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금융 위기 | 국뽕없이 보는 Imf 외환위기 사태 최근 답변 16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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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 위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시아 금융 위기( – 金融危機)는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한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온 일련의 금융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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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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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 – 나무위키:대문

1997년부터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외환 유동성 위기를 통칭하는 말.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김영삼 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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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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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높은 외환보유고, 금융위기의 새로운 씨앗? | 나라경제

해외언론들은 이러한 막대한 외환보유고 축적의 원인을 아시아 국가들이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낮추어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외환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달러를 대거 매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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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iec.kdi.re.kr

Date Published: 8/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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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시아 금융위기가 걱정인 이유 정인설의 워싱턴나우

금리 오르면 빚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저개발국 위험 ‘빅테크’ 실적이 ‘빅스텝’ 인상을 이길까 / 美 증시 주간전망. 다시 아시아 금융위기가 걱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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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1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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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달러 강세 아시아 금융위기 야기할 것 | 한경닷컴 – 한국경제

“미 달러 강세, 아시아 금융위기 야기할 것”,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 밝혀 엔화 가치 하락, 위안화 가치 하락 유발 엔화 환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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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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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위기의 전파과정 · 아시아적 스케일에서 본 1997년 위기

제 1단계에서는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 위기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주변의 동남아 국가로 전염된 단계다. 태국이 환율방어를 포기하고 자유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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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97imf.kr

Date Published: 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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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불러온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

태국 고정환율제도 하의 바트화의 몰락과 아시아 금융위기. 바트화에 대한 공격, 즉 달러 매수와 바트화 매도 포지션의 확대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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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bzine.securities.miraeasset.com

Date Published: 6/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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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정리]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과 함의

일반사람들은 ‘1997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IMF 사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호칭일뿐더러 1997년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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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oohyeon.com

Date Published: 8/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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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대 동남아시아 정책 연구

태국의 바트화 폭락으로 발생된 아시아 금융위기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경제,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는 달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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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pository.hanyang.ac.kr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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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동아시아 금융 거버넌스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 1. I. 서론. 1997-8 년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불과 10 년 만인 2008 년 다. 시 글로벌 금융위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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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ai.or.kr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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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없이 보는 IMF 외환위기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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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시아 금융 위기

  • Author: 지식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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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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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국가

아시아 금융 위기( – 金融危機)는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한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온 일련의 금융위기사태를 말한다.

영향을 받은 국가들 [ 편집 ]

대한민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입니다.

1997년 한보철강이 5조 원의 경비가 드는 제철소를 4조 원의 빚으로 건설하려다 부도를 일으켰다. 이를 필두로 기아그룹, 한신공영 등 대기업들이 연쇄부도를 일으켰다. 급기야 같은 해 12월에는 환율이 1달러 당 2천원으로 폭등하여 대한민국의 국가 파산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 뇌물을 바치고 정치권이 은행대출을 주선하는 이른바 정경유착·관치금융에 대한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국가경제가 파산에 이르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 1997년 12월 3일부터 IMF체제가 시작되었다.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업자와 문을 닫은 공장이 속출했고 다음해인 1998년에는 대량실업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대한민국은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은지 3년 8개월이 지난 2001년 8월 23일, 1억 4천만 달러를 상환함으로써 IMF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경제 불황은 지속되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카드대란을 겪는 등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 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 편집 ]

수하르토의 몰락 : 1998년 5월 21일 사임하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모습.

1997년 6월,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태국과 달리 낮은 인플레이션과 9억 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흑자, 2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와 은행분야의 선방을 보이며 위기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지만 사실 인도네시아의 수 많은 회사들이 미국 달러를 빌리고 있었다. 1997년부터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달러에 비해 강세를 띄면서 달러를 빌린 회사들에게 부채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를 주었다.

