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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FIFA 브라질월드컵 8강전 프랑스 vs 독일 [습츠_월드컵 클래식]⚽ 스브스스포츠 x 월드컵 클래식 ⚽
✔ 2014년 7월 4일
✔ 리우 데 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
✔ 프랑스 감독: 디디에 데샹
✔ 프랑스: 요리스(GK), 에브라, 사코, 바란, 드뷔시
카바예, 마튀이디, 포그바, 그리즈만, 발부에나, 벤제마 (교체: 코시엘니, 레미, 지루)
✔ 독일 감독: 요아힘 뢰브
✔ 독일: 노이어(GK), 회베데스, 후멜스, 보아텡, 필립 람,
케디라, 슈바인슈타이거, 크로스, 외질, 토마스 뮐러, 클로제 (교체: 쉬얼레, 괴체, 크라머)
✔ 프랑스 0 : 1 독일
✔ 독일 4강 진출!

04:06 전반 12분 마츠 후멜스 결승골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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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적에서 동반자로 :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 화해

사실 독일과 프랑스는 19세기 이래로 한 세기 반 동안 무려 네 차례나 전쟁을 치렀을 만큼 치열한 대립 관계를 유지했지만, 오늘날 유럽 통합의 두 견인차요 기둥으로 손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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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rm.or.kr

Date Published: 1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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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비' 후멜스가 다했다 / 2014 FIFA 브라질월드컵 8강전 프랑스 vs 독일 [습츠_월드컵 클래식]
‘공격+수비’ 후멜스가 다했다 / 2014 FIFA 브라질월드컵 8강전 프랑스 vs 독일 [습츠_월드컵 클래식]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프랑스 독일

  • Author: 스브스스포츠 SUBUSU 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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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1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UkvRo7P-Q

[박보균의 현장속으로] 프랑스·독일의 화해, 한·일 관계 롤 모델로

1차 대전 프랑스 승전비 정식 명칭은 알자스-로렌 기념비(콩피에뉴 숲, 파리서 80?). 긴 칼(프랑스)이 독수리(독일)의 심장을 찔러 추락시킨 형상. ‘조국과 정의의 수호자, 알자스-로렌의 영예로운 해방자인 프랑스의 영웅적 군인에게’라고 적혀 있다. [박보균 대기자]

프랑스와 독일은 이웃이다. 화해와 협력의 동반자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까지는 숙적(宿敵)이었다. 두 나라 관계는 적대와 증오로 차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두 세기에 걸친 약 140년간이다. 양국은 네 차례 큰 전쟁을 치른다.

140년간 큰 전쟁 네 번, 2승2패 … 적대에서 화해로, 거대한 역사 전환의 힘은 무엇인가

①나폴레옹의 베를린 진군(1806년, 프랑스 승리) → ②보불(普佛)전쟁(1870~71년, 독일 승리) → ③ 1차 세계 대전(1914~18년, 프랑스 승리)→ ④히틀러의 파리 점령 (2차 대전 초기 1940년, 독일 승리)이다. 보불은 프로이센(普魯西·보로서)과 프랑스(佛蘭西·불란서)의 한자 표시다. 전쟁의 결과는 4전2승2패다.

전쟁은 참극이다. 1차 대전 때 프랑스군 140만 명이 숨졌다. 젊은 세대 40%가 증발됐다. 독일의 서부전선 희생 규모도 비슷했다. 원한과 복수심은 세대로 이어졌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이후 대전환이 시작된다. 양국 리더십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다. 그리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두 나라는 유럽연합(EU)의 견인차다.

피켈하우베(Pickelhaube, 뿔 달린 헬멧)를 장식한 독일 제국의 독수리.

숙적에서 동반자로-. 그 거대한 전환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한·일 관계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가. 8·15 광복 67주년이다.

나는 그 역사의 무대를 찾아갔다. 프랑스의 콩피에뉴(Compiegne)와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 랭스 대성당, 독일의 베를린 역사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역사 현장은 특유의 방식으로 단서와 해법을 준다.

프랑스의 콩피에뉴와 베르사유 궁전은 기억의 장소들이다. 영욕이 뒤얽힌 역사의 절묘한 무대다. 그 기억 속에 영광은 독점되지 않는다. 수치도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승패의 서사시를 교대로 썼다. 콩피에뉴는 파리에서 북동쪽, 자동차로 1시간10분 거리(80㎞)다. 작은(인구 4만) 도시다. 중심가 시청 주변은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차 있다. 나는 약속대로 그 지방 사학자를 만났다. 로랑 로베르(57). 관광지 자원 봉사자다. 시청을 출발한 지 5분 뒤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4차선 도로를 따라 15분쯤 가면 목적지다. 숲 속에 기념 광장을 조성했다. 정식 명칭은 ‘콩피에뉴 휴전 숲속 빈터(la Clairiere de l’Armistice)’다.

