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쿠데타 | [Kbs 역사저널 그날] 5.16 군사정변의 그날ㅣ Kbs 200721 방송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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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회 그날 클립영상] 5.16 군사정변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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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륙(五一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키워드. 박정희; 군사쿠데타; 김종필; 장면;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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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9/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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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1961 – 우리역사넷

이처럼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는 한국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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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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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과 5·16군사쿠데타에서 미국의 역할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그리하여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합헌정부, 민주주의 지지라는 미국의 단기적 일시적 쿠데타 반대 사유는, 반공과 체제안정이라는 구조적 거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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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6/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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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안장된 5.16군사쿠데타 세력들 – 오마이뉴스 모바일

5월 16일은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발발 61년이었다. 1961년 이날 새벽, 박정희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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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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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이 군사 쿠데타라는 건 로마 가톨릭 신학생들도 알았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6) 5·16 군사 반란“경제만 떼 박정희 평가 안 돼죠”“고문으로 숨진 청년학생과 가족을 경부고속도로가 위로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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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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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저널 그날] 5.16 군사정변의 그날ㅣ KBS 200721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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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군사 쿠데타

  • Author: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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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RmPZaL8Ki8

군사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은 4·19혁명 이후 처음 정군운동(整軍運動)으로 나타났다. 4·19혁명의 여파로 군 내부에서도 군의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타나게 되었고 인사적체 등 군 내부 불만과 결합되어 정군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1960년 5월 2일 박정희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3·15부정선거와 각종 군부 비리의 책임을 물러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어 5월 8일에는 김종필(金鍾泌)·김형욱(金炯旭)·길재호(吉在號)·옥창호(玉昌鎬)·신윤창(申允昌)·최준명(崔浚明)·석창희(石昌熙)·오상균(吳尙均) 등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가 국가반란음모라는 죄목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뒤에 연합참모부장인 최영희(崔榮喜) 중장과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 팔머(W. B. Palmer) 대장의 성명을 성토하여 세칭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으로 피소되기도 하였다.

정군운동의 결과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참모총장, 5월 31일에는 당시 한국군에서 최고 계급을 갖고 있던 백선엽 대장 등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국의 반대와 허정 과도정부의 미온적 대응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매그루더는 송요찬의 사임 직후인 1960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거의 매일 공개적으로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이 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며 정군운동을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장면 정권 하에서도 정군은 지지부진하였다. 정군운동은 사실상 중장급 장성들의 반수 정도가 퇴진하고, 소장 3명이 퇴진한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 한편 군내에서 하극상으로 간주되는 집단행동을 한 영관급 장교들도 역시 미온적으로 처리되었고 정군파 장교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정희도 12월 7일에 한직(閑職)인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는 정도였다. 결국 장면 정권은 정군운동을 미온적으로 처리하여 군 내부 불만을 해소하지도 못했고 또 쿠데타 주도세력의 형성을 막지도 못하였다.

이에 1960년 가을부터 일부 정군파 장교집단을 중심으로 쿠데타 모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쿠데타를 결의했다. 김종필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은 박정희 세력과 결합되어 쿠데타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세력 규합에 나섰다. 특히 이들은 이른바 ‘비둘기 작전’이라는 장면 정권의 폭동진압계획을 적극 활용했다.

장면 정권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고양을 군사력 중심의 물리적 탄압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비둘기 작전’이라는 폭동진압 계획이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적임자로 장도영을 선택해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장도영은 주요한 정군 대상 인물로 예편원까지 제출했었는데, 매그루더의 지원과 장면 정권의 정치적 이해가 맞어떨어져 결정적 시기의 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쿠데타 주도세력은 장면 정권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들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했다. 그 결과 육군 제6관구사령부·육군 제33사단·육군 제34사단·육군 제12야전공병대·육군 제1공수단과 육군본부·국방부의 중견장교들이 다수 쿠데타 세력에 포섭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金潤根) 준장이 중심이 된 군사 쿠데타 계획도 있었지만 육군의 쿠데타 세력과 연결되면서 통합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도영이 참모총장이 된 것은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박정희는 오랫동안 장도영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도영이 2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는 휘하의 부사령관이었다.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대령이나 제1공수단장 박치옥 등은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항간에는 쿠데타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1961년 들어서는 이른바 ‘3·4월 위기설’이 대두되어 사회적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이때부터 쿠데타는 모의 단계를 넘어 본격적 실행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3월 경부터 폭동진압계획에 동원될 군부대 장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조직된 장교 40여 명이 쿠데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1961년 4월 6일 명동의 양명빌딩에 모여 쿠데타 참여를 맹세했다.