1997년 7월, 태국이 태국 밧의 고정환율을 폐지하자 인도네시아의 재정부는 루피아의 변동 제한폭을 8%에서 12%로 확대시켰다. 1997년 8월 루피아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1997년 8월 14일 당국에 의해 루피아의 변동 제한폭이 사라지자 루피아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IMF는 230 달러 규모의 긴급구제금융 방안을 가져왔으나 루피아는 회사들의 부채와 루피아의 대량 매도, 달러에 대한 수요 폭증으로 급락을 지속했다. 같은 해 9월, 루피아와 자카르타 증권거래소의 지수는 역사적인 최저점을 찍었다. 무디스는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장기채권을 “정크 본드”로 평가절하했다.[1]

그 해 인도네시아는 GDP 전체의 13.5%를 상실했다.

태국 [ 편집 ]

1985년부터 1996년까지 태국의 경제는 매년 평균적으로 9%씩 성장했는데 이는 당시 그 어떤 나라들보다도 높았으며, 인플레이션은 3.4에서 5.7%의 낮은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2] 바트화는 당시 25바트가 1달러로 고정되어 있었다.

1997년 5월 14일과 15일, 태국 밧은 대규모 투기 공격을 받았다. 1997년 6월 30일, 당시 태국의 장관 차왈릿 용차이윳은 태국 밧을 평가절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국은 태국 밧-달러의 고정환율제를 유지할 외환보유금이 부족했고, 태국 정부는 결과적으로 태국 밧의 가치 변동을 강제하고, 1997년 7월 2일에는 태국 밧의 가치가 외환시장에 의해 결정되도록 허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연쇄적으로 여러 사건들의 핵심 연결고리가 되어 지역적 금융위기로 치닫는 원인이 되었다.[3]

금융, 부동산과 건설 분야에서 대량 해고가 진행되어 태국의 고성장은 중단되었고, 이는 수 많은 노동자들이 지방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6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4] 태국 밧은 급격하게 평가절하되고 50% 이상의 가치를 잃었다. 1998년 1월 태국 밧은 56밧이 1달러로 환율의 최고점을 찍었다. 태국 주식 시장은 75% 하락했다. 금융면에서는 당시까지 태국의 최대의 금융 회사였던 “Finance One”이 도산했다.[5]

1997년 8월 11일, IMF는 태국에 대한 170억 달러 규모의 금융지원 방안을 공개했는데, 이는 파산절차 관련법(재조직과 구조재편)의 통과와 은행 및 금융기관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체제의 신설을 포함했다. 1997년 8월 20일, IMF는 태국에 대한 29억 달러 규모의 또다른 긴급구제 지원 패키지를 승인했다.

경제 위기로 인하여 근로자의 채용과 임금, 복지가 모두 줄면서 결과적으로 빈곤율과 빈부격차가 증가했다.[6]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북동부 지방의 수입은 1998년부터 2006년까지 46% 증가했다.[7] 전국적인 빈곤율은 21.3%에서 11.3%로 감소했다.[8] 금융위기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계속 상승했던 태국의 지니계수는 2000년 .525에서 2004년 .499로 낮아졌다.[9]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 편집 ]

다시 아시아 금융위기가 걱정인 이유 [정인설의 워싱턴나우]

금리 오르면 빚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저개발국 위험

‘빅테크’ 실적이 ‘빅스텝’ 인상을 이길까 / 美 증시 주간전망

‘빅스텝’으로 저개발국들의 줄부도?

중국 이어 미국도 ‘성장률 쇼크’?