1806년 10월 나폴레옹, 베를린 입성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위용.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승리 직후다.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환영했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독일은 항복한다. 4년 4개월의 잔혹한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 국민은 환호했다. 프랑스는 승전 의식을 갖는다. 장소는 콩피에뉴 숲. 형식은 휴전조약. 실제는 독일의 항복 서명식이다. 보불전쟁 패배 48년 만의 설욕이다.

원형의 기념 광장은 서울시청 앞 광장의 반쯤 된다. 입구의 황토색 조각은 도발적이다. 청동의 장검(長劍)과 독수리-. 승리의 월계수로 감싼 긴 칼이 독수리의 심장을 찌른다. 독수리는 거꾸로 쓰러져 처박힌 형상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콰드리가 수모 콰드리가를 탈취하는 나폴레옹. 승리의 여신이 전차(戰車)를 모는 조각상으로 국가적 명예를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 위를 장식한다. [박보균 대기자]

독수리는 제국 독일의 상징이다. 칼은 연합국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승전비다. 명칭은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기념비-.

알자스-로렌은 만성적인 영토 분쟁 지역이다. 전승국이 교대로 주인이 된다. 프랑스는 1차 대전 승리로 그 지역을 되찾았다.

로베르는 “알자스-로렌 획득은 영토 집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과 복수욕의 과격한 표출”이라고 말한다. 나는 독수리 조각을 살폈다. 제국의 독수리, 라이히사들러(Reichsadler)다. 독일 황제(Kaiser)와 제후, 장군들의 헬멧을 장식한 독수리다. 카이저의 권위는 독수리의 웅비하는 날개 속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콩피에뉴 숲에서 날개는 처참하게 꺾였다. 그 승전비의 화법은 격정적인 직설이다.

1871년 1월 독일 보불전쟁 승리,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황제 즉위식 안톤 폰 베르너의 ‘베르사유에서 황제선언’(Kaiserproklamation). 프랑스 영광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비스마르크(흰색)가 주도한 빌헬름 1세 황제 즉위식. 보불전쟁 승리와 독일 통일을 과시한다.

숲 속 빈터의 중간에 놓인 둥근 화강암에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제국 독일의 범죄적 자존심을 굴복시켰다. 이는 자유 민중이 노예로 속박당하지 않기 위해서 싸운 승리를 말한다.” 그 어휘들로 콩피에뉴 숲은 정의의 성전(聖殿)이 된다. 성전의 글귀는 대중을 격발시키는 단어를 채집한다.

프랑스의 1차 대전 영웅 포슈(F. Foch) 원수의 동상도 서 있다. 동상 얼굴은 여유 있는 위엄이다. 광장 끝 쪽에 2층 박물관이 있다. 그 앞에 자그마한 르노 F-17 탱크가 놓여 있다. 회전 포탑이 최초로 탑재된 탱크의 원조다.

광장은 주말인데도 조용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도 그 이유다. 박물관 입장료는 4 유로다. 콩피에뉴 전문가인 로베르는 “여기가 기억의 장소임을 실감할 것이다. 특별한 전시물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박물관 특별 전시물은 열차 객차다. 휴전 조인식 객차(Le Wagon de L’Armistice)-. 그 객차에서 1, 2차 대전 두 차례 프랑스와 독일은 휴전 조약을 맺었다.

1919년 6월 프랑스 1차대전 승리, 베르사유 궁전 강화조약으로 설욕 베르사유 조약 협상 광경(윌리엄 오픈 작품). 윌슨(미국 대통령), 클레망소(프랑스 총리), 로이드 조지(영국 총리)가 가운데에 그려져 있다. 거울의 방에 전시한 기념물, 93년 전 서명 때 썼던 화려한 책상과 의자다. [박보균 대기자]

전쟁 5년째인 1918년 늦가을, 독일은 전선을 포기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포슈는 은밀한 휴전 장소를 물색했다. 기자들을 피하고 독일 대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포슈는 콩피에뉴 숲 빈터에 철로를 연결했다. 그의 전용 객차를 옮겨놓았다.

