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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다. 닉슨은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에서 태어나 듀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내인 팻 닉슨과 결혼한 후 미국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으로 활동한 후 전후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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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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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닉슨은 탄핵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1974년 8월 9일에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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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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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리처드 밀허스 닉슨은 미국의 정치가로 제37대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통령을 역임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는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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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7/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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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오디세이] ‘교활한 디크’ 닉슨은 대통령에서 어떻게 물러났나

리차드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교활한 디크(Tricky Dick)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에 강한 정치인이었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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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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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티켓 – 요르바 린다 – Tiqets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입장권을 온라인으로 예약하세요. 이용 후기를 읽어보시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의 입장 시간과 가는 방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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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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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스페셜 -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퇴.20161208
KBS 스페셜 –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퇴.20161208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닉슨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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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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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밀허스 닉슨(영어: Richard Milhous Nixon, 1913년 1월 9일 ~ 1994년 4월 22일)은 미국의 정치가로 제37대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통령을 역임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는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제36대 미국의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다. 닉슨은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에서 태어나 듀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내인 팻 닉슨과 결혼한 후 미국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으로 활동한 후 전후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상원의원에 당선된 닉슨은 매카시즘 시대에 사상 공세를 하였으며,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직에 지명되어 당선되었다. 부통령 재직동안 니키타 흐루쇼프와 부엌 논쟁을 하면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60년 대선에서 닉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맞붙어 근소한 차로 패배하였다. 이후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하지만 현직 주지사였던 팻 브라운에게 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닉슨은 1968년 대선에 재출마하였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상대로 근소한 차로 승리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에 베트남 전쟁을 종결짓고 미국인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으며, 미국 환경보호국을 설립하였다. 또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우주 경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인종 차별 폐지에 힘썼다.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해 여러 외교 행사를 했으며 이는 1970년대에 데탕트 움직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50개 주 중에 49개를 승리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었다. 사건이 점차 커지자 닉슨은 증거 조작과 은폐를 시도하였으며, 이는 언론과 특검에 의해 밝혀졌다. 닉슨은 증거 제출을 거부하였으며 이는 대법원 판결에서 위법으로 판결되었다. 1974년에 의회는 탄핵 표결에 들어갔으며, 성사될 가능성이 높자 닉슨은 사임을 발표하고 제럴드 R. 포드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닉슨은 남은 20년 동안 저술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1994년 4월 22일, 81세 생일이 지난지 103일 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 편집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넉넉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동부로 진학하는 것을 단념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위티어 대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위티어 대학 졸업 후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듀크 대학교 로스쿨에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전교(graduating class) 3등에 드는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1937년 6월에 졸업하였다. 그 후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bar)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정계 활동 [ 편집 ]

리처드 닉슨은 위티어 지역에 위치한 윈저트 앤 뷸리(Wingert and Bewley)라는 로펌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했고, 1940년 6월 21일에 취미로 연극 활동을 하던 중 만나 교제하던 고등학교 교사 텔마 “팻” 라이언(Thelma “Pat” Ryan)과 결혼했다. 1942년 1월 닉슨은 물가관리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으로 이직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했다. 하지만 닉슨은 이 일을 즐기지 못했으며 4개월 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불과 39세의 나이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닉슨은 유권자들로부터 1만 8천 달러를 받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정치 스캔들에 휘말렸다. 선거 기간에만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다는 규정을 어겼으며, 돈이 정치 활동에만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수용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여론은 사퇴를 요구했다.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전혀 사용한 적이 없다며 유권자에게 개인 선물로 받은 것은 자신의 애완용 개뿐이라고 연설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선거 결과는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과반수 이상 차지하게 되었고, 닉슨은 미국의 36번째 부통령이 되었다. 1953년 1월 20일 4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고, 1956년 재선되어 43대 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196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2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68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재선되었다. 이 빛나는 승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임기 중 사퇴라는 치욕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외교 정책 [ 편집 ]

