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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역사 – 나무위키

네덜란드는 중심이 되는 중앙 국가 또는 특정 거점이 주변을 병합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다른 국가의 역사보다는 특정 지역의 처지와 정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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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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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네덜란드(네덜란드어: Nederland 네데를란트 [ˈneːdərˌlɑnt] 이 소리의 정보 … 왼쪽에 있는 Carambeí 역사 공원 공원과 네덜란드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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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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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네덜란드의 역사와 특징 – 브런치

네덜란드의 역사와 특징 나는 학창 시절에 스페인이 세계 최강국이었다가 무적함대가 영국에 무너지면서 그 주도권이 영국으로 넘어갔다고 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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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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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네덜란드의 역사적 배경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BC 50년 …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네덜란드의 역사에 관해서는 Christoph Dries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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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kocw.or.kr

Date Published: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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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특히 왕실의 종교는 … 그 책의 다섯 장에는 우리나라의 관료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다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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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9/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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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 처리문제에 대한 네덜란드의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

네덜란드-독일 역사 청산 -전후 독일 처리문제에 대한 네덜란드의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 The Clearing of History between the Netherlands and Germany. 통합유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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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9/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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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국부론 | KDI 경제정보센터 – 한국개발연구원

네덜란드 역사는 물과의 투쟁의 역사. 물과의 투쟁은 간척으로, 간척지를 중심으로 한 무역의 현장으로, 무역의 발달은 도시 발달로 연결. 네덜란드는 유럽 어느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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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iec.kdi.re.kr

Date Published: 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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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네덜란드의 경쟁력, 어디서 시작됐나 – 월간조선

바다를 메워 개척한 낮은 땅과 유럽 최강국 독일, 프랑스, 영국 사이에 자리 잡은, 남한의 절반도 안되는 땅에서 네덜란드인은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기적을 일궈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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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nthly.chosun.com

Date Published: 1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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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5분상식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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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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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왼쪽에 있는 Carambeí 역사 공원 공원과 네덜란드 건축물

네덜란드(네덜란드어: Nederland 네데를란트[*] [ˈneːdərˌlɑnt] (도움말·정보) , 영어: Kingdom of the Netherlands)는 서유럽과 카리브 제도에 걸쳐 있는 네덜란드 왕국의 구성국이며,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정부와 각종 행정기관이 밀집한 도시는 헤이그다. 홀란트(Holland) 지방에서 딴 이름인 홀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derlanden)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네덜란드라는 이름도 ‘낮은 땅’이란 뜻이다. 독일 ,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리 [ 편집 ]

독일, 벨기에, 그리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총 면적은 4만 1000km2이다. 북해에 면해 있는 국토는 레인 강(Rijn; 독일어로는 라인 강)), 마스 강(Maas), 스헬더 강(Schelde) 등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남서쪽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나 림뷔르흐 주에 있는 이 나라 최고 지점조차도 321m에 지나지 않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카리브 해의 해외 영토인 아루바 섬과 퀴라소, 신트마르턴, 보네르섬, 사바섬, 신트외스타티위스섬도 포함한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50여 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다.

기후 [ 편집 ]

네덜란드의 겨울

네덜란드는 위도가 높은 곳에 있지만, 북부 지역은 북해의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작지만, 날씨는 변하기 쉽다. 그러나 남동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거칠고 기온차도 심하다.

De Bilt (1981–2010 averages), all KNMI locations (1901–2011 extremes), snowy days: (1971–2000 averages).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최고 기온 기록 °C (°F) 17.2