로베르의 목소리는 진지해진다. “이제 객차 속으로의 시간 여행이다. 이 객차만큼 승리와 절망의 순간을 담은 유물은 없다.”-. 11월 11일 콩피에뉴 숲 속 객차-. 휴전 조인식이 열렸다. 독일 대표는 휴전 조건을 물었다. 포슈는 “조건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것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위압적 명령이다. 독일 대표단에게 굴욕의 탈출구는 없었다.

1962년 7월 프랑스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를 이룬 드골(왼쪽)과 아데나워.

그리고 7개월 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어진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을 험악하게 압박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은 만성적이었다. 히틀러는 원한의 열정을 생산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복수욕을 퍼뜨렸다. 그 속에서 나치(Nazi)는 성장하고 집권한다.

독일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2차 대전 초기,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마지노선의 난공불락 신화에 의존했다. 독일의 전략은 프랑스의 허를 찔렀다. 마지노선을 우회해서 프랑스 영토를 유린했다. 6주 만에 프랑스는 항복한다.

나치 총통 히틀러는 휴전 장소로 콩피에뉴 숲을 선택했다. 로베르는 히틀러의 상상력을 해부한다. “히틀러는 복수의 드라마를 기습하듯 연출했다. 연출 방식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식(儀式)이다. 치욕과 수모를 프랑스에 되돌리는 극적인 반전을 노렸다.”-. 기억의 장소는 통치의 무기다. 히틀러는 역사의 민감한 소재를 대중 장악의 무기로 활용했다. 독일국민은 국가적 굴욕을 청산한 그에게 열광했다.

히틀러는 항복 조인식을 찾았다. 독일군은 박물관 속에 있던 객차를 숲 속 빈터로 끌어냈다.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갈고리 십자가)로 알자스-로렌 승전비를 덮었다. 박물관 한쪽에 히틀러 사진들이 걸려 있다. “히틀러 얼굴은 경멸과 분노, 증오와 복수, 환희와 쾌감이 뒤엉켜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 미국인 기자 윌리엄 시러(William Shirer, 『제3제국의 흥망』 저자)의 기사도 눈에 띈다.

1918년 11월 1차 대전 종전, 콩피에뉴 숲 객차 독일 항복 조인식 1차 대전 휴전 협상 대표인 프랑스군 원수 포슈(오른쪽 둘째)와 연합국 대표들. ‘콩피에뉴숲 빈터’로 옮겨진 열차 객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히틀러는 객차에 올랐다. 22년 전의 휴전 현장 그대로다. 승자와 패자의 위치만 바꿨다. 히틀러는 의자에 앉는다. 지난번 승자인 포슈의 자리다. 히틀러가 연출한 ‘따라하기 복수’는 완결된다.

객차 안에서 기묘한 공기가 퍼져 나온다. 상호 경멸과 분노, 희열과 낙담이 뒤엉켜 새어나온 듯하다.

베 르사유 궁전은 영욕의 기억을 특별히 드러내지 않는다. 탐사는 베르너(A. von Werner)의 그림부터가 적절하다. ‘베르사유에서 황제선언’-. 그 그림은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원본은 비스마르크 박물관). 베르너는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모습을 사진처럼 화폭에 담았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1세가 통일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광경이다. 그 기획자는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O. von Bismark).

1870년 시작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패퇴했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 조카)는 국경 근처 세당에서 항복했다. 참모총장 몰트케(H. von Moltke)의 프로이센군은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으로 진입했다. 루이 14세가 지은 그 궁전은 프랑스 왕정의 권위와 자존심을 상징한다.

비스마르크는 궁전의 ‘거울의 방’을 황제 선포식전으로 선정했다. 그 방(73X10.5m, 높이 13m)의 거울과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사치와 화려함은 압도적이다. 그 장소 선택 의도는 복합적이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짓밟는 시위였다. 프랑스에 대한 독일 국민의 열등감을 씻는 의식이기도 했다. 그때 독일은 수십 개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통일의 요건은 프랑스의 영향력 제거다.

1940년 6월 2차 대전 초기, 콩피에뉴 숲 객차 히틀러 ‘따라 하기’ 복수 히틀러는 1차 대전 수모를 설욕하려고 같은 객차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는다. 객차 앞에 히틀러(왼쪽 셋째)와 공군사령관 괴링(넷째, 뒷모습) 등 나치 수뇌부.

그 65년 전, 1806년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군을 대파한다. 그의 베를린 입성은 독일의 집단 기억 속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프랑스군은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콰드리가(Quadriga)’를 빼앗는다(8년 뒤 반환). 베르사유 궁전에는 베를린 입성 광경을 포착한 그림이 걸려 있다. 비스마르크의 베르사유 선택은 그 수치에 대한 반격이었다. 프로이센군은 거울의 방을 야전병원으로도 사용했다.

