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국가 | [국가보훈처] 6.25전쟁, 잊을 수 없는 상처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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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_초등5-2사회
4편-6.25전쟁, 잊을 수 없는 상처
현재 초등 5학년부터는 역사 과목이 정규 교과목으로 편성돼 ‘6.25 한국전쟁’을 포함한 근,현대사를 접하고 배우게 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를 통해 접하는 역사 과목의 경우 평면적 문자 중심의 기록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 수업보조 동영상 자료는 멀티미디어적 기록콘텐츠의 기본형태를 바탕으로 초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역사적 흥미와 집중도를 높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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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은 전세계적으로 현재 계속되고 있는 전쟁들의 목록을 수록한다. …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천명~9,999명의 전쟁 … 국가별 사망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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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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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쟁과 국민국가의 위기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수행한다”는 찰스 틸리의 테제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근대 초기 전쟁을 통해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그것들에 의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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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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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의 탄생 – YES24

전쟁 국가의 탄생. : 베트남 전쟁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고삐 풀린 미국의 전쟁사. 레이첼 매도 저 / 박중서 역 | 갈라파고스 | 2019년 04월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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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5/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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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의 탄생 – 도서 – 인터파크

전쟁 국가의 탄생. 베트남 전쟁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고삐 풀린 미국의 전쟁사. 레이첼 매도 저박중서 역 갈라파고스 2019.04.23. 판매지수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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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ook.interpark.com

Date Published: 6/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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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하게 전쟁 국가 취재 보도를 통제하는 나라 – 미디어오늘

여권법 17조, 전쟁국가 취재 허가제로 통제해…자유로운 취재 위해 신고제로 바꿔야. 분쟁지역 취재를 허가제로 운영하며 외신에 의존하게 만드는 ‘여권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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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ediatoday.co.kr

Date Published: 9/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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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戰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제법에서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 내 2개 이상 정치적 권력집단 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킨다. 현대의 전쟁은 군사적 무력만이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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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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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가의 탄생레이첼 매도 | 갈라파고스- 교보문고

… 있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가 미국의 뒤죽박죽 국가 안보에 관해 펼치는 상식적이면서 도발적이고 심각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 『전쟁 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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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9/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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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6.25전쟁, 잊을 수 없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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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전쟁 국가

  • Author: EBS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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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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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

2019년 5월 기준 전 세계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1만명 이상의 대형 전쟁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천명~9,999명의 전쟁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백명~999명의 소규모 충돌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백명 이하의 소규모 충돌 및 국지전

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은 전세계적으로 현재 계속되고 있는 전쟁들의 목록을 수록한다.

가이드라인 [ 편집 ]

이 진행 중인 군사 분쟁 목록은 현재 진행중인 군사 분쟁만 수록할 수 있으며, 사망자수 별로 분쟁을 나누었다. 이 목록의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둘 또는 그 이상의 무장 단체와의 충돌, 또는 정부군과 반정부군간의 충돌로 발생한 군사 분쟁을 다룬다. [1] 국가간 분쟁, 국가 내부 분쟁 및 내전, 비국가 군사 충돌 또한 목록에 나열한다.

국가간 분쟁, 국가 내부 분쟁 및 내전, 비국가 군사 충돌 또한 목록에 나열한다. 사망자 숫자에는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군인 및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하여 양 측에서 발생한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의도한 공격에 발생한 사망자도 포함한다. 충돌로 인한 직접적 사망자는 전년도 및 올해년도에 발생한 사망자만 쓴다. 기근, 질병, 기타 기초 서비스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간접적 사망자는 가능한 경우 총 누적 사망자에만 포함시켜서 계산한다.

이 목록에 기재된 군사 분쟁은 총 누적 사망자 100명 이상, 전년도 혹은 올해년도 사망자 1명 이상일 경우에만 등재가 가능하다.

총 사망자는 정보 부족으로 인해 과소평가되거나 추측 불가능할 수 있다. “~명 이상”이라는 표시는 최소 그 숫자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455명 이상 사망”이라고 써있을 경우, 실제 사망자는 455명을 넘을 수 있다.

분쟁 위치는 군사 분쟁에 끼어든 국가가 아닌, 실제로 주요 분쟁이 발생한 위치를 기록한다. 이탤릭체는 미승인 국가 또는 영토 분쟁 지역임을 나타낸다.

지속적인 군사 활동이 일어나는 국가만 기재하며, 과거의 국가 및 더 이상 군사 활동이 보이지 않는 국가는 기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폭력사태 및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국가는 이곳에 기재하지 않으며, 전쟁 목록 또는 외교적으로 길어진 전쟁 목록에 수록한다.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만명 이상 [ 편집 ]

다음 목록은 현재 혹은 과거년도에 발생한 사망자가 1만명 이상인 대규모 군사 충돌 목록이다.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천명~9,999명 [ 편집 ]

다음 목록의 군사 분쟁은 전년도 또는 올해년도의 사망자가 천명에서 9,999명에 해당된다.

1년에 사망자가 천명이 넘는 군사 분쟁은 웁살라 대학교의 웁살라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에 “War”로 기록된다.[13]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백명~999명 [ 편집 ]

다음 분쟁은 전년도 혹은 올해년도의 사망자가 백 단위인 충돌이다.

전년도/올해년도 사망자 백명 미만 [ 편집 ]

다음 목록은 전년도 혹은 올해년도의 충돌 사망자가 백명 이하인 분쟁을 나열한 목록이다.

국가별 사망자 [ 편집 ]

이 문단은 21세기 연구[258]와 ACLED를 기반으로 한[20] 2014년~2018년 각 국가별 분쟁으로 인한 사망자 분류표이다.

분쟁 관련 사망자 그래프. 2014-2018년 사이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국가 17개국 수치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더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내용주

↑ 예멘에서 22,201명 사망,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504명 사망 ↑ 소말리아에서 3,862명 사망, 케냐에서 90명 사망 ↑ 소말리아에서 123명 사망, 케냐에서 21명 사망 ↑ 나이지리아에서 1,830명 사망, 카메룬에서 293명 사망, 니제르에서 49명 사망, 차드에서 41명 사망 ↑ 인도에서 451명, 파키스탄에서 7명 사망 ↑ 인도에서 186명 이상, 파키스탄에서 22명 이상 사망 ↑ 파키스탄에서 388명, 이란에서 28명 사망 ↑ 파키스탄에서 115명, 이란에서 28명 사망 ↑ 콜롬비아에서 693명, 베네수엘라에서 16명 사망(에콰도르 사망자 없음) ↑ 콜롬비아에서 103명, 베네수엘라에서 1명, 에콰도르에서 1명 사망 ↑ 터키에서 464명, 이라크에서 59명 사망. 시리아의 사상자는 시리아 내전 항목에 편입되어 있다. ↑ 부르키나파소에서 최소 61명 사망. ↑ 2017년 200명 이상, 2018모년 652명 ↑ 민주콩고에서 10명,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4명 사망