1969년 “아시아 각국은 내란이 발생하거나 침략을 받으면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969년 1월 닉슨 행정부가 수립된 후 미소관계는 상호협조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라고 강조한 닉슨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협상 시대 도래를 희망한 후 곧이어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서구 우방을 순방했다.(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 대통령은 대소협상에 관한 사전 의견교환을 하고 방소 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1] 외교 정책의 대담한 변화로 1971년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1972년에 그 자신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중공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미․중 정상회담(2월 21일),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져 훗날 미국과 중국 사이 국교 정상화 길을 열었다.[2] 또한 같은 해 소련을 방문하여 냉전 시대에서 대화 시대로 옮기는 기수가 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맺고자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였다.[3]

워터게이트 사건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워터게이트 사건 입니다.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국 행정부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대중에게 알려진 정치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1973년 여름까지 공모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23일,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연방수사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녹음된 말이 공개되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침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 공개된 이 녹음은, 이른바 연기뿜는 총(스모킹 건)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수반인 대통령이 도청했다는 사실보다, 누구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 뒤, 의회는 탄핵을 준비하였다. 탄핵안이 가결확실시되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제럴드 포드가 취임한 지 한 달 뒤 그를 특별 사면시키는데, 그 당시 닉슨에 대한 험악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선 커다란 정치적 모험이었고 결국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는 재선에 실패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전 미국이 뒤숭숭할 때 실업자 새뮤얼 비크가 경찰을 죽이고 비행기를 납치해 닉슨을 암살하려 했으나 곧 진압되었고 새무얼 버크 본인은 자살했다.

퇴임 이후 [ 편집 ]

사임 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그는 뉴욕과 그 근교의 뉴저지주에서 조용히 생활하였으나, 후임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종종 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후 1994년 4월 18일 뇌졸중이 발작하여 나흘 후인 4월 22일 81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져서 그곳에 안장되었다.

닉슨의 가족. 좌로부터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 리처드, 팻, 트리샤 닉슨 콕스, 에드워드 콕스

가족 관계 [ 편집 ]

닉슨은 아내 팻 닉슨과 두 명의 딸이 있다 – 트리샤(1946년생)와 줄리(1948년생). 첫딸 트리샤는 변호사인 에드워드 콕스(현재 뉴욕주 공화당 위원회 의장)와, 둘째딸 줄리는 아이젠하워의 손자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결혼하였다.

같이 보기 [ 편집 ]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각주 [ 편집 ]

↑ “이것이 미국이다<46> 외교 – 對蘇관계(하)”. 매일경제신문. 1972년 12월 29일. 1969년1월 「닉슨」行政府가 수립된 후 美蘇관계는 相互協調의 시대로 돌입했다. 선거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고 강조한 「닉슨」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協商時代의 到來를 희망한 후 곧이어 西独, 英, 伊 등 西歐友邦을 순방했다. (1969년 2월) 이 방문에서 「닉슨」대통령은 對蘇協商에 관한 事前意見交換을 하고 訪蘇준비를 착실히 진척시켰다. ↑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7쪽. ISBN 978-89-91965-12-6 .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회담했고, 그 결과 1972년 2월21일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사이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 점차 외교적 기반을 상실했다.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외부 링크 [ 편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워터게이트 사건(영어: 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2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각종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데, 미국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침입과 도청 사건, 이를 부정하고 은폐하려는 미국 행정부의 조직적 움직임 등 권력 남용으로 말미암은 정치 스캔들이었다. 사건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 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처음 닉슨과 백악관 측은 ‘침입 사건과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라는 태도를 고수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측근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닉슨은 탄핵안 가결이 확실시되자 1974년 8월 9일에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사건 경과 [ 편집 ]

도청 사건 적발 [ 편집 ]

도청 사건이 발생한 워터게이트 빌딩.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프랭크 윌스(Frank Wills)는 건물 최하부 계단의 후미진 곳과 주차장 사이 문 위에 기묘한 테이프가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는 문의 열쇠가 잠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부가 작업 도중 테이프를 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테이프를 묶어 놓았다는 의심이 들자 워싱턴 시경에 불법 침입이 일어난 사실을 통보했다.

