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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지난 2003년 총리 시절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최초의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르기도 했던 고건 전 총리가 회고록을 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검증이 안 된 무능력한 리더였고,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내세운 진영 논리에도 잘못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강진 기자입니다.
[기자]오만과 불통, 무능.
고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이같이 규정하고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했어야 한다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영대결에 앞장서서 그 사람을 검증도 하지 않고 뽑고 추동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촛불집회와 탄핵 여론이 들끓던 지난해 10월 말 청와대에 초청받았을 때는 성역 없는 수사로 모든 의혹을 규명하라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도 담겼습니다.
2004년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권한대행을 맡았던 63일은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고난대행 시절이라고 떠올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탄핵에서 복귀한 뒤 새 장관들에 대한 임명제청을 거절하고, 사표를 전달한 것이 역린을 건드렸다고 관계가 틀어진 배경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시대발전 흐름을 봤을 때 변곡점에 와 있다고 진단한다고 대승적 차원에서 여야정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서는 특정세력의 조사와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고건 / 전 국무총리 :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들 말합니다. 지난 얘기는 흘러간 얘기에 불과할 수 있지만 현재의 시각에서 음미할 때 살아있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전 총리는 또 박원순 서울시장과 신연희 강남구청장 사이에 갈등은 잘못된 선거제의 폐해라며 시장이 구청장 후보를 내서 의회 동의를 얻는
방식으로 했으면 신연희 청장 같은 사건이 안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YTN 이강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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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건(髙建, 1938년 1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고건. 대한민국 총리 고건 서울종합방재센터 방문90.jpg · 대한민국의 제30·35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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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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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前총리 아들, 배구 전설, 北 0.1% 상류층…尹선대위 합류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국민공감미래정책단 공동단장에 선임된 고진 한국모바일산업연합회장. 고건 전 국무총리의 장남이다. 페이스북 캡처. 국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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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펴낸 고건 전 국무총리“특권과 반칙이 없는 국정 시스템 …

고건 전 총리는 두 번의 총리, 두 번의 서울특별시장, 세 번의 장관, 최연소 전남지사, 최초의 사회통합위원을 역임한 한국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행정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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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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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박근혜,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검증 않고 뽑아”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고건 전 국무총리가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 등을 비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만든 보수 정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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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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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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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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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건(髙建, 1938년 1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생애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고건은 1938년 1월 2일, 서울에서 아버지 고형곤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아버지 고형곤은 학술원 회원을 역임한 철학자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탓에 내사와 탄압을 받기도 했다. 큰형 고석윤은 행시와 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이후 상공부 상역국장을 지내다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가 검찰의 내사를 받자 공직을 사퇴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작은 형 고경윤은 일찍 사망했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공무원 활동 [ 편집 ]

1959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졸업 후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고시에 합격한 아들에게 아버지 고형곤은 공무원으로 지켜야 할 3계명을 줬다.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는 소문을 내지 마라.”이다.[2] 후일 고건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2] 지방행정사무관에 임용된 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1965년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 1968년 서기관으로 승진, 전라북도청 식산국장과 내무국장을 거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내무부 지방국 지역개발담당관, 새마을담당관 등을 지냈다. 행정관리관으로 승진, 1973년 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 1975년 전남지사를 거쳐 1979년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 국토개발연구원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리자 5.17을 군정으로 간주하고, 군정하에서 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다.[3]

정치 활동과 제30대 국무총리 [ 편집 ]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내무부 장관에서 하야한 뒤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하나 열고 칩거하던 중 1988년 민정당 군산지구당 위원장, 민정당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시 관선 시장을 지내고 뒤이어 1991년부터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명지대학교 총장직에 있다가 1995년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거쳐,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8년 3월 3일 퇴임 다음날 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재청하고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김종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 1998년 4월 그는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에 특별 임용되었다.

제35대 국무총리 [ 편집 ]

고건은 2001년 한국상하수도협회 초대회장, 2002년 국제투명성기구 대한민국지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2003년 다시 입각제의를 받고 입각, 고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193대 2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 편집 ]

탄핵 소추되었을 무렵의 노무현 대통령

고건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자 외신, 특히 미국계 외신은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다고 보도했다.[4] 통신은 한국에서 국무총리는 통상 의전적인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했다면서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4]

뉴욕타임스(NYT)는 고 총리가 지난 97~98년 외환위기 당시 총리를 지냈던 경험을 살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결정을 내리기까지 임시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면서 정치 분석가들은 고총리의 풍부한 행정 경험, 격동의 시기에 안정적인 스타일의 리더쉽을 발휘해온 점을 평가하고 있다[4] 고 발표했다. 영국 BBC는 고 총리를 한국의 안정적인 리더(South Korea”s “steady” leader)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비교적 자세히 논평을 실었다.