(63.0) 20.4

(68.7) 25.6

(78.1) 32.2

(90.0) 35.6

(96.1) 37.2

(99.0) 38.2

(100.8) 38.6

(101.5) 35.2

(95.4) 30.1

(86.2) 22.0

(71.6) 17.8

(64.0) 38.6

(101.5) 평균 최고 기온 °C (°F) 5.6

(42.1) 6.4

(43.5) 10.0

(50.0) 14.0

(57.2) 18.0

(64.4) 20.4

(68.7) 22.8

(73.0) 22.6

(72.7) 19.1

(66.4) 14.6

(58.3) 9.6

(49.3) 6.1

(43.0) 14.1

(57.4) 일 평균 기온 °C (°F) 3.1

(37.6) 3.3

(37.9) 6.2

(43.2) 9.2

(48.6) 13.1

(55.6) 15.6

(60.1) 17.9

(64.2) 17.5

(63.5) 14.5

(58.1) 10.7

(51.3) 6.7

(44.1) 3.7

(38.7) 10.1

(50.2) 평균 최저 기온 °C (°F) 0.3

(32.5) 0.2

(32.4) 2.3

(36.1) 4.1

(39.4) 7.8

(46.0) 10.5

(50.9) 12.8

(55.0) 12.3

(54.1) 9.9

(49.8) 6.9

(44.4) 3.6

(38.5) 1.0

(33.8) 6.0

(42.8) 최저 기온 기록 °C (°F) −27.4

(−17.3) −26.8

(−16.2) −20.7

(−5.3) −9.4

(15.1) −5.4

(22.3) −1.2

(29.8) 0.7

(33.3) 1.3

(34.3) −3.7

(25.3) −8.5

(16.7) −14.4

(6.1) −22.3

(−8.1) −27.4

(−17.3) 평균 강수량 mm (인치) 69.6

(2.74) 55.8

(2.20) 66.8

(2.63) 42.3

(1.67) 61.9

(2.44) 65.6

(2.58) 81.1

(3.19) 72.9

(2.87) 78.1

(3.07) 82.8

(3.26) 79.8

(3.14) 75.8

(2.98) 832.5

(32.78) 평균 강수일수 (≥ 0.1 mm) 17 14 17 12 14 14 14 14 15 16 18 17 184 평균 강설일수 (≥ 0 cm) 6 6 4 2 0 — — — — 0 2 5 25 평균 상대 습도 (%) 87 84 81 75 75 76 77 79 84 86 89 89 82 평균 월간 일조시간 62.3 85.7 121.6 173.6 207.2 193.9 206.0 187.7 138.3 112.9 63.0 49.3 1,601.5 출처: KNMI.nl[2]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의 역사 입니다.

고대와 중세 [ 편집 ]

켈트와 게르만인이 자리잡고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외국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BC 50년 경이다. 남부의 마스트리흐트에 로마 시대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지배의 말기에는 프랑크와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네덜란드에 기독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슬람을 막은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800년) 그가 사망(816년)한 이후, 유럽은 베르됭 조약(843년)으로 서 · 중 · 동 프랑크로 나뉘게 되는데, 이 때 저지대 국가는 스헬데 강을 중심으로 서쪽(현재의 벨기에)은 서프랑크 왕국에, 동쪽은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3] 10~13세기에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홀란트 백작이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독립 전쟁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입니다.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4]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5]로 바뀐다.

황금시대 [ 편집 ]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영국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쇠퇴기 [ 편집 ]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793년 2월 1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하였다.[6]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현대사 [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유엔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현재는 카리브 해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 아루바만이 식민지의 잔재로 남아 있다. 1971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네덜란드 잔담에 상륙하였다.

정치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의 정치 입니다.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행정부 장관은 총리에 의해 지명되며 14개의 행정부서가 있다. 현재의 총리는 마르크 뤼터이다. 최고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에 각 지방법원과 간이법원이 속해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법관은 최고법원과 법무장관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특별 법정에서 가린다.

경제 [ 편집 ]

상업과 교통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업과 교통은 네덜란드 경제를 주도하는 핵심 부문이다. 19세기에 북해와 라인 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가 완공된 이후, 로테르담 항구는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와 수로로 연결되어 크게 성장했다. 오늘날 로테르담 항구에는 하루 평균 100만 톤의 물자가 이동하고 있다. 20세기에 네덜란드는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식민지들을 잃었지만 여전히 경제 선진국으로 1인당 국내 총생산이 유럽 연합 회원국의 평균보다 높다. 또한 첨단 기계와 영농 기술 도입으로 농업 부문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한편 네덜란드는 복지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대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14%인 80만 명이 실업자였고 장해연금과 조기퇴직 프로그램에 의해 노동 시장에서 제외된 근로자 수도 이와 같은 규모였다. 1986년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실업상태를 더 오래 지속하는가?》를 통해 네덜란드의 고용 실패를 지적했다.[7]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네덜란드의 경기침체는 유난히 심각했다.[8] 많은 경제 부분이 과잉 생산의 부작용을 겪었고 25개 제조업체 중 1개꼴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없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이 제조업의 정규직 근로에서 발생했다. 실업자는 매달 1만 명씩 증가하여 1984년에는 80만 명까지 증가했고 노동조합들은 전체 노조원의 17%를 잃었으며 남은 노조원들 중 4분의 1이 복지 혜택의 수혜자가 되면서 노동없는 복지 상태에 이르렀다. 미취업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은 더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실업 상태에서 얻은 결론은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범국가적 인식의 확산이었다.[9]

