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내전 | 레바논 거리 총격전, 내전으로 가나? (Kbs_235회_2021.10.23.방송)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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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베이루트 시내에서 총격전이 발생, 최소 6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헤즈볼라가 주도한 시위대를 겨냥해 저격수가 총격을 가했고, 이에 헤즈볼라 대원들이 반격하면서 일어난 사건. 헤즈볼라는 즉각 배후로 기독계 정당 ‘크리스천 레바논 포스’를 지목,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레바논은 이슬람 시아파, 수니파, 기독교 등이 종파별로 권력을 나눠 갖는 정치 체제인데, 지난해 8월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의 진상조사를 두고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총격의 대상이 된 시위대 역시, 진상조사를 주도하는 판사가 親헤즈볼라 정치인만 소환한다며 판사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레바논의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름 부족 등으로 전력은 하루 2시간 미만으로 공급되고 있고 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제난 속에 정치 혼란마저 겹쳐진 레바논의 현실을 현지 교민의 취재를 통해 전합니다.
#특파원보고세계는지금 #세계는지금 #국제시사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매주 토요일 밤 9:40 KBS 1TV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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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 – 나무위키

1990년 10월 13일 걸프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던 미국의 묵인 아래 시리아군이 대대적인 아운파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시리아군에 패전한 아운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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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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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바논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5만에서 23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구의 1/4인 백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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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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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 정체성이 저지른 레바논 100년 내전 – 시사IN

첫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레바논이 말려들면서 시작된 내전이다.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베이루트를 초토화시켰다. 둘째는 이란을 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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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in.co.kr

Date Published: 10/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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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CivilWar in Lebanon) – [노동자의 책 : 마르크스주의]

레바논 내전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레바논내 기독교도와 회교도 간의 대립과 여기에 가세한 시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 미국, 프랑스, 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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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aborsbook.org

Date Published: 4/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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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분쟁 25시 |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내전 2014년 11월호

세계분쟁 25시 7 |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내전 … 사진은 지난 1월 2일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근거지인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지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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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unikorea21.com

Date Published: 3/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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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은 ‘내전’이 아니다” – 프레시안

레바논에 내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작년 7월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침공으로 초토화 됐던 남부지역이 회복세에 접어들 겨를도 없이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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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essian.com

Date Published: 5/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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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총격 사건, 내전의 전초전인가 – 한국일보

지난달 1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레바논 적십자사에 따르면, 7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다쳤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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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hankookilbo.com

Date Published: 7/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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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거리 총격전, 내전으로 가나? (KBS_235회_2021.10.23.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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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레바논 내전

  • Author: KBS 세계는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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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바논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5만에서 23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구의 1/4인 백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35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배경 [ 편집 ]

역사적 배경 [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주변 아랍국가가 독립하면서, 역사적으로 크리스트교도가 많았던 레바논은 중동에서 몇 안되는 크리스트교도 중심 국가가 되었다. 원래 레바논의 영역은 ‘작은 레바논’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 땅을 지배했던 들뢰즈파의 영주 파할 앗딘의 지배 영역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오랫동안 이 지역이 ‘진정한 레바논’이라고 여겨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의 종주국이 된 프랑스는 원래의 레바논 영역(소레바논)을 넘어 ‘대레바논’이라고 불리는, 원래의 시리아 영역으로 여겨진 베커 고원, 레바논 북부와 트리폴리시,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여 국경선을 획정한다. 이것은 마론파를 포함한 레바논 독립운동을 저지하려는 프랑스의 분단 정책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레바논 내전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사건이 되었다.

종교적 배경 [ 편집 ]

레바논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레바논의 인구구성 중 51%를 차지했던 크리스트교 마론파와 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이슬람교도간 연합으로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크리스트교 세력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은 항상 마론파에서 선출되며, 레바논의 아랍적이고 이슬람적인 성향을 보장하기 위해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1970년대 이슬람교도가 급증하면서 크리스트교도는 3분 1을 조금 넘는 구성 비율로 바뀌었다. 그러자 이슬람교도는 총리의 권한 강화 등 보다 강력한 권한을 요구하였다. 이에 마론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슬람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4월 13일 PLO게릴라들이 베이루트의 한 교회당을 기습하여 다수의 기독교도들을 살해하면서 내전은 시작되었다.

시리아의 개입 [ 편집 ]

종파 정체성이 저지른 레바논 100년 내전

ⓒReuter8월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했다.

8월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폭발은 끔찍했다. 여느 폭탄 테러에서도 보기 힘든 버섯구름에 세계는 경악했다. 일단 우발적 사고로 보이지만 의아하기 짝이 없다. 위험물질 질산암모늄 2750t을 안전장치 없이 6년간 항만 창고에 방치했다. 항만 사무소가 관계 당국과 법원에 6차례나 위험물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반응은 없었다. 피해는 막대하다. 사상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극심해진 경제위기, 올해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이번 폭발 사건까지 겹치며 레바논은 총체적 난국이다. 폭발로 밀 보관창고가 날아가 식량위기도 가중될 전망이다.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총리를 포함해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책임지고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퇴임하는 장관들이 자기가 속했던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희한한 발언도 늘어놓고 있다. 피해 현장을 방문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마치 레바논 지도자 같다는 푸념도 들린다.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는 대중은 거리에서 ‘차라리 마크롱이 나서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실패 국가(failed state)’의 징후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레바논 문제의 본질은 경제가 아니다. 정치의 실패다. 연원은 100년 전 오스만제국(오토만제국) 패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오스만제국을 재편하며 신생국을 만들었다. 현대 중동의 시작이다. 영국은 요르단과 이라크 왕국의 수립을 주도했다. 혁명의 후예를 자임하는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 공화국의 탄생을 도왔다. 1926년 프랑스는 자국의 제3공화국 헌법을 본떠 레바논 헌법을 만드는 등 법과 행정 시스템을 정비하면서 레바논 건국을 준비해나갔다.

