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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그리스 성 풍속사 1/ 한스 리히트 /정성호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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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sexuality in ancient Greece, https://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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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조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대 그리스 조각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대부분의 채색된 도기를 … 의 이유로 오늘날에는 석상·테라코타, 거기에 근소한 청동 조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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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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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은 왜? 옷을 벗고 있을까? – Naver Post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굳이 미술관, 박물관을 가지 않아도 거리와 건축물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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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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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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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 나무위키:대문

이 고대 그리스의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성전환 버전(. … [10] 룬 왕국의 왕자 쿠르트가 메두사의 저주로 석상이 된 어머니 갈라티아를 구하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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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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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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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조각

고대 그리스 조각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대부분의 채색된 도기를 제외하고 고대 그리스 회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까지 잔존하는 그리스 미술의 주된 형식이다.

소재와 기법 [ 편집 ]

대릭석 말을 조각한 장인의 공방에 있는 아테나

그리스인이 조각을 제작하는 데 사용한 소재는 나무·석회석·대리석·청동·테라코타·크리셀레판틴(금과 상아)·쇠 등이었는데, 그리스의 기후는 초기의 목조(木彫)를 보존하기에 적합지 않아, 크리셀레판틴은 잔존(殘存)하기에 너무나 귀중하고, 쇠는 부식되고, 또 청동은 무기 등으로 개주(改鑄)되는 등의 이유로 오늘날에는 석상·테라코타, 거기에 근소한 청동 조각이 남아 있다.

대리석은 그리스 미술의 가장 중요한 소재의 하나로서, 초기의 목조나 청동 조각을 거의 잃어버린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재료이다. 그리스 미술의 발전에 긴밀한 관계를 갖는 석재는 최초부터 단단한 대리석이 사용된 것이 아니고, 초기 단계에서는 비교적 무른 석회석이 사용되었다. 조각상은 석회석·대리석·테라코타의 상을 물을 것 없이 당시는 전면 혹은 부분을 채색하였다. 현재에는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아크로폴리스 미술관에 있는 폴로스(석회석의 일종)의 군상 조각이나 대부분의 코레상에는 당시의 밝고 아름다운 색채까지 남아 있다. 이들 상의 눈에는 이따금 착색한 돌·유리·상아 등이 상감되어 있으며, 특히 여인상에서는 귀고리나 목걸이용으로 다른 금속·보석이 더하여져 있었다.

테라코타는 이미 크레타·미케네 시대에도 알려진 재료인데, 대리석이 흔하지 않은 키프로스나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는 물론 소아시아나 그리스 본토에 있어서는 신전의 장식 조각이나 봉납상에 흔히 쓰였다. 석내나 테라코타에 이어서 청동도 즐겨 사용된 재료이다. 초기의 청동상은 목심(木心) 위에 두드려 늘여 만든 것이었는데, 6세기 초 이집트에서 주형(鑄型)에 의한 주조기술이 전해져서, 이 새로운 기법은 대리석이 귀한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 각지에 급속하게 전파되고 청동 조각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로마 시대의 모각(模刻)으로서 잔존하는 고전기 거장의 걸작 대부분은 주조에 의한 청동상이었다. 그러나 석상은 전체가 하나의 석조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두부나 돌출한 팔 등은 따로따로 만들어 납이나 못으로 붙인 것도 있었다.

그리스인이 조각에 사용한 도구에는 펀치·송곳·갈고리·끌·거친끌·편평끌·나무망치·톱 등이 있다. 톱은 오래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는데, 작고 깊은 구멍을 뚫는 돌림송곳이 쓰인 것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이다.

전개 [ 편집 ]

기하학 양식 시대 [ 편집 ]

기원전 10세기 말에 이르러 아티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본토에서는, 인물이나 동물까지도 도형으로 표현한 경직한 기하학 양식이 탄생하고, 그 양식은 기원전 9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서 그리스 세계를 석권했다. 이 새로운 장식 양식은 아테네의 디필론의 묘지에서 출토한 큰 암포라의 장식 양식에 있어서 최고조에 달한다. 여기서는 그 장식은 간단한 직선문양(直線紋樣)-번개 모양의 마름모꼴·사실 모양·지그재그-과 동물·인물이 수평한 띠 모양으로 표현되고 그 인물의 두부(頭部)는 원형, 동부(胴部)는 역삼각의 도시적인 실루엣으로 그려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특징은 항아리의 장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장르의 미술에도 보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미술을 ‘기하학적 양식’이라 부른다.