보불전쟁은 독일을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시켰다. 역사는 다시 소용돌이친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와신상담(臥薪嘗膽) 차례다. 1차 대전의 종결은 1919년 6월 베르사유에서의 조약 체결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의 힘과 영광으로 복귀한다. ‘거울의 방’ 한쪽에 그 역사를 기억하는 유리 공간이 있다( 8X4 m, 높이 3.5m 정도). 그 공간은 관광객이 몰리는 성수기엔 치운다. 그 속에 조약 서명 때 쓰인 수려한 책상과 의자가 전시돼 있다.

유리 벽에 연합국 대표들의 얼굴을 새겼다. 영국 화가 오르펀(W. Orpen)의 조인식 그림(런던 전쟁박물관 소장)을 복사해 붙였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독일을 거칠게 옥죈다. 독일의 군사 경제적 재기를 막는 기능으로 조약을 작동시켰다.

1962년 7월 랭스 대성당 드골-아데나워 화해의 미사 프랑스 랭스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Reims)의 역사적인 화해 장면. 1962년 7월 드골(오른쪽)과 아데나워는 미사에 참석해 적대적 역사를 청산키로 했다.

전후 프랑스 사회는 허술해졌다. 전쟁의 잔혹함은 평화 열망을 고조시켰다. 정치권은 좌우로 분열됐다. 전쟁 의지는 약화됐다. 그런 속에서 평화는 썩고 비굴해졌다. 히틀러의 공갈과 선동은 허점을 파고들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권력 쟁취의 소재로 삼았다.

콩피에뉴 숲 박물관 안 휴전조약 객차 앞에 선 기자.

나는 로베르가 보낸 e-메일을 읽었다. “나폴레옹부터 따지면 2차 대전 종전(1945년)까지 약 140년, 보불전쟁부터 70여 년간 굴욕과 설욕의 역사가 양국 사이에 숙명처럼 펼쳐졌다. 패권·팽창의 제국주의 시대는 그 숙명을 강화했다. 콩피에뉴 기념물은 그 숙명의 기억장치이면서도 그 운명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다.”

그 시대 양국 관계의 우선적 속성은 우월과 지배, 복수와 응징, 불신과 경멸이다.

베르사유 궁전에 담긴 이력은 그 숙명을 기억나게 한다. 콩피에뉴 객차는 그 숙명의 직설적인 잔해다. 그 기억의 창고는 양국 관계를 화해와 우호로 바꾸라는 역설의 서사시로 존재한다.

8·15 광복 67년 … 랭스 대성당 석판 묵시록적 화해 결의

한·일 리더십의 결단과 전략적 용기 필요

프랑스 랭스의 대성당은 기억의 장소다. 그 기억은 콩피에뉴 숲과 다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 화해(reconciliation, Versohnung)의 출발지다.

1962년 7월 8일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독일 총리(당시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는 랭스 대성당 미사에 함께 참석했다.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선언적 광경이다.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의 성지(聖地)다. 성당 정문 바닥에 기념 석판이 있다. “아데나워와 나는 대성당에서 화해를 맹세했다”, 샤를 드골. 1962.7.8 주일(主日) 11시02분. 분 단위까지 적은 그 단선적 결의는 묵시록적 감흥을 준다.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궁, 아데나워와 드골은 다시 만났다. 화해 협력의 엘리제 조약에 서명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시대에 유럽은 쇠퇴를 경험했다. 두 사람은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국력의 재도약을 위해 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다. 유럽연합(EU)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여론조사에서 양국 사람은 가장 친한 나라로 상대방을 꼽는다. 올해 두 나라는 유럽 재정위기 해법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동반자로서의 운명은 견고하다.

한 ·일 관계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위안부, 교과서문제가 터지면 양국관계는 거칠어진다. 그 우선적 원인은 일본의 역사 접근 태도다. 식민지사에 대한 일본 지도층의 반성·사과는 지지부진하다. 일본의 집요한 독도 욕심은 그 연장선이다. 이는 독일 리더십의 진정한 사과 자세와 다르다.

국가 간 화해 심리는 비슷한 국력을 확인하려 한다. 독일·프랑스의 전쟁 승부는 2승2패였다. 한·일은 임진왜란, 강제병합만 따지면 일본의 승리다. 하지만 한국의 부국강병은 세계사의 특별한 성취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전진, 올림픽에서의 비약, 젊은 세대 경쟁력은 높아진 국력을 드러낸다.