Fed도 물가 참고지표 바꿔야 하나

‘빅테크’가 ‘빅스텝’을 이길까

미국 증시가 한 달 가까이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다우지수는 4주 연속, S&P지수와 나스닥 지수는 3주째 내리막입니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만들어 낸 합작품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 봉쇄령에 미국의 긴축이 더해지면서 글로벌 증시를 혼수상태에 빠뜨렸습니다.특히 지난주엔 파월 의장을 비롯한 Fed 인사들의 난도질이 가장 컸습니다. 50bp(1bp=0.01%포인트) 정도의 ‘빅 스텝’ 인상을 뛰어넘은 75bp의 ‘자이언트 스텝’ 인상을 얘기했습니다. 5월 빅스텝을 기정사실화하고 3번 내리 50bp 올리겠다는 ‘트리플 빅스텝’까지 거론했습니다. 금리 초민감주인 기술주들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이번주엔 초우량 기술주가 늪에 빠진 미국 증시 구하기에 나섭니다. 구독자 급감으로 시장에 충격을 준 ‘넷플릭스 쇼크’를 만회하기 위해 강타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입니다.’빅테크’가 대표주자입니다. 과연 ‘빅테크’가 ‘빅스텝’을 이길 수 있을까요. 다시빅테크의 어닝 서프라이즈가 빅스텝 쇼크를 잠재울 수 있을까가 관심입니다.둘째 관전포인트는 성장과 물가의 싸움입니다. 복합적인 이유로 성장률은 추락하고 물가는 치솟고 있습니다. 그 흐름의 끝은 어디일까요. 언제 정점을 찍고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번 주에 나오는 미국과 유럽의 1분기 성장률과 미국의 3월 개인소비지출(PCE)이 그 단서를 보여줄 전망입니다.셋째, 증시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기승전 우크라이나’입니다. 러시아가 벌인 참극 탓에 우크라이나 동부는 끔찍하지만 서부는 미국 국무장관이 방문할 정도로 나아졌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이 공존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변함없는 관심사입니다.파월 의장이 다음달 FOMC에서 기준금리를 50bp(1bp=0.01%포인트)를 올려야 한다는 ‘빅스텝’ 인상을 공식화했습니다. 나아가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 연달아 50bp를 인상할 것’이라는 시장 예상에도 공감을 표했습니다.앞서 올해 FOMC 표결권을 보유한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 총재는 50 bp가 아니라 75bp 인상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놨습니다. 벌써부터 금리 선물시장에선 6월 FOMC에서 75bp를 올릴 확률을 91%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무조건 빅스텝을 외치고 있지만 금리 과속으로 일어날 부작용들을 생각해볼 때입니다.먼저 저성장입니다. 금리를 올리면 시중 돈이 마릅니다. 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둘째는 부채 위기입니다. 가계 기업할 것 없이 빚부담에 허덕이고 정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국에선 가계가 가장 문제고 미국에선 정부가 제일 심각합니다. 한국의 가계부채, 미국의 정부부채는 금리 급등 시대의 골칫거리입니다.셋째는 저개발국 또는 신흥국의 위기입니다. 긴축 시대엔 돈은 안전자산과 선진국으로 몰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과속은 신흥국보다 미국 금리가 더 높은 ‘금리역전’ 현상을 야기합니다. 신흥국 증시에서 돈이 빠지는 ‘엑소더스’가 일어날 게 명약관화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달러가치가 상승해 신흥국의 환율도 엉망이 됩니다.이렇게 되면 금융시장이 취약한 신흥국들은 속수무책입니다. 게다가 저개발국들은 중국과 미국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돈을 못갚고 있는 저개발국들이 부지기수인데 금리가 오르면 아예 디폴트(채무불이행)나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이 선언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몰려 있는 저개발국들이 대표적입니다.그들의 최대 채권국은 중국이어서 봉쇄령과 수출 부진으로 삐끗하고 있는 중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줍니다. 이렇게 되면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가 재연될 수도 있습니다.