고민이 있었다. 레바논에는 종파가 너무 많았다. 본래 프랑스는 ‘마운트 레바논(레바논 중부 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레바논 건국을 추진했다. 레바논 남부와 북부엔 각각 드루즈파(이슬람 계열)와 마론파(기독교 계열)가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논의를 진행하며 레바논 국경의 범위가 넓어졌다. 베이루트를 포함한 북부 트리폴리, 시돈과 티르 등 지중해 해안 거점도시와 베카 계곡, 남부 리타니강 이남 지역까지 다 포함시켰다. 이른바 대(大)레바논, 현재 레바논의 영토다.

이로써 해안 및 남부에 살던 무슬림과 대도시의 기독교 소수 종파들까지 신생 레바논에 대거 편입됐다. 모두 18개 종파가 한데 묶이게 되었다. 당시 이슬람 수니파는 레바논 독립을 반대하며 끝까지 시리아로 통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독립을 희구하던 레바논 정객들은 수니파를 설득했다. 결국 레바논 건국에 참여하는 모든 종파에게 일정한 권력을 붙박이로 보장해주었다. 각료직과 국회 의석수를 종파별로 고정하여 나누어 갖는 독특한 형태였다. 그래야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종파 대표들은 1932년 시행된 인구조사에 따라 권력 분점을 합의했다. 구체적 내용은 1943년 국민협약에 담겼다. 협약은 의회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마론파 기독교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국회 부의장과 외교장관은 그리스정교, 국방장관은 드루즈파가 맡도록 못을 박았다. 국회 의석수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6대 5의 비율로 고정했다. 이른바 신앙 정체성에 입각한 ‘종파주의’ 또는 종파 간 ‘연합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레바논식 민주주의다. 모자이크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국민협약은 단순히 권력구조만 다룬 것이 아니었다. 레바논의 국가 성격을 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동서 문명의 화합으로 상정했다. 이에 따라 1943년 의회민주주의 공화정 세속국가 레바논이 출범했다. 후견국을 자임한 프랑스도 고무되었다. 중동의 신생국 중에서 이렇게 종파 간 공존이 명문화된 나라는 없었다. 사람들은 레바논이 중동의 모델 국가가 될 것이라 상찬했다. 그러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내면의 골을 메우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구구성이 변했다. 기독교인이 줄고 무슬림, 특히 시아파 인구가 늘어났다. 국민협약에서 권력을 배분한 근거는 1932년 실시했던 공식 인구조사다. 당시 레바논 인구 104만8383명 중 기독교도가 61만2790명(그중 마론파가 35만1197명)이었다. 반면 무슬림은 43만5593명으로 조사되었는데, 그중 수니파가 19만5305명, 시아파 16만6536명, 드루즈 6만2084명 등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율이 58.5%대 41.5%였던 것이다.

이후 공식 인구조사는 없었으나 추계에 따르면 1977년쯤엔 ‘기독교인 140만명 대 무슬림 170만’ 정도로 인구 역전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가운데서도 시아파가 대략 90만명에 이르게 되어, 마론파 기독교(80만명)와 수니파 무슬림(60만명)을 넘어서는 최대 다수 종파로 성장했다고 추측된다.

ⓒAFP PHOTO8월11일 폭발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종파 간 간극

시아파는 인구조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마론파의 우위를 명시한 국민협약을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요구는 타당했다. 하지만 레바논 출범 당시 합의했던 레바논의 대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국민협약의 본질은 분쟁을 막기 위해 종파별로 권력을 분점하되 특정 정파의 편파적 이익 추구를 막고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자는 데 있었다. 계약에 따라 다원적 정치체제의 균형과 질서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초월적 신앙고백에 근거한 종파 간의 간극은 컸다. ‘레바논’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종교는 오랜 세월 이어진 끈끈한 정체성이었다. 이 와중에 인구변화가 생겨나니 사달이 난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더 심각한 데 있었다. 각 종파들이 해외의 자기 종파와 연대하게 되었다. 종파를 고리로 레바논 분쟁이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대표적 두 사안이 얽히며 레바논을 망가뜨렸다. 첫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레바논이 말려들면서 시작된 내전이다.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베이루트를 초토화시켰다. 둘째는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의 공세적 개입과 헤즈볼라(레바논에 기반을 둔 이슬람 시아파 정치·군사 조직)의 문제다. 현재까지 레바논 정치 상황을 뒤흔들고 있다.

