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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유명할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화 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왜 그렇게 유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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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 나무위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수많은 혁신적 기술들을 도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면이나 측면을 딱딱한 구도로 보고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구도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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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나리자(영어: Mona Lisa)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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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 브런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가장 많은 관람객을 자랑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이 그림을 보겠다고 전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24/2021
View: 455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모나리자 “숨겨진 비밀 속으로”
세계 최대 박물관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최고 인기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모나리자’다. 이 그림이 최근 케이크 테러(?)
Source: www.kidshankook.kr
Date Published: 2/11/2022
View: 3178
다빈치 걸작 ‘모나리자’에 케이크 던진 남성…이유가? – BBC
휠체어를 탄 할머니로 변장한 한 남성이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를 향해 29일(현지시간) 케이크 …
Source: www.bbc.com
Date Published: 6/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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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소개 –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
명작소개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 ~ 1519)의 ‘모나리자’ (Mona Lisa) 레오나르도 다빈치, 53 x 77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
Source: chedulife.com.au
Date Published: 7/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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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속 모델로 등장하는 여인의 일화 – 프랑스 관광청
16세기 초 바티칸에 나타난 신인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많은 이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자, 또 다른 거장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
Source: kr.france.fr
Date Published: 3/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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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다빈치 모나리자
- Author: 예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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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0.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3OI1-H1Ta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나리자(영어: Mona Lisa)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이탈리어와 프랑스에서는 라 조콘다(이탈리아어: La_Gioconda, 프랑스어: La_Joconde)라 하는데 이는 “조콘도의 부인” 또는 “명랑한 여자”, “웃고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1]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걸작으로 여겨지는[2][3] 이 작품은 “전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작품을 직접 보기위한 방문객이 가장 많으며[4],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많이 노래되고, 가장 많이 패러디된 예술 작품”이다.[5] 수수께끼 같은 표정 때문에 말도많고 끊임없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 모방되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며 세상에 가장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는 유명세를 지니고 있지만 정작 이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6] 알려진 몇몇가지 들은 대부분 후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일뿐이다. 작업을 시작한 시기나 총 작업기간, 의뢰자나 모델의 정체등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 그 과정을 적어놓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7] 따라서 전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 작품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였다.[8]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업을 처음 시작한것은 1503년경으로 추정되며 의뢰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보관하며 틈틈이 작업하였던것으로 보여진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이주한후에도 조금씩 작업을 하여 1517년경에 프랑스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눈썹이 없는 것이 작품의 특징중 하나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며 이로 인하여 미완성 작품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소장하고 있다가, 1797년부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9] 그러던중 1911년 8월, 루브르 미술관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빈첸조 페루자가 훔쳐서 이탈리아로 반출하였다. 피렌체의 골동품상에게 넘기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며 발각되었고, 1914년 1월 프랑스에 반환되어 현재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이 그림은 여러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인 유화기법을 사용했으며, 선을 부드럽게 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10]
