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잡지 | [가사 읽기] 세븐틴 – 웃음꽃/[Read Lyrics] Seventeen – Smile Flower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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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 웃음꽃
(작사 우지)
그냥 왜인지 모르게 가끔씩 문득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어 요즘
이렇게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너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지금의 우리
그런 우리가
정말 언젠가 불행하게도
떨어지게 되면
그땐 어떡하지
물론 그럴 일 없겠지만
이런 상상은 정말 하기도 싫은데
가끔씩 떠올라 넌
부디 이런 생각나지 않길
함께라서 웃을 수 있고
너라서 울 수도 있어
그렇게라도 못할 게 어딨어
언제 어디에 있어도
함께하지 못해도 우린 늘 그렇듯
웃음꽃 피워요
그대 미소에 봄이 돼줄게요
아낌없이 난 늘 너에게
받기만 하는 것만 같아
그래서 눈물 나도록
고맙고 더 미안해
꽉 안아주고 싶어도
왠지 모르는 불안함에
망설이는 건 뭔지
이러고 싶지 않은데
하늘이 높고 바람은 차고
바다가 넓고 푸른 것처럼
내 눈에 네가 그저
당연하게 바라봐질까 봐
그게 불안해서
이러는 것만 같아
널 잃어버릴까 봐
부디 넌 나 같지 않기를
함께라서 웃을 수 있고
너라서 울 수도 있어
그렇게라도 못할 게 어딨어
마지막이란 말
하지 마 영원히
내가 너의 곁에 남아있을 테니
우린 정말 무슨 일 있어도
언제나 그랬듯 함께 있을 거예요
마지막이란 말
하지 마 영원히
무슨 일 있어도 우린 늘 그렇듯
웃음꽃 피워요
언제 어디에 있어도
함께하지 못해도 우린 늘 그렇듯
웃음꽃 피워요
그대 미소에 봄이 돼줄게요
#세븐틴 #좋은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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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음악잡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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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3/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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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 월간객석

『음악계』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로 기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작곡가 홍난파(1897~1941)가 발행한 것으로 계간지였다가 월간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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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uditorium.kr

Date Published: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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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지 중고거래 | 취향을 잇는 거래 번개장터 중고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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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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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지 어떤거 보세요 – 고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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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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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지 사망시대에 창간이라니? – 프레시안

음악잡지 사망시대에 창간이라니? [인터뷰] <대중음악 SOUND> 창간한 박준흠 “방법론 제시하는 매체 되고파”. 이대희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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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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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음악잡지들 온라인서 부활 – 동아일보

국내 최장수 대중음악 전문지인 ‘핫뮤직(Hot Music·2008년 종간)’ 전권이 최초로 온라인에서 부활한다. 고음질 음악 전문 사이트인 ‘그루버스’ 측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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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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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지들은 어디로?? – Melon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존재했던, 현재는 모두 폐간된 대중음악지들의 이름이지요. 한 때는 서점 입구의 잡지코너 한 켠에 자리했지만, 지금은 콜렉터들의 책장에서나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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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2.melon.com

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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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음악 잡지

  • Author: 다읽남[다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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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8.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djYKrK9Skc

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SPECIAL ISSUE 1

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한국 음악잡지 100년사 한국음악사에서 음악잡지는 단순한 역할을 벗어나 학술지와 자료집, 역사적 의미를 겸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객석’ 창간 기념호를 맞아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음악잡지의 100년사를 정리해본다

