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아타리 쇼크 –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maxfit.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maxfit.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와빌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967,957회 및 좋아요 7,386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아타리 쇼크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 아타리 쇼크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2016.09.15 15:33
2:56에서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2600을 개발합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마그나복스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1972)’입니다.
아타리 2600(1977)의 경우는 ‘카트리지 교환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라고 하네요. 정확히 조사한뒤 말씀드려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사랑니가 나려는지…아프네요;;
ps. 댓글 확인
아타리 쇼크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 위키백과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영어: North American veo game crash of 1983), 또는 아타리 쇼크(영어: Atari Shock, 일본어: アタリショック)는 1982년 연말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25/2022
View: 9585
09화 게임 멸망 ‘아타리 쇼크’는 왜 벌어졌을까? – 브런치
이 사태가 바로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으로 불리는 ‘아타리 쇼크'(ATARI Shock)다. 게임 회사 아타리는 1972년 6월 놀런 부슈널에 의해 설립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2/15/2022
View: 4559
세계 최초 게임기 ‘아타리’는 왜 망했을까 [임주형의 테크토크]
세계 최초 가정용 콘솔 게임기 ‘아타리 2600’ 카트리지 교체해 다양한 게임 지원한 최초 게임기 … 게임 품질 관리 실패해 ‘아타리 쇼크’ 이어져.
Source: www.asiae.co.kr
Date Published: 8/20/2022
View: 8236
[시사금융용어] 아타리 쇼크 – 연합인포맥스
아타리 쇼크는 1983년 미국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2600이 수준 낮은 게임을 계속 발매하면서 소비자가 떠나가고 북미 게임 시장이 침체기에 …
Source: news.einfomax.co.kr
Date Published: 3/26/2021
View: 8174
아타리 쇼크 – 리브레 위키
아타리 쇼크(Atari Shock)는 1983년부터 1985년에 걸쳐 점점 낮아지는 게임 퀄리티에 대중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북미 게임 시장에 몰락을 가져온 …
Source: librewiki.net
Date Published: 10/14/2021
View: 5803
[꿀딴지곰 겜덕연구소] 게임 역사상 최악의 사건?! 콘솔계의 지각 …
조기자님이야 아주 잘 아시겠지만, 아타리쇼크를 어렴풋이 알지만 자세히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거든요. 그리고 만약 아타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한 …
Source: game.donga.com
Date Published: 8/3/2022
View: 1058
[기자수첩] 한국판 ‘아타리 쇼크’ 올까 – 글로벌경제신문
아타리쇼크는 게임 산업의 몰락을 일컫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북미 게임사 아타리는 1970년 세계 최초로 가정용 게임기 기기를 내놓으면서 비디오 …
Source: www.getnews.co.kr
Date Published: 12/3/2021
View: 3481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아타리 쇼크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https://i.ytimg.com/vi/vXsNQbkIUJY/maxresdefault.jpg)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타리 쇼크
- Author: 와빌
- Views: 조회수 967,957회
- Likes: 좋아요 7,386개
- Date Published: 2016. 9. 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XsNQbkIUJY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영어: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 또는 아타리 쇼크(영어: Atari Shock, 일본어: アタリショック)[주 1]는 1982년 연말 과열된 판매 경쟁으로 발생한 미국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일어난 위기이다. 게임 업계에서는 이 위기를 1929년 10월 24일에 일어난 주가 대폭락 사건인 검은 목요일에 비교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으며, 이후 아타리 쇼크란 단어는 게임 소프트웨어의 과잉 공급에 의해 소비자의 흥미가 급속히 떨어져 단번에 시장 수요가 사그라드는 현상을 뜻하게 되었다.
개요 [ 편집 ]
1977년 미국 아타리에서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아타리 2600)은 게임기에 내장되어 있던 게임 소프트의 프로그램 롬을 카트리지에서 제거하고 외부로부터 공급할 수 있도록 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 아타리는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의 프로그램 사양을 공개하여 누구라도 자유롭게 게임을 개발,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려 많은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들이 질이 낮고 재미가 없어 소비자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 갔다. 이에 따른 게임 개발사의 도산과 헐값 처분된 게임들이 시장에 흘러들어가 정가 라인이 붕괴되고 있었다. 이렇게 맞이한 1982년 크리스마스 판매 경쟁에서는 30억 달러의 시장 규모를 예측해서 유통하지만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 시장은 완전히 붕괴된 후였다. 당시 실제의 시장은 1억 달러 미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상당수의 재고를 떠안고 도산하는 소매점도 속출했다. 이후 1985년 닌텐도에서 NES가 발매될 때까지 미국 게임 시장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발생 원인 [ 편집 ]
이 위기는 여러가지 이유가 합쳐지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2세대 게임기들은 수많은 게임 프로그램들로 버텨왔다. 게임기의 인기는 5년 만에 하락하였고, 아타리의 시장관리자는 아타리 2600의 5번째 생일을 경축하였을 정도로 너무 길게 지원을 했다. 콘솔 사업은 새로운 세대의 게임기를 준비하지 못하였고, 길게 연기된 아타리 7800 게임기는 소비자들의 기대를 채워주기에는 너무도 빈약하였다.
게임기가 너무 많아,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폭이 너무 넓었다. [1]
회사의 재정을 맞추기 위한 저품질의 게임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980년대 초에 PC는 특별한 컴퓨터 가게에서만 팔렸고, 그 당시엔 엄청난 가격인 1,000 달러에 팔렸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에 텔레비전 세트에 연결하는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게임기와의 경쟁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가 게임기보다 더 좋은 메모리(게임기보다 좋은 그래픽과 사운드)를 갖게 되면서, 컴퓨터는 게임과 더불어, 문서작성과 가계부 정리까지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컴퓨터 게임은 게임기에서 사용하던 비싸고 구형인 ROM 모듈보다 복사가 쉬운 카세트 테이프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또한 게임기 제작회사 중 코모도어는 할인점이나 백화점, 그리고 장난감 상점에 그들의 물건을 팔았고, 코모도어는 보조적으로 그들의 칩을 다른 회사에 팔았다. 코모도어는 다른회사보다 더 높은 이윤을 위해 공격적인 할인 전략을 펼쳤다. 이 가운데에는 코모도어의 자회사인 MOS 테크놀로지에서 코모도어의 칩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몇몇 회사들은 자회사에서 칩을 만들었는데, 이는 1970년대의 계산기 시장을 보는듯 하다. 그 당시 계산기 회사들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서 판매한 칩을 사면서,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의 제품에 대항하는 계산기를 만들어 팔았다. 아타리와 같은 다른 회사들은 생산을 자신들의 협력 업체에 계약하기도 하였다.
이 재앙의 첫 번째 신호는 게임이 높은 품질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액티비전의 공동 설립자인 아타리의 게임 프로그래머들이 1979년 회사를 나갔다. 아타리는 그때 게임을 출시할 돈이 없었고 판매에 기초한 사람들의 사용료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타리는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액티비전의 대량 판매를 고소하였으나, 1982년에 소송에서 패소하였다.
이 소송은 Quaker Oats와 같은 정통 서드파티 개발자들과 회사들이 월스트리트와 소비자들을 겨냥하여, 오픈 비디오 게임 구획을 추진하던 계획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회사들은 서로 다른 프로그래머와 역공학을 사용하여, 상용 게임을 어떻게 만드는가 배우는 중이었다. 아타리는 몇몇 인텔리비전 개발자들을 고용해, 마텔에 대항하는 소송을 벌이도록 선도하였다. 아타리는 또한 그들에게 산업 스파이의 짐을 떠넘겼다.