제작 [ 편집 ]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 동방박사의 경배,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그 제작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임이 명백한 작품이다. 1503년 10월부터 리사 델 지오콘도의 초상화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며[13][14] 1503년 또는 1504년에 피렌체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이론도 있다.[15] 루브르 박물관은 “의심할 것 없이 1503년에서 1506년 사이에 그려졌다”고[16] 서술하지만 미술사학자 마틴 켐프는 확실히 날짜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17] 알레산드로 베초시는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 말기인 1513년 이후의 스타일로 그려졌다고 본다.[18] 1513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주장에도 문헌적 근거가 있는데,[19] “4년 동안 그림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었다”는 바사리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20]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1516년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로부터 앙부아즈성 근처의 클로 루체(Clos Lucé)에서 일하도록 초청받았을 때 모나리자도 들고 가서 계속 작업했다고 본다.[21] 미술사학자 카르멘 C. 밤바흐는 레오나르도가 1516년 또는 1517년까지 이 작품을 계속 다듬었을 것으로 본다.[22] 이 때 1517년경 레오나르도의 오른손이 마비된 것이 모나리자가 완성되지 않은 까닭으로 본다.[23][24][25][26][a]
1550년에 출간된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이 그림은 1503년 여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라는 상인이 새로 지은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 두기 위해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했다고 한다.[28] 그런데 이 작품은 의뢰자에게 전달되지 못했는데 이에 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의뢰를 받은 몇 달 뒤에 베키오 궁을 장식할 작품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두번째는, 그 당시 조콘도의 부인은 이미 아이 셋을 낳은 애 엄마였으나 조콘도가 원한 것은 23세로 아직 젊지만, 모성애 가득한 여인을 그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조콘도의 기대와 달리 왠지 무서운 배경속에 눈썹 없는 여인이 맘에 들지 않아 인수를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눈썹이 없는 여인은 행실 나쁜 여인들을 가리키기도 했기 때문이다.[29] 또 다른 설은 다빈치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을 의뢰자에게 내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빈치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1519년 레오나르도의 죽음 이후 그 행적, 제작 동기와 시기에 대한 상반된 기록들, 라파엘로의 스케치의 세부 사항 차이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두 장의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30][31][32][33] 이 주장에 의하면 첫 번째 그림은 1503년 즈음에 지오콘도가 의뢰하여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조수인 살라치가 1524년 사망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중인 작품으로, 1513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의뢰로 그려져 1518년 살라치가 프랑수아 1세에게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31][32][33][34] 진정한 모나리자는 단 하나였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운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7][35][36]
16세기 언젠가 그림에 니스가 발라졌다. 모나리자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으로 옮길 때까지 퐁텐블로궁에 보관되어 있었고, 프랑스 혁명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37]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서 영구 전시되었다.[38]
모델 [ 편집 ]
모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그림의 모델은 1479년 피렌체에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상인인 프란체스코 디 바르토로메오 델 조콘도(Francesco di Bartolomeo del GiocondO)와 결혼한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이며,[39][40] 그녀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얻기 위해 악사, 광대 등을 동원했다는 주장이 있다.[10] 그러나 미국 뉴욕 소재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의 릴리안 슈워츠 그래픽 컨설턴트는 모나리자의 그림이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을 여성화시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여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41] 또 다른 이론인, 그림의 주제는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모델이 리자 델 조콘도(lisa del giocondo)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42]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 그리고 후경의 풍경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모나리자를 관찰해보면 구도를 가로로 평행하게 배치된 팔은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얹혀 있고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팔이 너무 아래쪽에 배치되어서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하단부에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난간을 그려 넣어 그 둘 사이에 거리감을 조성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모나리자는 난간 앞에 서있다. 인물이 눈에 훨씬 더 잘 들어는 플랑드리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앞쪽 아랫부분에 작은 난간을 두어 인물이 그 난간 위에 손을 얹고 있도록 묘사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난간을 그녀의 앞이 아닌 뒤에 배치하고 그 대신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어떤 틈도 없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관람자의 공간 속으로 끌어다 놓은 것이다.
다빈치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을 했고, 사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도난 사고 [ 편집 ]
1911년 모나리자의 절도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화가 루이 베루드가 그린 모나리자의 모작.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1821년에는 튀일리궁에 있는 나폴레옹의 침실로 잠시 옮겨지기도 하였다.[43] 1860년대에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일부가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44]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동안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브레스트 해군기지로 옮겨졌다.[45]
1911년 8월 21일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한다.[46] 1911년까지만 해도 이 그림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었다.[47] 박물관측은 다음 날 화가 루이 베루드가 모작을 위해 방문한 후에야 도난 사건을 알았는데, 처음에는 사진촬영을 위해 어딘가로 옮겨진 줄 알았다가 나중에 도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루브르 박물관은 조사를 위해 일주일간 폐관했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부정적 주장을 펼쳐온 프랑스의 모더니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에 용의자로 지목되고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 역시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무죄가 확인되었다.[48][49] 진범은 루브르 박물관의 직원으로 작품의 유리 케이스를 만드는 일을 하던 빈첸초 페루자였다.[50] 그는 박물관이 문을 닫은 뒤 평소 시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빗자루 옷장에 숨어 있다가 외투 밑에 그림을 숨겨놓고 걸어 나오는 방식으로 모나리자를 빼돌렸다.
