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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진행시킨 랜드리스로 인해
각 나라에 끼친 영향은 과연 어느정도였을까요?
항상 풀오토 연사로 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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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대여법 – 나무위키

다만 독일이 늦게나마 총력전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랜드리스의 부재로 독일을 제대로 몰아내지 못하고 시간을 계속 끌면 기술력의 격차로 소련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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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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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대여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Lend-Lease 렌드-리스, 1940년 – 1945년), 정확한 명칭은 미합중국 방위 촉진을 위한 조례(An Act to Promote the Defense of the Uni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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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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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을 바꾼 미국의 한 수, 랜드리스(무기대여법) – 밀덕닷컴

랜드리스 법(Lend-Leas), 혹은 랜드리스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무기대여법은 (이하 랜드리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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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ldeok.tistory.com

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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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무기대여법 ‘랜드-리스’ – 랭킹월드

‘랜드-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쇼미더머니’로 미국의 물자생산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는데요. 미국의 무기대여법인 ‘랜드-리스’는 1941년 3월 11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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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ongbeiren.tistory.com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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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M10 랜드리스 전차 탱크 – 롯데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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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otteon.com

Date Published: 7/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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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무기대여법.#2. Lend-Lease. 소련에 제공된 미국의 랜드리스

비록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랜드리스가 영국의 1/3 정도. 당시 금액으로 109억 달러. 지금 시세로 환산하자면 160조 정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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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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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무기대여법 개정안 통과…우크라이나에 통 크게 지원

해당 법안은 2차대전 당시 별다른 절차없이 연합군에게 물자를 바로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으로 ‘랜드리스법’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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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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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프라모델 소련 M10 랜드리스 전차 탱크 521 – 11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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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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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랜드리스 항공기뉴스 – War Thunder

랜드리스(무기대여법)는 미국이 연합군에게 군사 장비와 전략물자 등을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랜드리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법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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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arthunder.com

Date Published: 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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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전쟁사] 36개국에 원조를 해줘도 병력이 증강하는 나라. Feat,미국의 랜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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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랜드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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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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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법안에 서명하는 FDR 대통령.

미국 하원 제1776호 무기대여법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 Lend-Lease 렌드-리스[*] , 1940년 – 1945년), 정확한 명칭은 미합중국 방위 촉진을 위한 조례(An Act to Promote the Defense of the United States)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소련, 중국 등의 연합국들에게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든 법이다.

개요 [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달리 이 법을 적용받는 전쟁 물자는 미국이 해당국에 무료로 운송하였다. 이 법은 미국이 1941년 12월에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하기 약 9개월 전인 1941년 3월에 발효되었다. 무기대여법은 전쟁 물자 구입시 해당국이 선불로 지불하고 직접 운송하도록 요구한 캐시 앤 캐리 법안을 무효화시켰다. 그 이유는 영국이 전쟁과 공습으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져 더이상 무기를 구입하고 운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대일 승전일인 1945년 9월 2일에 만료되었다. 이 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속되어온 고립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국제 정세에 개입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배경 [ 편집 ]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분리하여 실행되었다. 1823년 먼로 독트린(먼로주의)에서 보듯이 최초 미국 외교정책의 관심은 아메리카 대륙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차 미국의 관심 영역은 극동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898년 쿠바 문제로 야기된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에 미국의 외교 정책은 유럽에서는 불간섭정책을, 남미와 아시아에서는 간섭 정책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보다 앞서 아시아 대륙에 진출해 있던 서구 열강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문호개방 정책 (Open Door Policy)’을 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삼는다. 결과적으로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 고립은 유럽대륙에 대한 고립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고립주의 원칙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깨지게 된다. 1929년 미국 증권시장의 주가 폭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각국은 자국만의 해결책을 모색했고,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그 해결책으로 비정상적인 팽창주의를 지향했다. 이들 국가의 팽창전략으로 1930년대는 긴장이 끊이질 않았고, 미국과 영국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1]