출처주

새로운 전쟁과 국민국가의 위기

이 글은 최근 등장한 ‘새로운 전쟁’ 개념 및 그 현상에 대한 의미를 국제정치학적 접근보다는 정치철학적 및 정치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다양한 전쟁의 형태들 가운데는 기존의 국민국가 체계 시기의 전쟁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이른바 ‘새로운 전쟁’이 발견된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수행한다”는 찰스 틸리의 테제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근대 초기 전쟁을 통해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그것들에 의한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면, 최근의 새로운 전쟁은 오히려 국민국가 및 그 체계를 해체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따라서 이 글은 최근의 전쟁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기존의 국민국가 체계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는 물론 일국적 수준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새로운 정치를 발생시키는가, 나아가 국민국가라는 공동체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국민국가의 위기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계기를 발견해 보고자 한다.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new wars’, which occur recently in the world at the end of 20th century and that is distinguished from the war of modern nation-state era, in the approach of political philosophy rather than in the approach of international relation. These phenomena are contrary to the thesis of Charles Tilly, which is “the war makes the state, the states perform the wars.” The nation-states form through early modern wars and they form the international relations between the nation-states, but the recent new wars have the tendances to deconstruct the nation-states and theirs systems. This article examines, in analyzing the recent new wars, how they transform the modern nation-states system, and which new forms of politics rise in the cadre of nation-state and in the world level, and which changes will be discovered in the nation-state itself. And we wants to discover the new moments of democracy in the crisis of nation-state.

전쟁 국가의 탄생

오래전에 김동춘 교수가 쓴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미국은 1950년대 이후 언제나 전쟁 중에 있었다고 말한다. 다만 대부분의 전쟁에서 그들이 전쟁을 선포한적이 없고 은밀히 추진되었기에, 대다수의 세계인들은 물론 미국인들 마저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필두로 제3세계의 국내정치, 혁명, 혹은 내전에 수없이 개입한 명분은 공산주의 위협을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나라의 정치권력을 미국의 확실한 통제 하에 두어 자국의 잉여생산물을 안정적으로 팔고, 각 나라의 자원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여 미국기업이 활동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미국은 오래 전부터 유엔의 권위를 공공연히 무시해왔으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장 많이 행사한 나라이기도 하다. 즉, 미국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유엔의 권위를 빌렸고, 그 이외에는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사실 일반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미국은 유일무이한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의 경찰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고 제멋대로 군사활동을 하는 나라이다 . 19 세기에는 가톨릭을 , 20 세기에는 공산주의를 그리고 지금 21 세기에는 테러세력을 악마로 만들어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는데 , 이것은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정치의 전통처럼 되어있다 . 문제는 자신들이 하는 것은 테러가 아닌 자유와 민주를 위한 성전 또는 국제평화를 수호하는 것이라 하고 ,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테러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 아무튼 전쟁은 미국정치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최상의 비즈니스 혹은 식민지배를 위한 제국주의의 현대버전인 셈이다 .

그러면 미국인들은 이런 자국의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 이 책 [ 전쟁국가의 탄생 ] 은 미국의 진보적 정치평론가인 레이첼 매도가 쓴 책이다 . ‘ 베트남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 고삐 풀린 미국의 전쟁사 ’ 란 부제가 말해주듯 ,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전쟁사를 살펴보며 미국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전쟁국가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 미국 건국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지였다고 한다 . 그래서 전쟁선포권한을 한 명의 손에 두는 것에 대항하여 구조적인 장벽을 구축하였고 , 그 결과 헌법에 전쟁에 관한 모든 질문을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 즉 ‘ 평화는 쉽고 , 전쟁은 어렵게 ’ 가 초기 미국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지금의 미국 모습은 전쟁 속에서 표류하고 있으며 , 오히려 전쟁을 편안하게 여기는 국가가 되었다고 레이첼 매도는 말한다 . 그러면서 미국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다 .

베트남전쟁은 여러모로 미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존슨 대통령은 전쟁 초기 주방위군과 예비군 소집을 거부하는 대신 징병을 늘렸다고 한다. 이는 전쟁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실토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방위군과 예비군은 현역복무 회피를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한 사람의 결정에 맡기지 않기 위하여 총력전쟁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을 시작하면 국가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에이브럼스 독트린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예비군 소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전쟁이 결정권자 한 사람 손에 놓이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예비군을 소집하게 되면 일상에서 일을 하던 국민들이 소집됨에 따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레이건의 등장은 미국의 힘과 자부심에 대한 도발로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이라는 싸움기계의 공회전 속도를 높이는 일이 아주 훌륭한 정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국민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보의 오독, 날조, 허황된 얘기로 안보위기를 과장하였고,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로 미국의 군비가 얼마나 팽창되었는지를 저자는 국방비를 통해 알려준다. 그의 임기 8년동안 지속된 초군사주의는 결국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던 미국을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1983년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 침공과정은 승리가 필요했던 레이건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전쟁을 수행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레나다의 점령은 쉬웠지만 그 과정에서의 난맥상 등 미국이 겪은 손상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1985년 레바논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에 의한 미국인 인질사건이 일어났다. 의회를 거치적거리는 장애물로 여긴 레이건은 그레나다 침공사건과 마찬가지로 비밀주의를 고수했다. 이란과의 무기거래를 통해 인질을 석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 금지조치와 무기수출통제법 모두를 위반하면서까지 거래는 계속되었지만 인질은 풀려나지 않았다. 레이건은 이 거래를 지속하기 위하여 제3자가 콘트라를 지원하는 방안을 수립하여 콘트라지원작전을 민영화한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레이건은 탄핵위기에 몰리지만 행정부 권한에 대한 허황된 논리앞에 의회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결국 이후 단 한번도 의회는 전쟁을 원하는 대통령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함으로써 촉발된 걸프전은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의회와 지리한 공방이 이어지지만, 그것은 전쟁결정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구조적장벽인 에이브럼스 독트린 때문이었다. 즉, 세계 어디에서 건 간에, 그 어떤 중요성을 지녔던 간에, 그 어떤 군사작전이건 간에 이를 실시하려면 막대한 숫자의 예비군을 소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이 장벽을 피하기 위해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했지만, 부시는 추락하는 지지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의회와 공방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은 전쟁권한이 행정부에 있다는 판단이 굳어졌으며, 9.11에 이르러서 미국의 전쟁결정 권한은 아무런 반대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징병제가 사라진지 2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모두 지원자로 이루어진 미국 군대는 더 안정적이고, 더 전문적이고, 더 유능하고, 더 교육받은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기혼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군은 그들의 가족을 돌보아야 했다. 이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군은 비용을 절감하고 수행능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아래 외주화, 민영화, 민간 병참지원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고, 펜타곤은 이를 훌륭한 관리방식의 상징으로 추켜세웠다. 클린턴시절에 이르러서는 외주화의 임무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정보기술, 데이터처리, 지도제작, 항공정찰은 물론 정보수집조차도 도급화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발칸반도에서 나타났다.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침략하자 미국은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미국의 민간 병참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외주업체가 크로아티아와 민주주의 이행 지원업무를 계약했고, 반년 후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게 된다. 이제 미국은 군사를 파견해야 할 때 예비군을 소집하는 대신 도급업체를 선택하여 계약하면 되었고, 클린턴이 퇴임한 2001년에 이르러서는 전쟁 이외의 작전은 국민이나 의회 모두를 무시한 채 무한히 나아갈 수 있는 자동 항법장치가 마련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2011 년 5 월 미군 특수부대가 파키스탄 샴시 지역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 . 파키스탄의 샴시 지역은 CIA 가 드론 작전을 시행하고 있던 곳이었다 . 그곳에서는 민간 도급업체가 드론을 정비하고 , 조종하고 , 폭탄까지 장착했다 . 부시와 클린턴이 자신들의 전쟁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만든 외주화라는 편법은 9.11 이후 CIA 를 첩보조직이 아닌 대통령 전용 군사조직으로 만들었다 . 그들은 자체병력과 자체 로봇 공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지휘계통도 없고 , 인식 가능한 행동 및 교전수칙도 없는 비밀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 그리고 사람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간주되지 않았던 장소에서 미국을 대신해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 이로써 미국 대통령의 전쟁결정권한에 대한 마지막 구조적 장벽이었던 에이브럼스 독트린이 무력화되었고 , 이제 미국 국민은 전쟁 중임에도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

