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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일밤투의 두 번째 미국 회사소개 : Dell Technology. Inc. (DELL)
CEO 마이클 델이 회사를 설립하여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부터
상장폐지/재상장 후 현재의 근황까지 정리해보았습니다. (1부, 총 3부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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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CEO 열전] 27살에 세계 500대 PC 기업을 일군 천재 사업가 …
지난 2013년, 델(DELL)은 창업자이자 최대주주였던 마이클 델(Michael Saul Dell)은 델의 모든 주식을 인수한 후 상장폐지를 진행했다. 자본금 1,000달러 …
Source: it.donga.com
Date Published: 7/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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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델 – 요다위키
마이클 사울 델(Michael Saul Dell, 1965년 2월 23일 ~ )은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자선가이다.세계 최대의 테크놀로지 인프라스트럭처 기업 중 하나인 Dell …
Source: yoda.wiki
Date Published: 9/23/2021
View: 3672
컴퓨터 업계 최후의 거물 – 포브스
실리콘밸리의 회의론자들, 월스트리트의 적들과 수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마이클 델은 마침내 세기의 거래를 이뤄냈다. 대출과 뒤집기를 통해 500 …
Source: jmagazine.joins.com
Date Published: 1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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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낮일밤투: 낮에는 일, 밤에는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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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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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사울 델(영어: Michael Saul Dell, 1965년 2월 23일 ~)은 미국 비즈니스계의 거물, 사업가, 자선가, 작가이다. 개인용 컴퓨터(PC)의 세계적인 판매기업들 가운데 하나인 델의 창립자이자 CEO이다. 2012년 포브스 억만장자 목록에서 전 세계 41위의 부자로 순위를 올렸으며, 2014년 12월 기준으로 22,400,000,000 달러의 순재산액을 가지고 있다.[1]
각주 [ 편집 ]
[IT CEO 열전] 27살에 세계 500대 PC 기업을 일군 천재 사업가, 마이클 델
[IT CEO 열전] 27살에 세계 500대 PC 기업을 일군 천재 사업가, 마이클 델 이상우 [email protected] [IT동아 이상우 기자]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은 투자자를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성공적인 기업공개(IPO)는 그 기업의 가치를 높인다. 반대로 주식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상장폐지’는 기업에게 사형선고와 같다. 대부분의 상장폐지 원인이 자본잠식이나 부도, 파산 등인 만큼 좋지 않은 이미지까지 남겨 기업의 재기를 어렵게 한다.하지만 일부 상장폐지의 경우 회사가 망한 것과 관계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부실기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상장폐지하고, 외부 간섭 없이 대표가 경영권을 행사해 회사의 효율적인 운영과 장기적인 성장을 노리는 전략이다. 주주들의 이익을 생각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데 급급한 주식회사와는 달리(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지만), 더 먼 곳을 바라보며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이러한 자신 상장폐지의 대표적인 사례가 글로벌 IT 기업 델(DELL)이다. 지난 2013년, 델(DELL)은 창업자이자 최대주주였던 마이클 델(Michael Saul Dell)은 델의 모든 주식을 인수한 후 상장폐지를 진행했다. 자본금 1,000달러로 시작했던 회사가 주식시장을 거쳐 성장한 후, 다시 창업자의 손에 돌아온 것이다. 마이클 델의 개인회사가 된 델은 PC 중심의 기업에서 서버와 스토리지 등 데이터 센터 및 클라우드 인프라 기업으로 체질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델 <델의 창업자 마이클 델>
사업 수완이 좋은 10대 소년
델의 창업주인 마이클 델은 1965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업에 관한 안목이 높은 편이었다. 그가 우표를 팔아 큰 돈을 벌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평소 우표를 수집하던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 오래되거나 특별한 기념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됐고, 우표 판매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확보한 우표를 구매자에게 대신 판매하는 방법으로 12세란 어린 나이에 2,000달러를 벌었다.
16세에는 신문 정기 구독 영업을 통해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당시 지역 신문인 휴스턴 포스트는 전화나 방문 등 일반적인 방식으로 신문 구독을 권유했지만, 일반적인 가정은 한 번 구독하던 신문을 큰 이유가 없으면 바꾸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신혼부부와 새로 집을 장만해 이사한 가정이다. 이들은 새로운 신문을 구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마이클 델은 법원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해 새로운 주택 구매자 목록을 확보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영업한 결과 1년 만에 1만 8,000달러 정도를 손에 넣었다. 이는 자신의 역사 교사의 연봉보다도 많은 돈이었다.
컴퓨터 제조업에 뛰어 들다
마이클 델은 곧 컴퓨터 제조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적인 IBM 호환 PC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부품 가격은 약 700달러 정도면 충분했지만, 소매업자는 완성된 PC를 2,000달러에 구매해 소비자에게 3,000달러 정도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직접 제작하면 소매업자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판매하면서도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애플 II 컴퓨터를 직접 분해해보고 내부 설계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만큼 그에게는 이러한 작업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이클 델
1년 뒤인 1984년에는 PC’s Limited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등록했으며, 대학교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선다. 같은 해 5월에는 1,000달러의 자본금으로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Dell Computer Corporation)’을 정식 설립한다. 델은 1985년 처음으로 자체 제작한 컴퓨터인 ‘터보PC’를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매년 성능이 개선된 제품을 선보였고, 1986년에는 매출액이 3,40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IBM과 경쟁하고 싶어요
델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네 삶에서 하고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IBM과 경쟁하고 싶다’고 답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마이클 델은 기존 PC 시장의 강자 IBM과 경쟁하기 위해, 새로운 경영 전략을 도입했다. 신생회사인 만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택배로 제품을 배송 받는 것을 꺼리는 소비자를 위해 30일 환불 보증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마이클 델
이 프로그램은 현재 델 제품 구매자가 30일 이내에 더 낮은 가격을 발견한다면 그 차액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이클 델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부품을 골랐는지 자신이 직접 검수했으며, 고용한 기술자에게는 IBM 등 다른 경쟁사보다 더 성능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내용이 매체를 통해 소개되면서 소비자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와 그의 회사가 언제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업 초기, PC의 주요 부품인 CPU를 대량으로 구매했는데, 이후 CPU의 가격이 떨어져 곤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런 실수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웠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경험 있는 경영진을 고용해 일상적인 업무를 맡기면서 자신은 장기적인 전략에 집중할 수 있었다.
27살, 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하나를 만들다
1990년대에 들어서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은 아일랜드 리머릭에 제조공장을 세우고,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의 지역을 커버했다. 이미 해외에서도 델의 PC를 주문하는 만큼, 해외에서 직접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2년, 그의 회사는 미국 포츈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 꼽혔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이듬해 호주, 일본 등을 시작으로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제품 역시 기존의 PC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서버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파워 엣지 서버 제품군을 출시하기도 했다.
마이클 델
<텍사스 오스틴의 PC 생산 공장과 마이클 델>
그는 1998년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마이클 & 수잔 델 캐피털(MSD Capital)이라는 투자전문 회사를 세우고 일상적인 업무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이 캐피털을 바탕으로 MSD 재단을 세워 자선 사업에 나선다. 2004년에는 자신의 대표 자리까지 전문 경영인에게 넘겼다.
하지만 이사회의 요청으로 2007년 다시 델 컴퓨터의 대표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2000년 후반, 미국에서 호황을 누리던 IT 산업의 거품이 빠지면서 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델 역시 주가 하락 등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노트북 배터리 불량으로 화재 사고가 발생하면서 제품을 리콜하는 등 여러 악재가 발생한 것도 마이클 델의 대표 복귀를 부추긴 원인이다.
기업의 체질을 바꿔라
다시 경영자로 돌아온 마이클 델은 소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불만을 처리하기 위한 서비스인 ‘아이디어스톰’을 신설한다. 이와 함께 스토리지(저장장치), 네트워크 장비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엔터프라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력 사업인 PC 제조를 넘어 종합 IT 솔루션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다.