그럼에도 금리를 올리겠다는 것은 당연히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월가는 3월이 미국 인플레이션 정점으로 기대했지만 파월 의장은 ‘3월 정점론’을 부정했습니다.국제통화기금(IMF)도 파월 주장에 동조했습니다. IMF는 2분기나 3분기까지 물가 상승률이 계속 높아질 것으로 봤습니다.결국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장과 인플레의 앙숙 관계 일단을 이번주 후반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28일에 미국 1분기 경제성장률(GDP) 속보치가 발표됩니다. 미국의 성장률은 속보치와 잠정치, 확정치로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 연율로 환산한 미국의 1분기 성장률 전망치는 0.8~1.1%로 지난해 4분기 기록한 6.9%에서 크게 둔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코로나19발 인플레이션에 우크라이나발 위기가 겹친 탓입니다.다음날엔 유럽연합(EU)도 1분기 성장률을 내놓습니다. 미국은 그나마 낫지만 유럽이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시장에선 EU의 1분기 성장률 전망치가 4.8~5.1%로 직전인 지난해 4분기(4.6%)보다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가 완전히 반영된 2분기엔 더 심각해질 수 공산이 큽니다. 중국에 이어 미국 유럽도 저성장에 본격적으로 접어들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습니다.같은날 Fed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3월 PCE 물가가 나옵니다. 앞서 이달 초 나온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8.5% 상승으로 41년만의 최고치를 기록하며 시장에 충격을 줬습니다.PCE는 다소 애매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시장은 보고 있습니다. 3월 헤드라인 PCE는 6.8% 안팎의 상승으로 2월(6.4%)보다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반면 에너지와 식품을 뺀 3월 근원 PCE는 전월 대비 0.3%, 전년 대비 5.3%로 2월(각각 0.4%, 5.4%)보다 낮아질 것으로 월가는 예상하고 있습니다.만약 이렇게 나온다면 ‘3월 물가 정점’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착시가 있습니다. 현재 인플레이션의 주범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국제유가와 곡물가 상승입니다. 근원 PCE엔 이 주범들이 빠져 있습니다.그동안 Fed가 가장 눈여겨 봐 왔던 게 근원 PCE입니다. 이 때문에 ‘푸틴발 인플레이션’과 ‘시진핑발 인플레이션’가 겹친 현 시점에서 근원 PCE를 핵심 지표로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습니다.현 시점이 인플레이션의 정점인 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주가 어닝시즌의 절정인 것만은 분명합니다.S&P500 지수를 구성하는 종목 중 160개 기업 가량이 이번 주에 실적을 내놓습니다. 이 가운데 애플 아마존 알파벳(구글)로 대표되는 ‘트리플 A’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더블 M’가 무너진 빅테크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지 주목됩니다.경기재개(리오프닝) 관련주인 음료와 자동차의 양대산맥 기업들도 어두운 증시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을까가 관심입니다.우선 최고의 A매치 데이는 26일 화요일과 28일 목요일이 꼽힙니다. 26일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가 실적을 공개합니다. 28일은 애플과 아마존, 인텔, 트위터 외에 로빈후드와 마스터카드 등도 실적을 발표합니다.이밖에 오래된 경쟁 관계인 GM(26일)과 포드(27일), 코카콜라(25일)와 펩시코(26일), 비자카드(26일)와 마스터카드(28일), 엑손모빌과 쉐브런(이상 29일) 등도 실적을 내놓습니다.결국 이번 주는 실적 및 경제 지표 발표가 몰려 있는 26일과 28일, 29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승부처에서 ‘빅테크’가 ‘빅스텝’을 이겨내느냐, 성장이 물가의 견제를 극복하느냐, 우크라이나에서 희소식을 전할 수 있느냐에 따라 증시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세 가지 전쟁에서 1승만 거둬도 증시 분위기는 바뀔 수 있는 만큼 시장을 열심히 지켜봐야겠습니다.워싱턴=정인설 특파원 [email protected]

