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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조선왕조.
조선의 이념과 사회를 고스란히 담은 궁궐 복식으로 본, 조선 왕실의 삶에서 조선의 역사와 과학을 알아보자.
조선의 궁궐에는 왕족을 비롯해 노비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궁궐 복식은 가장 귀한 재료와 최첨단 복식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왕과 왕비의 옷에서 권위와 위엄이 드러날 수 있도록. 문무백관의 옷에서는 본분과 직책이 드러날 수 있도록. 궁궐 복식은 섬세해지고 과학적으로 발전했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달라졌던 왕과 왕비의 옷.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던 궁궐에서 신분을 나타내주던 옷. 궁궐 복식은 조선이 왕실을, 조선의 신분 사회를 조선의 정치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금사를 사용하고 금박을 붙였던 궁궐 복식의 아름다움은 현대 과학 기술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전통 과학이 숨겨져 있었다. 궁궐 복식에서 조선 패션의 흐름을 읽고 현대 복식에 전통미를 가미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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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자복식에 표현된 선(線)의 미(美) – KoreaScience
조선시대 남자복식에 영향을 미친 사상적 배경으. 로 유교사상과 조선후기에 대두된 실학사상을 들 수. 있다. 1. 유교사상. 조선시대의 思想史的 潮流는 유교사상으로 고려.
Source: www.koreascience.or.kr
Date Published: 9/29/2021
View: 3793
한국복식사 10장. 조선시대복식
복식문화사. 2부. 고려시대 복식. 9장. 고려시대 장신구 및 직물 · 염색. 3부. 조선시대 복식. 10장. 조선시대 남자 복식. 교재: 한국복식사 개론, 교문사, 2015.
Source: contents2.kocw.or.kr
Date Published: 9/20/2021
View: 9028
역사 속 의복,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입었는가? – 문화재청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복식금제가 자주 내려졌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리의 공식 집무복인 관복의 …
Source: www.cha.go.kr
Date Published: 5/24/2021
View: 6473
조선시대 여성들을 어떤 옷을 입었을까? 2 – 채널예스
재미있는 점은 조선 후기의 파격적이라 할 만한 여성의복의 유행을 선도한 이가 바로 기생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기녀들의 복식을 모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적 …
Source: ch.yes24.com
Date Published: 11/10/2022
View: 1498
[논문]의복명칭의 분화를 통해 본 조선시대 복식문화 고찰
세계전통복식. 수학사. pp. 35-36; 2. 황유선 (1999). 조선시대 저고리류 명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3. 박춘순 (1991). 바지고 바지형태의 지역적 …
Source: scienceon.kisti.re.kr
Date Published: 7/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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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복식
- Author: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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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6. 11.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Yun4800cfI
우리 나라의 개화기는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1876년부터 경술국치의 1910년까지를 말할 수 있으며, 이때부터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였다.
이때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분의 평등의식이 복식의 간소화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해외에 대한 견문을 넓힌 개화파들이 일으킨 1884년의 갑신정변은 그해 5월에 갑신의복개혁이라는 교지를 내리게 했다. 그 교지는 다음과 같다.
“관복이 흑단령으로 전용함은 고제로서 일이 심히 간편하므로 당상관의 시복인 홍단령은 『대전통편』과 『경국대전』에 따라 입지 못하게 한다. 이제부터 모든 조정에 적둔 자는 상(常)에 흑단령을 입고, 대소의식·진현 및 궐내외 공고(公故)에는 흉배를 보태어 문무나 품계의 구별을 삼는다. 단령제도의 반령·착수도 『경국대전』의 제양을 따른다.” 이러한 교지에 따라 모든 품계의 관리들이 흑단령을 입게 되고 다만 흉배로서 품계를 나타내게 하였으니 이는 신분 계급 타파에서 온 평등사상이 그대로 복식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관복의 소매가 광수이던 것을 착수로 고치게 했다.
뿐만 아니라 1895년에는 공사 예복 중 답호는 입지 말고 진궁(進宮) 때에 모·화·사대를 사용하고 주의는 관민이 모두 흑색으로 만들어 입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종은 관민 일체감을 주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우리 나라 복식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획일적인 복식간소화작업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1895년 8월에 문관복장식이 반포되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복·제복은 구례대로 입고, 대례복은 흑단령·사모·품대·화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흑반령·착수·사모·속대·화를 착용하고, 통상복은 주의·답호·사대를 착용할 것”이었다. 여기에서 공복이라는말 대신에 대례복·소례복이 생겨 소매의 너비로 구별하게 한 것이다.
이해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또다시 복식의 개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당시 명성황후의 상중이었으므로 “국복(國服)이 몸에 있으니 의복은 예와 같이 백색으로 하고, 망건은 폐지하며, 외국의 의복인 양복을 입어도 좋다.”고 하였다.
1900년 4월에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되어 문관예복으로 양복을 입게 하였다. 이때 반포된 문관예복은 영국의 궁중예복을 모방하여 만든 일본식 예복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대례복으로는 연미복인 프록 코트(frock coat, 厚錄高套)와 같은색 트라우저(trousers)에 콕크드 해트(cocked hat)로서 차양이 두번 접어 올려진 비콘해트(bicorne hat)를 썼다. 소례복으로는 프록코트와 다른 색 바지에 실크 해트(silk hat, 眞絲高帽)를 썼다. 이와같이 수천년간 내려오던 한복문화가 한복·양복의 혼합문화로 전환되게 된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왕실을 위주로 하였던 복식문화에서 일반평민을 위한 복식문화로 전이되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기울어가면서 우리보다 한발 앞서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인들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양복화시킨 정치적인 원인도 있으려니와 우리 나라를 그들의 경제시장화하기 위하여 의료공급을 서두른 데 기인한 경제적 원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물산(朝鮮の物産)』에 보면 의료품 1인당 소비액이 1910년에 면포가 0.699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7배인 5.018원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저마는 1910년 0.068원이던 것이 1919년에 1.223원으로 무려 18배에 이르고 있으며, 견포는 1910년에는 0.082원이던 것이 1919년에는 0.225원으로 불과 1.7배밖에 오르지 않은 것은 귀족을 위한 고급의료품의 수요보다 평민을 위한 의료품의 수요가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의료품을 신분에 관계없이 경제력만 있으면 구입하여 원하는 의복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신분의 계급이 무너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일반인의 복식이 양복화하는데 자극을 주게 된 또다른 요인은 학생들의 학생복 착용에 있었다. 1920년대에 남학생 교복이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뀐데 이어, 1930년대에는 여학생의 교복도 한복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게 됨에 따라 양복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또 양복의 활동적인 기능이 인정되어 어린이들의 옷으로도 많이 권장됨으로써 기성복으로 생산되어 어린이의 양복 차림도 크게 증가되었다. 물론 양복화 경향은 도시의 상류층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반 국민은 역시 우리 옷인 한복을 많이 착용하였다. 그러나 한복의 착용에도 양복의 혼용이 점진적으로 일어나 버선이 양말로, 짚신은 고무신과 구두, 속옷은 셔츠 등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또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이 우리 나라에 물자절약을 강요함에 따라 의류소비절약 차원에서 복식의 개량운동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옷고름을 단추로, 긴 양말은 짧은 양말로 변화되었다.
1940년대에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각각의 소속집단에 따라 제복을 착용케 하였다. 남자들은 국방색 국민복 상의에 당꼬바지를 입게 하고, 여성들에게는 몸뻬바지로 그 복장을 통일시켰다.
특히 여성들의 몸뻬바지는 그간의 바지가 내의(內衣)로 착용되었던 이유로, 겉옷으로 착용하는데 대한 반감이 매우 심했으나, 몸뻬바지 자체의 여유분량이 많아 헐렁한데다가 잦은 공습 등에도 치마처럼 펄럭이지 않고 간편하다고 인식이 바뀌면서 여성들의 일상복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보다는 남자 의복에서 많이 나타났고, 지방보다는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지방과 여성들의 복장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착용하였고 그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와 별다른 차이는 없었으나, 일부분이 서양식으로 개량되었다.
이 시기의 남자들의 복식은 한복과 양복의 구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는 남자들이 여성들보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외부와의 접촉도 많았기 때문에 쉽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복의 착용 역시 지방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지방 등지에서는 대다수가 한복을 착용하였다.
계절에 따라 남자는 상의로 저고리와 적삼, 배자나 등걸이, 조끼, 마고자를 입었다. 상의는 무명이나 비단에 솜을 둔 솜저고리, 봄·가을에는 목면의 겹저고리,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로 만든 적삼을 입었다. 저고리의 깃은 그 너비가 좀 좁아지고 고름이 넓고 길어졌다.
또 저고리 위에 개화기에 들어온 조끼나 마고자를 덧입었고, 적삼의 앞길에 주머니를 다는 새로운 형태가 생기기도 하였다. 또 조끼가 소개된 후에 저고리의 길부분을 다른 색 옷감으로 하여 마치 조끼를 착용한 듯한 모양으로 제작하여 착용하기도 하였다. 하의로는 바지, 고이, 잠방이 등을 입었으며, 전시대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여기에 비로드나 털을 목부분에 두른 두루마기를 착용하였다.
1940년대 전후에는 두루마기와 함께 오바코트나 만또를 입는 경우가 도시를 중심으로 증가되었다. 단발령이 단행되어 갓 대신 모자를 많이 쓰게 되었다. 특히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에는 남미의 에쿠아도르와 인도차이나 등에서 만든 파나마모자와 맥고모자가 많이 착용되었고, 일본인들이 만든 중절모 등도 많이 착용되었다. 이때는 바지, 저고리, 마고자 차림에 모자를 쓰고 구두를 착용하여 한복과 양복의 혼용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양복의 속옷인 메리어스가 1934년경에 소개되었는데 종래의 우리 속옷과는 달리 몸에 밀착되어 보온효과가 뛰어나 단시일 내에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한복의 속옷으로도 많이 착용하였다.
또 발에는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던 풍속이 1920년대로 들어오면서 버선 대신 양말이 착용되었고, 짚신이나 미투리 대신 고무신이나 구두를 신게 되었다. 구두는 직물과 가죽을 재료로 하여 ‘혁신화(革新靴)’라고 하였다.
여자들의 복식은 남자들과는 달리 양장이 바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나, 개화기에 등장한 개량한복이 일반화되었다. 개량한복은 통치마에 긴 저고리로 간편하면서도 활동적이라는 이유로 크게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전통 양식의 한복인 저고리와 치마, 마고자, 배자, 두루마기 등이 착용되었다.
저고리는 개화기 이후 길어지기 시작하여 1910년대에는 저고리 길이가 35㎝로 거의 허리선까지 오는 길이가 되었다. 또 진동 배래 수구 등도 길어졌고, 배래는 뚜렷한 곡선을 이루면서 ‘붕어배래’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새롭게 소개된 광목·목양목·인조견 등의 옷감으로 만들었다.
치마에 있어서는 길이가 긴 긴치마와 개량치마인 통치마가 함께 착용되었다. 긴치마는 일반 여성들이 많이 착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비해 폭이 좁아지고 길이도 좀 좁아졌다. 또 통치마는 사회활동을 하는 도시의 신여성들이 많이 착용하였다. 발목이 보일 정도의 길이였으며, 주름의 넓이, 치마 길이 등에 변화를 주어 착용하였다. 주름 너비는 4∼5㎝였다.