이렇게 쿠데타 준비를 마친 이들은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기 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폭동진압 명령이 내려지면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 학생들의 시위를 과격한 방향으로 조장하기 위해 비밀공작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가자 5월 12일을 다시 거사일로 정했다. 이 계획 역시 사전 정보 누설로 무산에 그치고 마침내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혁명기도의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玄錫虎) 국방장관이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朴致玉) 대령에 의하여 출동하고, 제6군단 포병대는 군단참모 홍종철(洪鍾哲) 대령과 문재준(文在駿) 대령·구자춘(具滋春) 대령에 의하여 제933대대, 백태하(白泰夏) 중령에 의하여 제822대대, 김인화(金仁華) 중령에 의하여 제911대대가 각각 출동하였다.

한강 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상오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이던 반도호텔을 급습하였으나, 총리의 도피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장면 총리는 애초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출입이 저지되었으며 재차 미 대사관 숙소로 피신하고자 한 시도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주요 군 지휘자 중의 하나였던 1군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적극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입장과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으로 진압작전은 시행될 수 없었다.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자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쿠데타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고, 지방에서도 중요 도시인 대구·부산·광주·대전 등지를 장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쿠데타군은 이날 상오 5시 서울중앙방송국 첫방송을 통하여 “우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전하고 이른바 ‘혁명공약’ 6개 항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 공약은 김종필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상계』를 많이 참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방송은 이 날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그 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장면 총리가 5월 18일 은신처였던 깔멜 수녀원에서 나와 중앙청에서 제69차 임시각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장면은 은신처에서 미국 대사관 등과 연락해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와 주도적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의 군사력이 동원되지 않는다면 쿠데타 진압은 사실상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고 장면으로써는 달리 도리가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로써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와해되고 본격적인 군정이 시행되었다. 이 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군사혁명 지지의 시가행진이 있었고,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군사정부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김종필과 회담을 가진 뒤, 군사 쿠데타를 인정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은 박정희·유원식(柳原植)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는 모호한 논평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5·16은 명실공히 성공을 거두고, 같은 날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고쳐,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를 비롯한 30명의 최고위원으로 구성되고, 고문에 김홍일(金弘壹)·김동하(金東河)를 추대하였다.