우선 1982년 11월 24일 바세나르에서 세계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바세나르 협약이란 이름의 임금인상 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빔 코크의 노동조합연맹과 크리스 판 베인의 경영자단체연합 사이에서 이뤄진 중앙협약에 의한 임금인상 억제 정책은 변화하는 해외 및 네덜란드 내 시장에서 심화되는 국제경쟁에서 네덜란드 경제를 적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조합주의가 되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사회보장체제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임금수준과 복지혜택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노동시장 정책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10]

1990년대 들어서 네덜란드는 1980년대 일관적인 임금인상 억제 정책, 사회의 안정화, 개혁정책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실업률을 반감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83년 14%의 실업률을 1997년에는 6% 수준으로 내렸는데 이는 유럽 연합 평균인 11%의 실업률보다 낮은 수준이다.[11] 미국과 같은 수준의 고용증가를 겪기도 했으나 미국처럼 급격한 빈부격차의 증가를 경험하진 않았다. 다만 이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시간제 근로였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증가했으나 55세에서 64세 중장년층 남성 취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했다. 능력 위주의 직원 선발이 이뤄지면서 발생한 외국인과 미숙련근로자의 낮은 취업기회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5 청년 실업률은 가장 낮은 수준인 5.5%로 떨어졌으나 완전고용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시간제 근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12]

네덜란드에서 경제성장의 가장 큰 원천은 해외시장이다. 네덜란드의 재화, 용역의 수출입 규모는 1950년 국내총생산의 70.9%, 1970년 74.8%, 1994년 89.2%에 달했는데 영국의 41.8%, 독일의 39.3%, 프랑스의 34.2% 미국의 17.8%, 일본의 14.6%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이다.[13]

네덜란드에서 중공업 분야는 무역업과 제조업에 비해 다소 늦게 발달했다. 북해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해 주는 북해 운하의 입구에는 에이마위던(IJmuiden)이 있는데, 이곳에는 코크스 제조 공장과 네덜란드 최대의 제철, 제강 공장이 있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편이다. 림뷔르흐 주의 탄전은 1970년대에 이미 문을 닫았으나 북해 연안의 그로닝겐 지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은 수출된다. 석유도 생산되지만 천연가스에 비해 양이 적어 네덜란드 경제에 큰 기여는 하지 못한다. 헹겔로와 델프제일 근처에는 엄청난 양의 암염이 매장되어 있는데, 일부는 산업용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출된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최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경영 규모가 커져서 생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토의 4분의 1정도가 농지로 이용되는데, 이중 약 30%가 목초지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약 3분의 2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또한 겨울철 날씨가 온화하고 토양이 기름진 네덜란드는 원예 농업이 발달했다. 수천 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가 첨단 시설로 재배되고 있다. 헤이그와 뫼즈 강 하구 사이, 델프트 주변과 로테르담 북부에는 유리 온실이 줄지어 있다.

축산업도 네덜란드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자동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젖소, 돼지, 닭, 오리 등을 대량 사육하고 있고 유제품 관련 산업도 잘 발달했다. 하우다, 에담, 레르담과 같은 도시는 치즈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치즈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4월에서 9월까지 알크마르에서는 금요일 아침마다 전통 치즈 시장이 열린다. 전통 치즈 시장에서는 커다란 치즈 경매가 진행되고 관광객들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알크마르를 찾는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14]

무역 [ 편집 ]

2017년 기준으로 네덜란드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독일(21.91%), 벨기에(10.25%), 영국(8.58%), 프랑스(8.03%), 미국(4.36%)이며,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18.47%), 벨기에(10.70%), 중국(9.02%), 미국(7.65%), 영국(5.33%)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505,94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50,076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44,034백만 달러), 전자 부품(15,565백만 달러), 무선 통신 기기(15,492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15,492백만 달러), 독극물(7,256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28,408백만 달러), 원유(28,328백만 달러), 무선 전신 장치 용 송신 장치(18,261백만 달러), 전자 부품(16,071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7,317백만 달러)이다.[15]

인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의 인구 입니다.

식민지 [ 편집 ]

벨기에 – 1830년 독립

사회, 문화 [ 편집 ]

문화 [ 편집 ]

회화로는 17세기 황금시대와 19세기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유화 기법의 선구자 프란스 할스가 활약하였고, 중엽에는 유화 기법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렘브란트 판 레인이 나타났다. 중산 계급이나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린 얀 스테인, 풍경화가 로이스달 등도 활약했다. 실내화에서는 우아한 광선을 살린 그림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들 수 있으며, 19세기에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공예품으로는 델프트(Delft) 도자기와 붉은 색의 아름다운 마쿰(Makkum) 도자기를 들 수 있다. 도자기는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스포츠 [ 편집 ]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높다.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3번 달성한 축구강국이지만 아직 우승 경력은 없다.

