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람 |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70 개의 정답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영적인 사람 –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maxfit.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maxfit.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베이직교회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68,958회 및 372654 Like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 영적인 사람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타임코드를 클릭하시면 해당 영상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찬양 4:15
말씀 11:22
BASIC COMMUNITY CHURCH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http://www.basicchurch.or.kr​
* 이 채널은 베이직교회 공식 채널입니다.
* 이 영상의 저작권은 ‘베이직교회’에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스크랩] 영적인 사람의 네 가지 특성 – Daum 블로그

영적인 사람은 “수건을 벗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수건을 벗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인 …

+ 더 읽기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1/2021

View: 2529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은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말로 영적이며 경건한 사람들은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늘 당당하다 …

+ 더 읽기

Source: lewisnoh.tistory.com

Date Published: 3/11/2022

View: 2196

< 누가 영적인 사람 >인가? – 블로그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

+ 여기에 보기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5/18/2022

View: 5341

영적인 사람의 특징 – 아진(서울)

영적인 사람의 특징. 아진(서울) 2015. 7. 7. 06:05. 성숙이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더 읽기

Source: minyk0001.tistory.com

Date Published: 5/27/2022

View: 1150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 뉴스앤 스토리 – 갓톡

,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www.godntalk.com

Date Published: 2/20/2021

View: 3869

영적인 사람이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니엘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예. 왜? 다니엘 10 : 11-12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했기 때문에 …

+ 여기에 표시

Source: beroeans.net

Date Published: 10/22/2022

View: 1413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 YES24

세 권으로 된 웟취먼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 생명으로 행하고, 영적 전쟁을 하는 데에 한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본서는 큰 영적 갈등 가운데 쓰여 졌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9/29/2022

View: 276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영적인 사람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영적인 사람

  • Author: 베이직교회
  • Views: 조회수 68,958회
  • Likes: 372654 Like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2. 5.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nCbk8rmjtk

영적인 사람의 네 가지 특성

인간은 신약성경이 기록된 희랍말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희랍말로 인간을 의미하는,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뜨로포스’라는 단어입니다.

그 원래의 뜻은 “위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저는 두 번째 ‘안뜨로포스’라는 단어가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더 합당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진정한 만족과 보람을 느끼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영혼을 채운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에게는 놀라운 특징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특징들이 나타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영적인 사람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한번 보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운명론에 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주팔자에 매이고, 이름에 매이고, 풍수지리에 매이고,

=조상신에 매이고, 택일 날짜에 매이고, 각종 운수에 매여 삽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 마포에 있는 동네에는 그 당시 수도가 제대로 없을 때

마을에 있는 우물물을 먹고 살았는데

그 우물을 개바우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봄이 되면 거기에다가 새끼줄을 치고 무당이 굿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물 속에 동전을 던지고 빌곤 했습니다.

1년에 두 번씩 우물 청소를 하는데

그것은 나와 바로 위 형의 몫입니다.

우리는 수고비도 받고 또 우물의 있는 동전을 다 우리들의 것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마을 옆으로 군사도로가 나는데

거기에 서낭당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없애야 하는데 아무도 선뜻 나서지를 않습니다.

내가 다른 군종병들과 함께 가서 아예 뿌리채 다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내 사무실로 왔습니다.

“아무 이상 없냐고” 나는 말짱한데. 사람들이 엉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을 잡아서 이사를 가고 못질을 합니다.

그 날이 무엇이냐면 귀신이 출장을 간 날입니다.

못질을 하다가 귀신 눈알에 못질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귀신이 출장을 간 날 못을 박습니다.

상주에 있을 때 10미터 되는 나무가 태풍에 넘어졌습니다.

속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매이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귀신도, 어떤 재수도, 어떤 팔자도, 어떤 점도 우리를 맬 수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가슴을 펴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어 습관부터 고쳐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재수 없어서!”라는 말, “팔자가 나빠서!”라는 말,

=”조상신이 노해서!”라는 말, “묘 자리가 나빠서”라는 말,

“집안에 저주가 흐르고 있어서!”라는 말 등은 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믿는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의 자유는

=운명론으로부터의 자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안의 자유는 죄의식, 실패의식으로부터의 자유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죄를 통해 반성의 계기는 삼되 죄의식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패하면 실패에 매여서 전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주님 안의 자유는 그런 실패의식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실패에 대한 기억력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잘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의 가능성을 잘 살리지 못합니다.

코끼리가 서커스단에서 가는 밧줄에 매여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 자란 코끼리의 힘이면 충분히 밧줄을 끊고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쇠줄로 묶여서 그 줄을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코끼리의 엄청난 힘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잘못된 기억력, 잘못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더욱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 질서의식, 그리고 책임의식이 더욱 투철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 정말 자유인이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영적인 사람의 특징으로는 “시야가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영적인 사람은 “수건을 벗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수건을 벗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눈앞의 것만을 봅니다.

안목이 짧습니다. 자기만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멀리 봅니다.