8·15 광복 67주년이다. 동북아의 장래는 불투명하다.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 중국의 위세는 정세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한국은 중국과 친해야 한다. 일본과도 가까워야 한다. 그 접근법은 대통령 시절 김대중 연설에도 있다. “불행한 관계는 일본의 한국 침략 7년(임진왜란)과, 식민 지배 36년간이다. 50년도 안 되는 두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 이상의 교류와 협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1998년 일본 의회).

진정한 친선은 한·일 지도자들의 역사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독일 리더십의 비전과 전략적 용기는 롤 모델이다. 일본 지도층은 과거사와 진솔하고 대담한 결별을 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21세기 한·중·일 협력시대를 함께 열어야 한다.

프랑스와 독일, 천년의 적대감 청산-영구화해

독일 분단⑤…프랑스, 자르란트 점령시도…드골과 아데나워, 화해로 전환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서기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분리되고 , 동프랑크는 독일, 서프랑크는 프랑스의 원조가 된다. 이후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족의 주류인 합스부르크 제국 또는 프로이센과 경쟁관계가 되었고,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서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20세기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두 민족의 관계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독일 총리를 지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양국은 1천여년의 기간 동안에 무려 42회나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2차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프랑스는 또다시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프랑스인들은 게르만족이 영원히 재기할수 없도록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20년쯤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감정 응어리도 사그라들었고, 두 나라 지도자들은 영원한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 염원이 현실화되면서 오늘날 EU라는 거대한 정치통합체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르란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2차 대전 기간에 프랑스는 나치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전쟁 배상금으로 땅이든, 돈이든 받아내려 했다. 전후 프랑스가 노렸던 땅이 자르란트(Saarland)였다.

자르란트의 면적은 2,569km²로 룩셈부르크 정도이며, 서울의 4배에 해당한다. 인구가 100만명으로 독일에서 가장 작은 주다. 이 주는 독일의 서남방으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에 인접해 있다.

이 땅은 오랫동안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영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자르란트는 중세에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들이 작은 영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프랑스 왕의 직할령도 있었고, 독일계 바바리아 왕국(바이에른)의 영지도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 이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고, 루이 14세 때 프랑스가 한때 점령(1680-97)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라인강 좌측 지역이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5년 파리조약에서 그 대부분이 프로이센에 넘어가고 남동부는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석탄 산지로, 산업 혁명 이후 석탄 및 철강 공업이 발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이곳을 합병하려다 실패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국제연맹이 감독하는 자치 지역으로 되었다. 그후 1935년 주민투표에서 91%의 지지로 다시 독일로 복귀했다.

2차대전 종전후 프랑스는 이 땅을 자치주로 만들어 공식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욕심을 냈다. 프랑스는 자르란트를 점령해 보호령(protectorate)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아무리 패전국이지만 독일 연방정부(서독)가 가만 있지 않았다. 1950년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자르란트의 반환을 촉구했다. 두 나라는 주민투표에 붙이기로 했다.

1955년 9월 23일 자르란트에서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프랑스령 자치주로 남을 것인지에 찬성한 표가 32.29%, 반대표가 67.71%로 나타났다. 압도적 인구가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자르란트는 독일에 복귀하게 된다. 1956년 10월 프랑스와 서독은 자르란트를 독일에 귀속시키기로 협약을 맺었고, 이 땅은 1957년 1월 1일 독일연방공화국의 1개 주로 편입되었다.

ECSC 가맹국 /위키피디아

독일과 프랑스의 자르란트 분쟁은 유럽 석탄 ·철강공동체(ECSC) 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ECSC는 EEC로, 오늘날 EU로 발전하게 된다.

ECSC 출범에 기여한 사람은 로베르 쉬망(Rober Schuman)이 프랑스 정치인이다. 쉬망은 1886년에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피에르 쉬망은 알사스-로렌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이었다가 영토변화에 따라 독일 국적으로 바뀌었다. 쉬망도 독일 국적이었다가 1차 대전 이후 프랑스 국적으로 바꿨다. 이렇게 출생지와 국적이 바뀌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쉬망은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굳히게 되었다.