저자는 마지막으로 미국의 핵무기 관리에 대해 설명한다 . 미국의 핵무기 일부는 40 년 심지어 50 년째 현역상태에 있다고 한다 . 그러한 핵무기를 수리하고 정비하고자 하지만 너무나 복잡한 까닭에 , 혹은 과학자나 기술자들의 은퇴에 따라 방법을 알지 못해 수리하지 못한다고 폭로한다 . 심지어 8조달러를 들여 제작보유한 핵무기에 곰팡이가 피어 있다고도 한다 . 또한 저자가 예를 드는 공군의 핵무기 관리 상태를 읽다 보면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이 정도라고 하니 그저 아찔하기만 하다 .

이처럼 저자는 미국의 군사력 행사가 정치적 토론을 배제하고 전개될 수 있게 이루어짐으로써 미국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했는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 그는 미국의 전쟁결정 권한이 의회와 국민의 손을 떠나 표류하고 있는 것은 미국인들의 책임이라며 , 전쟁을 일상으로 만든 지난 40 년의 경로는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임을 인지하고 , CIA 의 비밀 군사활동이나 외주화 혹은 민영화된 민간의 병참지원을 근절하고 , 핵무기를 감축하고 , 전쟁에 관한 행정부의 권한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 그것은 ‘ 평화는 쉽고 , 전쟁은 어렵게 ’ 라는 미국의 헌법적 뿌리로의 보수적인 회귀라고 말하는 저자는 , 그를 위해 지금까지 미국이 표류해온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것도 같다 . 전쟁은 미국의 대통령이 자신의 인기를 얻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 그것을 제어하는 구조적장벽은 다 무너지고 어디에도 없다 . 그리고 전쟁에 관해서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 단지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강 ( 强 ) 과 아주 조금 약한 온 ( 溫 ) 이 반복될 뿐이다 . 특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미국은 물론이고 그 나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에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 그렇게 볼 때 우리의 현실이 불안하게 다가온다 . 저자의 바램대로 미국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미국민들의 각성으로 그들의 건국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원래의 이상으로 하루 빨리 회귀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

지금의 미국이 어떻게 , 그리고 왜 전쟁국가로 탄생되었는지 그 흐름을 알고 , 미국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추가 적립 안내

‘평화는 쉽게, 전쟁은 어렵게’, 미국의 이상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에미상 수상작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가 말하는

미국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표류하는 이유

베트남 전쟁에서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미국이 전쟁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법

미국의 전쟁은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미국은 어쩌다가 ‘전쟁은 어렵게, 평화는 쉽게’라는 원래의 이상에서 멀어져 영구적인 전쟁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기는 지경이 된 걸까? 이 책은 미국이 전쟁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법과 특히 전쟁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레이건의 과격한 안보 사랑이 남긴 정치적 유산, 미국 공군의 황당한 핵무기 관리를 비롯하여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은 어떻게 비대해졌는지, 미국의 전쟁 수행 역량은 어떻게 점진적으로 민영화되었고 어떤 부작용을 초래했는지, 항시 전쟁 중인데도 미국 국민들이 전쟁 중인 것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MSNBC에서 에미상 수상작인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가 미국의 뒤죽박죽 국가 안보에 관해 펼치는 상식적이면서 도발적이고 심각하면서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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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의지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국가의 권리에 무척이나 위험한 도구인데도 불구하고 통치자의 재량에 맡겨놓은 도구”가 상비군이며, “통치자는 엄격히 정해진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전쟁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은 동시에 전쟁을 일으킬 가장 많은 권력의 분지가 행정부”라고 지목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전쟁 선포 권한을 결정권자 한 명의 손에 두는 것이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항하기 위해 구조적인 장벽을 구축하려 했다. 그리하여 미국 헌법은 의도적인 신중을 기하여 전쟁에 대한 질문을 입법부에 귀속시켰다. ‘평화는 쉽게, 전쟁은 어렵게’가 초기 미국을 지배하는 이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전쟁에 나가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다. 때로는 적이 우리를 공격했고, 또 때로는 우리가 적을 찾아 나섰다. 급기야 ‘차마 비할 데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니고, 세계 어디에서나 평화를 누리는 국가’가 되는 것은 경시되며, 잃어버린 정치적 메시지로 여겨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즉 ‘아늑하고 과도하게 안전한 세계의 한구석’에 있는 것이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되었다. 마치 우리는 무장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방법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되었다.” (본문 중에서)