마이클 델
<마이클 델은 PC 제조 기업인 델을 종합 IT 솔루션 기업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실제로 오늘날 모바일 기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PC 시장은 해를 거듭할 수록 축소되고 있으며, 그나마 수요가 발생하는 곳은 울트라모바일이라 불리는 휴대성 좋은 제품과 기업에서 사용하는 비즈니스 노트북 정도만 작은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IT 환경은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차세대 기술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당시 델 컴퓨터가 PC 제조에만 계속 집중했다면 줄어드는 시장 규모 속에서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중국 기업과 경쟁하며 더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마이클 델은 이러한 체질 개선에 만족하지 않고, 더 장기적인 전략을 준비한다.
스스로 상장을 폐지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이 되다
2013년, 마이클 델은 사모펀드인 실버레이크와 손잡고 주식회사 델의 모든 주식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상장을 폐지하고 비상장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주식 인수작업은 2014년 마무리되었다.
사실 창업자가 주도하는 자진 상장폐지는 매우 드문 사례다. 일반적인 상장폐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업 경영이 어려워 퇴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자진 상장폐지라 하더라도 사모펀드가 거품이 낀 기업을 인수해 회사를 분할 및 매각한 뒤 알짜배기만 남겨 재상장해 이득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와 달리 마이클 델은 주주의 간섭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단기적인 이익이 아닌 미래의 사업을 목표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이를 통해 델 컴퓨터는 주주총회 같은 번거로운 절차 없이 경영자의 판단만으로 미래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PC 제조업에서 IT 솔루션 기업으로 탈바꿈 하기 위한 투자도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마이클 델의 결정을 IT 매체들은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이 탄생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대주주였던 마이클 델은 여전히 최고경영자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회사를 이끌었다. 특히 그가 델 컴퓨터의 미래 먹거리로 여긴 서버, 스토리지 등 엔터프라이즈 분야의 사업이 성장하면서 델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성장에 힘입어 마이클 델은 2015년 글로벌 1위 스토리지 솔루션 기업인 EMC를 67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엔터프라이즈 솔루션 분야에서 입지를 확고히하기 위해서다. 잘하는 분야였던 서버 등에는 꾸준히 투자하고, 못하는 분야였던 스토리지는 인수로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마이클 델이 EMC를 인수한 일은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기술 인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이클 델
<마이클 델은 스토리지 기업인 EMC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이 인수를 통해 EMC의 자회사인 가상화 솔루션 기업 VM웨어의 지분까지 보유하면서 클라우드 솔루션 기업으로 진화할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실제로 VM웨어는 클라우드 시스템 관리 소프트웨어 시장과 데이터센터 자동화 소프트웨어 시장의 선두 기업으로, 델의 하드웨어와 만나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2017년 현재(1분기 기준) 델은 PC와 서버 시장에서 여전히 선두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 PC 시장의 경우 중국 기업의 가격을 앞세운 공세에 밀려 3위에 머물렀지만, 미국 PC 시장에서는 여전히 HP와 함께 1~2위를 다투고 있다. 전세계 서버 시장의 경우 HP엔터프라이즈 사업부와 매출 및 출하량에서 1~2위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다. 10대부터 진행된 마이클 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 형이다.
글 / IT동아 이상우([email protected])
[CEO 열전: 마이클 델]일선 복귀한 마이클 델, 상장 폐지 택한 이유는…PC→IT솔루션으로 매출 82조원 기업 성장
실제로 오늘날 모바일 기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PC 시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축소되고 있다. 그나마 수요가 발생하는 곳은 울트라 모바일이라 불리는 휴대성 좋은 제품과 기업에서 사용하는 비즈니스 노트북 정도로 이마저 작은 규모로 성장하고 있을 뿐이다. 또 전 세계 기업들의 IT 환경은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차세대 기술을 도입하며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당시 델 컴퓨터가 PC 제조에만 계속 집중했다면 줄어드는 시장 규모 속에서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중국 기업과 경쟁하며 더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마이클 델은 이러한 체질 개선에 만족하지 않고 더 장기적인 전략을 준비한다.
스스로 상장 폐지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으로
2013년 마이클 델은 사모펀드인 실버레이크와 손잡고 주식회사 델의 모든 주식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상장을 폐지하고 비상장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주식 인수 작업은 2014년 마무리되었다.
사실 창업자가 주도하는 자진 상장폐지는 매우 드문 사례다. 일반적인 상장폐지는 기업 경영이 어려워 퇴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자진 상장폐지라 하더라도 사모펀드가 거품이 낀 기업을 인수해 회사를 분할 및 매각한 뒤 알짜배기만 남겨 재상장해 이득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델
Dell Technologies Inc. 창립자 회장 겸 CEO
마이클 사울 델(Michael Saul Dell, 1965년 2월 23일 ~ )은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자선가이다. 세계 최대의 테크놀로지 인프라스트럭처 [1]기업 중 하나인 Dell Technologies의 창립자, 회장, CEO입니다. 그는 2022년 [2]2월 현재 순자산 600억 달러로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 의해 세계 20위 부자로 선정되었다.
2011년에는 델 주식 2억4천335만주가 35억달러로 [3]1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남은 약 100억 달러의 재산은 다른 회사에 투자되어 있으며 그의 [4]이니셜을 포함한 MSD 캐피탈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2013년 1월에는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경영권 인수에서 244억달러에 Dell Inc.를 사적으로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Dell Inc.는 2013년 [5]10월에 정식으로 사기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2018년 [6]12월에 다시 상장했다.
초기 생활과 교육
델은 1965년 휴스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주식 [7]중개인인 로레인 샬롯(성명 랭팬)과 치과 교정 전문의 알렉산더 델이었다. 마이클 델은 휴스턴의 [8]헤롯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계속해서 메모리얼 고등학교에 [9]다닐 것이다. 조기 입사를 위해 그는 [citation needed]8세 때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응시했다. 그는 10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주식과 [10]귀금속에 투자했다.
델은 7세 때 첫 계산기를 구입하여 중학교 때 초기 텔레타이프 단말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5세 때, Radio Shack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고 난 후, 그는 그의 첫 컴퓨터인 Apple II를 구입했고,[11] 그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기 위해 즉시 분해했다. 델은 휴스턴에 있는 메모리얼 고등학교에 다녔고, 여름에는 휴스턴 포스트의 구독을 판매했습니다. 델의 부모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12]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는 1983년 텍사스 대학에서 프리메디션을 시작했다. 델은, 콜드 콜을 실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문 구독에 특정의 인구를 타겟으로 하는 방법을 계속 배워, 그 해 여름,[13] 18,000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델은 종업원을 몇 명 고용해, 사업 첫 해에 20만달러에 가까운 총이익을 올린 후,[14] 19세에 텍사스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비즈니스 경력
델이 서명한 PC 한정 터보 PC
마이클 델이 샌프란시스코 2010 오라클 오픈월드에서 강연
텍사스 대학 의대 신입생 시절, 델은 Dobie Center 레지덴셜 [9][15]빌딩의 2713호실에서 PC용 업그레이드 키트를 조립하여 판매하는 비공식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는 텍사스 주와의 계약에 입찰하기 위한 벤더 면허를 신청해, 컴퓨터 가게의 [16][17][18]오버헤드를 가지지 않고 입찰을 따냈다.
1984년 1월, 델은, PC를 직접 판매하는 메이커의 잠재적인 코스트 삭감이, 종래의 간접 소매 채널에 비해 큰 메리트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1984년 1월, 델은 회사를 「PC’s Limited」라고 등록했습니다. 콘도에서 운영하는 이 회사는 PC 업그레이드, 키트, 애드온 컴포넌트를 5만 달러에서 8만 달러어치 판매했다. 델은 5월에 델의 컴퓨터 주식회사로서 회사를 설립해, 노스 오스틴의 비즈니스 센터로 이전했습니다. 이 회사는 주문 접수원으로 몇 명 고용하고, 주문에 응하기 위해 몇 명 더 고용했습니다.델이 회상했듯이, 「3명의 스크류 드라이버를 6피트 테이블 앞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제조 스탭이 있었습니다. 그 벤처의 자본금은 1,[19][20]000달러였다.