먼저 내전을 보자. 종파 균열이 서서히 불거지던 1970년대 초, 베이루트 외곽 난민촌에 자리 잡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무장세력을 레바논 무슬림(특히 시아파)이 지원하면서 일이 꼬였다. 기독교 우파 세력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불러들였다. 결국 1975년 4월 베이루트 외곽에서 무장 충돌이 일어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물론 시리아까지 개입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들락날락하게 되었다. 시리아군은 레바논 전쟁 억지를 명분으로 2005년까지 29년간 주둔하며 주권국가 레바논을 마치 식민지처럼 다뤘다.

최악의 내전 상황은 1982년 이스라엘의 2차 침공과 맞물려 벌어졌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를 거쳐 베이루트까지 진격했다.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팔랑헤)와 함께 PLO의 거점을 파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론파인 바시르 제마엘 대통령 당선자가 피살되는 사건이 겹쳤다. 친이스라엘 대통령을 PLO가 사살했다는 오해는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의 보복 공격을 불렀다. 1982년 9월16일 저녁, 기독교 민병대는 베이루트를 장악한 이스라엘군의 묵인 및 공조하에 베이루트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급습했다. 이틀 동안 학살이 자행되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460명에서 3500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시아파 레바논인들이 살해당했다. 이른바 ‘사브라 샤틸라 사건’이다. 중동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과 레바논 기독교도를 악마처럼 인식하게 된 계기다.

냉전이 끝날 무렵에야 내전도 종식되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연맹이 주도하고 미국이 후원한 타이프 협정이 체결된다. 종파 대표들은 다시 마주앉았다. 이슬람 측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기독교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각료회의의 권한을 높였다. 대통령의 총리지명권, 계엄선포권, 의회해산권을 폐지하면서 권력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국회는 기독교와 이슬람 6대 5 비율에서 5대 5 동수로 바뀌었다. 수니파 총리의 권한이 괄목할 만하게 커졌고, 국회의 위상도 높아졌다. 나름 인구변화에 조응하는 권력 재조정이었고, 대통령·총리·국회의장의 권한이 균형을 맞췄다. 혹자는 이를 ‘3인 대통령 체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권한의 균형은 곧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 행태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이란의 개입과 헤즈볼라 문제다. 1989년 타이프 협정은 종파 간의 갈등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결국 헤즈볼라가 떠올랐다. 사실 종파 간 갈등이 극심하던 내전 중반기인 1983년부터 헤즈볼라는 힘을 드러냈다. 사브라 샤틸라 사건 이후 PLO가 약화되고 이스라엘도 레바논에서 발을 뺐다. 레바논은 내부 종파의 갈등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즈음에 ‘혁명 이란’의 후원으로 등장한 강력한 시아파 정당이 바로 헤즈볼라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 시아파 집권을 추구하는 공식 정당이지만 동시에 무장 세력이기도 하다. 1983년부터 헤즈볼라는 중동 현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행위자다.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대사관과 미군 해병대 주둔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2005년 2월 라피크 하리리 총리 폭살 사건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테러와 연루되었다고 줄곧 의심받아왔다.

내전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 1992년부터 고강도 경기부양책을 쓰며 레바논의 환골탈태를 꿈꿨던 하리리 총리의 피살은 레바논을 뒤흔들었다. 2000년 선거에서 총리로 복귀한 하리리는 시리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마침 미국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시리아가 적성국가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수니파의 대표였던 하리리는 기독교권 및 드루즈파를 설득해 ‘반(反)시리아-반(反)시아파’ 연대를 구축하려 했다. 물론 미국은 하리리를 지원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소행이라고 알려진 테러로 하리리가 허망하게 숨지자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반(反)헤즈볼라-반(反)시리아’ 시위대가 베이루트 순교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 규모가 무려 100만명을 웃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시리아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철군을 선언했다. 헤즈볼라도 레바논 정치에서 힘을 잃는 듯 보였다. 수니파와 기독교파는 이제야 비로소 레바논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7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로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이스라엘은 33일간 시아파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남베이루트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지했다. 헤즈볼라라는 위험 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의 버티기는 끈질겼다. 결국 레바논 민간인의 피해가 크게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교전은 중단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헤즈볼라 제거 목표는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부상한 헤즈볼라는 ‘기독교와 수니파의 친미·친서방 기조는 이스라엘 편들기’라고 질타하며 여론 반전을 주도했다. 기독교와 수니파의 협공에 위협을 느끼던 온건 시아파 세력들도 헤즈볼라와 함께했다. 시아파 각료들은 내각에서 전원 사퇴했다. 시아파 국회의장인 나비 베리는 일체의 회의 소집을 거부하며 정국을 마비시켰다.

이후 아랍의 봄, 시아파 벨트(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의 헤즈볼라) 형성, 내전, IS(이슬람국가: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단체) 등장 등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헤즈볼라는 견고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밖으로는 이란과 연대하여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등에 개입하면서 투쟁력을 키웠다. 국내에서는 통치 역량을 학습했다. 현 미셸 아운 대통령은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친서방 성향의 수니파보다는 친헤즈볼라 성향을 보이는 등 시아파의 영향력이 높아진 상황이다. 그러나 어느 종파도 레바논 전체를 아우르며 국가 공권력과 행정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헤즈볼라는 자신의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 남부 등 일부 지역에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운용하는 듯했다. 그나마 헤즈볼라는 병원, 학교, 복지 시스템 등을 갖춰 시아파들에게 배타적으로 제공했지만 다른 종파는 그 정도도 해내지 못했다. 이번 항만 폭발 사건은 레바논이 국가 전체 시스템 문제를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 난맥상은 이토록 오래 묵은 레바논 정치의 모순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합리적인 정치체제라고 믿어졌던 레바논의 추락은 종파 사이의 벽 때문이다. 종파적 정체성에 함몰되어 국민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1943년 국민협약의 정신은 단순히 싸움을 회피하기 위해 권력을 나눈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분점을 통해 공존과 대화를 이끌어내어 종국에는 유기적 결합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목표를 상실하면서 레바논은 정상적인 국가 건설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어떤 제도가 레바논을 구할까

