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대륙 | [#걸어서세계속으로Full📺] 4박 5일 열차타고 떠나는 캐나다 대륙횡단여행(Narr.배우 염정아님✨) Trip To Canada (Kbs_20161022)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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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회 특집으로 아시아, 남미, 북미를 만나는
대륙열차를 통해 장거리 열차 여행의 기쁨을 전달한다.
마지막 3편에서는
매주 토요일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본방 사수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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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 나무위키:대문

캐나다(Canada)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연방국이다. 밴쿠버 섬에서 오대호에 이르는 북위 49도선 이북을 통치하고 있는 나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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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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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소개 | Destination Canada – 미디어 센터

캐나다는 미국 위에 위치하여 북미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맞닿아 있습니다. 남쪽에는 미국이, 북쪽에는 북극해가 자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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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edia.canada.travel

Date Published: 1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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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대륙횡단 13박 14일 (밴쿠버 출발) : 오케이투어 (모바일)

캐나다 살면서 한 번쯤은 꿈꿔봤을 대륙횡단 여행! 베테랑 기사/가이드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지! 여행 지역. 밴쿠버, 벨마운트, 밴프, 캘거리, 에드먼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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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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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캐나다 대륙

  • Author: KBS여행 걸어서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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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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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영어: Canada, 프랑스어: Canada 카나다[*] )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연방 국가이다.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태평양, 북쪽으로는 북극해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약 998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며, 이는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크고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크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이 국경선이 무려 8,891km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간 국경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이며, 그 외에도 토론토, 몬트리얼, 밴쿠버가 가장 거대한 도시들이다.

캐나다는 수천년간 캐나다 원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본격적인 캐나다 탐험을 시작하였고 17세기 중반 캐나다의 대서양 해안에 정착하였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양도하고 캐나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1867년, 영국령 캐나다가 연합하여 캐나다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영토의 증가가 가속화되었고, 지리적 영향과 이민국가로의 특성을 띄어 영국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대영제국 내 자치령이 되어 행정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1947년부터 캐나다 자치령에 거주하고 있는 대영제국 신민들은 캐나다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법권은 1949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캐나다 대법원으로 옮겨짐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정식 국명을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캐나다는 정치적으로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뤄진 연방 국가이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다. 국가원수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엘리자베스 2세는 16개국의 국왕이다)이며, 캐나다 총독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리인이다.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는 G7, G8, G20, 북대서양 조약 기구, OECD, WTO, 영국 연방, 프랑코포니, 미주 기구, APEC, 개발 원조 위원회, UN의 회원국이다. 한편, 2012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캐나다가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2위로 선정되었다.

캐나다는 세계 최고 선진국들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도 18번째로 높은 1인당 명목 GDP를 가지고 있으며[1] 인간개발지수에서는 세계에서 16번째로 높다.[2] 경제규모는 세계에서 10번째로 거대하며, 주로 풍부한 자원들과 국제무역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출처 필요] 캐나다는 UN, NATO, G7, G20, 커먼웰스,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 프랑코포니,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참여국이기도 하다.

이름 유래 [ 편집 ]

캐나다(Canada)라는 명칭은 이로쿼이 부족이 사용하는 말인 이로쿼이-휴런어로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에서 유래되었다.[3] 1535년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오늘날 퀘벡 지역인 스타다코나 마을에서 도착하였다.[4] 원주민 추장 돈나코나와 함께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탐험에 나서며 지명을 물어보았는데,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어 말뜻을 이해못했던 추장은 그들의 말인 이로쿼이-휴런어로 ‘마을’이라는 뜻에 카나타(Kanata)라고 답하였다[5]. 그러나 자크 카르티에는 이를 지명으로 알아들었고 오늘날의 캐나다(Canada)라는 나라 이름으로 쓰여지게 되었다.[6]

1965년 당시 캐나다의 국기

국기 [ 편집 ]

캐나다의 국기는 붉은색과 백색 바탕에 붉은 단풍잎을 그려놓은 모양으로, 그 독특한 모습 때문에 ‘메이플리프 플래그(Maple Leaf Flag)’라고도 부르며 프랑스어로는 ‘l’Unifolié’라고도 부른다. 단풍은 건국 초기부터 캐나다를 상징해온 것들 중 하나로, 캐나다의 축복받은 환경과 자연을 상징한다. 붉은색은 조지 5세가 영국계 캐나다인들을 상징하기 위하여 유니언 잭에서 선택한 색깔이며, 하얀색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상징하기 위하여 프랑스 왕실의 문양의 색에서 따온 것이다.

캐나다의 옛 국기는 ‘상선기(Canadian Red Ensign)’이라고도 불리는데, 건국 초기에 유니언 잭이 포함된 해상 국기들 가운데에서 상선단의 국기를 골라 임시로나마 상징기로 사용한 것이다. 캐나다는 세계 대전 시기에도 이를 국기 대용으로 사용하였으며, 마침내 매켄지 킹 총리가 1945년에 정식 국기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점차 캐나다가 영국에서부터 독립해나가고, 프랑스계 국민들의 국기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캐나다만의 특색을 갖춘 국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마침내 1963년 취임한 레스터 B. 피어슨 총리가 국민 대상 공모전을 열게 되었다. 이후 이 공모전에서 한 역사학자의 공모안이 뽑혔고, 1964년 10월 22일에 채택, 1965년 1월 28일에 캐나다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명을 받아 캐나다의 국기로 선포되었다.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캐나다의 역사 입니다.

유럽인 도착 이전 [ 편집 ]

인류는 최소 약 14,000여 년 전부터 시베리아에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 현재 북아메리카와 캐나다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시기에 캐나다 지방에 정착한 고인디언(Paleo-Indian)들이 모여 살던 블루피시 동굴과 올드크로우 평원 등이 있다. 한편 빙하기가 끝나고 아프로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서로 이어주던 육로가 물에 잠기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인류는 고유한 문화를 꽃피워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영구 정착지들을 짓는 경우도 있었고,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었으며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하며 부락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유럽인 식민개척자들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상당수가 멸족하였고, 현재는 대부분을 고고학적 연구로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캐나다에 도착하였을 때에, 캐나다에 모여 살던 토착 민족들의 수는 약 20만 명에서 2백만 명 사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개척 이후 토착민족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이전의 20% 수준으로 추락하였고, 대부분의 부락들이 사라졌다. 이들은 주로 유럽에서 옮겨온 인플루엔자,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들이나, 혹은 식민지 개척자들과의 무력 충돌, 그리고 백인 주도의 식민지 정부의 탄압 등으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추정된다.

다만 유럽인들과 토착민들 사이의 첫 만남이 항상 폭력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누이트족과의 첫 만남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편이었다.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혼혈인 메티스(Métis)들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게 협조하는 데에 일조하였고, 북아메리카 모피 무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 도시들을 세우는 데에도 원주민들이 도움을 주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다만 이후 유럽인들이 확고하게 캐나다 지역에 뿌리를 박고 세력을 어느 정도 구축해나간 이후에는, 토착 민족들은 강제적인 통합 정책으로 인하여 조상 대대로 살던 토지를 잃고 백인 사회에 흡수되어야만 했으며, 거부할 시에는 외지로 쫒겨나거나 때로는 사망하기도 하였다.

식민 개척 [ 편집 ]

캐나다 해안을 처음으로 탐험한 유럽인은 바이킹 탐험가인 레이프 에릭슨이라고 추정된다.[7] 대략 기원후 1000년 즈음, 노르만족은 캐나다 지역을 탐험하고 소규모의 캠프를 차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이후 1497년까지는 그 어떠한 유럽인들도 캐나다를 탐험한 적이 없었는데, 1497년에 이탈리아 출신 잉글랜드 탐험가 존 캐벗(John Cabot)이 캐나다 동부 해안을 탐험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소유로 선포하였다.[8][9] 이 지역은 뉴펀들랜드라고 명명되었다. 1534년에는 프랑스의 탐험가인 자크 카르티에가 캐나다의 가스페 반도에 다다랐고, 그 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고 적힌 십자가를 꽃고 프랑스령을 선포하였다.[10][11] 16세기 초에 유럽인들이 포경업, 그리고 생선잡이를 위하여 대서양 연안 곳곳에 기지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본격적인 유럽인들의 교류가 행해졌다.

1583년에 영국의 험프리 길버트 경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을 받아 임시 식민지인 세인트존을 세웠다.[12] 1600년에는 프랑스인들이 임시 무역거래소로 타두삭을 세웠고, 이후 프랑스인 탐험가들이 연이어 도착하며 1605년에는 포트 로얄을, 1608년에는 퀘벡을 세웠다.[13] 프랑스는 캐나다 지역에 상당한 관심을 쏟으며 프랑스인들을 지속적으로 북미 지역으로 보냈고, 이때 이들이 차지한 캐나다 동부 지역을 ‘아카디아(Arcadia)’라고 이름붙였다. 유럽인 개척자들은 이러한 식민도시들을 중심으로 점차 외곽으로 뻗어나갔고, 선교사들은 오대호와 미시시피 유역으로 포교를 나갔으며 모피 사냥꾼들도 비버와 같은 모피를 찾아 활발히 개척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17세기 중반에는 북미 모피 교역로를 두고 비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은 1610년대부터 뉴펀들랜드에 추가적인 거주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미국이 있는 자리에 13개의 식민지들을 연달아 세웠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전세계의 식민지 주도권을 놓고 결국 7년 전쟁이 발발,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결국 영국이 캐나다 유역의 식민지를 이끌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노바 스코티아 지역은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령으로 귀속되었으며 1763년 즈음에 이르자, 캐나다 유역 거의 대부분이 영국의 통치 하에 놓였다.

영국령 캐나다 [ 편집 ]

1763년 왕실 칙령으로 인하여 뉴프랑스 지역에 퀘벡 주가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세인트존 섬은 1769년에 독립적인 식민지 구역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아직도 프랑스인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기에 영국 식민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던 퀘벡 주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1774년 퀘벡 법을 제정하여 퀘벡 주의 영토를 오대호부터 오하이오 계곡까지 넓혔다. 또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남쪽에 있던 13개 식민지들과는 차원이 다른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해주었다. 영국 본국은 퀘벡 주에 프랑스어의 사용, 가톨릭의 종교의 자유와 가톨릭 신자의 공직 선출을 허용하고, 프랑스식 대륙법 문화와 프랑스 민법의 적용을 인정하였으며,[14][15][16][17] 이 덕분에 퀘벡의 분리독립 운동은 이전보다 훨씬 가라앉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남쪽에 있던 13개의 식민지들에게는 불공평해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격분한 13개 식민지들의 대표들은 독립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 혁명이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영국 군대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이후,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신생 미합중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영국으로부터 오대호 남쪽의 영토와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후 미국에 있던 왕당파, 그리고 영국 충성파 인사들은 대다수가 미국을 떠나 캐나다의 대서양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의 갑작스런 유입은 캐나다의 인구 구성까지 바꿔놓으며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프랑스권이 주류였던 퀘벡 지역에 대대적으로 몰려오자, 영국 정부에서는 이들과 프랑스계 주민들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1791년 퀘벡 법을 제정하여 세인트로렌스강 하류 지역을 프랑스어권인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로, 상류 지역을 영어권인 어퍼 캐나다(Upper Canada)로 나누어 각자 의회를 설치하고 자치하도록 만들었다.

