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나=아나키스트=자유인’임을 기억하고, 행동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 바르는 시민다움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구조와 생산양식체계를 바꾸기 위한 볼셰비키 혁명은 폭력을 동반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했다. 시민다움의 정치는 폭력 그 자체에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폭력에 반대하여 폭력을 수반하는 거대담론의 정치가 아니라, 불공정한 제도를 ‘개인적 수준’으로 끌어들여 아나키즘을 실천해야 한다. 결코 정치참여나 사회운동을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하다 보면 조금씩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 일상적 실천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먼저 아나키 공동체와 본질이 같은 ‘연대’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나키 공동체는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작은 공동체다. 사회주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이 인류의 본능이라고 말한 상호부조와 같은 조직이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시민연대다. 여성운동, 노동조합 등 시민들끼리의 연대에 참여하면 삶 또한 진화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책에서 말한 우회 의제의 방식 중 하나인 문화예술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참된 인식으로 사회의 부당함을 진지하고 대담하게 묘사하려는 창작 방식은 가두 연단의 선동가가 보여주려는 가장 격렬한 장광설보다 더 큰 위협이자 보다 강력한 영감이 된다”고 말했다. 텍스트를 끊임 없이 쓰고, 읽고, 문학을 내 옆에 둠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찾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더 간단히 실천하는 방법도 있다. 공정무역 커피 소비, 채식하기, 퀴어 축제 참여하기 등 불공정한 제도를 자신의 삶에 끌어들여 작은 근육을 쓰자. 우리 몸의 작은 근육들이 모여 전체적인 몸매를 완성시키듯, 일상의 작은 실천들이 마침내 대의제라는 한계를 극복하여 원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개개인이 삶의 정치를 이루어 낼 때 우리는 최상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스트가 21세기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정신에 있다. 그들로부터 국가에 대해 분노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저항하며, 불복종의 용기를 배울 수 있다. 21세기 아나키스트가 되어 다시 한 번 ‘자유’를 외쳐야 한다. 우리 모두는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의 나’ 가 되어야 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근로자’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가 말한 작업과 행위를 하는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청춘들이 미래의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아나키스트의 정신과 열정에 가담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정수현

아나키스트와 안아키스트, 누가 더 위험한가?

아나키스트(anarchist)는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곧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사전은 이에 대해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란 단어를 접한 이들 가운데 영화 애호가들은 2000년 개봉작 <아나키스트>를 떠올릴 것이다. 일제 독립운동을 벌였던 무정부주의자들의 삶과 나라 사랑을 그린 이 영화에는 장동건, 김상중, 정준호, 이범수, 예지원 등 쟁쟁한 배우들이 열연했다. 특히 한명곤 역을 맡았던 김상중이 뱉었던 말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라는 대사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아나키스트란 말은 웬만한 상식을 지닌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그러면 안아키스트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만 아나키스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등장한 말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를 잘못 표기한 것은 아닐까라고 할 사람도 있겠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적, 극단적 자연주의 육아 신봉하는 안아키스트

안아키스트는 ‘약 안 쓰고 우리 아기 키우기’ 카페, 줄여서 ‘안아키’ 카페에 가입해 현대 의료를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자연주의 치료를 신봉하며 실천하는 사람, 주로 아이 엄마들을 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최근 이 카페에 대한 경찰 수사를 계기로 그 회원이 무려 6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최근 아동학대 방지 시민모임 대표가 ‘안아키’ 카페를 경찰에 아동학대 혐의 등으로 조사해줄 것을 요청해 안아키스트의 실체가 널리 대중에 널리 노출됐다. 아기가 고열이 나더라도 해열제를 사용하지 않고 의사도 찾지 않은 채 관장 등 자연 해열에 다걸기(올인)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뿐 아니라 항생제 사용도 거부하고 아토피 아이에게는 피부를 박박 긁어 무르게 만든 뒤 피부에 세균 감염이 일어나 딱지가 생기면 이를 벗겨내는 방식의 치료를 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얼마나 고통에 시달릴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비뚤어진 신념을 실천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한데 그 수가 무려 6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몇몇 철딱서니 없는 엄마들의 무지와 일그러진 행동 탓으로만 돌리기도 그렇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회원이 되었다면 우리 사회가 반성할 점은 없을까?