통치마는 1920년 중반에 와서는 방모(紡毛)의 세루(serge)가 수입되어 세루치마가 유행되었고, 1930년대에는 벨벳(velvet)이 수입되어 통치마감으로 사용되었다. 여성들의 하의는 1940년대에 제2차세계대전이 격렬해지자 반공훈련이 잦아지면서 치마 대신 몸뻬의 착용이 강요되어 일반화되었다.
여성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치마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고 신여성들은 코트를 입었다. 여름에는 입지 않았으나, 봄·가을에는 겹두루마기, 겨울에는 솜두루마기를 착용하였다. 비단·명주 등으로 만들었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입 방모직물이 이용되었다.
1920년경에 서양식 속옷인 셔츠가 들어오면서 속적삼 대신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여러 겹으로 입었던 하의 속옷 수도 줄어 다리속곳 대신 팬티를 착용하고 여기에 바지와 단속곳을 더입는 정도로 간소화되었다. 한편 통치마에는 바지 대신 부루머(사루마다)를 입고 어깨허리가 달린 속치마를 입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전통 속옷을 개량하는 시도가 부단히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바지 뒤에 단추를 달아 용변시에 뒷부분의 단추를 열어 사용할 수 있게 하거나 바지길이를 무릎 정도로 짧게 한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된 속옷은 당시에 호응을 얻었을 뿐 지속적으로 착용되지는 않았다.
또 통치마를 착용하면서 버선이 1910년대에는 양말이 나오면서 혼용되었고, 1920년대에는 양말을 더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이때 착용되던 양말은 피부색과 비슷한 누런 색이었고, 길이도 종아리를 가릴 수 있을 만큼 길이가 길었다. 그러다가 1930년 물자절약이 강요되면서 발목까지 오는 짧은 길이로 변하였다.
신발은 1910년을 전후하여 값싸고 질긴 고무신이 생산되었다. 고무신의 모양은 당혜(唐鞋)나 운혜(雲鞋)와 비슷하여 별다른 거부감없이 지방에까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고무신과 더불어 운동화·구두도 착용하였는데, 구두는 1917년 양복과 개량 한복에 맞는 혁신화가 만들어져 널리 착용되었다.
여성의 혁신화는 남성 것과는 달리 신코에 꽃봉오리나 나비 도안 등을 자수하였다. 1930년대에는 편상화·단화·리본화·목구두 등의 다양한 구두가 만들어졌다. 1940년대에는 여성들에게 하이힐이라는 서양풍의 굽 높은 구두가 착용되기도 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물자 절약으로 왕골로 만든 굽있는 구두모양의 신발 고려화(高麗靴)를 만들어 착용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 등지에도 수출하였다.
여학교를 중심으로 쓰개치마와 장옷 착용이 줄어들면서 머리모양에 변화가 일어나 펌프도어(챙머리)가 유행하였고 1934년부터는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단발을 하였다. 1937년부터는 파마머리가 지방의 젊은 여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 또 여성들의 의복이 서양화하면서 종래의 주머니 등은 1930년 이후 핸드백으로 대치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시대의 복식
조선시대의 의식주 ( 衣食住 )
조선시대의 복식
목차
(1) 궁중예복 적의
(2) 원삼활옷당의
(3) 일반 의복 저고리
(4) 치마
조선시대의 복식은 예와 의식에 많은 신경을 썼는데 세종 때의 《오례의(五禮儀)》, 성종 때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간행함으로써 복식제도는 체계화되었다.
관습에 따라 일상복은 달랐다.
고려 말 목화의 보급으로 목면(木棉)을 이용한 복식이 사용됨으로써 의복생활이 다양화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복식 구분의 와해, 유교 윤리의식의 약화로 인한 복식의 장식성이 추구되었다.
▶ 조선시대의 복식
서민층 남자는 바자마, 저고리에 버선을 신고, 신은 짚신이나 마후리를 신었다.
서민 여자는 포를 입지 못하였고 쓰개는 장옷[장의(長衣), 천의(薦衣)]에 한하였고 저고리, 적삼, 치마, 바지, 속곳, 고쟁이 등을 입었고, 짚신을 신었으며 삼화장 저고리는 입지 못했으며 치마는 오른쪽으로 여미어 입었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복식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명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아 관복제도가 확립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치르는 동안 중국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조선시대의 관복을 그대로 복식에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여자 복식은 구조상으로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은 아니지만 왕비복의 경우 명나라의 관복 사여를 통해 이루어진 중국제 그대로 왕비복을 예복으로 하였으며, 고대 복식의 시대에 따라 변해 저고리 치마 등의 국속을 함께 입어 이중 구조 속에서 전승되어 왔다.
(1) 궁중예복 적의
대례복은 명에서 사여한 적의가 국말까지 사용되었다. 왕의 적의(翟衣)는 대홍단(大紅鏄 : 붉은 비단)으로 지었고 심청색 바탕감에 길이는 12등분하여 적문(翟紋 : 꿩무늬)을 넣어 대개 148쌍을 수놓았고 작은 윤화(輪花 : 둥근 꽃무늬)를 사이사이에 넣었다.
▶적의
(2) 원삼활옷당의
원삼은 겹으로 하여 적자색 다홍색 길이에 뒤가 길고 앞이 짧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에는 홍, 황의 두 가지 색동과 금직단의 백한삼(白汗衫) 원삼이나 활옷의 소매 끝에 대는 흰 천이 붙어 있으며 저고리단 부분과 7척 길이의 홍단대에는 운봉문(雲鳳紋)을 화려하게 금직하고 앞가슴과 뒤에는 쌍봉문의 흉배(胸背) 왕복과 문무백관의 상복에 부착하는 수놓인 천을 장식하였다.
활옷은 꽃무늬가 많은 것으로 화의(花衣)라고도 하며 우리말로 활옷이라고도 한다.
(3) 일반 의복 저고리
조선시대에는 삼, 한삼 저고리의 저구리, 저고리, 결막이란 말이 있고 궁중용어로 동의 대라는 말도 쓰였다.
저고리란 말은 조선 세종 2년(1420)의 실록에 처음 보지만 고려 충렬왕 이후 원의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4) 치마
조선시대에도 길고 넓은 치마를 입었는데 속에는 여러 겹의 속옷을 입어 하체를 부풀렸고, 서민이나 노비의 여인들은 두루치기라는 폭이 좁고 짧은 치마를 입고 앞치마를 덧입었다.
학성(鶴城) 이천기(李天機) 일가 묘 출토 복식은 이천기(1610~1666)의 묘와 그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에서 1969년에 출토된 유물이다.
이천기는 선조 27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여 1604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으며, 훈련원부정행용양위부호군(訓練院副正行龍楊衛副護軍)을 지냈다.
이천기는 슬하에 이정영(李廷英), 이동영(李東英), 이지영(李之英) 등의 자녀를 두었으며 영조 44년(1768) 통훈대부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으로 추정되었다.
유물 중 이천기의 묘 출토 복식(2종 3점)은 광다회대 1점, 면포 솜소모자·명주 솜소모자 2점이다. 이천기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출토 복식(3종 3점)은 면포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이다.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 출토 복식(3종 4점)은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쌍이다.
● 조선시대 모자
▲ 맨상투머리 : 천한 존재의 표현
공공장소에서 아무 모자도 쓰지 않은 사람들은 필시 상민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돈이 워낙 없는 처지라 싸구려 벙거지 하나 마련할 형편이 못되어 맨상투인 채로 다니기 때문이다. 혹은 일을 할 때 맨상투인 차림들이 많다.
▲ 두건 : 상민들의 노동모
▶벼 타작. 단원 김홍도 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그림에서도 양반인 지주가 타작을 감독하고 있고 6명의 일꾼들이 일을 하는데,
이 중에서 1명은 두건을 두르고 1명은 결혼을 안한 댕기머리 총각,
나머지는 모두들 맨상투 머리다.
맨상투는 너무 없어 보인다 해서,
대충 두건으로 상투를 가리는 경우가 있다.
▲ 삿갓 : 상민들의 쓰개
조선시대 삿갓은 부모상을 당한 상주가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쓰기도 했다지만, 일상에서도 그냥 쓰고 다녔다.
특히 강 위에서 노를 젓는 사공이나 여름철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 경우 좋은 햇빛 가리개였다
▲ 벙거지 : 군졸이나 상민들의 모자
벙거지는 원래 군인들이 쓰고 다녔던 군모였다.
임진왜란 이후, 상민들이 속오군으로 편성되면서 봄 가을마다 동원되었고 그때마다 쓰고 갔던게 벙거지였다.
그후 정기적인 동원이 시들해지면서 어느새 상민들의 모자로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아래 그림의 김홍도의 씨름도에도 벙거지를 벗어놓고 팔을 괴고 구경하는 남자가 보인다. 때문에 사극에서 민간인이 벙거지를 쓰더라도 시대는 조선후기로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정도전에 보면 왕골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든 패랭이를 보게된다.
이걸 조선 전기인, 15세기까지도 두루 썼다. 그러다가 패랭이의 형태는 원통 모양으로변하게 된다. 그리고 검은 물감을 들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초립이다.
처음 나왔을 때는 양반, 상민 모두 착용했다.
그런데 갓이 발달함에 따라 양반들은 초립을 쓰지 않게 된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초립은 완벽히 상민 전용의 모자가 되어버렸다.
조선 후기에 패랭이도 여전히 사용됐다.
다만 모자의 크기가 작아지고 색을 들이지 않게 된다.
흔히 보부상들이 쓰고, 홍길동이 쓰던 바로 그 모자다.
▲ 갓 :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
▶조선말 갓 쓴 짚신 노점장수 (좌측 넓은 챙 갓. 우측 좁은 챙 갓)
갓은 비단실, 말총, 돼지털로 만든다.
그런데 이런 갓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평민은 물론이고, 노비도 착용했던 것이다.
사극에서는 신분을 과시하겠다면서 넓은 챙(양태)의 갓을 양반용, 좁은 챙을 중인용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보다 갓의 크기는 시대마다 달라졌던 것이지 챙(양태)으로 신분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16세기 처음 등장했던, 초기의 갓은 높이(갓대우 또는 총모자)는 매우 컸으나 챙(양태)이 좁았다.
그러다가 18세기가 되면 챙이 거추장스럽게 넓어진다.
상민의 갓도 챙이 넓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세기가 되면 다시 챙은 좁아지게 된다.
드라마 허준에서 차도남 스타일로 멋지게 나오던 ‘유도지’가 챙이 좁은 갓을 쓰고 나와 스타일을 구겼는데,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16세기 당시 갓은 모두 챙이 좁았다)
다만 갓이 아닌, 벙거지나 패랭이 등을 썼다면 그 사람은 확실히 양반이나 중인이 아닌, 평민이나 노비인 것이 분명하다.
결론 짓자면, 조선시대에 모자만 보고 신분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조선시대 겉옷
조선시대 신분을 구분하는 바로미터는 겉옷이다.
사실 이것만 확실히 알고 있어도,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서 대번에 사람들의 신분을 파악할 수가 있다.
도포 : 양반의 평상복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도포를 입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직령’이라는 옷을 조선 초기 당시까지 입었다.
그러다가 16세기부터 양반들의 옷으로 도포가 유행이 되게 된다.
▲ 직령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상민들도 도포를 착용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고로 조선후기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노비가 있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일이 못된다.
▲ 조선 양반 평상복 ( 도포 )
양반의 평상복 중에서 도포는 임진왜란 이후 문관들의 웃옷이었으며,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의 예복이었다.