1815년에 독립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고 다시 미대륙에 평화가 찾아오자, 더 많은 영국인들이 캐나다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1815년과 1850년 사이에 약 96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대서양을 건너왔으며, 이들 중에서는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온 난민들과 잉글랜드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온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자, 당연히 위생상태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고 전염병이 빈번하여 1891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온 유럽인들의 25%에서 33% 정도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출처 필요]

캐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질수록, 캐나다인들은 자치적인 통합 정부를 갖기를 원했고 결국 1837년에는 영국을 상대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이를 무마하고 프랑스계 백인들을 영국계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캐나다 자치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한다. 1840년 연합법의 통과로 인하여 1849년까지 캐나다 전역이 하나의 정부의 통치를 받게 하도록 하는 구상이 영국 의회를 통과했고, 영국은 미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어 캐묵은 미국과의 국경 분쟁을 끝냈으며 북위 49도 선을 국경으로 삼아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이후에도 영국은 밴쿠버섬과 브리티시컬럼비아를 개척, 식민지로 삼았다. 1867년에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면서 캐나다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해버리려 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간의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팽창 [ 편집 ]

1867년 이후로 캐나다의 행정 구역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1867년 7월 1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British North America Acts)을 통하여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티아, 뉴브런스윅, 이 4개의 주가 합쳐져 공식적으로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설립되었다. 각 주는 사법부를 선출하였고 교육과 보건 등에 자치권을 행사했다. 신생 캐나다 정부는 설립 직후 곧바로 루퍼츠랜드를 북서부의 영토로 합쳐 북서부 영토를 설립하였으며, 1870년 7월에 마니토바 주를 새롭게 만들었다. 1866년에 합쳐져 있던 브리티시컬럼비아와 밴쿠버 섬은 1871년에 캐나다 자치령에 포함되었고,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1873년에 캐나다에 가입했다. 1898년에는 금광을 찾아 북서부 지역으로 수많은 백인 광부들이 골드러시를 떠났고, 이에 북서부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유콘 준주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1871년과 1896년, 캐나다 인구의 4분의 1이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남쪽으로 이민을 갔다.

캐나다 정부는 낙후된 서부 지방을 개발하고 유럽인 이주를 장려하기 위하여 3개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본격화했다. 당시 철도 건설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이들은 중국에서 온 1만 5천여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을 향한 차별은 분리정책과 임금차별 등 이들의 이주 초기부터 철도 완공 후 인두세 부과(Chinese head tax in Canada) 등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된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정부에 따르면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만 투입된 9000명의 인력 중 6500명이 중국 이주노동자들이었는데, 백인 노동자들이 하루 1.5달러에서 2.5달러의 임금을 받으며 식사와 장비를 제공 받을 때 이들은 하루 1달러를 받으며 식사와 장비를 본인들이 사야 했고 폭파와 같은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만 수백 명의 중국 이주노동자들이 건설 노동 중 사고, 추운 겨울,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18] 2006년 연방정부는 차별적 인두세 정책에 대해 사과했다.[19]

캐나다 정부는 또한 개척자들의 토지 획득을 장려했고 경찰 조직을 신설하여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때 수많은 백인들이 서부 지역으로 건너갔고, 이 때문에 많은 토착 민족들이 거주지를 잃고 강제로 내쫒기거나 ‘보호구역’으로 끌려갔다. 또한 백인 사냥꾼들의 무분별한 사냥으로 한때 미대륙 전역에 있던 아메리카 들소가 멸종당했으며, 이들의 빈자리를 유럽식 소 농장과 밀 농장이 채웠다. 한편 원주민들은 유럽발 전염병, 토지 상실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캐나다 정부는 이들이 보호구역으로 옮겨가는 조건으로 인도적 지원을 했다. 이 시기 캐나다 정부는 ‘인디안 법’을 제정하여 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정부 주도 교육을 강화하여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 편집 ]

신생 캐나다 정부가 설립되었다고는 했어도,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법에 따라 영국은 여전히 캐나다의 외교권을 쥐고 있었다. 이 때문에 캐나다는 자동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수 밖에 없었다. 캐나다의 자원병들은 곧바로 서부 전선으로 투입되었으며, 비미 리지(Vimi Ridge) 전투 등 여러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략 625,000여 명의 군인들이 유럽으로 파병되었으며, 이들 중 6만 명이 전사하였고 172,000 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캐나다인들이 유럽의 전쟁에서 전사하며 캐나다 내에서 회의론이 커지던 중, 친영파 내각이 병사 부족을 근거로 징병령을 추진하자 국민들은 특히 프랑스어권 퀘벡을 중심으로 이에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프랑스계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영국계에 비하여 차별을 받고 있었다 느꼈고, 영국에 대한 애국심도 약했기에 참전을 꺼릴 수 밖에 없던 것이다. 한편 1919년에 캐나다는 영국과는 독자적으로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고, 1931년의 웨스터민스터 헌장을 통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캐나다는 1930년대 초의 대공황으로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많은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자, 정부가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이념이 40년대와 50년대에 주류로 떠오르며 현대적 ‘복지 국가’의 개념이 대두되었다. 한편 1939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라이언 메켄지 킹이 9월 10일에 나치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로 인하여 캐나다의 독립 행보가 잠시 주춤하였다.

1939년에는 첫 캐나다 파병대가 영국에 도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캐나다인들이 참전하였으며, 대략 42,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55,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캐나다 군인들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전투, 이탈리아 침공, 스헬더 전투 등에서 활약을 펼쳤다. 또한 나치 독일군을 피해 피난을 온 네덜란드 왕가에게 망명지를 제공하였으며,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해방을 도와준 은인국가로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세계 대전기 동안 캐나다, 영국, 중화민국, 소련 등 참전국들에게 판매할 군수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캐나다 경제는 전폭적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비록 1944년에 퀘벡에서 또다시 징병 논란이 불거지기는 하였으나, 전쟁이 끝날 때쯤의 캐나다는 강한 군대와 경제를 갖고 있는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연방정부는 서부 연안에서부터 100마일(약 160km) 이내에 살고 있는 재캐나다 일본인과 일본계 캐나다인 2만 1천여 명(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살던 일본계 캐나다인 중 90 퍼센트를 초과)을 감금하고 어떠한 보상도 없이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매각했다. 이들은 전시조치법(War Measures Act)에 의해 구금되었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들은 내륙에 있는 수용소로 강제이주 당했는데, 성인 남성들은 가족과 분리되어 도로 건설에 투입되거나 가족과 함께 알버타 주와 매니토바 주에 있는 사탕무 농장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받았다. 강제이주를 거부하는 이들은 포로소용소로 보내졌다. 이 조치는 캐나다 군과 캐나다 연방경찰(RCMP)의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캐나다에 위험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다. 일본계 캐나다인의 투표권은 1948년이 되어서야 복권되었다. 1998년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는 캐나다 정부를 대표해 일본계 캐나다인들에게 행해진 잘못을 사과했고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시조치법을 폐지했다.[17][20]

현대 [ 편집 ]

대공황의 여파로 캐나다의 경제가 휘청거리자, 뉴펀들랜드는 자치 정부를 포기하고 1934년에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는 왕실령 식민지로 귀속되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2번의 국민투표를 거친 후, 뉴펀들랜드의 주민들은 1949년에 캐나다의 한 주의 자격으로 캐나다에 포함되는 것을 선택하였다.

캐나다는 전후 연달아 자유주의 내각이 집권하면서 캐나다만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다. 1965년에는 현재의 메이플리프 깃발을 새로운 국기로 채택하였으며, 1969년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공식적인 국어로 삼았고 1971년에는 다문화주의를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복지정책, 연금정책, 학자금 대출 등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도 이 때 중심으로 다수 시행되었다. 다만 퀘벡 주나 알베타 주 등 이러한 정책들이 행정권 남용이라 하여 심하게 반발하는 주들도 일부 있었다.

1982년에는 영국에서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을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캐나다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게 되었다. 또한 ‘캐나다 인권과 자유 헌장’(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 Freedoms)이 채택되기도 했다. 캐나다는 엘리자베스 2세를 여전히 국가원수로 두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1999년에는 누나부트가 캐나다의 3번째 준주로 편입되었다. 같은 시기,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던 퀘벡에서는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라 하여 격한 세속주의화, 국민주의화가 일어나며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났다. 급진적인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은 1970년대에 납치와 테러를 일삼으며 퀘벡 독립을 추구했고, 의회에도 진입하며 1980년에 독립 주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분리 독립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퀘벡 분리주의 운동은 급진적인 방향에서 선회하여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투표를 통한 독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1995년에 또다시 시행한 주민투표에서 50.6대 49.4로 아슬아슬하게 또다시 독립이 불발되었다. 1997년에 캐나다 대법원은 퀘벡 주와 같은 선례를 막기 위하여 연방으로부터 함부로 탈퇴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을 승인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퀘벡 독립운동 외에도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으로 1985년에 일어난 캐나다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낸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1989년의 대학 총기 난사 사건, 원주민들과 캐나다 정부 사이의 갈등이 터진 오카 사건 등이 있다. 캐나다는 1990년에 걸프 전쟁에 미국 주도 연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평화유지군 임무에도 참가하였다. 캐나다는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2003년의 이라크 전쟁 참전은 거부하였다. 2011년에 캐나다 군대는 나토 주도의 리비아 전쟁에도 참여하였고, 2010년대 중반에는 이슬람 급진 테러단체인 IS와도 전투를 벌였다. 2020년대에는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코로나 19가 전세계적으로 퍼졌고, 캐나다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정치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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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단위 행정은 연방 정부(프랑스어: Gouvernement fédéral, Federal Government), 입법은 연방 의회(프랑스어: Parlement du Canada, Parliament of Canada), 사법은 연방 법원(프랑스어: Cour fédérale, Federal Court)에서 처리하는 3권 분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캐나다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연방하원(프랑스어: Chambre des Communes, House of Common),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며, 내각의 수장은 총리(프랑스어: Premier ministre, Prime Minister)로 연방 하원 내 다수당 대표가 연임하게 된다. 차관급 미만 연방 공무원은 비정치적, 비선출직 공무 분야 전문인으로 구성되어 정치색을 띠지 않는다. 지방자치제가 발달해 각 주에는 주 정부(프랑스어: Gouvernement provincial, Provincial Government)가 총리(프랑스어: Premier ministre, Prime Minister)의 영도 아래에 연방정부 고유 권한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정 영역을 관할한다. 주 단위에서도 삼권 분립이 이뤄져 사법부인 주 법원(프랑스어: Cour provinciale, Provincial Court)과 입법부인 주 의회(Legislative Assembly, House of Assembly, National Assembly, 프랑스어: Assemblée législative, Chambre d’assemblée, Assemblée nationale)가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21][22], 자유주의, 평등주의, 온건한 정치 이념 등을 바탕으로 가히 타국의 모범이 될 만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출처 필요] 자유주의 국가치고는 사회적 정의에도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 외에도 평화, 질서, 권리, 인권 등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출처 필요]

캐나다의 정계는 현재 크게 2개의 중도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도 좌파 정당이자 현재 여당인 캐나다 자유당(Liberal Party of Canada), 그리고 중도 우파 정당이자 현재 제 1야당인 캐나다 보수당(Conservative Party of Canada)이 있다. 그 외에도 좌파 계열 정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등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캐나다 정계에서는 단 한 번도 극우나 극좌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으며, 국민들도 대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중도를 선호하며, 온건한 방향의 정당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2019년 총선의 결과로 5개의 정당이 대표를 가진 교섭단체로 의회에 진출하였는데, 이 5개의 정당들 중에서는 현재여당인 캐나다 자유당, 제 1야당인 캐나다 보수당, 좌파 계열 정당인 신민당, 퀘벡 분리주의 정당이자 지역정당인 퀘벡 블록, 환경정당인 녹색당 등이 있다.

캐나다는 영국의 국왕이자 캐나다의 국왕을 최고 국가원수로 하는 의회제도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국왕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로, 그는 캐나다 외에도 15개에 달하는 타 커먼웰스 국가들의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여전히 캐나다와 영국의 국가원수를 동시에 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캐나다와 영국은 완전히 별개의 국가이며 시스템 제도도 독자적으로 운영한다. 캐나다 국왕은 캐나다 본토에서 자신을 대리할 총독(Governor General)을 임명하며, 이 총독이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를 해산할 수 있고 내각 각료들을 임명하거나 내치는 등 캐나다에서 국왕의 권한을 대신 맡아 수행한다. 다만 실제로 총독이 국민이 뽑은 총리를 내친 경우는 거의 없다. 총독의 권력은 거의 상징적인 것이며, 총리가 단순히 최고 국가원수인 국왕의 권위를 빌어 총독의 명령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캐나다 국왕이 캐나다의 최고 원수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순전히 상징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보통 캐나다의 권력은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된 하원과 내각,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선출된 장관들에 의하여 행해지며, 행정수반인 캐나다 총리가 정무를 주로 본다.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총독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나,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장관들의 재고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총독은 정부의 국정운영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보통 의회에서 의석을 가장 많이 차지한 다수당의 당수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며, 원내 2당의 당수는 공식적으로 야당 대표의 지위를 획득하여 정부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자연스레 맡게 된다.