안목이 깁니다. 남을 잘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육적인 사람은 베드로가 어부로만 보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사람은 베드로가 앞으로 예루살렘을 뒤흔드는 재목임을 압니다.

그리고 육적인 사람은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추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긍정적이고, 창조적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서 결점을 들추기보다는

=그 자신이 새로운 상태를 창조하기 위해 그 일에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육적인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자신에 대한 굳건한 가치를 볼 줄 압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이상이 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은 거룩한 소명의식을 가지라는 것이지 교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적인 방법에 예민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진리와 새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위대한 환상을 가집니다.

우리가 봐야 할 환상은, 그리고 기독교적인 환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 꿈과 비전이라는 환상입니다.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무엇을 봤다, 누구를 봤다”고 하는 환상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환상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런 환상은 미신적인 환상에 가깝고 별로 의미도 없고,

우리가 힘써 추구해야 할 환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얻게 되는 환상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작하겠다는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환상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언제나 환상이 있는 사람 편에 서 왔습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바로 그러한 환상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환상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영적인 사람에게는 주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본문 18절을 다시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즉 주의 성령을 받은 자에게는 주의 영광이 나타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보이면 주님처럼 살려고 하는 열망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에게는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왜 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습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말로 전도하지 않고 행동으로 전도합니다.

화려한 말은 줄어들고 섬기고 봉사하는 행동은 많아지게 됩니다.

말만 가지고는 사람을 이끌 수 없습니다.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믿는 사람을 심하게 배척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들이 배척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에 질문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상 그것은 진리를 알고 싶다는 것이지

성경을 배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척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태도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 전체를 나쁘게 보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명백히 나쁜 태도도 싫어하지만

=죄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얌체 같은 태도도 싫어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가장 실망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나친 공짜 의식입니다.

구원도 공짜도 얻었으니까

다른 것도 공짜로 얻으려는 심리가 너무 강합니다.

구원은 물론 공짜입니다.

그러나 그 공짜가 있기까지 주님의 큰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짜 심리를 가지기보다는

=주님의 희생을 배워서 대가를 치루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인데,

=구원도 공짜로 얻었다고 다른 것도 공짜로 얻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성도들이 너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우리 나라 성도들이

미국 성도들보다는 더 헌신적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대가를 치루는 것이 정확한 사회이지만

=교회생활에 있어서만큼은 한국 성도들이 훨씬 더 대가를 치룰 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에서는 그렇게 대가를 잘 치루는 사람들이

=사회에서는 너무 인색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큰 죄는 아니지만 얌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배려하고 자상하게, 공정하게 이해해 주려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 왜?”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얌체 짓을 최대한 버리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흔적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해야 합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사도바울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향기를 날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생활에서도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향기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영적인 사람은 결국 그의 모습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18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영적인 사람은 그의 삶에 조금씩 주의 흔적이 나타나다가

=결국 주님의 형상이 그에게 나타난다고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중에 최고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는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사실상 예수님을 닮는 것처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최상의 삶의 목표를 그리스도는 닮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을 때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됩니다.

겸손은 세상 사람에게는 그렇게 크게 요구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자격증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비판의 소리가 적고,

다른 사람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가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사랑과 용서가 없는 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가 없으면 아무리 영적인 어떤 모습을 보여도

그 사람은 결코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딸과 아들을 둔 어떤 어머니가 자녀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습니다. 먼저 딸집에 들렀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딸이 일어나기도 전에 사위가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만들어 먹고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출근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그토록 귀여워해 주는 사위가 한없이 고맙고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며느리는 일어나지도 않고

아들 혼자서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너무 불쌍해 보이는 동시에

며느리의 행동이 얼마나 괘씸한지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 딸의 행동이나 며느리의 행동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는데

어째서 하나는 그토록 밉게만 보였을까요?

‘사랑’ 이것은 허다한 실수와 허물을 덮어 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어지면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보입니다.

선한 것도 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실수와 허물을 덮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직 우린 사랑함이 적은 까닭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운 사람이 많이 있는 이유는

나에게 사랑함이 부족한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하는 일이 못마땅해 견딜 수 없을 때는

내가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괜히 싫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문제라기 보다는 사실 나에게 그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대한다면

어두웠던 자리가 아름다움의 자리로

서서히 변하여 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여러분! 성 프랜시스를 기억하지요?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주님처럼 살았던 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가장 미움과 증오가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가정에 상처가 생겨나고 고아와 과부가 양산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교인들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가 탄생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게 하소서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주게 하소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게 하소서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주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결국 영적인 사람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고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영.분별자 원글보기 : 영.분별자

메모 :

영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

노승수 목사

영적인 사람은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말로 영적이며 경건한 사람들은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늘 당당하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자만에 빠지고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함으로 충만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므로 겸손해 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자신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들을 것들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영적이며 경건한 사람들의 중요한 특질 중의 하나는 청빈이다.