도포라는 말은 1564년(명종 19)에 처음 등장했는데, 도복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다. 1884년(고종 21) 갑신의복개혁 때 폐지되었다가 1900년 다시 무관자(無官者)의 예복이 되었다.
의복은 깃이 곧고, 무가 달려 있으며 소매가 넓은 형태다. 옷의 뒷길은 무와 연결된 허리부터 뒷중심이 터져 있고, 그 위에 도포의 특징인 뒷자락이 하나 더 있어 말을 타거나 앉을 때 용이하다.
색상은 백색·옥색·자적색·녹색 등으로 다양하며, 그 중 백색 도포는 집에서 지내는 제사 때 제복으로 많이 입었다.
도포에는 가는 띠를 두르고 태사혜를 신었으며, 집에 있을 경우에는 관(冠)을, 나들이할 경우에는 갓을 착용했다.
도포는 크게 이런 특징이 있다.
① 겨드랑이 아래가 트여 있다.
② 소매가 무척 넓고 길다.
③ 색깔이 다양하다 : 흔히 청색, 황색, 흑색 등으로 염색을 했다.
▲ 철릭 : 중인들이 입던 옷
얼핏 보면 도포와 비슷하지만, 양옆이 트여있지 않고, 허리 아래로 주름이 잡혀 있는 겉옷이 있다. 이게 바로 중인들이 입던 철릭이라는 옷이다. 보통 관아의 아전들이 많이 입었다.
▶흑립+철릭을 입은 무관
철릭은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 연결시킨 형태의 포이다. 조선시대 왕을 비롯한 문무관이 착용하던 곧은 깃의 포로 상의인 유와 하의인 상이 연결된 형태인데 상에 잔주름이 잡혀 활동하기 편리하게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단령 밑에 입는 받침 옷으로 항상 입도록 하였는데 이는 백관들이 비상시 단령 벗으면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 없이 융복으로 대신하려는 간편함을 따른 것이다.
조선시대 철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7년 “병조에서 궐 밖으로 임금이 거동할 때 위군사는 철릭을 착용하라”하였는데 이는 융복의 기능이었다.
특히 선조 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이 잦자 사대부들까지도 행동에 편리한 철릭을 착용하였다.
또한 임금이나 세자가 혼례 때도 착용하였다.
국난이 있을 때는 왕도 전립에 철릭으로 된 융복을 착용하였다는 것을 조선조 제25대 철종의 어진에서 볼 수 있다.
무관, 문신이 융복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 착용하였다.
▲ 술띠 : 신분 구분은 이것으로 한다 .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도 상민도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데 어떻게 신분을 구분하란 말인가?
여기서 양반들이 모든 건 다 양보해도, 단 하나 양보하지 않았던 게 있었다.
바로 ‘술띠’라는 도포에 차는 허리띠다.
“오직 양반들만 가슴에 술띠를 맬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붉은색 술띠는 지체높으신 분만 착용 가능.”
가슴에 맨 끈, 술띠란 바로 이런거다.
술띠는 도포나 전복, 창의에 착용하는 가느다란 띠로 실띠 혹은 분합띠라고도 하며, 가는 실띠의 양끝에 술이 달려 있다.
품계에 따라 빛깔을 달리하여 도포를 입을 때 당상관은 훈색(吾色) 또는 자색(紫色)을,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을 사용하여 품위를 가렸다.
그러나 이 밖에도 수많은 색이 있어 제도를 떠나 자유로이 선택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노인들은 대개 회색이나 흰색의 세조대를, 상중(喪中)에는 흰색의 세조대를 매었다.
한편 왕도 평상시에는 도포를 입었는데 여기에 금사세조대(金絲細條帶)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편복 포에 사용되었던 세조대는 한말에 이르러 도포나 창의 등 광수의(廣袖衣)가 폐지되고 두루마기 일색이 되면서 그 사용이 줄어들어 도포와 함께 가제(家祭)의 제복(祭服)에 사용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김홍도 씨름도의 구경꾼들의 신분은 어떻게 될까?
구경꾼들을 보면 망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 갓을 쓰고 왔을 게다.
하지만 저 중에 술띠를 맨 사람이 보이는가?
그래서 씨름도의 구경꾼들은 대부분 상민들로 간주하고 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던 상민들이 술띠만을 못하게 했던 까닭은..
나라에서 사대부가 아니라면 착용하지 말라는 금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김홍도 ‘씨름
때문에 술띠는 사대부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도 같았고, 그 중에 붉은색 술띠를 차면 더욱 귀한 신분으로 먹어줬다.
조선시대 회혼례도를 보면 아버지는 붉은색 술띠를 차지만 자식들은 검은색술띠를 차고 있다.
사극에서는 가끔 말단 관직의 젊은 유생이 붉은색 술띠를 착용하고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고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술띠는 중인 신분들도 착용했다.
조선시대를 반-상의 2신분제로 나눈다면 중인은 양반층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 창옷 : 상민 전용의 도포
창의(氅衣)라 하며 별칭으로 ‘창옷’이라 부른다.
상민도 도포와 유사한 겉옷을 입었는데, 이를 창옷이라고 한다.
얼핏 보면 도포와 비슷해 보이지만,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소매가 좁다는 것이다.
조선 초부터 말기까지 사대부들은 집에서 입거나 외출시 도포나 대창의 등 겉옷의 밑받침 옷으로 입었고, 서민들은 겉옷으로 입었다.
사대부들은 명주나 비단으로, 서민들은 목면 등으로 지은 백색·흑색·청색·옥색의 창의를 입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두루마기와 함께 양반도 입는 옷으로 격이 높아졌다.
창의는 소매가 좁고 무가 없으며, 겨드랑이부터 옆이 터진 포로 시대에 따라 형태에 변화가 있었다.
즉, 옷깃이 칼깃에서 두루마기 깃으로 변했고 화장이 짧아졌으며, 밑단 도련선이 수평으로 반듯해졌고 앞길의 중심선에 달렸던 겉섶이 좌측 길 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윤복(申潤福)이나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에 보이는 양반들은 창의에 세조대를 매고, 넓은 테의 갓이나 유건(儒巾), 그리고 짚신을 착용했고, 놀이 갈 때는 앞자락을 뒤로 매고 띠를 매지 않았는데, 이것은 밑받침 옷으로 간편한 옷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래 그림에서 보면 소매가 넓은 양반의 도포와 쉽게 비교가 된다.
그런데 상민들은 이런 창옷을 독특한 방식으로 입곤했다.
술띠를 맬 수 없어서, 허리가 헐렁한 것도 있었고
활동을 많이 하는 신분이다 보니 아무래도 앞자락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앞자락을 허리에 묶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바지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 저고리 : 상민들의 노동복
상민의 겉옷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저고리다.
단원의 풍속도를 통해 통계를 내어 보면 대충 상민들 중 80%가 저고리를 입고 있다.
저고리는 상민들의 노동복이기 때문에 당연히 소매가 좁다.
또 허리에 띠를 둘러 입기도 했다. 다만 활동하기 편하도록 임시로 맨 것이다.
● 서민들의 바지와 신발
▲ 대님과 행전
조선시대 바지에는 통이 넓은 바지와 좁은 바지가 있다.
통이 넓은 바지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발목 부위에 대님을 쳤다. 이는 양반, 상민 공통이다.
상민 중에서는 외출을 하거나 먼길을 떠날 때면 무릎 아래 행전을 차기도 했다.
오늘날의 각반인 셈이다. 행전은 바지나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 매는 물건으로서 반듯한 헝겊으로 소맷부리처럼 만들고 위쪽에 끈을 두 개 달아서 돌라매게 되어 있다
▲ 잠방이
잠뱅이라는 저가 청바지 브랜드가 있다.
그런데 이 어원이 조선시대 7부바지인, 잠방이에서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잠방이는 상민들의 여름 노동복으로서 오늘날의 7부 바지와 비슷했다.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지은 짧은 홑고의. 조선시대에 흔히 농민들 사이의 노동복으로 사용됨. 주로 베로 지어 입음. 반바지.
특이한 건 맨발차림이다. 커다란 갓과 상당히 매치가 안된다.
옛 속담에,
“잠방이에 대님 차듯”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일이 몹시도 궁색할 때의 상황을 나타낸 말이다.
▲ 짚신과 미투리
조선시대 서민들의 대표적 신발로, 짚신과 미투리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짚신과 미투리의 차이는 뭘까? 사실 생긴 건 둘 다 비슷하다.
짚신은 말 그대로 재질이 지푸라기인데 비해 미투리는 소재가 마, 모시로 만들어진다.
옛사람들은 집을 나설 때 미투리와 짚신, 2개의 신을 챙겨 떠났습니다
좋은 길을 걸을 땐 미투리를 신고, 산길을 걸을 땐 짚신으로 갈아 신었습니다
푹신한 짚신은 산길에 널린 미생물을 죽이지 않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투리는 삼으로 만든 신이기에 짚신보다 더 고급스럽고 결도 훨씬 촘촘합니다
걸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좋은 길을 걸을 때 짚신을 신고, 산길을 걸을 때미투리를 신어야 편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땅에 사는 미생물들에게는 짚신보다 미투리가 더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사람들은 다래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걸었다고 합니다
콩콩콩, 지팡이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작은 생물들이 밟히지 않게 그 길을 벗어날 수 있도록 신호를 준 것입니다. 짚신도, 미투리도, 다래나무로 만든 지팡이도 없는 지금, 문득 그런 옛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크게 느껴집니다
▲ 짚신 종류
미투리가 좀 더 질기기 때문에 미투리가 더 비쌌고, 좀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신었다. 그렇다면 양반들은 이런 짚신과 미투리를 신지 않았을까?
아니다. 양반이라도 형편이 안되면 짚신을 신었다.
보통 일반 짚신은 신총이 6-8개를 제총으로 대충 엮어 쓰는 막치기 짚신이다.
일상 생활에서 급하게 만들어 쓰거나 작업시에 신는다.
통상 신총을 20개정도 박아서 엮은 짚신으로 나름 곱게 지어졌다.
짚신도 신총을 70-80개 정도로 가늘게 박아 엮으면 꽃신이라 불릴 정도로 곱고 이쁘게 만들 수 있다. 색색이 색깔을 넣어서 알록달록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투리는 삼베를 짜는 삼으로 엮고 바닥 신날도 6개로 곱게 짜며 노파리는 실내화로 하였으며 왕골짚신, 부들짚신, 칡껍질을 벗겨 만드는 청올치신 등도 있다.
짚신(미투리 포함) 중에는 사진처럼 장화 모양의 짚신도 있었다.
여행 중에 가죽신을 아끼기 위해 짚신을 신는 양반들도 있었다.
쇠짚신은 소에게 신겨 일을 시키거나 먼길을 짐을 싣고 운반할 때 썼고, 걸립짚신은 무당이 굿을 할 때 신 앞에 내놓는 신으로 썼고, 멱신은 설화로 눈이 많이 오는 산간에서 신었다.
설피는 방한화로, 습신은 죽은 시신에게 신기는 신으로, 엄짚신은 상제가 신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또 열 켤레의 짚신이나 미투리를 한 죽이라 불렀고 같은 의미로 죽은 이의 옷이나 신발, 그릇도 한 죽의 짚신과 함께 죽신이라 불렀다.