1910~1920년대 홍난파와 음악잡지의 출현

『음악계』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로 기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작곡가 홍난파(1897~1941)가 발행한 것으로 계간지였다가 월간지로 바뀌었다. 1918년에 도쿄로 유학을 떠난 홍난파는 1927년에 또 한번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이를 계기로 『음악계』는 7호를 끝으로 한다. 조선 음악계의 과거와 장래를 논하거나, 음악 해설과 평, 알기 쉬운 음악 상식 등이 실렸다. 홍난파가 『음악계』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광』➊의 발간 경력 덕분이었다. 1차 도쿄 유학(1918~1919) 시기에 도쿄의 조선유학생악우회가 발간한 잡지다. 음악에 집중한 『음악계』와 달리 『삼광』은 종합 예술지였다. 음악, 미술, 문학에 관한 기사를 취급했고, 제호인 ‘삼광(三光)’은 세 분야의 예술에서 빛이 되겠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일본을 통한 서구 문화의 세례를 잔뜩 받은 홍난파의 다종다양한 관심이 이 책의 구성과 목차를 만들었다. 홍난파와 시인 황석우가 주요 필진이었다. 근대 예술의 전문가가 극도로 빈약했던 당시, 홍난파는 여러 필명으로 지면을 채웠다. ‘ㅎ·ㄴ·ㅍ’, ‘H·Y·H’, ‘ㅎ·ㅇ·ㅎ’, ‘도·레·미’ 등이 그의 필명이었다. 『삼광』은 홍난파의 귀국으로 인해 2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최남선이 1908년에 발행한 『소년』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였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종합 예술지로서의 『삼광』의 출현은 매우 빠른 행보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음악과 시』➋는 1930년 8월에 창간됐다. 50쪽 분량의 잡지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문단에서 성행한 카프 열풍이 음악계에 준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카프는 1927년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정치 투쟁을 강조하는 신강령을 채택했는데, 『음악과 시』는 음악이야말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음악과 시』는 창간과 동시에 폐간됐다. 1934년에는 『음악』➌이 창간됐다. “조선에 서양음악이 수입된 지 60여 성상(星霜)”이 되었고, “남부끄럽지 아니한 연주가와 작곡가를 산출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음악에 대한 기관지와 전조선음악계를 대표할 조직체가 없음으로 전조선 내외 음악가의 후원으로 조선음악계를 대표할 기괸지 음악(音樂)을 창간코저 음악사(社)에서 준비 중”이라고 기록(조선일보 1934.5.26)되고 있다. 이를 발행한 최성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상과대학 재학 시절, 서클인 연희전문사중창단에서 테너로 활동했다. 중창단의 인기는 오늘날 팬텀싱어와도 같았다. 졸업 후 최성두는 경성 본정통(지금 충무로)에서 악기점과 음악사(音樂社)를 운영했다. 『음악』은 일본에서 초빙하는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1936년, 음악평론가 김관이 『음악평론』➍을 창간했다. “김관 씨의 편집에 의한 음악 전문잡지 ‘음악평론’이 4월 초에 창간되리라 하는데 사무소는 경성부 다옥정(茶屋町) 5”(동아일보 1936.3.24)이라는 기사가 잡지의 출간을 알렸다. 『음악』과 『음악평론』은 종합예술지가 아닌 음악에 중심을 두었다. 『음악』은 공연 보도를 중심으로 했다. 1936년 4·5월, 두 차례에 걸쳐 발행된 『음악평론』은 공연은 물론 방송과 음악, 교육, 음악과 시 등을 통해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살폈다. “음악평론의 1930년대를 추적한다는 것은 평론가 김관의 성장과 그 한계를 보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행인 김관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평론가였다. 특히 조선에 토착화되지 않는 서양음악을 물신(物神)하는 서구 중심적 사고관을 타파하고, 음악에 대한 민족적·민중적 입장을 수렴하고 이념화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1940년대 해방공간

1945년 광복 이전의 음악 출판물들은 음악교과서와 창가집이 주종을 이루었고, 창작가곡집, 동요집, 악전, 찬송가집 등이 소수를 이루었다. 그나마 대중적 수요가 거의 없는 전문 음악교재나 악보는 일본에서 출판된 것을 직수입하여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쓴 음악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나온 그 양은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것보다 많았고, 내용도 다양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우익의 대립과 논조는 이러한 잡지와 기사물들을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문학·미술·연극·영화 등에 비해 음악은 사회 참여적 자세보다 음악가 개개인이 추구하는 음악관에 따라 잡지들이 성향을 갖춰나갔다. 『예술통신』은 해방공간의 예술전문 일간지였다. 1945년 10월 2일 창간되어 1947년 3월 2일 412호까지 발행하고, 3월 11일부터는 문화일보(현 문화일보의 전신이 아님)로 제호를 바꿔서 발행되었다. 『예술통신』은 영화를 비롯하여 출판,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크다. 1946년에 창간된 『음악주보』➎도 『예술통신』과 같은 신문 모양새(8절지 1매)였다. 1946년 금수현(금난새 부친)이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경남음악협회가 발간한 『음악주보』는 해방 후 처음으로 나온 음악전문 간행물이다. 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상남도의 각 학교에 배부하였다. 월 3원의 유가지(有價紙)였음에도 인기가 많아 매주 2천부를 찍었다고 한다. 금수현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51년 부산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도서와 악보를 출판했고, 1970년 월간 『음악』을 창간했다. 1949년 9월, 서울교향악협회는 『필하아모니』➏를 발행했다. 서울교향악협회는 “정부 당국자와 민간 유지들이 대동단결하야 종전의 서울교향악단을 중심으로” 조직한 협회였다(조선일보 1948.11.16). 2년간 간행된 책의 발행인은 김생려(지휘), 주간은 김성태(작곡)였다. 서울교향악단은 1945년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이 재발족한 것이고, 현재 서울시교향악단의 전신이기도 하다.

1950년대 전쟁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음악계는 위축됐다. 음악가들은 흩어지거나 군대의 문화선전대 등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10월, 소속 대원 120명 전원을 해군문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정훈음악대도 재발족되었다. 오늘날 서울시향은 정훈음악대를 전신으로도 삼는다. 따라서 여기서 발행한 『정훈음악』➐은 오늘날 서울시향의 월간지 『SPO』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전쟁 후, 1955년 국민음악연구회가 『음악』을 발간했으나 2년 만에 폐간했다. 하지만 이강염이 운영한 국민음악연구회는 음악출판사로 『고등음악통론』(김형근·1957), 『한국음악연구』(이혜구·1957), 『초등화성학』(박태준·1958), 『세계음악사』(이강염·1959) 등을 발행하며 음악 출판을 선도해나갔다. 1958년 음악문화사(社)가 『음악문화』➑를 발간했고, 1959년 신문화사에서 『음악문화』를 창간했다.