동성 결혼 합법화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의 동성 결혼 입니다.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16] 대표적인 경우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최초로 1993년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17] 2001년 4월 1일을 시작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마약 합법화 논쟁 [ 편집 ]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마약 사범을 처벌하는 처벌 위주 정책이 아닌 중독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마약을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낮으며 인체에 피해가 적은 대마, 환각 버섯 등을 연성 마약(Soft Drug)으로 규정하여 5g 이하의 대마를 피우거나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대마를 피는 것을 허용하되 500g 이하만 판매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연성마약을 허용함으로써 헤로인과 코카인 등 이른바 중독성 마약을 가까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있다. 바로 대마중독자 문제이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줄어든 대신 대마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복용을 끊지 못하는 대마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

종교 [ 편집 ]

종교 구성 (네덜란드)[18] 무종교 50.1% 로마 가톨릭 23.7% 개신교 15.5% 그 외 기독교 4.5% 이슬람교 4.9% 기타 종교 1.1%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에는 세속화로 인해 개혁교회 신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 이외에도 옛 동인도 식민지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힌두교도들도 있고, 소수이지만 유대교 신자도 존재한다. 이슬람교 신자도 있으나 박해의 대상이 된다.[19]

행정 구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의 행정 구역 입니다.

네덜란드 행정구역

네덜란드는 12개의 주(provincie)로 나뉜다.

프리슬란트 주의 프리지아인은 프리지아어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대외 관계 [ 편집 ]

한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네덜란드-대한민국 관계 입니다.

네덜란드는 조선 시대에 벨테브레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들어온 일, 헨드릭 하멜도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일 등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럽 국가이다. 또한 대한 제국이 헤이그에 헤이그 특사 파견을 한적도 있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25일,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으며[20],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한국을 지원하였다. (보병 1개 대대, 군함 1척) 헤이그에 한국 대사관(주 헤이그 국제기구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한국의 대(對)네덜란드 수출은 46억2698만USD, 네덜란드의 대(對)한국 수출은 44억2550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네덜란드는 한국에 있어서 제27위의 수출국이자 제25위의 수입국이다.[21] 모두 1,771 명(재외국민 1,663명, 시민권자 108 명)의 한민족들이 네덜란드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22] 한국과 네덜란드는 KLM과 대한항공의 노선으로 운항하고 있다. 중등 교육의 경우 한국에서는 네덜란드어가, 네덜란드에서는 한국어가 개설되지 않았다.

영국 [ 편집 ]

당시 네덜란드가 에스파냐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고자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해군력을 강력히 키워나가 잉글랜드 왕국과 연합하여 마침내 에스파냐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영국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기존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설립한 때부터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고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트집을 잡아 네덜란드와의 동맹을 해제하였고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방해하였다. 네덜란드는 결국 잉글랜드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의 군대가 더욱 우세했고, 끝내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게 된다. 이후 영국과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지만, 프랑스 왕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 왕국은 다시 네덜란드와 동맹을 요청했고, 네덜란드가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양국간의 관계는 좋아진다.

프랑스 [ 편집 ]

네덜란드가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식민지마저 대부분 빼앗기자, 이를 노리고 있었던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를 멸망시키고자 대대로 침입을 자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던 탓에 한동안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더구나 11월 유럽의 현존하는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모든 국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1793년 1월에 드디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1793년 2월 1일,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 포고하였다.[23]네덜란드 공화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오스트리아 왕국 등과 함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1795년에, 하천의 결빙으로 네덜란드의 요새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겨울철을 노려 피슈그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이 네덜란드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마침내 하천이 결빙되어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어 네덜란드 총독 빌렘 5세가 잉글랜드 왕국으로 도망가고, 네덜란드 함대는 접수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국의 주도로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고(1795년 1월 19일), 브라반트 공국과 마스트리히트가 프랑스 왕국에 할양되었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로 권력을 잡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로데베이크 1세)에 즉위시켰다.(1806)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 [ 편집 ]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소레기에타가 네덜란드로 이민와 국후가 된다. 이 때문에 양국간 우호가 상당히 돈독해졌다. 또한 양쪽 모두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관련 분야의 교류가 활발하다.