▲ 가죽신
가죽신은 일반 상민들은 신지 못하게 돼 있었다. 특히 노비는 절대 신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어 신분제가 붕괴되더니, 상민들 중에는 가죽신을 신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조선시대 문무관료가 관복을 입을 때 신었던 화자, 사대부가의 남자들이 편복에 신던 가죽신으로 태사혜가 있는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왕도 편복에 신었다.
어른의 태사혜는 검정색 바탕에 흰 태사문을 새겼고 어린이용은 녹색바탕에 다홍색 태사문을 새겼다. 사슴가죽으로 만든 녹피혜, 기름먹인 가죽으로 만들어 방수가 되는 신으로 유혜라고 한다. 바닥에 징을 박아 징신이라고 한다. 나막신과 함께 마른신에 반대되는 뜻으로 진신이라 불렀다. (마른땅-마른신, 진땅-진신)
문무백관들이 조복과 제복에 신었던 흑혜인데 가죽으로 만들고 장식이 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궁혜는 궁에서 신는 신발이며 안쪽은 융같은 푸근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여러 색으로 화사하게 하며 바닥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비올 때 장화 대용으로 신는 나무로 만든 나막신도 있었다.
● 소소한 얘기 : 조선시대 의복의 특징
신분을 숨기지 마라 .
전근대 시대, 신분제 사회 속에 살던 대부분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입는 의복을 통해 엄격한 신분 위계질서를 담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100% 잘 지켜졌던 게 아니었다.그렇더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알맞는 의복을 입어야 했다.
때문에 양반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소유했던 역관들이라 할지라도 도포에 술띠를 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고, 그들은 항상 철릭을 걸치고 다녀야 했다.
“넓은 갓은 양반만이 쓸 수 있었지.”
“가죽신은 양반만이 신을 수 있었지.”
이런 정도로 규제가 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편하더라도, 폼 나게 입어라
조선시대 의복은 남성복이든 여성복이든 실용적이지 못하고 비활동적이었던 모양이다.
▶루벤스가 그린 조선시대 철릭을 입은 중인. 상민들에게는 흰색 옷만을 입도록 강요됐다.
임진왜란 때였다.이웃한 중국, 일본 사람들이 항상 지적하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양전투가 끝나고 명나라 지휘관들이 당시 평안도 순찰사였던 이원익을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명나라 지휘관들이 조선 군관들을 보고 비웃었다.
“아니, 이렇게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전쟁을 했단 말이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선조는 매우 속이 상했다.
“조선의 의복이 그렇게도 거추장스럽게 보인다니..” 때문에 이런 전교를 내렸다.
“앞으로 넓은 옷소매를 줄이도록 하고 거추장스러운 갓 대신에 모자를 쓰도록 하라.”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런 말을 듣겠는가!
평안도 지역만 일시적으로 깔짝 대다가 말았을 뿐이다.
구한말 일본인 혼마 규스케는 조선의 한복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사람들의 옷은 소매는 길고 갓은 크다. 불편함에 있어서 세계 으뜸일 옷이다.“
“조선 사람의 거동이 우유부단하여 활발하지 못한 원인은 아마도 이런 의복을 입는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여성의 의복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폭이 넓은 소매와 긴 치마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 후기에 여성들의 저고리 사이즈가 유난히 짧아지는 이유는 이러한 불편함을 피부로 느끼면서 생기게 된 변화였다.
(한국 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상활사 3편, p58~59)
▲ 화려하게 입지 말아라
왜 조선시대 한복은 화려하지 못했을까?
특히 이웃한 중국과 일본의 전통 옷과 비교해 보면 매우 수수하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의 경우 무늬를 넣는 것은 철저히 금지됐다. 사극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늬 있는 옷은 기생들이나 입는 것이지.”
더욱이 지체 높은 양반가라고 하더라도비단 옷만을 즐겨 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로 생각했다.
“치장을 해야 하는 젊은 여자들에게는 특별히 사정을 봐줄 수는 있지만, 이때도 100% 비단옷은 안되고, 비단에 무명을 섞어서 지어 입도록 하라.”
17세기 윤선도의 글을 보면 이렇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비단 옷과 모시 옷을 입어봤는데, 벌써부터 아들에게 비단옷을 즐겨 입게 하면 안된다.”
이토록 화려한 의복을 경계했던 것이다.
이유가 뭘까? 바로 조선 선비들의 검약 정신 때문이다.
▲ 중국 복식에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복식
우리나라 복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중국복식입니다.
한족의 전통적인 복식 양식을 규범으로 삼았죠.
하지만 꼭 한족복신만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니고 선비족이나 몽골의 복식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중국은 한족 복식 양식에 이민족 문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원나라때는 고려 복식을 영향을 받았죠. 이 처럼 한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조선시대는 통치 철학과 이념이 유교사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어느 시대보다 “예(禮)”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식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국가 중요행사에서 복식 규범을 명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한결같이 중국의 복식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실학자들은 유교 이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복식에서는 역시 중국의 복식을 따르자고 주장했습니다.
“의관제도는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대체로 인문에 맞, 법상(法象)의 정당함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제도는 간소하여 구비하기 쉬울 뿐 아니라 오늘은 문물을 같이 하는 때이므로 운남과 귀주와 같이 북경에서 거리가 만여 리나 되고 일찍이 상투를 틀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하던 지역도 남녀노소가 중국과 똑같은 제도를 따르고 있다.
하물며 북경에서 사천 리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 우리는 실로 오복과 제후가 다름이 없는데도 의관이 수치스러운 것이 많다.
신이 삼가 모양을 갖춰 올리니 바라건대 이것을 공조에 내려 팔도에 반포하고 개조하여 중국제도를 따르게 하자” 유성원, <번계수록>
“중국의 의관이 변한지 백여년이 되었다. 지금은 천하에 오직 우리나라에만 구제가 약간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에 오자 무식한 사람들이 웃지 않는 이 가 없으니 그 근본을 망각했음이 슬프도다 (중략) 4면이 모두 터져 있는 옷은 융복으로 명제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리의 조복으로부터 선비의 도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명제를 답습하고 있다” 홍대용, <담헌서>
▲ 철릭 ( 帖裏 )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어 고려시대에 착용하던 철릭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착용되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의와 상의 길이가 같아 일대일의 비율이었으나 점차 치마의 길이가 길어지고 치마에 잡힌 주름이 잔주름에서 넓은 주름으로 변했습니다.
또 좁았던 소매는 넓어지고 직선배래는 독선배래가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의 상복, 관원의 공복에 이르기까지 밑받침 옷으로 철릭을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철릭은 융복(戎服 : 군복의 일종으로 문무관이 몸을 빠르게 움직일 때의 복장) 으로, 사대부 및 서인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습니다.
선조 25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해 상하백관들은 철릭을 착용하고 전란 중의 공복으로 삼았습니다. 병자호란때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항복했으나 비상태세를 유지하며 공복 속에는 반드시 철릭을 입었습니다.
그 당시 북과 종을 여러 번 치면 공복을 벗고 철릭만을 입고서 각자의 자리를 고수하였습니다. 전시와 전후에 걸쳐서 오랜 세월 철릭을 관복 대신 착용함으로써 폼을 간편하게 하고 행동을 민첩하게 한다는 본래의 기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길고 넓은 포로 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 홍철릭 / 청철릭
철릭은 계절에 따라서 홑겹(單)·두겹(裌) 또는 솜을 넣어서(襦) 만들었는데 단오에는 홑겹, 추석에는 두 겹, 정월초하루·동지·가례의대에는 솜을 넣은 것이 상용되었습니다.
두 겹 또는 솜을 넣을 경우에 궁중에서는 안은 붉은색, 겉은 초록색을 주로 썼고
(대홍·자적·아청색도 있음.), 가례의대에는 반드시 초록색을 썼습니다.
또 관복의 밑받침 옷으로서의 홑겹 철릭에는 흰색을 썼고, 겉옷으로는 검은색·푸른색·붉은색이 쓰였는데 선조 때를 전후하여 붉은색이 유행하였습니다.
영조 때에 당상관은 남색, 당하관은 청현색, 교외 거동 때에는 붉은색으로 제도화되고(이때 철릭의 쓰임은 융복이었다.), 순조 말년에는 홍철릭이 다시 푸른색으로 바뀌어 말엽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위·사령·나장 등의 하급직들은 흰색·천담색·붉은색·푸른색을, 기타 악공이나 무당은 주로 붉은색을 착용하였으며, 별감도 통상예복에는 붉은색을 조선말까지 착용하였습니다.
옷감은 면·마·비단류가 쓰였는데 홑겹일 경우에는 면·마를, 두 겹이나 솜을 둔 경우에는 비단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 답호 ( 더그레 )
원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왕과 관리들의 상복(常服) 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는 옷이었습니다.
형태는 옷깃은 곧은 깃이고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넓은 섶이 가슴을 덮어 겨드랑이 밑에서 여며지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는 긴 길이로 옆트임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답호에 관한 최고(最古)의 기록은 고려시대 ≪노걸대 老乞大≫·≪박통사 朴通事≫에 대답호(大褡胡)·답호(褡胡)·답홀(褡忽)이 있으며, 더그레로 언해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에 26년 3월 명제(明帝)가 보내온 왕 상복 가운데 철릭(帖裏)과 함께 답호가 일습으로 들어 있고, ≪역어유해 譯語類解≫에서는 답호 밑에 ‘더그레’라 주하고 있으며, ≪지봉유설≫에 조선시대 세종 때 허조(許稠)가 회색 답호를 상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더그레란 덧입는 옷의 총칭으로 호의 ( 號衣 )· 전복 ( 戰服 )· 답호가 포함됩니다 .
▲ 조선시대 곤룡포 ( 袞龍袍 )
곤룡포 형태는 명나라와 많이 유사하였지만 소매 밑이 곡선이 아니고 거의 직선적인 형태가 나타났으며, 포 양옆에 있는 부분에 무라고 하고 명나라의 ‘파’와 달리 한국만의 독특한 호칭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곤룡포의 색상은 시대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왕의 초상화를 보면 조선 초기에 청색을 이용하고 후에 홍색으로 바뀌었고, 고종 때까지 왕의 신분을 상징할 수 있는 황색을 착용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왕의 상복은 입기 편하기 때문에 국난시(國難時) 융복으로 착용 하였으며 명나라처럼 곤룡포 안에 첩리와 답호를 입었습니다.
곤룡포 위에 둥근 오조룡원보(五爪龍圓補)를 이용한 것이 곤룡포의 특징입니다. 보통 가슴, 양 어깨에 배치하고 명나라와 달리 장문 해(日) 와 달(月)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용의 형태도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태초 때 가슴에 있는 용 문양은 행룡(行龍)이고 영조, 고종 때 정룡(正龍) 으로 변하였습니다.
포의 색상은 황제가 황색, 황태자와 왕이 대홍색, 왕세자와 왕세손이 아청색 혹은 자적잭이었습니다. 황제, 왕, 왕세자는 양 어깨, 가슴, 등의 4곳에 둥근 보를 달고, 왕세손은 가슴과 등에만 네모난 보를 달았습니다.
보에 수놓아진 용의 발톱 수는 황제와 왕이 5개, 왕세자가 4개, 왕세손이 3개입니다.
『국조오례의시례』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조선시대 왕이 쓰는 익선관은 주로 모라(毛羅)로 만들고 관의 양쪽 큰 각 뒤에 작은 각 2개가 뒤에 서 있었습니다.