1960년대 틀이 형성되는 음악계

1960년대는 현 분단체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지배 시스템이 비롯된 기원이며, 계급구조와 문화구조, 이데올로기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한국 사회 근대성의 구조가 형성되는 출발점이다. 지금의 음악계도 당시의 공연과 교육 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음악 천재의 등장에 환호하기 시작했고, 콩쿠르가 시작되고, 유학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명곡해설 전집류이다. 이강염 편저 『세계명곡해설대사전』(국민음악연구원), 김형주의 『명곡해설전서』(현대악보사), 나상신 편저 『명곡해설대사전』(호악사) 등이 이 시대에 쏟아져 나왔다. 교양인-되기의 유행 속에서 1964년 음악세계사에서 ‘음악인·음악 애호가를 위한 월간지’를 표방하며 월간 『음악세계』를 창간했다. 『음악세계』➒는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해외 음악가들의 소식을 발 빠르게 실어 날랐다. 1965년 국민음악연구회에서 『음악생활』➓을 발행했으나 1년 만에 폐간되었다.

1970년대 공연과 레코드 붐

창간과 폐간을 반복하던 음악잡지들이 체제를 갖추고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1970년 7월, 금수현이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월간음악』은 논문 형식의 글과 번역물도 실었고, 한국음악론에 관한 지면도 많이 할애했다. 1973년에 『월간FM』과 『월간 스테레오』가 창간되었다. 제호처럼 라디오와 오디오 기기를 통한 음악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둔 두 잡지는 1960년 초반부터 시작된 클래식 음반 판매와 대중매체를 통한 음악감상의 소비가 1970년대 들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국악 순수음악 대중음악 팝송을 망라하는 『월간FM』 (…) 창간호는 「작곡가가 말하는 우리 작곡계의 전망과 꿈」을 비롯해 「FM에 관한 기호 상식」 「세계 명연주가 소개」 등”(동아일보 1974.2.27)을 담았다. 『월간FM』은 1976년 12월 제호를 『음악세계』로 변경했고, 1984년 중앙일보사로 운영권이 넘어가며 대중음악지로 바뀌었다. 『월간 스테레오』는 『월간음악』의 자매지로, 신간 레코드와 오디오 기기 소개가 주를 이루었다. 1978년에 창간된 『레코드음악』도 ‘레코드·오디오·음악 전문지’를 표방하며, “창간호엔 「레코오드의 올바른 취급법」 「오디오란 무엇인가」 「마르타 아르게리치」 「라자르 베르만」 「레나드 번스타인」 등 세계 저명 음악가들의 활동상 등”(동아일보 1978.2.27)을 소개했다. 1972년 『오디오』가 창간되기도 했다.