그리스 미술의 단서가 되는 기하학 양식 시대의 조각에는 또한 대리석으로 된 모뉴먼트한 상은 보이지 않고, 겨우 청동이나 상아로 된 소상(小像)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위에 크소아논이라 불린 목조의 신상(神像)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의 목조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초기의 청동 소상으로는 ⟪만티크로스의 봉납상(奉納像)⟫(보스턴 미술관), 올림피아 출토의 전사(戰士)(루브르 미술관), 펠로폰네소스 출토의 말(베를린 미술관) 등이 있으나, 이들 소상은 어느 것이나 앞에서 말한 디필론 암포라와 공통되는 엄격한 도식적 형태를 보인다. 그 가느다란 선과 뾰족한 각도를 가진 양식은 화려하여 자유로운 크레타 미술 양식과는 전혀 이질적인 정신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들어가면, 조상(彫像)은 차차 둥근 모양을 띠고, 형태가 갖추어져 생생한 표현을 가지게 되었다.

아르카이크 시대 [ 편집 ]

클레오비스와 비톤, 아르카이크기의 쿠로이(kouroi). c. 580 BC.

아르카이크란, 그리스어의 ‘아르크’ ‘아르카이오스’, 즉 ‘처음’ ‘오랜’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하고, 고대 그리스인이 고전기 이전의 미술을 그렇게 부른 연유에 의한다. 오늘날에는 아르카이크 시대는 기원전 7세기 중엽 이후 그리스 각지에서 대리석으로 등신상 또는 거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기원전 5세기 초 무렵까지를 가리킨다. 기원전 10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성립된 그리스의 폴리스는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서 뚜렷한 발전을 하여, 지중해 각지에는 식민도시 건설이 성행했다. 이 새로운 발전의 시기가 미술사상 아르카이크기이며, 그리스는 이 무렵 이집트나 동방과의 접촉으로 대리석으로 된 모뉴먼트한 조각을 제작하는 일을 배운 것이다.

최초의 유품(遺品)으로는 델로스섬에서 출토한 니칸드라의 봉납상(아테네 국립미술관), 사모스섬의 헤라 신전의 여신상(루브르 미술관) 등이 있다. 기원전 7세기 중엽의 것인 니칸드라의 봉납상은 아르카이크기의 가장 오랜 상으로서, 그 편평하고 소박한 형태는 크소아논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 상보다 조금 후기의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 각지에 오늘날 일반적으로 쿠로스 상이라고 불리는 나체의 청년상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코레 상이 제작되는었데, 이 나체의 청년상과 옷을 입은 소녀상은 아르카이크기의 가장 중요한 상이다. 입상 이외의 유품으로 델포이의 나크소스인의 스핑크스, 델로스섬에서 출토된 니케, 또한 건축의 장식 조각으로서 코르프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박공 조각 등이 있다. 이들 상은 초기의 경직성(硬直性)과 기술적인 미숙성이 남아 있으나, 동시에 대담하고 또한 힘있는 표현에는 생생한 생명감이 넘친다.

중기 아르카이크의 상은 도서(島嶼)의 영향이 본토의 그리스 조각에 미친 시대의 산물이다. 이 기간의 상으로는 이오니아 양식의 특징인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표현이나 아몬드형의 눈, 이른바 아르카이크 스마일의 입 모습 등이 나타나 많은 점에서 경직된 양식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들 양식은 중기 후반 무렵(전 550∼전 525년)에 이르러 본토의 양식이라고 할 만큼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 아크로폴리스의 ⟪모스코포로스⟫(송아지를 둘러멘 청년)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른바 아르카이크 스마일은 이 시대상의 특징이지만, 이러한 표현은 상에 인간적인 표정을 담으려고 한 결과인 것 같다. 후기 아르카이크에 이르면 근육의 유기적 구조에 대한 관찰이 일층 세밀해져서 상은 더욱 자연스런 형태에 가까워진다. 생생하고 더욱 세련된 그 형태는 힘있는 생명의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 아르카이크기의 남성 입상 조각의 유일한 과제였던 쿠로스 상은, 그 발전의 최후 단계에 도달했다.