5·16 군사정변 군이 정부를 장악하다

1961년 5월 16일에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모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물리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이로써 박정희 그룹은 1963년 대선을 치르고 민간정부로 전환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형태로 한국사회를 통치했다. 이처럼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는 한국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또한 장기간 군사 엘리트들의 집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한국사회 전 부문에 걸쳐 뿌리깊은 군사주의 문화가 자리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이 발생한 배경은 당시의 국내외 정치·사회적 동향과 한국군 내부의 문제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국내 정치에서는 이승만 정권을 종결시킨 4·19 혁명 이후 한국사회는 오랜 기간의 독재정치가 끝난 만큼 다양한 집단의 정치적 요구가 표출되었고, 이승만 정권 당시의 학살이나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터져나오던 상황이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 그룹은 이 시기의 상황을 분열, 무능, 혼란 등의 몇가지 전형적인 키워드로 규정하였으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표적으로 삼은 것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다만 장면 정부가 이승만 정권 청산요구에 다소 미온적이고 보수적으로 대처했다는 점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신·구파간 갈등으로 분열된 기존 민주당 세력보다 혁신계 정치세력이 부상했다. 4·19의 주도세력으로 자임했던 학생들 역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의제를 제출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려 했는데, 특히 한국사회 후진성을 지적하며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반미 자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립화통일론 등 그간 금기시했던 통일 논의가 시작된 시기일 뿐 아니라, 남북한 대표를 공동으로 유엔에 초청하자는 제안이 나왔기 때문에, 학생 운동계에서도 남북 문화교류를 제안할 정도였다. 언론매체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한데다 언론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승만 정권 시기 강력했던 어용노조의 반작용으로 노동조합 운동도 활발해졌다. 이처럼 여러 부문에 걸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자 민주당 정부는 집시법이나 반공법을 추진하여 대응하려다 이른바 2대 악법 반대투쟁에 부딪히기도 했다. 한편 미국은 이 시점에 공화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행정부에서 민주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61년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시기 뉴룩(New Look) 정책의 결과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다시금 경제원조에 방점을 두되, 무상원조보다는 차관에 비중을 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했다. 특히 로스토우(Walt Whitman Rostow)의 주도 아래 등장한 저개발국 경제개발론이 등장하였고, 제 3세계에서 미국식 개발모델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냉전 하 체제경쟁에서 관건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에서는 현지의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개발모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조차 타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본국에서는 개별 국가들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역학(area studies)이 발전했고, 이와 동시에 현지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상황을 통제하면서 자본 흡수력을 높이고 경제개발을 추진할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필요해졌다. 친서구적이고 반공적이면서도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단절된, 일정한 수준의 근대교육을 받아 조직과 행정력을 보유한 집단으로 현지의 군(軍)이 주목받았다. 미국 정부는 한국사회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통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군 내부 지도자들을 물색한 바 있다. 한국군 역시 6·25전쟁을 거치며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음에도, 휴전으로 전투 활동이 중지되면서 내부에 승진 적체 현상이 발생했다. 특히 당시 드물게 근대 교육을 받고 근대적인 조직생활을 경험한데다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장교들은 엘리트 의식과 함께 관료 및 특권층에 대한 분노가 심했다. 이들은 4·19 이후에 군 내부에서 정군(整軍) 운동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하극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장면 정권이 출범한지 보름여만인 1960년 9월 이미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여기에서 쿠데타에 필요한 구체적인 준비와 역할 분담을 했고, 조직적으로 동조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한강 대교에 도달하였으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오전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방송국을 접수한 쿠데타 세력은 라디오 방송으로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혁명공약 첫머리에서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점을 가장 먼저 내세웠던 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 미국 측의 사상 검증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또한 반공(反共)을 제외하면 쿠데타그룹의 정치적 입장이 동질적이지 않았다. 박정희 개인의 연설이나 저서에서 나타나는 주장을 살펴보면 기존의 반공주의자들과 달리 소련이 아니라 자국의 ‘민족성’에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돌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과도기적, 행정적, 민족적,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데, 당대 인도네시아 수카르노(Achmed Sukarno)의 교도적(guided) 민주주의나 대만 장제스의 군정-훈정-헌정론과 유사성을 갖는다. 쿠데타 직후에는 이런 논리가 『사상계』의 장준하나 『민족일보』 등 대학가나 지식인층에서 호응을 얻기도 했다. 대대 단위까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군 내부 쿠데타 발생가능성을 인지하고 본국에 보고까지 했던 상황이었으나, 발발 직후 쿠데타 세력과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당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유엔군사령관과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 대사대리는 즉각 민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군 내부 질서유지를 요망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므로, 매그루더는 본인의 권한을 침범당했다고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전 11시 30분경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쿠데타를 진압하자는 강경책을 제시했으며, 19일 쿠데타 주도세력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점을 문제로 삼았다. 쿠데타 직후 수녀원에 은신했던 장면 총리는 매그루더와 그린이 합법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 미 대사관과 접촉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상황을 정리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미군을 직접 동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일단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는, 내정에 개입하더라도 최대한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미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관은 이 경우에도 한국정부 총리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한국군을 동원하려고 했다. 총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군 통수권을 행사해야 할 대통령을 방문한 매그루더와 그린은, 윤보선으로부터 쿠데타 진압에 대한 반대의사를 전해들었다. 장면과 민주당 신·구파 갈등을 겪고 있던 윤보선은 쿠데타에 대해 정적이던 장면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에는 1군 사령관 이한림이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결정적으로 장면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했다. 19일에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 지도부와 접촉했으며,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 쿠바 피그스만 공격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을 지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일관되게 불개입 태도를 유지했으나, 사실상 현상유지 입장에 가까웠다. 유엔군 보좌관이었던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신임 주한미국대사 버거(Samuel David Berger) 등 현지에 파견되어 있던 관계자들이 지지를 해주면서 미국정부는 20일에 쿠데타를 추인했고. 같은 날 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발표하고 중앙정보부를 구성했다. 이후 7월에는 미국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군사정부 지지성명을 내었다.