요지는 세 번의 장관, 두 번의 서울 시장에 이어 국무총리도 두 번째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잘 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 BBC 역시 고 총리를 “미스터 안정(Mr.stability)” “행정의 달인(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했다.[4] BBC는 고 총리가 핵심 요직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 사건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 보수파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을 잘 보좌해 왔다고 평가했다. BBC는 대미관계에 있어 비굴한 아부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 당시부터 마찰을 빚어왔던 노대통령과 달리 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4] 미국 언론의 관심 이후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고건은 2개월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 특히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정한 관리라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자동으로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종료하고 5월 24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 [ 편집 ]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기간 중 고건은 민심과 여의도 국회의 분노를 수습하는 등 무난한 수습 노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은 그를 총리로 기용한 것은 인사실패라고 비판하여 설전을 벌였다.

2006년 12월 15일 광주 전남방문에서 그는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남의 탓만 하고 있다”든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는 무책임한 충격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비판했다.[5] 노무현은 12월 21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6] 에서 고 전 총리 기용에 대해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 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했다”며 ”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다”라고 말했다.[5] 이어 “오히려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7]” 고 하여 노무현은 고건의 기용을 인사 실패라고 규정했다.

고건 측에서는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고 즉각 반박했다.[5] 고건의 한 측근은 그 날 “(그가)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서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고 전총리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5][7] 인사실패 발언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고건은 12월 22일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다 22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자신의 총리 기용을 `인사 실패’로 규정한 노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6] 이어 그는 노무현 대통령 등의 고립에 대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탓[6][8]”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고건은 또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6][9][8][10]”라며 반박했다.

덧붙여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가르기, 민생문제도 챙기지 못한 무능력,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런 귀결[6][7][10]”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당이 원내 제1당이었음에도 국정운영은 난맥을 거듭했다[6][8]”면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은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석이 46석에 불과한 여소야대 정국이었다”며 “총리 주재로 4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국정협의회를 정례화해 국가적 현안과제들을 정치권과 조율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 나감으로써 큰 차질없이 국정을 운영한 바 있다”고 말했다.[6]

고건은 또 “참여정부 초대 총리직을 제의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했다”며 “그러나 안정속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며 억울함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권한대행으로서 국민의 협조를 얻어 국가적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데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행은 신중하고, 절제돼야 한다.[6][10]”고 반박했다. 비판 성명 발표 이후 ‘성명 내용이 강경하다.’는 한 언론의 질문에 대해 고건은“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7]”라고 응답했다.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하게끊는 계기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되었었다.[10] 이후 그의 한 측근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제 부담없이 `이혼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됐다[10].”고 밝혔다. 이후 그는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대선주자와 대선 후보로 거론됐으며 대통합민주신당 영입설, 민주당 영입설, 한나라당 영입설 등이 나타났으나 2007년 1월 16일 언론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 퇴임 이후 [ 편집 ]

2009년 대통령 소속의 사회통합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는데, 고건이 초대 위원장으로 위촉됐다.[11][12]

상훈 [ 편집 ]

1972년 홍조근정훈장

1982년 청조근정훈장

1998년 국제투명성기구(TI) 세계청렴인 상

2001년 3월 국제투명성기구(TI) 올해의 세계청렴인상

2002년 9월 몽골국 북극성훈장

2005년 암창 상(賞)

저서 [ 편집 ]

《행정도 예술이다》(2002년)

《고건 회고록》(2017년)

논문 [ 편집 ]

1994년 지방자치에 대응하는 지방정부의 쇄신과제

1995년 지방화시대의 행정개혁 전략

가족 [ 편집 ]

할아버지: 고병소(髙炳韶)