현재 하원은 338명의 의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선거구제에 기반하여 국민들의 총선을 통하여 선출된다. 실질적으로 캐나다의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기관으로, 의회해산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총리와 평민원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10년에 한 번씩 인구조사를 시행하여 각 주에 의석을 배분하는 데, 북부 3개의 준주에 최소 1개를 배분해주며 나머지 10개 주에는 원칙적으로 인구 비례에 따라 배분한다. 선거구의 인구 편차는 최대 1:3:7 정도로 나누어진다. 총선은 기본적으로 총리의 제청에 따라 총독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며, 헌법에 따라 총선이 한 번 치러진 후 최소한 5년 이내에는 또다시 총선이 치러져야만 한다. 다만 캐나다 선거법에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4년마다 한 번씩 10월에 총선을 실시한다. 상원은 105명의 의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국민들이 뽑지 않으며 총리가 추천하고 총독이 임명한다. 상원 의원들은 주와 준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고, 각 주 별로 의석 수가 정해져 있다. 헌법에서 상원의 정수가 113명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임기는 따로 없으나 정년은 75세로 규정되어 있다.

행정 구역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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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 오타와에 의회와 총독부가 있다. 캐나다 총독부는 공식적으로 국가 원수인 영국의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대리한다.

캐나다 주는 모두 10개로 다음과 같다:

준주는 노스웨스트 준주(주도 옐로나이프), 누나붓 준주(주도 이칼루잇), 유콘 준주(주도 화이트호스)가 있다.

외교 [ 편집 ]

캐나다의 국력은 약 중견국 정도로 평가받으며, 보통 국제 갈등 상황에서 다자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23]

캐나다의 외교 기조는 주로 국제 평화 유지에 치중되어 있으며, 국제 연합 등 국제기구들을 통하여 갈등을 해결하는 쪽으로, 웬만한 경우에는 군사력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캐나다는 약 20세기부터 전세계에서 평화유지 업무를 맡아왔으며, 해외에서 일어나는 전쟁, 내전 등에 나름대로 활발히 참여해왔으며 현재에도 참여하고 있다. 캐나다 외교부에서는 2018년에 해외정책 기본 기조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정책에는 단순히 특정 국가의 번영이 아닌, 전세계인들의 공영과 복지가 포함되어 있는 밀레니엄 개발목표 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도 캐나다 외교의 기본적인 골조를 보여준다.

캐나다는 UN의 창립 회원국이자, 세계무역기구의 회원국이며 G20, OECD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한 여러 국제기구와 헌장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1976년에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조인하였으며 1990년에는 미주기구(OAS)에 가입하였다. 2000년에는 OAS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2001년에는 3회 아메리카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환태평양 경제권을 중심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캐나다는 미국과 유난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거나 초소를 설치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과 여러 군사 캠페인들과 합동훈련들을 벌이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서로에게 최대 교역국이기도 하며, 경제적으로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캐나다가 미국과 완전히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기에, 미국과 적대적인 국가들 중 하나인 쿠바와도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3년에 이라크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미국 외에도 역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와도 관련이 깊은 나라였기 때문에, 구 영국 식민지들의 모임인 커먼웰스와 프랑스어 국가들의 모임인 프랑코포니에도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를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역사 덕분에 현재까지도 네덜란드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캐나다 CF-18의 이륙 모습

국방 [ 편집 ]

캐나다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고, 꽤나 긴 기간 동안 영국에게 외교권을 종속당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뜻에 따라 2차 보어 전쟁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편에서 싸웠다. 이때 자국민들과의 뜻에 반하여 자신들과 관련 없는 전쟁에 연이어 참전한 경험 탓에, 캐나다는 지금까지도 최대한 군사력을 활용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갈등을 풀어나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냉전기에는 한국 전쟁에서 UN군의 일원으로 공산군과 맞서 싸웠으며, 소련의 잠재적 공습을 대비하기 위하여 NORAD를 창설하여 미국과 함께 항공을 공동 방위하는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956년의 제2차 중동 전쟁 당시, 후에 캐나다의 총리에 오르게 되는 레스터 B. 피어슨은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국제평화유지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하였고, 그는 이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UN의 국제평화유지군은 이 때 처음으로 활약을 펼쳤고, 피어슨이 아니었다면 평화유지군의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에 피어슨은 보통 국제평화유지군의 입안자로 평가받는다. 캐나다는 그때 이후로 세계평화유지 임무에 여러 차례 참가하여, 최소 50여 차례에 달하는 임무에 참가하였으며 1989년까지는 UN에서 주도하는 모든 평화유지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르완다,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분쟁지역에 군대를 주둔하며 국제평화에 일조하였다. 다만 1993년의 소말리아 등지에서 캐나다 군인들이 대거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외에 자국 군인들을 파병하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001년에는 미국군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하여 UN의 인정을 받고 NATO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2007년 2월에는 캐나다, 이탈리아, 영국, 노르웨이, 러시아 등이 개발도상국과 최빈국들을 위하여 거금을 들여 백신개발을 지원하겠다는 발표도 한 바 있다. 2007년 8월에는 1925년 이래 자국령이라 여겨오던 북극 내 캐나다령 영토가 러시아의 잠수함 프로젝트로 인하여 침범당한 적도 있다. 2020년 9월에는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제 공동 백신 배분 프로젝트인 코벡스에 참여하였고, 모든 회원국들과 특히 개발도상국들에게 최대한 공평한 백신 배분이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캐나다는 기본적으로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약 79,000여 명의 현역 군인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32,250명의 예비군이 있다.[출처 필요] 캐나다 군대는 크게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누어진다. 2013년에 캐나다의 국방비 지출은 약 190억 캐나다 달러 정도로, 캐나다 전체 GDP의 1% 정도에 머물렀다. 다만 캐나다 정부 측에서 발표한 2016년 국방백서에는 이후 10년 동안 국방비를 약 70% 가량 증강하겠다고 밝혔다.[출처 필요] 이로 인하여 캐나다 군대는 약 88기의 전투기와, 15척의 상륙함을 추가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캐나다의 총 국방비 지출은 2027년 경에 이르면 약 327억 캐나다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필요] 현재 캐나다는 3,000명이 넘는 군인들을 해외에 파병하였으며[출처 필요], 가장 대표적으로 이라크[24], 우크라이나, 캐리비안 해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출처 필요]

자연 환경 [ 편집 ]

자연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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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유럽 전체보다 땅이 넓어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그러나 국토의 북쪽 절반은 메마른 툰드라 지대이고, 실제로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은 동서 약 6,000km에 걸쳐 뻗쳐 있으며, 미국과의 국경에서 200∼300km 사이에 있는 지대에 한정된다. 약 200만 개의 호수가 있다. 캐나다는 여섯 지형구로 나뉜다. 먼저 동부 대서양 연안의 애팔래치아산계, 서부 태평양 연안의 코르딜레라 산계, 국토의 중앙의 북쪽에서 허드슨 만이 파고들어 이루어진 허드슨만 저지, 이것을 둘러싸고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캐나다 순상지, 동쪽의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 서쪽의 내륙평원인 프레이리 등이다. 이들 대지형의 배열은 대규모의 지각 변동에 따라 형성되어 제각기 다른 지형을 구성하였으나, 캐나다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빙하의 영향을 받은 점이 전체적으로 공통된 점이다. 또한 나무가 우거진 곳이 많다.

캐나다는 15개의 육상생태권과 5개의 해상생태권으로 나누어진다. 이 생태권들에는 약 8만 개가 넘는 캐나다 고유 야생종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이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의 야생종들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캐나다 정부 차원에서 타국에 비하여 생태계 보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인간 활동으로 인하여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보니 약 800여 종의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으며 더 많은 종들이 위험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 캐나다 국토의 절반 넘게가 아직까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처녀지이며, 각종 환경 규제를 통하여 그 자연환경을 보호받고 있다. 캐나다의 타이가 숲은 그 규모가 약 3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도로, 도시, 공장 따위 로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처녀림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캐나다의 전체 국토 가운데 약 42% 정도가 숲으로 덮여있으며, 덕분에 전세계 숲 면적의 8%를 캐나다가 차지하고 있다.[출처 필요]

캐나다 정부는 전 국토의 약 12.1%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놓았으며, 이 외에도 국토의 11.4%에 달하는 면적을 또다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놓았다. 호수나 강들의 경우에도 전체의 13.8%가 자연보호구역이며 8.9%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캐나다의 첫 국립공원인 밴프 국립공원은 1885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면적이 약 6,641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얼음 벌판, 만년빙, 빽빽한 타이가 숲 등이 풍부하여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국립공원들 중 하나이다. 캐나다의 슈퍼리어호 국립 해상 보호구역은 그 면적이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담수호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캐나다에서 가장 거대한 야생보호구역은 스콧 섬 해상국립 야생구역으로, 면적이 11,570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가며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야생 조류들의 40%가 넘게 거주할 정도로 생물들이 풍부하다.[출처 필요] 캐나다는 약 18개에 달하는 유네스코 생태보존구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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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해수면 면적을 포함하면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국토를 가진 영토 대국이다. 그러나 워낙 많은 내륙의 담수호들 탓에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내수면 비율을 가지고 있기에, 순수한 육지 면적만 따지면 세계에서 4번째로 거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대서양, 북쪽으로는 북극해,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9,984,670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같이 넓은 국토 덕에 해안선도 세계 최대 규모로, 약 243,042km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미국과는 8,891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육상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그린란드와 해상 경계를, 동남쪽으로는 프랑스의 해외영토들과 해상 경계를 가지고 있다. 캐나다는 세계 최북단에 위치한 거주지이자 군사기지인 얼러트가 위치한 국가이기도 하다. 얼러트는 얼즈미어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군사기지로, 북극점에서 약 817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워낙 추운 날씨 탓에 약 72명 정도만이 겨우 거주하고 있다.

캐나다의 지리환경은 매우 복합적인데, 냉대 타이가 숲이 국토 전역에 걸쳐 넓게 퍼져 있으며 북극해와 인접한 지방들과 로키 산맥 근처에는 영구적인 만년빙들이 쌓여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평평한 편인 남서부 지방의 캐나다 평원에서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난하여, 주로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지고는 한다. 거대한 담수호들에서 물이 흘러나와 세인트로렌스 강으로 흘러들어가며, 이 강이 캐나다 경제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지대 지방을 건너 대서양으로 향하게 된다. 캐나다는 약 200만 개가 넘는 담수호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563개가 면적이 100 제곱킬로미터가 넘어간다. 그 외에도 로키 산맥, 해안가 산맥, 북극 인접 지방들에도 녹지 않는 빙하들이 존재한다.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지진이 활발한 편으로, 지진과 화산활동이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휴화산들이 있다.

캐나다의 기후도

기후 [ 편집 ]

캐나다의 기후를 결정하는 인자(因子)는 대륙에서의 캐나다의 위치와 대지형(大地形)과의 관계이다. 태평양 연안에는 해안산맥이 뻗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대기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습하고 따뜻한 태평양의 기단은 내륙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내륙 평원은 지형적으로 회랑(回廊)을 이루어, 겨울에는 북극지방의 찬 공기가 남하하고, 여름에는 열대성의 기단이 북상한다. 한편, 동부의 대서양 연안에서는 대기가 내륙부로부터 계속 흘러오므로 바다의 영향이 적으며, 같은 위도인 유럽에 비하면 겨울에는 추위가 심하다.