일본 [ 편집 ]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녔던 시절의 네덜란드는 중국을 통해서 일본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진 개신교 국가였지만 장사가 중요하지 선교활동은 관심이 없었으며[24], 일본은 가톨릭을 탄압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서양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과의 교역 상대가 될 수 있었으며, 일본 국왕도 서양 제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교역을 허용할 정도로 돈독해졌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차별 공격하였고, 끝내 네덜란드가 미국과 영국과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전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마침내 일본이 완벽히 패배하였고, 한동안 일본과의 관계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반일 세력이 일본 국왕인 히로히토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에게 총격을 가하고 쓰레기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각주 [ 편집 ]

참고자료 [ 편집 ]

47. 네덜란드의 역사와 특징

네덜란드의 역사와 특징

나는 학창 시절에 스페인이 세계 최강국이었다가 무적함대가 영국에 무너지면서 그 주도권이 영국으로 넘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일견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 약 200년에 걸쳐서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의 자리는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즉 16-17세기가 그 시기인데 이 당시의 네덜란드의 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각 시기별로 세계 최대의 부국 중에서 최고의 나라는 어디일까? 이런 질문에 사실 답을 주기는 힘들지만 각 시기별 세계 최대 부국의 국민소득이 그 당시의 2 위국의 국민소득에 비하여 어떤지 하는 지표로 분석해 보면 압도적으로 16-17세기의 네덜란드를 손꼽을 수 있다.

이 당시 2위 부국이었던 영국의 거의 2배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는데 역대 어느 1위 국도 2 위국에 비하여 2배에 달하는 이런 높은 수준을 보여준 나라는 없다.

또 이 당시가 해양력이 국력을 상징하는 지표였다고 하면 전 유럽이 보유하고 있던 선박수의 절반이 네덜란드 소유였다.

경제학의 고전인 영국의 아담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에서는 그 당시 네덜란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네덜란드가 영토나 인구수는 영국보다 적지만 훨씬 잘 사는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치로 제시하는 것이 그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약 2% 금리로 돈을 차입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일반 서민도 3% 정도면 차입 가능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영국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이고 이미 쇠퇴 일로를 걷고 있던 스페인은 차입금리가 거의 40%에 육박했다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네덜란드의 국가 신용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과거 별 볼 일 없던 나라이고 주변국의 침입으로 고생하던 이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앞의 스페인의 역사에서 언급했지만 1492년 유대인들의 추방령이 내려진 후 유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슬람 문화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 네덜란드이다. 그것의 이유는 그 당시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사상인 ‘자유’였을 것이다.

당시 전 유럽이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을 때이고 신. 구교의 대립은 많은 전쟁을 양산하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신교와 구교 중에 하나를 선택했고 여기에 맞지 않는 국민에게는 모진 박해가 있었을 때였다. 여기에 가장 앞장서서 구교를 지켰던 곳이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당시에 네덜란드는 신교. 구교 여부는 물론 유대인과 같은 전혀 다른 유대교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였다. 자연히 종교가 지배했던 당시 사회상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에 모여들었고 결국은 사람이 재산이라는 경제학의 원리에 맞게 네덜란드는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이런 교리에 근거하여 이에 맞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추방한 스페인은 빠르게 쇠퇴해 간다.

금융에 종사했던 나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금과 은이 국력의 척도라 하여 해외 유출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런데 네덜란드만 예외였다. 모든 금과 은의 유입 및 유출이 자유로웠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완벽한 자본자유화를 시현한 것인데 지금부터 400-500년 전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자연스럽게 많은 경제활동이 네덜란드에 집결되어서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가서야 유가증권 시장을 부분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해서 자금의 해외 유입과 유출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유로운 사상은 경제력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렘브란트나 고호 등과 같은 많은 유명화가들을 이 작은 나라에서 배출했는데 역시 이 당시는 종교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는 소재가 제한적이었던데 반하여 유독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것을 다 주제로 삼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가면 대마초가 합법이고 또 성 매매를 하는 곳도 공공연히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도 다 신고를 하고 세금을 내고 있다. 우리뿐만이 아니고 서방 세계의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네덜란드의 이런 문화를 접하면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이때마다 네덜란드인의 반응은 한결같다. 자유!

또 다른 요인은 우리가 모두 아는 네덜란드인 들의 근면성이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상태였는데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서 이를 극복했다. ‘신은 세상을 만들었고 네덜란드인은 땅을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모든 사업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도 많이 작용했다. 이 당시 유럽의 최대 곡창지대인 스페인의 카스티야 지방에서 큰 흉년이 들어서 곡물 가격이 거의 배로 올랐는데 이때 네덜란드에서 이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소위 말하는 돈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단지 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 많은 간척사업을 통해서 넓은 경작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 이 당시의 부가가치가 높았던 사업 중에 청어잡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이 당시 전 유럽에서 청어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높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청어 떼는 발트해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청어떼들이 갑자기 서식처를 발트해에서 북해로 옮기게 된다. 이 당시 자료에 의하면 북해에 얼마나 청어떼가 많았는지 배가 운항하는데 지장을 받았을 정도라 한다. 이것 역시 네덜란드가 어업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큰 돈을 버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도 개인적으로는 네덜란드가 청어잡이에 대한 모든 준비가 다 잘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북해가 네덜란드만 가지고 있는 내해가 아닐 텐데 인근 다른 나라는 네덜란드만큼 수혜를 못 입었다.