1980년대 잡지 춘추전국시대와 음악잡지

“올 들어 1백80개 잡지가 새로 창간, 모두 1천 6백 24종의 정기간행물이 경합을 벌이고 있어 잡지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1백84종에 이어 쏟아진 잡지 창간은 레저, 과학기술, 경제, 음악, 건강, 미술 등 전문분야별로 폭넓게 확산돼 잡지 전문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경향신문 1984.12.25) “전문잡지가 늘고 있는 것은 우릭사회가 그만큼 지적,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줘 반가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매일경제 1984.4.4) 사람들의 다양해진 취향과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여유는 다종다양한 잡지 시대를 열었다. 1982년 9월 『피아노 음악』, 1984년 3월 『객석』, 같은 해 4월 『음악동아』가 창간됐다. “음악의 경우 종래의 『월간음악』 『피아노음악』 『음악세계』 등은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가족 잡지 같은 성격을 띠어 왔다. 그러나 『객석』 『음악동아』 등은 일반 애호가들을 독자층으로 하고 있어, 예술가와 일반 독자들과의 사이에 보다 폭 넓은 교류 무대를 마련해 줄듯하다”(경향신문 1984.2.13). 『객석』은 창간사에 다음과 같이 적음으로써, 음악 전문잡지로서 초석을 다졌다. “‘사람의 겉을 다스리는 것은 예(禮)이고, 사람의 안을 다스리는 것은 樂(音樂)’이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이어오기까지 음악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 있읍니다. 많은 분들의 지도와 선각자들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 음악·공연예술지 ‘객석’을 창간하게 된 것도 예음이 지닌 뜻과 우리의 음악·공연문화와의 조화를 함께 살펴보고 싶은 의지입니다.” 창간호에는 윤이상, 윤정희와 바렌보임, 한국 최초의 중공 음악기행 등을 다루었고, 특별부록으로 오디오테스팅 테이프와 서울의 문화지도를 제공했다. 1985년 세광음악출판사에서 월간 『음악교육』을 창간했고, 1989년 『음악저널』이 창간되었다. 오디오의 보급과 유행은 1983년 10월 『오디오와 레코드』, 1987년 『스테레오 음악』으로 이어졌다. 오디오·레코드 전문잡지는 일종의 유행이 되어 “2만~3만부의 고정독자를 확보, 착실하게 부수를 늘”렸고, “이들 잡지의 성공에 힘입어 『계간 스테레오』 『프로사운드』 등 계간지와 『스테레오 가이드』 『오디오월드』 『하이비』 등 연간지”가 창간을 앞두기도 했다(경향신문 1989.3.2). 일간지는 ‘12월의 음악잡지’류의 기사(동아일보 1984.11.26)를 통해 그달에 발간되는 음악잡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도 했다. 1981년 서울대 음대에 이론전공이 신설되며 전문 평론가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잡지는 이들의 활동장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음악잡지 전성시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세계 여행자유화가 시작되고, 1990년대가 되어 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화의 문과 보폭이 커졌다. 해외 유학생과 내한하는 음악가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CD는 고가의 미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감상의 주요 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음악잡지의 부록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이러한 독자들의 성향에 맞춰 다종다양한 잡지가 발간되었다. 1994년 1월 『월간음악』이 복간(재창간)되고, 『레코드리뷰』가 창간되었다. 『월간음악』은 1970년에 창간됐으나 263호로 종간했다가 통권 제264호로 복간된 것. “잡지 한권 값은 6천 5백원으로 기존 잡지와 비슷하지만 부록으로 ‘도이치 그라모폰 콤팩트디스크’ 한 장을 끼워주”었는데, “음반의 국내 최저 보급가가 7천 5백원선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판매 방식”(한겨레 1994.1.16)이었다. 1995년 신년호에는 ‘재창간 1주년 특별부록’으로 30장의 CD를 제공하기도 했다. 악기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피아노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1995년 『리틀 피아노』가 발간되기도 했다. 1982년 발간된 『피아노음악』의 자매지로 음연(音硏)에서 발행했다. 1984년 창간한 『음악동아』는 판형을 바꾸어 1995년 1월호를 내어 제2창간을 단행했다. 이 호에는 영화예술 1백년을 기념해 최신 영화음악의 진수만을 골라 CD로 제작·배포했다. 1995년 『클래식 피플』, 『음악춘추』, 『레코드 포럼』이 창간되었다. 『레코드 포럼』은 레코드 전문지 디아파종(프랑스) 등과 계약을 맺고 각종 정보를 담았다. 1996년 『고전음악』이 창간됐다. 격월간 클래식음악 비평전문지를 표방했으나 창간호 이후에 발행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뮤지카 노바』가 창간되었다. 전문가들의 영역으로만 구축되다시피한 20세기 현대음악을 위한 격월간지로 존 케이지부터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를 다루기도 했다. 1997년 월간 『CD가이드』가 창간되었다. 오늘날 공연기획사로 잘 알려진 마스트미디어는 현악전문지 월간 『the Strad』 한국판을, 오순화(비올라·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비올라 전문지 『올라 비올라』를 창간하기도 했다.

2000~2010년대 달라진 음악정보 환경과 미래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문이 넓어지고, 소비의 방식도 다양해진 1990년대를 지나 2000년이 되면서 인터넷 문화는 강력한 정보의 홍수를 만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이 오갔다. 그동안 책을 통해 정보를 제공받던 독자를 능동적 정보 탐색자와 편집자로 만들어주는 인터넷과 ‘검색 문화’ 등이 음악을 둘러싼 책과 읽기 문화에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2001년 영국의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의 한국판이 나왔다. 영어판 번역기사와 국내기사를 각각 섞은 비율이었다. 같은 해에 나온 『에듀클래식』은 2016년 월간 『REVIEW』로 재창간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으로 인한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잡지의 운명은 1980~90년대보다 폭과 양이 대폭 축소되었다. 과거에 전성기를 자랑하던 음악잡지들은 “최근 대형 음반사들이 새 음반 수입과 제작을 줄이면서 광고 수급의 차질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2001.2.25). 2002년 『CODA』가 창간되었고, 월간 『the Strad』를 운영하던 마스트미디어는 2003년 『인터내셔널 피아노』과 『콰이어어&오르간』 한국판을 펴냈다. 이후 음악잡지의 창간은 뜸했고, 정보의 공백은 인터넷이 대신했다. 2015년 『La Musica』가 무가지로 창간되었고, 2016년 『월간 색소폰』, 2019년 『Classic J』가 세상에 나왔다. 오디오를 통한 음악감상의 환경도 인터넷과 유튜브, 어플리케이션의 등장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한 가운데 2020년 일본 오디오 매거진 『Audio Accessory』 한국판, 무크지 『풍월한담』이 창간되었다. 잡지 속 종이에는 당대의 문화, 사람들의 취향,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스며있다. 지금 이 시대의 음악잡지는 녹록치 않은 걸음을 걷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시대의 빛을 받고 굴절하여 문화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빛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믿음 하에 『객석』은 미래를 책임질 한국의 젊은 음악가와 예술가들의 활동을 깊이 있게 기록하여 아카이브를 채우고, 글로벌 시대의 문화예술 전지기지가 되고자 전세계 음악가-기획자-공연장을 잇는 미래적 정보망으로 활약 중이다. 한국 음악잡지 100년의 전통과 역사를 껴안고, 도래할 미래를 예견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음악잡지 사망시대에 창간이라니?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음악 애호가에게 꿈과 같은 시대였다. 백만 장의 음반을 팔아치우는 뮤지션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해외 유명 음악인들도 이 대열에 끼어들곤 했다. 음악전문지 시장도 놀라울 정도로 컸다. 90년대 당시 음악 전문잡지 시장에서는 <핫뮤직>을 중심으로 <지엠비(GMV)>, <월드 팝스>, <락킷(Rockit)> 등 여러 매체가 경쟁했다.