1992년, 27세의 나이로, 그는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21]기업 리스트에 오른 회사의 최연소 CEO가 되었습니다. 1996년, 델은 웹상에서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이것은, 동사가 최초의 서버를 개시한 것과 같은 해입니다. Dell Inc.는[when?] 곧 [22]dell.com에서 하루에 약 1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2001년 1분기에 Dell Inc.는 세계 시장 점유율 12.8%에 도달하여 Compaq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PC 메이커가 되었습니다. 이 지표는 지난 7년 동안 순위가 바뀐 첫 사례였다. 동사의 데스크탑, 노트북, 및 서버의 출하량은, 경쟁사의 [23]매상이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전 세계에서 34.3%, 미국에서는 30.7%증가했습니다.
1998년 델은 가족의 투자를 관리하기 위해 MSD Capital L.P.를 설립했습니다. 투자활동에는 상장증권, 사모활동, 부동산 등이 포함된다. 이 회사는 8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뉴욕, 산타모니카, 런던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델 자신은 일상 [24]업무에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2004년 3월 4일, 델은 CEO에서 물러났지만, Dell Inc.의 이사회 의장에 머무르고, 당시 사장 겸 COO였던 Kevin Rollins가 사장 겸 CEO가 되었습니다. 2007년 1월 31일, 델은 이사회의 요구에 따라 CEO로 복귀해, 롤린스의 [25]뒤를 이었습니다.
2013년 마이클 델은 실버레이크 파트너스, 마이크로소프트 및 대부업체 컨소시엄의 도움을 받아 델, Inc.를 사적으로 인수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 계약은 250억 달러의 가치가 있으며 실행 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한다. 칼 아이칸은 눈에 띄는 저항을 보였지만 몇 달 후 물러났다. 마이클 델은 개인 회사의 [26]지분 75%를 취득했습니다.
2015년 10월 12일, Dell Inc.는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및 스토리지 기업 EMC Corporation의 인수를 발표했습니다. 670억달러에 달하는 이 회사는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기술 인수”[27][28]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이 [29]인수는 2016년 9월 7일에 마무리되었다.
패널티
2010년 7월, Dell Inc.는 인텔 Corporation으로부터의 미공개 지불에 관한 SEC의[30] 정보공개 및 분식회계 혐의를 해결하기 위해 1억달러의 위약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마이클 델과 케빈 롤린스 전 CEO는 각각 400만달러, 제임스 슈나이더 전 CFO는 300만달러씩 [30]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칭찬
델은, Inc.[31]지의 「올해의 기업」(24세), Worth지의 「American Business」(American Business의 톱·CEO), Financial World, Industry Week, 및 CEO(최고 경영자)를 수상했습니다. 또, 델은 1998년 미국 어카데미[32] 골든 플레이트상, 2013년 프랭클린 인스티튜트 바워상 비즈니스 리더십 [33]부문도 수상했습니다.
제휴
델은 세계경제포럼 재단위원회, 국제비즈니스평의회 집행위원회, 미국 비즈니스평의회(US비즈니스평의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미국 대통령 [34]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2020년 4월, Greg Abbott 주지사는 델을 Strike Force to Open Texas(텍사스 오픈)에 임명했습니다.이 그룹은 COVID-19 [35]대유행 기간 동안 안전하고 효과적인 주 재오픈 방법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글
델의 1999년 저서 Direct from Dell: Strategies That Revolutionized a Industry (by Harper Business)는 그의 어린 시절 삶, 회사의 설립, 성장, 실수, 그리고 얻은 교훈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 책은 캐서린 프레드먼과 [36]공동으로 쓰여졌다.
델의 두 번째 책인 Play Nice But Win: CEO의 창업자에서 리더로의 여정(포트폴리오별)은 그를 리더로 정의한 내부 싸움의 이야기입니다. 그 책은 제임스 [37]캐플런과 공동으로 쓰여졌다.
재산
Forbes는 2021년 [38]4월 현재 델의 순자산을 504억달러로 추산했습니다.
2018년 2월, 2014년에 델은 맨해튼의 One57 펜트하우스에 10050만달러를 지불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이 펜트하우스는 당시 [39]맨해튼에서 판매된 주택 중 가장 비싼 주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생활
델은 1989년 10월 28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수잔 리버먼과 결혼했습니다.이 커플은 [40][41][42]4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박애주의
1999년, Michael과 Susan Dell은 Michael과 Susan Dell Foundation을 설립했습니다.이 재단은 조성금, 도시 교육, 아동 건강 및 가정의 경제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2006년에, 수잔은 델 센터 선진화 기획 건강한 생활, 델 소아 연구소의 델 어린이 의료 센터에서 새 컴퓨터 과학 빌딩에 대한 자금을 보완하는데 5천만달러 3건강과 관련된 단체들은 텍사스 대학과 관련된:마이클 및에게 보조금에 제공했다.월 오스틴 [43]캠퍼스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 2013년에 [44]재단은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의 델 의과대학 설립에 5,000만달러의 추가 공약을 제공했습니다. 1999년 이후 MSDF는 미국, 인도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45]비영리단체와 사회적 기업에 12억3천만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델은 [46]오스틴 북서부 힐스에 델 유대인 커뮤니티 캠퍼스를 설립하는 것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1년까지 재단은 미국, 인도 및 남아프리카의 어린이 [47]문제 및 지역사회 이니셔티브에 6억 5천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습니다. 현재 이 재단은 [48]4억 6천 6백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 델은 아일랜드와 지역 사회에의 투자와 교육 [49]이니셔티브에의 서포트를 인정받아, 리메릭 대학에서 명예 경제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2년에 Michael and Susan Dell Foundation은 의학 교육에 5,00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델 의과대학은 [50]2016년부터 학생을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그는 이스라엘 [51]방위군의 친구들에게 180만 달러를 기부했다.
2017년 허리케인 하비의 여파로 휴스턴 출신인 델은 [52]구호 활동에 3,600만 달러를 약속했다.
2017년 5월, 델은 아동 빈곤에 초점을 맞춘 재단에 10억달러의 기부를 실시했습니다.이 재단은, 투자 효과와 자선 [53]기부의 양쪽 모두를 실현합니다.
2018년에는 복잡한 재무구조 조정을 통해 Dell [54]Technologies가 공개시장에 복귀했습니다.