더 큰 비극은 종파 분열을 틈타 국제정치가 국내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레바논 내 종파 간 대화보다 외국 동일 종파와의 연대가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중동의 대표적 두 문제인 ‘이팔(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이란 주도의 시아파 네트워크’가 레바논 내부로 틈입해 나라를 뒤흔들었다. 레바논은 이팔 분쟁이 폭발하는 장소이자 중동 시아파들이 연대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항만 폭발 사건 이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지도자들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내각은 총사퇴했고 전문가들은 레바논의 미래에 관해 분석과 전망을 내놓는다.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 바꾸는 게 답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근본을 바꾸어야 한다.”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내전 2014년 11월호

세계분쟁 25시 |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내전 2014년 11월호

세계분쟁 25시 7 |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1943년 독립 이후 한때 세계무역과 금융 및 관광의 중심지로서 중동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번영을 이루었던 곳이다. 독립 초기 종파 간 협약에 따라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 국회의장은 시아파 이슬람교도, 국방장관은 드루즈파 이슬람교도, 군사령관은 마론파가 맡아 종파별 권력을 인구비율에 맞게 분배하는 형태를 유지했다.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이 지역도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기도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합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레바논 분쟁의 역사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드루즈파 이슬람교도 간의 충돌과 반목에서 출발했다. 시리아 북부의 성 마론 수도원을 중심으로 5세기경부터 독자적으로 주교를 선출하는 등 분파 움직임을 보이던 기독교의 한 분파가 베이루트 북쪽의 산악 및 삼림지대를 중심으로 이슬람교 지배에 저항했는데 이 분파가 바로 마론파 기독교였다. 종교의 분파적 움직임은 이슬람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11세기경부터 정통 이슬람교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드루즈파 세력이 확대되면서 레바논 내에 또 다른 폐쇄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 이르러 오스만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종교적 갈등은 다소 약화되었다.

레바논 내전, 국제전으로 확산

한편 1860년 드루즈파가 오스만 당국의 묵인 하에 마론파 기독교도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바논 지역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는 종교 집단 간 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가 레바논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프랑스는 오스만제국을 압박해 레바논 지역에 자치 지역을 만들게 한다. 이러한 통치에 대해 기독교도는 환영했지만 드루즈파를 포함한 이슬람교도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레바논 분쟁은 1958년에 기독교 세력의 샤문 대통령이 서방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이 반발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 개입을 요청했고 미국은 영국, 터키와 함께 1만5천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서방의 개입으로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3개월간 계속된 소요사태로 2,700여 명이 사망했다.

1975년 4월 강경파 기독교도 정당인 팔랑헤 당의 당원이 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탑승한 버스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및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내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78년 3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텔아비브 습격에 대한 보복을 명분삼아 레바논을 침공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파견했으나 미국이 이스라엘과 기독교 우파를 지원하고 구소련이 시리아와 이슬람 좌파를 지원함으로써 레바논 내전은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82년 이스라엘은 PLO 본부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기독교 정권을 강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을 다시 침공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슬람 민병대의 공격으로 네 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입은 인명 손실만큼의 피해를 입었고 국내 철수여론이 높아져 1985년에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1982년의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 결과적으로는 PLO 소탕작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레바논에서 시리아군을 철수시켜 시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계획된 전쟁이었다.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의 분쟁

1985년 이스라엘이 철수한 이후 시아파 민병대가 남부 레바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슬람의 시아파는 친시리아계인 아말파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모두 PLO의 각 파벌 및 드루즈파, 수니파와도 자주 전투를 벌였다. 특히 서베이루트와 남부 레바논을 근거로 하는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을 대상으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이스라엘 북부 지방에 로켓을 쏘는 등 반이스라엘 투쟁을 벌이고 있다. 1988년 대통령 지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협약을 통해 인구비율에 따른 권력배분 폐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 협약은 또 다른 불만을 야기했을 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96년 4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에 휴전이 성립되어 레바논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지만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남부주둔군 간에 안전지대를 문제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000년 5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의 안전지대에서 철수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10여 개의 부락을 점령하여 그들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2002년 8월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공격 중지를 요구하면서 시리아와 레바논에 대해 대규모 보복 공격을 예고했고 2003년 10월에는 실제로 공격했다. 2006년 7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하는 사건으로 시작된 양측의 전쟁은 34일간 지속되어 레바논 국민 1,287명, 헤즈볼라 대원 수백명, 이스라엘은 153명이 사망했다.

2013년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 대 헤즈볼라의 분쟁은 폭력적 위기로 악화되었다. 양측의 사망자도 전년도에 이어 수백명을 넘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레바논 분쟁은 종교와 민족문제, 그리고 인접국가와 강대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팔레스타인 난민문제까지 결합되어 실마리를 풀기 어려운 상태이다. SNS가 발단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민주화 요구 열풍도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중동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책임 있는 국제정치 세력들이 안정적인 세계 자원공급 문제 해결차원에서 원만한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이 요망된다.