MSNBC에서 에미상 수상작인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의 상쾌한 재치와 지성이 돋보이는 이 책은 미국이 원래의 이상으로부터 표류하여 멀어지고 있으며, 기묘하게도 영구적인 전쟁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기는 국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장소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매도는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의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과정에서 레이건이 보낸 과격한 대통령 임기에 대하여, 불편할 정도의 행정부 권한 상승에 대하여, 미국의 전쟁 수행 역량을 민간 업체에 위탁하는 점진적인 외주화에 대하여, 미국 공군의 황당한 핵무기 관리에 대하여, 전쟁 중임에도 전쟁 중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못하는 미국 국민들에 대하여 탐구한다. 그럼으로써 미국의 군사력 행사가 정치적 토론을 압도하여 전개될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미국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식 싸움의 기술에 영향을 미친 베트남 전쟁부터

스텔스기처럼 전쟁을 은폐하게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미국의 고삐 풀린 전쟁사

베트남 전쟁은 여러 방면에서 미국에 큰 영향을 준 전쟁이었다. 「1장 G. I. 조, 베트남 전쟁 그리고 미국식 싸움의 기술」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 군대가 어떤 변화를 겪었고 미국 정책에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말한다. 이른바 ‘전쟁에 나가는 것은 국가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라는 에이브럼스 독트린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미국의 전쟁 결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한다. 「2장 레이건이 숨겨둔 비장의 수」에서는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레이건의 대선 전략이 어떻게 ‘세계 어디에서나 평화를 누리는 국가’를 ‘심각한 위험에 처한 국가’로 만들었는지 말한다. 「3장 과장된 안보 위기와 군사주의」에서는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가 미국의 국방력을 얼마만큼 팽창시켰는지 보여준다. 「4장 엉망진창 그레나다 침공 사건」은 승리가 필요했던 레이건이 겉과 속이 다른 이유로 어떻게 그레나다를 침공하게 되었는지 그 속내를 밝힌다. 「5장 백악관의 비밀주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입법부를 거치적거리는 장애물로 여긴 나머지 행정부가 벌인 촌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만들어진 레이건 행정부의 행정부 권한에 대한 논리는 이후 정부에서 살뜰하게 이용되었다. 「6장 페르시아만에서 벌인 부시의 십자군 운동, 걸프전」은 전쟁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어야 한다는 미국 행정부의 판단이 굳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쟁 결정 권한에 대한 입법부의 헌법상의 권리가 어떻게 식물화되는지 또한 보여준다. 「7장 클린턴이 키운 군대의 민영화」는 입법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최신 전략으로서 군대의 민영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부시와 클린턴이 자신들의 전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만든 편법은 미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8장 오바마의 지독한 살인 기계와 빈 라덴 사살 작전」은 오바마의 CIA 드론 프로그램을 다룬다. 정보 조직이 졸지에 대통령 전용 군사 조직이 된 이유와 비인간적으로 사용되는 미국 군대에 대해 말한다. 「9장 핵무기에 핀 8조 달러짜리 곰팡이」는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최강자 미국의 졸속 관리를 보여준다. 이전에 만들었던 핵무기를 수리하지도 못하는 이유, 대참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미국 공군의 아찔한 핵무기 관리 등을 이야기한다.

미국이 전쟁을 결정하는 방법이란 이런 것이다

전쟁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서사시적으로 보여주는 책

미국은 원래의 이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사실들을 나열하는 이 책은 미국의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 동시에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고 만 과정을 서사시적으로 서술한다. 매도의 필치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지만, 미국이 전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국 군대의 삽질과 오지랖에 대한 머리 어질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은 미국이 어쩌다가 다른 모든 국가들의 지출액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액수를 군사주의에 소비하게 되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준다. 매도는 뭔가를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에 대해 말한다. 전쟁 결정에 대한 권한이 국민과 입법부의 손을 떠나 표류하는 것에는 미국인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일상으로 만든 지난 40여 년의 경로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고 매도는 말한다.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온 나라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CIA 드론 프로그램이나 용병 조직처럼 비밀리에 벌이는 군사 활동은 모두 근절되어야 하며, 이 세계가 위협적인 장소라고 해도 무력을 이용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고, 위험천만한 화학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핵무기는 감축되어야 하며, 전쟁에 관한 행정부의 비대한 권한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매도는 말한다. 과연 미국은 원래의 이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상식적이면서 도발적이고,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이 책은 거대하고 뒤죽박죽이 된 미국의 국가 안보에 관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들을 전해줄 것이다.

“세계 유일하게 전쟁 국가 취재 보도를 통제하는 나라”

분쟁지역 취재를 허가제로 운영하며 외신에 의존하게 만드는 ‘여권법’ 개정을 위한 사진전이 오는 31일부터 서울 청운동 류가헌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 ‘금지된 현장’은 온빛다큐멘터리와 류가헌이 공동기획해 6월12일까지 개최한다. 오는 6월3일 오후 4시에는 여권법 개선을 위한 성명 발표와 토론회를 류가헌 2관에서 진행한다. 주최 측은 이번 사진전의 배경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쟁 국가에 대한 취재 보도를 ‘허가제’로 통제하는 나라”라고 밝혔다.

이번 사진전에는 김상훈, 박종우, 박하선, 성남훈, 신제섭, 유별남, 이유경, 장진영, 정은진, 조진섭, 최형락, 태상호 사진가와 강경란, 김영미 영상PD 등이 참여한다. 장진영 사진가는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했는데 이 사진도 공개된다. 그는 귀국해 여권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 우크라이나 키이우 기차역. 장진영. 2022년 3월12일. 사진=류가헌 제공

김영미 PD가 5월호 ‘신문과방송’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국정부는 2007년 8월부터 여권법에 따라 여행금지제도를 시행하고 있어 한국 언론이 국제분쟁 뉴스 대부분을 외신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관점과 거리가 멀어 국민 알권리에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수도 키이우에는 1000여명의 외신이 취재 중이지만 한국 취재진은 외교부의 금지로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취재를 허가받을 때도 취재허가서에 취재내용과 일정·경로, 경호업체 정보 등 언론사 내 타 부서에도 알리지 않는 내용이나 취재진의 목숨이 걸린 문제까지 모두 보고해 언론검열이란 비판도 나온다. 결국 외신에 의존하면서 분쟁지역을 둘러싼 다양한 선전전과 왜곡주장에 대해 한국 취재진이 사실확인조차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주최 측은 외교부의 언론검열을 중단하고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꿔 자유로운 취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취지에서 사진전과 함께 성명을 계획한 것이다. 이들은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장을 취재해 진상을 알리고자 노력해 온 언론인들과 사진가가 겪는 어려움을 공론화하고 문제가 된 여권법 개선을 도모키 위한 ‘금지된 현장’을 기획해 연다”고 했다.