엄격 양식 시대 [ 편집 ]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부터 고전기의 빛나는 달성에 이르는 과도기의 약 30년 동안을 일반적으로 엄격 양식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르카이크의 종언(終焉)이 바로 고전기의 시작이라고 보아 이 시기를 인정 않는 학설도 많다. 크리티오스의 소년상에 있어서 남성 나체 입상의 기본형은 프론타리티(前面性)의 법칙을 완전히 타파했다. 그래서 조각은 일층 자유로운 프론타리티 자세로 변화되어 간다. 모든 상의 입 모습에서는 아르카이크의 미소가 사라지고, 무게 있고 엄숙한 표정으로 변한다. 아이기나의 아파이아 신전 박공 및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박공의 군상(群像)에서의, 변화가 풍부하고 다양한 자태는 한층 더 자연스런 형태에 가까워지고, 하나하나의 상에 긴장한 시대 정신과 생기가 부여되어 있다. 델포이의 마부상(馬夫像)이나 아르테미시온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동상(아테네 국립박물관)은 이 과도기의 입상 조각의 대표적 걸작이다.

고전 전기 [ 편집 ]

《도리포로스》의 잘 보존된 로마 시대 복제품. 재료: 대리석. 높이: 2.12미터.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그리스 민족에게 자신과 긍지를 주어, 그 후 그리스는 정치·경제·문학·예술 등의 모든 분야에서 미증유의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대두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철저한, 가장 빛나는 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5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 전기의 조각은 조화와 균형을 갖춘, 하나의 이상미(理想美)를 낳았다. 여기서는 상은 모두 단순하고 또한 명확한 형식으로 정리되고,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좋은 정신성(精神性)으로 유지되어 있다. 이 기간의 초기를 대표하는 미론은 인체가 운동하는 양상을 정지한 순간 속에서 포착하였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이나 ⟪아테나와 마르시아스⟫는 운동의 정점에 달한 긴장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여기서는 운동이라는 격심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고양된 감정의 표현을 보이지 않는다. 미론, 페이디아스와 더불어 고전 전기를 대표하는 폴리클레이토스는, 남성상에 관한 각 부분의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수학적으로 산출해 내고, 그것을 ⟪카논⟫(규범)이라고 하는 책에 기록했다. ⟪도리포로스⟫(창을 멘 청년)나 ⟪디아두메노스⟫(승리의 리본을 매는 청년) 등의 상은, 이 비례에 기초를 두고 제작되었다고 말해진다. 오늘날은 그 저서도, 청동의 원작도 없어져서, 로마시대의 모작에 의해서만 원작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고전 후기 [ 편집 ]

기원전 432년에 시작되어, 그 후 30년 동안 계속된 완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나의 경계로 삼아, 고전 후기는 폴리스 상호 대립과 투쟁으로 세월을 보낸 시기이다. 국가의 이상이 약해짐에 따라 사상적으로도 전세기와 달라서, 회의적인 사상이나 개인주의적인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미술면에서도 숭고한 신들의 모습은 차차 희박해지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술의 신 디오니소스, 사랑의 신 에로스 등, 보다 인간적인 신들이 주된 대상이 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는 고귀한 신들의 표현이 추구된 데 대해 기원전 4세기에는 지상적(地上的)·순간적인 표현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숭고한 양식·신들의 표현’에서 ‘우미한 양식·인간의 표현’으로의 이행이었다. 고전 후기의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저명한 작가로서는 우미한 여인의 이상상(理想像)을 창조한 프락시텔레스,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적 감정을 취급한 스코파스, 새로이 우미한 남성 이상상을 규정하고, 또한 초상(肖像) 작가로서도 유명한 리시포스의 세 거장을 들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헬레니즘 미술 입니다.