조상현 / 군사연구소 연구위원

“레바논 내전은 ‘내전’이 아니다”

레바논에 내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작년 7월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침공으로 초토화 됐던 남부지역이 회복세에 접어들 겨를도 없이 다시 헤즈볼라는 ‘친 서방 정권’인 파우드 시니오라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지난 23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시아파와 시니오라 정권을 지지하는 수니파 간의 반목의 골은 급기야 지난 25일 학생 3명이 사망하고 340명이 다친 베이루트 아랍대학 내 유혈충돌로 표면화 되기도 했다.

인구는 370만 명에 불과하지만 20여 개의 종파가 제각각의 이념과 정치색을 갖고 있는 레바논은 분쟁 가능성을 항상적으로 안고 있는 나라다. 이에 지난 1975년부터 15년 간 계속된 내전 이후 의회 의석을 종파별로 안배하는 완충장치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작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통해 헤즈볼라의 권력이 커진 상황에서 시아파는 아예 정부 권력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레바논의 내전이 헤즈볼라로 대표되는 시아파와 시니오라 정부가 이끄는 수니파, 그리고 에밀 라후드 대통령을 배출한 기독교계 마론파 간의 갈등에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해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의회 내 시아파 의석을 늘린다든지, 부통령 자리를 두고 시아파에 영구적으로 안배한다든지 하는 방법 등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바논의 내전이 우려되는 이유는 단순한 내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전쟁이 결국은 레바논 영토에서 이뤄진 미국과 이란 간의 ‘대리전’ 성격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란 침공을 노리고 있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앞세워 이란이 지원하는 헤즈볼라를 미리 한번 쳐본 것이다.

최근의 레바논 상황도 그 연장선상에서 풀이될 수 있다. 헤즈볼라의 나스랄라와 시니오라 총리가 물러설 수 없는 일합을 벌이는 상황의 배후에는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대결이 숨어 있고, 한 발 더 들어가면 사우디아라비아를 움직이는 미국의 손이 보이는 것이다.

다음 글은 시리아 출신 정치전문가 사미 모바이드가 이처럼 복잡다단한 레바논의 구체적인 상황을 현지의 시각에서 분석한 것이다. 이 글은 홍콩의 인터넷 매체인 <아시아타임스> 29일자에 실렸다.

▲헤즈볼라와 시니오라 정부 간의 갈등은 지지자들 간의 유혈충돌로 번졌다. 사진은 지난 25일 그 과정에서 숨진 시아파 대학생의 장례식 장면. 추모객들이 헤즈볼라의 지도자 나스랄라의 사진을 들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중앙 흰옷)의 지워을 받고 있다. 사진은 레바논에 76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약속한 레바논 지원 국제회의. ⓒ로이터=뉴시스