할머니: 창녕 조씨(曺氏) 아버지: 고형곤(高亨坤, 1906년 4월 16일 ~ 2004년 6월 25일) 어머니: 장정자(張貞子, 1914년 ~ 2001년 5월 13일) 형: 고석윤(髙錫尹, 1928년 ~ ) 형: 고경(髙敬, 1936년 ~ 몰년 미상) 여동생: 고혜경(高惠敬, 1945년 ~ ) 여동생: 고혜련(高惠蓮, 1951년 ~ 2013년 5월 1일) 배우자: 조현숙(趙賢淑, 1938년 ~ 2021년 9월 29일) 장남: 고진(1961년 10월 11일 ~ ) 차남: 고휘(1962년 ~ ) 3남: 고위(1967년 ~ )

학력 [ 편집 ]

195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0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사

1971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공학석사

명예 박사 학위 [ 편집 ]

1992년 원광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2001년 시라큐스 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평가와 비판 [ 편집 ]

평가 [ 편집 ]

고건은 행정의 달인, 유능한 관료,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한 관료라는 평가가 있다. ‘사실상 새마을운동을 기획한 주무책임자로서 농촌부흥운동을 진두지휘했다. 새마을운동 성공이 그를 최연소 도지사(전남·37)로 만든 것이다. 세계 5대 지하철 교통망 구축, 난지도 생태공원 조성, 서울 도시고속도로건설, 한옥마을 복원[2]’ 등이 업적으로 거론된다.

“청렴은 사명감 이전에 나의 생존법칙이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그의 청렴성은 브랜드화됐다.[2] 그는 오랜 공직생활 속에서도 스캔들이나 부정부패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일이 없다. 그가 행정의 달인이 된 배경에도 청렴성이 자리잡고 있다.[2]

그는 1990년 2월 초 한보 수서택지분양 때 도덕성과 자리를 바꿨다. 청와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수서택지분양 수의계약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했다.[2] 이 사건이 서울시장(관선)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고 전 총리의 설명이다. 당시 수서특혜분양수사 결과 많은 사람이 구속됐으나 서울시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다. 이로써 ‘클린 서울’의 명성을 얻었다.[2] 그의 청렴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1998년 그에게 세계청렴인상을 주었다.[2]

비판 [ 편집 ]

일부에선 고 총리가 “예스맨”이란 닉네임으로 불릴 만큼 근성이나 열정이 없다[4]는 비판도 있다.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기타 [ 편집 ]

고건은 생맥주를 즐겨 마시지만 가까운 사람과는 맥주에 소주와 토마토주스, 후춧가루 등을 혼합한 독특한 칵테일을 돌려 마신다.[2]

인맥 관리 [ 편집 ]

고건은 인맥 관리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인맥은 오랜 관료생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부임하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료모임, 자문 교수모임은 물론 심지어 부임하는 부처의 출입기자와도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2] 심지어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한다. YS정권 말기 DJ와 갈등을 빚을 때도 두 세력에 동시에 인맥을 구축할 정도로 고 전 총리는 인맥관리의 달인이다. 그리고 공직에서 퇴임 후에도 대학총장은 물론 각종 시민단체 등으로 넘나들며 인맥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본인 특유의 부지런함도 작용했다.[2]

잠적 의혹 [ 편집 ]

한편 격동의 순간마다 잠적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의혹이 있다. 고건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습 서거 당시 3일 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2],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1주일 간 잠적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특히 이 부분은 2003년 2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집중적으로 의혹이 부각됐다. 그 의혹의 제기의 속내는 “당시 국가위기 때 처신은 국가지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2]”는 것이다.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전임

박종성

(직무대리 전영춘 기획관리실장) 제4대 강원도 부지사

1973년 11월 1일 ~ 1973년 12월 16일 후임

임성재

전임

허련 제18대 전라남도지사

1975년 11월 13일 ~ 1979년 1월 9일 후임

장형태

전임

정상천 제2대 대통령비서실 제2정무수석비서관

1979년 1월 10일 ~ 1979년 12월 18일 후임

(정무수석으로 통합) 고건

전임

류혁인 (제1정무수석)

고건 (제2정무수석) 제1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1979년 12월 19일 ~ 1980년 6월 7일 후임