경찰은 도착 후 같은 호텔에 있던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 사무소에 불법 침입한 5명의 남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5명은 비질리오 곤살레스(Virgilio González), 버나드 바커(Bernard Barker), 제임스 W. 매코드(James W. McCord), 유지니오 마르티네스 주니어(Jr. Eugenio Martínez),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이다. 이후 증거 사진에서 그들은 3주 전 같은 사무소에 침입한 적이 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같은 사무소에 두 번이나 침입했던 것 또한 범인 측의 실수였지만, 더 치명적인 실수는 버나드 버커가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Jr.)의 백악관 연락처를 기록해둔 수첩을 지닌 채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헌트는 예전에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CREEP 혹은 CRP)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에, 이 범행에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관련돼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에 닉슨 대통령의 로널드 루이스 지글러(Ronald Louis “Ron” Ziegler) 보도담당관은 “3류 절도(third-rate burglary)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며 백악관과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심문 과정에서 매코드는 CIA의 옛 직원으로 대통령 재선위원회 경비주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워싱턴 연방지방 검사국 앨 J. 실버드 주임검사후보는 매코드와 CIA 간의 관계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가 대통령 재선위원회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는 동료 칼 번스타인과 함께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해, 사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을 신문에 발표했다. FBI 및 다른 정부조사관들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그 기사로 인해 워터게이트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면서 닉슨 대통령과 그 측근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우드워드에게 비밀정보를 제공했던 딥 스로트(Deep Throat)로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고위층 인물은 이 사건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훗날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가 2005년 5월 31일 자신이 ‘딥 스로트’임을 밝혔다.[1]

사임을 한 닉슨의 측근들 – 에릭만과 홀더먼

닉슨 측의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시도 [ 편집 ]

닉슨 대통령과 H. R. 홀더먼[2] 대통령수석보좌관은 7월 23일 FBI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저지하고자 CIA 이용을 논의하였으며, 그 상황은 테이프에 녹음되었다(녹음테이프는 후에 특별검찰관에게 제출을 요구받았다). 논의 후 닉슨은 국가안보가 위험하다며 CIA에 FBI 조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방해하려는 닉슨 측 정치공작은 조지 고든 배틀 리디(George Gordon Battle Liddy) 및 E. 하워드 헌트를 중심으로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 직원이 주도하였다. 그들은 이전 닉슨정권에서 선관공(plumber unit)이란 애칭인 특별조사팀에서 움직였다. 이들은 정보누설을 조사해 민주당원과 반전운동활동가에게 각종 공작을 실행했다. 가장 유명한 게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한 대니얼 엘스버그가 다니던 정신과의 루이스 J. 필디그의 사무소 침입공작이었다. 이 공작에서 헌트와 리디는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침입은 닉슨 대통령과 그 측근에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 엘스버그 기소는 정부의 부정행위 때문에 기각되었다.

존 N. 미첼(John Newton Mitchell) 법무장관, H. R. 홀더먼 수석보좌관, 찰스 콜슨(Charles Colson) 특별보좌관(Chief Counsel) 및 존 대니얼 얼리크먼(John Daniel Ehrlichman) 내정담당보좌관, 닉슨 대통령 및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사건 계획 시점에서 어느 정도 관여했느냐가 논쟁의 주제였는데, 찰스 콜슨은 자서전 《새로 나기》(Born Again)[3]에서 변호사출신의 닉슨파 고위관리들이 그들이 누리던 엄청난 특권[5]옹호와 그들이 매우 존경하는 닉슨을 보호하기 위해 훌륭한 법률 지식을 이용하여 은폐 계획을 꾸몄다고 한다. 하지만 18일 만인 1973년 4월 8일 이들의 음모는 들통난다.[6] 미셜 대통령 재선위원회 책임자는 제프 스튜어트 마그다 선거운동본부장 및 프레더릭 C. 랄과 함께 헌트와 리디의 침입을 포함한 스파이 활동 계획을 승인했으나, 이를 그들의 상부에서 지시했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마그다는 예를 들어 다수의 다른 보고서를 제공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 [ 편집 ]