여권법 제17조를 보면 “외교부장관은 천재지변·전쟁·내란·폭동·테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국외 위난상황(危難狀況)으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신체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이 특정 국가나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기간을 정하여 해당 국가나 지역에서의 여권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방문·체류를 금지(이하 ‘여권의 사용제한 등’이라 한다)할 수 있다. 다만, 영주(永住), 취재·보도, 긴급한 인도적 사유, 공무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목적의 여행으로서 외교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여권의 사용과 방문·체류를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 군에 체포된 ‘레드셔츠’ 시위대원이 눈이 가려진 채 이송을 기다리고 있다. 2010년 5월 군의 유혈 진압으로 방콕 도심을 점거 중이던 레드셔츠 90명 내외가 학살당했다. 이유경. 사진=류가헌 제공

이들은 오는 6월3일까지 언론인 등의 서명을 받아 성명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여권 사용 허가 제도를 개정하여 여행금지 국가의 취재 및 보도를 보장하라!

현재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권법 제17조는 “외교부 장관은 천재지변·전쟁·내란·폭동·테러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국외 위난상황(危難狀況)으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신체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이 특정 국가나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기간을 정하여 해당 국가나 지역에서의 여권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방문·체류를 금지 (이하 “여권의 사용제한 등”이라 한다)할 수 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 법안은 ‘취재, 보도’는 허가 대상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허가를 받을 때까지 최소한 2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천재지변, 전쟁, 내란, 폭동, 테러 등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그 어떤 국제뉴스보다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취재와 보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행 규정에 따르면 대부분의 주요 취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중요한 시점에 현장에 있어야 할 기자가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모든 상황이 끝나버리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친 제한과 절차로 인해 사실상 취재와 보도 자체를 차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2월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개전 후 약 한 달이 지난 3월에서야 처음으로 국내 언론사 기자가 현지에 투입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의 경우로, 외교부 출입 언론사에 국한되었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경호 업체와의 계약서를 제출한 경우였습니다. 이는 중소 언론 매체나 비정규직 언론인(프리랜서)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처사로 보입니다. 취재지역을 수도 키이우에서 약 500km 떨어진 최후방 체르니우치 주와 리비우 주로 한정했고, 취재 기간을 5일 이내로, 투입 인원 또한 다른 언론사와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4명 이내로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키이우에만 1,000여 명이 넘는 세계 각국 취재진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취재와 보도의 장소, 기간, 인원까지 국가에서 제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이는 언론 취재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전쟁과 분쟁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어린이와 여성이 키스하는 모습. 성남훈. 사진=류가헌 제공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현장에서 위험과 책무를 동시에 감수하고 수행해야 하듯이, 전장을 취재하는 언론인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 및 보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후방의 안전한 곳에서 단기간에 취재하라는 법률적 제한은 우리나라 언론의 후진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2007년 여행 금지 제도가 시작된 이래, 국제 분쟁 뉴스의 대부분은 외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 규모 11위, 영향력 10위권의 강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국제 뉴스는 우리의 눈과 귀가 아닌 외국에 의존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정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 민주화 항쟁을 취재, 보도한 독일 기자나 한국전쟁을 기록한 미국 종군기자의 업적은 소중한 사료로 높이 평가하면서, 국내 기자의 국제 분쟁 취재 및 보도는 안전상의 이유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만약 광주 민주화 항쟁 현장이나 한국전쟁 당시에 외신 기자의 입국을 제한했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2009년 이스라엘-가자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은 가자지구 출입을 봉쇄하고 외신 언론의 출입과 취재를 전면 차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정부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안전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외신기자들은, 전장 봉쇄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자국의 기자들이 가자지구에 들어가 취재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이스라엘 정부에 요청까지 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자국민인 기자의 생명을 가볍게 생각한 것일까요? 그의 판단은 언론의 자유와 기록의 가치를 높이 사고, 언론인의 책무를 이해하고 존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정부의 취지에는 국민으로서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현 제도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기록해야 하는 언론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내 언론의 국제 경쟁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이에 우리는 허가제와 같은 통제보다는 정부의 정보력, 외교/행정적 지원을 통한 자국 언론인 보호를 통해, 여행금지 국가에 대한 언론의 취재 및 보도의 보장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 미디어오늘은 여러분의 제보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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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신라 이전의 전쟁

①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서기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검성에 도읍한 위만(衛滿)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 이르러서는 군사력이 증강되고 국토가 넓어졌으며, 고조선 남부에 있는 변한 등의 세력이 한나라와의 직접 통교를 방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하던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초 사자를 보내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그 해 가을 성기(成己)로 하여금 육군 5만 명, 수군 7,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군의 선전으로 1차 공격에 실패한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어 강화를 교섭하고자 하였다. 우거왕도 강화교섭에 응하여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태자가 1만여 무장병의 호위하에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한나라의 사자는 호위병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태자는 강을 건넌 뒤 자기를 살해하려는 기만책으로 의심하여 돌아와 버렸다. 이로써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화의에 실패하자 한무제는 총 공세를 취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한군이 왕검성을 포위하여 수 개월 공격했으나 고조선군은 그때마다 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성 안에서도 화전(和戰) 양파의 대립에 따른 동요가 일어나,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군에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서기전 108년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② 여수·당전쟁(麗隋唐戰爭):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요하(遼河)를 국경으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나라의 대고구려정책은 건국 초기에 아직 정비되지 않은 통치력으로 인한 일시적인 방책이었으며, 점차 요동(遼東)을 정복할 야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수나라의 정책에 대응하여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영양왕 9)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수나라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으며,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대응하여 수문제는 수륙군 30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육상군은 홍수로 인한 보급선 마비와 질병의 유행으로 요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군도 풍랑으로 회군하여 실패로 끝났다.

수나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다시 파견하기에는 국내 체제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예방전쟁의 목적을 일단 달성한 고구려도 전쟁을 더 원하지 않아 수나라는 고구려의 사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중지하고 양국의 우호관계는 다시 이루어졌다.

그 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고구려 국왕의 내조를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영영왕 23)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육상군은 113만이었고, 군량 수송을 담당한 인원은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은 약 7만 명에 달하였다.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나라의 군대를 수 개월 동안 그곳에서 막아냈다. 요동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나라의 수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그 해 6월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수군은 열세하여 해전을 피하고 적의 수군을 지상으로 유도해서 섬멸하기로 하고, 거짓 패한 척 후퇴하여 평양성의 외성 내에 잠복 대기중이던 정예부대가 수군을 급습하였다. 이에 수나라 수군은 불과 수천 명만이 생명을 건져 철수하였다.