민주주의에서 파업은 합법이다. 그러나 ‘반달리즘(파괴)’은 불법이다. 레바논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정치 상식 중 하나다. 1950년 대 바쉬르 알 커리와 카밀 차문 정권을 넘어뜨린 것도, 1992년과 2005년 두 번이나 오마르 바라메흐 정부가 붕괴된 것도 모두 총파업 때문이었다.그런데 바라메흐 정부를 두 번이나 넘어뜨렸던 정치세력이 최근 헤즈볼라가 주도한 총파업에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중 대표적 인사가 드루즈인들의 정치적 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다. 그의 아버지인 카밀 줌블라트가 1950년대 커리와 차문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유명세를 탔음에도 말이다.레바논 집권당인 ‘3.14 그룹’ 역시 헤즈볼라와 기독교계 자유애국운동(FPM)이 결성한 레바논 야권 연합 측이 지난 23일 총파업에 돌입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 여파로 25일 아랍 대학교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것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됐다.자유애국운동의 미셸 아운 대표,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 그리고 레바논 의회 의장 나빈 베리는 모두 친서방적인 푸아드 알-시니오라 총리의 교체를 원한다. 그러나 ‘3.14 그룹’ 측은 현 정부는 법적 정통성을 지녔으며 내각 교체는 모든 정파 간 합의가 이뤄졌을 때, 혹은 헤즈볼라 무장해제 등과 같은 조건을 내건 협상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이들의 주장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부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야당 측에서는 ‘3.14 그룹’을 의회에서 내쫒기 위한 조기선거를 요구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얘기한다. 친 서방 정권이 이미 부패한 데다가 이념적으로는 전체주의적이고 군사적으로는 잘 무장됐으며, 헤즈볼라를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의 시도를 못 본 척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권이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의 수족 노릇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전체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야당 측은 시니오라 총리가 지난 12월 1일부터 부분적으로 시작됐던 파업의 뜻을 받아 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었더다면 이번 총파업이 유혈사태로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레바논 정부와 집권 여당에 충성을 다하는 군부가 야당이 주도한 파업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레바논 시가지에서 공공연하게 사보타주를 했다고 주장했다. 아운 대표는 여당 쪽에 선 ‘레바논 군단'(LF: 1975년 내전 당시 이스라엘 편에서 싸웠던 팔랑해 민병대가 다른 기독교 세력을 흡수해 만든 정치단체)의 사미르 개가 대표는 아예 헤즈볼라와 자유애국운동연합 회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저격수인 양 옥상에서 무장을 한 채 서 있기도 했다고 덧붙였다.아운 대표는 “우리는 사람이나 사유재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며 “우리는 총으로 무장한 채 피를 찾아 돌아다니는 LF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아운 대표는 LF가 ‘민병대 통치’를 시작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군사력을 쓰지 않고 타이어만 태우겠다는 우리를 어떤 정부가 욕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아운 대표는 오히려 시니오라 정권이 “범죄자 정부”라고 말했다.파업 첫째 날의 혼돈은 정파를 막론하고 세 명의 사망자와 340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아운 대표는 24시간 만에 파업 종료를 선언하면서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시니오라 총리는 끝내 사임을 거부했고 자신의 정통성과 시위 세력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레바논 지원 국제회의 참석차 파리로 떠났다.이번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이자 전직 주미대사인 반다르 왕자와 알리 알 라리자니 이란 최고국과안보회의 의장이 레바논 충돌을 중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1주일 쯤 전, 라리자니 의장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과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만난 바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외교장관은 전화 회의를 통해 “레바논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의는 계속돼야 하고 레바논 야당 연합과 정부 측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중재안에 마련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아운 대표와 나스랄라는 마치 이번 폭력사태를 끝낼 수 있는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는 양 했지만 실제로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령 아래 행동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동의 ‘초강국’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대리전이 레바논에서 벌어진 셈이다. ‘3.14 그룹’을 이끄는 사드 알-하리리가 레바논 내 사우디아라비아 ‘통’으로 꼽힌다면 나스랄라와 베리는 친 이란 파다. 나스랄라는 한 번도 이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란이 없었다면 자신은 헤즈볼라 지휘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할 정도다.나스랄라는 지난 24일 연설에서는 “두 나라 간 의견 일치가 있을 때만 레바논에 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3.14 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레바논 정부 구성이 헤즈볼라를 달래고 레바논 내 시아파의 불만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는 전망들이 베이루트 곳곳에서 새어나오고 있다.타렉 미트리 레바논 외무장관은 레바논 문제를 아랍 전체 차원에서 해결토록 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사 총장은 지난 달 레바논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레바논을 방문하기도 했었다.당시 무사 총리가 내놓은 중재안은 ’19+10+1’ 안이다. 기존 다수당인 ‘3.14 그룹’에 19석을, 헤즈볼라와 자유애국운동 측에 10석을 주고, 한 석은 무소속에게 주자는 얘기다. 이렇게 하면 ‘3.14 그룹’의 의석이 3분의 2를 넘지 않아 집권 여당의 독주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3.14 그룹’은 이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헤즈볼라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이란은 시아파와 대결국면을 조성하고 있는 레바논 내 수니파들과 충돌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베이루트를 에워쌌을 때에 이란은 오히려 시아파가 규율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수니파 지역이 베이루트 봉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레바논 친여매체들은 레바논에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을 우려한다. ‘3.14 그룹’ 지지자들은 헤즈볼라가 베이루트에 이란식 신정일치체제를 세우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나스랄라는 여권의 이 같은 주장이 100%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최근 혼란상황은 종파 간 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헤즈볼라가 운영하는 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대결구도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살린 알-호스, 오마르 카라메흐 전 총리 등 정적(政敵)들을 방송에 출연시키는가 하면 파업에 관한 보도에서도 십자가가 그려진 옷을 입은 기독교인 참가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수니파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방송에 나와 헤즈볼라를 방어하는 발언을 하게 하기도 했다.