김창식

전임

김재명 제27대 교통부 장관

1980년 9월 2일 ~ 1981년 3월 10일 후임

윤자중

전임

정종택 제35대 농수산부 장관

1981년 3월 10일 ~ 1982년 5월 20일 후임

박종문

전임

정호용 제46대 내무부 장관

1987년 5월 26일 ~ 1987년 7월 14일 후임

정관용

전임

김용래 제22대 서울특별시장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후임

박세직

전임

이영덕 제4대 명지대학교 총장

1994년 3월 17일 ~ 1997년 3월 5일 후임

송자

전임

이수성 제30대 국무총리

1997년 3월 5일 ~ 1998년 3월 2일 후임

김종필

전임

조순

(권한대행)강덕기 제32대 서울특별시장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후임

이명박

전임

(초대) 제1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1999년 1월 23일 ~ 2002년 9월 23일 후임

이명박

고건 前총리 아들, 배구 전설, 北 0.1% 상류층…尹선대위 합류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인선 작업이 9일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유명 인사의 이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고건 전 총리의 아들, 배구계 레전드급 인사도 ‘윤석열 호(號)’에 이름을 올렸다.

고건 아들, 배구 전설 합류

국민의힘에선 선대위 합류 인사 가운데 고진(60) 한국모바일산업연합회장을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고 회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거쳐 미국 시러큐스대에서 컴퓨터공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ICT 분야 전문가다. 이번 국민의힘 선대위에선 국민공감미래정책단 공동단장으로 선임됐다. 고 회장은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부친은 고건 전 국무총리, 조부는 고형곤 전 의원이다.

고 회장의 영입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대위 인선 작업에 관여한 한 인사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이던 고 회장이 선대위 합류를 망설여 그와 친분이 있는 당내 여러 인사가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19대 대선을 앞둔 지난 2017년 3월 민주당에 영입돼 신성장특별위원회에서 김병관 의원과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고 회장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선대위 특별고문인 윤진식 전 대통령정책실장이 연락해 함께 정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서 최종적으로 합류를 결심했다. 민주당엔 탈당계를 제출해 처리 완료됐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윤 후보의 서울 대광초 1년 후배이기도 하다.

신치용(66) 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의 선대위 합류도 눈길을 끈다. 신 전 촌장은 직능총괄본부 산하 체육지원본부장에 선임됐다. 배구선수 출신인 그는 1997년 삼성화재 창단과 함께 지휘봉을 잡아 리그 9연패를 이뤄냈다.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지냈다. 신 전 촌장의 아내 전미애씨와 딸 신혜인씨는 여자농구 선수 출신, 사위 박철우씨는 현역 배구 선수다.

신 전 촌장은 통화에서 “정치적 신념, 소신에 따라 윤 후보 선대위 합류를 선택하게 됐다”며 “체육계의 당면한 어려움이 많다. 현장 선ㆍ후배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후보 직속 청년위엔 ‘北 0.1% 상류층’ 김금혁

청년층에서도 다양한 분야 출신의 인사가 합류했다. 윤 후보 직속의 ‘내일을 생각하는 청년위원회’ 위원으로 합류한 김금혁(30)씨는 북한 엘리트 출신의 탈북민이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다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 베이징어원대에 입학했다. 이후 북한 체제의 실상을 깨닫고 다른 유학생들과 비밀 독서회를 조직했다가, 이 일이 북한 보위부에 적발되며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에 정착한 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앞서 김씨는 선대위 청년본부장인 시사평론가 장예찬씨의 권유로 윤 후보 청년 싱크탱크인 ‘상상23’ 연구위원을 맡았다가 이후 경선 캠프에선 정무실 산하에서 일했다. 김씨는 “저는 현 정부를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윤 후보는 그런 사람들에 맞섰다”며 선대위 합류 이유를 설명했다.

장씨와 함께 선대위 공동청년본부장을 맡은 여명(30) 서울시의원과 청년본부 수석대변인인 이기인(34) 성남시의원은 대선 경선 당시 각각 홍준표 의원, 유승민 전 의원의 캠프 대변인 출신이다.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출신인 여 시의원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로 서울시의원에 당선됐을 당시 전국 광역시ㆍ도의원 가운데 최연소였다. 이 시의원은 판교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줄곧 제기해 당내에서 ‘대장동 저격수’로 불린다.

고건 국무총리 체크 공식방문 상세보기

고건 국무총리 체크 공식방문

고건 국무총리 내외는 「스삐들라」체크 공화국 총리의 초청 및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지원을 위해 2003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간 체크를 방문할 예정이다.

고건 총리는 체크 공식방문 기간중 「클라우스」대통령을 예방하고,「스삐들라」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제반 상호 협력증진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며, 하원의장과 부총리(외교장관 겸직) 등 주요 인사들을 면담할 계획이다. 또한 고건 총리는 현지 교민 및 우리 기업인들을 만나서 격려할 예정이다.