록 잡지를 사 모으던 팬들에게 1998년 1월은 조금 더 특별한 때로 기억될 것이다. 월간지 <서브(SUB)>가 창간했기 때문이다.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필진들로 꾸려졌던 <서브>는 헤비메탈, 팝음악 소개에 치우쳐있던 국내 음악잡지 시장을 동시대 영미권 최신조류로 끌어당긴 일등 공신이었고, 한국 대중음악의 100대 명반 리스트를 작성해 국내 음악의 성과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 주인공이었다.

펜타포트 페스티벌 총감독과 가슴네트워크 대표로 더 잘 알려진 박준흠 전 <서브> 편집장이 새 잡지 <대중음악 SOUND(사운드)>를 만들었다. 무크지 형태를 취한 <대중음악 SOUND>의 창간호는 15일 발행된다. 학술지적 보고서와 현장 리포트, 그리고 대중음악 전문지 성격을 한 번에 아우른 <대중음악 SOUND>의 창간호는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지난 2년 간의 ‘루키 어브 더 이어(Rookie of the Year)’를 조명하는 코너를 비롯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죽음으로 사회적 관심을 일으킨 대중음악 유통구조에 대한 분석, 지난 10년 간 아이돌 음악 시장의 변화, 대중음악학과 신설 논의, 대중음악축제의 미래 등의 주제를 다룰 예정이다.

박준흠 <대중음악 SOUND> 발행인을 만나 잡지의 사망 시대에 다시금 잡지를 내놓은 이유를 들어보았다. 아울러 그의 음악관과 <서브> 시절에 대한 재평가도 요청했다. 인터뷰는 11일 오전 11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커피숍에서 진행됐다.

▲ ⓒ대중음악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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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선은 가슴네트워크가 기획한 <한국 인디뮤지션 사진집>,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음반리뷰>,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인터뷰>, <한국의 인디레이블> 등을 펴냈다. 한편 <서브>가 창간 기념으로 연재한 ‘스페셜 텍스트: 산울림으로부터 Next Big Thing을 중얼거리며…’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중음악사 100대 명반 선정 작업을 이행해 국내 대중음악 분석의 기틀을 잡은 기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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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흠 <대중음악 SOUND> 발행인. ⓒ박준흠