“미 달러 강세, 아시아 금융위기 야기할 것”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 밝혀

엔화 가치 하락, 위안화 가치 하락 유발

엔화 환율, 달러당 150엔 상승하면 도미노 절하 가능성

“미국의 달러 강세가 다시 아시아 경제위기를 야기할지 모른다.”

전 골드만삭스의 이코노미스트인 짐 오닐(Jim O’Neill)의 말이다. 오닐은 신흥 경제대국을 의미하는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오닐은 9일(현지시간) 블룸버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엔화 환율이 달러당 150엔으로 상승(엔화가치 하락)하면 달러가 새로운 아시아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달러화 가치는 최근 미 중앙은행(Fed)이 공격적인 속도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엔화 가치는 달러당 134엔으로 떨어졌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따라 잇달아 기준금리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이와는 반대로 느슨한 통화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미스터 엔’으로 불렸던 전직 일본 관료 사카키바라 아이스케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엔화 가치가 계속 약세를 보이면 중국 당국은 경쟁력 유지를 위해 위안화 절하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같은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오닐은 밝혔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는 태국 바트화 가치의 폭락과 함께 시작됐었다. 우리나라는 외화유동성 부족으로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

오닐은 “엔화 가치가 계속 약세를 보이면 중국은 이를 불공정 경쟁 우위로 간주할 것이며, 이는 명백히 아시아 외환위기때와 유사하다”며 “중국은 이런 통화의 황폐화가 경제를 위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오닐은 일본은행이 경제학자들이 매우 느슨한 형태의 통화정책으로 보는 수익률곡선 통제, 즉 일본 국채의 수익률을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을 고수한다고 가정할 때, 달러의 강세는 베이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이자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의 전 의장인 오닐은 2013년 골드만삭스를 떠났고, 이후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인 채텀하우스의 선임 고문이 됐다.

강현철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1997년 위기의 전파과정 · 아시아적 스케일에서 본 1997년 위기 · 1997 외환위기아카이브

1997년, 위기의 전파과정

최두열(1998)은 아시아 통화위기를 전개과정에 따라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 1단계에서는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 위기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주변의 동남아 국가로 전염된 단계다. 태국이 환율방어를 포기하고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한 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같은 길을 따르게 되었다. 제 2단계는 동남아 통화위기가 동북 아로 전염되는 단계다. 대만의 뉴타이완달러(NTD)가 공격을 받자, 이미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던 대만 중앙은행은 환율방어를 쉽게 포기하였다. 이어서 홍콩이 공격을 받고 홍콩 증시가 폭락하는데, 이로 인해 홍콩발 단기부채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한국에 불이 붙게 된다. 제 3단계는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등이 통화위기에서 탈출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가 위기의 중심이 된 단계다. 제 4단계는 아시아 지역의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파급되는 단계다. 아시아 지역의 경기침체와 더불어, 이들 지역에 자연자원을 공급하며 수출의존도가 높던 러시아와 남미지역의 무역수지가 악화된다. 이는 다시금 국제투자가들의 자금도피를 일으켰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다. 위기는 동유럽 및 남미로 확산되고,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지게 된다.