전개 과정 [ 편집 ]

1933년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특정 국가에 대해서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무기금수 조치 법안을 발의하여 의회에 제출한다. 그러나 의회의 고립주의자들은 침략국 선별 권한이 부여된 국제 협의는 대통령이 미국을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끌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하며, 분쟁중인 모든 국가에 대해서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이 법안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루즈벨트가 국제 분쟁의 침략자가 규정되면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집단 행동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 사회에 약속하며 국제 연맹과 협력하려는 의도를 보인데 대한 고립주의의 견제였다. 루즈벨트로서는 뉴딜 정책 수행을 위해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고,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던 군축 협상이 유럽의 불안정으로 결렬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출 법안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입장을 후퇴시켰다. 1935년 8월 제럴드 나이(Gerald P. Nye), 하이람 존슨(Hiram Johnson) 등 의회의 고립주의자들은 고립주의를 미국 외교정책 노선으로 천명하는 중립법안(Neutrality Act)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은 미국의 1차 세계대전 개입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국제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혹은 미국령의 어느 누구도 대통령이 지목한 교전국과 교전국이 이용할 수 있는 중립국을 포함 모든 지역에 군수품을 매각하거나 수송하는 것이 금지되었다.[2]

1937년 루즈벨트는 국제정세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주축국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한다. “현대 세계는 기술과 도덕 양쪽의 결속과 상호의존으로 다른 세계에서 발생한 경제적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특히 그 변혁이 쇠퇴하지 않고 확산되고 있을 때는 자신을 완벽하게 고립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것은 국제조약의 존엄성과 국제적 도덕성의 보전을 회복하려는 미국 국민들과 관련이 있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 염병이 퍼지기 시작하면 전염병으로부터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그 공동체는 질서 속에서 환자를 격리하는데 찬성하고 협력합니다. 이것이 평 화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나의 결심입니다.” 루즈벨트는 현재의 세계에서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것으로 세계평화를 원하는 미국인이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시기 유럽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다음해인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짓밟는다. 루즈벨트는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히틀러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실질적인 행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 과 프랑스 또한 속수무책이었다. 그해 8월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양면 전쟁(tow-front war)의 악몽에서 벗어난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마침내 폴란드 국경을 넘기에 이른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3]

유럽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영국의 보급로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조건을 수락할 경우 그는 선거에 패배할 수도 있었다. 또한 거부할 경우 그것은 영국의 패배와 미국의 위험을 의미했다. 루즈벨트는 결국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캐나다와 카리브 해에 이르는 해군과 공군기지의 사용권을 받았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미국의 직접적인 참전 없이 주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 고안은 1941년 1월 10일 ‘H. R. 1776’이라는 명칭으로 하원에 상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미국 외교정책을 고립주의에서 개입주의로 전환시킨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이다. 이 법안은 결국 격렬한 논쟁 끝에 ‘미국방어 증진법안(Act to Promote the Defense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이름으로 통과 되었고, 1941년 3월 11일 루즈벨트의 서명으로 발효되었다.[4]

결과 [ 편집 ]