백악관을 떠나 헬리콥터에 타면서 작별하는 닉슨 대통령

1973년 1월 8일 리디와 헌트를 포함한 침입범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으나, 매코드와 리디 이외의 전원이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에서는 피고전원에 대해 범죄 공동모의, 가택침입 및 도청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피고가 증언을 하지 않고 유죄를 인정했으니 보석금을 지불해도 되냐는 사실을 밝혀 왔다. 이에 대해 존 J. 시리카 연방재판소판사[7]는 크게 화를 내고, 피고에 대해 30년형을 언도하는 동시에 그룹이 사건조사에 협력적이란 판결을 재고할 것도 이야기했다. 이 판사의 발언에 응하여 매코드가 스스로 대통령 재선위원회와의 관계가 위증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 침입범에 대해 재판은 가택침입의 재판만 유죄선고로 끝나고, 다른 사건에 대한 조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샘 J. 어빈 주니어 상원의원은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4월 30일 닉슨은 그의 가장 유력한 보좌관 홀더먼 및 얼리크먼의 사직을 강요했다. 거기에 닉슨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John Wesley Dean III)을 경질하고, 새로운 법무장관으로 엘리엇 L.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특별검사를 지명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5월 18일 닉슨은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Jr.)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TV에 방송된 심문은 전날 미국상원에서 시작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의 공청회는 여름을 통해 방송되었고, 이것은 닉슨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이었다. 특별위원회는 거기에 7월 13일에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위원회에서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은 백악관이 대통령집무실의 모든 대화를 자동녹음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것은 닉슨과 딘 법률고문의 면담을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조사위원회 양측 모두 테이프제출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으로 이를 거부하고,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 특별검사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의 거부로 인해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닉슨은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요구했으나,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진사임했다. 뒤이어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주 올랜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 am not a crook.)”라는 유명한 말도 이때 나왔다.

닉슨은 계속해서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면서, 백악관이 편집한 기록[8]을 제출하기로 합의하여 공표했다. 그 속에는 다수의 비속어 삭제가 몇 군데 있었다. 이것으로 닉슨에 대한 보수적인 국민들의 지지가 크게 약해졌다. 테이프의 대부분은 존 딘 법률고문의 증언과 일치하였으나, 1개의 테이프에 18분 30초가 삭제된 부분이 발견되어 의혹이 일어났다. 백악관은 이것을 닉슨의 비서 로즈 메리 힌스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는 시기에 녹음기의 페달을 눌러 우연히 테이프가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의해 전화를 받으며 페달을 밟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녀의 손발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백악관에 의한 자의적인 테이프 편집은 증거물 훼손으로, 이는 범죄행위로 기소대상이 된다고 판명됐다. 테이프 제출 문제는 대법원에까지 가서 다투게 되었는데, 1974년 7월 24일 테이프에 대해 닉슨의 대통령 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특별검사 레온 자보로스키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하는 판결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닉슨은 7월 30일 문제의 테이프를 넘겨주게 되었다.

탄핵조정 [ 편집 ]

1974년 3월 1일 대통령의 옛 측근 7명(홀더먼, 아리크만, 미셸, 찰스 콜슨, 고든 C. 스토먼, 로버트 C. 마디언 및 케네스 W. 베킨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 방해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배심은 거기에 비밀로 닉슨을 기소하지 않은 공모자[9]로써 지명하였다. 디안, 마그더 및 다른 인물은 이것으로 유죄를 인정하였다. 닉슨의 지위는 계속 불안정한 가운데, 하원은 대통령의 탄핵이 가능한 형식상 조사를 시작했다. 하원사법위원회는 1974년 7월 27일에 27표 대 11표로써 대통령에 대한 제1차 탄핵(사법방해)을 권고하는 것으로 가결되어 거기에 그 후 7월 29일에는 제2차 탄핵(권력의 남용)을 또 7월 30일에는 제3차 탄핵(의회에 대한 모욕)까지도 가결되게 되었다. 침입이 있은 지 약 며칠 후 기록된 테이프는 1972년 6월 23일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1974년 7월 30일 대법원 판결에 따라 넘겨준 백악관 집무실 녹음 테이프는 닉슨의 사퇴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 속에는 닉슨과 홀더먼은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문제를 날조하는 것으로 조사를 저지할 계획을 세운 것이 드러난다. 테이프는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Smoking gun))’라 불렸다. 닉슨에 대한 상원의 지지는 하원과 마찬가지로 약했다.