기원전 320년경부터 기원전 30년경까지,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의 동방 원정에 의하여, 널리 동방 각지에 전파된 그리스 문화가 오리엔트 문화와의 접촉으로 동방적 요소와 융합하고,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 폴리스는 체제가 붕괴하고, 강대한 지배권을 가진 군주제로 바뀌어 종교적으로는 올림포스의 신들로부터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로 옮겨졌다. 이러한 시대 사조를 기본으로 하여서 일어난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의 미술은 모든 면에서 전시대를 초월했다. 새로운 미술의 중심은 본토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으로 옮겨졌다. 각종의 다양한 민족이나 문화와의 접촉과 현실 생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 소재를 무한정으로 넓혀, 세속적인 서민의 일상 생활의 모든 모습에까지 넓혀졌다. 여기서 고전적인 감정은 격정·흥분에까지 높아지고, 운동은 격동·동요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는 관능의 세계에 도취되어 결국 헤르아프로디테의 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유명한 ⟪라오콘⟫(바티칸 미술관)을 비롯하여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 대제 단의 부조(베를린 미술관)는 비통·격정을 나타내고, 그 위에 사실적(寫實的)인 감각과 고도한 기법은 ⟪권투사(拳鬪士)⟫(로마 국립미술관), ⟪거위를 안은 아이⟫(루브르 미술관) 등의 작품을 낳았다. 그리고 ⟪멜로스의 아프로디테⟫ 등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의 상이 제작된 것도 이 시대이며, 이들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은 로마에 계승되어 새로운 전개를 보게 된 것이다.

양식 [ 편집 ]

그리스의 신전 건축 양식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본토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보급되는 간소·웅장한 도리아 양식과, 에게해 및 서아시아 연안 여러 지역에서 보여지는 우미·전아(典雅)한 이오니아 양식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양식은 아르카이크 조각에 있어서도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도리아 양식은 아르고스·시키온을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여러 지역에 있어 특히 현저하여, 남성 나체상에서 그 특징있는 양식이 발전했다. 아르고스의 폴리메데스가 만든 델포이의 클레오비스와 비톤의 상은 그 좋은 예로서, 소위 짧은 근육으로써 다룬 무게가 있고 엄숙한 구축적(構築的)인 성격을 보인다. 이에 대하여 장식적·묘사적 특징이 현저한 이오니아 양식은,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여인상으로 고도한 발전을 했다. 아르카이크의 미소를 띠고 있는 입모습의 표현은 일층 명료하여, 투명한 얇은 옷과 육체와의 콘트라스트로써 관능적인 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대부분의 아름다운 코레상(像)은 이 이오니아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이고 있다. 소위 조각에 있어서의 아티카 양식은, 기원전 550년경부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아티카 지방에 개화한 양식으로서, 아크로폴리스의 ⟪모스코포로스⟫(송아지를 둘러멘 청년)이나 헤카톰페돈의 박공에 새긴 군상(群像) 등은 그 초기의 좋은 예이다.

주제 [ 편집 ]

쿠로스과 코레 [ 편집 ]

쿠로스(kouros=청년이란 뜻으로서, 복수는 쿠로이) 상은, 코레(kore=소녀·처녀의 뜻. 복수는 코라이)와 더불어 아르카이크기(期)의 입상(立像)의 기본 형태이며, 그 생성과 발전은 동시에 그리스 조각 그것의 창조·발전을 의미한다. 왼쪽 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고, 양쪽 팔을 허리에 얹고 선 초기의 형태는 분명히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의 남성 입상(男性立像) 조각은 이 형태를 유일의 기본 테마로 하고, 나체에 대한 진지한 관찰을 하여, 아름답게 완성한 청년의 이상상(理想像)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수니온에서 출토된 쿠로스 상(기원전 600년?, 아테네 국립박물관)은 그의 가장 오랜 상의 하나로서, 귀나 긴 머리의 표현은 딱딱하고 또한 도식적이며, 복부(腹部) 등 가운데는 깊이 판 선으로 근육을 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집트 조각과는 이질적인 긴장된 생명감이 넘치고 있다. 그 후 1세기 동안에 청년상은 차차 자연스럽고, 발랄한 형태에 가까워진다. 아리스토디코스의 쿠로스 상(아테네 국립박물관), 클리티오스의 소년상(아크로폴리스 미술관)에 있어서는 아르카이크의 미소는 없어지고, 그 체중은 한쪽 다리에 걸려 있다. 그 때문에 허리는 S자형으로 굽고, 옛 시머트리의 법칙은 타파되었다. 반면에 화려한 코레는 모두 옷을 입고 있다. 쿠로스 상이 건전한 육체의 유기적 표현에 기울고 있음에 대하여 코레 상에서는 의상의 질감(質感), 주름에서 보여지는 선, 채색의 아름다움 등이 강조되어 있다. 구조적(構造的)인 쿠로스 상에 대하여, 장식적인 코레 상은 이오니아의 우아한 점을 보여 준다.