90년 수교이후 최근 한·체크 양국간의 경제협력 관계가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체크는 2004년 5월 EU 가입을 앞두고 투자환경 개선 및 경제관련 제도정비 노력을 강화하고 있는 바, 금번 총리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 양국간 실질 협력 기반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고건 총리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지원 노력의 일환으로 7월 1일부터 2일간 프라하에서 개최되는 IOC 총회의 주요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며, 6월29일에는 우리기업이 주관하는 체육.문화 행사도 참관, 격려할 예정이다.

금번 고건 총리의 체크 방문에는 김재섭 외교통상부 차관을 비롯하여, 국무총리실, 외교통상부, 산업자원부 등 정부부처 관계관이 수행하게 된다.

회고록 펴낸 고건 전 국무총리“특권과 반칙이 없는 국정 시스템 만들어 국민통합 이뤄야”

고건 전 총리가 지난 11월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대통령만 빼고 다 해봐… ‘정성 다하고, 남의 돈 받지 말고, 매일 새로워져라’ 지킨 덕

박근혜 전 대통령, 아버지 기념사업에 전념했으면 탄핵 같은 불행 당하지 않았을 걸

[백세시대=오현주기자]

고건 전 총리의 회고록 ‘공인의 길’.

고건(79) 전 국무총리가 최근 회고록 ‘공인의 길’(나남출판사)을 펴냈다. 이 책에는 30년 공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고건 전 총리는 두 번의 총리, 두 번의 서울특별시장, 세 번의 장관, 최연소 전남지사, 최초의 사회통합위원을 역임한 한국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행정가이다. 보수와 진보에 치우치지 않는 행정의 달인, 안정적 리더로 국내외에 알려졌다. 고건 전 총리에게 듣는 화려했던 공직 생활과 인생철학.

-어떻게 지내시나.

“북한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2014년 출범한 아시아녹화기구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황해도 사리원 산에 1차 묘목사업을 시작했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잠정 중단된 상태지만 재개될 경우를 대비해 철원군 산림조합과 협력해 휴전선 접경지역에 대규모 북한조림용 양묘장(통일양묘장)을 조성 중이다.”

-회고록을 내게 된 배경은

“원래는 중앙일보에 5개월 동안 쓴 글들을 묶어 ‘국정은 소통이더라’란 제목으로 냈다. 그 책을 누가 보랴 싶었지만 웬걸, 무슨 일만 나면 내 책을 참고용으로 삼았던 것 같았다. 기자들이 메르스 사태 때는 내가 국무총리 시절 범정부 차원으로 사스방역을 이끌었던 경험을 이야기해 달라, 탄핵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일했던 체험을 말해 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새삼 인터뷰 할 것 없이 책에 다 적혀 있다’고 했는데 기자들 말이 ‘보려고 해도 책이 없다’고 했다. 내 회고록의 핵심 주체라 할 공인의 길과 소통의 문제야말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과제라 느끼고 언론 대담을 추가하고 제목을 달리해 다시 펴내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다.

“정말 답답했다. 오만, 불통, 무능…, 하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지.”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기 전 만나서 충고했다는데.

“충고라기보다는 국가비상시국에 드리는 진언을 한 적이 있다. 국민들의 의혹과 분노가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으니 성역 없는 수사를 표명해 모든 의혹이 객관적으로 규명돼야 한다는 것과, 인적 쇄신과 동시에 국정시스템을 혁신해 새로운 국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초청해 함께 고민해 달라는 말씀을 드렸다.”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결국 촛불집회가 연이어 일어나고 국회에서 탄핵안이 발의되고 가결되지 않았나.”

-적폐청산이 도를 넘은 건 아닌지.

“탄핵소추 의결 전후인 2016년 12월에 국민일보가 의미 있는 여론조사를 했다. 국민에게 ‘최순실 게이트, 국정농단의 원인을 뭘로 보느냐’고 물었더니 상류층 및 고위 공직자의 부패 47.8%, 정경유착 11.5%, 연고주의 11% 합계 70%로 결국 특권과 반칙이 70%였다. 적폐청산이란 특권과 반칙이 없는 공정사회로 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정 운영시스템 혁신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정치 보복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특정 세력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사해서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겠지만 기본 목적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의 혁신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건 바로 국민통합으로 가는 길이다. 거기서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으로 연결된다. 그러니까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두 차례 총리를 지냈다. 바람직한 총리의 역할이라면.