관은 자주색, 청색, 흑색을 이용하였습니다. 관 위에 명나라와 달리 금식이 아니고 끈으로 만든 매듭 장식이 양각 중간에서 관 위에 내려졌습니다.
각 시대 황제 초상화에 의하면 익선관은 초기에 관 뒤에 있는 각의 크기가 아주 작고 후에 점차 넓고 커졌는데 고종 때에는 다시 작아졌습니다.
또한 관의 높이는 영조 때 제일 높고 후에 낮아지고 형태가 모두 완성되고 말기까지 계속하여 이용하였습니다.
▲ 속대 ( 束帶 )
천자가 쓰는 속대 대판(帶版)은 주로 옥으로 만들기 때문에 옥대라고도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왕이 쓰는 대는 형태가 명나라와 차이가 없고 조옥(雕玉)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는 홍색 단으로 싸서 위에 금실로 5줄을 둘렀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대를 매는 위치 차이가 있어서, 초기에는 허리나 허리 조금 밑 에 있고 후에 점차 가슴 위치를 올라갔습니다.
또한 신분과 관계없이 모두 흑색 화를 신었습니다. 화의 형태는 명나라와 비슷하고 여름에 흑칠피로 만들고 겨울에 흑색 궤자(麂子)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속대 전체는 대판이 모두 20개 있고 형태와 크기가 모두 다르고 특정한 명칭도 따로 있었으며, 주로 삼태(三台) 3개, 원도(園桃) 6개, 보필(輔弼) 2개, 달미(達尾) 2개, 배방(排方) 7개를 대정(帶鞓) 위에 끼어 있었습니다.
대정 즉 대의 주체이고, 보통 가죽으로 만들어서 위에 홍색이 나황색 원단으로 다시 싸서 위에 금실으로 장식을 5줄을 둘렀으며, 기본 적인 대정이 보통 3부분 즉 좌, 우, 후로 구성되었습니다.
좌부분에 삼대 2 개, 원도 3개, 보필 1개, 달미 1개, 우 부분에 삼대 1개, 원도 1개, 보필 1개, 달미 1개, 후 부분에 배방 7개 이런 순서대로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속대 좌, 우 부분 안에 부대(副帶) 각각 1개가 있고 부 대 위에 작은 구멍이 있었으며, 후 부분에 금속제 버클 한 쌍이 있고, 부 대와 연결해서 부대 위의 구멍을 통해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속대를 쓰기 위해 전체 플러그는 앞의 삼대가 있는 부분의 뒤에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속대 사이즈는 인체보다 더 크기 때문에 허리를 졸라매는 기능이 아니고 착용할 때 허리 부분에 헐겁게 걸었습니다.
이런 착용 모습도 명나라 속대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 화 ( 靴 )
상복은 보통 흑색 장화를 이용하였습니다. 화는 주로 가죽으로 만들고 화의 통이 좌, 우 두 부분으로 꿰매고 화의 표면이 앞 2부분, 뒤축 한 부분으 로 제작하였습니다.
화의 속에 보통 원단으로 만든 무릎 받이가 있고, 화의 밑은 새하얗기 때문에 ‘분저조화(粉底皂靴)’라고도 불렀는데, 즉 흰 바닥의 검은 장화를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명 후기에 다른 재료로 만든 화가 나타났고, 주로 홑 화와 모전(毛氈) 방한화였습니다.
▲ 조선시대 관복을 입은 양반가의 남자 _ 문관
조선시대의 ‘사대부(士大夫)’란 주로 현·전직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지식계급을 지칭하게 되었다.
사대부는 유교에 바탕을 둔 예의를 생활의 기본으로 하여 스스로를 엄히 규제, 절제하였고, 국가에서도 법률적으로 이들의 몸가짐을 규제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사대부는 그 처가 사망한 후 3년이 경과하지 않으면 재혼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이중환(李重換)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사대부는 혹은 농, 공, 상의 업을 할 수 있어도 농, 공, 상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대부의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사대부를 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이르러 자연적인 추세로서 신분의 차별이 생겨난 동기라 할 수 있겠다” 라고 사대부를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신분만으로도 많은 특권을 누리던 세습 신분이었지만, 진정한 양반으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학문적 소양을 쌓아서 궁극적으로는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가져야 했고, 생활에서도 유교적 규범을 지키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학문적 성취도 없고 생활태도도 모범이 되지 못하면 제대로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양반은 특권에 걸 맞는 책임 의식을 지니고 있어서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품위 있는 생활 태도를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의 격조 높은 문화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관복(官服)은 문무백관의 정복(正服)을 뜻한다. 관복은 좁은 의미로 상복(常服)으로서의 사모관대(紗帽冠帶)를 말하기도 한다.
사모관대는 사모, 단련, 흉배, 대, 목화로 구성되는데 시대에 따라 색이나 모양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왕조마다 유행색도 있었다.
상복은 1426년(세종8년)에 정해진 것으로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 대, 화로 이루어지며, ‘대’로써 품계의 등위를 가렸다.
1454년(단종2년) 이후에는 ‘흉배’로 상하를 가렸다. 초기의 형태는 고려 단령과 같았으나, 조선 중후기가 되면서 단령의 깃을 많이 파고 소매가 넓어지며 옆에 있던 무를 뒷길에 붙이고 옷고름을 달았다.
1884년(고종21년)에는 상복과 시복을 흑단령 하나로 간소화 했고, 1895년(고종32년)에 문관복 장식을 반포하여 대례복, 소례복이 생겼으며 흑단령의 ‘소매 넓이’로 대례복과 소례복을 구별하였다.
1900년(광무4년)에 단령을 양복으로 대치한 이후 단령은 지금까지 신랑의 혼례복으로 남게 되었다.
1. 복두의 소재는 모라이고 뒤의 양각이 아래로 쳐져있다.
2. 단령의 소재로는 겨울에는 주로 명주, 여름에는 마포로 만들며 당상관은 사라능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3. 목화는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공단 또는 융으로 만든다.
▲ 조선시대 별감
조선조는 중세의 고려를 이어 근대에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성하였던 조선시대는 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렀으며, 끝내 일제에게 국가의 존속이 좌절 당한 파란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전투복의 변천사적 관점으로 조선시대의 군복을 살펴보면, 화약무기의 발달로 갑옷체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와 철제, 혁제의 전투복에서 포제(袍制) 전투복을 착용하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화약의 발달은 전투복의 변화와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화약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중후한 갑옷은 행동을 크게 제약하여 더 이상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점차 소화기인 소총이 발달하면서 민첩한 행동이 요구되자 방어의 기능보다 위용을 주는 두정만 박은 두정갑이나 철릭, 구군복이 착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전투복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두정갑이 착용되면서 방어의 기능이 상실되자 임진, 병자 양란 이후에 융복(戎服)을 많이 입게 된 것으로 보는데, 융복의 구성인 ‘철릭’은 상하가 붙은 포로 하상의 허리에 주름을 넣어 활동하기 간편하도록 만든 전투복의 일종이다.
순조 때에는 “우리나라 의복제도 가운데 가자 오래된 것이 철릭인데 상의하상(上衣下裳)이 연결되어 있고 소매는 팔꿈치를 돌릴만하여 심의이면서 융사(戎事)에 나갈 수 있는 뜻이 있으므로 ‘융복’이라 부르며 이를 모포 속에 입기 때문에 철릭이라 하였는데, 포를 덧입고는 조정에 나가고, 포를 벗고는 융사에 나갈 수 있어서 편안할 때도 위태함을 잊지 않게 되어 간편하고 편리하다”고 하였다.
융복으로서의 철릭은 숭문비무(崇文卑武)의 사조에 따라 점차적으로 소매통이 넓어지고 치마 길이가 넓어지면서 전투복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갔고, 이를 개선하여 활동하기 편리한 구군복이 등장하게 되었다.
정조 초까지는 구군복보다 융복을 더 많이 착용하였으나, 정조 17년 군복과 융복을 이중으로 장만하는데 경비와 번거로움을 이유로 들어 융복폐지론이 대두되면서 병용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현상은 결국 조선말까지 이어져 구군복과 융복이 함께 착용되었다.
융복은 문관이나 무관 모두 몸을 경첩하게 해야 할 경우의 복장으로 보통 ‘철릭’과 ‘주립’을 착용했는데, 왕 행차에 수행할 때,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그리고 국란을 당하였을 때 착용했다.
착용방법은 철릭을 입고 광다회를 띠고 호수로 장식한 주립을 쓰며 목화를 신었다. 손에는 등채를 쥐고 등에는 환도와 통개를 매며, 대에는 병부와 호패를 찼다. <속대전>을 보면, 품계를 입과 철릭의 색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상 3품 이상은 자립(紫笠)에 패영을 썼으며, 당하 3품 이하는 청현색 철릭을 입되 교외 동가(動駕)시에 홍색 철릭을 입고 흑립에 정영을 썼다고 전한다.
또한 청철릭에는 홍색광다회를, 홍철릭에는 남색광다회를 매어 품계에 따라 대의 색을 달리 하였으나, 종아리에 행전을 두르고 목화를 신는 것은 모든 계급에 동일하게 적용시켰다고 한다.
1. 주립은 가는 대오리로 만들며 붉은 색을 칠한다. 호수를 꽂고 홍색, 황색의 구슬을 꿴 갓끈을 단다.
2. 등에 메는 동개는 천과 가죽으로 버선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다.
3. 목화는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공단 또는 융으로 만들고 안은 백공단으로 하며 가장자리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 환갑 ( 還甲 )
환갑(還甲)이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합쳐서 60갑자(甲子)가 되므로 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 뜻하는 61세가 되는 생일을 말한다.
회갑(回甲), 화갑(華甲/花甲), 주갑(周甲)이라고도 하며, 잔치를 하는데 이것을 수연(壽宴, 壽筵)이라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에서는 산해진미를 갖추어 환갑상을 마련하고 각종 과일을 1자 2치 이상씩 괴어 올렸다.
환갑인(還甲人)의 부모가 살아 계시면, 오색반란지경(五色班爛之慶)이라 하여 환갑인이 환갑상 앞에서 먼저 부모에게 헌수(獻壽)하며,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이것이 끝난 뒤에 자녀들의 헌수를 받는데, 형제가 있다면 환갑인 부부의 옆에 앉아서 함께 받는다.
헌수는 맏아들, 둘째아들, 맏딸, 둘째딸의 순으로 부부가 나란히 서서 잔을 올리고, 남자는 2번 절하고, 여자는 4번 절하였으나, 지금은 낳은 순으로 부부가 절을 하거나, 다 같이 재배(再拜)하기도 하고, 1번의 절로 끝내기도 한다.
다음에는 손자·손녀·조카 등이 차례로 잔을 드린다. 만일 한쪽 부모만 계신다면 술잔을 하나만 놓는다.
과거에는 악공(樂工)과 기생을 불러 풍악을 잡히고 기생은 권주가(勸酒歌)를 부르면서 헌수를 성대하게 장식했다.
환갑을 며칠 앞두고 수연시(壽宴詩)의 운자(韻字)를 내어 친척이나 친지에게 알려 시를 짓게 하고, 잔칫날 지은 시를 발표하면서 흥을 돋우었으며, 시를 모아 ‘수연시첩(壽宴詩帖)’을 만들어 자손 대대로 전하기도 하였다. 환갑 잔치는 사정에 따라 날을 가려서 앞당겨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사람이 70살 사는 이, 예로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는 시가 있듯이 70살 된 노인을 보기 드물어 환갑만 살아도 큰 경사로 여겨서, 사람들이 환갑상에 놓은 밤, 대추를 얻어다가 자손들에게 먹이면서 장수하기를 빌었다.