서쪽(브리티시컬럼비아주 등)은 온난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나,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 동쪽(온타리오주, 퀘벡주, 매니토바주 등)은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추운 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봄과 가을이 약간 짧은 편이다. 여름에는 장마가 없으나 서부 밴쿠버 지역은 겨울에 강수량이 높아 ‘겨울 장마’라 불릴 정도다. 여름철은 캐나다 여러 지역이 매우 기온이 높은 편이나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날에도 습도가 낮기 때문에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참고로 리자이나는 체감 온도가 50도 가까이 된 적도 있다. 북부의 옐로나이프와 화이트호스는 겨울이 매우 춥고 여름이 쾌적하다. 겨울이 길고 대도시라도 기온이 섭씨로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도 있다. 북부는 너무 추워 겨울이면 오후 2시만 되어도 일몰하고 남부라도 오전 8시 이후에 일출하는 날도 있다. 캐나다는 11월에 겨울이 시작되어 한국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오며, 반 년이나 지속되어 다음 해 4월에야 겨울이 끝난다.

경제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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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지리 위치상(접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경제에 상당히 의존하는 편으로 미국과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이며 나라 면적이 세계 2위인 캐나다는 각 주마다 특성을 이용한 산업이 활발한 편으로, 각 주마다 주요 산업이 다르다. 특히 2007년 시점에서는 앨버타주의 오일 샌드에서 원유가 채굴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매장량을 지닌 산유국이기도 하다.

산업 [ 편집 ]

캐나다의 주요 산업은 항공 산업, 우주 산업, 자동차 부품 제조, 제지, 철강, 기계 ·기기, 에너지 산업, 광업, 화석연료 채굴, 임산, 농업, 어업, 관광업, 영화 산업, 멀티미디어 산업, 하이테크 산업, 컴퓨터 산업, 소프트웨어 제작, 게임 제작, CG, 애니메이션이다.

임업과 그 관련 사업은 캐나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으며, 전수출액의 3할 가까이를 제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펄프, 제지업은 생산액, 취업자수, 수출액에 있어서 캐나다 최대의 산업이며, 신문 용지는 세계 수용의 1/2을 공급하고 있다.

수산업은 캐나다 최초의 산업이며, 새우,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연안에서는 청어, 정어리 등을 중심으로 35%를 차지하며, 오대호에서는 10%에 불과하다.

광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한 산업으로서, 특히 서드베리 부근의 니켈, 퀘벡주 남부의 석면(石綿)은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그 밖에 백금, 금, 우라늄, 은, 구리, 아연 등 세계 유수의 광산물 수출국이다. 또 수력 발전은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위의 발전 능력을 지니며, 보크사이트를 수입하여 정련하는 알루미늄 생산국이기도 하다. 금속 자원의 경우 우라늄(1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29.2%), 염화 칼륨(820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30.9%), 유황(903만 톤, 2위), 철광석(1980만 톤, 3위), 은(1309톤, 3위), 텅스텐(2750톤, 3위), 니켈(16만 톤, 3위), 아연(100만 톤, 4위), 코발트(4304톤, 5위), 염화 나트륨(1335만 톤, 5위), 납(15만 톤, 5위), 금(141톤, 7위), 안티몬(143톤, 8위), 구리(56만 톤, 8위)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마그네슘, 인 등도 채굴되고 있다.

캐나다는 광물 자원을 타고나서 세계 10위에 들어가는 광물이 17종류가 있다. 이하 수치는 2003년 시점의 통계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다. 유기 광물 자원은 천연가스(6565천조 줄, 3위), 연료가 되는 갈탄(3695만 톤, 9위)외에 석탄(2954만 톤)과 원유(9111만 톤)의 산출량을 가지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산출량도 1120만 캐럿에 이르러 세계 제6위이다. 주로 보유한 천연자원으로는 천연가스, 석유, 석탄, 금, 은, 구리, 다이아몬드, 철광석, 니켈, 우라늄, 아연 등이 있다. 석유(오일샌드 포함)는 세계 2위의 부존량을 자랑한다. 그러나, 캐나다는 대량으로 원유를 수입한다. 중동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와 북해에서도 들여온다. 2006년 기준 하루 평균 27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고 85만 배럴을 수입했다. 캐나다의 원유 조달 구조가 이처럼 기이한 것은 이 나라 원유 자원의 자연적 특징 때문이다. 원유는 보통 지하의 유정(油井)에서 뽑아내는 방식으로 생산되지만, 이 나라 원유는 오일샌드(oil sand) 형태로 부존하기 때문에 생산 방식이 전혀 다르다.[25]

캐나다의 농업은 취업 인구의 3.4%(1999년)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노동생산성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다. 곡류, 감자 등의 농산물 중에서도, 평원의 3주에서 생산되는 경질(硬質) 밀은 단백질의 함유량도 많아 질이 좋으며, 생산량의 3분의 2를 수출하고 있다. 밀 총생산량은 25,261,400톤(2011년, 세계 7위, 3.59%)[26]이다. 또한 낙농과 가축 사육도 왕성하다. 온타리오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는 온실(green house) 농업이 발전하는 추세에 있다.

무역 [ 편집 ]

2018년 기준으로 캐나다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75.85%), 중국(4.32%), 영국(3.24%), 일본(2.17%), 멕시코(1.44%)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미국(51.33%), 중국(12.64%), 멕시코(6.33%), 독일(3.20%), 일본(3.12%)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0,632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32,405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54,037,754백만 달러), 자동차(16,216,430백만 달러), 금 광석(13,112,868백만 달러), 석유 등(11,337,52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자동차(24,734,528백만 달러), 석유(12,768,537백만 달러), 석유 등(12,297,755백만 달러), 트럭(10,646,055백만 달러)이다.[27]

교통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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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넓은 땅이 지형적으로 군데군데 끊겨 있고, 3,000만에 가까운 인구가 미국과의 국경과 가까운 남부 (북위 49~50도 사이)에 몰려있는 실정으로, 교통망도 이러한 토대 아래 형성되었다. 현재의 주 교통망은 1885년에 개통한 대륙 횡단철도에서 파생한 철도망, 넓은 국토를 덮는 항공망, 각 가정에 보급된 자동차와 거주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망, 오대호로부터 센트로렌스 물길을 거쳐 대서양에 이르는 선박수송에서 석유, 가스의 파이프라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통 수단이 이용되고 있다. 1962년에 개통된 길이 8,000km에 이르는 캐나다 횡단 고속도로의 구실도 매우 크다.[28] 국토가 너무 넓어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차로는 시속 100km의 속도 기준으로 한번도 쉬지 않고 운전을 할 경우에 약 45시간 걸리기 때문에 미국과 같이 도시와 도시를 잇는 주요 교통 수단은 항공기이다. 캐나다는 에어 캐나다와 웨스트제트 등의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민국과는 대한항공과 에어 캐나다 2개의 항공사가 연결하고 있다.

사회 [ 편집 ]

국민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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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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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인구밀도

캐나다의 총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35,939,927명이다. 인구 증가율은 1.04%(2010~2015년)로 1955년부터 점점 증가하고있다. 인구밀도는 4.0명/km2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2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81.8%(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40.6세이며 2015년 노인인구비율이 16.14로 고령화 사회이다.[29]

2016년에 시행된 캐나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캐나다의 인구는 35,151,728명으로, 2011년과 비교하여 약 5% 정도의 증가폭을 보였다고 한다. 2011년과 2016년 5월 사이에 캐나다의 인구는 약 170만 명 정도 증가하였는데, 이 증가분 중 약 3분의 2가 전세계에서 몰려온 이민자들 덕분이라고 하였다. 1990년과 2008년 사이에 캐나다는 전세계의 이민자들을 수용하면서 약 560만 명 정도 증가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약 20.4% 정도나 불어난 수이다. 현재도 캐나다 인구 증가의 주요 원동력은 이민을 통한 인구 증가로, 캐나다 내 출산으로 인한 인구 증가 효과는 이민에 비해서는 미미하다.

캐나다는 1인당 이민률이 가장 높은 축에 끼는 국가들 중 하나로, 국가 측에서도 이를 장려하고 있으며 가족 단위의 이주를 장려하여 더욱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오게 하고 있다. 캐나다의 국민들과 기존 정당들 대다수들도 현재의 이민 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기준으로 1년에 약 341,180명의 이민자들이 캐나다로 유입하였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새로 이민을 온 사람들은 주로 토론토, 몬트리얼, 밴쿠버와 같은 도시권 지대에 정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는 단순 이민자들 외에도 난민들도 많이 수용하는데, 전체 연간 세계 난민들 가운데 10% 넘게를 수용하고는 한다. 특히 2018년의 경우에는 28,000여 명에 달하는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토록 이민과 난민들을 많이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의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약 3.7명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캐나다의 국토는 북위 41도부터 북위 83도까지 걸쳐 있는데, 이와중에 약 95%의 인구가 모두 북위 55도 아래에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 인구의 5분의 4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국 국경과 15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캐나다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되어 약 50%에 달하는 국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남부 퀘벡과 남부 온타리오 지역으로, 세인트로렌스강과 담수호들이 있는 지역이다. 나머지 30% 정도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의 저지대나 알베르타 등에 모여 살고 있다.

캐나다인들의 약 67.7%는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고, 28.2%는 홀로 살아가고 있으며 4.1% 정도만이 가족이 아닌 사람과 살고 있다고 답했다. 6.3%의 가정만이 다세대 가정이며 20세와 34세 사이의 청년들 중 34.7%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전했다. 69%의 가정이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 중 58.6%가 담보대출을 끼고 저택을 구매했다고 한다.

민족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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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만 명 이상인 민족만 해도 34개 민족이 있다. 캐나다인의 다수인 백인은(2016년 기준 73%)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민 온 유럽(잉글랜드 18.3%, 프랑스 13.6%, 스코틀랜드 13.9%, 아일랜드 13.4%, 독일 9.6%, 이탈리아 4.6%) 출신의 백인의 자손이다. 아시아계 캐나다인은 전체 인구의 14.5%이며, 온타리오주 남부와 밴쿠버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3.3%이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2.88%를 차지하는데, 서인도 제도에서 온 이민들이 대부분이다. 영어를 쓰는 섬나라들에서 온 이민들은 주로 토론토 지역에, 프랑스어를 쓰는 아이티 이민들은 주로 몬트리올 지역에 정착하였다.

미국과는 달리 심한 인디언 박해는 없었으며 1982년의 헌법은 캐나다의 원주민 세 집단(인디언, 이누이트, 메티스)을 인정한다. 법 제정 당시에는 ‘인디언(Indians)’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현재는 선주민을 의미하는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들 원주민은 2001년 인구 조사에서 전체 인구의 3.3%인 976,305명이 집계되었는데, 그 가운데 62%가 퍼스트네이션, 30%가 메티스, 5%가 이누이트이다.

종교 [ 편집 ]

캐나다는 종교적으로도 매우 다원적인 국가들 중 하나로,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 덕택에 수많은 종교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다. 캐나다에는 국교가 없으며, 정부 차원에서도 종교적 다원주의를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다.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으며, 그 어떠한 힘으로도 개인이 특정 종교로 개종하거나 개종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없다. 영국 식민지 시절, 백인들이 사회를 주도하던 시절에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등이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이후 아시아계,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사회 주류로 통합되기 시작하자 기독교가 점차 힘을 잃고 세속적인 경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현대 캐나다인 대다수는 종교가 일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성향이 강하나, 여전히 대부분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2011년 종교 분포 조사에 의하면, 캐나다인들 가운데 약 67.3%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다. 이들 중 로마 가톨릭이 가장 수가 많고, 전체 인구의 38.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기독교 인구의 대다수는 개신교이며, 전체 캐나다인의 27%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개신교 단체는 캐나다 연합교회로, 전체 캐나다인의 6.1%가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또한 그 뒤를 캐나다 앵글로 교회, 그 외 여러 복음주의 교회들이 잇는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세속주의가 강해졌고, 2011년에는 전체의 23.9%에 달하는 국민들이 종교가 없다고 밝혔으며 2001년의 16.5%와 비교했을 때 꽤나 큰 증가세를 보였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가장 거대한 종교는 이슬람교로, 캐나다 인구 전체의 3.2%가 무슬림이다. 또한 이민자 유입에 힘입어 가장 빠르게 세를 확장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캐나다 전체 인구의 1.5%는 힌두교도이며 1.4%는 시크교도이다.