(<서브>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한국 음악 잡지시장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매체이자, 시장의 몰락을 지켜본 잡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공연기획자가 아닌 ‘평론가’ 박준흠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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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발행인은 록음악 애호가이며 프로급의 실력을 가진 연주자다. <대중음악 SOUND> 참여필진과 편집위원에는 현직 교수, 음악산업 관계자, 평론가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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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지 시장이 사실상 사멸한 지금 왜 새로운 잡지를 만들었나?음악시장이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완전히 재편돼, 사실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화했다. 시장에 들어오는 자본의 절대크기가 줄어들었는데, 그마저도 극히 일부에 불과한 아이돌 시장에 집중됐다. 기형적 구조인데,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척박한 대중음악 현실을 직접 바꾸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현실을 바꾸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매체는 반드시 필요했다.꼭 음악전문지라야 했나? 워낙 잡지시장이 어려운데다, 특히 음악전문지 시장은 사실상 사망 상태이기 때문에 자꾸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당연한 현실인데… 일반 매체와 전문지는 다룰 수 있는 분야와 종류, 독자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종합지에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반 매체는 음악이 사회적 관점, 문화적 관점 등에 따라서 화제성을 가질 때만 타깃독자층을 상대로 관련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지난 십여 년 간 음악전문지에는 글을 쓰지 않는 평론가들이 생겨났고, 이들에 의해 음악평론 시장이 ‘음악가이드’ 대신 ‘음악을 읽는’ 평론 위주로 재편됐다.물론 음악을 문화적,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필요하다. 그러나 순수하게 음악만을 논하는 ‘음악 가이드’ 평론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전문지만이 소화 가능하다. 대중음악 평론이 ‘음악을 읽는’ 글과 ‘음악 가이드’의 어느 중간에 위치한다고 보면, ‘음악 가이드’에 조금 더 무게추가 쏠려야 한다고 본다. 음반을 소비하는 사람을 위한 글이 죽는 것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이효리가 레이디 가가의 패션을 따라했다’ 혹은 ‘어느 정권이 음악시장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글뿐만 아니라 ‘이효리 신보의 음악적 성취가 좋다/나쁘다’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그렇다. 모든 음악 평론이 에세이가 돼서는 안 된다.와 같은 월간지 형태가 아니라 무크지 포맷이다.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는 장기적으로 볼 때 월간지, 혹은 주간지 형태로 가야하지 않겠나.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돈이 없다. 정기발행을 하려면 총판을 구축하고,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근무자를 둬야 한다. 불가능하다. 를 만드는데도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들여서 기고료를 겨우 메웠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다. 도서출판 선의 김윤태 사장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시작하기도 어려웠다.두 번째로, 내가 시간이 없다. 내 본업은 공연기획자이지 평론가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잡지를 만들었다. 내가 기획과 필진 섭외, 편집 등을 도맡고 출판사가 유통과 디자인, 인쇄 등을 전담하는 협업 시스템으로 책이 나오는데, 이렇게 만드는데 시간이 최소 석 달은 걸린다. 8월 펜타포트 페스티벌이 끝나고 창간기획이 시작됐는데, 이제야 첫 책이 나온다.마지막으로, 이처럼 심층적인 콘텐츠를 만들려면 월간지 형태로도 소화하기 어렵다. 기획에 한 달, 기고자의 원고 마감에 한 달, 제작에 한 달이 필요하고, 각자 생계를 위해 본업도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 재충전에도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크지가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다.물론 주간지 형태로 미리 원고마감 시한을 넉넉히 두고 기획연재를 진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에서 ‘스페셜 텍스트: 산울림으로부터 Next Big Thing을 중얼거리며…’를 이런 포맷으로 연재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든 정기간행물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불가능하다.창간호에 수록된 내용들을 보면 매우 전문적이다. 애초에 음악산업 관계자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것 같다. 좋은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시장 안에서만 머물지 않을까 우려된다. 얘기를 하고 싶다. 영화 관계자, 마니아뿐만 아니라 영화 지식을 흡수하고 싶어했던 일반 독자까지 영화산업으로 끌어들이는데 이 큰 공을 세웠다. 그렇다고 이 쉽고 가벼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는 에 엘리트 문화소비자를 타깃으로 했던 를 결합한 형태이고, 의 성과를 음악판에서 내고자 한다. 편집을 현장 리포트와 학술지, 그리고 대중음악 잡지의 성격을 코너별로 나눠서 배치한 이유이기도 하다.수록된 내용들은 지금 한국에서 반드시 필요한 얘기들이고, 이제껏 다뤄지지 않았던 내용들이다. 예를 들어 류형규 마니아디비닷컴(maniadb.com) 운영자가 쓴 ‘대중음악 유통의 현재와 미래’는 기자는 물론, 평론가도 쉽게 쓰기 어려운 글이다. 유통산업에 몸담고 있는 이가 음원 수익배분과 관련된 논의를 가장 정확하게, 팩트를 갖고 썼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죽음으로 음원수익 배분 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 생겨났으나, 이를 제대로 소화한 매체가 없었던 게 사실 아닌가. 분명 대중음악 독자 사이에도 관심이 있는 사안인데 말이다.아무래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컸고, 당시와 오늘날의 대중음악 시장 분위기도 워낙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음악잡지 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가 매달 8000부를 발행했고, 같은 경우는 전성기 시절 2만여 부까지 찍을 때도 있었다. (놀랍다. 지금은 종합일간지도 2만여 부를 못 찍는 곳이 적지 않다.)