1. 복건은 검은색의 증이나 사로 만들었다.
2. 전복은 홑옷이며 반투명한 재질을 띤다.
3. 오방장두루마기는 반드시 중앙섶을 중앙색인 노랑으로 한다.
바지, 저고리, 색동마고자, 오방장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전복을 입으며 띠를 매고 머리에는 복건을 쓰고 혜를 신고 있다.
복건은 앞단에서 귀 윗부분에 좌우 2개씩 주름을 잡되 아래 주름 속으로 끈을 달아 뒤로 돌려맨다.
마고자는 깃, 고름이 없으며, 여성용은 섶을 달지 않고 남성용은 섶을 다는데 길이를 여성용보다 길게하고 양옆 아래를 튼다.
▲ 조선시대 유생
조선시대의 유자(儒者), 유생(儒生), 또는 유가(儒家), 유사(儒士)라고도 칭해지는 이들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다른 유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7∼8세에 서당에 들어가 <천자(千字)>,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사략(史略)>을 배우고 14∼15세엔 사학(四學)
또는 향교에서 사서(四書)·오경(五經)을 배운다.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면 성균관에 진학하여 더욱 공부한 뒤 대과에 응시하며 급제하면 관직에 임명된다.
벼슬에서 물러나면 집에서 유학을 익히고 예절을 지키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것이 유생의 일반적 일생의 과정이다.
또 유생은 유건이나 유관을 쓰고 유복을 입으며 가묘(家廟)엔 4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며, 관혼상제 때엔 주자가례를 철저히 지키며 유생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 등록된다.
그러나 만약 유생으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유림의 빈축을 사게 되면 유적(儒籍:청금록)에서 제적(除籍)된다.
과거와 벼슬을 중심으로 한 이런 유생의 생활과는 달리 과거 공부는 아예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수신(修身)에 전념하며 살다가 상소를 통하여 정치를 비판하고 간섭하는 유생들이 있다.
이러한 유생을 처사(處士) 또는 산림처사라고 부르는데 임금도 이런 산림처사들의 공론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조에서 17세기에 이런 산림처사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어 이른바 산림처사시대란 말이 나왔다.
1. 유건은 흑색의 베, 모시, 무명으로 만들었으며 위가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다.
2. 도포는 소매품이 넉넉하면서 부드러운 질감으로 만들어져 유연한 주름이 형성된다.
3. 도포의 소매에 형성된 공태는 간단한 일용품을 넣는 주머니 역할도 하였다.
도포, 창의, 중치막 혹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착용하였다.
유건은 갓처럼 양쪽에 끈을 달아서 턱밑에 매어 고정시켰다.
유건을 쓰거나 또는 복건 위에 유건이나 갓을 쓰기도 하였다.
▲ 조선시대 장옷을 입은 여자
조선시대의 여성은 일반적으로 엄격한 유교 전통을 따라 철저히 남성과 구분되는 생활을 하였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분명하여, 집의 구조 자체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어 가운데 중문이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문을 넘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부부간에 옷홰나 시렁도 구분하여 섞이지 않게 하였다.
여자는 문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길을 걸을 때도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다니게 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외출시에 여러 가지 복식품목을 사용하여 얼굴을 가렸는데 장옷은 그 가운데 서민층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이다.
양반 부녀자들은 치마와 유사한 쓰개치마를 사용하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양반 부녀자들까지도 쓰개치마 대신 장옷을 착용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장옷을 쓰고 외출하는 조선시대 후기 여인들의 모습은 신윤복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여승과 여인>에서는 자주색 깃을 단 녹색 장옷을 쓴 여인이 계집종과 함께 절을 찾아가는 중 삿갓을 쓴 비구니가 마중을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장옷의 양쪽 고름을 손으로 모아 쥐고 오므려 큰 머리를 감싸 얼굴과 상의를 가리고 있다. <유산행차>에서는 장옷을 뒤집어 쓴 채 말을 타고 꽃놀이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소년으로 보이는 말구종이 말을 인도하고 여인은 두 손으로 역시 장옷의 옷고름을 감싸 쥐고 있다.
<점괘>에서는 길거리 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여인이 장옷을 몇 번 접어 머리 위에 얹어 놓고, 치마를 걷어 올려 주머니를 열고 있는데, 주위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엽전을 꺼내는 여인의 차림과 옷매무새로 보아 서민으로 보이며 장옷을 간편히 머리 위로 올린 모습이 특이하다.
1. 장옷은 여름에는 얇고 가벼운 사, 겨울에는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광택이 나는 견으로 만들었다. 주로 겉감은 녹색 무명이나 명주로 만들고 안은 자주색을 사용하였다.
2. 장옷은 추운 겨울에 방한을 목적으로 솜을 두어 입기도 하였다.
3. 장옷의 수구에는 거들지를 달았고 동정 대신 넓은 흰 헝겊을 대어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는데 이는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
치마, 저고리를 입고 얼굴이 드러나 보이지 않게 장옷을 쓰고 혜를 신고 있다.
쪽찐머리는 이마 중심에서 가리마를 타 양쪽으로 곱게 빗어 뒤로 넘겨 한데 모아 검정댕기로 묶고 한 가닥으로 땋아 끝에 자주색 댕기를 드리고 쪽을 찐 후 비녀로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장옷의 앞은 여며지도록 맺는 단추를 2, 3개 달았고 이중고름을 양쪽에 달아 손으로 잡아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 조선시대 대장장이
대장간은 풀무(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대 역할을 하는 쇳덩이로 발로 밟아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를 차려놓고, 쇠를 달구며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을 ‘대장장이’라 하였으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쇠를 달구었다가 찬물에 넣는 것)로 쇠의 강도나 성능을 조절한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대 역할을 하는 쇳덩이), 정, 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대장장이가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주문을 받고 연장을 만들던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는데, 이들은 여러 부류의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망치로 두들겨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의 농기구나 문고리, 칼, 돌쩌귀, 편자(말발굽에 붙이는 쇠) 등 각종 생활도구를 만들던 대장장이는 농사철이 가까워지는 2∼3월이면 더욱 바빴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장이는 필수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대장장이가 착용하였던 복식은 특수한 작업 상황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사회적 위치와 신분에 따라 일반 서민 남자들이 착용하였던 복식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나라 고유복식으로 그 기본 구조가 되는 저고리, 바지를 착용하였는데, 상층사회에서 착용되던 사치스럽고 화려한 복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흰색의 문양 없는 면직물의 기본 복식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직물, 문양, 색 등에 제한을 두었던 여러 가지 복식금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양반의 수탈 대상이 되어 부의 축적은 물론, 최소한도의 미적 충족을 위한 그들만의 복식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 조선시대 등짐을 진 보부상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정책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상업의 발전을 억제하는 근본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생활의 필요에 따라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농민들은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수공업 제품이나 소금, 생선, 건어물 등 각종 물품을 상인을 통해 구입하였다.
보부상(褓負商)은 전통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였던 전문적 상인으로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상품을 보따리에 싸서 들고 다녔기 때문에 ‘봇짐장수’라 이르던 ‘보상’은 비교적 고가물품인 옷감, 화장도구, 금은보석, 기타 가죽제품 등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들고 다니거나 멜빵에 짊어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물건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녔기 때문에 ‘등짐장수’라 이르던 ‘부상’은 보상에 비해 비교적 조잡한 일용상품인 연초, 도끼, 목기, 자리, 짚신 등을 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또한 보부상은 엄격한 규율과 단결심이 강하였고, 평상시에는 행상인으로 활동하지만, 나라가 위급하거나 어려울 때에는 목숨을 걸고 관군을 도와 애국 애족심을 발휘하는 강력한 민간조직으로도 큰 역할을 해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부상은 일반적으로 흰색 혹은 두록색 면으로 된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패랭이를 썼으며, 패랭이의 상부 양쪽에 큼직한 목화송이를 달아 쓰기도 했다.
조선후기 풍속화에서도 보부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에 나타난 보부상은 등짐을 지고, 초립에 바지, 저고리, 행전을 착용하고 있다.
1. 저고리는 일반적으로 무명으로 제작되었고 보부상이 착용하던 저고리의 재질은 주로 면이었으며, 겨울에는 무명에 솜을 넣어 지어졌다.
2. 저고리의 색상은 흰색 또는 두록색 등이었고 노동으로 인해 소매를 접어서 사용하였다.
3. 행전의 소재로는 주로 광목, 옥양목, 무명이나 모시가 사용되었다.
▲ 조선시대 삿갓을 쓰고 소를 끌고 가는 평민 남자
조선시대 서민은 가족노동을 기반으로 농사일에 종사하였고, 소비물자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하였다.
당시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수공업제품이나 소금, 생선, 건어물 등 각종 물품들은 상인을 통해 구입하였는데, 지방의 장터는 상인과 일반민간의 상품거래라는 경제기능 외에 오락, 공연, 음주, 서신교환, 친지대면 등의 기능까지 겸했다.
장터는 이웃마을 사람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통신 매체였으며, 그에 따라 농사정보와 사회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공공 매스컴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장터에서 거래되는 물건의 운반도구로는 지게가 가장 일반적이었는데, 소가 있는 집이라면 운반한 물건을 소에 매고 갔다.
소는 논밭갈이와 운반수단으로 이용하였는데 가난한 농민이 소를 장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소로 농사를 짓고 가을에 빌린 값을 주거나, 지주집의 송아지를 길러 사용한 후 나중에 소를 팔고 그 값의 절반을 돌려주거나, 송아지를 어미 소로 만든 뒤 다시 송아지로 갚거나, 마을 사람 공동의 명의로 소를 사서 부리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서민의 생활상은 풍속화에 잘 나타나 있는데, 김홍도의 <평양감사환영도>에 그려진 장터의 풍경에서도 소나 말에 짐을 지운 서민, 등짐을 지고 가는 상인, 지게에 물을 실어 나르는 물장수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1. 삿갓은 대오리나 갈대를 엮어 만들었다.
2. 낮은 계층이 착용한 저고리, 바지의 기본은 흰색에 가까운 소색의 면직물로 만들어졌다.
3. 짚신은 짚 이외에는 삼, 칡, 닥 껍질로 만들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바지, 저고리를 입었으며, 행전을 차고 짚신을 신고 있다.
삿갓 안에는 미사리를 넣어 머리에 고정되도록 한다.
행전은 끈 두개를 달아서 정강이에 끼고 위쪽에 있는 끈으로 무릎 아래를 둘러매게 하였다.