결국 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사건이 시아파의 폭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는 수니파 지도자들의 일대기나 명언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몇 차례 방영하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이 수니파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시니오라 총리 외에도 수니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려는 것이다.에서 수차례 방영된 수니파 지도자들에 대한 프로그램은 아랍 내 수니파 전체를 격분시키기 충분했다. 2003년 이라크가 미국에 침공당한 후 이라크 내 시아파가 힘을 받으면서, 이라크 내 암살대에 의해 수니파 유명 인사들을 제거당하고 시아파가 수니파 사원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면서 차근차근 쌓여 왔던 분노였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의 몰락 이후 나스랄라가 새로운 중동의 스타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쉽게 표출되지 못했던 분노였다.그리고 그 분노가 이번 레바논 사태를 통해 터져버린 것이다. ‘3.14 그룹’은 이 같은 수니파의 민족감정이 함양되길 원하고 있다. 나스랄라의 카리스마와 지난여름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던 헤즈볼라의 영웅적 전적 때문에 아랍 대중들 사이에서 ‘3.14 그룹’의 인기가 날로 떨어지던 와중에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생긴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악관이 시니오라를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백악관이 밀어주는 힘이 세면 셀수록 헤즈볼라가 시니오라를 비난할 건수도 많아졌다.영국의 일간 의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중앙정보국(CIA)도 레바논 내 헤즈볼라에 반격하기 위한 은밀한 조치를 조직해 왔다.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 내 이란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반대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다. 비밀에 부쳐진 이 계획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몇몇의 미국 하원 의원, 그리고 이 계획을 지지하는 일부 사우디아라비아 관료들에게만 공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CIA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랍 세계 내 수니파에 대한 반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판단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공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담 후세인 제거 후 우리는 종파간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시아파에 우호적인 정책만 펼쳐 왔다.”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화해에 대한 미국의 온화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 문건은 결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결국 션 맥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이 “우리는 시니오라 정부를 넘어서선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시니오라 총리가 레바논 내 분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유화 조치를 취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결정일 뿐 우리가 헤즈볼라와 만나서 협상하는 일은 없다”고 진화작업에 나서야만 했다.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레바논 지원 국제회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레바논에서 무책임한 폭력의 분출을 봤다”며 헤즈볼라 공격에 날을 세웠고,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23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극단주의자와 알카에다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 극단주의자 간의 세기의 대결”이라며 헤즈볼라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했다.많은 사람들이 헤즈볼라의 무장해제와 작년 여름 이스라엘-헤즈볼라 간 전쟁을 얘기한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가설은 미국의 월간 의 시무어 허쉬 기자가 얘기한 ‘미국과 이란 간의 대리전 설’이다. 당시 레바논에서 벌어진 전쟁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무기로 미국과 이란이 벌인 전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시아파 게릴라 세력의 제거를 강하게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 세력을 일망타진하겠다는 목적은 실패했다.미국과 이스라엘이 헤즈볼라 제거를 원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에서 ‘제2의 헤즈볼라’ 탄생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라크에도 헤즈볼라 같은 구성체가 있다. 메흐디 민병대를 생각해 보라. 이들은 젊고 혈기왕성하며 적개심 강하고 종교적으로 경도돼 있는 병사들로만 구성돼 있다. 무크타다 알-사드르를 수장으로 하는 이들에겐 무기조차 풍부하다. 이란을 축으로 하는 헤즈볼라 같은 세력이 이라크에도 또 생겨난 것이다.미국이 헤즈볼라를 미워했던 또 다른 이유는 미 국무부가 지원하고 보증한 시니오라 정부를 하산 나스랄라가 위협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이 시니오라의 최대 장애물을 하루 속히 해치워주기를 바랐었다. (라이스 장관이 왜 레바논 조기 정전에 반대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란과의 전쟁을 계획한 미국이 헤즈볼라의 능력을 통해 ‘이란의 맥박’을 쟤 보려 한 데 있다.누구의 말을 들어도 이스라엘과 맞서 싸운 헤즈볼라의 파워에 미국 정부가 놀란 것은 분명한 듯하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을 경우 이란이 얼마만큼 맞서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대리전’은 시니오라와 나스랄라가 고집스레 자기 입장을 지키는 연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누가 먼저 태도를 바꾸는가를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각각 나스랄라와 시니오라를 부추기고 있다. 양 측 중 누구도 먼저 포기할 의사는 없어 보이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나스랄라는 자신은 물론 야당 측 누구도 기존의 입장을 철회할 뜻이 없다고 분연히 밝혔다.일각에서는 이같은 분열이 계속될 경우 레바논 일부는 시니오라 정부가, 또 다른 일부는 헤즈볼라와 연합한 다른 정부가 통치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시나리오다. 헤즈볼라는 자신들에게 저항했던 정치인들을 몰아낼 수 있고, 시니오라 역시 베이루트 서부에서 여전히 자신의 지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미르 개가 LF 대표가 사임한다면 같은 기독교 단체지만 색깔은 전혀 다른 자유애국운동의 미셸 아운 대표가 기독교계 수장에 오를 수도 있다.이보다 좀 더 나은 대안은 1896년에 아민 헤마엘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것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 당시 헤마엘 전 대통령은 부통령 자리의 신설하고 이를 영구적으로 시아파의 몫으로 남겨둘 것을 제안했다. 수니파에서 총리직을 맡고 기독교계 마론파에서는 대통령을 맡고 시아파에서는 의회 의장과 부통령직을 맡는 것이다.시아파의 정치적 지분이 커진 현 상황에서는 꽤 논리적인 제안으로 보이지만 처음 제안됐을 1986년만 해도 현실화가 난망한 얘기였다. 레바논 지평선에 아스라이 깔린 내전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라면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제안한 ’19+10+1’ 안도 검토해 볼 만하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제안들도 모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의심할 바 없는 협조’ 약속 아래에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이루트 총격 사건, 내전의 전초전인가