레퍼런스
추가 정보
IT혁명의 영웅들: IT 경영의 귀재, 마이클 델
*잠깐, 이 글을 소개해드리는 위시켓은 2019년 시밀러웹 방문자 수 기준, 국내 1위 IT아웃소싱 플랫폼입니다. 현재 8만 이상의 개발업체, 개발 프리랜서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무료로 프로젝트 등록이 가능합니다. 프로젝트 등록 한 번으로 여러 개발업체의 견적, 포트폴리오, 예상기간을 한 번에 비교해보세요:) 대기업 브랜드 PC를 구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컴퓨터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조립 PC를 구매하고 있습니다. 성능과 단가를 비교해서 가장 자신에게 적절한 부품별로 구매한 다음, 그것을 적절하게 조합한 PC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용산전자상가에는 많은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직접 발품을 팔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조립 PC를 구매하였습니다. 2000년대부터 인터넷 전자상거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대형 온라인 마켓을 통해서 구매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조립 PC의 방식으로 구매하는 흐름은 온라인으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프라인이든 웹을 이용한 온라인 방식이든, 개인에게 조립 PC가 컴퓨터를 구매하는 방법에 있어서 주류가 된 것은, PC 출시 이후 초창기에 중개상을 없애고 컴퓨터를 직접 조립해서 판매하는 방식을 선택한 델컴퓨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델은 조립 PC의 세계적인 원조인 것입니다. 델컴퓨터는 이러한 제조와 판매 방식을 도입하여 미국을 넘어 세계 컴퓨터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였고, 창업자인 마이클 델은 200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축적하면서 한때 미국의 40대 이하 부호 순위 1위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 물론 마이클 델은 단순한 PC 유통 분야뿐만 아니라 서버 컴퓨터 시장에 진출해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외에도 프린터, 디지털 가전 시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수위를 다투며 IT업계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번 챕터에서는 이러한 마이클 델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s://www.pexels.com/
타고난 천재 사업가의 어린 시절
마이클 델은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태어난 지 10년 후인, 1965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델은 경제관념이 매우 강한 집안에서 자라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사업가적인 기질의 토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는데요. 아버지는 치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증권 중개사였기 때문에 식탁에서의 주제는 늘 주식이나 금리와 같은 경제 분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델의 아버지는 델이 자신과 같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3형제 중에서도 유독 사업가 기질이 강했던 마이클 델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시선으로 볼 때는 많은 외도를 했습니다. 유명한 사건 하나를 들어보면, 우표 마니아였던 아버지 친구가 우표를 수집하고 그것을 통해서 경제적인 수익도 거두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표의 가치는 높아진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마이클 델은 여기에서 사업적인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경매로 판매하는 중개상들에게 지불하는 수수료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냈고, 자신이 직접 판매하는 방식을 고안해냅니다. 훗날 성인이 된 마이클 델의 창업 모델이 되었던 컴퓨터를 직접 판매하는 사업 방식의 단초를 여기서부터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델은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자금을 마련해서 우표를 모으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웃들의 우표를 대신 판매해준다면서 구색을 다양하게 갖춥니다. 그리고 우표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잡지에 홍보해서 우표 판매를 시작하였습니다. 중간 마진을 없앴기 때문에 풍부한 제품군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우표 사업은 나름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12세의 어린 나이에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젊은 부호 마이클 델 (출처: www.businesspundit.com)
이외에도, 16살에는 신문 판매업에 뛰어들어 당시 교사의 연봉보다 높은 2만 달러에 이르는 고수익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마이클 델의 방법은 무분별하게 익명의 대중들을 상대로 판매를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구독할 만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이사를 간 사람들이나, 신혼부부가 신문을 신규로 구독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을 알아낸 후 그들의 명단을 구해서 타깃 마케팅을 펼친 결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우의 고 김우중 회장 역시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에서 남다른 사업가적인 감각을 발휘해서 다른 배달 사원보다 큰 수익을 거둔 일화가 있는데, 마이클 델 역시 사업가로서의 타고난 수완이 남달랐던 것입니다. 마이클 델의 어린 시절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성은 당시 얼리어답터였던 또래 친구들이 그러했듯이 컴퓨터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마이클 델의 경우는 조금 과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학창 시절 자신이 모은 돈으로 애플 컴퓨터를 구매할 때 집에 도착하기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기 힘들어 우체국까지 직접 가서 들고 올 정도였습니다.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 해박했던 델은 고가의 애플 컴퓨터를 완전히 해체하여 다시 조립하는 모습을 보여 부모님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 명문 텍사스 의과 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중퇴를 합니다. 그때쯤 델이 완전히 푹 빠져버린 컴퓨터를 조립해서 판매하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완제품 컴퓨터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높은 사양의 컴퓨터를 구매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학생이었던 델은 마치 사업가처럼 바빠졌고, 학과 성적도 덩달아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을 수상히 여긴 부모님이 델의 기숙사를 급습했을 때 델은 황급히 침대 밑으로 부품들을 숨겼으나 부모님은 눈치를 채고 델을 혼냈습니다. 하지만 델은 자신이 IBM과 겨루는 사업가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였고, 얼마 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처럼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델만의 방식으로 성공하다
1984년 발품을 팔고, PC 통신 등을 통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컴퓨터가 어떤 것인지, 제조 원가와 마진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낸 델은 불과 천 달러를 가지고 창업했고, 첫해에만 18만 달러, 2년 뒤인 1986년에는 6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델은 어느 순간 직접 판매 방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평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5년부터 델은 컴퓨터를 자체 제작하면서 터보 PC라는 이름을 붙였고 컴덱스라는 유명한 컴퓨터 전시회에 당시 가장 연산처리 속도가 빨랐던 IBM의 286 컴퓨터보다 2배나 빠른 성능을 가진, 12 MHz 속도를 가진 터보 PC를 절반 가격에 선보이며, 터보 PC와 마이클 델의 이름을 또 한 번 만방에 알리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컴퓨터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구매하는 것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 심리를 파악하여, 강력한 A/S 정책을 실시합니다. 무료 A/S 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24시간 전화 상담을 받아주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입니다. 또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부품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회사의 재고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공급업체에 알리는 등 당시로써는 선구적인 경영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세계 최초로 인터넷으로 컴퓨터를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이클 델은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IBM의 PC 사업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IBM을 넘어 세계 최고의 퍼스널 컴퓨터 제조업체이자 유통업체로 성장하였으니, 1965년생인 마이클 델이 불과 27세였을 때, 1992년 미국 포츈지에서 세계 500대 기업 중의 하나로 델컴퓨터를 선정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버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여 업계의 선두를 다투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1998년에는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마이클 앤 수잔 델 캐피털이라는 자선 단체를 세웠고, 2004년에는 전문 경영인인 케빈 롤린스에게 CEO 자리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왕의 귀환
2007년 복귀한 마이클 델 (출처: 델 코퍼레이션 제공)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배터리 불량 등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겹치고, 중국의 중저가 컴퓨터 공급 업체들과 경쟁해야 하는 등, IT업계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델컴퓨터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마이클 델은 이사회의 요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델은 IBM이 PC 사업 부문을 중국 업체에 전면적으로 넘기고, 소프트웨어 업체로 탈바꿈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듯이, 델컴퓨터라는 사명을 델로 바꾸고 사업 다각화를 시도합니다. 디지털 가전 시장에 진출하기도 하고, 음악 서비스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와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운영체제,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에도 뛰어드는 등 종합 IT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는 한편, 현실화되고 있는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시대를 착실히 준비하였습니다. 델이 경영을 맡으면서 2017년 PC 분야에서는 다시 미국 내 1위 기업으로 올라섰으며, 서버 시장에서는 세계 1위 업체로 등극하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내기 시작했고, 마이클 델 개인은 한때 세계 41위의 부자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마이클 델이 R&D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대단한 기술 혁신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IT 기업 중 하나를 운영하면서 선진적인 제조, 유통, 경영시스템을 창조하고 시장에 확산시킨 것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델이 만든 시스템은 소비자들에게는 큰 혜택을 주었고, 델의 경영 방식은 오랫동안 학계의 연구로까지 이어지면서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전 세계의 IT 기업들에게 본보기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청년 사업가다운 활력이 넘치는, 아직 55세에 불과한 마이클 델이 앞으로 IT업계에서 또 어떤 마법을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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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업계 공룡 ‘델’ 창업자 마이클 델이 겨누는 새 성장동력은?
비상장사로 전격 전환…IT 솔루션 기업으로 사업구조 재편
마이클 델 CEO는 2004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3년 뒤 복귀해 델의 제2 부흥기를 일구고 있다.<델 테크놀로지스>
[인사이트코리아=김동수 기자] 델은 글로벌 PC제조업계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회사다. 2020년 집계한 글로벌 PC시장에서 델이 차지하는 위치는 레노보와 HP에 이어 3위다. 국내 시장에선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강세로 인지도가 낮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글로벌 PC시장을 석권했고 이후 점유율 3위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 ‘PC업계의 공룡’으로 불린다.1000달러로 세계 500대 기업 일구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을 일궈낸 인물은 마이클 델 CEO다. 회사 창업자이자 회장을 맡고 있는 마이클 델은 어린시절부터 천부적인 사업 수완을 보였다. 12세에 우표를 팔아 2000달러를 벌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는 평소 우표를 수집하던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 오래되거나 특별한 기념 우표의 가치가 상승한다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이와 함께 경매로 우표를 판매하는 중개상들이 생각보다 높은 수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2세의 어린 소년은 당돌한 생각을 한다. ‘중간단계를 건너뛰고 우표를 직접 판매하면 돈을 벌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었다. 마이클 델은 이를 실행에 옮긴다. 우표 판매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확보한 우표를 구매자에게 대신 판매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일찍부터 직접 판매 방식의 효과를 체험한 마이클 델은 컴퓨터 판매에도 이러한 방식을 적용했다. 평소 컴퓨터 제조 사업에 관심이 많던 그는 텍사스의대 재학 중 PC 가격 상승에 중간마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PC업계의 선두 업체인 IBM의 컴퓨터를 뜯어보고 각 부품값의 합이 컴퓨터 가격을 훨씬 웃도는 것에서 창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스펙의 컴퓨터를 더 값싸게 만들어 팔겠다는 계획을 세운 그는 1984년 자본금 1000달러를 가지고 ‘PCs Limited’라는 회사를 만들어 PC 판매를 시작한다.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Dell Computer Corporation)의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이다.