▲ 조선시대 탕건을 쓰고 외출하는 평민 남자
서민복식의 기본이 되는 것은 저고리, 바지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민서복의 규모는 세종31년 정월에 내린바 있는 금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인, 공상천예는 직령, 액주름, 철릭을 통착한다.”,
“양천의 정죽의 수는 十五 이하, 평죽은 單七 이하로 하고 감투를 통착한다.”라고 하고 있어 직령, 액주름, 철릭이 서인복으로 지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죽과 평죽의 수로 보아 패랭이가 그 입모가 되었고, 여기의 감투는 탕건 비슷하되 턱이 없이 민듯하게 만든 것으로 당시의 감투는 죽감투였다고 생각되는 바이나 나중에는 챗불처럼 결은 말총, 가죽, 헝겊, 등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구승이상의 의복도 사라능단 사견으로 된 낭자호슬과 진사대, 영피화, 피초혜 또 대홍의를 이에서는 금하고 있는데 이러한 금제는 사치를 억제한다는 명목하에 역대에 자주 내린 바 있는데 이것을 통해 서민복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금제가 붙어 조선조 복식문화 발달을 저해하고 백의 민족으로 지칭될 만큼 의문양식 및 염색의도 입지 못하여 원시 그대로의 소야한 복식제도를 준수했던 것이며 그들은 양반의 수탈 대상이 되어 부의 축적은 물론 최소한도의 미적 충족을 위한 자기네들의 복식문화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서민이 처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와 대우는 상당히 낮았다. 따라서 어느 봉건국가에서든 복식은 그 자체가 계급성을 띠고 있어 이것이 바로 질서를 표상하는 의장이 되고 상하, 존비, 귀천의 이원적 구조에 따라 강제성을 갖게 되므로 이러한 여건 밑에서 복식다운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바지는 주로 삼국시대의 궁고 형태를 변형한 사폭을 대고 있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발목 부위를 잡아 매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에는 ‘다님’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근래에도 어린이용 바지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는 다님이 붙박이로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부터인가 따로 치게 되었고 때로는 행전을 치기도 했다. 저고리, 바지에 버선과 초리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적삼, 고이 등도 착용하였다. 그 위에 ‘직령’,’첩리’도 착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시장경제의 활발로 양반보다 부유한 상인이 생겨났다. 부를 가진 하층 계층을 통해 상층의 복식이 하층으로 점차 확산되고 남자의 저고리도 여복과 함께 간소화 경향을 보이나 국말에 가서야 어느 정도 다시 길어지고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탕건을 쓰고 외출하는 서민남의 경우 빈곤한 서민의 단순한 차림과 달리 배자를 입고 장식적인 안경집과 쌈지를 착용하였는데 그 부유함을 알 수 있다.
1. 탕건은 대나무, 말총 등을 엮어서 만들고 옻칠하여 말려서 썼기 때문에 반투명의 건으로 안에 있는 상투가 어렴풋이 보인다.
2. 쌈지는 기름종이, 가죽헝겊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서 질기고 잘 헤지지 않았다.
3. 안경집의 재료로는 대모, 상어가죽, 지승, 나무, 천, 가죽,어피, 종이 등으로 만들며 색헝겊으로 싸서 수놓아 만든다.
바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망건을 하고 탕건을 썼으며 허리에 안경집과 쌈지를 차고 짚신을 신고 있다.
머리를 위쪽으로 끌어 올려 틀어 상투를 맨 후 그 위에 동곳을 꽂고 망건을 쓴다.
탕건은 망건을 쓴 위에 썼으며 망건의 덮개로 쓰거나 외출시 갓 아래에 받쳐 쓰기도 하였다.
▲ 조선시대 생산 직물 종류
⁕ 안동포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의복 재료로 사용하여 온 것은 대마(大麻), 저마(苧麻)이다.?대마는 기후에 잘 적응하는 식물로 세계 각처에서 재배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재배되어 왔다.
함경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마포는 북포(北布), 강원도의 마포는 강포(江布), 경상도 지역의 마포는 영포(嶺布), 특히 안동지역에서 생산되는 마포는 안동포(安東布)라 하였다.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서는 북포의 극세한 것은 ‘한 필이 바리 안에 든다’하여 발내포(鉢內布)라고 하고 매미날개와 같다 하였다. 영포와 안동포는 여름옷감으로 쓰이고, 강포는 거칠고 값이 싸서 농부의 하복감 또는 상복에 쓰인다고 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안동포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삼베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붉은 빛이나 누른 빛이 나며, 바탕이 가늘고 고운 고급 옷감이다. 고의(袴衣), 적삼(赤衫) 등의 속옷에 쓰였으며, 남자들의 여름용 옷감이나 상복(喪服)으로 사용되었다.
⁕ 삼베
대마포는 고려시대에 ‘베’라 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반적으로 ‘베’ 또는 ‘삼베’라고 부른다. 베는 여름철 일상 의복감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직물이었다.
남자의 고의, 적삼, 조끼의 소재가 되었고, 여름철 이불, 베갯잇으로 사용되었으며, 옷을 마르고 베어낸 조각으로는 조각보를 만들었다.
베는 일상생활에서 의복감 외에 화폐로도 사용되었고, 고운 것은 교역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수의와 상복으로 사용되는 양도 상당한데, 우리 민족에게 베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산 사람, 죽은 사람 모두에게 요긴하게 쓰이는 직물이었다. 예로부터 베는 여인의 손에서 두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첫 번째는 삼대에서 삼껍질을 벗기고 째고 이어 베틀에 걸어 짜는 여인의 공으로 구분 지어져 태어나 상품, 중품, 하품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여인들이 빨고 풀 먹이고 만지고 다리는 정성으로 경쾌한 질감의 베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는 옷감의 특성과 사람의 성품이 어우러져 다시 태어나는 옷감이다.
⁕ 모시
모시는 열대, 아열대의 고온 다습한 일기에 해가 잘 들고 배수가 잘 되는 토질에서 풍해가 없어야 하는 생육 조건이 까다로운 섬유 식물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는 모시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들이 다 입는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나라 안의 많은 사람이 모시옷을 입었는데, 고운 모시는 상류사회의 옷감으로 쓰인 것이 나타난다. ” 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만기요람(萬機要覽)>, <궁중발기>, <연행(燕行)일기(日記)> 등에서 백저포, 9승 백저포, 12승 백저포, 7승, 8승의 백저포, 극상세저포, 황세저포, 아청저포 등 모시에 대한 무수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모시는 그 섬세함과 색채의 특성으로 인하여 흔히 매미날개 같고 눈과 같이 희다고 비유되기도 하였다.
모시의 손질은 베와 같은데 베보다 더 정성을 들여야만 모시의 특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모시를 빨아 풀먹여 손질할 때는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모시 올이 치게 되므로, 반드시 한손에 가는 바늘을 들고 올을 옆으로, 또 아래 위로 쓸어 내려 올을 바르게 앉히며 만져야 한다.
따라서 모시는 다루는 사람의 정성으로 그 품위를 더해 완성되는 직물이라 할 수 있다.
⁕ 무명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면직물은 무명, 광목, 옥양목이다. 옛 우리 의복 규범에는 “검박(儉朴)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검박이란 지나치지 않고 합당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검박한 옷감으로서는 면직물이 으뜸이다.
우리나라의 면직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려조 문익점 선생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한원>의 고구려 기사에 ‘조백첩포(造白疊布)’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백첩포는 면직물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문익점 선생의 면종자 반입 이전에 면직물 제직이 가능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따르면, 정천익이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 뒤 호승(胡僧) 홍원(弘願)에게 직조 기술을 배워 가비(家婢)에게 한 필의 면직물을 짜게 하여 면직물 제직을 시작한 뒤 10년이 채 못되어 이 직물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공양왕 3년(1391)에는 백성에게 값비싼 비단 대신 무명을 쓰라는 영이 내려졌다고 한다.
또한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태종 1년(1401) 에는 백성 상하가 다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무명은 짧은 섬유를 모아 이어 실을 자아 베틀에서 짜낸 것이므로, 그 표면이 천태로 들고 나서 자동 직기로 짜낸 광목, 옥양목에 비하여 변화가 풍부하다.
게다가 섬유의 천성이 온화하고 기교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 옷감에 아주 적합하였으며, 이불, 요, 베갯잇으로 사용하였을 때 광목, 옥앙목 보다 온화하고 푸근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무명은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사용될 수 있는 의복 재료로 수요가 많았다.
무명은 세탁 시 양잿물을 넣어 삶았는데, 삶아서 빨아 말린 것은 풀을 하여 손으로 만져 그냥 다리거나 다듬어서 쓰기도 하였다. 무명 역시 여인들의 만지는 솜씨에 따라 태어나는 모습이 달랐던 옷감이다.
⁕ 아청무명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면직물은 무명, 광목, 옥양목이다.
옛 우리 의복 규범에는 “검박(儉朴)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검박이란 지나치지 않고 합당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검박한 옷감으로서는 면직물이 으뜸이다.
우리나라의 면직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려조 문익점 선생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한원>의 고구려 기사에 ‘조백첩포(造白疊布)’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백첩포는 면직물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문익점 선생의 면종자 반입 이전에 면직물 제직이 가능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따르면, 정천익이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 뒤 호승(胡僧) 홍원(弘願)에게 직조 기술을 배워 가비(家婢)에게 한 필의 면직물을 짜게 하여 면직물 제직을 시작한 뒤 10년이 채 못되어 이 직물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공양왕 3년(1391)에는 백성에게 값비싼 비단 대신 무명을 쓰라는 영이 내려졌다고 한다.
또한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태종 1년(1401) 에는 백성 상하가 다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무명은 짧은 섬유를 모아 이어 실을 자아 베틀에서 짜낸 것이므로, 그 표면이 천태로 들고 나서 자동 직기로 짜낸 광목, 옥양목에 비하여 변화가 풍부하다. 게다가 섬유의 천성이 온화하고 기교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 옷감에 아주 적합하였으며, 이불, 요, 베갯잇으로 사용하였을 때 광목, 옥앙목 보다 온화하고 푸근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무명은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사용될 수 있는 의복 재료로 수요가 많았다. 무명은 세탁 시 양잿물을 넣어 삶았는데, 삶아서 빨아 말린 것은 풀을 하여 손으로 만져 그냥 다리거나 다듬어서 쓰기도 하였다. 무명 역시 여인들의 만지는 솜씨에 따라 태어나는 모습이 달랐던 옷감이다.
한편 무명, 광목, 옥양목은 소한 것, 흰 것 그대로도 사용하였으나 염색을 하여서도 많이 사용하였다. 강릉 지역에서는 무명에 짙은 남염을 한 치마를 많이 지어 입어 오늘날까지 많은 유품이 전한다.
⁕ 명주
우리나라 견직물과 그 제직 사용에 대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그 밖의 많은 국내 문헌에 전하고 있다.
문헌 기록과 유품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사용 제직한 견직물을 조사하여 본 결과 주(紬), 사(紗), 라(羅), 능(陵), 금(錦), 단(緞), 시, 초 등과 각종 천연 염료로 침염된 직물, 힐염된 문양직물, 그림이 그려진 회(繪) 등이 일반적인 종류였으며, 백(帛), 견(絹), 수(繡), 금니(金泥) 등 견직물과 관계된 종류도 다양하였다.
이들 견직물 가운데 오늘까지 제직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 사, 라, 능, 단, 금 등이다. 이들 가운데 주만이 ‘명주’로 명명되어 수직기로 극소량이 제직되고 있고, 나머지는 현대화된 직기로 대량 생산될 뿐 전통적인 직기로 제직되는 것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거의 모든 주는 견사의 단순한 평조직 직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주의 종류는 대단히 많아 신라시대에는 공물품으로 조하(朝霞)주, 어아(魚牙)주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면주(綿紬)가 공물품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황주, 자주, 조주 등이 의복과 생활 용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본 직물은 충북대박물관에 소장된 갈색 명주 창의의 부분이다.
⁕ 화문단 ( 花紋段 )
단(段)은 라, 사, 평, 능조직의 발상 이후에 가장 늦게 발상된 주자조직(朱子組織)으로 제직된 견직물의 총칭이다.