다음 10년의 게임기 제조사인 닌텐도. 세가, 소니 혹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들은 플랫폼에 공급하는 게임의 독점적인 규제를 잃어버렸다. 이건 장난감 가게에 그들의 물건이 절대로 오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액티비전이나 아타리, 마텔은 경험있는 프로그래머를 가졌고 많은 새로운 회사들이 그들의 시장에 끼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경험있는 재주로 게임을 만들지 못하였다. “Chase the Chuk Wagon”, “Skeet Shoot” 그리고 “Lost Luggage”는 게임회사들이 비디오 게임 붐에 합류하고자 만든 게임의 예이다. 잠시 동안간 많은 광고와 판매가 있었지만, 게임은 최저의 품질이었기 때문에 제작사들은 아무런 희망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업에 끼친 영향 [ 편집 ]
직접적 영향 [ 편집 ]
1982년 저질게임이 소매시장으로 급속히 들어와, 소매시장이 범람하게 되었다. 마텔안의 인텔리비전의 판매담당 간부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2년 동안에 나올 물건들이 1년 동안에 시장에 나왔다. 그리고 그걸 균형 맞출 만한 시스템도 없다.” 가게에서는 새로운 게임 회사들에게 받은 물건을 다시 돌려보냈고, 회사는 소매상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없었다.
1982년 크리스마스에 회사가 망해서 돌려보내지 못하는 게임들을 장난감 가게에서는 마크를 떼고 할인 바구니와 판매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 당시 보통의 게임가격은 $34.95 달러(인플레이션을 포함한 2007년 미국달러 기준으로 $75)였는데, 할인 바구니에서는 게임 하나당 4.95 달러에 팔았다. 1983년 6월 게임시장에서 예전 가격으로 팔던 게임들은 몰락하고, 더 싼 게임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다. 고객들은 가게에 가서 할인 바구니안의 게임들을 사갔고, 고객들은 싼 게임이 비용적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고객들은 저질게임들을 퇴출시키고, 이제는 줄어버린 높은 가격의 게임을 사서 쓰거나 게임을 하지 않게 되었다.
커다란 게임시장은 이 결과에 흔들렸고, Magnavox와 Coleco는 게임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었다. Imagic는 자사 주식상장이후에 몰락하게 되었고, 나중에 파산하게 되었다. 잠시 가장 컸던 서드-파티 카트리지 제작자였던 액티비전은 그 후 몇 년간 더 생존하였다[2]
추가적으로, 장난감 소매상들은 게임에 대한 소비자들의 접근을 조절하면서 비디오 게임은 일종의 변덕이라 결론을 내렸고, 변덕이 끝나자 그들은 다른 제품들을 그들의 선반에 올렸다. 많은 소매상들이 몇 년 동안 비디오 게임을 자기 가게에 올리는 걸 반대하였고, 그리고 이건 닌텐도의 패미컴이 미국에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닌텐도는 즉시 패미컴을 게임기 대신에, 엔터테이먼트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컨트롤 덱과 게임 팩과 같은 이름으로 게임을 불렀다. 또한 R.O.B라고 불리던 로봇을 포함시켜 장난감 업체가 그들의 가게에 NES를 올리도록 납득시켰다.
장기적 영향 [ 편집 ]
미국 비디오 게임 위기는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가정용 게임기 제작사가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1987년 비디오 게임시장이 복구될때, 선두주자로 닌텐도의 닌텐도 엔터테이먼트 시스템은 소생하는 아타리와 세가와 싸우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로, 추락의 가시적인 결과인 서드-파티 제작자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질적인 문제가 제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쟁 회사들은 아타리나 마텔의 소프트웨어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훈련된 게임 프로그래머를 고용하게 되었다. 닌텐도는 게임에 라이선스 제한을 걸었고, 그리고 역공학을 방지하기 위한 잠금 보안 시스템도 채용하였다. 만약 게임제작자들이 다른 곳에 – 아타리, Coleco, Mattel 같은 곳에 게임을 넘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카트리지 안에는 무조건 키 칩이 삽입되어 있어서, 다른 게임기상에서는 돌아가지 않았고, 제작자는 그들의 저작권이 닌텐도가 주목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였다. 비록 Acclade는 Sega에 대해 기술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 심지어 세가 라이선스 조약을 양보하게 되었다. 몇몇 개발자 – Tengen(Atari), Color Dreams, 그리고 Camerica는 8비트 시대에 닌텐도의 제어 시스템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제어 시스템에 대한 개념은 현재 소수의 카트리지-기반의 8/16비트 시장에 사용되고 있다. 보안 칩은 교체되어 현대의 대부분의 게임기에는 특별하게 암호화된 광학 디스크로, 읽기만 되고, 복제가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닌텐도는 그들의 시스템에 5개의 게임을 공급하겠다는 제한을 두고 NES 게임에 대한 이윤 일부를 자기 몫으로 떼갔다. 또한, 모든 카트리지를 닌텐도에서 만들어내어, 예전에 그들이 만든 카트리지를 모두가 사갔다. 카트리지는 닌텐도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개발자들은 손해를 입게 되었다. 닌텐도는 저질게임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모든 시스템의 게임에 승인받았다는 금색 딱지를 붙이도록 하였다. 이런 닌텐도의 플랫폼 제어는 그 후 세가나,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수용하게 된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DeMaria, Rusel & Wilson, Johnny L. (2003). High Score!: The Illustrated History of Electronic Games (2nd ed.). New York: McGraw-Hill/Osborne. ISBN 0-07-222428-2.
각주 [ 편집 ]
내용주 [ 편집 ]
참고주 [ 편집 ]
↑ Taylor, Alexander L. III (1982년 12월 20일). “Pac-Man Finally Meets His Match”. Time Magazine. 2007년 9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 Activision eventually faded as well; its name and assets were purchased by a new management team led by Bobby Kotick , who built a new, highly successful, but otherwise unrelated company based on the old brand. This company still exists, and is considered one of the major video game publishers.
09화 게임 멸망 ‘아타리 쇼크’는 왜 벌어졌을까?
1983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1982년까지 30억 달러 규모까지 미친 듯이 성장하며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이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간 1985년이 되자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규모는 종전의 3% 수준인 1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 수많은 게임 업체가 도산했고 그중에선 비디오 게임 시장을 이끈 수장이자 산업의 핵심 존재였던 아타리도 포함됐다.
이 사태가 바로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으로 불리는 ‘아타리 쇼크'(ATARI Shock)다.
게임 회사 아타리는 1972년 6월 놀런 부슈널에 의해 설립됐다. 이 회사는 그해 11월 ‘퐁'(PONG) 게임을 선보이며 게임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무수한 게임들을 선보이며 게임을 ‘비즈니스’ 측면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퐁의 신드롬은 디지털 문화 산업의 토대로 인식되고 있으며, 놀런 부슈널이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아타리는 게임 개발에서 ‘게임기’ 개발로 눈을 돌린다.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 될 것으로 판단한 놀런 부슈널은 1976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천8백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한 후 게임기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로 1977년 출시된 ‘아타리 2600’이다. 2세대 가정용 게임기의 시작이자 게임 대란의 시초이기도 하다.
비디오 게임 시장의 기폭제였던 ‘아타리 2600’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1977년 9월 11일 북미 시장에 출시된 아타리 쇼크는 본지에서도 소개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https://brunch.co.kr/@jikigame/24)보다 한층 변화된 기술력으로 단번에 소비자들을 매료시켰다. 아케이드 게임이었던 유명 게임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 을 가정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과 롬 팩을 교체하며 다양한 게임을 취향에 맞춰 즐길 수 있다는 점, 고급스러운 외형 등으로 199달러라는 높은 가격에도 큰 인기를 구사한다.
놀런 부슈널은 그해 11월 ‘동종 업계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퇴사하게 된다. 그의 퇴사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지만 회사 경영에 대한 이슈와 시장 다각화 전략에 대한 반대 등이 주요 이슈로 꼽힌다. 그가 떠난 후 아타리 후임 대표로 레이몬드 에드워드 카사르가 발탁되고 그는 섬유 업계 경험을 이용, 제작부터 유통 전반적인 부분을 안정화시키며 아타리를 성공적인 회사로 발돋움시킨다.
그러는 사이에 내부에서는 위험한 싹이 자라고 있었다. 당시 아타리에서 개발되고 출시되는 모든 게임기 및 소프트웨어의 권리를 독점했다. 게임이 대 성공을 거뒀지만 개발자들에겐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 문제가 쌓이자 1979년 5월 다수의 내부 프로그래머들이 대표에게 게임 판매에 대한 저작권료와 게임 내 개발자들의 이름을 넣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표는 이를 무시했고 그들은 결국 퇴사하게 된다.