“총리는 크게 주주형, CEO형, 집사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JP처럼 정치권력 형성과정에서의 지분이 있는 경우가 주주형이다. 나는 그런 거 없었다. CEO형은 서로 상호 필요에 의해 즉, 오너(대통령)가 필요에 의해 전문경영인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해당한다. 김영삼 대통령한테는 총리 수락조건으로 해임제청권을 달라, 그래서 내각국무조정, 내각통할권을 보장 받았다. 마지막 집사형은 의전형, 대독형이다. ‘총리로 와주십시오’ 그러면 ‘아이고, 고맙습니다’하고 모자 쓰고 들어가는 거를 말한다.”

-소신과 철학을 지켜낸 행정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품안에 사표를 갖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었다.

“1960년대 수습행정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해 2004년 권한대행으로 물러나기까지 순수한 공직기간은 30여년이다. 그 동안 내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사표를 7번이나 쓰기도 했다. 임명직은 당연히 임명권자인 청와대 눈치를 보는 데 그걸 거부한 것이다. 임명권자인 청와대의 방침과 지시에 겁도 없이 반기를 들었던 거였다.”

-무슨 일로 사표를 그렇게 많이 썼나.

“최규하 대통령 아래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을 때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전야에 신군부가 국보위와 군정을 위한 비상계엄령확대조치를 했는데 거기에 내가 반대하고 사표를 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군정을 의미하는 거였다. 군정으로 돌아가면 안되기 때문에 이것에 반대하고 임시국무회의에 못 가겠다고 말한 후 사표를 쓰고 나왔다. 직업공무원은 그때 끝났다.”

-서울시장 재직 시 잊지 못할 일이라면.

“노태우 정부에서 임명직 서울시장 할 때였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통해 수서택지를 한보건설에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끝까지 청와대 지시를 거부했더니 법무부국장이 찾아와 ‘사태가 심각하다’며 ‘김모 도시계획국장을 바꾸지 않으면 구속이 된다, 그걸 예방하려면 국장을 바꾸라’고 했다. 그때 김 국장을 잡아가면 사회고발을 하려고 했다. 내 돈으로 신문에 전면광고를 내 ‘여차여차하더니 이렇게 잡아갔다’고 광고를 내려고 했다.”

-행정 분야에서 실패한 정책은 없었나.

“전남지사로 내려갔을 때 산림국장이 건의안을 가지고 왔다. 지리산 일대에서 고로쇠물을 채취하는데 살아 있는 나무를 뚫기 때문에 나무의 생장에 나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금지해야 한다고 했더니 난리가 났다. 고로쇠물을 채취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 물로 건강관리를 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현실을 잘 몰랐던 거였다. 고로쇠물을 뽑으면 나무가 죽는지 확인 안한 것도 잘못이었다. 죽은 나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취소했으니 실패한 셈이다.”

-대통령 빼고 수많은 행정 및 정치 자리를 했다. 공직철학은 무언가.

“아버지가 준 훈시와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까지 합쳐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지성감민(至誠感民), 지자이렴(知者利廉), 일일신(日日新)이다. 공직생활 할 때 아버님이 ‘줄서지 마라, 누구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마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인사운동하지 말고 누구의 가신이 되지 말라는 얘기였다. 결국은 일을 열심히 해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자이렴은 남의 돈 받지 말라는 뜻이다. 예전에 가친이 나한테 ‘남의 돈 받지 마라’고 했는데 이게 공직윤리상 당연한 것이었다. 마지막 일일신은 행정의 환경이 급속하게 변하니까 그에 대처해 행정도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고건 전 총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사임.

오현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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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박근혜,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검증 않고 뽑아”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고건 전 국무총리가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 등을 비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만든 보수 정치권에도 쓴소리를 했다.