결국 어떤 운이 다가와도 준비되어 있는 자만이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 준비 없이 놀고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운이 닥쳐도 그것을 움켜쥘 능력이 없게 된다.

이 당시 네덜란드의 산업 구조를 보면 제조업보다는 금융의 비중이 컸고, 해외투자를 활발하게 해서 해외투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2배 수준의 규모였다고 한다.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활발한 투자를 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해외투자규모가 국내총생산의 절반 수준 정도 밖에는 안된다.

물론 이것을 보고 미국의 해외투자가 네덜란드에 비하면 너무 낮은 수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바로 양국의 내수 시장의 차이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국토가 좁고 인구수도 적은 관계로 내수시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살길은 활발하게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반면에 미국은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 최강의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해외투자를 많이 하여도 국내총생산에 비하면 그 비율이 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를 연구하자는 분위기가 어떤 정권하에서는 유행처럼 번졌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무조건 모방하기에는 조금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과거 같이 너무 해외 의존도가 크면 해외변수에 너무 민감하게 경제가 작용하게 되고 결국은 내수 시장 역시 어느 규모로는 키워 놓아야 서로 조화가 이루어질 것 같다.

이런 네덜란드도 역사가 항상 그러하듯이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뻔한 답인 돈을 버니 나태해졌기 때문이다. 근로의욕이 사라지고 돈을 번 사람들은 그것을 재투자하지 않고 사치품이나 별장 사들이기에 치중했다. 자본가들만이 아니고 노동자들도 길드라는 조직을 통해서 단합함으로써 임금이 해마다 높아지고 이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제조업의 경쟁력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래서 제조업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호황을 구가하던 경제는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조세 수입이 줄어들자 사치품이라 생각되는 소비재에 대해서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고 이것은 더욱 소비를 위축시켜서 경제 악화를 심화시키게 되었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집들을 보면 창들이 좁거나 커튼이 짧거나 한데 모두 이 당시 이런 것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라 한다. 어째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서 상당히 우려가 된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모든 것보다 더한 요인은 초창기 유대인을 비롯한 인구 유입과 반대로 많은 금융전문가를 포함한 고급 인력들이 영국으로 대거 유출하면서 네덜란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영국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당시 영국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네덜란드의 빌렘 3세가 영국의 공동 국왕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혼자 가지 않고 자기 세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약 3만 명 정도를 데리고 간다. 이때 금융전문가들이 많이 영국으로 건너가는데 한 때 대표적인 영국의 투자은행이었던 베어링이 이런 네덜란드계 금융인들이 영국에서 세운 은행이었다. 당연히 스페인에서 쫓겨나 네덜란드에 들어와서 금융업의 꽃을 피웠던 유대인들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네덜란드의 하락과 영국의 상승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래저래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영국과 감정이 안 좋아진 네덜란드 금융기관이 영국과의 거래를 줄이고 프랑스로 대출선을 바꾸었는데 여기서 요즘 말하는 금융권의 부실 채권이 급증하고 이것이 또 발목을 잡게 된다. (권홍후 저 ‘부의 역사’ 참조 및 인용)

이렇게 세계 1위의 자리를 내어준 네덜란드는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정상의 자리는 오르기는 힘들지만 내려오기는 간단하고 한 번 밀리면 다시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세상 이치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

이런 네덜란드는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가까운 일본을 근대화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닿았는데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듯이 하멜이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가다가 우리나라에 표류하면서 또 이 하멜이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기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본격적인 통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사실 하멜보다 우리와 네덜란드 관계를 이어준 분이 계시는데 바로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이다.

결과가 좋아서인지 이때부터 네덜란드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바뀐다. 한국 축구에 대해서 기존 한국 축구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진단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훈련시킨 이 명장은 한국 축구를 바꾸어 놓았고 기존 한국의 축구 지도자를 무능한 자로 만들었다.