초기에 최고회의는 의장으로 참모총장 장도영을 내세웠지만 장도영은 곧 반혁명 음모 사건으로 축출되고, 실세이던 박정희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쿠데타 직후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일련의 ‘정화’ 조치를 시행했다. 정치계에서는 구 정치인들을 정계에서 축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서 정당·사회단체를 전면 해체했다. 한편으로는 사회정화를 내세우면서 병역기피자·밀수·조직폭력배 등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강력한 단속을 시행했다. 또한 언론정화라는 명목으로 언론매체를 통폐합하고 공보부를 신설하여 검열과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농촌지역의 지지를 염두에 두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을, 생활개선·정신개조 등의 목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이라는 이름의 대중동원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서서히 혁신계를 숙청하고 장면 정권 시기 생겨난 유족회들을 탄압하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민주당 정권 당시 추진했던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도 개정했다. 또한 쿠데타 3달 뒤인 8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민정 이양을 예정보다 2년 뒤로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민정이양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군사정권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1961년 말 박정희 의장을 미국에 대표 자격으로 초청하여 쿠데타 세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민정 이양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이들도 결국 미국의 집중적 압력과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로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은 형태였다. 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총리제를 설치했으며, 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3공화국 헌법은 오늘날 6공화국 헌법과 유사성을 갖는다. 곧이어 1963년 2월에는 김종필 주도로 1년 여간 물밑에서 준비를 거쳐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그룹이 주가조작, 횡령을 통해 정치자금을 착복한 정황이 드러났고,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며 대중들의 기대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63년 8월, 박정희는 전역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공화당 총재직과 대선후보를 수락했다. 그 해 10월 15일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민주정의당 윤보선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명실상부한 민간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4월혁명과 5·16군사쿠데타에서 미국의 역할