무기대여법에 의해 루즈벨트는 자신이 미국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특정 국가에 군수품을 판매하거나 이양, 교환,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되었다. 독일과 전쟁을 치루는 연합국에게 군수 물자의 물품비만이 아니라 그 운송비까지 무료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전체 전쟁 지출의 11%인 총 501억 달러(2018기준 5650억 달러)가 개입되어 영국에 314억 달러(3540억 달러), 소련에 12억 달러(361억 달러), 프랑스에 32억 달러(361억 달러), 중국에 16억 달러(180억 달러), 나머지 연합군에 26억 달러(180억 달러)가 투입됐다.[5] 우선 영국이 수혜를 입었으며 4월에는 중국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소련에도 적용하여 군수물자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미소 양국은 모스크바에서 군수협력에 관한 협의를 진행한 끝에 1941년 10월 1일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First Soviet Protocol, 혹은 모스크바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의 유효기간은 1942년 6월 30일까지로 정하였다. 그때까지 루스벨트는 총 1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루스벨트는 연합국에 대한 군수지원을 원활히 하 기 위해 백악관이 직접 관리하는 무기대여청을 만들었다. 모스크바에는 미국인이 상주하는 지부를 두어 업무를 전담시켰다. 미국과 소련은 파시스트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군수분야에서 더욱 긴밀히 협조하였다. 소련으로 최초로 보내질 특별 분량의 군수물자 약 2,972톤이 1941년 12월 이란의 ‘페르시아경로(трансиранский маршрут)’을 경유하여 제공되었다. 제1차 소비에트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지급된 군수물자는 127억 3,600만 톤이었다. 이때 제공된 물자를 보면 군수용 비행기 22,150여 대, 탱크 12,700대, 화물차 975,883대, 모터사이클 35,170대, 트랙터 8,071대에 자동화기 131,633대, 폭발물 345,735톤 그리고 민수용 신발, 가죽, 광물, 주류 등 다양하였다.[6] 1945년까지 이 법률에 의해 연합국 측에 공급된 군수 물자는 약 500여억 달러에 이르렀다. 연합국 중 영국은 전체의 약 60%에 해당하는 300억 달러를, 소련은 약 22%에 해당하는 11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7]

개정 [ 편집 ]

미 의회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더욱 신속하게 제공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제정된 ‘무기대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법 제정 이후 81년 만이다.

2022년 4월 6일, 미국 하원은 무기대여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2022년 4월 28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 후 미국 하원은 무기대여법 개정안을 찬성 417표, 반대 10표로 가결시켰다.

2차대전 때와 달라진 점은 법률안 이름에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Ukraine Democracy Defense)라는 목표가 명시된 점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위 무기대여법이 발효되면 미국 정부는 무기와 군수물자, 절차적 장애 없이 우크라이나에 신속히 지원할 수 있다. en:Ukraine Democracy Defense Lend-Lease Act of 2022

무기대여법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3월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에게 무기와 식량, 연료 등 전쟁물자를 신속히 지원하기 위해 제정했던 법으로 당시 연합군이 나치 독일에 승리하는 데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무기대여법이 하원도 통과하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무기를 실시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일단 원하는 무기를 빌려 쓰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 그 대가를 지불하면 된다.

각주 [ 편집 ]

전황을 바꾼 미국의 한 수, 랜드리스(무기대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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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들어가며

랜드리스 법(Lend-Leas), 혹은 랜드리스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무기대여법은 (이하 랜드리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장한 미국의 대연합군 물자지원 계획이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헝가리 등의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에게 물자를 지원하자는 취지로 1941년 3월 11일에 시작해 1945년 9월 2일에 종료했다. 그 이후로도 이미 보내기 시작한 무기들도 운송을 계속해서 최종적으로는 9월 20일에 원조를 끝냈다.

각종 무기나 군수품 외에도 식량이나 연료도 지원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0년에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병기창 정책의 일환으로 사실 유럽 연합군의 핵이었던 소련과 영국 모두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던데다가 전쟁 초기 독일군 공세에 밀려났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국 국민당은 더욱더 힘든 상황들이였기에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던 미국의 자금으로 전황을 바꿔보자는 취지였다.

1. 수혜국

러시아 (구 소련)

영국

중화민국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기타 등등…

너무 많은 수혜국이 있기에 사진으로 확인할 것을 추천한다.

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도움을 받았다.

2. 무기대여법, 과연 유효 했는가?

상당히 유효했다.