페루자는
1911년 도난되어 작품의 자리가 비어있다. “La Joconde est Retrouvée” (“모나리자의 귀환”). 《쁘띠 파리지앵》 1913년 12월 13일 호. 1913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에서 전시중인 모나리자. 그림의 우측에 미술관 관장 지오반니 포기가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La Joconde est Revenue” (“모나리자, 돌아오다.”), 《Excelsior》, 1914년 1월 1일 호
이탈리아인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이탈리아에 반환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하였으나,[52] 그림이 도난당한 후 모나리자의 가치가 크게 상승할 것이라는 동료의 꼬드김에도 영향을 받았다.[53] 페루자는 자기 집 난로 밑에 2년 동안 숨겨두었다가,[54]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의 관리인 조반니 포그에게 모나리자를 팔려고 시도하다가 붙잡혔다. 이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2주간 전시되었고 1914년 1월 4일 루브르 박물관에 반환되었다.[55] 페루자는 이 범죄로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환영을 받았다.[49] 도난 사건 1년 후, 이 절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에두아르도 드 발피에르노라는 인물도 나타났다. 이브 초드론이라는 인물이 모나리자 6장을 위조하여 미국에서 판매할 예정이었다고도 했다.[53][56]
2차 세계대전 이후 [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앙부아즈성으로, 그 다음에는 로크디외 수도원에서 샹보르성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몽토방의 잉그레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56년 12월 30일에는 우고 웅가자 빌레가스라는 한 볼리비아인이 돌을 던져 모나리자 왼쪽 팔꿈치의 염료가 일부 떨어져나가는 일도 발생했다.[57] 이미 이로부터 몇 년전 한 남성이 면도칼로 그림을 베어 훔쳐가려고 시도한 일이 있던 터라 유리창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덕분에 더 이상 훼손되는 일은 없었다.[58] 이후로는 방탄유리로 그림을 감싸두었다. 1974년 4월 21일에는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전시중에 한 여인이 박물관이 장애인들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며 빨간 스프레이를 뿌리는 방식으로 항의한 적도 있었고,[59] 2009년 8월 2일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거부당한 러시아 여인이 루브르 박물관의 기념품숍에서 판매하는 머그컵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60][61] 후자의 경우 컵 파편이 유리 케이스 내부로 들어가긴 했으나 둘 모두 그림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논란 [ 편집 ]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눈썹을 뽑는 것이 당시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모델도 눈썹이 없는 상태였다는 주장과[62], 모나리자 작품이 눈썹을 그리지 않은 미완성작이라는 설이 있다. 모나리자를 연구한 엔지니어 파스칼 코트는 “모나리자 눈썹이 청소 중에 지워졌다”며 “모나리자의 눈 주위를 자세히 살피면 미세한 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나 그림 복원가가 눈 부위를 부주의하게 닦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63][64] 또한 라파일이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기둥이 있었지만 다빈치의 그림에는 기둥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액자 제작자가 그림을 액자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기둥 부분을 잘라내버렸다’는 주장도 제기된다.[65]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현재 그림과는 달리, 처음에는 머리를 묶은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그린 그림에는 붓 자국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66]
1919년에는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만 붙인 L.H.O.O.Q라는 작품을 그려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7년 8월에는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초안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초안의 밑그림에는 원래 손이 포개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67]
모나리자의 상반신 또한 4분의 3각도를 취하고 다 관람자를 향해 약간 목을 돌린 모습이다. 두 눈은 우리를 똑바로 내려다보듯이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 우리가 다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해 그림 하단부를 막고 있는 팔부터 눈에 이르기까지 모나리자가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관람자는 그녀의 시선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서양화 최초의 누드화라고 알려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베누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인물의 시선 아래 있는 것만 같은 느낌과 같이 <모나리자>에서 인물의 시선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후경을 잘 관찰해보면 비논리적인 점이 보인다. 관람자의 시점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높은 산과 거울처럼 평평한 수평선이 왼쪽에 비해 다소 올라와있는 호수가 보인다. 반면에 왼쪽 풍경은 오른쪽보다 낮다 다시 말해 두 부분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상 거기에 인물 자체와 모나리자의 미소에 의해 감춰지고 변형된 간격인 단절이 있다. 모나리자의 입술은 오른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다. (좀 더 높게 그려진 오른쪽 풍경 쪽으로) 양쪽 두 풍경 사이의 불가능한 이행이 인물 속에서 바로 인물의 미소를 통해 실현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오비디우스 예찬론자로 <변신 이야기>를 열심히 읽었다. 레오나르도는 오비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미란 바로 덧없음, 즉 시간의 무상함이라고 생각했다.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헬레나는 ‘제 모습이 오늘은 아름답지만 시간이 흐르면 과연 어떻게 변할까요?’라는 말을 한다 이는 시간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에 바로 이런 우주적 사색과 통찰을 투영한 것이다. 바로 미소의 덕이기 때문이다. 미소란 덧없는 것으로 짧게 스치는 작은 웃음으로 얼굴에 잠시 머물 뿐이다. 또한 페드레티에 따르면 풍경에서의 다리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다리가 있다는 것은 강물이 있다는 것인데 강물은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상징이다. 이에 모나리자의 핵심 주제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각주 [ 편집 ]
내용주
↑ [27]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년에 단 한 개의 작품도 완성시키지 못한 것을 비통해했다.