언어 [ 편집 ]

캐나다의 공용어는 영어[A]와 프랑스어이다. 2007년 12월 4일 발표한 200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어는 영어 57.8%, 프랑스어 22.1%, 가정어로 영어는 67.55%, 프랑스어는 21.70%, 인지도를 보면 영어 85.08%, 프랑스어 30.70%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1969년 7월 7일 공용어법(Official Languages Act)을 통해 프랑스어의 지위가 연방 정부를 통틀어 영어의 지위와 맞먹게 되었고 프랑스어를 모어로 하고 있는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그리하여 캐나다가 이중 언어 다문화주의 국가로 스스로 재정의하게 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연방 법원과 의회, 모든 연방 기구에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캐나다인의 98%가 영어나 프랑스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구사한다. 캐나다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영어가 필수 이수 과목이고, 제2외국어로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의 언어가 개설되어 있다. 프랑스어는 퀘벡주 전체를 비롯하여 뉴브런즈윅주, 온타리오주의 동부와 북부, 새스캐추언 주, 노바스코샤주 남쪽 해안과 북쪽 섬, 프린스애드워드아일랜드 주 서남쪽 해안, 매니토바주 남부 등 여러 군데에 흩어진 지역에서 쓰인다.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캐나다인 가운데 85%가 퀘벡주에 거주한다. 노스웨스트 준주에서는 여러 원주민 언어들이 공식 지위를 가진다. 누나붓 준주에서는 이누이트어가 다수 언어로 공식 지위를 가진다. 누나붓 준주의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까지 영어 대신 이누이트어를 가르친다. 또 2006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6,147,840(20.1%)나 차지했다. 그중에서 여러 개의 중국어(1,034,090), 이탈리아어(476,905명), 독일어(466,650명), 펀자브어(382,585명), 스페인어(362,120명), 아랍어(286,785명), 타갈로그어(260,440명)등이 포함된다. 캐나다는 영연방의 주요 구성원이자,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이다.

캐나다인들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공식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캐나다 전체 국민의 56%와 21%가 각각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어로 자유롭게 사용한다. 2016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730만 명 정도에 달하는 국민들이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타국어를 모어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가장 대표적인 비공식 언어로는 중국어로, 약 122만 명에 달하는 사용자들이 있다. 그 뒤를 50만 명 정도의 펀자브어, 45만 명의 스페인어, 41만 명의 아랍어, 38만 명의 독일어, 37만 명의 이탈리아어 등이 뒤따른다. 캐나다의 공식 언어 방침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등하게 국어로 인정하는 것으로, 공공기관, 연방법원, 의회 등 모든 곳에서 영어와 프랑스어가 동시에 통용된다. 시민들은 프랑스어와 영어, 그 외 여러 소수 언어들로 공공 서비스들을 제공받을 수 있으며, 모든 지방들에서 이 언어들을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도 있다.

1977년에 제정된 프랑스어 헌장으로 인하여 퀘벡 주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채택하였다. 캐나다에 살고 잇는 프랑스어 사용자들 가운데에 85%가 퀘벡 주에 살고 있으며, 그 외에도 뉴브런스윅, 알버타, 마니토바, 온타리오 등에도 많은 수의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살고 있다. 뉴브런스윅의 경우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의 33% 정도에 달한다. 이외에도 노바스코티아 남서부, 브레톤 곶 섬, 프린스에드워드 섬 남중부 등에도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대부분의 지방들은 공식 언어를 채택하지 않았으나, 프랑스어가 영어와 함께 법원, 공공기관 등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온타리오의 경우에는 프랑스어가 상당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나, 아예 법적으로까지 못박아놓지는 않았다. 캐나다에는 11개에 달하는 언어 그룹들이 있다. 이들 중 인구가 극히 적고 원주민들이 여전히 맥을 잇고 있는 북서부 영토에는 여전히 원주민들의 언어가 세를 가지고 있어서, 특히 누나부트 지방 등에서는 이누이트어가 다수어로 3개의 공식 언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여러 수화들의 발생지들 중 하나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국 수화이다. 다만 퀘벡 수화도 특히 퀘벡 등지에서 쓰이는 편이며, 뉴브런스윅, 온타리오, 마니토바 등의 프랑코포니 사회에서도 잘 쓰인다.

복지 [ 편집 ]

캐나다의 복지체제는 공공이 주도하는 헬스케어 시스템으로, 자국 내에서는 ‘메디케어’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는 1984년에 제정된 캐나다 보건법을 따르며,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의료 체제이다. 캐나다 정부 측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 의료보장체제 구축’을 목표로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고 있으나, 여전히 캐나다 국민의 전체 의료비 지출의 30%가 개인 사비를 들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다만 이같은 지출은 메디케어의 보험대상이 아닌 의료 서비스 때문에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치과, 안과, 단순처방 제조약 등이 있다. 캐나다인들의 65%에서 75% 정도가 국가의료시스템 외에도 추가적인 개인 의료 보험에 들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직장에서 보장해주는 의료 보장 제도를 이용한다. 그 외에도 고령자, 사회적 약자, 소수민족 등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의료 기금을 지원해준다.

캐나다는 여러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고령화를 겪고 있고, 이 때문에 복지 지출도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 형국이다. 점차 은퇴자와 고령자가 많아지고 노동가능인구는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것이다. 2006년에 캐나다인의 평균 나이는 약 39.5세였고, 12년만에 약 42.4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한편 기대수명은 약 81.1세이다. 2016년 캐나다 보건부의 조사에 따르면, 약 캐나다 인구의 88%가 자신이 ‘건강이 매우 좋다’라고 답했다고 하며, 이는 같은 선진국 모임인 G7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였다. 다만 캐나다 성인의 80%가 자신들이 흡연, 신체적 장애, 불균형한 식습관, 운동 부족 등 만성적인 위험 요인들을 최소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캐나다는 OECD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며, 당뇨 진단율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또한 4대 만성질환인 암, 호흡기 질환, 당뇨, 심장질환이 캐나다인의 사인 가운데에 약 65%를 차지한다.

2017년에 캐나다 보건부에서는 캐나다의 의료체계 지출이 당시 캐나다의 전체 GDP의 11%에 달하는 약 2,420억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캐나다 국민들이 의료에 지출하는 금액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라서 OECD 전체에서 약 7위에 달하였다. 캐나다는 2000년대 초반부터 OECD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의료 시스템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2017년에는 의사를 만나기 위하여 기다려야하는 대기 시간과 의료의 질을 평가했을 때도 OECD 평균보다는 상위권에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캐나다의 보건 체제가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있다. 캐나다 보건 시스템의 고질적인 약점들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높은 영아 사망률, 만성질환의 만연화, 긴 대기시간, 사후 관리 체계의 부재, 처방약의 부족과 치과 부족 등이 있다.

문화 [ 편집 ]

캐나다는 다양한 이민자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따로 창조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캐나다의 최고 문화적 성취들 가운데 하나는 다문화주의로, 여러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퀘벡의 경우에는 프랑스계 국민들이 매우 많은데, 일부 갈등은 있을지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캐나다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영국계가 주축이 되어왔던 캐나다에서 스스로를 캐나다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인정한 것이다. 이같은 경우들은 아랍, 중국, 아프리카계 시민들까지도 모두 적용되며, 이같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모인 캐나다의 문화를 표현하기 위하여 문화 모자이크라고 칭한다.

캐나다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영국, 프랑스, 유럽, 기타 문화들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20세기 동안에는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계의 사람들이 점차 캐나다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문학, 음악, 예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캐나다 문화의 특성들 중 하나로 꼽히는 ‘캐나다식 유머’가 꽤나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캐나다 출신의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미국 텔레비전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는 했다. 캐나다는 자체적으로도 훌륭하게 발전된 미디어 산업을 가지고 있으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미국이 워낙 거대한 미디어 산업계를 가지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그 명성이 바래는 감이 있다. 게다가 미국의 문화들이 바로 옆의 캐나다로 지나치게 쏟아져 들어와 캐나다 미디어 문화계를 압도해버리는 경향도 있기에, 캐나다는 정부 차원에서 캐나다 문화 진흥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상징 [ 편집 ]

가장 대표적인 캐나다의 상징물은 국기에도 있는 메이플 나무 잎사귀로, 최소 18세기 초부터 캐나다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 때문에 캐나다는 현재 이전의 국기, 그리고 캐나다의 국장에도 메이플 잎사귀를 넣고 있다. 현재 캐나다의 국장은 영국의 국장에서 크게 본을 따온 형태로, 다만 지나치게 영국식인 요소는 배제하고 캐나다의 요소를 일부 가미하였다. 그 외에도 캐나다의 표어인 ‘A Mari Usque Ad Mare’, 즉 ’바다에서 바다로‘도 유명한 캐나다의 상징이며, 캐나다에서 유명한 스포츠인 아이스하키도 있다. 그 외에도 캐나다의 동물인 비버, 캐나다 오리, 말 등도 있으며, 캐나다의 기마경찰, 로키 산맥 등도 캐나다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물질적인 것들로는 캐나다 맥주, 메이플시럽, 카누, 버터타르트 등이 유명하다. 캐나다의 동전들에도 이 것들이 들어 있는데, 1달러 동전에는 캐나다 아비새, 50센트 동전에는 캐나다의 국장이, 니켈 동전에는 비버가 새겨져 있다. 2013년부터 쓰이지 않게 된 페니에는 메이플 잎사귀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현재의 20달러 지폐와 모든 캐나다 동전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스포츠 [ 편집 ]

캐나다의 스포츠 역사는 17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스하키, 농구, 야구, 축구 등 여러 스포츠 등이 캐나다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공식적인 국민 스포츠는 아이스하키와 라크로스 등이 있다. 골프, 축구, 야구, 테니스, 스키, 배드민턴, 사이클링, 수영, 볼링, 럭비, 카누, 스쿼시 등도 인기가 많으며 많은 국민들이 유년기부터 무술을 짧게나마 배우기도 한다.

캐나다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 리그를 미국과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의 유명한 프로 스포츠 가운데에는 캐나다 축구 리그, 라크로스 리그 등이 있다. 캐나다는 1900년 이래 거의 항상 올림픽에 참가한 바 있고, 1976년 하계 올림픽, 1988년 동계 올림픽, 1994년 농구 챔피언십, 2007년 FIFA U-20 월드컵, 2010년 동계 올림픽, 2015년 FIFA 여성 월드컵 등 여러 국제 경기들도 여러 차례 유치했다. 캐나다는 2015년에 범아메리카 게임, 2015년 파라판 아메리칸 게임 등도 토론토에서 유치했다. 또한 2026년에는 멕시코와 미국과 함께 2026년 FIFA 월드컵도 공동 개최할 예정이다.

각주 [ 편집 ]

내용주 [ 편집 ]

↑ 캐나다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비슷하지만 어휘나 문법 등에서 차이가 있는 캐나다 영어 이다.

참조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Destination Canada – 미디어 센터

캐나다는 미국 위에 위치하여 북미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맞닿아 있습니다. 남쪽에는 미국이, 북쪽에는 북극해가 자리한 캐나다는 북미 대륙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차 타고 캐나다 대륙 횡단, 쉼없이 펼쳐지는 ‘신의 정원’… 나흘이 훌쩍 지났다

여행의 향기

밴쿠버~토론토 기차여행

기차는 절경을 따라…

전기·車·전화 없이 살아가는 마을 세인트 제이콥스

안타까운 사랑의 전설이 있는 사우전드 아일랜드

캐나다 동과 서를 잇는 비아레일. 철도여행은 캐나다의 낭만적인 풍경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여행코스 중 하나다.