요동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초조해진 수양제는 요동지방의 고구려성을 계속 포위하여 고구려군을 가두어 두고,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 유도작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밖 30리까지 유인한 다음, 수나라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조롱의 시 한 수를 보내고 그에게 철군하면 고구려 왕이 수양제에게 조례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수비가 견고한 데다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식량의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구려 왕의 조례 약속을 명분으로 후퇴하였다.

주 01)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을지문덕은 후퇴하던 수나라 군대에게 살수(薩水) 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그 뒤 수양제는 613·614년, 그리고 617년 세 차례나 침입했으나 거듭 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 탕진과 민심이 돌아선 데 따른 국내의 반란으로 수나라는 615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침공의 징조를 보이자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요하의 국경선에 1,000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646년(보장왕 5)에 이를 완성하였다.

주 02)가 되어, 신라가 한강을 점유함으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장성 축조공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가 되어, 신라가 한강을 점유함으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구려·백제의 동맹에 대응하여 신라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전개해서 두 나라의 견제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당나라의 대외정책과 일치하여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거듭 권고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감금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644년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으로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張亮)은 4만 3000여 수군으로 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신성·건안성·안시성 등 요동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안시성에서의 방어전은 치열하여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상군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회군하였다.

당태종은 그 뒤에도 647·648·655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싸움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으며, 고구려 정복의 어려움을 깨달은 당나라는 그 뒤 신라와의 연합을 통한 대고구려정책을 전개하였다.

③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과 668년(문무왕 8)에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었고, 당나라는 한반도를 정복할 야심에서 신라와 연합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는 한편,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진압된 뒤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의 옛 땅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라의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함으로써 신라의 백제 병합을 막는 일석이조의 정복정책을 추진하였다.

당나라의 3국 지배 야욕은 고구려 멸망 후에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도 9도독부를 설치했는데, 특히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삼았다.

이 안동도호부는 실제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의 5도독부와 신라까지도 총괄했으며,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전국인 고구려나 백제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신라는 이러한 당나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안에 있는 당나라군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먼저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방을 비롯하여 당나라 군대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고구려군 유민이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이들을 지원하여 고구려 옛 땅에 있는 당나라군을 견제하는 한편, 670년 7월부터 당나라의 백제 주둔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80여 성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671년에는 사비성(泗沘城) 및 웅진성(熊津城) 방면으로 진격, 이를 점령하여 백제의 옛 땅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당나라는 그들의 세력이 백제의 옛 땅에서 축출당하자, 672년에 4만 명의 병력을 평양에 진주시켜 신라의 북변 일대를 파상적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74년 2월부터 신라 북변에 대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당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신라의 북변 성주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당나라군과 치른 전후 18회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주 03)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677년 당나라는 신라군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옛 땅의 주둔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의 신성(新城) 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고려시대의 전쟁

①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국의 송나라는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華北)지방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985년(성종 4)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거란도 986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제의해 왔으나 고려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켰다.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가 연합하자 불안을 느끼고 993년 10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 후 거란군은 고려군을 물리치고 청천강에 도달하여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의 옛 땅을 넘겨주고 송나라와 단교하여 거란을 상국으로 받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으나 서희(徐熙)의 외교활동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즉, 서희는 소손녕의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거란은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자, 1010년(현종 1) 11월 거란의 성종은 강조(康兆)의 현종 옹립을 구실로 40만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제2차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는 강조에게 30만의 병력으로 통주에서 저항하게 했으나 패하였다. 결국 현종은 12월에 나주로 피난했으며, 1011년 1월 거란군은 개경(지금의 개성)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주 04)를 조건으로 대군을 철퇴시켰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국왕의 무조건 친조(親朝) 를 조건으로 대군을 철퇴시켰다.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1018년에 거란장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고려에 제3차 침입을 해왔다.

고려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도원수로 삼아 20만여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안주로 나아가 대비하게 했으나, 거란군은 바로 개경을 향해 남진하여 다음해 정월에는 개경 100리 거리에 이르렀다.

이때 강감찬이 개경에 대한 병력을 증강하고 거란군을 요격하니, 소배압은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을 귀주(구주)에서 대파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구주대첩)이다. 그 결과 1019년에 강화를 맺어 양국은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② 고려의 여진정벌: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만주 북부 완안부(完顔部)의 여진은 세력이 강대해지자 함흥평야의 패권을 두고 고려와 정면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1104년(숙종 9) 1월 완안부의 기병이 정평의 장성 밖에까지 미치자 고려에서는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항하게 했으나 도리어 패배당하여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기병을 물리치지 못하고 전세가 불리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패전의 원인이 적의 기병에 우리의 보병이 대적하지 못한 데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사졸을 양성, 훈련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고려조정은 별무반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하여 기병부대 양성에 역점을 두었고, 또한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107년(예종 2) 12월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17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점령지역의 여진군을 토벌하고, 다음은 수륙 양면에 의한 전격전을 전개하여 장성의 130여 마을을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수복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요지인 함주를 비롯하여 9개 소의 요지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그 뒤 여진이 계속 반격을 하는 한편, 조공할 것을 조건으로 9성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자 고려는 멀리 떨어진 변경을 확보, 경영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109년 7월 여진의 맹세를 받은 뒤 9성을 돌려 주었다.

③ 고려의 대몽항쟁: 정예 기마부대로 인접 국가를 정복하고 있던 몽골의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함락시키고 황하 이북의 땅을 그의 판도 안에 넣었다.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거란족은 금나라의 쇠퇴를 틈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확충하다 몽골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몽골군과의 충돌에서 패한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8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서북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1218년 8월 거란은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군과 싸우다가 강동성에 몰리게 되었다. 이 해 12월 거란 소탕작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몽골군은 거란족 격멸을 이유로 동진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연합하여 이 전투에 개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요청으로 군량미도 내고 병력도 합세시켰다. 몽골은 거란족을 소탕시킨 은혜를 구실로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고려에 강요했으나 고려는 이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 가던 중 1225년 1월 몽골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던 도중 도적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귀주성(구주성)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그 일부는 멀리 충주까지 내려갔다.

최우(崔瑀)는 하는 수 없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화의함으로써 몽골군은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과의 항쟁을 결의하고, 그 해 6월에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것은 수군이 없는 몽골군의 허점을 찌른 방책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도 산성이나 섬으로 피난하게 한 고려의 태도가 몽골을 자극하여 그 해 12월 몽골군은 다시 침략을 해왔다.

그러나 몽골 장수 살례탑이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그 뒤 몽골은 동진과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35년 7월 탕구[唐古]에게 제3차 침입을 하게 하여 1239년까지 5년간 전국을 유린하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했던 몽골의 대군도 넓이 약 650m의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지는 못하였다. 몽골의 요구는 고려왕이 육지로 나와 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몽골군은 그 뒤에도 제4차(1253)·제5차(1254∼1255)·제6차(1255)·제7차(1257)에 걸쳐 침략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도 1254년의 침략 때는 민중을 살육하는 것은 물론이요 포로로 붙들어 간 남녀만도 20만여 명이나 되었다.