지난해 베이루트 폭발 대참사 이후에도

3개 정파 간 균열 여전…경제는 더 악화

‘약한 국가’ 레바논 내 폭력 위험만 증폭

“내전으로 가진 않을 것” 전망, 아직 우세

지난달 1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레바논 적십자사에 따르면, 7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다쳤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와 그 동맹세력인 아말이 레바논 주법원 빌딩인 사법궁전 앞에서 집회를 하던 중, 시위대를 겨냥한 총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헤즈볼라 대원들이 소총과 수류탄 투척기 등을 동원해 반격하면서 총격전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최근 10년 사이에 벌어졌던 ‘최악의 시가전’이었다.

3개 종교 세력(기독교 마론파-이슬람 수니파-이슬람 시아파)의 권력 분점 형태로 정치 체제를 구성한 레바논은 ‘중동의 화약고’로 불릴 만큼 정파 간 갈등이 심각하다. 1932년 ‘대통령은 기독교파, 국무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가 담당한다’는 국민협약이 맺어지면서 이른바 ‘모자이크 국가’가 된 이후, 줄곧 아슬아슬한 동거를 이어 왔다. 이번 총격 사건은 이러한 레바논에서 내전을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수 있는 탓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베이루트 대폭발로 거슬러 올라가는 총격전의 배경

문제의 총격전이 발생한 맥락을 이해하려면, 작년 8월 4일 베이루트항에서 일어난 대폭발 참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질산암모늄 대폭발로 200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한 대참사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정파 간 갈등이 지난달 14일 시위의 발단이었던 탓이다. 고위 판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조사단과 관련, 헤즈볼라와 아말은 올해 2월 임명된 두 번째 조사 책임자인 판사의 교체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헤즈볼라는 조사 책임자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대참사에 대한 조사 자체가 크게 보면 수십 년 동안 레바논의 지배 엘리트한테 주어진 특권, 즉 ‘권력 공유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총격전이 시아파의 자작극인지, 반대 정파(기독교)가 배후에 있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은 ‘정체성이 다른 정파 간 정치 투쟁의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정치는 물론, 경제적 위기도 레바논 내부 폭력 발생 위험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지난 3월 레바논 유력 신문 ‘안나하르’의 보도를 보면 레바논인의 55%는 빈곤선 이하(2020년 기준)이고, 이 가운데 23%는 극빈층에 속한다. 실업률은 거의 40%에 육박하며,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71%에 달한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의료 시스템도 붕괴 직전에 놓였다. 올해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국가의 식량, 석유 보유량이 급감하면서 정부는 식량 보조금을 줄이고 휘발유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대규모 난민 유입도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대규모 시리아 난민이 생겼는데, 올해 초 통계에 따르면 비공식적으로 150만 명(공식 9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다. 150만 명은 레바논 전체 인구의 25%다.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높은 난민 비율이다.

정치권 자체가 혼란의 주범…’약한 국가’ 속 폭력 위험

정치권 자체도 혼란의 주범이다. 지난해 8월 베이루트항 사고 책임으로 하산 디아브 총리가 사임했으나, 헤즈볼라의 강력한 기독교 동맹 세력으로 알려진 미셸 아운 대통령은 13개월 만인 올해 9월에야 나지브 미카티를 총리로 임명했다. 사고 수습과 경제 회복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헤즈볼라 동맹 세력인 기독교계 대통령과 이슬람 수니파계 간 정치적 이해 충돌 때문에 신임 총리 임명이 1년 이상 지연된 것이다.

새 총리가 탄생했지만 여전히 ‘약한 국가’로 불리는 레바논 정부에 혼란 통제 역할 수행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헤즈볼라는 제도권 안에 들어왔으나, 일종의 ‘국가 내 국가’다. 수니파의 입지는 계속 약화되고 있다. 종교·종파 간 화학적 결합, 즉 완전한 국민국가 건설이 힘들다는 의미다. 따라서 수니파계 미카티 정부가 현 레바논 난국을 극복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혼란들이 쌓이고 쌓인 탓에 레바논 내에선 이미 지난달 총격전 이전부터 ‘폭력 발생 위험’이 증폭되고 있었다. 충돌의 진앙지인 타유네 지역 사법궁전은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발발지와 가까운 곳으로, ‘혼란의 망령’을 또다시 불러일으키는 곳이 됐다. 헤즈볼라와 아말은 기독교계 정당인 ‘크리스천 레바논 포스'(CLF)를 배후로 지목하고, “그들이 내전을 도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입장도 취했다. 레바논 정규군 8만5,000명보다도 헤즈볼라 병력이 더 많다는 과시였다. ‘우리가 내전을 원하진 않지만, 내전이 발생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물론 CLF는 이를 부인했으나, 양측의 갈등이 얼마나 심화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내전 확대 가능성은…”비교적 안정적”

이번 총격 사건이 세계적 관심사로 부각된 이유는 △기독교 마론파와 무슬림 간 15년 내전(1975~1990년) △시리아 내전 중 발생한 대규모 시리아 난민의 레바논 이주 △2019년 이후 시아파 벨트 내 불안정성 확산 △사회경제적 혼란과 피폐 등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모든 분쟁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변혁, 위기, 곤경, 빈곤의 시기에는 불안이 증가하고 경계, 즉 정체성이 중요해진다. 이때 적, 희생양을 찾으려는 욕구가 생겨나고, 이는 ‘낯선 자’를 향하게 된다.

적이란 무서운 위협이지만, 혼란과 불신,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그만큼 그리운 대상이 된다. 특히 ‘불안정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에 적은 필수품이고, 결국 집단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정치화한 종교다. 지금 레바논은 바로 이 같은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 레바논에는 각 종파의 종교 지도자, 정치 인사, 자본가, 상인 간에 끈끈한 후견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어 쉽게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돼 있다. 과거 15년 내전도 이러한 환경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총격 사건 이후 아직까지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즈볼라와 정부군 모두 내전으로의 확대 가능성은 경계하는 모습이다. 레바논에서 오랫동안 연구했던 이경수 한국외대 교수는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조사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내전으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올해 총격 사건 이후 각 정파가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것은 바로 과거 15년 내전에 대한 집단기억으로부터 배운 교훈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모자이크 사회는 자그마한 충격에도 깨지기 쉬운 유리에 불과하나, 잘 조화되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된다. 레바논 사회도 위기를 극복하고 후자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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