현대한국에서 4월혁명과 5.16구사쿠데타는 정치변동의 결정적 전환점들이었다. 특히 두 사건에서 한국군부의 정치개입 문제에 대한 작전지휘권의 행사를 둘러싼 미국의 정책과 역할은 오랫동안 매우 논쟁적이었다. 최근 해제된 문서들은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의 일단을 드러내주고 있다. 미국은 이미 4월혁명 시에도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여 사태진압을 위한 한국군의 투입을 사전에 허락한 바 있었다. 광주항쟁 무려 20년 전이었다. 더욱이 4월혁명 절정의 시점에 미국의 CIA는, 정당들을 대신할 세력으로, 한국의 군부를 교사·동원하여 쿠데타를 감행하려고 구상하였다. 미국에게 군사쿠데타는 적극적 선택경로의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미국은 실제의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관련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나 쿠데타를 저지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합헌정부, 민주주의 지지라는 미국의 단기적 일시적 쿠데타 반대 사유는, 반공과 체제안정이라는 구조적 거시적 찬성 논리와 요인에 의해 곧바로 철회되었다. 미국으로서는 후자가 더욱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이미 4월혁명의 시점에 때 이르게 군사쿠데타를 구상하였었음을 고려할 때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실제 쿠데타 발발 이후 완전한 성공이 확인될 시점까지 쿠데타군은 미국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환원시키지도 않고 있었다. 안보요인미국이 쿠데타를 교사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는 이중정책을 알았다면 장면총리는 미국에 의존하기 보다는, 쿠데타에 맞서 미국과 함께, 또는 미국에 맞서서라도 합헌정부를 수호하려 투쟁했어야했다. 아니면 독자적으로 투쟁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오직 미국의 태도를 기다릴 뿐 이중 아무런 결단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사를 건 쿠데타군에 맞서기에는, 그리고 미국의 친(親) 군사쿠데타적 이중정책을 넘어서기에는 국가지도자로서 너무나도 무력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In South Korea, the two historicalincidents, the April Revolution in 1960 and the May 16thcoupd’étatin 1961 were the very critical moments of political transformation. Especially the policy and role of America about the release of the Korean military in these two events was always questionable and controversial.Some newly declassified documents revealed the hidden facts. In the April revolution, surprisingly the U.S. agreed to release Korean Army in suppressing popular uprising. Moreover CIA of the U.S. they have had a plan to mobilize and to instigate the KoreanArmy for military coup even under the apex of the student uprising. Then, nevertheless Washington knew the coup signs in advance, they did not take any initiative of defeating of dissuading the coup drive. Then, at the time of May 16th coup, the U.S.’s choice of con in short term, but pro in concluding was neither unexpected nor neutral. It was fully expected and acceptable from American side. Upon that the U.S. has had the two options simultaneously between stopping the coup and stirring it, in order to defend the democratic government Prime Minister John M. Chang must have fought against the coup-led military and the USA as well. But he did neither move resolutely nor take any determined counter-coup effort, but just leaning to and waiting for the US action to quell down the coup and to save his constitutional government.It was one of the worst choices of him.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5.16군사쿠데타 세력들

큰사진보기 ▲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가운데)과 그를 경호하는 박종규 소령(왼쪽) 및 차지철 대위(오른쪽)의 모습.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5.16 쿠데타 과정에 참여한 많은 군인들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 우희철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5.16 쿠데타 과정에 참여한 군인들 중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은 친일 경력도 갖고 있다. 이들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우희철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5월 16일은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발발 61년이었다. 1961년 이날 새벽, 박정희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일부 군인 등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의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너 방송국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강압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이 쿠데타를 공식적으로는 ‘5.16 군사정변’이라고 칭한다.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체포한 사건을 ‘12.12 군사반란’이라고 한다. 이 신군부 세력은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장 군인을 동원해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이 두 사건은 모두 합법적인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했다는 점에서 ‘쿠데타’다. 그런데도 하나는 ‘군사정변(政變)’이라고 하고 하나는 ‘군사반란(反亂)’이라고 한다. ‘반란’은 말 그대로 ‘정부나 지도자에 반대해 내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지만 ‘정변’은 모호하고 넓은 의미로 ‘정치상의 큰 변동’을 말한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12.12에 ‘반란’이라는 용어를 명백하게 사용했지만, 박정희는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5.16을 모호하게 ‘정변’이라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아무튼 5.16과 12.12 군사 쿠데타를 획책한 인물들이 단죄되지 않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점도 커다란 논란거리 중 하나다.박정희 등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입법·사법·행정권 등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했다. 또 혁명에 필요한 조치로 금융 동결, 항구와 공항의 폐쇄, 정권의 인수, 의회의 해산,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등을 선포하고,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했다. 이들은 핵심적인 권력기구인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이를 근간으로 민주공화당을 조직했다. 새로 구성될 민간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으며, 1963년 10월과 11월의 양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이는 일단의 권력지향적인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헌법 유린의 명백한 쿠데타였다. 군부의 불법적인 탈선과 정치개입이라는 선례를 남겨 이후 평화적인 민간정권교체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사회 일반에 군사문화를 강제 이식하여 국민의 의식을 왜곡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일단 ‘5.16군사정변’을 ‘쿠데타’로 규정지었다. 하지만 그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고 했다. 성공한 쿠데타로 그 주역들을 뒤늦게 처벌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련의 쿠데타 과정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힌 인사들은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 김진위, 정명환, 김인화,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 등으로 장군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이중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 등 3인은 친일 경력도 있다. 이들 3인은 모두 함경도 출신이며 만주군에서 복무한 이력이 똑같다. 김동하와 최주종은 만주국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에서 복무했다. 박창암은 백선엽과 함께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항일 무장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소수의 일본인 장교를 제외하고는 전원 조선인만으로 구성한 특수부대로 독립군 토벌에 악랄하기로 소문난 부대였다.이들 셋은 광복후 국군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하는 조선해안경비대에 입대해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참전했고, 최주종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해 참전했다. 박창암은 육군 중위로 임관해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셋 모두 5.16 군사쿠데타에 적극 동참해 요직을 맡았으며 1963년에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사실도 공통적이다. ‘반혁명사건’은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부인 이순자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반혁명을 모의했다는 사건이다.1963년 3월 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발표하고 연루자들을 숙청했다. 이 사건은 “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했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혁명에 성공했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자”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이후 김동하는 다시 박정희의 배려로 한국마사회 회장과 재단법인 5.16 민족상 이사를 지냈고, 1993년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최주종 역시 박정희의 배려로 1970년대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지냈고, 1998년 3월 3일 사망했다. 박창암은 준장으로 예편한 뒤, 월간 지를 창간해 우익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운동을 펼쳤다. 2003년 11월 10일 사망했다. 이들은 사망한 후 모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5·16이 군사 쿠데타라는 건 로마 가톨릭 신학생들도 알았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6) 5·16 군사 반란