이런 능력과 더불어 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히딩크의 외국어 실력이었다. 영어는 물론 스페인어를 현지인과 같은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를 외국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는 히딩크가 언어에 상당한 소질이 있다고도 신문기사에서는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히딩크가 네덜란드의 표준일 정도로 모든 네덜란드인들은 외국어 1-2개 정도는 유창하게 구사한다. 히딩크만 특별히 잘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영어는 전 국민이 자유롭게 구사하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서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 중 홍콩에 가 보면 영어를 잘 구사하지만 택시를 타면 전혀 안 통한다. 즉 어느 정도 교육이 된 사람들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같은 경우는 택시를 타도 영어가 통하기는 하지만 싱가포르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다. 오죽하면 싱글리시라는 조롱도 받는다. 자국민들끼리만 통하는 영어인 것이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택시 기사는 물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 운전수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것도 훌륭한 발음으로. 어떨 때는 영국보다 더 영어를 잘 하는 것 같다. 사실 영국에서도 웨일스나 스코트랜드 등의 짙은 사투리가 섞인 영어를 들으면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다.

이렇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네덜란드인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영어를 회화 위주로 배우고 모든 고등학교 졸업 시 영국인과 free talking 시험을 통과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사람 말이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되는 것 인 줄은 모르겠으나 사실이라면 네덜란드의 모든 고등학교 졸업자는 현지인과 같은 수준의 영어 구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얼마 전 잡지에서 우연히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분이 쓴 글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의 중학교 정도 들어가서는 영어를 정말 강도 높게 가르친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지금도 국민소득이 5만 불이 넘는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좁은 국토와 적은 인구수로 내수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거 16-17세기와 마찬가지로 국내보다는 해외투자 그리고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해외로 취업을 한다. 이런 현실에 맞게 젋은이 들이 경쟁력을 갖추도록 영어 교육을 하는데 반하여 우리의 영어교육은 시험을 위한 한국만의 영어교육인 것 같아서 너무 답답하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영어 배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는데 전혀 현실세계에서는 도움이 안 되니 심각하게 반성해 볼 문제이다.

전 세계적으로 네덜란드인들의 해외 경쟁력은 아주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는다. 영어의 완벽한 구사와 조상 때부터 해외로 눈을 돌린 덕인지 국제적인 적응력이 남다르다. 반면에 같은 처지의 보통 한국인들의 국제 경쟁력은 아예 없다고 보인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영어 구사가 자유롭지 못하고 국제적인 적응력도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앞으로도 한국에서의 일자리는 한계가 있는데 언제까지 국내에서 이 많은 청년들이 취업이 안 되어서 몸부림을 쳐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근본 문제를 해결 못하고 바뀌는 정권마다 대기업에게 애국하는 마음으로 많은 취업을 하라고 압박하니 참 한심하다. 그리고 이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청년들이 더욱 불쌍하고…

네덜란드는 많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출장 갔을 때 현지 비즈니스맨들과 사적인 대화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나라는 상당히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매력적이고 또 상당히 부럽기까지 하다.

이밖에 내가 느낀 다른 점은 높은 국민소득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네덜란드에서 명품 브랜드의 샵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장사가 전혀 안 된다고 한다.

히딩크처럼 돈이 많고 또 스페인에서의 생활이 길었던 이유인지 예외적인 사람도 있지만.

또 유럽 여러 나라 중 스테이크 먹기가 가장 쉬운 나라가 네덜란드이다. 그만큼 이 나라 사람들은 육식을 많이 하고 또 다들 대식가들이다. 그런데도 길을 다니다 보면 미국에서와 같이 비만인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체격이 크고 또 건강해 보인다. 결국 육식으로 비만해지는 것이 아니고 미국인들같이 소위 패스트푸드라고 하는 정크푸드를 먹기 때문에 비만해지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많은 의사들이 육식을 줄이고 현미밥과 채식만이 건강의 지름길인양 열변을 토하는데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접할 때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런 느낀 점들만 쓰려고 해도 별도의 제목으로 길게 써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루크(Rubruck, W. van)은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그 첫 번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사이에 몽고제국의 영내를 다녀오고 우리나라를 까울레(Caule, 高麗)라 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에 따라 폴로(Polo, M.)도 카울레를 언급하였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뒤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소개한 사람은 하멜(Hamel, Hendrik)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페르베르호(DeSperwer號)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다 돌아갔다. 그 뒤 그는 『하멜표류기』를 1668년 로테르담에서 출간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기는 했으나,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처음으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다.

비첸(Witsen, N.)이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도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값진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가 이 방면에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의사로서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동안 일본의 데지마(出島)에 머물면서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표류해서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고, 그에 앞서 한글의 자모(字母)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낸 바 있다.