무인정치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崔竩)가 1258년 3월에 피살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1259년 4월 태자가 몽골로 출발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니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이며, 이로써 고려조정은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항몽세력의 핵심인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裵仲孫)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반몽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자 삼별초는 그 중심 인물의 대부분을 잃고 전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나머지 병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3년 4월 연합군은 제주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격멸하니, 삼별초의 만 3년간에 걸친 대몽항쟁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치른 40년간의 항쟁을 통하여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원나라도 다른 정복국과는 달리 고려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도록 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3) 조선시대의 전쟁

① 임진왜란·정유재란: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지배계급은 글에만 열중하여 나약해지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국방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국내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장기간의 싸움에서 강력해진 제후들의 군사력을 해외에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체제에 만전을 도모하고자 대륙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하는 한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가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 온 도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있어 침략 의도가 명백했는데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 이면에는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침략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춘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이 부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加藤淸正]·구로다[黑田長政] 등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편, 구키[九鬼嘉薩] 등이 지휘하는 9,000여 명의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지원, 엄호하게 하였다.

왜병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병은 다시 북진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 끝까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편성,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서해안을 우회하여 고니시군과 수륙 합동작전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패주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병선, 특히 거북선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더욱이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는 적 수군의 주력 함대 73척 중 59척을 빼앗고 격파하였으며, 또한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그들의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이제는 더 북상할 기세를 잃고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관군이 왜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주 05)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주 06)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령·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 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 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또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명장 조승훈(祖承訓)의 휘하에 5,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하게 하는 한편,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3000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일본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권율(權慄)이 배수의 진을 치고 끝내 왜군의 공격을 무찔렀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벽제관전투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왜군도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병참선에 대한 위협을 받고, 또한 각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었으므로 화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159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성을 쌓고 강화조약의 조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화의 진행중인 2월 18일 왜병은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내왕했으나 도요토미가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놓았기 때문에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다시 침공해 왔으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전비를 갖추었고, 또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며, 7월 15일 수군은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였다.

수군이 패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여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다수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그 동안 육상에서는 명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영향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는 부진상태에 놓였다. 특히,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었으나,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끝으로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나라와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주 07) 등을 제조하였다. 조선은 팔도가 거의 전쟁터화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조정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훈련도감의 설치, 삼수병에 의한 무예의 훈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를 발명하였고, 조총과 불랑기(佛狼機) 등을 제조하였다.

명나라는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새로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처음의 목적인 도요토미의 체제 안전 및 유지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전쟁으로 한일 두 민족의 원한관계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②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강요하는 등 압력을 가하고, 또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늘리라고 요구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기 위해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하여 원정군 10만을 편성, 청태종이 지휘하여 그 해 12월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하니, 출발한 지 10일 만에 서울 근교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날 비로소 청군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서둘러 두 왕자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그러나 인조는 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12월 4일 밤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벌써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다른 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서울에 입성하였다. 따라서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하여 성 내의 장병들은 사기를 잃었고, 구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했으므로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10일 이후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청태종의 요구는 조선의 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주 08)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대해 주저했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주 09)이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 주전파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조정은 청나라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락하여 화의가 체결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이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 주전파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의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 후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③ 병인양요·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탈출한 리델(Ridel, F. C.)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공사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로즈 제독은 그 해 9월 군함 3척을 보내어 지형을 정찰한 뒤 철수하였다.

그 뒤 10월에 다시 군함 7척, 육전대 600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에 대하여 항의하는 한편, 10월 14일 일부는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무기와 양식 및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프랑스군의 다른 부대(병력 120명)는 서울로 가는 길목의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에 의해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부대는 11월 9일 정족산성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500명의 매복한 포수의 기습에 의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하였다. 로즈 제독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부의 여러 관아를 불사르고는 11월 18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프랑스 정부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반면에 대원군은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같은 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에서 조선 관헌과 충돌하여 소각된 일이 있었다. 그 뒤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로(Low, F.) 공사에게 훈령하여 아시아 함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1871년 로는 로저스(Rodgers, J.) 제독에게 군함 5척에 해병대 1,200명을 지휘하여 남양(南陽) 앞바다에 와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6월 1일 그들의 일대가 강화해협을 측량하고자 강화도 광성진 앞에 왔을 때 요새의 병사들이 포격을 가하자 미군들도 이에 대응하여 사격을 하였다.

그 뒤 외교 교섭을 했으나 조선 정부가 완강히 거절하자 6월 10일 651명의 해병대와 7문의 포를 가지고 초지진·덕진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서로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중군 어재연(魚在淵) 등 243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ekee)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로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로부터 협상 소식이 올 것으로 기대하여 1주일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더 이상 전투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고 철수하였다.

전쟁이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한 결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외국군을 격파한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4) 항일독립운동

일제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반도 침략 및 대륙 진출을 실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으로 한반도의 정치 실권은 거의 일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일제에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08년을 고비로 의병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인명의 희생만도 1만 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따라 국내에서 무장독립항쟁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인식하여 동북만주 및 연해주로 이동해서 독립군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 항일무력투쟁이 만주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20년까지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만포진 공격 및 두만강 연안에서의 유격전, 그리고 청산리전투는 일본군과 대항한 독립군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20년 만주의 독립단체 총 수는 22개, 무장군인은 약 2,000명이나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게 되어 시베리아 등지로 이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상해로 모여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이전의 외교투쟁노선을 지양하고 무력항일투쟁으로 서서히 그 성격을 변화시켜 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 침공한 일제를 몰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태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초 중국 정부와의 협정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44년 8월 28일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당면문제는 병력 증강을 위한 초모활동과 첩보공작이었다. 1943년 6월에는 한영군의 합작 교섭이 성립되어 영국군에 파견됨으로써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전단 작성과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광복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미국과의 제휴로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한반도에 연합 진공하기 위하여 1945년 5월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광복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항복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미소 양군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다.