소련의 경우…

연합군의 흔이 탱커라 불리던 소련을 예로 들어보자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막강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말 그대로 찍어낸 T-34를 사용해 독일로 진격해 승전을 이뤄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는건 가능하겠지만 반격을 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제 엔진을 달았으며, 미국이 지원해준 항공유로 띄우며,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준 고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이겨냈다. 게다가 직접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다. 미국이 준 약 15,000,000 켤레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이 호평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당연히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혼돈의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 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할 정도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가 점령 했는데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40만 대의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2차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도 레일과 1,860량의 기관차, 11,181량의 화차와 객차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이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에 대한 생산은 거의 없었고, 기존에 있던 차량과 시설을 보수할 목적으로 가뭄에 콩나듯 조금 생산한 것이 전부였다. 덤으로 석유도 2,599,000톤을 지급해서 모처럼 받은 수송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막았다.

식량 분야도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나 콤바인을 지원해주고 비료까지 투입한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식량의 25%를 담당했다.

즉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공급해 줌으로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나치독일이 온 유럽의 공업력과 자원을 다 가지고도 공업효율이 형편없어 생산성이 그야말로 형편없던 것도 한 몫 한다.

이는 말 소련은 무기대여법의 효과를 제대로 누린것으로 정작 미국과 소련이 2차 대전 전에는 간접적으로 전쟁했었고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부터 몇 십년간 서로 노려 본 사이임을 생각하면 참 재밌는 이야기로 만약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 뿐만 아니라 서방 연합국도 상당한 희생을 치뤘을 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소련이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완전히 점령하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길 수 있었던 건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더욱이 소련은 독소전쟁 초기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했기 때문에 식량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공장이야 어찌어찌 우랄산맥 근처로 옮겨 어떻게든 운용할 수 있다지만 식량은 특성상 기후 및 토질이 맞아야 생산이 가능한데 아시다시피 시베리아는 농업에 부적당한 땅이니 농사가 불가능했다. 이러니 무기가 있다 한들 그것을 사용할 사람이 굶어 죽으면 생산한 의미가 없다. 즉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랜드리스의 위력이 실제론 소련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엄청난 위력이었단 소리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구리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실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부수기재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1가지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부족으로 78옥탄가 밖에 안 되는 저등급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옥탄가의 고등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했으며 나중엔 아예 4개 플랜트 시설을 제공했다. 그것도 레일이나 연료탱크같은 부수기재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면서 말이다.

물론 이런 효과는 소련 뿐만이 아닌

무기대여법 최대 수혜국이었던 영국 혼자 랜드리스 전체에서 60% 가량을 차지한다.

일단, 영국 육군의 경우 사실상 전차의 주력이 M4 셔먼으로 통일되어야 했고 파이어플라이 같이 셔먼 전차를 개조한 개량형도 생산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척의 호위항공모함 및 호위구축함을 지원받았다.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으로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한마디로 미국 없었으면 개전 당시의 해군 규모를 유지하기도 곤란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함선 지원의 대가로서 영국은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을 미국에 양도하게 된다. 때문에 영국은 카리브 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게 된다.

또한 본토만으로는 식량자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은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국제 완제품이 아니면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영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물자의 상당수도 사실상 미국제였다.

3.천후 처리.

랜드리스는 뜻 그대로 무기를 대여해주는 것으로 무상 지원이 아니다. 당연히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 끝나고 나서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심지어 적대국 소련에게 조차도 받아냈다.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무기대여법이 끊기자 미국에 추가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대략 11억 파운드 가까이 됐다. 여기에 무기대여법은 언제까지나 전쟁 끝나고 나서는 다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 빚도 추가되어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나 넘은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소련은 1948년에 1.7억 달러로 전부 변제하는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51년에 800만 달러를 변제하라고 요청하자 소련은 300만 달러만을 변제하겠다고 하자 또 파토가 난다. 그런데,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국가,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 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4월 2일 러시아가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하여 랜드리스 관련 채무는 전부 러시아가 책임지게 되었다. 2000년에 6억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부터는 조금씩 변제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총액에 비하면 이자 수준에 그친듯 하다.

중국 국민당의 경우는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쫒겨 나가서 갚을 여력은 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그냥 미국이 빚 받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를 받은 국가들은 전쟁 이후 물자 지원에 대한 보답 겸 대금 지불 대신으로 미국에게 병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지급하거나, 기지 부지 등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다.