아나키스트와 안아키스트는 닮은 점이 꽤 있다. 아나키스트가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안아키스트는 기존의 현대 의학과 의료·의약 체계를 부정하고 의료에 대한 개인의 자유, 즉 내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신념을 우선 가치로 내세웠다. 정치·사회적 신념과 의료·의학 신념이란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안아키즘은 자생적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한 불량 건강 신념

안아키즘, 즉 현대 의료에 대한 극단적 부정 신념과 행동은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진 것인가? 다른 나라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가? 왜 이들은 이런 신념과 행동을 보이는 걸까? 안아키 카페는 경찰 수사를 계기로 폐쇄됐지만 이들의 신념과 행동마저 폐쇄된 것은 아니다. 문제 해결은 카페 폐쇄나 이들에 대한 행정처벌 내지 법적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바로 잡느냐에 달려 있다.

안아키스트들은 감염병 예방백신도 불신한다. 이는 외국에서 무분별하게 수입한 신념의 결과이다. 이미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도 예방백신은 외려 아이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의료행위라며 접종거부 운동이 우리나라에 앞서 벌어진 바 있다. 한국의 안아키즘은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품이면 통관 과정에서 차단하면 될 터이지만 정보와 신념은 차단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우리 사회에서도 한때 선진국이 겪었던 홍역을 그대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단적 사고방식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있어 왔고 또 있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하다. 이들은 정상적 시스템과 정상적 과학(의학)을 부정하는 비정상적 구성원들이다. 이들의 신념과 행위가 세를 불리지 못하고 소멸되도록 할 책무가 사회에 있다.

과학(의학)은 만능 아니라는 정상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비과학(의학)적 안아키스트들은 왜 생겨나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첫째, 이들은 현대 의학을 부정한다. 물론 완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팔이 부러지면 병원을 찾는다. 다시 말해 선택적으로 현대 의학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기준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질병을 예방·치료해주는 만능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부작용도 있고 맹점도 있고 한계도 있다. 암, 아토피 등 많은 질병들이 여전히 현대의학으로도 잘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들은 이를 과장·왜곡해 받아들인다.

이들은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많은 질병들이 화학물질이나 현대 과학기술 때문이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공이나 화학은 나쁜 것, 자연과 천연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아주 극단적으로 한다. 물론 이런 이분법은 있을 수 없고 비과학적이다.

이들은 우리 몸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약이든, 백신이든 외부에서 인공적인 물질이 들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병원미생물에 감염되게 하거나 인체 자가 치유에 더 기댄다. 이른바 어린이 수두 파티 등도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다.

극단적 사고를 해부해 아동 학대 하지 못하도록 해법 제시해야

안아키스트들은 위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매우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의 위험 인식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은 아주 드물게 쇼크 반응 등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어쩔 수 없는 극단적 예외로 받아들이는 반면 안아키스트들은 자신의 자녀가 금세라도 그 희생양이 될 것처럼 여긴다.

안아키 회원들은 자연치료나 자연주의 신봉자 가운데서도 극단적 부류이지만 준아나키스트들도 우리 사회에 많다. 이들은 언제든지 안아키스트가 될 수 있는 예비군들이다. 풍욕·죽염·사혈·숯 치료 등에 열광하거나 맹신하는 이들이 예비군인 셈이다.