참조주
04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가장 많은 관람객을 자랑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있다. 이 그림을 보겠다고 전 세계에서 관람객들이 몰려오는 통에 관람객의 수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가다 그 그림 앞에 도달하는 순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초에 불과하다. 어떠한 이유와 계산에 의해 30초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증 사진을 찍기에는 충분한 시간일 수는 있다.
신비로운 미소를 띠는 여인의 초상을 담은 ‘모나리자’는 그 유명세로 인해 엄청난 패러디를 양산하고 이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의 출처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탈리아 화가 조르지오 바사리의 책 ‘The Lives of Painters’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림 속 여인은 플로렌스의 실크 상인 프란시스코 델 지오콘도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지오콘다)로 이 그림은 지오콘도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림이 의뢰된 시기인 1500년대 초 플로렌스에서 유행하던 초상화의 유형을 따르고 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독창적인 기술과 사상을 담은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1503-1516), 루브르 박물관
여인의 모습 그 자체에서 오는 신비한 매력 뿐 아니라 그림의 배경이 풍기는 독특하고 아련한 분위기는 스푸마토 기법의 사용으로 한층 더 고양된 느낌을 준다. 눈썹이 없는 것이나 특정 각도에서 보면 웃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등 알쏭달쏭 오묘한 요소들은 그림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양산하며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보통 초상화는 그림의 모델과 직접적인 연결성이 있다. 모델과의 유사성은 물론이요, 모델의 사회적 지위나 부의 정도, 성격이나 심리 상태를 담아냄으로써 모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화가의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예술적 표현과 가치에 감탄을 하도록 만든다.
다빈치가 평생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품
하지만 ‘모나리자’는 흔한 초상화와는 그 결을 달리한다. 이 그림이 단순히 초상화에만 머물렀다면 아마도 이리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적 결정체로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완성하고자 한 그림의 기법, 그가 온전히 담아내고자 한 세상의 이치, 그가 반드시 이루고자 한 예술의 정신이 이 그림으로 체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모나리자’를 논하면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그림의 모델과 어느 정도 닮았는지에 대한 유사성에 있지 않다.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과 궁금증은 당연히 대두되었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쉬운 문제에 해당된다.
위에서 밝힌 대로 그림 속 여인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그 보다도 더 많은 이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은 이 그림이 그림 속 여인 그 자체 보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에 더욱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는 순간까지 소장하고 있던 그림 중 하나였다. 그림이 의뢰된 시기로 추정되는 1502년을 시작으로 그림이 완성된 시기는 대체로 1503년에서 1506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의뢰인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완성 시기가 1510년 이후로 추정되기도 한다.
완성된 그림을 의뢰인에게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 그림이 정식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이나 가족의 부탁으로 착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반드시 전달해야만 하는 의무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언제까지라는 기한도 엄격히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느끼기에 더욱 더 완성시켜야 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되었다면 굳이 전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빈치가 마지막 3년을 보낸 프랑스
그리하여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생의 마지막 3년을 보낸 프랑스에까지 동행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를 가게 된 이유는 당시 새로 프랑스의 왕이 된 프랜시스 1세의 적극적인 후원에 따른 것이었다. 평생 든든한 후원자를 찾아 헤맨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프랜시스 1세는 더없이 좋은 인물이었다.
예술과 배움에 관심이 많았던 프랜시스 1세는 이탈리아 밀라노를 정복하고 곳곳을 여행하던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 그의 박식함과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완전히 반했던 것이다.