1985년에는 자체 디자인한 첫 컴퓨터 ‘터보 피씨(Turbo pc)’라는 조립식 컴퓨터를 판매했고 첫해 영업이익이 무려 7300만 달러에 달했다. 회사는 매년 80%가량의 성장률을 보이면서 마이클 델은 사업 시작 4년 만에 나스닥에 회사를 상장하고 회사 이름을 공식적으로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으로 변경한다. 1990년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도 주문이 몰려들어 델은 아일랜드에 제조센터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회사가 급성장하는 만큼 마이클 델 역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델이 1992년 미국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에 뽑히며 CEO 중 최연소 타이틀까지 얻게 된다. 당시 마이클 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비상장 전환 5년…델, IT 솔루션 기업으로 재기 발판 마련
1988년 나스닥 상장 후 델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 가도를 달렸다. 당시 PC 보급률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만큼 전 세계 사람들이 잠재적 고객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2004년 마이크 델은 대표 자리를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2007년 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신개념 모바일 디바이스인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며 PC업체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간 델의 장점으로 평가받던 저비용 생산 체계를 경쟁 업체들도 모방하기 시작했고 배터리 불량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마이클 델은 이사회 요청으로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기에 이른다.
마이클 델은 위기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회사를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과거 PC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영광을 뒤로한 채 회사를 비상장 회사로 전환했다. 회사의 신용도 하락과 자본 조달에 제약이 발생할 게 분명함에도 단기 실적에서 벗어나 CEO 위주로 회사를 유연하기 재정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 기간 델의 사업 부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2015년 데이터저장소와 서버 부문 대기업 EMC를 인수해 클라우드 서버 산업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개편했다. 이듬해 인수 절차를 완료해 ‘델 테크놀로지스’가 공식 출범하며 과거 PC 위주의 사업구조에 머물렀던 델을 IT 솔루션 기업으로 재탄생시켰다. PC산업은 2011년 최고점을 찍은 코로나 팬더믹이 발생하기 전인 2018년까지 꾸준히 하락 추세를 보여왔다. 마이클 델은 이러한 트렌드를 미리 읽고 PC 위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한 셈이다.
20대 시절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마이클 델은 아직 56세다. 델을 창립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이룬 성과와 달리 젊은 CEO에 속하는 만큼, 향후 그가 델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이목이 쏠린다.
실리콘밸리의 회의론자들, 월스트리트의 적들과 수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마이클 델은 마침내 세기의 거래를 이뤄냈다. 대출과 뒤집기를 통해 500억 달러에 달하는 부를 일궜다. 이제 델의 가장 큰 야망이 눈앞에 있다. 다른 억만장자들처럼 우주여행은 아니다.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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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자선 재단 본사에서 만난 PC 산업의 개척자 마이클 델은 그날 아침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블루 오리진의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날아갔고,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지구에 머물러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델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그 전주에는 다른 억만장자인 리처드 브랜슨이 억만장자 우주 경쟁에 뛰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혁신과 야망을, 어떤 사람은 비대한 자아와 오만을 보았다. 델이 본 것은 기회였다.델은 “우리는 신생 우주 기업에 제품을 많이 판매하고 있다”며 “막대한 컴퓨터 연산력과 데이터, 인공지능 없이는 그런 공학적 위업을 달성할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델은 지난 10년 동안 공개 석상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격렬한 인수 협상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델은 사업으로 말했다. 9년 전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는 델 개인과 회사가 모두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하향세였던 PC 시장을 따라 델도 팜이나 블랙베리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도 델은 기회를 발견했다. 델은 대중의 냉소를 피하기 위해 사모펀드 기업 실버레이크와 억만장자 공동 대표인 이곤 더반에게 요청해 2013년 자신의 회사를 249억 달러에 상장 폐지했다. 사상 최대의 IT 기업 레버리지 바이아웃이었다. 3년 뒤 델과 더반은 670억 달러를 마련해 IT 인프라 거물 EMC 코퍼레이션을 인수했다. 델은 미국 기업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으로 부채를 쌓아 올려서 무려 700억 달러의 레버리지 위에 제국을 세웠다.그 결과는 놀라웠다. 자동차, 통신, 전력망, 병원, 물류 네트워크가 모두 디지털 사업이 되면서 관리 및 저장이 필요한 데이터들을 갈수록 많이 쏟아냈다. 이제 델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대의 데이터 인프라 공급자 자리를 차지했다. 델은 “세계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7~8개월마다 두 배씩 성장한다”고 말했다.델 테크놀로지스의 가치는 750억 달러로, 상장 폐지 전보다 4배 이상 늘었다. 포브스의 추산에 따르면 막대한 레버리지 덕분에 델, 더반의 실버레이크, 공동 투자자들은 총 40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델의 개인 자산은 500억 달러로 늘었다. 여러 측면에서 사상 최대의 바이아웃 쿠데타를 설계한 주인공은 바로 델이었다.델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의론자들은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델은 현금을 퍼부으며 가치 있는 소프트웨어 자산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저렴한 이자 덕분에 기업 체질 개선을 위한 자금 조달에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됐다.“델은 금융에 해박하다. 절대 IT밖에 모르는 공돌이가 아니다.” 사모펀드 대기업 KKR을 공동 설립한 억만장자 조지 로버츠의 평이다. 레버리지 바이아웃의 선구자인 로버츠는 이 거래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로버츠는 “델은 적시에 회사를 다시 사들였다. 돌이켜보면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했다.56세인 델은 초기 PC 시대의 창업자들 가운데 아직도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최후의 IT 거물이다. 빌 게이츠, 래리 엘리슨, 스티브 발머 등 델의 경쟁자들은 나이가 들어 은퇴했거나 자선사업, 아니면 하와이제도나 NBA 팀 등 트로피 자산으로 관심사를 바꿨다.곧 델은 두 개의 상장기업에서 군림하게 된다. PC 및 IT 인프라 대기업 델 테크놀로지스와 분사한 기업인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 부문의 강자 VM웨어다. 두 기업 모두 관리 가능한 수준의 부채와 성장 및 인수에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세일즈포스 설립자이자 델의 친구인 억만장자 마크 베니오프는 “모두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 주목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델이 조용히 기업 IT 분야에서 시장점유율을 축적해왔음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PC 태동기에 마이클 델처럼 빛났던 기업가는 많지 않다. 1983년 델은 텍사스대 기숙사에서 최초의 PC를 미국인 수백만 명에게 판매한 회사를 설립했다. 표어는 ‘더 빠르게, 더 훌륭하게, 더 저렴하게’였다.델은 어린 시절부터 갈고닦은 효율성과 능숙한 재정 관리를 무기로 초저가에 주문 제작 컴퓨터를 만들어 판매했다. 