2차 대전후 쉬망은 두 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고, 드골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제3의 세력권을 확보했고, 1948년에는 외교부 장관이 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교 장관이던 쉬망은 이른바 쉬망 선언(Schuman Declaration)을 발표했다. 내용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생산되는 철과 석탄을 하나의 조직에 의해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헛된 말을 쏟아낼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프랑스는 평화를 희망한다. 우리의 생각에 유럽이 동의할 것이다. 독일의 루르와 자르, 프랑스의 산업 시설은 하나의 목표로 움직일 것이며, 유엔의 감시를 받을 것이다. 지금부터 유럽은 새로 태어날 것이다. 유럽은 굳게 단합할 것이다.”

쉬망은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었다. 철강과 석탄의 생산을 공동관리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이며, 평화적 발전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간파했다.

1958년 유럽의회 첫회의에 참석하는 로베르 쉬망 /위키피디아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즉각적으로 반겼다. 패전국이었던 독일로선 유럽의 무대에 복귀할 기회가 되었다. 쉬망의 제안에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호응했다. 영국은 이때 노동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국제기구의 초국가적 권력에 반대하며 가입을 포기했다.

쉬망의 제안에 의해 6개국으로 철과 석탄의 생산을 조절하는 기구가 1951년에 탄생했다. 이 조직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다.

쉬망 선언 이후 프랑스는 독일 자르란트를 영토화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자르란트는 1955년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로 귀속될 것이 결정되었다. 철과 석탄의 화해는 원자력의 화해로 이어졌고, 1957년에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결성되었다.

1963년 1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 협정 체결식 /위키피디아

1958년 9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은 서독의 노정객 아데나워 총리를 파리 교외의 자택으로 초대했다. 드골은 값비싼 포도주를 꺼내 아데나워를 접대하면서 두 나라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자고 정중하게 제의했다. 아데나워는 그때까지만 해도 드골을 신뢰하지 않았다. 드골은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아데나워는 드골의 제안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후 4년간 두 정상은 15번을 만나고 100시간 이상 토론하고, 40통의 편지를 서로 보내며 두 나라의 협력문제를 논의하고 우정을 쌓았다.

드골이 서독에 화해 제스추어를 던진 것은 미국과 소련의 주도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는 독일을 끌어 안고 유럽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것을 구상했다. 아데나워도 서방과의 화해를 원했고, 프랑스를 통해 나치독일의 원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두 지도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1962년 7월, 드골과 아데나워는 파리 외곽 노트르담 성당에서 양국군대의 사열을 받았다. 두 사람은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1차 대전 때 독일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한 상징적 장소였다. 그 곳에서 두 정상은 두나라 국민 앞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영원한 화해”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반년후인 1963년 1월 22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의 정상은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엘리제 조약(Élysée Treaty) 의 골자는 두 나라가 영구히 화해한다는 것이었다. 조약 체결 당시에 드골의 나이는 72세, 아데나워는 87세였다. 두 노정객들이 1천여년에 걸친 두 민족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 것이다.

악수하는 샤를 드골 프랑스대통령과 아데나워 독일 총리 (1961)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Wikipedia, France –Germany relations

Wikipedia,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Wikipedia, Saar Protectorate

Wikipedia, Robert Schuman

Wikipedia, Élysée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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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천지 원수 프랑스-독일, 어떻게 최고 우방이 됐나