아프로디테 [ 편집 ]

다양한 발전을 보인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은 아름다운 아프로디테에 있어서 미술사상 드물게 보는 위대한 발전을 했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관능적인 모든 가능한 형태를 탐색하고, ⟪웅크리고 앉은 아프로디테⟫(루브르 미술관, 로마시대 모각)나 ⟪아름다운 볼기를 벗는 아프로디테⟫(로마시대 모각, 나폴리 미술관) 등 자유분방한 자태를 전개시켰다. 여기서 여신은 이미 천상적(天上的), 그리고 청초한 여신이 아니라, 요염한 관능미를 과시하는 여성의 모습이다. 이 관능미에 대한 도취는 끝내 남녀 양성을 가진 ⟪헤르마프로디토스⟫로 발전했다. 상반신은 풍만한 유방을 갖고, 하반신에는 남성의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조각은 여러 각도로 바라보며 감상되었다. 이 풍조(風潮)에 대해 다시금 고전적 이상미에 가까워지려는 작품도 나타나서 ⟪멜로스의 아프로디테⟫(루브르 미술관)나 ⟪메디치의 아프로디테⟫(우피치 미술관) 등의 아름다운 여신상(女神像)도 제작되었다.

참조 [ 편집 ]

그리스조각상 : 롯데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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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고대 그리스인의 ‘그곳’은  왜 작을까

8등신의 완벽한 비율, 데피니션이 선명한 근육, 긴 팔과 날씬한 다리 그리고 찰랑이는 머릿결까지. 그리스 석상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독일의 미학자 빙켈만은 저서 ‘그리스미술 모방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 비율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은 곧 선을 의미한다. 절대자의 내재된 자연의 진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절대자의 진리’와도 같은 그리스 석상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감탄합니다. 유럽 박물관의 그리스 석상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죠. 그러나 하체 특정 부위에 눈이 꽂히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머릿속은 온통 엉뚱한 상상으로 가득하게 되지요. “근데 성기는 왜 이렇게 작지?”.

이상한 일입니다. 고대인들은 성기를 유독 커다랗게 묘사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이 곧 힘이었고, 성기는 많은 자손을 낳게 할 원천이었으니까요. 현대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남성들은 성기의 크기를 일종의 자신감으로 여기곤 하죠. 그런데 도대체 왜? 그리스는 정반대로 생각했을까요. 사섹의 첫 번째 시간이 ‘그리스 꽈추’입니다.

다비드 상. 고대 그리스 석상을 참고해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든 모습.

일섹. 그리스 성기는 왜 작은가

고대 그리스 연구가들은 우리 같은 범인들과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곤 이내 결론 내리죠. “고대 그리스에서는 꽈추가 작은 남성이 미남이었다”고요. 영국의 미술사학자 엘린 오레손(Ellen Oredsson)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큰 성기가 남성적이라는 시선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연구가들에 따르면, 그리스인에게 남성성은 두 가지였습니다. 신체 단련을 통한 아름다운 비례의 ‘근육’과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성’이었죠. 성기는 이성과 대척점에 선 욕망이었고, 욕망은 작아야 했습니다. 그리스 석상에서 성기가 작았던 이유기도 합니다. 커다란 꽈추는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의 동성애 (Greek Homosexuality)’로 유명한 케네스 도버(Kenneth Dover)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지지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거대한 성기를 두고 “멍청하고, 탐욕적이며, 흉한 것”(foolishness, lust and ugliness)이라고 평가했다고 썼습니다. 오히려 성장하지 않은 아이의 성기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덧붙이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성기를 크게 묘사한 게 특징이다.