주자조직은 원조직중 가장 늦게 만들어진 조직으로 주자조직이 어디에서 언제쯤 기원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출토되는 유품으로 8~9세기에는 주자조직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단은 무늬가 없는 공단(貢緞, 素段)과 단층의 주자문직물인 문단(紋段), 이색단, 중조직으로 짜여진 직금단(織金段), 금단(金段), 화단(花段) 등으로 구분된다. 전통 단직물중 가장 많이 사용된 직물은 문단이다.
문단의 실유품은 고려시대 후기의 것이 안동태사묘에 두 종류가 남아있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으며, 길이가 상당히 긴옷감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문능의 제직이 감소되고 문단의 사용이 많아져 조선시대 문단의 유물은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하게 남아있다.
문단은 다채롭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은은하게 표현되는 문양이 깊이가 있고 단아하여 현재에도 겨울철 한복감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문단은 경사 한종류와 위사 한 종류로 짜며 경주자직과 위주자직을 혼합하여 무늬를 나타낸 단층의 문직물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도류불수단, 다홍수복단, 송화색금수복자별문단, 초로화문단, 아청접문단, 유록운문단 등과 같이 단색으로 무늬의 이름이 기록된 단은 모두 단색문단에 속한다. 본 직물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당의의 겉감인 단의 부분으로 녹색 화문(모란, 국화, 매화)이 남아있다.
⁕ 초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아달라왕 4년(157) 연오랑과 세오녀의 기록 가운데 ‘세초’가 나온다.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후 신라에 일, 월의 빛이 없어져서 왕비가 짠 초를 신라에 보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옛 것 같이 되어 이것을 어고에 소장하여 국보로 삼았으며, 이 어고를 ‘유비고’라 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인 견직물의 귀중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직물 박물관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도 초, 백초, 홍초의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국혼정례(國婚定例)>에 생초, 숙초, 백, 자, 대홍, 자적, 청, 남, 초록색의 초가 나온다. 인조 16년(1638)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는 초장이 있었고, 직초 직기(織機)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임원십육지>에서 숙초는 상등 견사를 정련, 염색하여 경위사를 밀하게 제직한 것이라고 하였다. 초에 대한 옛기록을 종합하면 견직물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된 것 같기도 하다. 본 직물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조복 중 적초의의 부분이다.
⁕ 진주사 ( 眞珠紗 )
우리나라 전통 직물 가운데 가장 종류가 많은 것이 사(紗)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에 사(紗)는 사두품의 복두에 허용되었으며, 진골이 타는 우교차(牛轎車)의 앞뒤에 치는 휘장에 소문능(小文綾), 시 등과 함께 쓰였다.
고려시대 사의 종류에는 송나라에 보낸 사(紗), 복두사, 모자(帽子)사가 있으며,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왕의 상복에 쓰는 관모는 오사(烏紗)로 하고 백관의 공복 착용시에도 모두 사로 만든 복두를 쓴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라(羅)의 사용은 감소하고 사의 사용이 증가되는데, 조선시대 문헌 중에 나타나는 사는 직물의 품종 중 가장 많아 조선시대 사직물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사의 종류로 현재까지 제직되고 있는 것은 숙고사, 생고사, 은조사, 국사, 순인, 갑사, 진주사, 관사 정도이다. 이러한 사의 종류 대부분은 경사 2올이 꼬여서 짜여진 직물로 국사보다 더 투명하여 초여름 옷감에 적당하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옥색진주사, 백진주사 정도로 기록되어 있고 무늬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본 직물은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의 직물로 현재 고대직물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사조직으로 연속 육각형 무늬를 만들어 직물 전체에 배열하였으며, 그 위에 드문드문 소형의 문자, 초화, 나비문 등을 놓았다.
육각형의 가운데는 부직으로 작은 능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사직물은 무늬가 구슬을 늘어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진주사’라고 한다. 한복을 지어 놓으면, 점잖고 기품이 묻어나는 직물이다.
⁕ 공단 ( 貢緞 )
단(段)은 주자 조직으로 제직된 직물로서 직물조직 가운데 가장 늦게 태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직물 학자들은 주자조직의 직물이 12세기경에 제직되었고, 주자 조직의 기원지가 서역 또는 중국일 것이라 한다.
단은 주자조직으로 제직되는 것이므로 평직, 능직으로 제직된 직물보다 광택이 좋아 화려하다. 그리하여 단이 출현하게 됨에 따라 평직, 능직으로 제작된 금, 능의 제직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단은 그 제직 기술이 다양화되어 많은 종류가 제직되었다. 무문단은 무늬없는 경주자 조직의 단직물을 뜻한다. 무늬없이 제작된 단은 소단(素段), 공단(貢緞)이라고도 한다. 공단은 직물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풍부하다.
⁕ 자미사
우리나라 전통 직물 가운데 가장 종류가 많은 것이 사(紗)이다.
조선시대까지 각종 문헌과 <궁중발기>에 기록된 사는 무수히 많으나 오늘날까지 제직되어 사용하고 있는 것은 관사, 국사, 숙고사, 진주사, 갑사, 순인, 생고사, 은조사 정도이다.
사에 대한 직물 조직학적 용어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이 각기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경사가 좌우로 회전하여 꼬이는 동사적 표현을 ‘익경된다’하고, 중국에서는 ‘교경(絞經)’이라고 한다.
사는 국내외 여러 자서(字書)에서 ‘가벼운 비단’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얇은 직물류이므로 일반적으로 봄가을과 여름의 의복감으로 사용되는 것인데, 고문헌에는 겨울에도 의복감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한 의대와 직물 목록을 적은 <궁중발기>에는 왕과 왕비의 정초 의대에 여러 가지 색의 갑사가 사용된 기록이 제법 많이 있다. 자미사는 전체를 평직으로 짜고 무늬 경계 부분에서만 부직과 2경 꼬임으로 짜서 무늬 부분을 강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많이 사용된 사조직이며, 특히 작은 문양을 직물 전체에 드문드문 시문한 것을 ‘자미사’라고 한다. 본 직물은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왕의 자미사 솜바지 부분이다.
역사 속 의복,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입었는가?
Q.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의복의 색상이나 디자인이 달랐나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제 사회에서 의복은 신분의 상하구분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항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의복을 흉내 내고자 했고, 이를 막고자 법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834년 신라 흥덕왕의 복식금제입니다. 여기에는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의복의 재료, 색상, 장식품 등이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복식금제가 자주 내려졌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리의 공식 집무복인 관복의 색상과 재질, 흉배 등이 품계에 따라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1품에서 정3품까지는 붉은색 비단을, 종3품에서 6품까지는 푸른색, 7품에서 9품까지는 초록색을 사용하여 관복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일반복식의 경우에도 양반의 신분이 아닌 사람은 갓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포의 종류도 달라 도포는 양반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Q.조선시대 왕실 의복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제작되었나요?
왕실 의복을 만드는 곳으로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에 속한 상의원이 있었습니다. 상의원은 왕실 의복을 만드는 일과 함께 장신구와 보물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태조 때 만들어졌고 이후 고종 32년(1895)에 상의사(尙衣司)로, 광무 9년(1905)에 상방사(尙方司)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상의원에서는 직물제직, 염색, 의복제작, 가죽과 모피, 장신구, 금은 세공 등에 관련된 많은 장인이 왕실의 의복과 의대를 만들고 관리하였습니다. 그 수가 6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왕실 의복은 모두 이와 같은 전문 장인들의 집단인 상의원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지금은 침선장, 염색장, 옥석장, 화혜장 등의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흉배는 어떻게 달랐나요?
흉배는 명칭처럼 왕, 왕세자, 문무백관이 착용하는 관복의 가슴과 등을 장식하는 일종의 표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복에 직접 수를 놓거나 직조를 통하여 장식하고 나중에는 따로 만들어 부착도 하였습니다. 특히 왕과 왕세자의 용포(龍袍)에는 용문(龍文)을 수놓은 원형의 흉배를 가슴과 등, 양쪽 어깨에 장식하였는데 이를 ‘보(補)’라고 합니다. 관리의 관복에는 네모난 모양의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습니다.
흉배는 그 문양에 따라 이를 착용한 사람의 상하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식물이었습니다. 왕과 왕세자의 보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이 수놓아져 있는데 용의 발톱 수에 따라 오조룡(五爪龍)·사조룡(四爪龍)·삼조룡(三爪龍)으로 구별하여, 왕과 왕비는 오조룡보,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보, 왕세손은 삼조룡보를 사용하였습니다. 단종 2년(1454)의 기록에 따르면 대군은 기린(麒麟),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사자를 닮은 모습에 사람의 말을 하는 전설 속 동물), 대사헌은 해치(獬豸),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鷳: 흰 꿩),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熊羆)를 달도록 정했습니다. 영조 10년(1734)에 와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다가 고종 8년(1871)에는 문관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중에서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Q.예전 사람들은 어떤 속옷을 입었나요?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오히려 더 다양한 속옷이 존재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위한 방한용 속옷, 더운 여름을 고려한 속옷, 의복의 실루엣을 강조하기 위한 속옷 등 기능과 목적에 맞게 여러가지 속옷을 갖춰 입었습니다. 특히 여자의 속옷이 발달하였습니다. 남녀 모두 저고리 안에 속적삼을 착용하였고, 남자의 경우 바지 안에 잠방이라는 속바지를 입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제일 안쪽에 현대의 속옷과 비슷한 다리속곳을 입고, 그 위에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여러 겹의 바지와 서양의 페티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속치마를 착용했습니다. 먼저 바지통이굉장히 넓은 속속곳을 입고 그 위에 남자의 바지와 비슷한 형태의 고쟁이라고도 불리는 속바지를 입습니다. 고쟁이는 가랑이 아랫부분이 트여 있어서 용변을 보는 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허리부분에 여러 개의 큰 구멍이 있는 살창고쟁이를 입어 조금이나마 더위를 잊고자 했습니다. 고쟁이 위에 속속곳과 같은 형태지만 바지통이 더 넓은 단속곳을 입습니다. 단속곳은 바지통이 치마만큼이나 넓어 속치마 대용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예복을 착용하는 경우 치마를 더욱더 부풀리기 위하여 여러 겹의 치마가 달린 무지기 치마를 입고 그 위에 밑단을 한지로 만든 백비나 대나무살을 부착한 대슘치마를 입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이처럼 많은 속옷을 여러 겹 입어 맵시를 만들었습니다.
Q.삼국시대나 고려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의복 고증은 어떻게 하나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사극에서 등장인물이 입고 나오는 복식은 그 시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시각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극에서 복식의 고증은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복식 고증을 위한 사료가 많지 않아 복식 유물, 도자기와 공예 작품 등에 표현되어 있는 인물의 형태, 그림, 문헌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고증합니다. 이렇게 형태고증이 이루어졌어도 이를 실제로 제작하는 데는 직물의 복원 등 또 다른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고증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에서 제작되는 사극의 경우 완벽히 표현해내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퓨전사극의 경우 주제나 분위기에 따라 연출가와 의상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글‧조우현(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논문]의복명칭의 분화를 통해 본 조선시대 복식문화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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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고문서집성(12). -장서각 편 III-, p. 65. /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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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정약용. 兒學編. 규장각 소장. p. 29
82. 國史編纂委員會 (1961). 承政院日記(77). pp. 97-98. / ‘籃扇緞狹袖衣, 軟籃宮?狹袖周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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