액티비젼이 아타리 2600으로 내놓은 핏풀 <사진출처: 벤처스퀘어넷>
재미있는 건 이때 당시 퇴사했던 인력들이 모여 창업한 회사가 바로 ‘액티비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자. 주요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 입장에선 게임기의 판매량을 주도할 게임이 절실해졌다. 이때쯤 몇몇 개발자들은 아타리를 직접 분해해 분석한 후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고, 당연히 액티비젼 역시 자체적으로 아타리 2600용 게임을 만들어냈다.
이에 분개한 아타리 측은 저작권 침해 협의로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없인 활로를 열 수 없던 아타리는 액티비젼을 비롯해 다수의 업체와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 이때 처음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서드 파티’다. 공식적으로 아타리 2600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그들은 80년대 초반 게임 산업의 전성기를 이끈 주옥같은 명작들을 쏟아내며 대폭 성장하게 된다.
1980년 한 해 아타리는 2억 달러 이상을 매출을 기록한다. 많은 신생 업체들이 아타리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수익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많은 투자자들은 ‘게임 개발 = 돈’이라는 공식을 깨닫고 기술이 조금이라도 있는 회사라면 거액을 투자했으며, 여러 대형 유통회사부터 심지어 음반 회사까지 아타리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해 게임을 선보였다. 아타리는 밀려오는 돈 러시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981년 초, 이런 말이 돌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넣은 게임도 1백만 개는 팔릴 거야”
아타리는 밀려드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자 자제력을 상실해 버린다. 서드 파티 회사들의 게임을 모아 계약을 하는 퍼블리싱도 이때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그들이 주는 로열티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수준이나 QA 등 전권을 넘겨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회사에선 놀고 있는 인력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아타리 2600으로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마구 생겨났다.
이때 서드 파티는 대혼란이었다. 이미 출시된 게임을 베낀 게임들이 범람했고, 심의가 없었기 때문에 성인 게임들이 마구 출시됐다. 동일한 게임이 게임 명만 다르게 돼 나오는 건 기본이었고, 이때 등장한 경쟁 게임기로 이식돼 문제를 확장시켰다. 콜레코비전부터 RCA 스튜디오 II, 벡트렉스, 인텔리비전,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2 등 특징과 변화 없는 게임기용으로도 몇 백 개의 게임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된 점은 성인 게임이다. 표지부터 게임 내용까지 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이어진 것. 게임 중에는 도망가는 여자를 잡아 집으로 끌고 들어가 관계를 맺는 내용부터 카우보이가 벌거벗고 있는 인디언 여성을 잡는 내용 등이었다. 이로 인해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약화됐고 일부 학교, 학부모를 중심으로 게임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가장 논란이 됐던 게임인 ‘커스터의 복수’ <사진출처: 비디오게임베리에이션닷컴>
여기에 예상치 못한 존재도 게임 대전에 참전한다. 바로 홈 컴퓨터다. 애플 II와 오피스 시스템 경쟁에서 밀린 코모도어는 혼란이 도가니인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2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공격적인 마케팅 공세를 펼치며 홈 컴퓨터 시대를 선언한다. 당시 광고 카피 문구는 “왜 비디오 게임기를 사십니까?”였다. 광고 내에는 게임 외에도 교육 등 여러 전반으로 제품을 활용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코모도어의 마케팅이 반응을 얻자 1982년 새롭게 준비한 코모도어 64를 595달러로 출시했고 1983년에는 399달러까지 인하해 판매한다. 여기에 경쟁 기기를 가져오면 100달러를 추가 할인해주는 프로모션까지 더하며 승승장구한다. 이 제품은 단일 컴퓨터 중 가장 많이 팔린 대수 1천7백만 대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위축된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과잉되는 양상을 띄며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간다.
끔찍한 수준의 아타리 팩맨 <사진출처: 스플리터리스코어>
“그러던 중 아타리는 매우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당시에는 ‘발주’ 기반의 유통 산업이었기 때문에 판매 수량을 체크해 제품을 생산하는 형태로 업무를 진행했다. 1981년 말 아직도 미친듯한 성장을 기록 중인 비디오 게임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각 도매상들과 관련 업체들은 내년 판매할 수량을 매우 높게 책정해 아타리에 발주를 요청한다. 그렇게 등장한 게임이 바로 팩맨이다. 팩맨은 이미 아케이드 시장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게임이었기 때문에 북미 내에서만 1천2백만 장 주문이 들어온다.
1982년 3월 출시된 팩맨은 출시 몇 달만에 7백만 장이 판매된다. 하지만 5백만 장이 재고로 남았고 조약 한 품질과 각종 버그로 반품 요청이 늘어나면서 논란이 된다. 당시 재정적으로 큰 위기가 닥쳤음에도 아타리 측은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고 증권사나 언론 등에서도 말도 안 되는 성장폭을 예상하며 업체가 가져야 할 현실적인 대안이나 문제점 개선 등 위기감을 기우로 만들어버린다.
1982년 8월 후발주자로 들어온 서드파티들의 게임 판매량이 부진을 면치 못하기 시작했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게임들도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아타리 가정용 게임기 부분 사장을 해임한다. 이유는 내년 시장 수익 전망이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매우 낮은 수치였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뉴욕 증권 시장에 직격타를 날렸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주가는 물론 다수의 관련 업체의 주가를 대폭락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명치에 날아간 핵주먹 ‘아타리 E.T’
여기에 연말 실적 향상을 위해 물량을 대거 뽑아놓은 아타리 2600 E.T 게임이 완전히 망하면서 아타리와 모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 400만 개 판매를 예상했지만 판매된 물량은 50만 개 수준이었고 이 역시도 1983년 상반기 내 많은 양이 반품되는 결과를 초례한다. 이로 인해 연간 실적은 곤두박질쳤고 특히 1982년 4분기 영업이익은 고작 120만 달러였다. 그리고 끔찍한 1983년이 시작된다.
“포문은 개발사들이었다. 수요가 빠르게 사라지자 무리하게 돈을 당겨와 쓰던 개발사가 빠르게 도산했다”
그렇게 시장된 산업의 붕괴는 도미노보다 더 빠르게 시장 전체를 몰락시켰다. 30달러 정도였던 게임은 과도한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덤핑 판매로 되돌려져 5달러 미만에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에 경쟁이 붙자 하락세를 더욱 짙어졌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제값을 주고 게임을 구매하지 않게 됐고 게임 판매는 이어졌지만 업체들은 수익은 계속 감소해갔다. 업체들은 결국 버티다 줄도산 하기 시작했다.
1983년 아타리는 한 해에만 5억 3천6백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한다. 그리고 1984년 1분기에는 2천8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2분기는 4억 2천5백만 달러의 손실을 겪게 된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그해 상반기를 끝으로 더 이상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 아케이드와 홈 컴퓨터,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 등으로 나눠 분할 매각한다. 그중 아타리 게임즈는 1985년 남코(현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에 매각된다.
이런 게임들이 매달 100개 가까이 출시됐다.
그리고 1985년까지 북미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큰 폭으로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며 무너진다. 경쟁사가 없어졌음에도 소비자들은 더 이상 북미 게임을 구매하지 않게 됐고 이로 인해 게임사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유통 산업부터 카트리지를 비롯해 패키지 산업 등 다양한 분야가 영향을 받아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인 상황은 1985년부터 벌어지게 된다.
“1985년 10월 18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으로 불리는 기기가 북미에 출시됐다”
일본 내 1983년 출시돼 일본 내 가정용 게임기 열풍을 주도했던 일명 ‘패밀리 컴퓨터'(패미컴)이 텅 비어버린 북미 시장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닌텐도는 콘솔이라는 이름 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콘솔이 가진 부작용을 최소화시켰으며, 아타리 쇼크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드웨어 락아웃 칩 반영 및 정식 라이선스 제품 인증 표식 등을 부여하며 제품, 품질 관리에 힘썼다.