먼저 통화위기의 시발점이 된 태국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기업이 동남아에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특히 오랜 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 1992년 연립정권을 수립한 태국은 자본자유화 조치를 확대하였다. 외국인투자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실시하고, 외환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역외금융시장(BIBF)을 설립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본의 경기침체 등으로 인한 금리하향 추세 속에서 외국자본이 대량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기에 수익성을 올릴 수 있는 주식시장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버블을 형성시켰다. 새로운 자산스톡을 증가시키기보다는 기존 자산의 가격만을 상승시킨 것이다. 버블을 잡기 위해 태국 정부가 규제를 시도하자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지만, 부동산 기업의 파산, 관련 금융 기관의 부실화, 외국자본 유입 감소가 이어지며 금융시장의 불안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점차 바트화가 고평가 되어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태국 당국은 자본통제와 주변국과의 협조를 통해 96년 12월, 97년 2월, 97년 5월 세차례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점차 고갈되는 외환보유고를 버티지 못하고 7월 변동환율제로 이행한다.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으로 인해 그동안 환율 리스크에 대비할 필요가 없던 민간기업이나 은행들은 급하게 환율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우산을 찾게 된다. 통화스왑이 나 외화선물거래 등을 통해 환율변동의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달러수요를 증가시켜 환율붕괴를 가속화시 켰다. 결국 8월 11일, IMF와의 협상을 통해 172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협약하는 한편, 금융재건청(FRA)과 자산관리 공사(AMC) 설립하여 채권 중심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한편 말레이시아는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보다 이른 1980년대 후반부터 자본자유화와 금융자유화를 추진해왔고, 고정환율제를 기반으로 FDI를 유치하는데 힘쓰고 있었다. 또한 1985년경 일찌감치 부동산 불황과 은행부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보다 강화된 감독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이나 재정적자 비율 등 거시지표도 건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역시 태국과 마찬가지로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있었고, 1990년대 중반 유동성 과잉을 바탕으로 부동산 경기 과열과 경상수지 적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투자붐은 건축 및 부동산 등에 집중되었고, 거대한 인프라투자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되었다. 1997년 5월부터는 태국발 통화불안의 불씨가 옮겨붙게 된다. 당시 마하티르 총리는 수차례에 걸쳐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국제적 투기세력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비난 이후 ‘시장감정’의 악화로 인해 외환과 주식시장이 불안한 상태를 지속했다. 당국은 투기적 공격에 대해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면서도 링기트화를 절하하는 것으로 맞섰다. 링기트화의 불안은 지속되었지만, 말레이시아는 IMF 구제금융신청을 거부했다. IMF에게 해결을 맡기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선택지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해법은 IMF 및 서구 국가들의 권고와는 반대로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투자된 지 1년이 되지 않은 외국계 자본의 해외반출을 금지했고, 수출대금을 모두 중앙은행에 맡긴 뒤 실수효 증명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만 외화를 바꿔줬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투자자금은 규제하지 않는 한편, 자국민의 해외송금 및 해외투자 규모를 제한했다. 통화제도의 측면에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한편, 링기트화의 해외거래를 금지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말레이시아의 고강도 외환정책에 대해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외환시장은 5개월 만에 안정세를 되찾았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2001년 5월 자본통제를 전면 해제했다. 무디스는 99년 4월 말레이시아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했고, IMF도 말레이시아의 정책이 유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환율제도 측면에서 인도네시아는 태국, 말레이시아와 달리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통화제도를 비교적 탄력적이면서도 예측가능하게 운용하고 있었고, 경상수지를 비롯한 경제지표들은 건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태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서 인도네시아 역시 영향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7월 공격이 시작되자, 당국은 일일변동제한폭을 8%에서 12%로 확대 하였으나, 투기자본이 루피아화를 집중공격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변동제한폭의 상한선을 돌파하게 된다. 8월 14일 당국은 자유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발표하였고, 태국과 마찬가지로 민간부문 외채와 환리스크 헤지수요로 인해 절하압력이 배가되었다.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한 인도네시아는 10월 30일 IMF와의 협상을 타결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환율은 폭등하였고, 1월 20일 수하르토의 대선출마(7선 연임) 선언 이후 더욱 폭락하게 된다. 