델은 13세 나이에 휴스턴에 있는 집에서 우표 목록을 책으로 만들고 경매에 붙여 우편으로 발송하는 사업을 통해 별다른 초기 자금 없이 무려 2000달러를 벌어들였다. 치과 교정사인 아버지 알렉산더와 주식 중개사인 어머니 로레인은 아들의 재능에 깜짝 놀랐다. 10대 때 델은 신문 구독을 권유했는데, 지역 기록 보관소를 부지런히 훑어서 신문 구독 가능성이 높은 신혼부부의 주소를 찾아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6세 때 애플 IIe를 구매해서 분해한 다음에 구조를 학습했다.델은 1983년 텍사스대에 의대생으로 입학한 뒤 PC로 돈을 벌었다. 하드 드라이브와 메모리 칩을 들고 다니며 당시 막 생겨나던 PC 애호가들에게 판매했다. 1984년 1월에는 IBM 컴퓨터 지역 대리점이 너무 많은 재고를 떠안았음을 알게 됐고, 여분의 PC를 10~15% 할인가로 구매해 수익을 남겼다. 그해 4월까지 매달 8만 달러를 벌어들이다가 대학을 중퇴해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델은 IBM PC의 부품을 다시 조립하면 재고관리를 통해 비용을 40%까지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직접 판매를 시작했다. 혼자 고객을 상대하며 이메일과 전화로 주문을 받아서 PC를 조립하고 1~3주 내에 배송했다. 21세가 된 1986년에 델의 매출은 3400만 달러에 달했다. 1988년 7월 23세 나이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 3000만 달러어치를 매도하며 백만장자가 됐다.델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과 함께 IT 천재의 반열에 올랐다. 컴퓨터 산업을 주류로 만든 ‘오리지널 30세 이하 리더’ 클럽이었다. 1991년 당시 26세였던 델은 순자산 3억 달러로 포브스 400대 부자 미국인 중 한 명이 됐다. 구매자들은 델의 사용자 맞춤 설정, 서비스, 저렴한 가격을 좋아했다. 10년 동안 매출이 급등해 2000년에 델은 세계 최대의 PC 판매사가 됐고, 델의 지분은 160억 달러에 달하는 부를 이루는 토대가 됐다.그때부터 제국에 서서히 균열이 생겼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델 자신이 시작한 PC 마진 경쟁이었다. 2004년 은퇴한 델은 금융위기를 앞두고 회계 스캔들과 랩톱 등 트렌드에 뒤처져 재정적 위기에 처한 기업으로 돌아왔다. 아이폰, 아이패드, 저가형 크롬북이 등장하면서 수익성이 더욱 하락했고, 시장은 델의 서버와 스토리지 사업을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델은 휘청거리며 인수에 140억 달러를 낭비했다.2012년에는 PC 매출이 곤두박질치고 클라우드 컴퓨팅이 대세가 됐다. 델은 노키아 같은 공룡 기업과 같은 부류로 치부됐다. 공식을 바꿔야 했다. 델은 초기 델 PC에서 그랬듯이 자신의 회사에 새로운 장점을 더하여 다시 한번 가치 있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델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며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델은 가족 사무소인 MSD 캐피털에서 수십억 달러를 가져와 경쟁이 치열한 사모펀드 바이아웃에 쏟아부었다. 초기 투자 가운데 하나는 실버레이크 펀드였다. 2012년 이 회사의 파트너 체제가 바뀌는 중이었고, 야심 찬 젊은이 이곤 더반은 대형 투자를 성사시키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더반은 그해 콜로라도 아스펜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한 델을 찾아가 회의를 하자고 요청했다. 하와이에 있는 두 사람의 집이 회의 장소가 됐다.델은 하와이 코나에서 산책하면서 회의를 하자는 데 동의했다. 델이 선호하는 회의 방식이다. 더반은 델의 소규모 자산에 대해 물을 계획이었지만, 산책을 시작한지 3분 만에 올인을 했다. 더반은 “그냥 상장 폐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회사가 너무 평가절하되어 있어서 우리 돈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당신이 빌 게이츠와 다른 점은 제품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그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델은 KKR의 친구 조지 로버츠와 통화한 뒤에 상장 폐지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사진에게 IT 업계 최초의 초대형급 레버리지 바이아웃을 준비하라고 알렸다. IT 업계는 미사용 현금을 쌓아두기로 유명하다. 레버리지 바이아웃에는 정확히 그 반대의 자세가 필요하다.2013년 바이아웃은 월스트리트에서 펼쳐진 격렬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칼 아이칸이 저항하는 주주들을 이끌었지만, 사실 델과 더반 외에는 델을 구매하려는 사람, 즉 PC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데 돈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델의 저평가된 자산 덕분에 안전에 여유가 있다고 봤다.“델은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세가 뛰어나면서도 성공하기 위해 알맞은 방식을 택하는 능력이 있다”며 “수십억 달러를 무모하게 소진해버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조건은 완벽했다. 델은 “남는 돈을 쌓아두면 자본이 저렴해지고 대차대조표에 막대한 현금이 쌓이겠지만, 자산의 가치를 높이기는 어렵다”며 “방정식을 뒤집으면 상식을 깨는 ‘부채가 많은 IT 기업’이 된다. 현금흐름만 예측할 수 있다면 이기는 전략이다.”이곤 더반은 오스틴에 있는 델의 대궐 같은 저택에서 중요한 회의를 한 뒤 전용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요새 같은 주변 경계 때문에 현재 주민들 사이에서 ‘성’이라고 불리는 집이다. 2015년의 성 금요일이었다. 두 사람은 대형 인수에 필요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EMC 코퍼레이션 임원들을 설득하는 중이었다.EMC의 가치 있는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 컴퓨팅 자회사, 세계적인 수준의 데이터 스토리지 사업은 경쟁사 휴렛팩커드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델은 수년 간 EMC에 공을 들여왔다. 2008년 금융위기 도중에 인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EMC의 규모가 큰 IT 부서와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컴퓨팅 자산을 자신의 제국에 더하려는 것이었다. 낮은 주가는 인수 기회임을 나타냈다.몇 달 동안 델과 더반은 세계 각지에서 EMC 임원들을 만났지만 인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델은 EMC CEO 존 투치, 이사회 의장 빌 그린과 해리 유라는 EMC 임원을 초대하기로 했다. 투치의 은퇴가 다가오고 EMC의 지분을 대거 매입한 행동주의 투자사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회의를 서둘러야 했다. 델이 프리미엄 가격을 제시해 인수하는 것이 확실한 해법이지만, 더반과 델이 650억 달러를 현금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더반과 EMC의 유는 실리콘밸리로 날아가서 거래를 협상했다. 유가 냅킨을 꺼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EMC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은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의 강자 VM웨어 지분 81%였다. 나머지 19%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었고, 회사의 가치는 350억 달러였다. 상식적으로는 델이 EMC 전체를 현금으로 사야 했지만, 유는 EMC가 상장 거래되는 ‘트래킹 주식’을 통해 VM웨어 지분을 등록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밝혔다. 유는 자신이 이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억만장자 금융 천재 존 말론을 찾아가기도 했다. 유는 냅킨에 줄을 그어가며 더반에게 델의 현금 인수 비용을 낮추는 방법을 알려줬다. 착륙했을 때 더반은 델에게 전화를 걸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고 전했다.9월 초 60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 거래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델과 더반은 뉴욕시로 날아가서 로펌 스캐든 아프스의 복도에서 EMC 이사진을 기다렸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간체이스의 억만장자인 제이미 다이먼 CEO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델은 자신에게 연 매출 750억 달러 기업을 이끌 에너지가 남아 있으며, 현금도 가지고 있다고 회의적인 EMC 이사진을 설득해야 했다.EMC 이사진은 이사회를 마친 뒤 델을 초대했고, 더반과 다이먼도 따라갔다. 델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텍사스식 말투로 자신이 회사의 문화를 지킬 것이며 회사를 망가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 회의적인 이사는 델의 진정성에 대해 물었다. “수십억 달러 자산이 있는데, 은퇴하고 해변으로 가서 쉬지는 않을까?” 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쌍둥이 자식이 모두 대학에 가서 집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델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그 뒤에 돈 얘기가 나왔다. 