전쟁 국가의 탄생(원서/번역서: [해외]Drift (Paperback))

‘평화는 쉽게, 전쟁은 어렵게’, 미국의 이상은 어떻게 무너졌을까?에미상 수상작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가 말하는미국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표류하는 이유베트남 전쟁에서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미국이 전쟁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법미국의 전쟁은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을까?미국은 어쩌다가 ‘전쟁은 어렵게, 평화는 쉽게’라는 원래의 이상에서 멀어져 영구적인 전쟁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기는 지경이 된 걸까? 이 책은 미국이 전쟁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법과 특히 전쟁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레이건의 과격한 안보 사랑이 남긴 정치적 유산, 미국 공군의 황당한 핵무기 관리를 비롯하여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은 어떻게 비대해졌는지, 미국의 전쟁 수행 역량은 어떻게 점진적으로 민영화되었고 어떤 부작용을 초래했는지, 항시 전쟁 중인데도 미국 국민들이 전쟁 중인 것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MSNBC에서 에미상 수상작인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가 미국의 뒤죽박죽 국가 안보에 관해 펼치는 상식적이면서 도발적이고 심각하면서 재미있는 책.▶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워싱턴 포스트 선정 주목할 만한 논픽션▶ 커커스 리뷰 선정 최고의 논픽션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전쟁에 대한 의지였다. 토머스 제퍼슨은 “국가의 권리에 무척이나 위험한 도구인데도 불구하고 통치자의 재량에 맡겨놓은 도구”가 상비군이며, “통치자는 엄격히 정해진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전쟁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은 동시에 전쟁을 일으킬 가장 많은 권력의 분지가 행정부”라고 지목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전쟁 선포 권한을 결정권자 한 명의 손에 두는 것이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항하기 위해 구조적인 장벽을 구축하려 했다. 그리하여 미국 헌법은 의도적인 신중을 기하여 전쟁에 대한 질문을 입법부에 귀속시켰다. ‘평화는 쉽게, 전쟁은 어렵게’가 초기 미국을 지배하는 이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모습은 어떠한가?“우리는 전쟁에 나가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다. 때로는 적이 우리를 공격했고, 또 때로는 우리가 적을 찾아 나섰다. 급기야 ‘차마 비할 데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니고, 세계 어디에서나 평화를 누리는 국가’가 되는 것은 경시되며, 잃어버린 정치적 메시지로 여겨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즉 ‘아늑하고 과도하게 안전한 세계의 한구석’에 있는 것이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되었다. 마치 우리는 무장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방법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되었다.” (본문 중에서)MSNBC에서 에미상 수상작인 를 진행하는 진보적 정치 평론가 레이첼 매도의 상쾌한 재치와 지성이 돋보이는 이 책은 미국이 원래의 이상으로부터 표류하여 멀어지고 있으며, 기묘하게도 영구적인 전쟁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기는 국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장소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매도는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의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과정에서 레이건이 보낸 과격한 대통령 임기에 대하여, 불편할 정도의 행정부 권한 상승에 대하여, 미국의 전쟁 수행 역량을 민간 업체에 위탁하는 점진적인 외주화에 대하여, 미국 공군의 황당한 핵무기 관리에 대하여, 전쟁 중임에도 전쟁 중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못하는 미국 국민들에 대하여 탐구한다. 그럼으로써 미국의 군사력 행사가 정치적 토론을 압도하여 전개될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미국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했는지 보여준다.미국식 싸움의 기술에 영향을 미친 베트남 전쟁부터스텔스기처럼 전쟁을 은폐하게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미국의 고삐 풀린 전쟁사베트남 전쟁은 여러 방면에서 미국에 큰 영향을 준 전쟁이었다. 「1장 G. I. 조, 베트남 전쟁 그리고 미국식 싸움의 기술」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 군대가 어떤 변화를 겪었고 미국 정책에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말한다. 이른바 ‘전쟁에 나가는 것은 국가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라는 에이브럼스 독트린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미국의 전쟁 결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한다. 「2장 레이건이 숨겨둔 비장의 수」에서는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레이건의 대선 전략이 어떻게 ‘세계 어디에서나 평화를 누리는 국가’를 ‘심각한 위험에 처한 국가’로 만들었는지 말한다. 「3장 과장된 안보 위기와 군사주의」에서는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가 미국의 국방력을 얼마만큼 팽창시켰는지 보여준다. 「4장 엉망진창 그레나다 침공 사건」은 승리가 필요했던 레이건이 겉과 속이 다른 이유로 어떻게 그레나다를 침공하게 되었는지 그 속내를 밝힌다. 「5장 백악관의 비밀주의,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입법부를 거치적거리는 장애물로 여긴 나머지 행정부가 벌인 촌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만들어진 레이건 행정부의 행정부 권한에 대한 논리는 이후 정부에서 살뜰하게 이용되었다. 「6장 페르시아만에서 벌인 부시의 십자군 운동, 걸프전」은 전쟁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어야 한다는 미국 행정부의 판단이 굳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쟁 결정 권한에 대한 입법부의 헌법상의 권리가 어떻게 식물화되는지 또한 보여준다. 「7장 클린턴이 키운 군대의 민영화」는 입법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최신 전략으로서 군대의 민영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부시와 클린턴이 자신들의 전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만든 편법은 미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8장 오바마의 지독한 살인 기계와 빈 라덴 사살 작전」은 오바마의 CIA 드론 프로그램을 다룬다. 정보 조직이 졸지에 대통령 전용 군사 조직이 된 이유와 비인간적으로 사용되는 미국 군대에 대해 말한다. 「9장 핵무기에 핀 8조 달러짜리 곰팡이」는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최강자 미국의 졸속 관리를 보여준다. 이전에 만들었던 핵무기를 수리하지도 못하는 이유, 대참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미국 공군의 아찔한 핵무기 관리 등을 이야기한다.미국이 전쟁을 결정하는 방법이란 이런 것이다전쟁이 어떻게 쉽게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서사시적으로 보여주는 책미국은 원래의 이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보기만 해도 아찔한 사실들을 나열하는 이 책은 미국의 전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 동시에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고 만 과정을 서사시적으로 서술한다. 매도의 필치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지만, 미국이 전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국 군대의 삽질과 오지랖에 대한 머리 어질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은 미국이 어쩌다가 다른 모든 국가들의 지출액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액수를 군사주의에 소비하게 되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준다. 매도는 뭔가를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에 대해 말한다. 전쟁 결정에 대한 권한이 국민과 입법부의 손을 떠나 표류하는 것에는 미국인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일상으로 만든 지난 40여 년의 경로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고 매도는 말한다.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온 나라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CIA 드론 프로그램이나 용병 조직처럼 비밀리에 벌이는 군사 활동은 모두 근절되어야 하며, 이 세계가 위협적인 장소라고 해도 무력을 이용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고, 위험천만한 화학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핵무기는 감축되어야 하며, 전쟁에 관한 행정부의 비대한 권한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매도는 말한다. 과연 미국은 원래의 이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상식적이면서 도발적이고,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이 책은 거대하고 뒤죽박죽이 된 미국의 국가 안보에 관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들을 전해줄 것이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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