환율폭등으로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현상이 나타났으며,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는 통화위원회를 설치해 자본통제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미국와 IMF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5월 4일 IMF 합의에 따라 연료비, 전기료, 교통요금 등 생필품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철폐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이는 결국 1967년부터 인도네시아를 철권 통치해온 수하르토가 대통력직에서 하야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위기는 필리핀으로 옮겨붙었다. 국제 외환투기자들은 태국을 공격한 다음 필리핀 페소화를 공격했고, 필리핀 중앙은행은 페소화 폭락 열흘만에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1997년 하반기에 페소화는 달러 대비 30%나 하락했고, 주가도 연초대비 35% 떨어졌다. 국제 투자자들은 필리핀을 인도네시아나 태국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범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가 국제 자본과 대결을 벌일 때 필리핀 은행들이 불만을 터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필리핀은 비교적 적은 타격을 받고 1997년을 넘길 수 있었다. 이미 필리핀은 1980년대에 사실상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져 IMF의 관리를 받고, 산업정책의 포 기와 상품·금융시장 개방 등의 조치를 실행해오고 있었다. 필리핀 국민들은 사실상 내핍을 강요받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덕에 버블의 전파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7월 2일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자, 필리핀은 가장 먼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규모는 10억 달러로,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신청한 금액보다 훨씬 적었다. IMF는 필리핀이 요구한 구제금융을 즉각 지원했다. 필리핀에 대한 IMF 구제금융은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멕시코 페소화 위기 이후 IMF가 통화 위기에 처한 나라에 구제금융을 재개한 첫 케이스였다. 필리핀은 원래 1997년 7월 23일로 수십 년간의 IMF 간섭으로부터 졸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서 발원한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치자 필리핀은 IMF 졸업일을 연기 하면서 IMF의 보호막을 이용했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휩쓴 외환위기는 대만으로 북상하게 되었다. 7월 28일 대만 중앙은행은 타이완달러의 약간의 절하를 용인하였고, 이후 시장개입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불안이 지속되자 10월 17일 시장개입 중단을 선언한다. 태국 사태 이후 홍콩 역시 대규모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만 중앙은행이 타이완달러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자, 10월 20일부터 홍콩달러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홍콩 당국은 홍콩달러 차입에 필요한 오버나이트 금리 인상으로 맞섰지만, 이는 약 열흘간 이어진 홍콩 주가의 하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홍콩의 주식 및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지자, 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국제 투자자본의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폴 등 중화권 경제들은 1997년 위기에서 비교적 약한 충격을 받고 지나갈 수 있었다. 대만의 경우, 중소기업 중심의 유연하고 효율적인 유연생산체제, 막대한 외환보유고와 자본수출국으로서의 위치, 이와 연관된 정부와 기업의 낮은 대외부채, NTD의 조 속한 평가절하 등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성장률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은 사실상 위기의 영향을 벗어나있었다. 풍부한 무역 흑자와 외환보유고, 금융자유화 및 외국은행의 영향을 차단한 방어벽, 환율과 신용에 대한 부분적인 통제경제, 여전히 내향적 성격이 강한 경제 등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외국자본과 연결된 국제신탁투자공사(ITICS)들이 위기를 겪거나 도산했지만, 경제 전체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위안화 절하에 대한 압박에 불구하고 확장적인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 으로 경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대만이나 중국의 사례에서는 모두 금융제도를 규율할 수 있는 정부역량이 두드러진다. 홍콩은 대만이나 중국에 비해 훨씬 강한 압력을 받았지만, 금리인상을 통해 고정환율제도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배경에는 막 대한 외환보유고와 타이트한 금융감독,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과 나머지 세계를 있는 산업·금융·상업 허브로서의 역량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중화권 국가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이들은 IMF 체제 바깥에서 비시장적 개입을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국제자본이 홍콩에서 철수하자, 홍콩 자금시장으로부터 외환조달 의존도가 높고 단기외채 비중이 높은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들의 외채연장률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한국에 불이 옮겨붙는다. 이미 한국은 1997년 초 한보, 삼미, 진로, 대농, 기아 등 재벌 기업들의 연쇄도산과 함께 신인도의 하락을 겪고 있었다. 10월 22일 기아의 공기업화 방침 발표, 23일 홍콩 주가폭락, 24일 S&P의 신용평가 하락과 더불어 한국은 본격적인 외환위기로 접어들게 된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1993년 이후 한국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과 마찬가지로 급격히 국제금융시장에 편입되어 유동성 과잉을 겪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UR 협상 및 OECD 가입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국제경쟁 격화로 인한 수출품 가격 하락, 자본유입에 따른 원화 고평가가 겹치며 수출부진이 심화되고, 기업 현금흐름의 이상은 금융부문의 부실로 전파되고 있던 상황에서 통화위기로 인한 충격은 위기를 전면적인 위기로 발전시켰다.