대통령 사퇴 [ 편집 ]

사임 연설을 하는 닉슨 대통령

유죄판결 받기에 충분한 표의 존재를 중요한 공화당 상원의원에서 전달받자, 닉슨은 스스로 사퇴를 결정했다. 1974년 8월 8일 밤 국민을 향한 TV연설에서 닉슨은 8월 9일 정오에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즉, 그때 닉슨은 탄핵 당한 유일한 대통령으로 소개되었으나 탄핵결의가 나오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닉슨은 현실에서는 탄핵 당하지 않아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닉슨 사임 후 부통령인 제럴드 R. 포드가 대통령으로 승격되어 9월 8일 “닉슨 대통령이 지시한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대해선 무조건 대통령 특별사면(놀리 프로시콰이)을 재판 이전에 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인해 닉슨은 이후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으나, 사면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찰스 콜슨은 그 후 에르즈바크 사건에 관한 고발로 유죄가 인정되어 은폐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스트론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3월에 기소된 7명 중에서 남은 5명은 1974년 10월에 공판이 진행되었다. 1975년 1월 1일 파킨슨 이외 모두는 유죄를 피했다. 1976년 상소재판소가 마디안 때문에 새로운 재판을 명령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고발은 모두 취하하였다. 홀더먼, 얼리크먼 및 미셸은 1977년에 변명을 끝냈다. 얼리크먼은 1976년에 다른 2명은 1977년에 형무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중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영향은 닉슨의 사퇴와 보좌관들 중 몇 명이 형무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은 선거운동의 자금조달의 광범위한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법률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중요한 정부고관의 새로운 자산공개요구 법률과 그와 맞먹는 정보의 자유법가결의 주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법률상 요구받지 않으나 한편 최근의 소득세형식의 공개에 대해 다른 타입의 개인정보개시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닉슨은 1972년 선거에서 우세했으나, 상대 후보 조지 마크가벤과 토론하는 것은 거절했다. 이후 토론을 회피하는 자는 주요 대통령 후보는 되지 못하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대통령은 회화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이런 기록을 하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매스미디어가 정치가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유력한 하원세입위원장 윌버 밀스가 닉슨 사퇴후 몇 개월 후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켰을 때 미디어는 예전이라면 이것과 비슷한 일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않았으나, 사건은 보도되어 밀스는 곧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해서 리포터가 중요한 정치가의 개인 행위를 밝히는 것에도 예전에 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보고하게 되었다. 우드워드 및 번스타인을 목표로 하는 리포터의 새로운 세대는 조사보도와 정치가와 연관된 활동에 관련된 공표도 하면서 증가한 금융정보에 대해서 새로운 스캔들을 찾아내 보도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경우 [ 편집 ]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미국 하원 법사위는 사법방해죄, 권력남용죄, 의회모욕죄로 탄핵소추를 가결하였는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공무집행방해죄, 직권남용죄, 의회모욕죄가 존재한다. 조문이 약간 다르다. 호주의 경우 의회모욕죄는 징역 25년형의 중범죄인데 비해, 한국의 의회모욕죄는 징역 3년형이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찰스 콜슨. 《백악관에서 감옥까지(Born Again)》. 홍성사. :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자인 찰스 콜슨의 자서전