이후 프랜시스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신이 살고 있는 프랑스로 초청하고자 애를 썼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비하면 많이 뒤쳐져있던 프랑스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싶었던 프랜시스 1세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훌륭한 스승이자 귀감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실제로 프랜시스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철학에 매료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앵그르가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츠의 죽음'(1818), 쁘띠 팔레.다빈치가 숨을 거둘 때 프랜시스 1세가 직접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왕을 만난 뒤 다시 로마로 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프랜시스 1세는 다양한 루트를 이용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로 오도록 하기 위해 몇달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노쇠한 중에 있던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지만 지식과 탐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젊은 시절만큼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워낙 완성도에 집착하는 성격이라 완성된 작품이 많지도 않은 그가 커미션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놓고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프랜시스 1세는 엄청난 후원을 보장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러한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51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알프스를 건너 프랑스로 향했다.
그 당시 그의 손에 들린 그림은 3개였다. ‘Virgin and Child with Saint Anne’, ‘Saint John the Baptist’, ‘Mona Lisa’가 그것이었다. 1517년 프랑스에 머물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한 Cardinal Luigi of Aragon의 수행단이었던 비서관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세 개의 그림을 보여준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플로렌타인에서 온 노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씨가 플로렌타인 여인의 실사 초상화, 젊은 세례 요한, 성 앤느의 무릎에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등 세 개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모두 완벽했다.”
여인의 초상에 완벽을 담아내다
그가 거론한 플로렌타인 여인의 초상화는 바로 ‘모나리자’를 말한다.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유명인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한 여인을 그린 그림이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와 같이 설명했을 것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자신을 방문한 주교 수행단에게 자랑스레 보여줄 정도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그림에 집착한 것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의 한 마디로 모든 설명이 충분해진다.
바로 “완벽한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고위층을 그린 초상화라면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할 뿐 아니라 기한도 정해져있어 본인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친분에 의해 착수한 평범한 여인의 초상이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기술을 담아 한 여인의, 한 인간의 내면과 외모를 넘어서 인간 본연 및 자연에 대한 탐구를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열정과 사상, 기술과 노력이 깃든 최고의 걸작이자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낸 신비로움의 결정체로 후세에까지 남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모나리자’의 그림 속 여인이 누구인지 보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색깔 하나하나, 선 하나하나, 형태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다양한 추측과 해석을 내놓고 있다.
150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옆을 지켰던 제자들과 하녀, 형제에게 자신의 재산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모나리자’를 포함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그림들은 그의 제자 살라이에게 전해졌다.
어떻게해서 그 그림들이 모두 살라이에게 돌아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언장에는 오로지 밀라노의 포도밭의 절반만을 살라이에게 남긴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기 전에 이 그림들을 받은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모나리자’와 그밖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그림들은 살라이에게 전해진 뒤 최종적으로 프랜시스 1세에게 팔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좌) ‘모나리자’가 놓여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습 / (우) 1911년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비어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벽
이후 ‘모나리자’의 유리관을 제작하는 일을 했던 이탈리아 작업꾼에게 1911년 작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있었다. ‘모나리자’의 모사품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한 무리와 작당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가 겉으로 내세웠듯이 ‘모나리자’를 이탈리아로 되돌려 보내려는 일종의 애국심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2년 동안 그의 아파트에 모셔놓았던 ‘모나리자’를 우피치 미술관에 팔려는 과정에서 붙잡히게 된 그의 생각을 존중한 것인지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가기 전 우피치 미술관에 2주 동안 전시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고의 걸작 ‘모나리자’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어찌 보면 예술에 대한 후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노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조국을 떠나 숨을 거두기까지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은 프랑스 왕, 이탈리에에 못지 않은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이루고자 한 프랜시스 1세에 의해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작을 영원히 수성하게 되는 행운을 쥐게 되었다. ‘모나리자’의 신비롭고 영원한 미소는 결국 프랑스에게로 향한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모나리자 “숨겨진 비밀 속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계 최대 박물관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최고 인기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모나리자’다. 이 그림이 최근 케이크 테러(?)를 당했다. 30대의 한 남성이 “지구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외치며 케이크를 던진 것. 다행히 방탄유리 속에 있어 작품은 훼손되지 않았고 범인은 현장에서 잡혔다. 이 그림은 제작된 지 500년이 넘었는데도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 많다. 모나리자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다빈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남자 모나리자’에 대해서도 안내한다.