4.랜드리스, 그 의의

무기대여법으로 당시 강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말은 즉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자금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했고 무기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미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의 윈윈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의는 바로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결과로 나치가 심각하게 보수적인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력으로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공장설비를 포함해서 회수 할 수 있는건 모조리 회수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것도 아니였으며 공장은 회수한다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빌미로 학살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말 그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인 생산을 했다. 프리츠 토트 – 알베르트 슈페어의 생산 개선에 의해서야 무기 생산량을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이는 상당히 늦은 시점(1943~1944)이고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즉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의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5. 마치며

추축국의 중심인 독일 역시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은 원유의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못한 얘기지만, 독일은 동계장비를 절대적으로 핀란드에서 공급받았다. 독일은 전쟁 내내 핀란드에게 동계 장비를 공급받았으며, 북아프리카 전선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노력해준 덕분에 겨우 보급을 유지하는게 가능했었다. 또한 독소전 초기 독일의 보급선은 독일의 동맹국들이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으며 보호해주고 있었다. 일본군의 경우엔 같은 추축국의 지원을 받기보단 점령지 및 식민지를 쥐어짜서 중국 및 미국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썼다,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과 그로 인한 전후 일본에 대한 주변국의 증오를 받았고 이는 현재 한일관계를 비롯한 한중관계 등으로 보여준다.

수 십년 전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을 비롯한 추축국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이 피해 또한 미국의 랜드리스 덕분에 그나마 최소화 시킨 수치로 만일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을지는 파악하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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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무위키, 위키피디아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무기대여법 ‘랜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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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미국이 대연합군 물자지원 계획인 미국의 무기대여법 ‘랜드-리스’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랜드-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쇼미더머니’로 미국의 물자생산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는데요. 미국의 무기대여법인 ‘랜드-리스’는 1941년 3월 11일에 시작하여 1945년 9월 2일에 최종 종료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제의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폭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연합군측에 참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이러한 대연합군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 것은 2차세계대전 초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나치 독일에게 탈탈 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평가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소련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을 침공하였고 소련은 엄청난 인원을 징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공업단지가 나치 독일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엄청난 숫자의 소련군에게 무기를 제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항공기 18,303대를 지원받았으며 소총과 식량 그리고 대전차 차량을 지원받아 나치 독일군을 개박살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소련에게 준 약 1천 5백만 켤례의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미군이 지원해준 전투화는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굉장히 우수했다고 합니다.

결국 소련은 소련 각지에서 몰려드는 장병들에게 소총과 식량을 지급해 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나치 독일을 개박살 낸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하여 결국 베를린을 함락시켰고 나치 독일은 항복선언을 하게 되면서 유럽 전선의 전쟁은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의 무기대여법인 ‘랜드-리스’의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는 소련이었지만 최대로 지원을 받은 국가는 바로 영국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은 소련의 3배의 달하는 무기대여법 물품을 제공받았다고 하는데요. 특히 영국 해군은 대서양, 지중해, 태평양 3개의 전선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호위항공모함 및 호위구축함을 중점으로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러한 무기 및 식량 지원은 영국 연방 소속 병력들에게 지원을 해 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사실 2차세계대전 당시 본토에서 영국 연방의 소속 군인들에게 식량 보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국은 미국의 식량 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엄청난 대연합국의 무기대여법을 실행하는가 반면 미국은 유럽 전선을 포함한 태평양 전선에 엄청난 병력을 투입하게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참전 선포를 하면서 미국 역시 징집을 받기시작했던 것인데요. 몰려드는 미국의 징집병들에게 질 좋은 무기와 식량 그리고 미 육군항공대를 투입하여 진주만 폭격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일본 본토에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미국은 10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는 이른바 ‘몰락작전’의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이 원폭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면서 ‘몰락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포함하여 엄청난 물량 공세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일제는 항복하게 되었고 2차세계대전은 종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미국이 대연합국들에게 물자를 제공해 준것은 무상으로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전부 빌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대연합국으로 전쟁을 치뤘던 연합국들은 2006년이 되어서야 미국에게 빛진 것들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없었던 2차세계대전은 어떻게 끝났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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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무기대여법.#2. Lend-Lease. 소련에 제공된 미국의 랜드리스