델에게 현금이 있을까? 이제 다이먼의 차례였다. 다이먼은 “돈은 있습니다”라며 “거래에 문제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한 달 뒤 670억 달러 규모의 인수가 승인됐다. 델은 무려 500억 달러의 부채를 끌어들여서 투자할 만한 등급이던 EMC를 쓰레기 등급으로 만들었다. VM웨어의 53%를 대표하는 트래킹주식을 발행해 현금을 120억 달러 이상 절약했다.다이먼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델의 진정성이나 싸워 승리하는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나는 가끔 신용 모델을 사용하는 사람을 놀리곤 한다. 중요한 건 누구와 파트너를 맺는지다. 델과 더반은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냅킨 거래의 효과는 단지 돈을 절약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VM웨어는 JP모간과 전 세계 100여 개 은행이 대출에 참여한 사상 최대급의 담보였다. 델이 인수하고 수년 뒤에 VM웨어의 가치는 500억 달러로 급등했다. 덕분에 VM웨어는 델과 더반의 ATM이 됐다.2018년 두 사람은 VM웨어에서 현금 90억 달러를 꺼내서 주주들의 트래킹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수하려 했다. 처음에는 주주들에게 달러당 60센트를 지불하려 했으나 엘리엇 매니지먼트나 칼 아이칸 등 델의 숙적인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은 델을 마이카벨리에 빗대며 이런 행동이 ‘전체주의’라고 비난했다. 결국 이 거래는 달러당 80센트, 총 140억 달러로 더 공정하게 재조정됐다. 이 거래와 함께 델은 회사를 델 테크놀로지스라는 이름으로 상장했다.이 새로운 이름은 처음에 실적이 썩 좋지 않았다. 부채 더미에 올라앉은 델의 가치가 VM웨어의 이자를 제외하고 나면 0보다 작다는 사실이 주가에 반영됐다. 델은 VM웨어를 완전히 분사하는 쉬운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주주들도 만족하고 델은 더욱 부자가 될 것이었다. 시장이 오는 가을 마무리될 이 거래를 받아들이면서 델의 주가가 급등했고, 기업가치는 두 배가 되어 200억 달러로 치솟았다. 거래의 일부로 델은 VM웨어로부터 90억 달러 이상을 가져와서 바이아웃 대출과 수십억 달러의 담보 대출을 갚았다.“델은 올바른 선택을 했다. 패를 아주 잘 활용했다”고 델의 주주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파트너 제시 콘이 말했다.이제 델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 레버리지 바이아웃 전까지 델은 회사 지분을 15.6% 보유하고 있었고 가치는 40억 달러 미만이었다. 금융공학의 기적으로 인해 델은 이제 델 테크놀로지스의 지분 52%, VM웨어의 지분 42%를 보유하게 됐다. 델이 보유한 델 홀딩스의 총 가치는 400억 달러다.마크 베니오프는 “마이클이 회사 지분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지 보면 놀랍다”며 “이 정도로 성공한 기업인의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마이클 델이 성공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로 압축된다. 델은 IT 업계가 중대한 순간에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읽어냈다.팬데믹 도중 재택근무가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PC는 다시 부흥기를 맞이했다. PC 판매 시장 규모는 지난 분기 20% 증가한 133억 달러를 기록했다. 게다가 아마존 웹 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같은 퍼블릭 클라우드는 그토록 성공을 거뒀음에도 IT 세상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기업들은 AWS 같은 퍼블릭 클라우드 플랫폼을 사용하면서도 중요하거나 오래된 데이터는 온프레미스 IT 인프라나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보관한다. EMC를 인수하면서 델은 IT 부문의 최대 성장 시장인 데이터센터 인프라 서비스 분야의 강자가 됐다.델은 장비를 기업에 판매하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추가하기를 즐겨왔다. 현재 델은 데이터 저장장치, 서버, ‘초융합’ 인프라 분야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이다. 북미 최대의 데스크톱 컴퓨터 및 모니터 판매회사이기도 하다. 이제 델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기업의 IT 요구 사항을 하나로 통합해 제공하고자 한다.델은 대기업, 중간 규모 기업에 영업을 할 때 이렇게 말한다. “이미 귀사에 필요한 20가지 제품 가운데 8개 제품을 저희 회사에서 구매하고 계십니다. 20가지를 전부 구매하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그만한 가치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델이 최근 출시한 에이펙스는 한층 더 매력적인 제품이다. 고객의 사용을 바탕으로 데이터 및 클라우드 관리 구독을 제공한다. 한때 들쭉날쭉하던 매출이 반복 서비스가 되면서 사용량 증가에 따라 더 많은 매출을 일으킨다. 회계연도 2021년 1월 기준 매출 940억 달러, 운영 현금 흐름 130억 달러를 기록한 에이펙스는 향후 글로벌 GDP의 두 배 속도로 성장할 전망이다. 델은 가장 큰 기회는 ‘에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데이터를 생성되는 위치와 가까운 곳에서 관리하는 개념을 뜻한다. 에너지, 교통, 의료, 통신 인프라가 디지털화되면서 델은 이런 ‘에지’의 수요가 매년 17%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델은 “가트너는 전체 데이터의 75%가 5년 내에 에지로 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며 “모든 데이터를 클라우드로 옮기지는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기업들이 팬데믹 이후 하이브리드 시대를 준비하면서 5G 인프라, 버추얼 데스크톱 등 통신 장비 부문이 성장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델은 올해 부채 160억 달러를 상환해 투자 등급 평가를 획득할 계획이다. 이를 기반으로 어음 시장에 복귀해 대출 부문을 성장시키고, 더 많은 고객에게 자금을 지원해 휴렛팩커드 등 경쟁사로부터 점유율을 가져오려는 것이다. 여기에 마이클 델 제국의 왕관인 VM웨어가 있다. 분사가 완료되고 나면 VM웨어는 자체적인 길을 가면서 인수를 계획할 것이다. 델은 5년 규정이 충족되어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노동절 이후까지 기다릴 심산이다.델은 “머지않아 초대형 거래가 있을 테니 기다려야 하냐고요? 아마 아닐 겁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았다.무수히 많은 크레인이 하늘을 수놓는 오스틴에서 델은 IT 업계의 정점을 다시 차지하고 있다. 델의 아내 수잔은 낮은 세금과 더 높은 삶의 질을 찾아 오스틴을 떠난 실리콘밸리 CEO들을 다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자본금 18억 달러(배분: 22억5000만 달러)와 190억 달러의 투자 기업 및 가족 사무소를 바탕으로, 이들은 급등하는 시장을 활용해 기업을 공개한 신흥 IT 억만장자들의 조언자 역할을 할 것이다.델이 은퇴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델은 플로리다 보카 레이튼에 리조트를 소유하고 있다. 델은 “지루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베이조스, 게이츠, 엘리슨 등 다른 동료들이 이타주의, 쾌락주의, 우주여행의 쾌감을 좇아 떠났지만 델은 계속해서 업계에 머물 생각이다. 델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마이클 델은 자신의 데날리 홀딩스로 2016년 존 투치 CEO가 운영하는 EMC를 670억 달러에 인수하는 데 절묘한 솜씨를 발휘했다. EMC는 VM웨어의 지분 81%를 보유하고 있었다. 델은 VM웨어의 지분 53%(클래스 V 주주)에 대한 트래킹주식을 발행해 칼 아이칸, 폴 싱어의 엘리엇 매니지먼트 등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델과 이곤 더반의 실버레이크는 나머지 28%를 보유했다. VM웨어는 델이 EMC를 인수할 때 대출한 500억 달러의 담보가 됐다. JP모간의 지미 리와 제이미 다이먼이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어린 시절의 IT 거물들 (왼쪽부터)1992년 애리조나에서 열린 PC포럼에 참석한 빌 게이츠가 당시 27세였던 델,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공동 설립자 빌 조이와 대화하고 있다. 프레딕션 컴퍼니의 도인 파머가 영향력 있는 TI 뉴스레터 편집자이자 콘퍼런스 주최자인 에스터 다이슨과 대화하고 있다.- ANTOINE GARA 포브스 기자
마이클 델 카스티요
마이클 델 카스티요(Michael del Castillo) (Michael del Castillo)
마이클 델 카스티요(Michael del Castillo)는 포브스(Forbes) 부편집장 및 리포터이다. 블록체인 뉴스 사이트인 코인데스크의 리포터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블록체인을 취재해 왔다. 마이클의 취재는 뉴요커에 실렸고, 미국 도시 비즈니스 저널에 의해 전국적으로 연합되었다. 그의 작품은 금융시장의 블록체인(Blockchain in Financial Markets and Beyond By Risk Books)에 실렸고 정기적으로 업계 연구 보고서에 인용되고 있다.