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당시는 음반을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평론, 음악산업 지식을 소비하려는 욕구도 컸다.의 가장 큰 존재의의라면 동시대 해외음악 조류와 본격적으로 발맞춘 잡지였다는 점과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기틀을 열었다는 점 같다. 제대로 본 건가?맞다고 본다. 출발이 늦었지만, 의 창간으로 인해 헤비메탈이 아니라 동시대 얼터너티브, 브릿팝, 전자음악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시기가 홍대 인디신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이고, 당시 홍대음악이 해외의 최신 조류와 동일한 시간대를 걸었기 때문에 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시기적으로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필진이 워낙 좋았다. 최고의 팝음악 기자였던 성문영 씨(현재는 네이버 오늘의 뮤직 필진, 등의 번역자)가 있었고, 출신의 김미영이 다른 매체에서 볼 수 없는 전문적인 글을 썼다. 그리고 김민규도 한국 대중음악과 팝음악의 동시대 감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 대중음악은… 어쩌다보니 내가 기획을 하게 되면서 평론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본래는 글 쓰는 일까지 할 생각은 없었나?원래부터 음악쪽 일을 하려고 했다. 병역특례(박준흠은 전자공학과 출신이다)를 마치고 케이블 방송국에 들어갔고, 동시에 서울재즈아카데미를 다녔다. 그때 발행인이 된 인물을 알게 됐다. 내가 음악을 많이 듣는 걸 그 사람이 눈여겨보고 창간을 제안했고, 이뤄냈다. 당시만 해도 난 샘플러 CD를 만드는 정도의 역할만 하려 했다. 다만 한국 대중음악 기획은 꼭 필요하다고 봐서 그 아이디어를 전하려 편집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그 일을 하게 됐다. 첫 인터뷰가 김창완 씨였다.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질문지를 읽느라 바빴다. 그때는 인터뷰 요령이 없었다.가 나오던 시대는 인터넷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았던 때고, 그만큼 평론가의 지위도 높았다. 지금은 잡지를 인터넷이 대체하면서 정보의 유통량이 놀랄 만큼 많아졌고, 평론가의 권위는 낮아졌다. 격세지감이 들지 않나? 이는 의 자립에도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하고 싶다.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잡지의 기능을 대체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창간호에 실린 김규항 발행인이 주도한 음악인 대담,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가 쓴 글, 김보성 흐르는문화학교 모단스쿨 교장이 쓴 대중음악학제에 대한 논의 등은 인터넷을 뒤진다고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당장 지금 인터넷을 뒤져보면 잘못된 정보가 넘쳐나지 않나? 하다못해 음반유통사도 기획사와 유통사를 혼동해 인터넷에 표기한 경우가 적지 않다.평론가에 대한 불신이 있는 건 사실이고, 평론업계의 문제도 있다는데 부분적으로 공감한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평론가로의 데뷔 문턱도 낮아졌는데, 그러다보니 자기 중심을 채 잡지 못한 평론가들이 데뷔하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다.’자기 중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최소한 음악을 십 년 이상은 ‘집중적으로’ 들어야 글을 쓸 때 흔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장르가 나올 때 충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평론가라면 자기가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은 명확히 세워놓아야 한다. 이게 흔들리면 곤란한데, 그런 평론가도 있다. 앞서 내가 좋은 평론가란 ‘음악 읽기’보다 ‘음악 가이드’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다. 평론가도 취향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면 독자는 자기 취향에 맞는 평론가를 따라가고, 그 평론가가 소개하는 음악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평론가가 흔들리면 당연히 그를 믿던 독자는 ‘아, 속았네’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평론가와 독자의 취향이 맞지 않는데 독자가 그를 욕하는 건 당연히 무시해야겠지.’박준흠’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업적은 아무래도 ‘한국의 100대 명반’ 기획이다. 에서 처음 시도한 기획은 나중에 연재로도 꽃피었다. 에서도 이런 기획을 다시 할 생각은 있나?’100대 명반’과 같은 작업은 정기적으로 하는 게 좋다. 개인적으로는 5년에 한 번 정도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꼭 그 작업을 내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제발 다른 분들이 이 작업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리스트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고, 기획 아이디어를 보는 것도 기대된다. 에서 이를 소화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구체적으로 해보지 않았다.한국 대중음악 시장은 뚜렷하게 양극화돼 있다. 한국음악과 해외음악, 아이돌 음악과 성인 음악, 인디음악과 주류음악 간의 간극이 매우 크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여성의 소비 규모에 비해 남성의 음악소비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보나?교육, 노동 문제가 큰 원인 아닐까 싶다. 청소년들이 하는 일이란 게 공부하거나 티비 보는 것 정도밖에 없지 않나. 성인이 되면 죄다 88만원 세대가 되고, 휴식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가장 편한 여가수단인 티비에 의존하게 되고, 가장 자극적인 음악인 주류음악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남성의 음악소비가 무뎌지고 여성이 늘어나는 건 확실한 현상인데, 왜 그런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군대 때문인가…?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이 부활할 수 있으리라고 보나?파이가 커지는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 ‘정상화’되는 게 중요하다. 아이돌만 큰 시장은 결국 무너진다. 주류 음악시장도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인디신의 아이디어를 필요로 한다.두 신이 공생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당장 아이돌 음악만 봐도 변화를 알 수 있다. 최근 아이돌이 음악적으로도 일정 부분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음악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이돌도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는 결국 인디음악과의 교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 그 방법론을 보다 충실히 설파하는 매체가 되길 바란다.