□ 시리즈 목차

1. 강한 독일경제의 비밀, 히든챔피언과 미텔슈탄트

2. 전국이 골고루 잘 사는 연방국가의 파워

3. 치열하게 경쟁하되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사회적 시장경제

4. 새 비전과 실적을 보이는 정치리더십

5. 4차 산업혁명에 앞서가는 독일 현장 방문기

6. 철저하게 잘못돤 과거를 반성하고 국가대통합으로

7. 나치 나라에서 최고 좋은 이미지 국가로

8. 프랑스‧독일, 철천지원수에서 최고 우방으로

큰사진보기 ▲ 독일의 과거 수도였던 본 근처 뢴도르프의 아데나워 총리 사저에 있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왼쪽)과 독일 아데나워 총리 동상 앞에 필자가 서있다. ⓒ 김택환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1984년 9월 22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프랑스 베르됭의 두오몽 납골당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기념식에서 손을 잡고 서있다. 양국 화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관련사진보기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략, 보불전쟁, 1차 세계대전, 히틀러 파리 점령, 2차 세계대전 등… 근현대사에서 프랑스와 독일만큼이나 전쟁을 많이 하고 희생이 컸던 관계도 없을 것이다. 이들 전쟁을 통해 수천만의 인명 피해와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 청년 40%가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1806년 프랑스의 혁명가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독일 빌헬름 3세는 러시아로 도망가기도 했다. 이에 보복하듯이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빌헬름 1세 황제는 베르샤유 거울의 방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도 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 항복조인식이 열린 콩피에뉴 숲 객차를 찾아서 객차에 올랐다. 승전국의 복수를 시위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통치자들은 서로 자존심을 할퀴고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갈등과 대결 대신에 화해와 협력 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위대한 정치리더십에 있었다.전후 45년부터 55년 10년 동안 프랑스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독일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프랑스는 승전국으로 독일에 대한 점령정책이 가장 가혹했다. 자르 지방을 합병했고, 산업지역인 루르 지역의 반환에 반대했다. 또한 독일 건국에서 프랑스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반대했다.하지만 50년 후반에 프랑스와 독일관계는 극적인 반전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전지 원수에서 최고 우방국가로의 전환이었다. 이같은 변화에는 크게 2가지가 작용했다. 먼저 외교안보적으로 극한 냉전으로 인한 소련의 위협과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 때문이었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협력해야 상호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먼저 움직인 것은 독일 건국의 주역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였다. 그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샤를 드골 대통령은 만나주지 않았다. 드디어 첫 대면은 1958년 9월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베를린 위기’를 일으키기 전 프랑스 콜롱베르-도제글리저에 있는 드골의 고향 마을에서 만났다. 드골은 자서전에서 아데나워에 대해 “선입관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특히 두 정치지도자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문명과 개혁에 대한 신념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고 전체주의에 대항해 투쟁한 기억들이다. 드골 대통령은 망명 정부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고, 아데나워는 나치에 의해 2번이나 감옥에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드골 대통령은 이듬해인 195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해 ‘독일 청년에 고한다’는 제목의 강연에서 “(프랑스와 독일 간) 이 높은 장벽의 산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가 대대손손의 적이던 독일에게 기분 좋게 손을 내미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드골은 자신이야말로 나치 독일의 역사를 넘어서 독일인에게 사면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드골 자서전에 나오는 구절이다.두 노정객은 상호 사저를 방문하면서 화해와 신뢰를 쌓아갔다.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는 총리 재임 14년 동안 사저에서 출퇴근했다. 뢴도르프라는 라인강 언덕에 있는 사저에는 방 2칸과 거실, 그리고 파빌리옹(서가)이 전부인 소박한 주택에 드골을 초대해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후 아데나워 기념관이 된 사저는 유일하기 드골과 아데나워가 손잡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있다.이를 통해 드골과 아데나워는 유럽공동체라는 EU(초기 ECC)를 건설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63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양국의 우호조약인 ‘엘리제 조약’에 양 정상이 도장을 찍어 큰 작품을 만들게 된다.프랑스와 독일 관계를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존경받는 양국의 위대한 지도자가 국민의 동의와 축복 속에서 화해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후 지도자들은 선임자의 철학과 전통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들은 정파와 이념에 상관없이 프랑스-독일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으면서 상호 협력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갔다.대표적으로 이념이 다른 프랑스의 사회당 미테랑과 독일의 기민당 헬무트 콜은 항상 손을 잡고 유럽을 미래로 이끌어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 시기에 프랑스 미테랑은 독일 통일에 반대했으나 두 정상은 만나 더 큰 유럽의 집을 짓자는 데 합의하면서 미테랑은 통일 찬성론자가 되었다. 또한 현재 프랑스의 임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역시 정파는 다르지만 양국의 이익과 유럽을 위해 가장 긴밀하게 만나고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반면 한국과 일본은 1965년 조약부터 여러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해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조약을 체결하는데 실패했다. 한국은 시작부터 학생 데모와 반대에 부딪쳤고 위안부, 징용배상 문제가 아직까지도 양국간 논란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의 선임자가 한 선언이나 약속을 뒤집는 언행을 일삼아 양국 관계를 더욱 나쁘게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역사 인식, 신사 참배, 독도 문제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다행히도 20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1년 5개월 만에 중국 청두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비록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를 보였지만 양 정상이 ‘대화를 통해 풀자’라는 합의에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어가리라고 기대해본다.지난 11월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우리가 도덕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 등 많은 전문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관계에서 이명박 및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여준 갈등과 대립이 아닌 김대중 및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한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가길” 기대하고 있다.현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일본 TBS 방송국에서 열린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서 “과거에 발목을 잡히지 말고 현명하게 풀어가 북일 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 및 협력에 함께 가야한다”고 강조했다.꽉 막힌 한일관계가 해빙돼 더 좋은 이웃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나아가 북미 수교보다 북일 수교가 먼저 이뤄진다면 한반도 화해와 협력을 앞당기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일본은 독일같이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끊임없고 진정한 사과를 통해서만 피해를 입은 이웃나라와 함께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이웃나라 일본을 ‘통 크게’ 활용하는 대인배적인 지도자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일본을 뛰어넘기 위함이다.