여기서 다른 고대인들의 신체에 대한 생각을 잠시 들여다보시죠. 위 사진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입니다. 가슴과 성기를 두드러지게 크게 묘사하죠.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 상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경쟁관계였던 페르시아 사람들이 남긴 과장된 성기를 생각했을 때, 차이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아마 그리스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 야만족들과 차별점을 구사한 것 일지도 모릅니다. 고대 그리스 석상의 꽈추가 작은 건 조각가의 실수가 아닌 셈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작은 성기는 아주 아름답고 지적인 상징이었죠. (만국의 작은이 들이여 단결하라!)

이섹 그리스 남성 성기만 작은 게 아니라고?

작은 걸 선호하는 경향은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도 이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여성의 가슴이 작아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풍만한 여성은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죠. 로마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성의 가슴은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이런 나쁜 사람!)

고대 로마 당대의 미적 기준에 맞추려는 여성들의 도전은 이어졌습니다. 가슴을 붕대로 감아 발육을 막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작은 발에 집착한 고대 중국이 ‘전족’ 문화를 마련했듯, 로마에서는 ‘전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브래지어나 코르셋이 여기서 시작이 됐다고도 말합니다.

가슴가리개를 한 고대 로마 여성들

중세 유럽 르네상스가 넘어갑니다. ‘부활’이라는 뜻의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다시 살아 숨 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고로 그리스식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었죠.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 여성들 역시 고대 로마처럼 가슴을 작게 하려고 천을 덧댔다고 전해집니다. 그 유명한 코르셋이죠. 일부는 가슴에 유두가 눌려서 성장이 지체됐다는 기록도 종종 발견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섹스 심벌의 대명사들이 풍만한 가슴을 자랑했다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네요.

삼색 작은 성기를 향한 열망…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만 작은 성기를 예찬한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1992년으로 돌아가 보시죠. 이 시기 북한에서 한 동상이 발견되면서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태조 왕건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지만, 사학자들의 눈은 한 곳에 꽂혔습니다. 왕건의 성기였는데요. 최고 존엄인 왕의 동상임에도 불구하고, 꽈추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인 2cm로 묘사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 지증왕은 30cm에 달하는 대형 성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있었는데, 불과 400여 년 만에 태조 왕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매우 작은 성기로 화제를 모은 태조 왕건상.

국내 학자들 역시 바로 이 부분에 천착해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죠. 학자들은 태조 왕건 상의 작은 성기가 불교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왕건상에 불가에서 말하는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는데요. ’32대인상’은 부처가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특징을 말합니다. 고대 인도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신체특징을 불교가 채용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불교적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신체적 특성을 왕건상에 반영했다는 뜻입니다.

32대인상이란 건 알겠는데 성기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32가지 특징 가운데 ‘마음장상(馬陰藏相)’이 있습니다. 남성의 성기가 말(馬)의 남근(陰)처럼 오그라들어 몸 안에 숨은(藏) 형상(相)을 뜻합니다. 도가 통하여 경지에 오르면 생식기 쪽 陽氣(양기)가 줄어들고 그 양기가 머리 쪽으로 올라가 생식기가 아주 작아지는 경지였죠. 당시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왕건의 성기를 아주 작게 표현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였던 걸 과시했던 건데요. 태조 왕건상과 고대 그리스 석상이 ‘작은 꽈추’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이가 왕건이가 아니었어 으하하하”

사섹, 성기 크기에 집착하지 말자

고대인들의 사유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상적인 몸’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요. 때로는 큰 게 존중받고, 또 때로는 작은 것들이 숭상받기도 한다는 아주 작은 진리입니다.