추억의 음악잡지들 온라인서 부활

1980년대 음악 동호회 ‘코리아 헤비메탈 클럽(KHMC)’의 공동회장이었던 여상관(왼쪽) 장현희 씨가 26일 서울 서초구 ‘그루버스’ 사무실에서 만나 1987∼1993년 발행했던 잡지 ‘메탈뉴스’를 살펴보고 있다. 23년 만에 재개된 편집회의다. 그루버스 제공

월간팝송, GMV(지구촌영상음악), 락킷(ROCKiT), 월드팝스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잡지들.

버트 플랜트(그룹 ‘레드 제플린’ 보컬)의 얼굴이 실린 핫뮤직 창간호(1990년 11월호·왼쪽)와 스웨덴 밴드 ‘메슈가’가 표지를 장식한 종간호(2008년 5월호).그루버스 제공

이번 온라인 잡지 보기 서비스에는 뮤직피플, 스완송, 페이모스, KHMC(코리아 헤비메탈 클럽), GMV(지구촌영상음악), 락킷(ROCKiT) 같은 폐간된 잡지들과 발행 중인 재즈피플, 파라노이드, 비굿까지 10개 전문지가 포함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국내외 주요 대중음악 앨범 라이너노트(앨범에 포함된 해설지)도 1000종 이상 함께 온라인 서비스된다. 그루버스 측은 지면 게재에 더해 키워드(가수나 앨범명 등) 검색, 음원 연계 감상 서비스도 제공할 예정이다.고종석 그루버스 사업본부장(COO)은 “고음질 음원 서비스의 주된 소비층은 30, 40대인데 이들은 핫뮤직, GMV 같은 잡지를 보며 음악을 듣던 세대”라면서 “보고 듣고 이야기 나누는 콘텐츠를 함께 제공해 한국 대중음악 평론과 마니아 시장을 함께 활성화시키려고 이번 서비스를 계획했다”고 했다. 회원 가입자에 한해 2, 3개월의 베타서비스 기간에 무료로 서비스하되 향후 월 1500원 수준으로 이용료를 받고 운영한다는 계획이다.핫뮤직은 1990년 11월 창간돼 18년간 국내 대표 대중음악 전문지로 자리 잡았다. ‘월간팝송’(1971∼1986년)을 넘어 국내 최장수 대중음악 전문지로 기록됐다. 한때 월간 발행부수가 1만5000부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다양한 국내외 팝, 록 음악을 소개하고 매년 공연 시리즈 ‘로큰롤 코리아’도 주최해 음악시장에 기여했다.한국 대중음악 잡지의 역사는 1967년 창간한 팝스 코리아나로 시작됐다. 1970년대 ‘월간팝송’, 1980년대 ‘음악세계’가 창간되면서 음악 잡지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 박원웅의 1세대 DJ들 뒤로 심야 프로그램의 전영혁 성시완 씨가 등장하고 1990년 ‘음악캠프’(현 진행자 배철수)까지 가세하면서 라디오의 인기가 뜨거워졌고 대중음악 잡지 시장도 함께 성장했다. 국내외 대중음악에 대한 더 깊은 정보를 원하는 음악 팬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대중음악 전문지는 2000년대 초중반부터 사양세로 돌아섰다. 인터넷의 발달로 해외 음악 정보와 MP3 파일의 공유 통로가 열렸기 때문이다. 핫뮤직은 2008년 종간됐고 18년간 거기 실린 수많은 리뷰와 인터뷰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없어졌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중고 LP처럼 중고 잡지 판매가 일부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록, 메탈 전문지 ‘파라노이드’의 송명하 편집장은 “음악 소비 패턴이 앨범에서 디지털 싱글로 바뀌면서 마니아들까지도 음악 평론을 웹상에서 필요한 것만 찾아 빠르게 읽는 쪽으로 돌아섰다”면서 “웹, 앱 서비스는 소규모 유통 잡지가 좀 더 폭넓은 마니아를 만나는 접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임희윤 기자 [email protected]

Melon

막 2000년대에 들어선 그 즈음엔 꽤 많은 음악지가 있었습니다. 팝 전문지 [GMV], [52street], 그리고 락 음악 전문지 [핫뮤직]까지. 쉽게 접하지 못하는 해외 뮤지션들의 최신 소식과 음악평론, 생생한 인터뷰 기사와 고화질의 사진으로 무장한 음악지는 음악팬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부록으로 괜찮은 샘플러 CD나 좋아하는 뮤지션의 포스터라도 나올라치면 혹 조기매진이라도 될세라 방과 후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친구들과 좋아하는 뮤지션의 인터뷰기사를 돌려 읽으며 미리 쌓아둔 지식(사실 뮤지션들의 신변잡기)을 늘어놓을 적의 의기양양함, 음반추천 기사를 읽으며 음반 위시리스트를 작성하던 때의 쏠쏠한 재미. 공부하는 척 참고서 밑에 숨겨두고 읽다가 늦은 밤까지 공부하는 딸에게 간식 하사 차 오신 어머니께 발각, 잡지 한 권이 휴지조각이 된 서늘한 기억까지. 몇 푼 안 되는 용돈 때문에 CD 한 장 대신 테이프 두 개를 택해야만 했던 그 때, 용돈을 쪼개어 한 권, 두 권 모은 음악지는 음반 못지않게 소중했습니다. 부족한 용돈과 어머니의 감시란 악조건 속에서도 책장 한 켠을 빼곡히 채워가는 그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무엇보다도 다음 달 호를 기다리는 한 달간의 기분 좋은 설렘이란!

헌데 언제부턴가 음악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음악동호회 웹 카페에 매 달 음악지 내용이 그대로 업로드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즈음이었지요. 더욱이 외국어 실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해외 오피셜 사이트를 통해 최신 뉴스를 빠르게 얻을 수 있는데다, 희귀음반이나 해외 인디음악에 대한 고급정보까지 얻을 수 있음을 안 이상 음악지에 대한 애정이 예전 같을 리 없었습니다. 신속 정확한데다 무료인 정보들, 이 새로운 정보취득방식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굳이 잡지를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정보를 손쉽게 얻으면서 구입 횟수는 자연스레 줄어만 갔지요. 때마침 고3이 되면서 대입을 위해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고, 어머니에 의해 책장 한 켠을 차지했던 음악잡지들이 폐지 수거함으로 퇴출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음악지에 대한 애정은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꽤 오래간,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9년의 어느 날. 여느 귀갓길과 같이 서점 내 레코드샵에 들러 사고 싶던 음반을 골라 계산을 기다리는 줄을 섰습니다. 그러다 문득, 잡지코너에 있을 음악지 생각이 나더군요. 간만에 한 권 사볼까 싶어 코너 여기저기를 살폈습니다. 헌데 그 많은 잡지들 사이에서 발견한 건 클래식 전문지뿐, 즐겨보던 대중 음악지는 도통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원에게 물으니 ‘현재 발행되는 음악 잡지는 클래식 계열 밖에 없네요’하고 맙니다. 세상에, 품절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다’니! 예상 밖의 소식에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괜한 섭섭함과 미안함, 부끄러움이 뒤섞인 채로 서점을 나서며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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