북미 시장을 장악한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사진출처: 테크놀로지넷>
이 같은 닌텐도의 작전은 쓰레기 수준의 게임들에 지쳤던 게임 유저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됐다. 이후 세가의 SG- 시리즈, 마크 III와 세가 마스터 시스템,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등 품질을 고려한 일본의 우수 게임기가 북미 본토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모든 면에서 유리한 일본 제품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던 북미의 콘솔 경쟁사들을 밀어내며 시장 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 동안 북미 내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일본 업체들 주도로 흘러갔고 마이크로소프트(MS)의 Xbox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된다.
아타리 쇼크가 벌어진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무분별한 개발 라이선스 제공
▲ 품질보다 판매에 급급한 실적 위주 산업
▲ 시장 성장을 예측하고 적절한 공급을 유도하지 못한 점
▲ 무수한 경쟁자들과 경쟁하기보단 낙관 주의에 빠져 안주했던 경영진
필자 개인적으로는 품질에 대한 안일한 생각과 노력이 이 사태를 키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아타리 쇼크는 경제적인 측면부터 시장의 원리, 경영적인 측면 등 다양한 분야에 경각심을 일으켜준 사례였다. 이로 인해 디지털 문화가 큰 하나의 방향을 잡게 됐으며, 품질이 소비자를 만든다는 철학이 크게 대두된다. <끝>
세계 최초 게임기 ‘아타리’는 왜 망했을까 [임주형의 테크토크]
세계 최초 가정용 콘솔 게임기 ‘아타리 2600’
카트리지 교체해 다양한 게임 지원한 최초 게임기
1980년대 미국 가정용 게임 시장 성장 이끌었지만
게임 품질 관리 실패해 ‘아타리 쇼크’ 이어져
지난 17일 국내 한 대형마트에 전시된 일본 닌텐도사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 샘플 상품들. / 사진=연합뉴스 AD 썝蹂몃낫湲 븘씠肄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최근 국내서도 가정용 게임기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비대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닌텐도 게임기 ‘스위치’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지요. 이 외에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등은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 들어보는 이름입니다.이들 가정용 게임기는 바닥에 게임기를 거치한 후, TV나 컴퓨터 모니터 등에 케이블을 연결한 뒤 고유한 게임 패드를 쥐고 즐기는 방식입니다. 이 게임기 본체를 ‘콘솔’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콘솔 게임기라고도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안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콘솔 게임의 시초는 어디서부터였을까요?
현재 콘솔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본 기업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상업용 콘솔 게임기는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바로 아타리(Atari) 사가 지난 1977년 출시한 ‘아타리 2600’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게임은 오락실에 설치된 대형 게임기를 통해서만 즐길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같은 게임기들은 한정된 숫자의 게임만 구동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타리 연구원들은 작은 본체 안에 여러 종류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게임기를 만들고자 연구에 매진했고, 그 결과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콘솔 게임기인 ‘아타리 2600’을 완성했습니다.
최초의 콘솔 게임기 ‘아타리 2600’과 조종용 스틱.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썝蹂몃낫湲 븘씠肄
아타리 2600은 본체와 게임 조작용 패드, 그리고 게임 소프트웨어가 담긴 ‘카트리지’라는 메모리 카드로 구성됩니다. 카트리지를 게임기에 꽂으면, 게임기가 카트리지 안에 담긴 정보를 읽고 게임을 구동하는 방식입니다. 즉, 카트리지를 교체하기만 하면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아타리 2600은 발매 이후 무려 3000만대 이상 판매량을 올릴 만큼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특히 1980년 출시된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등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한 해에만 판매량이 4배 이상 급증했습니다.
오늘날 보편화된 게임기 개발사와 게임 제작 회사 간 관계도 아타리가 확립했습니다. 1980년대 초 아타리에게는 게임기 판매량을 끌어 올려 줄 재밌는 게임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일부 게임 개발자들은 아타리 게임기를 직접 분해해 분석한 뒤 스스로 게임을 개발해 판매했습니다.
처음 아타리는 이들에 대해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곧 이들 게임 개발자들이 아타리 게임기의 판매량을 늘려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결국 아타리와 게임 개발자들은 ‘게임 개발사가 아타리에 일정한 로열티를 지급하고 게임을 발매한다’는 조건으로 타협에 이르게 됩니다. 이같은 방식은 오늘날 게임산업에서 ‘서드파티’라고 불리며, 아타리가 최초로 안착시킨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하지만 서드파티 정책은 아타리를 몰락시킨 간접적 원인이 됐습니다. 당시 아타리는 서드파티 업체들에 로열티를 받을 뿐, 게임의 질을 관리하기 위한 어떤 품질 관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드파티 정책이 확립된 뒤 일부 게임 개발자들은 질 낮은 게임들을 대량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사진은 미국 시리얼 회사 ‘퀘이커 오트밀’ 사 게임 개발 지부에서 제작한 게임(위)과 1982년 아타리가 직접 출시한 비디오 게임 ‘E.T.’ /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썝蹂몃낫湲 븘씠肄
이 때문에 게임 회사들은 질 낮은 게임을 대량으로 개발해 비싼 가격에 판매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게임과 아무 관련도 없는 회사가 아타리 게임 개발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981년 미국 시리얼 제조회사 ‘퀘이커 오트밀’이 게임 개발 부서를 만들어 16개 게임을 출시하는가 하면, 성인용 포르노 게임까지 범람하게 됩니다.
1982년 출시된 게임 ‘E.T.’는 특히 ‘역사상 최악의 게임’이라는 혹독한 평을 듣게 됩니다. E.T.는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동명의 영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게임으로, 당시 아타리 모회사였던 워너 커뮤니케이션스 경영진은 해당 게임이 약 400만장 팔릴 것으로 예상해 400만개의 카트리지를 주문했습니다.
지난 2014년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인근 사막에서 발굴한 ‘E.T.’ 게임 카트리지. / 사진=유튜브 캡처 썝蹂몃낫湲 븘씠肄
하지만 초기에 팔린 150만개 중 100만개가 반품됐고, 결국 아타리는 350만개의 E.T. 카트리지 재고를 떠안게 됐습니다. 당시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아타리는 350만개의 카트리지를 전부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인근 사막에 통째로 매립했습니다. 재고 카트리지 중 일부는 지난 2014년 자원봉사자들이 발굴 작업을 통해 건져내기도 했습니다.
아타리의 질 낮은 게임에 실망한 소비자들은 E.T. 이후 하나둘 가정용 게임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1982년 30억달러(약 3조5300억원)에 이르렀던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은 85년에 이르러 1억(약 1177억원)달러 수준까지 위축됐습니다. 전체 시장의 97%가 증발해 버린 셈입니다.
이 충격으로 인해 아타리에 게임을 만들어 공급하던 수많은 게임 개발사가 도산했으며, 아타리도 10억달러가 넘는 손실을 입은 뒤 결국 다른 회사들에 분할 매각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이 사태를 두고 이른바 ‘아타리 쇼크’라고 합니다.
다만 아타리가 확립한 가정용 콘솔 게임기 구동 방식 및 비즈니스 모델은 일본 닌텐도, 세가 등 후발주자들이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업계 표준으로 자리하게 됐습니다. 아타리 쇼크 이후 콘솔 게임기 시장은 점진적으로 회복을 거듭해, 2019년 기준 450억달러(약 53조원)를 넘어설 만큼 거대한 산업이 됐습니다.