안아키스트들은 자신들이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극단적 자연주의 육아와 현대 의학 거부 행위를 벌이고 있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인지를 이번 기회에 성찰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옳다고 여긴다면 자신과는 달리 대다수 부모들이 현대의료와 예방접종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될 터이다. 왜 그들은 안아키즘에 빠져들지 않는지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번에 ‘안아키’ 카페는 아동학대 혐의로 고발됐다. 안아키즘에 빠져든 이들은 질병과 현대 의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념 체계를 학대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와 전문가, 언론 등도 왜 이들이 이런 극단적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게 됐는가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해 사고와 행동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거 없는 지식을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연구를 바탕으로 더는 극단적 자연주의 육아가 우리 사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안아키’ 카페는 사라졌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지 알 수 없다. 안아키스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의 비뚤어진 의식 세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다른 형태의 ‘안아키’ 카페 내지 그들만의 소통망이 등장할 것이다. 공동체에서 안아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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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일제시기 원산지역 아나키즘 단체의 조직과 아나키스트들

1920년 설립된 원산청년회는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혼재되어 각 세력들 간에 경쟁과 분쟁이 있었지만, 상호 논의하고 협력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1925년에 들어서 원산청년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사회주의계열과 부르주아민족주의계열의 각축전은 더욱 심화되었고, 사회주의 각 정파들은 소규모 청년단체 및 사상단체의 결성을 위해 분투했다. 아나키즘 진영은 원산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원산노동청년회나 원산청년연합회 등의 결성 시 서울계 공산주의자들과 공조했다. 1926년 11월 발표된 정우회선언과 방향전환론은 원산지역 운동계에 큰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기존 청년단체 해체와 원산청년동맹 결성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단체로 1927년 4월 本能兒聯盟을 결성했다. 그 강령에 ‘정치적 중앙집권주의를 배격하며 지방분권적 자유연맹주의를 주창한다’라고 명시한 것은 공산주의계열에 의한 중앙으로부터의 하향식 운동방침 전달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지역운동의 혼란에 대한 저항과 대안의 메시지였다. 원산지역 아나키즘운동은 특히 재일조선인 아나키즘진영과 인적 조직적으로 교류하며 큰 영향을 받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사회경제적 입지 면에서 지역 토착 유지인 有産者와 화전민ㆍ노동자 등 이주한 無産者 부류로 크게 격차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입지는 戰時期 민족해방운동의 침체와 자의적 타의적 대일협력 과정을 거치면서 해방 후 친일파 청산과 같은 사안에서 입장이 분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Since there was a mix of various ideologies such as communism, anarchism, and nationalism in the Wonsan Young Men’s Association, founded in 1920, there were competition and disputes among forces, and yet, they were in mutual discussion and cooperation. However, in 1925, the heated competition between the socialist line and the bourgeois nationalist line, surrounding the initiative of the Wonsan Young Men’s Association deepened, and each of the socialist factions exerted themselves to organize small youth groups and ideological groups. The anarchist camp cooperated with Seoul-pa communists in organizing groups like the Wonsan Labor Youth Association or the Wonsan Youth Association, acting with the Wonsan Young Men’s Association as the center. The Declaration of Jeongwoohoe(政友會) and the Theory of direction conversion announced in November 1926 brought about huge diastrophism in the field of movement in the Wonsan area. The anarchists opposed the communists’ calls for the dissolution of the existing youth group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Wonsan Youth Alliance and organized Bonneunga Yeonmaeng (本能兒聯盟) as their own organization in April 1927. ​Its doctrine states the following: “We reject political centralism and advocate a decentralized liberal federation.” It was a message of resistance and alternative to the top-down delivery of the movement policy from the center by the communist line and confusion in the regional movement derived from this. The anarchist movement in the Wonsan area was greatly affected, especially, making personal and organizational exchanges with the anarchist group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There was a large gap between the bourgeoisie, who were indigenous community leaders and the proletariat, who were migrant slash-and-burn farmers and workers among the anarchists in terms of socioeconomic position. This socioeconomic position might act as a factor that divided positions in clearing the pro-Japanese group after liberation, going through the stagnation of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and the process of cooperation with Japan voluntarily or against their will during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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