최적의 열차 공간… 맛있는 음식은 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있는 업사이드 다운 하우스

비아레일의 출발지인 밴쿠버 퍼시픽센트럴 역

벽화가 그려진 세인트 제이콥스의 한 건물

전파도 잡히지 않는 광활한 대륙

파크카에서 바라보는 캐나다 풍경

미국의 유명 호텔사업가 볼트가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지은 하트 섬의 볼트 성

세인트 제이콥스와 사우전드 아일랜드의 절경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있는 세인트 제이콥스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여행이 있다면 크루즈 여행과 장거리 기차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크루즈 여행이나 기차여행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취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육체적 부담이 덜한 대신 볼거리나 활동량이 적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여행이 나흘이나 기차여행이 이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이어지는 4500㎞ 거리를 달리는 동안 캐나다의 비경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기차여행은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기차가 멈추면 재스퍼, 앨버타 주의 주도인 에드먼턴, 평원 지대의 사스카툰과 위니펙 등 매력적인 도시가 나타납니다. 기차여행이 끝나고 만난 자연주의 캐나디안이 살고 있는 세인트 제이콥스, 1000개의 섬이 끝없이 펼쳐진 사우전드 아일랜드, 나이아가라까지 황홀하게 이어졌습니다. 이 매력적인 나라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밴쿠버=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email protected]“캐나다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국영철도 비아레일(VIA Rail)은 총 운행거리 1만2500㎞를 19개 노선으로 나눠 운행하며 캐나다 전역 450개 역에 정차합니다. 캐나다를 여행하는 낭만적인 방법 중 하나로 세계 철도여행 팬들이 좋아하는 관광열차이기도 합니다. 가장 인기있는 노선은 이번에 손님이 경험하실 밴쿠버~토론토를 운행하는 ‘캐나디안’호입니다. 약 4500㎞ 거리를 87시간에 걸쳐 달리는데 3박4일 동안 로키산맥의 관광 거점인 재스퍼, 앨버타 주의 주도인 에드먼턴, 평원 지대의 사스카툰과 위니펙 등 매력적인 도시를 거치며 대평원, 로키산맥, 호수 등 캐나다의 비경을 만나게 됩니다.”비아레일 승무원인 제스퍼는 활기찬 목소리로 기차를 소개했다.밴쿠버 퍼시픽센트럴 역에서 노란색 기차표를 손에 쥐고 기차 허리쯤에 있는 217호실 F방으로 들어섰다. 인도의 대열반 열차를 타고 10박이 넘는 여행을 하고 난 뒤 10년 만에 떠나는 장거리 기차여행이다. 기차여행은 사실 쉽지 않다. 종일 이어지는 기차의 진동을 몸으로 받고 있으면 생활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하다. 그럼에도 기차여행이 좋은 것은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앉으니 마치 사색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방은 아담했다. 편안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의자를 젖히면 편안한 침대가 내려오는 구조다. 벽에는 옷이나 가방을 걸 수 있는 고리 몇 개와 거울, 온도조절장치(에어컨디셔너), 작은 선풍기가 달려 있다. 시선이 놓이는 쪽으로 세면대와 작은 문을 열면 화장실이 있다. 머리 위에는 2단계 밝기 조절이 가능한 독서용 조명이 붙어 있다. 벽장처럼 생긴 선반에 수건과 샴푸 비누 등을 넣어둔 노란색 세면도구가 여러 개 놓여 있다.특급호텔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아쉽겠지만 이만하면 부족한 것이 없다. 열차 한 칸에 1인용 샤워실도 있다. 다만 열차 한 칸에 샤워실도 하나여서 다소 불편할 수는 있다.아침식사는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스페셜 오믈렛과 메이플 시럽을 뿌려서 먹는 팬케이크는 물론 베이컨 달걀프라이 등 네 가지 음식 중에서 기호에 맞는 음식을 즐기면 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음식들을 준비했나 싶을 정도로 맛이 빼어났다. 점심은 대개 치킨이나 파스타 같은 음식이 나오고 저녁은 그럴듯한 정찬이 차려진다. 잘 구운 스테이크에 해산물 요리까지 매일매일 신선한 음식이 준비된다. 침대석은 모든 식사가 기차요금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있다. 게다가 디저트나 음료 등은 몇 개를 시켜도 웃으면서 더 가져다준다. 맛있는 음식이 여행의 절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꼭 권하고 싶을 정도다.기차는 어느새 로키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로키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롭슨산의 만년설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높이만 3945m에 달하는 롭슨산은 54만 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자작나무 사이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롭슨산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롭슨산을 넘으니 테리 폭스(Terrance Stanley Fox) 산이 나타났다. 테리 폭스는 한국인에게는 낯설지만 캐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국민 영웅이다. 테리 폭스는 캐나다의 운동선수이자 암 연구 활동가였다. 폭스는 포트코퀴틀럼의 고등학교와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를 다닐 때 육상과 농구 선수로 활약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어느날 무릎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져 병원에 갔더니 골육종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1977년 수술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인공 다리를 달고 밴쿠버에서 휠체어 농구 선수와 육상 선수로 맹활약했다. 1980년에는 암 연구를 위한 자선 마라톤을 시작했다. 폭스는 143일 동안 무려 5373㎞를 달리며 암 연구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다. 그가 달리는 동안 수많은 캐나다 사람이 감동받아 같이 달리거나 기부금을 냈다. 하지만 마라톤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암이 폐까지 전이돼 9개월 뒤 폭스는 세상을 떠났다. 질병을 극복하려는 그의 강인한 의지는 꺾였지만 숭고한 정신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1981년부터 매년 60개국 이상이 테리 폭스 달리기(Terry Fox Run)를 개최하며, 수만 명이 참가한다. 테리 폭스 달리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암 연구를 위한 1일 자선 운동이며, 그의 이름으로 5억 캐나다달러 이상을 모금했다고 한다.기차 밖으로 풍경들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파노라마 전망대에 앉아서 창밖을 보니 잣나무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행여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비아레일에서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전파도 잡히지 않는 광활한 대륙을 횡단하기 때문에 인터넷은 물론 전화 통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트렁크가 무거워질까봐 책을 충분히 챙겨오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먼데 벌써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이 몰려와서 낮에 잠을 충분히 자다 보니 정작 자야 할 시간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때는 열차의 중간마다 있는 파크카에 우두커니 앉아 마치 영화처럼 흘러가는 풍경과 하나가 됐다. 180도로 둥그렇게 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파크카는 비아레일의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열차의 천장, 양옆, 앞뒤가 모두 창문으로 돼 있어 캐나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캐나디안호는 대략 8번 정도 정차하는데 몇 번은 잠을 자느라 미처 하차하지 못했고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재스퍼다. 고층건물도 없고 단층집에 산이 보이는 작은 마을이 재스퍼의 전체적인 인상이었다. 캐나디안 로키를 관광하는 관문인 재스퍼는 만년설이 내려앉은 롭슨산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린다.기차는 친구를 사귀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잠자고 식사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열리는 마법 같은 공간이 바로 기차 안이다. 쉽게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는 기자조차 중국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뒤 세계 대학교를 찾아 여행을 한다는 별난 중국 노인을 비롯해 스타를 꿈꾸며 기차에서 노래하는 연상연하 부부 가수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시간 변경선을 넘는 것이다. 나라 안에 4~5시간의 시차가 있는 나라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나라다 보니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마법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차가 대륙을 횡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횡단하는 것이다. 캐나디안호를 탑승하면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가는 동안 총 세 번의 시간 변경선을 넘는다. 예를 들어 밴쿠버가 오전 8시일 때 에드먼턴은 9시, 사스카툰과 위니펙은 10시, 토론토는 11시다. 각각의 시간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3시간의 시간 변경선을 넘어 드디어 토론토에 도착했다. 4일 만이다.온타리오주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인 세인트 제이콥스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개신교의 한 분파인 재침례교파로 알려진 메노나이트 교파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고 사는 이곳은 고적하고 차분하다. 1786년 캐나다로 이주해 살고 있는 메노나이트 사람들은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이색적인 사람들이다. 전기와 자동차와 전화 없이 살아가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며 기쁨을 느끼는 자연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축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사과 농사를 짓거나 단풍나무에서 시럽을 채취해 판매하고 있다.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 중에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제품은 대개 메노나이트 사람들이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세인트 제이콥스를 뒤로하고 온타리오에서 2시간30분 거리에 있는 킹스턴으로 향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인트 로렌스 강 위에 펼쳐진 사우전드 아일랜드를 보기 위해서다.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이름처럼 딱 1000개가 아니라 1150개의 섬으로 돼 있으며 그중 캐나다령에 속한 것은 660개라고 한다.사우전드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볼트 성(Boldt Castle)이 있는 하트 섬(Heart Island)이다. 미국 뉴욕의 유명 호텔인 월도프 애스토리아호텔(현재 힐튼호텔) 소유주인 볼트가 자신의 아내 생일인 밸런타인 데이에 성을 선물했다고 한다. 사우전드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요리사가 볼트의 병든 아내를 위해 개발한 소스가 바로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다. 안타깝게도 볼트의 아내는 성의 내부 공사가 한창일 때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볼트는 이 섬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랑의 전설이 남아있어서인지 현재는 결혼식장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email protected]

1889년 선교사를 보내자는 호소문을 계기로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토론토대학의 YMCA가 게일(Gale, J. S., 奇一)과 펜윅(Fenwick, M. C.) 목사를 각각 파송하였다.

게일은 1892년까지 한국 전역에 걸쳐 전도하였고, 그 기록을 남겼다. 침례교인인 펜윅 목사는 원산을 본거지로 선교하면서 한국순회교회를 조직하여 포교하였고, 토론토의 후원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캐나다장로회는 1894년에 매켄지(Mckenzie,W.J.) 목사가 개인으로 내한하여 황해도 송천에서 전도하다가 죽은 뒤 한국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에 그리어슨(Grierson, R., 具禮善) 목사·푸트(Foote, W. R., 富斗一) 목사·매크레(McRae, D. M., 馬求禮) 목사를 파송하여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국가간의 정치적 외교는 1949년 4월 캐나다가 대한민국을 승인한 이후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유엔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 당시 캐나다는 극동과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고, 한국에는 대표부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겨우 평화질서를 찾은 때였으나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인접한 미국과 유엔결의를 열렬히 지지하고, 유엔의 통제와 권위 밑에서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안보활동의 일부를 담당하는 의미에서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참전규모는 육해공군으로 육군 3개 보병대대, 해군 구축함 3척, 공군 1개 비행중대였다. 육군 총연병력(1953년 7월 27일까지) 2만 1940명, 최고 유지병력 8,123명(1952년 1월), 휴전 당시 유지병력은 7,134명이었다. 사상자는 전사 309명(장교 11), 전상 1,202명(장교 59), 실종 32명(장교 2)으로 총 1,543명(장교 72)인데 실종 32명은 포로로서 전원 송환되었다.

캐나다 육군은 영연방 제27보병여단에 배속되어 미제9군단의 지휘 아래 선더볼트작전·킬러작전·리퍼작전 등에 참여하였고, 가평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통령부대표창을 받았다. 그 밖에 백일리전투·철원지구 정찰권 더크작전·클래이모어작전·코만도작전·페퍼포트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1963년에 처음으로 주캐나다 대사(겸임)가, 1964년에는 주한 캐나다대사(겸임)가 각각 임명되었고, 1964년 8월에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이, 1974년 1월에 주한 캐나다대사관이 설치됨에 따라 양국관계가 정상궤도에 올랐다. 1970년과 1975년에는 주밴쿠버 총영사관과 주토론토총영사관도 각각 개설되었다.

그 뒤 1979년 2월에 우리나라 외무장관이 캐나다를 공식방문하였는데, 같은 해 11월에 캐나다의 상원의장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조문사절단을 인솔하고 방한하였다. 1980년에 주몬트리올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1981년 3월에 상원의장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경축특사로 왔으며, 같은 해 캐나다에서 열린 연례통상장관회담에 우리나라 상공부장관이 참석하였다. 또한 한·캐나다의원친선협회의 양국대표단의 상호방문도 이루어졌다.