임주형 기자 [email protected]
[시사금융용어] 아타리 쇼크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07시 30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타리 쇼크는 1983년 미국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2600이 수준 낮은 게임을 계속 발매하면서 소비자가 떠나가고 북미 게임 시장이 침체기에 빠진 사건을 말한다.아타리2600은 1977년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을 개발했다.VCS는 게임기 안에 게임이 내장되어 있던 기존의 게임기와는 다르게 외부에서 게임팩을 끼워 넣어 즐길 수 있어 출시 때부터 1984년까지 3천만개가 팔리며 주목받았다.하지만 게임뿐 아니라 더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는 PC가 등장하면서 위기에 처했다.당시 아타리2600은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출시하더라도 구매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게임을 만들어냈지만, 소비자들은 이를 빠르게 외면했다.아타리2600은 결국 팔지 못한 기기와 게임 수백만개를 1983년 뉴멕시코 매립지에 묻었고, 같은 해 5억달러 이상의 손실을 봤다.아타리2600은 이듬해인 1984년 분할 매각됐고, 게임 수요가 급감하면서 30억달러 규모였던 북미 게임 산업의 가치는 1억달러 상당으로 추락했다. (기업금융부 이미란 기자)[email protected](끝)
아타리 쇼크
아타리 쇼크(Atari Shock)는 1983년부터 1985년에 걸쳐 점점 낮아지는 게임 퀄리티에 대중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북미 게임 시장에 몰락을 가져온 사건의 통칭이다. 게임 시장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과 비교될 정도로 북미 게임 산업이 극도로 침체기에 접어들게 한 사건이다.
한마디로 시장 전체의 질적 하락이, 시장 전체의 몰락을 부른 사례다.
1 명칭 [ 편집 ]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1971년 8월 15일에 발생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경제 사건 닉슨 쇼크에 빗댄 것이다. 다만 아타리 쇼크라는 명칭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악의가 서려 있는데, 당시 북미 시장에 진출하려던 닌텐도의 입김에 일본의 게임 잡지에서 ‘아타리 쇼크’라는 표현을 다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에서 아타리의 책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타리의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만 유별나게 저품질이었던 게 아니라 다른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도 하나 같이 저품질이었다. 즉,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 선정과 유행에는 다분히 프레임을 씌우려는 일본 게임계 측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대한민국의 게임 잡지 또한 일본의 게임 잡지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한국에도 정착했다.
2 배경 [ 편집 ]
당시 아타리의 게임기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누구든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었다.[1] 소재나 퀄리티가 어떻든 게임의 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아무 게임이나 팔았던 것이다. 그래서 질 낮은 게임들이 시장에 범람하자 소비자들은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커스터의 복수》라는 포르노 게임이 출시되자[2] 당시 학부모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은 사건이 터졌다.
덧붙여, 이때 당시만 해도 2010년대처럼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닌텐도 스위치 이런 식으로 3강 체제로 나뉘지 않고, 여기저기서 개나 소나 게임기를 출시해서 선택지가 과도하게 많았었다. 코모도어 64, 아미가, 아타리 5200, 애플 2, ZX 스펙트럼 등등 게임을 할 수 있는 게임기 및 PC가 무지막지하게 범람하던 시기였다.[3] 게임기가 많은 만큼 게임도 쓸데없이 너무 많고 너무 쉽게 만들어져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너무 넓었다. 선택장애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결국 서드 파티 회사들도 줄줄이 파산, 공급만 너무 많다보니 회사가 망해서 반품이 안 되고, 정가가 붕괴해서 게임들이 헐값에 팔리기도 했다.
거기다 한 번은 아케이드 게임으로 출시했던 《팩맨》을 아타리 2600로 이식해서 출시했었다. 여기서 아타리 26000는 《팩맨》의 게임 카트리지를 무려 1200만 개나 주문하는 미친 짓을 시도한다. 물론 아타리 26000의 성능이 따라와주지 않아 《팩맨》이 제대로 이식될 리가 없었는데다, 인기 있는 게임 브랜드를 우겨넣어도 판매량이 700만 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머지 500만 개는 악성 재고가 되고….
2.1 E.T. 사건 [ 편집 ]
1982년 말, 아타리는 당시 성공적이었던 영화 《E.T.》의 라이선스를 이용해 게임을 만들어 크리스마스에 정식 출시하기로 한다. 《E.T.》의 흥행은 전설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게임도 잘 팔릴 거라는 기대하에 게임 제작에 들어갔으나, 제작 기간이 겨우 5주였다…. 아무리 당시 게임 개발자 중에 실력자를 데리고 왔어도 5주 안에 게임을 기획하고 프로그래밍까지 하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출시했으나, 처음에는 잘 팔리는 듯하더니 미흡한 게임성으로 인해 다시 반품 러쉬를 맞았다. 심지어 영화 《E.T.》를 앞세워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다보니, 그 동안 쌓였던 소비자들의 불만이 여기서 폭발했고 반품뿐만 아니라 게임 불매 운동까지 벌어졌을 정도로 아타리한테 엄청난 임팩트를 가져온 것이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에게 게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타리 2600판 게임 《E.T.》은 아타리 쇼크의 상징이 된다.
결국 1983년 한 해에만 아타리는 5억 3천 6백만 달러의 손실을 떠안았고, 게임 산업 1인자이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대기업 아타리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2.2 게임 매립 [ 편집 ]
결국 악성 재고가 되어버린 《팩맨》, 《E.T.》의 행방에 대해 한 가지 루머가 돌았다. 원래 이 게임들은 텍사스주의 엘패소(El Paso)라는 곳의 공장에서 만들어졌는데, 게임들이 줄줄이 실패하자 팔 수 없었던 게임을 옆동네 뉴멕시코주 사막에 매립했다는 설이었다.[4]
이 설에 대해 아타리는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2014년 아타리 쇼크 30주년을 맞아 《아타리: 게임 오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5]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사막을 탐사한 결과, 그 소문은 진짜로 판명됐다. 실제 게임 《E.T.》의 개발자도 “무슨 핵폐기물도 아니고 사막에 묻었나 했더니 진짜였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약 1,300개의 게임 카트리지가 발견되어 모두 경매에 붙여졌고, 최고가 1500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
3 영향 [ 편집 ]
이 사건을 소재로 다양한 영화,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AVGN 더 무비》가 게임 《E.T.》 및 아타리 쇼크를 소재로 하는 영화이다. 물론 51구역 외계인설을 짬뽕해 만든 액션 영화지만.
당시 아타리에서 진행하던 대규모 행사인 《소드퀘스트》의 이벤트가 중단되는 계기가 됐다. 《소드퀘스트》로 제공하는 게임 속 미션을 해결하면 정식 대회에 출전해 실제 보물 을 준다는 대회였다.
을 준다는 대회였다. 하도 북미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보니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패미컴)가 북미에서 출시했을 때는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이라는 명칭까지 내세우며 장난감 흉내를 내기도 했다. 게임기가 아닌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게임 덱이 아닌 컨트롤 덱으로, 거기다 주변기기인 R.O.B 더 로봇까지 끼워서 장난감처럼 판 것이다. 이름 가지고 말만 바꾼 거긴 하지만, 결국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통해 대히트를 치면서[6] 북미 게임 산업을 다시 끌어올린다. 물론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게 아닌, 일본의 게임기가 미국에서 히트친 거긴 하지만…….[7]
4 각주
[꿀딴지곰 겜덕연구소] 게임 역사상 최악의 사건?! 콘솔계의 지각변동 ‘아타리쇼크’
[꿀딴지곰 겜덕연구소] 게임 역사상 최악의 사건?! 콘솔계의 지각변동 ‘아타리쇼크’ 조학동 [email protected](해당 기사는 지난 2021년 1월 13일 네이버 포스트 게임동아 꿀딴지곰 겜덕연구소를 통해서 먼저 소개된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꿀딴지곰 겜덕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조기자입니다. 이번에도 지식인에서 고전게임 전문 답변가로 활동하고 계신 꿀딴지곰님을 모셨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게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아타리 쇼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임업계 최악의 사건, 아타리쇼크]조기자 :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은 전세계 콘솔 게임 역사에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던, 아타리쇼크에 대한 얘기로 꾸며보려 합니다. 게임 좀 안다는 분들이라면 웬만하면 안다고 할만큼 화제를 모았던 사건이자 현재까지도 수많은 콘솔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 아니겠습니까.
너무 유명해서 다루는 게 맞나.. 싶은 사건이기도 하거든요.