리처드 닉슨 — Google Arts & Culture

리처드 밀허스 닉슨은 미국의 정치가로 제37대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통령을 역임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는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제36대 미국의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다. 닉슨은 요바린다에서 태어나 듀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아내인 팻 닉슨과 결혼한 후 미국 연방 정부에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으로 활동한 후 그는 전후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상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매카시즘 시대에 사상 공세를 하였으며,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직에 지명되어 당선되었다. 부통령 재직동안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부엌 논쟁을 하면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1960년 대선에서 닉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그는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맞붙어 근소한 차로 패배하였다. 이후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하지만 현직 주지사였던 팻 브라운에게 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닉슨 1968년 대선에 재출마하였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상대로 근소한 차로 승리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에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종결짓고 미국인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으며, 미국 환경보호국을 설립하였다. 또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으로 우주 경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인종 차별 폐지에 힘썼다. 1972년에 그는 중국을 방문해 여러 외교 행사를 했으며 이는 1970년대에 데탕트 움직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그는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50개 주 중에 49개를 승리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었다. 사건이 점차 커지자 닉슨은 증거 조작과 은폐를 시도하였으며, 이는 언론과 특검에 의해 밝혀졌다. 닉슨은 증거 제출을 거부하였으며 이는 대법원 판결에서 위법으로 판결되었다. 1974년에 의회는 탄핵 표결에 들어갔으며, 성사될 가능성이 높자 닉슨은 사임을 발표하고 제럴드 R. 포드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닉슨은 남은 20년 동안 저술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994년 4월 22일, 81세 생일이 지난지 103일 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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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오디세이] ‘교활한 디크’ 닉슨은 대통령에서 어떻게 물러났나

viewer 리차드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교활한 디크(Tricky Dick)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에 강한 정치인이었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미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대통령이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AP연합뉴스