비록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랜드리스가 영국의 1/3 정도. 당시 금액으로 109억 달러. 지금 시세로 환산하자면 160조 정도인데,

전투화의 경우 1천5백만 켤레가 소련으로 지원되었는데, 이건 소련 육군 전체 군인들이 신고도 남는 숫자.

지프를 포함한 트럭이 41만 대가량. 기관차가 1860량, 화차와 객차가 1.1181량.

전차와 같은 기갑차량이 12,161대. 대포와 박격포 등 중화기 96,000문. 포탄도 32만 발, 기관총 13만 정, 무전기 24만 5천 대, 기타 통신장비 42만 대

이렇게 모처럼 얻어온 것들을 기름이 없어서 못 굴릴까 봐 석유도 260만 톤.

미국이 소련에 지원한 품목 리스트는 끝도 없이 내려가지만, 당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품목이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물론 영국도 그랬지만, 소련 역시 식량사정은 아주 골치 아팠는데,

그건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너무나도 형편없이 밀리면서 곡창지대를 전부 빼앗겼던 이유도 있습니다.

최소한으로 축소해도 결국 영국은 물론, 소련까지 미국이 식량을 대 줬다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 대단한 것이, 식량이 자급자족되고도 남아도는 나라라는 것.

곡물은 물론이고, 스팸(그 스팸 맞다), 과일주스, 사과, 바나나 등 정말 오만 것들이 다 보내졌는데, 이는 국가의 역량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해서 독일과의 전쟁에 몰빵하던 소련에게 있어서는 가뭄에 단비 이상의 커다란 축복이었을 겁니다.

사실상, 미국의 소련에 밀어준 각종 무기와 장비. 그리고 식량이 없었다면,

독일이 1945년에 패망하는 건 좀 힘들었다고 봄이 타당하고

소련이 독일 국회의사당에 적기를 게양하는 것도 많이 늦어졌을 겁니다.

美 무기대여법 개정안 통과…우크라이나에 통 크게 지원

체코군이 운용하고 있는 T-72M1 / 사진=체코 국방부

[내외경제TV] 최재호 기자=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인 무기대여법을 상하원 모두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미 하원은 본회의에서 무기대여법 개정안을 상정해 찬성 417표, 반대 10표로 가결처리했다.

해당 법안은 2차대전 당시 별다른 절차없이 연합군에게 물자를 바로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으로 ‘랜드리스법’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이번 법안이 하원까지 가결되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과 법안 공포만 남은 상태다.

바이든 대통령이 해당 법안을 공포한다면 우크라이나에 공세용 무기가 지원될 근거가 마련되면서 미국의 무기 지원규모가 더 커질것으로 보인다.

밀리터리 프라모델 소련 M10 랜드리스 전차 탱크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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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랜드리스 항공기

랜드리스(무기대여법)는 미국이 연합군에게 군사 장비와 전략물자 등을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랜드리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법안에 결재를 마치고 1941년 3월 11일부터 발효되었으나… 실상은 더 복잡하게 꼬여 있었습니다. 특히 항공기 부분에서 정도가 더욱 심했죠.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미국은 우방에 미국산 전투기를 공급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중일 전쟁 당시, 중화민국에선 100대 이상의 커티스 호크 III 복엽기를 구매하였으며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틴 139WC 폭격기까지 구매 및 도입하였습니다. 그 후로 중국 내에서 잡음이 많긴 했지만, 미국의 벌티 V-11 공격기와 커티스 P-36의 생산 시설을 중국 내에 갖추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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