꿀딴지곰 : 언젠가 한 번은 다뤄야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조기자님이야 아주 잘 아시겠지만, 아타리쇼크를 어렴풋이 알지만 자세히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거든요. 그리고 만약 아타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한 번은 게임업계가 겪을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질좋은 게임을 즐기고 싶은 게이머들과 이를 관리해야하는 플랫폼 사업자들에겐 뼈저린 교훈이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고요.
조기자 :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이 아타리쇼크를 떠올리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최근에 북미 지역에 발표된 ‘퐁’ 때문입니다.
아타리에서 북미 지역에 내놓은 ‘퐁’ 게임기인데요, 탁상 위에 올려서 플레이하기에 여간 좋은 게 아니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이 퐁 게임기를 보면서 군침을 흘리다가.. 아타리에 대해 떠올린 김에 이렇게 포스팅 주제로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
(최근 조기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타리 퐁. 아쉽게도 국내 출시되진 않았다.. ㅠ_ㅠ)
(고급진 마감이 눈에 띈다)
(게임이 퐁 1개 뿐인 전용이라는 건 다소 아쉽지만..)
(두 사람이 심심할 때 한 번씩 즐기기엔 최적의 게임기다)
꿀딴지곰 : 오.. 이 퐁이라면 저희같은 레트로 게이머들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인 게임기가 될 것 같은데요? 전 이런 게임기가 나왔는지도 몰랐습니다.
조기자 : 네. 사실 퐁이라는 게 게임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게임기 중 하나죠. 예전에 경기도에서 주최하는 ‘플레이엑스포’ 게임쇼에서 아주 큰 업소용 퐁을 즐긴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의 작은 디지털 버전이 새로 나왔더군요.
(플레이엑스포 게임쇼에 출품됐던 아케이드용 퐁 게임기. 실물 바와 공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꿀딴지곰 : 그리고 저희 연배의 게이머들은 이런 ‘퐁’ 게임기를 어렸을때 직접 즐겼어서 추억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탁상용 퐁 게임기가 출시된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한국 정식 출시는 되지 않았다는 게 좀 아쉽군요.. (애초에 수요가 너무 한정적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본론 : 아타리쇼크에 대해 살펴보자!]꿀딴지곰 :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014년 4월, 미국에서 아주 흥미로운 발굴이 진행됐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받은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주도한 발굴 작업이었는데요, 이 작업은 소식을 듣고 온 수많은 관중들과 함께 다양한 장비를 이용해 뉴멕시코의 한 황량한 광야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유적도, 역사적인 전투도 없던 곳이었지만 발굴단의 장비가 계속 땅을 파내려 가자 시멘트 덩어리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지켜본 관중들은 마치 역사 속 유물을 발굴해 낸 듯이 환호했습니다.
시멘트 밑에 있던 것은 다름아닌, 바로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게임팩이었죠. 게이머들에게는 ‘도시전설’ 정도로만 취급되던 ‘아타리쇼크’ 시절 벌어진 ‘ET’ 게임팩 매장설(設)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발굴 작업, 전설의 게임 ET를 발견하다)
꿀딴지곰 : 수십 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하나의 산업이 송두리째 없어지며,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몇 번이나 진행되어 왔습니다. 흔히 경제 위기라고 말하는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인데요, 이런 위기가 찾아오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지만, 과열된 투자와 잘못된 경제 시스템으로 벌어진 일이 대다수 인 것이 사실이죠.
게임시장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이른바 ‘아타리쇼크’로 불리는 사건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타리쇼크’는 당시 ’39억 달러’에 이르던 미국 콘솔 시장의 규모를 불과 2년 만에 ‘1억 달러’로 추락시킨 것을 비롯해 수 많은 기업들이 ‘줄도산’을 면치 못하는 등 게임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시절로 꼽히는 사건이거든요.
수천 개의 게임팩을 땅에 묻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최악의 시절로 기억되는 ‘아타리쇼크’. 그렇다면 이 게임산업의 대공황은 과연 어떻게 미국 콘솔시장을 휩쓸게 되었을까요.
(대공황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전설적인 게임, ET)
꿀딴지곰 : 1980년대 북미 게임시장은 특히, 콘솔 기기 시장은 그야말로 황금기라고 불릴만큼 역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소니의 PS,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닌텐도의 스위치 등 통용되는 콘솔기기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지만, 당시 북미 게임시장은 ‘게임을 고르는 것 보다 게임기를 고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수 많은 기기들이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아르카디아 2001. 아는 분은 많지 않을 듯…)
꿀딴지곰 : ‘아타리 2600, ‘아타리 5200’, ‘벨리 아스트로케이드’, ‘콜레코비전’, ‘콜레코제미니'(아타리 2600의 호환 게임기), ‘아르카디아 2001’, ‘페어차일드 채널F’ 등 각 회사별로 10여 종이 넘는 콘솔기기들이 거실을 차지하려 격돌했고, 이 과정 속에서 매출의 규모는 날로 커져 게임은 영화산업에 맞먹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죠.
(크게 호응을 얻은 아타리 5200)
꿀딴지곰 : 이런 춘추전국시대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회사가 바로 ‘아타리’였는데요, 미국 전역에 동전이 모자라게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퐁’을 개발한 전설적인 인물이자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는 놀런 부슈널(Nolan Bushnell)이 세운 회사였죠.
놀런 부슈널 (출처 : 나무 위키)
꿀딴지곰 : 이 게임사 ‘아타리’는 게임을 제작하는 것을 넘어 개발자들을 통해 게임을 공급받고 자신들이 출시하는 지금의 서드파티 형식의 게임 판매 방식을 통해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게임을 프로그램에서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시킨 인물이기도 한 놀런 부슈널은 새로운 사업분야인 콘솔 게임기 개발에 착수하게 되지만 이내 자금난에 허덕이고 마는데요, 자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나선 놀런 부슈널 앞에 나타난 회사는 게임시장의 성장에 눈독을 들이던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였습니다.
(1977년, 워너브라더스로부터 투자받아 제작한 아타리 2600)
꿀딴지곰 : 이 과정 속에서 놀런 부슈널은 워너브라더스로부터 약 2천 8백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투자 받았고, 이 자금을 바탕으로 마침내 1977년 세계 최초로 컴퓨터 그래픽을 탑재한 게임기 ‘아타리 2600’을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이 2천 8백만 달러는 당시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영화 2~3편을 제작할 정도의 거대한 금액이었습니다. 지금도 명작으로 꼽히는 벤허의 제작비가 1천 5백만 달러라는 걸 생각해보면 장난이 아닌 수준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이 아타리 2600은 날개돋친듯 팔려나가게 되어, 워너브라더스는 불과 2년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게 됩니다. 굉장한 충격이었죠. 게임의 파괴력을 알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이게 독으로 작용한 것일까요, 게임시장의 맛을 본 워너브라더스 경영진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자 더욱 더 게임 산업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워너 브라더스)
꿀딴지곰 : 당시에 게임기는 있으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소프트 개발에 차질을 겪고 있던 놀런 부슈널에게 접근한 워너브라더스는 ‘아타리’의 완전 인수를 추진하여 결국 자신들의 자회사로 두게 되는데요,
1970년대 후반 미국의 경제 부흥기와 함께 ‘아타리’는 매년 최고 매출을 경신해 나갔고, 한 때 워너브라더스 그룹 전체 매출의 절반을 게임부문에서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매출은 곧 비극으로 바뀌고 마는데요, 워너브라더스의 경영진은 1980년대에 들어 게임사업의 수익을 유지시키기 위해 자칭 ‘전문가’들을 경영진으로 투입시켰는데, 문제는 이 전문가들이 게임에 완전한 ‘문외한’이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꿀딴지곰 : 금융, 건설,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연봉을 받던 이 경영진들에게 게임은 그저 돈이나 버는 사업 중 하나에 불과했고, 자신들이 출시하는 게임에 대해 플레이는 커녕 어떤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게임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죠.
더욱이 게임을 제작하는 개발자들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해 개발자들에게 복장 규정을 적용하고, 정시 출퇴근을 강요하는 등 일반 기업과 똑같은 회사원으로 취급했으며,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도록 하는 등 그야말로 푸대접을 일삼았습니다.