△모나리자는 어떤 작품?
‘모나리자(Monna Lisa)’는 8절지 보다 약간 큰 가로 53cm, 세로 77cm 유화다.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의 여성을 담은 이 그림은 1503년 무렵 다빈치가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 그렸는지, 누가 모델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빈치가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전까지 한 해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루브르박물관을 찾는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근거로 모나리자의 경제적 가치를 최대 40조 원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작품의 순수가치는 1조 원대 이상이다.
△모나리자 모델은?
1550년에 쓴 ‘미술가 열전(바자리)’에 따르면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자 상인 프란치스코 조콘다의 부인 리자를 그린 것이다. 1503년부터 4년간 초상화를 제작했다. 이탈리아 말로 모나는 마돈나(Madonna)의 준말로 ‘부인’이라는 뜻. 따라서 모나리자(Monna Lisa)는 ‘리자 부인’이다.
이 작품은 인물의 눈썹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대해 ‘당시 미인의 기준이 넓은 이마여서 눈썹을 뽑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지만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등 여러 가설이 전해지고 있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의 한 연구진은 모델이 리자가 아니라 그의 조수였던 ‘살라이(작은 악마라는 뜻)’라는 의견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모나리자 얼굴에도 황금비율?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미적으로 아주 완벽한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한다. 누워서 팔과 다리를 쭉 뻗은 사람이 완벽한 기하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일치하는 모습으로, 1:1.618034이다. 다빈치 역시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의 설명을 보고 1480년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인체 비례도)’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가운데 정사각형은 두 팔을 벌린 너비와 사람의 키가 같음을 보여 준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그렇다면 모나리자는? 그림 속 여인의 얼굴 자체가 황금비율이다. 얼굴 가로의 길이를 1이라고 하면 세로의 길이는 1.6이다. 턱에서 코밑까지와 코밑에서 눈썹까지 길이도 1:1.6 정도다. 말하자면 여인의 얼굴을 모두 황금비로 그린 것이다.
△모나리자의 알쏭달쏭 미소는?
모나리자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볼 때마다, 보는 위치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또 다른 특징은 그림 그 어디에도 윤곽선이 없다는 것. 이는 다빈치가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스푸마토는 이탈리아어로 ‘연기처럼 없어진’혹은‘희미해진’이라는 뜻. 윤곽선이나 경계선이 드러나지 않게 색조를 섬세하고 부드럽게 변화시켜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인물 뒤쪽으로 보이는 풍경은 물론 모델의 얼굴까지도 이 기법으로 표현했다.
△모나리자가 미완성인 이유?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미완성작으로 남겼다. 이탈리아 의료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다빈치의 오른손 마비를 들었다. 16세기의 화가 지오반 암브로지오 피지노가 그린 다빈치의 초상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림 속 다빈치의 손은 옷으로 감겨 있으며, 뻣뻣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빈치가 말년에 손에 이상이 생긴 뒤 붓을 쥐는 데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남자 모나리자는?
다빈치 작품 가운데 ‘남자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로, 라틴어로 ‘구원자’를 뜻한다. 그림은 왼손에 크리스털 구슬을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예수의 모습을 담았다.
1500년경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부탁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복원을 거쳐 201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5026억 원에 팔렸다. 낙찰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 압둘라 무함마드. 다만, 그림 속 색상과 옷 모양 등을 근거로 다빈치의 제자인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박스]다빈치 전시관제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 박물관은 이탈리아에서 가져 온 다빈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다빈치 발명품의 작동 모형 등 3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국내 유일의 이탈리아 테마파크 ‘피노키오와 다빈치’에서도 다빈치 관련 작품을 만날 수 있다. B동 지하 1~2층은 다빈치 전시관으로, 명화와 다빈치 설계도를 재현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모나리자 속 모델로 등장하는 여인의 일화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이라 그와 엮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의 어머니의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가장 그리운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나리자>의 어떤 부분이 그의 어머니와 닮아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확실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인을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라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정체가 불분명해도 다빈치가 가장 아끼던 여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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