네덜란드에 돌아간 뒤 그는 1831년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라이덴에서 독일어로 써 냈는데, 그 책의 다섯 장에는 우리나라의 관료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은 뒷날 라이덴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와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곁들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라이덴 소재 국립민족학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가장 두드러진다.

국립민족학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대략 1,500점에 달하는데, 세 사람의 소장품이 그 근간을 이룬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이 그 중 한 사람으로,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 가운데 23점은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이고, 나머지 13폭은 석천(石泉)의 것이었다. 그것이 뒤에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또 한 사람은 한말 전환국(典圜局)의 기사로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인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를 포함하여 조선 말의 값진 유물이 상당수 거기에 들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그것은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로,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이다. 그는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그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그 동안 이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로서,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발라벤이 전임으로서 한국어·한국문학입문·한국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와 라머스 신(Lamer-hin, S.)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전공 학생이 5명, 부전공학생이 해마다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학 가운데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방면의 연구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호프(Moelenhoff)에서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으로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있는바, 거기에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이다.

이 밖에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으로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네덜란드-독일 역사 청산 -전후 독일 처리문제에 대한 네덜란드의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보상에 관한 협의과정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보여 왔고 다른 주변국들과 비교했을 때 보상의 범위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오랜 기간 중립노선을 지켜왔던 네덜란드는 독일의 침공으로 전 산업부문에 걸쳐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 학살 비율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피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독일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가 온건한 기조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과정과 역사적 국면들에 주목하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양 지역 간 전후배상에 관한 과정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설립 및 참여와 함께 일부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주변국가들의 전후 피해보상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대비되는 네덜란드의 온건 기조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유럽공동체를 통한 경제회복이라는 기능주의적이고 결과론적인 측면을 넘어, 네덜란드 정부가 2차 대전과 전후 전쟁 보상을 위한 협상의 여러 국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왔는지, 협상 과정에서 가장 우선이 되었던 쟁점은 무엇이었는지, 시기별 태도의 변화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 지 등에 관한 분석을 실시했다. 나아가 최종적으로 온건 기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구조적 요인(사회경제적 측면)과 행위자적 요인(정치적 측면)을 살펴보았다. 네덜란드는 전후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서 전후 배상을 포함한 독일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2차 대전 직전까지 독일은 네덜란드의 가장 큰 무역파트너였으며 상호 경제의존의 수준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종전 직후 연합국의 독일분할점령정책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무역관계 개선에 장애로 작용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한 상업적 고려가 다른 정치적 고려들보다 우선되어졌고, 연합국의 정책방향이 명확해진 후에야 네덜란드의 대독일 처리문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전후 독일 문제 해결에 대한 다양한 쟁점들은 온건한 입장을 고수하던 정치인들과 산업계의 경제적 입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어졌다.

The clearing of history between the Netherlands and Germany through compensation of war damages was quite smooth. The Netherlands held a moderate position in negotiating the compensation and set narrower boundaries in defining damages compared to its neighboring countries. The Netherlands, a long-time neutral nation, had experienced serious damages to its industry due to German invasions. The percentage of Jews killed was also relatively high in the Netherlands. This paper focuses on the reasons why the compensation process between the Netherlands and Germany was so moderate despite its considerable damages. This can be explained in part by the establishment and participation in the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but in doing so we may neglect the reason why the Netherlands, out of all countries that had damages, held such a moderate position. Therefore, this paper looks beyond the functionalist and conclusive reason of economic development through European integration, and instead focuses on analyzing what positions Hague took, what issues were at stake, how these positions changed, and why they did. Furthermore, I look at the structural (socio-economic) and actor (political) reasons for the moderate position ultimately taken by the Dutch Government. The Netherlands had to face the German problem amidst the chaos of the after-war years. Up to the start of World War II, Germany had been the Netherlands’ biggest trading partner and the mutual dependence was higher than most trading partners. However, the division of Germany by the allies post-war acted as a hindrance to the recovery of this treasured trading relationship. To overcome this, commercial interests was considered priority to political ones, and this strong position allowed consensus on the German issue. The many opinions regarding the matter was ultimately absorbed into those of the moderate politicians.

[현지취재] 네덜란드의 경쟁력, 어디서 시작됐나

⊙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실용적 국민성

⊙ 월러스틴 예일大 석좌교수 “진정한 패권大國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

⊙ 시골 중소기업도 무역 전문용어 척척… 생활속 깊숙이 국제화

⊙ ‘합법적 매춘’에 제동 건 암스테르담市정부… 홍등가 폐업 잇따라

⊙ “한국이 네덜란드를 배워야 하는 시대 지났다. 이젠 협업해야”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유로마스트 전망대에서 본 유럽 최대 항구 도시 로테르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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