한마디로 게임 개발을 적당한 하급 노동자 정도로 치부해버린 것이죠. 크리에이터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겁니다.
(아타리의 다양한 게임들)
꿀딴지곰 :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많은 개발자들이 ‘아타리’의 정책에 반발하며 이탈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 중에는 창립자인 놀런 부슈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회사를 나온 이들은 직접 자신들의 회사를 창립하기에 이르러 1980년대 미국에는 신생 게임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요, 이렇게 설립된 회사 중 한 곳이 바로 엑티비전입니다.
경직된 회사 분위기, 핵심 인력의 이탈 등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아타리’는 점점 수준 낮은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는 게임사로 변질되기 시작하게 됩니다. 더욱이 ‘아타리 2600’의 성공을 지켜본 후발주자들이 잇따라 새로운 콘솔 게임기를 선보이며 거센 공세를 시작했으며, 우수한 게임 타이틀 역시 다른 콘솔기기에도 함께 보급되면서 ‘아타리’는 점차 매출 감소를 겪기에 이르죠.
이에 아타리의 새로운 경영진들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검증 단계를 거치지 않고 되도록 많은 게임을 아타리의 이름으로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류를 늘리면 무조건 사람들이 사주고,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게임 퀄리티를 따지지않고 게임이 많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운 아타리)
꿀딴지곰 : 하지만 유명 개발자도, 이를 검증할 만한 시스템도 없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게임들의 수준이 높을 리가 없었고 개발하기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게임은 그야말로 뻔한 게임들 투성이였습니다.
게임이라는 산업의 이해 없이 단순히 수치와 자본의 논리로만 수익을 얻으려 했던 경영진들의 어처구니 없는 기획이었는데, 여러 매체에서 다룬 ‘역대급’ 최악의 게임들 대부분이 바로 이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설상가상 콘솔 게임이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분야의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게임부를 신설해 게임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콘솔 게임 개발사는 그야말로 우후죽순 생기기에 이릅니다.
한마디로 XX건설, 스타벅X, 페리카X, KT&X 등의 회사들이 게임개발에 뛰어든 셈이라고 할까요?
여기에 ‘아타리’에서부터 시작된 물량전은 다른 게임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일단 게임만 만들면 무조건 출시되기에 이르게 되고 이렇게 시장에 등장하는 게임의 질은 계속 하락하기만 했죠.
(분노하는 게이머들. 사진의 주인공 ‘앵그리버드’는 아타리 쇼크와 상관없음;)
꿀딴지곰 :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다름아닌 게이머들이었습니다. 표지나 게임소개를 보고 만만치 않은 가격을 치르고 게임을 구매했건만, 다른 게임들과 비슷한 심지어 버그투성이인 게임을 접한 게이머들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죠.
더욱이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포르노 게임이 등장하는 등 도를 넘은 부도덕함에 질린 게이머들은 점차 게임사들을 불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몇 번은 호구가 되어주었지만, 점차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죠.
(ET 표지. 저 소년이 만약 현실 인물이었다면, 땅 속에 파묻힐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꿀딴지곰 : 그러던 1982년, 스티븐스필버그 감독의 ‘E.T’가 흥행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이에 주목한 워너브라더스의 경영진은 황급히 천문학적 규모로 E.T의 판권을 사들인 후 크리스마스 시즌 전까지 ‘아타리’의 이름을 단 게임을 출시하라고 지시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지시가 불과 크리스마스 시즌을 5주 앞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것이죠.
5주 만에 블록버스터 급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황당한 지시를 받은 ‘아타리’의 개발진은 최선을 다해 게임을 개발했지만, 날림으로 개발한 게임에 그래픽적 감수성이나 재미 요소가 녹아있을 리 없었고, 온갖 버그와 저질 콘텐츠로 가득한 ‘게임 E.T’는 곧 대규모 반품 사태를 불러오게 됩니다.
엄청나게 판매되었다가 미친듯이 욕을 먹고 다시 반품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와 너무 재밌을 것 같은 게임…, ET)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자랑했다. 오른쪽에 저 녹색 캐릭터가 ET 맞다..)
꿀딴지곰 : 수요에 대한 분석 없이 영화의 명성을 빌어 성공을 확신하던 경영진의 오판 덕에 게임팩을 이미 수백 만장 이상 찍어낸 최악의 상황.
판매는 고사하고 대규모 반품 사태 덕에 악성 재고를 떠안게 된 아타리의 경영진은 이 수 십 만장의 ‘게임 E.T’를 뉴 멕시코에 있는 자신들 소유의 땅에 몰래 묻어버리기에 이르게 되죠.
더욱이 엄청난 손해를 겪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많은 저질게임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재고로 남은 게임들을 덤핑 할인하여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게임사들 모두 이 할인 경쟁에 뛰어들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가 크게 추락한 미국 게임시장의 모습)
꿀딴지곰 : 수익만 쫓는 게임사들, 게이머들의 실망만 안겨주는 무분별한 저질 게임의 난립, 그리고 전문성의 부족과 기업 윤리의 실종.
당시 북미의 콘솔 게임 시장은 온갖 문제로 가득차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게이머들은 이들 게임을 완전히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량은 넘치는데 수요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게임사들은 연이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매출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쳤죠.
또한, 콘솔 게임의 붐이 일던 당시 참여한 여러 업종의 투자사들은 수익이 감소되는 것을 보자마자 자본을 황급히 회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더 많은 게임사들이 자금난에 허덕이며 ‘줄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게임업계의 대공황, ‘아타리쇼크’가 시작된 것입니다.
(ET는 도움을 원했지만.. 게임업계 전체를 도움이 필요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이베이에서 이정도 가격에 팔리고 있는 ET. 더 비싸지기 전에 기념품 삼아 하나쯤 소장하는 건 어떨까)
꿀딴지곰 : ‘아타리쇼크’ 이후 39억 달러 수준까지 육박하던 시장이 불과 1억 달러로 추락할 만큼 미국의 콘솔 게임업계는 그야말로 ‘전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폭풍에 살아남은 몇몇 게임사들이 있긴 했는데요, 애플2 등 새로운 플랫폼으로 게임을 출시하기에 이르렀으며 해외의 유명 게임들을 수입해 공급하는 퍼블리셔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사실상 콘솔 게임 개발사는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내수 시장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관대함 그리고 막강한 구매력까지 북미의 게임시장은 해외 기업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였으며, 북미 콘솔 개발사가 거의 사라질 지경에 이르자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타리 쇼크 후 텅 비어버린 북미 시장에 눈독을 들인 닌텐도 게임들)
꿀딴지곰 : 이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가장 처음 발을 디딘 회사가 바로 패미컴(북미명 NES)를 앞세운 닌텐도였는데요, 닌텐도는 이전까지와 차원이 다른 수준의 게임들을 선보이며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이어 북미 시장에 진출한 세가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미국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게 됩니다.
이런 닌텐도와 세가의 양강 구도는 2000년대 들어 마이크로소프트가 Xbox를 내놓기 전까지 이어졌으며, 85년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사실상 일본 게임사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닌자’, ‘전국시대’, ‘기모노’ 등 일본 문화코드를 듬뿍 담은 게임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미국의 청소년 혹은 성인 게이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본의 문화 콘텐츠가 유입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북미 콘솔 시장에서 벌어진 ‘아타리쇼크’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 게임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꿀딴지곰 : 이처럼 ‘아타리쇼크’는 전문성을 잃어버린 경영진의 그릇된 방향성, 저질 게임의 난립, 도덕적 해이, 윤리의식의 부족 그리고 수익만 쫓은 게발사들의 부도덕함까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며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세계 게임업계에 크나큰 이슈를 불러일으켰고, 거기에 교훈을 얻은 콘솔 플랫폼 사업자들의 행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죠.
조기자 : 사실 아타리 쇼크와 다소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사건이 국내에서도 있긴 합니다. 국내에서도 경영진의 압박에 게임이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출시되었던 게임이 있잖습니까. 너무나 유명했던 사건 말이죠.