캐나다의 트뤼도(Trudeau, P.) 수상이 1981년 9월 방한함에 따라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8월 아프리카 4개국 순방 후 캐나다를 공식방문하였다. 이 후 여러 고위장관급 인사의 상호방문교류가 이루어졌으며, 국제의원연맹 등 국제회의에 상호 참가하였다. 1984년 캐나다의 자유당 전당대회와 진보보수당 신정권수립 최초의 하원개원 때도 우리나라 의원대표가 참석하였다.

남북한 분단상황에 대한 캐나다의 정책은 남한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으로, 북한과의 공식적 외교관계는 없다. 캐나다는 남북대화를 통한 우리 나라의 평화통일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양국간에는 무역협정(1966.12.)·경제기술협력협정(1971.4.)·원자력개발 및 응용에 관한 협정(1976.1.)·이중과세방지협정(1978.2.)·공업소유권 부여와 보호에 관한 협정(1979.2.)·방산품(防産品) 품질보증 협정(1984.11.)·항공협정(1988.12.)·사회보장협정(1997.1.) 등을 체결하고 있다.

양국의 통상관계는 1988년의 경우 대한 수출 9억 6900만 달러(석탄·광물·펄프)이고, 수입은 14억 5079만 3761달러(의류·기계류·전자제품)를 기록하였으나 2015년 현재 대한 수출은 41억 6000만 캐나다달러이고, 수입은 72억 5000만 캐나다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과는 1987년의 경우 대북한 수출 581만 달러(소맥·사무용구), 수입 134만 달러(의류·야채류)를 나타내었다.

캐나다에 진출한 우리나라 은행으로는 외환은행과 한일은행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캐나다은행에는 몬트리올은행·노바스코샤은행과 로열은행·내셔널은행 등이 있다.

포항제철의 석탄광개발은 투자규모 5,900만 캐나다달러, 참여지분 20%로 1983년 9월에 준공하여 생산을 개시하였으며, 쌍용의 석탄광개발은 투자규모 135만 캐나다달러, 참여지분 15%였다.

우라늄광개발에 있어 한국전력의 경우 1983년에 투자규모 270만 캐나다달러, 대우의 경우 1982년에 투자규모 400만 캐나다달러이며, 투자지분에 있어서는 각각 4.5%와 10%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정부투자기관으로서는 KOTRA와 한국전력이 진출하여 있다. 장기수입계약을 맺고 있는 것은 한국전력의 발전용 탄, 포항제철의 유연탄, 쌍용의 석탄, 온산 동제련소의 동정광(銅精鑛) 등이다.

IDRC는 1976년 9월 우리나라와 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고, NRC는 한국표준연구소 및 한국과학재단과 기술교류하고 있다. 1976년 1월 한·캐나다원자력협정체결 결과 1982년 3월에 한·캐나다원자력기술협력회의 및 공동상설위원회의 설치로 원자력기술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에 민간기업체의 기술협력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77년 캐나다로부터 은대구 250쿼터를 배정받은 바 있다.

1990년 9월 캐나다와 문화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으며, 양해각서 체결 이전에도 민속예술단 등 민간단체의 문화교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리틀앤젤스가 1971년부터 4회 캐나다에서 공연하였으며, 국립무용단이 1982·1984년(2회), 국립국악원연주단이 1972·1979년(2회), 선명회합창단이 1972년에 공연하였다.

1985년 9월에는 토론토에서 한국문화영화의 주간행사가 있었으며, 10월에는 사물놀이팀이 캐나다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984년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내에 ‘캐나디안 스타디스 프로그램(Canadian Studies Programme)’이 발족되어 한·캐나다이해교류증진을 위하여 연 4회 정도 캐나다 각계인사의 강연과 세미나를 열고 있다.

역사적으로 캐나다 땅에 맨 처음 발을 디딘 한국사람으로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본명 金點童) 부부인데, 그들은 1895년 7월 온테리오주 글렌부엘(Glen Buell)이라는 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유학생 제1호는 김일환(1905)인데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뉴욕으로 이주, 사업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본격적인 한국인 캐나다이주는 1960년 중반 미국 혹은 독일 등 제3국을 경유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한국계 캐나다인들은 토론토·밴쿠버·몬트리올·에드먼턴·캘거리 등지에 살고 있으며, 가장 집중된 곳은 토론토로서 약 4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토론토에 사는 한국인의 경우 약 45%가 자기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11.4%가 기술직, 12.19%가 노동, 사무직이 6.6%, 전문직에 종사하는 수는 9%에 해당한다. 한인들의 수입은 캐나다인 평균수입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온테리오 한인실업인회는 1,500개 이상의 자영기업인들의 모임으로 막강한 경제인연합회이다.

이민역사가 짧고 언어·풍습 등의 차이와 소수민족으로서의 애로가 있어, 교민1세 중 정치적·사회적으로 현저한 진출자는 아직 없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교민2세의 사회진출이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캐나다 이민진출 현황은 매년 증가하여 총 이민자 수의 1.1∼1.5%를 점유한다. 1995년 1월 말 재캐나다교포는 7만 1241명이고, 체류자는 1,791명이다. 2015년 기준으로 캐나다에 약 17만명의 한국교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주요 교민단체로는 캐나다한인총연합회, 지역별 한인회 17개 지역, 대한체육회 캐나다지부, 재(在)캐나다한인학자회, 올림픽후원회 6개 지역, 캐나다태권도협회·한인실업인협회·한인신용조합 등이 있다.

2016년 11월 10일부터 캐나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전자여행허가(eTA)를 승인받아야 한다. 또 전자여행허가를 받기 전 「범죄경력회보」(실효된 형 포함)을 발급받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범죄기록은 캐나다 이민부에 이민법상 사면을 신청하여 승인을 받아야 비자 발급 시 문제가 없다.

캐나다와 우리나라는 국제정세 분석에 대한 인식을 대체로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관계에서 캐나다는 우리나라를 계속 지지할 것이며, 북한에 대한 정책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캐나다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활력에 차 있으며, 급성장의 추세에 있으므로 무역이나 이민 등을 통하여 캐나다의 이익과 번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나다 정부는 향후 이 지역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계속 추구하게 될 것이다. 특히, 무역과 경제 분야에서 1985년 현대자동차에 의한 승용차조립생산공장의 단독투자 설립계약을 비롯하여, 그 동안 양국간의 교역이 급증하고 있어 앞으로도 경제관계가 깊어질 전망이다.

1980년대에는 캐나다의 대한국 무역역조 폭이 컸다. 1984년의 적자액이 2억 4000만 달러였고, 1985년 상반기에도 2억 1000만 달러를 넘었으므로, 이에 따른 무역역조 시정요구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가 이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1990년대 현재 한국의 대캐나다 교역은 대체로 수출·수입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1993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은 캐나다의 세계7위의 교역상대국이며, 캐나다는 한국의 제12위 교역상대국이다.

2015년 기준 캐나다의 대한국 수출은 40.3억 달러, 수입은 78.8억 달러이다. 캐나다의 대한국 주요 수출품은 광물 연료 및 석유, 곡류, 광물, 그리고 육류이다. 캐나다의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 전기기기, 기계류, 그리고 철강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501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캐나다와 우리나라와의 문화사적 관계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를 서방세계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Corea’라는 말이 캐나다에서 출판된 문헌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토론토대학 내 낙스신학교의 교지(Knox College Monthly)이다. 이 교지에 코리아에 선교사를 보내자는 호소문이 실렸고, 이 호소문에 응한 사람이 게일이다.

게일은 1888년에 토론토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그 해 12월 12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게일은 ‘훌륭한 선교자, 학자 또는 저술가’로 불리었고 1912년에 캐나다에서 출판된 인명사전에는 게일을 가리켜 ‘한국을 서방세계에 소개한 가장 으뜸가는 문필가’라고 칭하였다. 게일이 한국에서 은퇴하기까지(1927) 약 40여 년간 번역을 포함한 한국어 저서가 48권에 이르고, 영문 저서도 10여 권이나 된다.

그의 저술로 특기할 만한 것은 『영한사전 English-Korean Dictionary』(1897), 영문소설 「Vanguard」(1904)가 있고, 그 밖에 한국을 서방세계에 소개하는 『Korea in Transition』(1909)·『Korean Folk Tales』(1913)·『History of the Korean People』(1926) 등이 있다.

『Pilgrim’s Progress』(천로역정)과 『Robinson Crusoe』(로빈슨크루소)를 한글로 번역하여 서양의 문학작품을 한국에 소개하였고, 『춘향전(春香傳)』·『구운몽(九雲夢)』 등을 영역하여 우리 문학을 서방에 소개하였다.

게일은 문화사적 측면에서 한국과 서양을 잇는 교량의 구실을 한 것뿐만 아니라 개화기에 한국의 젊은이들, 가령 이승만(李承晩)·이상재(李商在) 등에게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을 고취시키는 데도 핵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캐나다교민들은 1988년 그의 선교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 모교회에 기념동판을 세워 게일의 업적을 새겼다.

게일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캐나다인으로는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을 창설하고 언더우드(Underwood,H.G.) 후임으로 연세대학교 2대 총장을 지낸 애비슨(Avison,O.)이 있다(1985년 연세대학교 동문회는 그를 기념하는 석탑을 그의 모교인 토론토대학에 세웠다). 역시 당대인으로 평양에서 맨 먼저 선교사업을 시작한 홀(Hall,W.) 의사가 있으며, 하디(Hardy,R.)와 펜윅도 모두 캐나다 출신들이다.

캐나다인으로서 일본의 침략을 서양에 폭로한 스코필드(Schofield,F.W.)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The Tragedy of Korea』(1908) 또는 『Korea’s Fight for Freedom』 등을 저술한 매켄지는 영국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의 만행을 『Daily Mail』(London)을 통하여 폭로하였다.

그 해 말 그는 일본에 의하여 추방당하였으나 1906년 다시 내한, 한국·만주 및 중국에 뻗친 일본의 제국주의 야심을 『The Unveiled East』(London, 1907)라는 책을 통하여 세계에 폭로하였다.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효시는 1973년에 토론토대학 종교학과에 개설된 한국종교이다. 당시의 책임교수는 맥도널드(McDonald,R.) 박사인데, 그의 양친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맥도널드(McDonald,D.A., 梅道捺)이다. 당시 수강생은 20명이었다고 한다.

그 뒤 토론토대학의 동양학부에서 한국문화사(유재신)·한국언어(백웅진)·한국예술(Smith, R. M.)을 강의함으로써 한국학의 기틀을 놓았고, 현재 보강된 3명의 강사와 객원교수가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객원교수들은 그들의 전공에 따라 역사·문학·예술·정치·사상 등을 강의한다. 현재 학부에서 14과목, 대학원에서 4과목을 강의하고 있으며, 370여 명의 학부생과 4명의 대학원생이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다. 15여년 전 약 20여 명의 학생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학 발전은 강좌의 확장과 학생수에서뿐 아니라, 토론토대학 동양학부 부장이 한인교수로(백응진) 임명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토론토대학 내 신학대학원의 한국교회사 강의[유영식(劉永植)]는 캐나다 종교계에 한국을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외에도 맥길대학과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에서도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토론토대학 한국학과는 1979년 토론토에 거주하는 교민들로 토론토대학 한국학과 후원재단을 구성하여 본국 학술진흥재단과 협력하여 한국학을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학은 동아시아과의 중국학과 일본학과와 더불어 질적·양적으로 평준화되어 동양삼국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활동은 캐나다 아시아학회를 통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한국학 학자들은 국내 및 국제학회에 참여한다. 1988년 제6차 국제한국언어학회가 토론토대학에서 열렸고, 발표된 논문들은 『Papers From the Six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Linguistics』(1988)라는 제하에 출판되었다.

한국학 관계의 출판물을 간략해 보면, 『Modern Korean Syntax』·『Korean and Asian Religious Tradition』·『Shamanism:The Spirit World of Korea』·『Introduction of Buddhism to Korea』·『Earlier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A Study in History 1888∼1895』 등이 있다.

캐나다는 ‘바다와 바다(A Mari Usque Ad Marie)’, 즉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천연적 수평문화의 나라이다. 이 수평선적 문화 위에 수직적으로 유입된 각 이민족의 문화를 이식하여 모자이크문화를 창조하려는 정책이 미국적 정책(melting pot)과 다른 캐나다의 복합문화정책이다. 그래서 정부는 정책적으로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보유하고 사회에 보급하도록 권장한다.