극단적인 남녀 갈등으로 ‘꽈추 사이즈’ 조롱이 심심찮게 보이는데요. 풀이 죽은 남성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인이 열망하던 지적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전형이라고요. 태조 왕건의 미적 개념을 기준으로 보아도, 당신은 마음장상의 경지에 오른 깨달음을 얻은 존재입니다. 이제 눈물을 닦을 시간입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그리스 석상

고대 조각상 원래는 화려… ‘흰색의 미학’ 편견에 色을 잃었다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

어린 시절 학교에서 근처의 사찰로 야외학습을 간 적이 있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절이었지만 불교와는 거리가 먼 집안에서 자란 내게 절은 아주 낯선 곳이었다. 경내에 가득한 향냄새,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 등 내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정보가 이질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었던 것은 시각정보였다. 특히 사찰 입구에 있는 천왕문을 통과하면서 마주친 사천왕상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사람보다 훨씬 큰 조각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은 어린 시절, 불교라면 그저 불상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사천왕상이라는 형태 자체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도록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놀란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만큼 강렬했던 것은 사천왕상의 색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 사용된 단청(丹靑)과 비슷하게 청, 적, 황, 백, 흑이 사람의 모습을 한 조각상에 적용되었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겠지만, 그것이 어떤 색이든 상관없이 거대한 인물상이 그렇게 채색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전달하는 느낌은 일종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내가 본 인물조각은 채색되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가령 김경민 조각가의 작품 같은) 공공예술 등을 통해 채색된 인물상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조금만 오래된 조각상들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채색을 꺼려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의 이순신상(1968)이나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세종대왕상(2009)에 페인트로 사실적인 채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멀쩡한 동상을 왜 천박하게 만드느냐는 항의가 빗발칠 게 분명하다. 그 두 동상은 추상조각이 아니고 실존인물을 사실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피부색과 곤룡포의 황금색과 붉은색을 칠하는 것이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각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우리는 불상이나 사천왕상처럼 특별히 동양의 전통을 따르는 인물상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동상, 특히 인물상은 채색을 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의 전통에서 왔다. 우리나라에는 위인이나 유명한 인물의 모습을 공공장소에 동상이나 석상으로 세우는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의 길거리나 공원에 세워진 동상들은 모두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서양의 전통적인 조각상들은 그것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든 청동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이 채색을 하지 않고 재료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우리는 그 전통을 가져온 것이다.

미켈란젤로(1475∼1564)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에 만든 모세의 대리석 조각상. 르네상스 조각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채색되지 않은 하얀 대리석이라고 믿고 전통을 이으려 했다.

가령 르네상스 조각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대리석상들을 보면 전혀 채색되어 있지 않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태동한 시점이 바로 르네상스 시기이고, 그 이유는 그때가 훗날 모든 예술가의 존경을 받는 천재적인 대가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밀로의 비너스 등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 역시 하얀 대리석이기 때문에 서양 미술사는 채색되지 않은 하얀 대리석 조각이야말로 정통이었고,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인다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만큼 충격적인 변화를 겪는 역사도 드물다. 2003년 독일 뮌헨에서 시작되어 10년 넘게 전 세계를 순회한 ‘채색된 신들(Gods in Color)’이라는 전시회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이 흰색이었다는 상식을 통째로 뒤집어 버렸다. 독일의 고고학자 빈첸츠 브링크만의 오랜 연구의 결과물인 이 전시회는 우리가 처음부터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된 줄 알았던 고대의 석상 대부분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브링크만과 다른 많은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석상들은 피부와 머리카락, 옷, 장식이 밝고 화려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파괴되지 않고 후세에 전해진 조각상들은 험한 기후에 노출되어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물감을 모두 잃었고, 땅속에 묻혔다가 꺼낸 조각의 표면에 남아있던 물감은 발굴한 사람들이 흙을 떨어낼 때 함께 떨어져나갔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절에 이르면 고대의 조각상들은 모두 우리가 아는 하얀 대리석이었고,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과거를 되살리려 했던 당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채색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 에기나섬 아파이아 신전(기원전 약 500년)의 궁수 조각상. 대리석 조각에서 발견된 물감의 흔적을 통해 채색되었던 과거의 형태를 재현한 모습. 출처: Marsyas, 위키커먼즈