꿀딴지곰 : 흐… 설마.. 그 ‘마그나 카르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한국 게임역사에서도 큰 이슈를 보여주었던 마그나카르타 사태)
조기자 : 바로 아시는군요; 저는 아타리 쇼크나 마그나 카르타가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출이 급해서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출시됐다는 점, 개발기간이 극히 모자랐다는 점 출시 후 시장을 초토화시켰다는 점, 이후 반면교사로 작용했다는 점 등입니다.
꿀딴지곰 : 네.. 맞습니다. 근근이 먹고 살던 국내 콘솔 게임업계, 정확히 패키지 게임업계는 마그나 카르타의 영향으로 초토화되고 말았죠.
‘버그나 깔았다’, ‘만들다 말았다’ 등등 갖가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초도물량 8만 장을 예상한 대작 ‘마그나 카르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하긴 뭐 이정도 규모의 게임에 개발 기간 1년이라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죠. 상장하면서 매출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하지만, 본질은 역시나 게임 아니겠습니까. 상품을 망가뜨리면 결국 문제가 된다는, 큰 교훈을 남긴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멸종했던 패키지 시장. 명맥은 스마트폰 게임시대에서도 이어지는 중)
꿀딴지곰 : 사실 전문가들이든 게이머분들이든, 요즘 이 ‘아타리쇼크’를 현재 국내 게임산업에 빗대어 우려를 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죠.
비슷한 온라인게임, 동일한 방식의 모바일게임 등에 실망감을 느낀 분들 중에 특히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국내 모바일 게임시장도 경쟁이 치열할만큼 치열해졌고, 너무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게임들이 많은데다 저퀄리티 게임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때문에 이처럼 게임산업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며 게임업계 전체에 경종을 울린 ‘아타리쇼크’를 기억하여, 과거의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다시 이런 참사가 게임산업에 발생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
조기자 : 휴.. 교수님. 좋은 말씀 이십니다. 국내 게임업계가 요즘 너무 확률형 아이템과 함께 해외 진출이 어려운, 갈라파고스 형태의 발전이 감지되고 있는데.. 절대 좋은 현상은 아니거든요. 이제부터라도 창의적이고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게임성을 가진 게임들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꿀딴지곰 : 재청입니다!!!
조기자 : 흐 그러면 오늘은 좀 짧은 감이 있지만 이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꿀딴지곰 : 네 조기자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조기자 : 네에 교수님.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주에 뵙지요. 이렇게 이번 시간에는 ‘게임업계 최악의 사건 아타리쇼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는데요, 혹시나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조기자 ([email protected])나 어릴적 추억의 고전게임 이름이 궁금할때 꿀딴지곰 지식인 질문하기http://kin.naver.com/profile/valmoonk 로 문의주시면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꿀딴지곰 소개 :
꿀딴지곰
레트로 게임의 세계란 ‘알면 알수록 넓고 깊다’며 더욱 매진해야겠다는 레트로 게임 전문가. 10년째 지식인에서 사람들의 잊어버린 게임에 대한 추억을 찾아주고 있는 전문 앤서러이자 굉장한 수준의 레트로 게임 헌터이기도 하다.
조기자 소개 :
조기자
먼산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나니 레트로 게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게임기자. MSX부터 시작해 과거 추억을 가진 게임물이라면 닥치는대로 분석하고 관심을 가지며, 레트로 게임의 저변 확대를 위해 레트로 장터나 네오팀 활동 등을 하고 있다. 다양한 레트로 게임 개조를 취미삼아 진행중이며 버추어파이터 쪽에서는 igelau로 알려져있다.
[기자수첩] 한국판 ‘아타리 쇼크’ 올까
엔씨소프트의 주가가 4일 연속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작 ‘블레이드 & 소울 2’ 출시에도 불구하고 반등은커녕 52주 최저가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이어가는 중이다.
엔씨의 흥행 부진은 예상치 못했던 일로 평가된다. 그간 대형 게임사의 MMORPG는 흥행 보증 수표로 불리어 왔다. 블소2 역시도 원작 IP의 이름값에 마케팅 공세가 더해지면서 매출 상위권 진입은 정해진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존 흥행 공식은 여지없이 깨지는 분위기다. 현재 블소2의 구글 플레이 매출은 5위에 랭크돼 있다. 엔씨가 내놓은 신작마다 줄곧 매출 3위 안에 입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뼈아픈 결과다.
업계에선 블소2를 두고 원작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지나친 과금유도로 인한 유저들의 반발이 컸던 것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현 상황이 게임 하나의 단순 ‘해프닝’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 커뮤니티 내에선 국내 게임 산업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한국판 아타리쇼크’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도 일고 있다.
아타리쇼크는 게임 산업의 몰락을 일컫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북미 게임사 아타리는 1970년 세계 최초로 가정용 게임기 기기를 내놓으면서 비디오 게임 산업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질 낮은 게임들을 시장에 쏟아내면서 경쟁력을 잃은 아타리는 1983년 급속도로 무너지게 된다.
국내 게임 업계도 이 같은 위험 수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르 편중화’, ‘과금 모델 고착화’로 게임산업의 성장이 수년째 정체돼 있어서다. 대다수 유저들은 게임사들이 수익성에만 골몰하느라 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대형 게임사들은 그간 주력 타이틀로 MMORPG에 상당수 힘을 줘왔다. 장르 특성상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구글 플레이 기준 매출 5위까지는 모두 MMORPG다. 10위권으로 범위를 넓히면 무려 7개나 된다.
국내 MMORPG를 보면 아이템 강화부터 합성, 문양, 아바타, 변신, 펫 등 대부분에서 ‘랜덤박스’가 결합돼 있다. 비상식적으로 낮은 확률은 덤이다. 운 좋게 뽑았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다음 콘텐츠, 추가되는 아이템 등 경쟁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선 추가 과금은 필수다. 게임을 지속할수록 재미보다 과금에 대한 피로도가 끝없이 누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글로벌 시장은 어떨까. 북미 시장의 경우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캐주얼 게임이 대세다. 유럽 시장도 마찬가지다. RPG 왕국으로 평가받는 일본 시장에서조차 매출 1위는 ‘우마무스메’로 육성형 시뮬레이션 장르가 차지했다.
반면 국내 MMORPG는 대만(리니지M, 리니지2M)을 제외하고 외면받는 게 현실이다. 향후엔 엔씨가 자신했던 리니지 끝판왕 ‘리니지W’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글로벌 흥행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생긴다. 고과금 전략과 지나친 경쟁 구도는 큰 진입 장벽으로 다가올 수 있다.
최근 게임스컴에 공개된 펄어비스의 신작 ‘도깨비’ 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도깨비의 게임 플레이 영상은 200만 조회수를 넘어섰고 대다수 유저들로부터 신선한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도깨비 인게임 영상을 접한 한 유저는 “어른은 동심을 느낄 수 있고 아이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게임을 접했다”면서 “국산 게임에 전율을 느낀 것은 오랜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메타버스 요소, 뛰어난 그래픽 등 주목할 만한 포인트도 있지만, 결국은 게임의 본질인 ‘재미’에 집중하고자 한 개발진의 고민이 유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국내 게임사들의 개발능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은 정평이 난 사실 중 하나다. 그러나 일각에선 개발진이 참신한 게임을 들고 와도, ‘수익’에만 목매는 경영진이 퇴짜 놓기 일수란 자조섞인 얘기도 나온다.
리스크 없는 도전은 없다. 국내 유저들의 눈높이는 높아졌고 사골처럼 우려먹는 IP에 이들은 이제 대놓고 반감을 드러낸다. BM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사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성이 있다. 지금은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한 순간이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아타리 쇼크
다음은 Bing에서 아타리 쇼크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 와빌
- 그재무지
- 흥미만점
- 아타리쇼크
- 아타리
- E.T
YouTube에서 아타리 쇼크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재무지] 게임이 죽은 날…’아타리 쇼크’ | 아타리 쇼크,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