숙적에서 동반자로 :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 화해

본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한․중․일 간의 역사 분쟁 해소를 위한 사회적 인식의 토대 마련

사실, 한․중․일 간의 역사 분쟁은 그저 학술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감정과 정치적 이해관계, 미래의 국가 전략 …

본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한․중․일 간의 역사 분쟁 해소를 위한 사회적 인식의 토대 마련

사실, 한․중․일 간의 역사 분쟁은 그저 학술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감정과 정치적 이해관계, 미래의 국가 전략 등이 복잡하게 얽힌 민감한 사안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수긍할 수 있을 어떤 원만한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은 듯 보인다. 가령, 고구려사 문제이든 교과서 서술의 문제이든 간에 역사학자들이 어떤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실증적인 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실증적인 근거를 앞세워 정당화되기 마련이었던 자국중심적인 역사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일 양국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오랜 동안 서로 적대 관계를 유지해온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경험을 추적해보는 작업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리라 기대된다. 특히, 민족주의적 열기가 뜨거웠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 기간에 두 나라에서 제각기 과거의 기억들을 어떤 방식으로 표상하고 이용했는가, 그리고 이렇게 해서 구성된 ‘민족사’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양국의 역사학계와 시민사회가 어떠한 노력을 펼쳤는가, 그 결과 유럽 통합이라는 이상이 현실로 다가온 오늘날 양국 국민들의 서로에 대한 인식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작업은 동아시아에서의 역사 분쟁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타산지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균형 잡힌 역사 기술 및 의식의 함양에 대한 기여

한․중․일 세 나라의 경우 또한 독일과 프랑스 못지않은 교류의 전통을 지닌 문화적 공동체이며,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는 중국인이기도 하고 일본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 서술과 역사의식은 여전히 우리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수많은 문화 교류의 기억들 속에서 세 나라가 공유하는 유산을 찾기보다는 차별성과 독창성을 더 앞세우기 십상이다.

본 연구는 역사적 기억의 편향성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움과 동시에 그 기억이 갖는 갈등과 화해 또는 배제와 통합의 기능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 자신부터가 스스로의 기억을 점검하고 반성하는 성숙한 역사의식과 이를 바탕으로 열린 정체성을 가꾸어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타자들의 경험을 소개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우리의 역사 문화를 좀더 폭넓은 안목으로 그리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반추하도록 이끄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여 본 연구의 성과물은 학술 논문의 형태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도 공유될 것이다.

(3) 민간 교류의 활성화를 위한 교훈 제시

동아시아에서는 정부 부문의 접근이 민간 부문의 교류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반일시위가 격화되어도 두 나라 정상이 만나 악수를 나누면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국가간의 관계가 외교관계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중․일 관계란 세 나라 정부 간의 관계이기에 앞서 세 나라 국민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며, 이들 사이의 상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한 외교상의 우호친선은 사상누각일 뿐인 것이다. 양국간 민간 교류의 사례는 동아시아에서 반핵, 평화, 환경, 인권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시민사회 운동단체들 사이의 협력과 연대를 촉진하는 데 본보기가 될 것이다.

(4) 기억의 화해를 위한 문화사업 방안의 제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의 역사에서 특히 두드러진 점은 두 나라가 공유하는 기억의 유산들을 소중히 보존하고 기념하려는 정부와 민간 부문의 의식적인 노력이다. 문제는 이런 유산들을 민족사의 관점에서 또는 친일․사대와 같은 단순한 잣대로 재단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탈피하여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으로서 보듬고 열린 교육의 장으로 삼으려는 건설적인 태도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인 강 양편의 국민들이 과거의 역사적 기억을 공동의 유산으로 보듬기 위한 실천의 현장들은 정부 및 자치단체의 문화사업 입안자와 시민 단체들이 교류 협력 사업을 펴나가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5) 역사 교육의 새로운 모델 제시

본 연구에서 다루는 바, 역사적 기억의 표상과 굴절, 이를 둘러싼 국민들 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시사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역사학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깊이를 겸비하고 있다. 또한 이 주제는 문헌 기록만이 아니라 회화, 조각, 삽화, 만화, 영화 등 다양한 시각 자료에 의존하는 만큼 좀더 생생하고 현장감 있는 강의 방식 및 교재를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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