viewer 닉슨 대통령의 사임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1974년 8월9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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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활한 디크(Tricky Dick). 미국 제37대 대통령인 리차드 닉슨(1913~1994)의 별명이다. 닉슨은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출마할 당시 부통령 후보였다. 그는 불법적인 사전 선거 운동으로 고발됐지만 TV 토론에서 능수능란한 말과 교묘한 논리로 이를 피해 나갔고 이후 ‘교활한 디크’로 불리기 시작했다. 닉슨은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후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는 기자 여러분이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할 리처드 닉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뒤집고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교활한 디크라는 별명이 다시 본격적으로 회자된 건 10년 뒤인 1972년. 재선에 골몰하던 닉슨 캠프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마련된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닉슨은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증거가 나오면서 2년 뒤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닉슨이 1974년 8월 8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 사퇴를 공식 발표하자 사람들은 “역시 교활한 디크” 라며 조소를 보냈다. 정치 인생 내내 교활한 디크라는 별명답게 권모술수로 위기를 넘겼던 닉슨을 낙마시킨 힘은 무엇이었을까.◇워터게이트의 시작부터 ‘교활한 디크’의 항복 선언까지=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선거본부 사무실에 불법 침입했던 괴한 5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대통령 재선위원회 직원들로 민주당 지도급 인사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고 민주당 선거 전략이 담긴 문서를 빼내기 위해 침입한 것이었다. 백악관은 “3류 도둑 사건에 불과하다”며 즉각 반박했지만 불법 도청을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지, 비용은 어떻게 조달됐는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주목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실제 이 사건은 닉슨의 재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7일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 인구 절반 이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들은 바 없다는 응답이 나온 것이다. 결국 닉슨은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의혹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73년 2월 7일. 닉슨 재선위원회의 불법 행위와 부정 자금, 정치 속임수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샘 어빈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닉슨 선거 운동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러나 교활한 디크라는 별명처럼 닉슨은 이를 전면 부인한다. 4월 30일 TV 연설에서 백악관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을 자기는 전혀 몰랐다고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그럼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씨는 점점 커진다. 어빈 위원회에서 닉슨 대선 캠프 관련자들의 증언이 잇따르며 여론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백악관 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닉슨이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했다는 사실까지 폭로한다.닉슨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10월 20일. 닉슨은 문제의 녹음 테이프를 요약해서 제출하자는 타협안을 거부한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파면한다. 이는 하원이 닉슨 대통령 탄핵을 검토하는 계기가 됐다. 닉슨은 1974년 1월 4일 열린 상원 워터게이트위원회에서 500건의 테이프와 문서 등을 제출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행정부의 특권을 내세워 거부했다.상황은 점점 닉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같은 해 7월 대법원은 대통령이 특별 검사가 요구하는 테이프를 제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 8시간 만에 백악관은 승복한다고 발표했다. 7월 27일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에 대한 2개 조항의 탄핵안을 승인한다. 첫째 조항은 사법권 행사 방해, 둘째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반복하여 위반했다는 내용이다. 사흘 뒤 셋째 조항이 추가됐다. 위원회 소환장을 무시했다는 위헌 행위였다. 8월 5일. 결국 닉슨은 TV 연설에서 수석 보좌관과의 대화가 담긴 테이프 복사본을 공개한다. 여기에는 워터게이트 사건 엿새 뒤에 닉슨이 FBI의 사건 조사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8월 8일.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한다. 워싱턴 포스트가 닉슨의 연루설을 꾸준히 제기하며 2년여간 탐사보도를 이어온 결실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워싱턴 포스트가 터트린 특종은 닉슨 사임 여론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칼 번스틴·로버트 우드워드 두 기자가 닉슨 사임 전까지 1년여 동안 쓴 기사는 200여건, 대부분이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기사량으로 따지면 25만자나 되는 분량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6개월 동안 휴가도 못하고 하루 16시간씩 일했다.◇숱한 압력과 비난을 이겨낸 워싱턴포스트의 힘은=무려 2년여에 걸친 워싱턴포스트의 탐사 보도는 기자 한두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현장에선 칼 번스틴과 로버트 우드워드라는 민완 기자들이 발로 뛰었지만 이를 진두지휘하고 물심양면 지원한 편집국장과 발행인의 힘이 없었다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은 그레이엄 캐서린 여사. 자살한 남편을 대신해 발행인을 맡았던 그는 숱한 압력과 비난으로부터 워싱턴 포스트를 지켜낸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가 받았던 압력을 상상을 초월했다. 백악관은 워싱턴 포스트를 ‘저질 저널리즘’이라고 폄훼했고 기자들은 공식 브리핑에서 제외됐다. 워싱턴 포스트가 소유하고 있던 플로리다의 TV 방송국은 현지 공화당원의 광고 보이콧 때문에 파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그러나 캐서린은 닉슨 행정부의 외압을 막으면서 기자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심지어 이들을 대신해 감옥에 갈 각오로 임한다. 캐서린이 닉슨 행정부의 압력에 주춤거리는 기자들을 격려하며 “우리는 이제 물살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한 말은 두고두고 회자 된다. 그는 세무조사, 방송국 허가권을 갱신해주지 않겠다는 협박, 심지어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시도 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연히 맞섰다.또 한 명 기억해야 할 이름은 벤 브래들리. 브래들리는 1968년부터 무려 23년 동안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워싱턴 포스트는 일개 지역 언론에서 전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매체로 거듭났다. 아마도 닉슨 행정부에게 브래들리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브래들리는 1971년 일명 ‘펜타곤 페이퍼’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행정부에 치명타를 가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의 베트남 공격의 빌미가 됐던 1964년 통깅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미 국방부 기밀문서를 보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 반전 운동에 불이 붙었고 닉슨 행정부의 도덕성은 땅으로 떨어졌다.워터게이트 탐사보도는 결정타였다. 브래들리는 하워드 사이먼스, 해리 로젠펠드, 베리 서스먼 등 편집국 간부들과 함께 관련 보도에 직접 관여했다. 취재 지시부터 사실확인, 기사 작성까지 취재 및 보도의 ABC를 지키며 진실 보도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탐사기획팀=김정곤기자 [email protected]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티켓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 (Richard Nixo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은 미국 제37대 대통령 (1969-1974) 인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의 매장지이다. 그는 그의 부인 팻 닉슨과 함께 묻혔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닉슨 대통령의 가족이 한때 소유했던 캘리포니아주 요르바 린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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