“경제만 떼 박정희 평가 안 돼죠”

“고문으로 숨진 청년학생과 가족을

경부고속도로가 위로하지 못하고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100억불 수출탑이 보상 못하잖아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오 26,52)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11,42-43)

사람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 (창세기 1,27)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잘 보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암시이며,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닮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다르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법과 제도가 없다면 인간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야만의 세계에 이성과 양심이라는 주춧돌을 놓고, 공동선이라는 기둥을 세운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제도입니다. 초기 민주주의가 다수 독식이라는 모순을 내포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약자와 소수자 배려라는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공동체에 문제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체제를 뒤집는 변혁의 과정이 따릅니다. 우리는 이를 반란 혹은 혁명이라 말합니다. 종군기자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는 헝가리, 베트남, 멕시코, 그리스 등의 혁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큰 모순과 아픔을 목격했습니다. 혁명의 결과, 올라가는 깃발이 붉은색이든 푸른색이든 또는 노란색이든 그 과정에서 숱한 이들이 살육되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실토요, 고백이자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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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원장의 안타까운 거짓 답변

5·16을 혁명이라고 부르던 시절, 저는 그것이 혁명에 대한 지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군사 정변(政變)이라는 언뜻 들으면 가치 중립적인 듯 보이는 점잖은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저는 단연코 5·16은 ‘군사 반란’이라고 규정합니다.

로마 유학 시절, 저는 이 점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 시절 “너는 어디에서 왔니?”라는 외국 친구들의 질문에 “나는 한국에서 왔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즉시 “아! 그 쿠데타의 나라?”라는 대꾸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은연중에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는 느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쿠데타나 일어나는 미개한 나라라는 듯이. 저는 가슴이 시리고 치욕스러웠습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을사늑약처럼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자 수치입니다.

장면 내각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자유 국가를 구가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결국 사회적 분열과 혼란으로 군사 쿠데타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사임 후 장면 내각은 불과 9개월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1공수특전단, 제1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등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습니다. 당시 장면 총리는 소공동 반도호텔 809호를 공관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서너 시쯤 공관 인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장면 총리는 피신을 위해 미 대사관과 유엔사령부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곳의 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새벽 5시쯤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 총리는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합니다.