그렇다면 브링크만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1980년대 초 석사과정으로 연구하던 시절 그는 고대 조각가들이 어떤 종류의 도구로 돌을 깎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특수한 전등을 사용해서 표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석상 표면 구석구석에 물감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국은 한 석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안 브링크만의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르네상스 이후로 무수히 많은 미술사학자가 무수히 많은 그리스 로마 조각을 샅샅이 살피고 연구해왔는데 어떻게 1980년대에 들어서야, 그것도 대학원생의 눈에 처음 띄게 되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바로 유럽인들의 편견에 있다. 유럽의 고고학자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대 조각의 표면에서 물감자국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런 자국을 발견할 때마다 흙과 함께 열심히 털어버렸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르네상스 거장의 대리석 조각이 있었고, 그 거장들은 당연히 고대의 조각들을 참고했을 것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를 잇는 채색되지 않은 하얀 대리석 조각이라는 계보를 가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대표적인 미술사학자가 그 유명한 요한 요하임 빙켈만이다. “신체는 희면 흴수록 아름답다”고 믿었던 그에 눈에 미세한 물감 자국은 띄지 않았고, 보였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물감 흔적이 발견되면 그 조각은 그리스 이전의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치부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에서 백인우월주의의 느낌을 피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로 유럽의 인종차별 역사에서 백인의 우월성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 로마의 대리석 조각은 꾸준히 등장해왔고, 지금도 많은 백인우월주의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18, 19세기의 유럽학자들은 같은 지중해 문명에 속한 이집트에서 발견된 채색된 조각은 ‘비유럽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유럽 백인들은 순수한 흰색을 면면히 유지해왔다는 허구를 만들어내어 믿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종주의를 믿지 않는 예술가나 학자들도 흰색의 미학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브링크만을 비롯한 많은 학자의 노력은 21세기에 비로소 결실을 맺었고, 많은 미술사 교과서가 ‘채색된 그리스 로마 조각상’을 정설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고대의 채색 조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사고방식만이 아니다. 우리의 편견과 굳은 사고는 눈앞에 있는 증거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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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은 화려한 컬러 조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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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 고대 조각들은 남녀 모두 헐 벗고 있을까요? 어렸을 때 홀딱 벗은 서양 고대 조각들을 보면서 서양인들은 인간의 몸을 숭배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홀딱 벗고 있는 조각상을 만들죠.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완벽한 비례와 조형미를 갖췄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옷으로 가리지 않고 홀딱 벗겨 놓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네요.

이 사진들은 20년 동안 고대 조각상을 연구한 Vinzenz Brinkmann과 Ulrike Koch-Brinkmann이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재현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엑스레이 형광기와 자외선 분석도구와 적외선 분광기와 여러가지 기술과 도구를 이용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대 조각상들이 대리석 덩어리가 아닌 여러 염료 도구로 채색을 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최근에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무려 30여점의 고대 조각상을 분석한 후에 약 30여 점을 고대 조각상의 초기 모습으로 재현했습니다. 이 복원된 고대 조각상들은 2004년에 바티칸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고 현재 전 세계에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색이 다 사라졌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색이 다 벗겨졌기 때문입니다. 돌 자체는 색을 넣을 수 없기에 대리석 위에 채색을 했는데 이 색이 풍화 작용 등으로 다 사라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색을 숭배했고 신분 차이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노예나 평민들은 염색을 하지 않는 옷을 입고 다녔고 귀족이나 왕족들만 현란한 색이 들어간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몇몇 조각상을 보면 아름답다기 보다는 촌스럽고 천박해 보입니다. 이는 원색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서는 색이 하나의 권력을 표시하는 도구였기 때문에 일부러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 귀족과 왕족을 그대로 조각으로 재현하다 보니 똑같이 원색 계열의 색으로 조각을 칠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놀이공원의 흔한 조각으로 보여서 오히려 천박해 보이는데 고대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가 색이였습니다.

또한, 법으로 정해서 노예는 색을 입힌 옷을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몸 자랑하려고 벌거 벗은 조각을 만든 것도 아닙니다. 고대 사람들은 벌거벗는 것을 꼴불견으로 여겼습니다.

나체 조각상 위에 색을 칠해서 옷을 입혔는데 후손들은 이것도 모르고 벌거벗은 몸을 숭상하는 줄 알았네요.

색을 좋아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사자 갈귀에도 파란색으로 칠해 놓았네요. 그런데 신기하죠. 고대 그리스 조각상은 무채색으로 된 모습이 더 품격 있고 위대해 보입니다. 색을 칠해 놓으니 놀이공원에 서 있는 볼품없는 조각상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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