소개 [ 편집 ]
마이클 델 카스티요는 포브스의 리포터로서 비트코인, 에테르(ether) 및 기타 블록체인 어플리케이션을 다루고 있다. 그의 글은 뉴욕커(New Yorker), 코인데스크(Coindesk), 실리콘 밸리 비즈니스 저널(Silicon Valley Business Journal), 뉴욕 비즈니스 저널(New York Business Journal) 등에 실렸다. 그는 뉴욕으로 이사하기 전에 머서대학교(Mercer University)와 옥스퍼드대학교(Oxford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후 그는 맨해튼 지역의 문학 유산을 홍보하기 위해 비영리 단체인 문학 맨해튼(Literary Manhattan)을 공동 설립했다. 또한 마이클 델 카스티요는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의 저널리즘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글을 쓰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펜 파렌티스(Pen Parentis)의 창립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마이클 델 카스티요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기업과 더 넓은 비즈니스 커뮤니티에 어떻게 채택되고 있는지 보고한다. 그의 커버리지에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XRP와 같은 암호화폐의 사용이 포함되며 금융, 공급망 관리, 디지털 아이덴티티 및 기타 여러 사용 사례에서 블록체인의 비 암호화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장된다. 전에는 블록체인 뉴스 사이트인 코인데스크의 리포터로서 블록체인이 작업을 보다 요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며 증가하는 기업의 의지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다.[1]
학력 [ 편집 ]
2001년 ~ 2005년 : 머서대학교(Mercer University) 영문학 전공, 문학 학사 학위.
2004년 ~ 2005년 : 옥스퍼드대학교(Oxford University) 영문학 전공 졸업.
2010년 ~ 2011년 :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과학, 비즈니스, 경제, 환경 과정 전공, 마스터.
경력 [ 편집 ]
2007년 08월 ~ 2010년 06월 : The Library Hotel 관리인.
2010년 08월 ~ 2011년 05월 : Earth Institute 학생 자문위원회.
2010년 09월 ~ 2011년 05월 : 미국 히스패닉 언론인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Hispanic Journalists, NAHJ) 부의장.
2011년 06월 ~ 2011년 08월 : Earth Institute 학술 및 연구 프로그램의 임시 관리자 사무실.
2011년 06월 ~ 2011년 12월 : Big Think 프리랜서 리포터.
2011년 10월 ~ 2016년 03월 : 미국 도시 비즈니스 저널(American City Business Journals, ACBJ) 기술 혁신 리포터.
2013년 09월 ~ 2014년 03월 : The New Yorker 프리랜서 작가.
2014년 10월 ~ 2018년 03월 : 뉴욕 역사 협회(New-York Historical Society) 프로젝트 매니저.
2016년 03월 ~ 2018년 05월 : 코인데스크(CoinDesk) 저널리스트.
2018년 05월 ~ 2020년 02월 : 포브스(Forbes) 암호화 작가.
2009년 01월 ~ 현재 : 문학 맨해튼(Literary Manhattan) 공동 설립자.
2020년 02월 ~ 현재 : 포브스(Forbes) 부편집장 및 리포터.[2]
주요 활동 [ 편집 ]
포브스 [ 편집 ]
포브스(Forbes)는 미국의 출판 및 미디어 기업이다. 이 매거진은 1917년 창간되었으며 한국어판 포브스 코리아는 중앙일보에서 2003년 2월부터 발간하고 있다. 또한, 전문분야는 비즈니스, 재무, 투자, 기술, 정치, 리더십, 기업가 정신, 중소기업, 클라우드 컴퓨팅, 보안 및 관리이다. 창업자는 B.C.포브스(Bertie Charles Forbes)이며 마이클 델 카스티요는 회사의 부편집장 및 리포터를 맡고 있다.
포브스 미디어는 비즈니스, 투자, 기술, 기업가정신, 리더십 및 풍부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뉴스와 정보에 초점을 맞춘 글로벌 미디어, 브랜딩 및 기술 기업이다. 포브스, 포브스 아시아, 포브스 유럽 잡지는 물론 포브스닷컴(Forbes.com)을 발행한다. 포브스 브랜드는 포브스닷컴, TV, 콘퍼런스, 연구, 소셜네트워크 및 모바일 플랫폼 등 전 세계 37개 지역 판을 통해 매달 비즈니스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전 세계 9천4백만 명 이상의 인구에 도달하고 있다. 포브스 미디어의 브랜드 확장에는 콘퍼런스, 부동산, 교육, 금융 서비스, 기술 라이센스 계약이 포함된다.[3]
문학 맨해튼 [ 편집 ]
문학 맨해튼(Literary Manhattan)는 문학 영감을 주는 순간부터 출판 순간까지, 문학 라이프 사이클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는 문학 애호가 커뮤니티이다. 문해력과 독서의 이점을 장려하고 맨해튼의 풍부한 문학적 역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설립되었다. 당사의 공동 설립자인 마이클 델 카스티요는 맨해튼의 Library Hotel에서 일하면서 Literary Manhattan의 아이디어가 탄생했다.[4]
문학 맨해튼은 맨해튼의 문학적 중요성 영역에 대한 가이드 투어를 수행하고, 문해력 프로그램을 위한 자료를 개발하며, 글을 쓰는 경연 대회 및 장학금을 후원하였다. 또한 박물관을 설립함으로써 문학 정보 및 자료를 포함하는 웹 사이트를 통해 이러한 미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문학 맨해튼의 문학 애호가들은 서로를 지지 및 홍보하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커뮤니티를 통해 뉴욕의 모든 분야에 풍부한 문학의 힘이 퍼지도록 존재한다.[2]
주요 활동 [ 편집 ]
2019 콘센서스 [ 편집 ]
2019 콘센서스(Consensus 2019)는 코인데스크(CoinDesk)가 주관하는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 업계의 연례 콘퍼런스 행사이다. 201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2019 콘센서스는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미국 뉴욕 힐튼 미드타운 & 쉐라톤 뉴욕타임즈 스퀘어에서 개최되었다. 콘센서스 2019는 블록체인과 관련된 기술, 거버넌스, 비즈니스, 금융, 투자, 규제 등 모든 분야의 글로벌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 최대의 블록체인 콘퍼런스이다. 이번 콘퍼런스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 교수들(하버드 대학교의 올리버 하트(Oliver Hart), 에릭 마스킨(Eric Maskin) 교수와 뉴욕 대학교(NYU)의 데이비드 여맥(David Yermack) 등)은 물론 OECE, IBM, 딜로이트, 후오비 등 유명한 기업 및 기관의 업계 관계자 200여명이 직접 패널 혹은 스피커로 참석하여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했다. 5월 13일 행사에는 문학 맨해튼(Literary Manhattan) 공동 설립자이자 포브스의 부편집장 및 리포터인 마이클 델 카스티요(Michael del Castillo)가 참석하여 행사 장소인 Room A, Concourse Level에서 ‘블록체인이 경제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또한 5월 14일 행사에 그는 토론 구분에 좌장으로 참석하여 행사 장소인 그랜드볼룸 3층(Grand Ballroom)에서 ‘디자인으로 열기 : 어디서나 비즈니스를 위한 블록체인 제공’이라는 발표 주제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각주 [ 편집 ]
참고자료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키워드에 대한 정보 마이클 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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