토론토의 경우 매년 열리는 각 민족의 향연인 카라반(caravan)행사에 이곳 한인들은 서울시를 꾸며 본국의 문화예술단체를 초빙하기도 하고, 주민들 자체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한다.

약 30여 년의 짧은 이민역사에 비추어 교민들의 문화적 활동은 활발하다. 1965년 12월에 발족한 토론토한인회는 초기에는 교민들의 영사 업무를 비롯, 이민정보·문화행사의 대명사 노릇을 하였다.

낙스장로교회의 당회록에 의하면 종교라는 이름 아래 최초의 교민집단을 형성한 것은 1967년이고, 현재 토론토지역에는 100여 개의 개신교교회와 2개의 천주교성당과 3개의 사찰이 있어, 교민의 종교생활을 돌보고 있다.

언론이 교민사회에 끼친 기여와 영향은 자못 크다. 『한가주보(Korea Canada Times)』라는 제하에 교민 최초의 신문이 1971년 3월 26일 창간호(당시 주간지)를 발간하여 약 1년 남짓 계속되다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그 뒤 얼마 동안 교민을 위한 신문이 없다가 1971년 시카고판 『한국일보』가 보급되었다.

1972년 11월 29일 『Korean Journal』을 발간하였고, 연이어 1973년 10월 24일 『New Korea Times』, 1979년 2월 23일 『민중신문』, 1981년 6월 『한국일보』(Canada Newsrk가 폐간되고 한국일보 발행), 1984년 1월 1일 『동아일보』, 1984년 11월 8일 『Korean Digest』, 1987년 4월 15일 『Canada 조선』 등이 발간되었다.

토론토교민들로 구성된 한인장학재단은 장학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선발된 한인과 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줄 뿐 아니라,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선발하여 매년 장학금을 지불하고 있다.

또한, 이 장학회는 매년 비한국계 2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줄 뿐 아니라, 신체장애자 1명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수여하며, 토론토대학 한국학과에서 수학하는 한국학 연구생 중 우수생 2명을 추천받아 장학금을 지불한다. 현재까지 장학금으로 수여한 금액은 80여만 달러에 달한다.

1977년에 발족한 재캐나다문인협회는 아동문학작가인 이석현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작품은 물론, 동인지 『이민문학』(1979)·『이민도시』(1980) 등을 출판한 바 있다. 협회원뿐 아니라 일반 교민들을 위한 창작 임상강의를 주관하기도 하고, 정기동인발표회도 갖는다.

교민들로 구성된 한인합창단(1979.9.)은 매년 성탄절을 기하여 헨델(H○ndel, G. F.)의 「메시아」를 공연하며, 한인들로 구성된 한인교향악단(1980.8.)은 국내 혹은 국외에서 활약하는 한인 음악인들을 초청,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한국음악예술을 서방에 전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인들로 구성된 재 캐나다미술인협회가 있어 예술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한인들만의 극단 ‘얼’이 1982년 9월 창단되어 매년 우리의 극을 공연하고 있다. 대표적인 공연으로 「맹진사댁경사」(1983)·「이수일과 심순애」(1985)·「방자전」(1990) 등이 있다.

캐나다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한국유물 소장으로는 매크레가 죽은 뒤 소장하고 있던 것을 그가 그의 딸 헬렌(Helen)이 오타와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얼마간의 유물이 있다. 토론토에 있는 유명한 온테리오왕립박물관에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한국 구석기·청동기시대의 돌도끼 등 희귀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맥도널드라는 선교사가 주로 평안도지역에서 수집하였던 것을 그의 아들 맥도널드가 소장하고 있다가 그가 죽자 그의 미망인이 왕립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다.

왕립박물관은 한국문화소개 전시회를 3년에 걸쳐 캐나다 전역을 돌며 가진 바 있다. 특히, 1984년에는 재캐나다한인들로 한국문화예술진흥협회가 조직되어 온테리오왕립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을 설립하고, 우리 문화재를 수집, 보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1년 각계각층의 교민들로 구성된 한인상위원회는 한인사회에 공로·문화·예술·봉사 또는 학술면에서 기여한 자랑스러운 한인 및 서양인을 선정해 매년 표창하기도 한다.

통유리 열차타고 캐나다 횡단…고개드니 로키산맥 대자연이 눈앞에

비아레일에서 백미로 꼽히는 비아레일 전망 칸. [사진 제공 = 비아레일]

◆ 캐나다, 엔데믹 시대 왜 열차일까

◆ 캐나다 최고의 창문, 캐나디안

비아레일에서 백미로 꼽히는 캐나디안 라인. [사진 제공 = 비아레일]

◆ 호텔 통째 옮겼더니…밤이 더 즐겁다

비아레일 침대칸. [사진 제공 = 비아레일]

◆ 한국 여행족이 열광하는 캐나디안 라인

▶ 비아레일 100배 즐기는 팁 = 열차 안 즐거운 삼시 세끼에 시원한 바다 풍경까지 결합된 오션 코스도 있다. 황혼이 질 무렵 몬트리올을 떠난 열차는 퀘벡 시티를 지나 작은 소도시들의 불빛이 가로등처럼 깜박이는 밤을 관통한다. 새벽녘부터가 오션 타임이다. 퀘벡주(州)에서 출발해 뉴브런즈윅주(州)와 노바스코샤주(州)의 주요 도시를 거쳐 핼리팩스까지 1346㎞를 달려오는 동안 세인트로렌스만의 해안선이 코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다. 하룻밤을 보낼 르네상스 캐빈 역시 낮 동안의 의자가 밤사이 두 사람을 위한 2층 침대로 변신한다.

안락한 의자에 파묻혀 독서를 즐기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 풍경이 눈 쌓인 로키산맥이라면? 몇 페이지를 더 넘긴 후 시선을 돌렸을 때, 이번에는 빙하가 섞인 파스텔 톤 푸른 호수가 창을 메우고 있다면? 절대 꿈이 아니다. 캐나다 대자연을 달리는 열차 여행을 한번이라도 해본 여행 고수라면 이미 경험한 투어 코스니까. 호젓하지만 심심하지는 말 것. 엔데믹 여행의 언택트한 조건을 만족시킬 것. 그렇다면 볼 것 없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버킷리스트 첫 줄에는 ‘캐나다 열차 여행’이 써 있을 테니까.대한민국의 100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 캐나다의 광활한 대륙을 가장 편하고 수월하게 여행하는 법. 당연히 기차다. 준비할 것? 사실상 몸만 가면 된다. 굳이 챙겨야겠다면, 필수 지참 리스트 정해드린다. 그동안 못했던 가족과의 대화, 읽고 싶은 책,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숨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마음의 여유 등이다.열차 선택, 고민할 것도 없다. 무조건 비아레일(Via Rail)이다. 이 열차는 캐나다 서부와 동부, 총거리 1만4000㎞를 연결하는 캐나다 국영철도다.가장 마음에 드는 건 속도. 정확히 구름 빠르기 수준인 시속 50㎞ 남짓. 천천히 이동하니, 딱 이 속도로 풍광이 눈에 꽂힌다. 사실상 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느리니, 마음에 여유도 절로 생긴다. 캐나다 대자연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충분한 셈. 오죽하면 ‘지상의 크루즈’라는 애칭까지 붙었을까.캐나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비아레일의 핵심은 캐나디안 노선이다. 여행 좀 한다는 고수들은 아예 ‘캐나다 열차 여행의 자부심’으로 이 노선을 꼽는다. 루트도 압권이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두 도시, 서부의 밴쿠버와 동부의 토론토 사이 장장 4466㎞ 거리를 잇는다. 도시에서 시작된 풍경은 숲과 호수를 지나 대초원을 달리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될 무렵 로키산맥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여기서 잠깐. 이 노선이 캐나다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이유, 객차의 창문이다. 광활한 대자연의 나라 캐나다 하고도 압권인 풍광만 잡아낸다고, 이 객차의 통창, ‘캐나다 최고의 창문’이라고 불린다. 가능한 한 최대 크기의 조망을 확보하기 위해 통유리 창을 천장까지 끌어올린 것도 매력이다. 창을 스치는 다양한 자연의 풍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담길 수밖에 없다.비아레일 캐나디안 라인에는 3개 타입의 클래스가 있다. 프레스티지, 슬리퍼 플러스 클래스, 이코노미 등이다. 슬리퍼 플러스 클래스와 프레스티지 클래스는 럭셔리 그 자체. 열차 안에서 먹고 자는 시간 전부를 즐거움으로 만들어준다. 독립된 공간이 주어지는 언택트 투어가 가능해 엔데믹 시대, 1순위로 마감되는 클래스다. 요리도 특별하다. 열차의 주방에서 셰프가 갓 조리해낸 먹방 코스가 풍경과 버무려진다. 사소한 불편함은 배정된 담당 컨시어지에게 콜을 하면 끝. 여행자는 오로지 풍경만 즐기면 된다.열차의 밤은 어떨까. 캐나디안 노선에서 밴쿠버부터 토론토까지 이동할 경우 열차에서 ‘3박’을 지낸다. 압권은 매너 슬리핑 카가 있다는 것. 열차의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방식이어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낮 동안에는 서로 마주 보는 좌석이었다가 밤이면 커튼으로 가려진 2층 침대로 변하는 객실이 있는가 하면, 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된 1인용 캐빈, 2인용 캐빈은 방해받지 않는 밤을 보장한다. 2개의 캐빈 사이 벽을 제거하면 4인을 위한 독립적인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 스위트로 돌변하기도 한다.업그레이드된 서비스를 위해 2015년 도입한 프레스티지 클래스는 열차에 호텔을 통째 끌어들인 구조다. 프레스티지 카의 2인용 캐빈은 더 넓은 공간과 전망을 확보하고 평면 모니터, 냉장고, 가죽 소파(침대 겸용), 개인 욕실과 화장실까지 완비하고 있다. 사소한 일을 처리해주는 전담 컨시어지 서비스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캐나디안 라인 중에 한국 여행객족이 찜한, 최고의 인기 구간도 있다. 밴쿠버에서 출발해 기차에서 1박을 해 캐나디안 로키의 핵심, 재스퍼까지 가는 루트다. 약 20시간이 소요된다. 캐나디안 로키로 향하는 기차여행은 밴쿠버 퍼시픽 센트럴 역이 시작점이다.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체크인도 해야 하고 짐도 부칠 수 있다. 여기서 주의사항 한 가지. 열차 내에서 1박을 하니, 세면도구 등 간단한 짐을 가지고 탈 것. 슬리퍼 플러스 클래스를 예약했다면 밴쿠버 역에서 라운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수하물 크기도 내가 예약한 기차 좌석 클래스마다 다르니 예약할 때 확인은 필수다.이 구간 골든타임은 선셋이다. 기다리던 저녁식사 시간이 오면 식당칸으로 가서 만찬을 즐기면 된다. 슬리퍼 플러스 클래스에는 무알코올 음료와 식사가 포함된다.빵과 수프로 시작되는 코스 요리를 여유 있게 맛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가에 어둠이 내린다. 비아레일의 매력 중 하나는 이렇게 시간에 따라 변하는 캐나다의 깨끗한 하늘을 마음껏,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아쉬움이 남는다면, 저녁식사 후 천장까지 유리로 된 파노라마 칸으로 이동하면 끝. 제대로 밤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깜깜한 밤, 파노라마 칸의 불이 켜지질 않아 정전인가, 싶은 찰나, 승무원의 설명이 기가 막힌다.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을 볼 수 있게 실내등을 최대한 줄였다’는 것.어떤가. 캐나다의 자연 속.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별들을 이정표 삼아 달리는 비아레일은 은하철도999가 검정 은하수를 유영하듯, 달린다. 말이 되는가. 열차가 꿈만 같다니. 종착역이 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 열차 여행이다.·캐나다관광청 공동 기획[신익수 여행전문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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