장면 총리가 몸을 피하고 잠시 후 총리 공관에 들이닥친 박정희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결론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단 3일 만에 박정희에게 정권이 이양된 것입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어쩌면 쿠데타를 막을 수도 있었던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을 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우선 장면 총리는 경찰 첩보로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음을 오래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반란 일주일 전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도 받습니다. 하지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그때마다 “모략이다. 미군이 있는데 말도 안 된다”라며 얼버무리며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미국은 어떠했을까요? 쿠데타를 뒤늦게 알아차린 미 대사가 총리의 피신처를 알기 위해 노기남 주교에게 연락합니다. 그런데 당시 가르멜 수녀원 프랑스인 원장은 주교의 확인 전화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 그때 미 대사와 장면 총리가 즉시 만났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주한 미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는 함부로 군을 움직인 박정희에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전시뿐 아니라 평시 작전권도 미군에 있을 때입니다. 그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쿠데타 진압을 자청했지만, 웬일인지 윤보선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경무대에 쿠데타군이 들이닥치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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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가 진짜 잘못한 것은

제2공화국은 출발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의원내각제에서 민주당의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 총리 체제가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신·구파는 서로를 불신했고,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그 깊은 증오의 골을 박정희가 파고든 것입니다. 이후 미 국무부도 불개입 원칙을 견지하며 방관자 입장으로 돌아섭니다. 미국은 승자의 편을 들 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미국이 친일 세력을 두둔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친일파가 친미주의자가 될 테니까요.

장면 총리는 피신 55시간 만에 가르멜 수녀원에서 나와 쿠데타를 인정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합니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쿠데타였습니다. 장면 총리에 대한 저의 평가에는 애증이 모두 담깁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우리는 신학생 시절, 매일 미사 중에 장면 정부의 성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품과 신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1970년대 감옥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은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장면 총리는 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에 이후 수많은 시민과 청년 학생이 큰 희생을 치르게 합니다. 당시 저는 천주교 사제로서, 또한 같은 신앙인으로서 이분이 자신의 정치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속한다고 생각하며 아픈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사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일왕에게 충성 혈서를 씁니다. 민족에 대한 첫 번째 배반입니다.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의 견습사관을 거쳐 관동군 보조부대인 만주군의 소위와 중위로 복무합니다. 그런 그가 해방 후에는 광복군이라고 주장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해방 후 그는 국군 창설에 관여해 대위로 임관합니다. 48년에 여순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동료 명단을 주고 자신은 사형을 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족과 동지에 대한 두 번째 배반입니다. 그는 쿠데타 후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쿠데타가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건 ‘혁명공약’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공동체에 대한 세 번째 배반입니다. 혁명공약의 여섯 개 항목 중 마지막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정변으로 영구집권을 꾀합니다. 그는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했습니다. 197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연설에서 그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영원한 배반입니다. 마침내 그는 동료이자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의로운 결단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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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한 평가로 잘못된 역사의 고리 끊어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립니다. 경제 분야의 업적만은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분연히 반대합니다.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3선 개헌과 유신헌법,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수많은 청년 학생, 시민들에게 가한 폭압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5·16은 군사 반란이자 민족사의 치욕입니다.

4·19 불사조 정신을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는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이고, 독재자 전두환의 선임자일 뿐입니다. 친일 잔재와 이승만 독재, 유신 독재의 청산이 우리 시대 성숙한 시민들이 해야 할 역사적 책무입니다. 지나간 과거사라고 해서 조금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 학생, 시민들과 그 유가족들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탑이 짓밟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상해 주지도 않습니다. 성장 지상주의의 깃발 아래 노동 착취, 빈부 격차, 지역감정과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숨죽이며 군사 정권의 만행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문민정부’라고 불렸습니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 출신의 대통령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단어입니다. 그 후로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후대를 위해 5·16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잘못된 역사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죄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 그것이 바로 역사 기도이고 민족적 성찰입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반복해 올립니다. 배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저희 모두의 회개를 청하며 보속과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 모두 새로 태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시고 민족의 일치와 평화 공존을 위해 몸 바치게 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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