IMF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위기의 해결 과정은 IMF가 설립이래 표면적으로 내세워왔던 순수한 기술적 해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IMF는 자금 지원의 ‘조건’으로서 거버넌스의 개혁을 요구했다. IMF의 구조개혁은 아시아의 금융시스템을 보다 서구적으로 만드는 한편, 자본계정 자유화, 무역 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했다. IMF가 요구한 긴축정책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데 아시아의 금융시스템을 서구적인 시스템으로, 즉 고부채에서 저부채 모델로 변형시키려면 이미 쌓여 버린 부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로버트 웨이드는 역사적으로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네가지 방법으로 인플레이션, 파산, 상환, 출자전환이 있었다고 한다면, IMF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을 강제했다고 평가한다 (Wade&Veneroso, 1998). 그러나 IMF가 내세운 반부패와 정경유착 철폐, 선진화 등은 매력적인 슬로건이었고, IMF가 제시한 중장기적인 제도개혁의 과제들은 IMF에 의한 ‘외압’ 뿐만 아니라 국내 다양한 세력들의 지지에 힘입어 추진되었다.

위기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사회적 위기와 국내정치적 변동이 이어졌다. 제도적 유산, 발전단계, 지리경제적 조건, 국내정치적 조건 등에 따라 위기의 처리방식과 효과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국가들이 한국과 같은 ‘IMF 모범생’은 아니었고, IMF가 내세운 해법이 유일한 것도 아니었다.

미래에셋증권 웹진

안녕하세요, 미래에셋대우인 여러분! 지난번에는 투기자본의 동남아시아 상륙과 아시아 금융위기 진원지로 지목된 태국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았는데 기억나시나요? 이번에는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태국 고정환율제도 하의 바트화의 몰락과 아시아 금융위기 바트화에 대한 공격, 즉 달러 매수와 바트화 매도 포지션의 확대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입니다. 이후 태국의 위기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되는데요. 바트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와중에도 태국 정부는 환율 문제보다 먼저 당시 만연한 불경기를 잡기 위해 재정정책에 나서 경기 부양에 나서려는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고정환율제가 이용되는 상태에서 바트화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외환보유고를 적정수준 유지하는 등 긴축 정책이 필요했는데요. 태국 정부가 오히려 국고를 유출시키려는 행동에 나서면서 태국 정부의 신뢰도는 하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데는 태국 정부의 오판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실제로 태국 정부는 1996~1997년 초까지만 해도 이번 사태가 금융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었답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 하지만 태국 경제 자체의 리스크가 심화됨에 따라 환 투기가 계속되면서 민간 외환보유고는 이미 예전에 바닥난 상태였지요. 이를 깨닫게 된 태국 정부는 정부의 외환보유고로 바트화의 가치하락을 막겠다고 결심합니다. 실제로 1997년 금융기관들의 부실, 경제지표의 부진, 바트화의 평가절하가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외국인들은 달러를 사고 바트화를 공매도하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태국 정부는 국가 외환보유고를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서게 됩니다. 이 덕분에 태국 바트화는 1997년 3~4월까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렇지만 1997년 5월에 이르러 바트화는 슬슬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태국 정부에서는 바트화의 평가절하에 동의하지 않던 재무장관에 대한 교체설이 돌기 시작했는데요. 이 시기에 맞춰 투기 세력들의 바트화 공매도-달러 매입이 대폭 강화됩니다. 이에 대한 환율방어로 인해 무려 200억 달러 가까운 외환보유고가 몇 달 만에 증발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1997년 연초 459억 달러에 달했던 태국의 외환보유고는 25억 달러 수준으로 급감했고, 결국 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선언합니다.

아시아 전 지역으로 금융위기의 확대되다:

말레이시아 외환위기의 경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 태국의 금융위기는 앞에서 말했듯이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태국이 금융위기의 첫 희생양이 된 이후, 나머지 동남아 지역까지 금융위기가 전이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도 피해를 입게 되는데요. 그 중의 대표가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우선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 상황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태국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말레이시아부터 살펴볼까요? 말레이시아 역시 경제 펀더멘털을 좋은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의 빠른 성장으로 말레이시아는 10년째 연 9%대의 고속성장을 거듭하는 등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실제 말레이시아 정부를 이끌던 마히티르 수상은 ‘비전 2020’을 외치면서 반드시 2020년에 선진국가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힙니다. 하지만 태국과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도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연평균 9% 대의 고속성장을 10년 간 반복하면서 말레이시아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큰 빈부격차 등 여러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국이 겪었던 것처럼 말레이시아 역시 불황을 경험했습니다. 1995년에는 GDP의 8%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이 커졌지요. 결국 태국 바트화에 이어 말레이시아의 링깃화 역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정환율 체제에서 링깃화의 가격은 1996년 7월 이전까지만 해도 1달러 2.5 링깃화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요. 이후 환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링깃화의 가치가 1달러에 4.5 링깃 수준까지 하락하게 됩니다. 즉, 무려 80% 이상 말레이시아의 통화 가치가 급락한 것입니다. 이에 말레이시아의 화폐가치가 급락하고 외국인들이 자본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덩달아 주식시장도 크게 흔들립니다. 이 때문에 당시 엉망이 된 말레이사의 경제를 두고 말레이시아 마히티르 총리가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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