고 전 총리는 1일 공개한 ‘고건 회고록 : 공인의 길’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정말 답답했다. 오만, 불통, 무능…. 하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 한다”며 “당사자가 제일 큰 책임이 있겠지만, 그 사람을 뽑고 추동하면서 진영대결에 앞장선 사람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고 전 총리는 또 “박근혜를 검증 안 하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 아니냐. 보수진영이 이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진영대결의 논리이고 결과이다. 중도실용을 안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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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과 세월호 진상규명 촛불집회

고 전 총리는 지난해 본격적인 촛불 정국 도래 직전 박 전 대통령에게 진언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2016년 10월 30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사회원로 몇 명과 함께 차를 마시며 ‘국민의 의혹과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성역없는 수사를 표명하고, 국정시스템을 혁신해서 새로운 국정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촛불집회가 일어나고 탄핵안이 발의, 가결됐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회고록은 그가 걸어온 길 자체가 한국 역사의 한 장면, 장면임을 보여준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을 시작으로 도지사, 장관,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했다.

고 전 총리는 머리글에서 “실제 공직에 있었던 시간은 다 합해 30년이지만 야인으로 지낸 20년 역시 공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았으니 50년을 공인으로 살았다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며 “공인으로서 나의 삶은 우리나라와 서울의 현대사와 깊게 엮여 있기에 ‘무엇을 왜 어떻게 하려 했고 실제 어떻게 했는가, 또는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회고의 기록을 남기는 일은 공인으로서 나의 마지막 의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내 회고담의 핵심주제라 할 ‘공인의 길과 소통의 문제’야말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과제다. 국민으로서 정부의 무능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사의 혼돈과 독선은 참지 못한다”며 “지난 겨우내 광화문을 달군 ‘이것이 나라냐’의 절규는 바로 공인 정신의 소멸과 소통의 부재에 대한 전 국민적 절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라고 진단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건 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노무현대통령과 고건총리가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박일/정치/

2003.4.15 (서울=연합뉴스)

고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총리를 맡게 된 과정 등에 대한 뒷얘기도 털어놨다.

그는 첫 만남에 대해 “1998년 서울시장 민선2기에 출마할 당시,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를 만났다. 인상적이었다. 그의 화법은 매우 담백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드물게 사심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37세 최연소로 전남도지사가 되는 등 늘 ‘최연소’ 타이틀을 달았던 고 전 총리는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를 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총리를 제안하면서 ‘개혁대통령’을 위해선 ‘안정총리’가 필요하다 했고, 완강히 고사해도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면서 “‘해임제청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내각인선까지 맡아서 해달라면서 다만 법무부 장관은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고 뒷얘기를 소개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권한대행을 맡았던 시절에 대해서는 ‘내 인생 가장 길었던 63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탄핵소추에서 복귀한 날 청와대로 들어가 ‘이제 강을 건넜으니 말을 바꾸십시오’라고 사의를 표명했다”면서 “그런데 사흘 후 새 장관들에 대해 임명제청을 해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비서실장을 두세 번 보냈고, 마지막에는 내 사표를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완전히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틀어진 배경을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12월 “고건 총리가 양쪽을 다 끌어당기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고 말한 데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고 전 총리는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 여야를 아울러서 국정을 수행한 건 나다. 내가 물러난 지 2년 후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을 때는 노 대통령 본인이 고립됐던 건 사실인가보다. 노 대통령 스스로 고립된 거다. 나는 총리를 그만둔 지 몇 년 후 얘기다. 시계열에 대한 착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내가 총리일 땐 여야정 협의가 잘됐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명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임명제청 요구 거절을 우선으로 들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친노(친노무현) 세력에게 ‘고건을 밀지 마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싶다고 짐작했다.

2007년 고건 전 총리 대선 불출마 선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상학기자 = 16일 오후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예정이던 고건 전 총리 대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이 지지자들의 반대로 무산된 가운데 고건 전 총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 [email protected]/2007-01-16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고 전 총리는 “제일 큰 불출마 요인은 중도실용의 기치를 내걸고 내 정치세력을 못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호남 출신의 한계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정치적 실패를 놓고 보면 중도실용의 정치가 설 자리도 좁았지만, 비정당 출신 제3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더 좁았다”며 “참여정부의 총리를 해서 진보 쪽으로 포지셔닝이 된 상황에서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발생하니 역부족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출마 선언을 하고 사흘 후인가 돌아왔더니 DJ(김대중) 쪽에서 보낸 정세현 전 장관이 ‘동교동에서 번의(飜意)하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후원해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간판을 바꿔도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며 “다음 대선에 재수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나이가 DJ가 대통령이 됐던 만 73세보다 많아지는 거다. 노욕을 덮어버릴 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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