청빈과 반대되는 특성은 겉치레와 과시이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드러내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며 이것은 매우 천박한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미성숙의 한 표현이다. 과시는 자신의 내면적 불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오는 존재적 불안이다. 누군가에게 자신 그 자체로서는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인정되고 사랑스럽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역설적이지만 스스로 전혀 무가치하게 느끼는 사람은 힘이나 지위, 부, 명예, 혹은 자녀 등등 그 외에도 어느 모로 보나 영적인 미덕이라고 보여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과시와 겉치레를 통해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과도한 금식이나 금욕 , 자신의 육체를 괴롭게 하는 등의 영적으로 보이는 특성들도 과시욕의 한 형태일 수 있다 .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청빈하다 . 그는 물질과 돈, 명예 등으로부터도 청빈하지만 그의 청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마음의 청빈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 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일평생 한번도 비운 적이 없는 휴지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늘 그 마음이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쓸데없는 생각들과 상념들이 나 자신의 통제 범위 밖에서 나도 모르게 피어오른다. 우리 모두는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흠칫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해들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청빈하다면 우리는 갖은 상념들의 방해 없이 말씀 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우리의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견고한 진으로서의 우리의 생각들을 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의 청빈은 커녕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들이 나의 생각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 그것이 너무나 견고하여져서 주의 말씀이 결실할 수 없는 돌짝밭일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起耕)해야 한다. 마음의 소유들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기경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청빈의 마음을 갖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가장 표면적인 것은 우리의 시기심이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시기와 다툼이 없이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시기와 다툼은 내가 받아야 할 사랑을 나 아닌 누군가가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 내지 심리적 박탈감에서 출발한다 . 이것은 매우 부정적 에너지이며 우리의 내면의 쓴뿌리이다. 그러면 왜 그토록 그러한 사랑 혹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두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내면적 공허감 때문인 듯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과 사랑이 아직 자신의 것으로 체득되고 경험되지 못함에서 오는 살기 위한 몸부림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생명은 쓸데없는 쓰레기들을 잔득 모으는데서 오지 않고, 모든 것은 내어주는 청빈의 삶에서 온다는 것은 역설인 듯 싶다. 예수께서는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되고 자신의 목숨 을 내어주는 사람들을 살게 될 것이 다고 하신 말씀이 오늘 가슴 깊이 다가온다.

2009.01.28 10:42

< 누가 영적인 사람 >인가?

< 누가 영적인 사람 >인가? 진리의말씀 https://blog.naver.com/chjung40/200837044 ​  누가 < 영적인 사람 > 인가? 1. 들어가는 말 먼저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 튜브는 혼, 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과(고전 3:1-3)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고전 3:1)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바깥에 있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이 짤막한 구절 속에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그리고 온전하신 뜻(“perfect will”)이 그것이다.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두 번째 뜻에 대해서는 아주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자, 그렇다면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사람”인가? 우리는 분별 할 수 있으며 성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쇄

영적인 사람의 특징

성숙이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평생동안 영적인 발전과 성숙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성숙된 사람이라고 해서 이마에 어떤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어린아이로서 양육을 받아야 하며

또한 누가 성숙된 사람으로서 주님의 분부를 감당할 수 있는 지,

분별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됩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성숙된 사람에게는 몇 가지의 일반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몹시 민감합니다.

기질적으로 그렇게 민감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어린아이들은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이나 느낌에는 몹시 둔감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상처를 잘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대체로 서투릅니다.

그들은 보통 눈치가 없으며 자기의 유익에만 민감하고 남을 섬길 줄 모릅니다.

남의 가슴을 다 뒤집어 놓고 ‘나는 뒤가 없어요.’ ‘저는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서..’

‘저는 남 듣기 좋은 말을 못해요’ 하는 식의 말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이런 어린아이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 쪽에는 소질이 없어요’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나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며 신앙과도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과 환란을 통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하여

영혼이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느낍니다.

그는 특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상대방의 상태를 간파해 냅니다.

그는 사람들을 섬기고 돕기 원하지만 어느 때 말을 해야 하는 지, 아니면

묵묵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경험자는 열변을 토하고 전문가는 웃는다’하는 말도 있지만

그는 쉽사리 남을 설득하려고 자기의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다.

그는 조용히 묵묵히 기다리지만 사람의 영을 분별하고 느끼며

그의 영혼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왕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 성장한 사람이 별로 지혜도 없이 단순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며

몹시 어린 사람의 열변과 예리함과 지혜가 몹시 멋지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열매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넘치고 예리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말과 분석과 지혜는

왕왕 분쟁과 상처를 낳을 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면도 있으나

대부분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성장해 갈수록 자신의 꿈과 야망에 대해서 자유로와 집니다.

어떤 아집이나 욕망에 별로 사로잡혀 있지를 않습니다.

‘주님, 이것이 아니면 나를 죽여주십시오.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이런 식의 기도가 없어집니다.

그러한 자세는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어거지이며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에 매우 유동적이며 자유롭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꿈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과거에 꿈이 있었고 현재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이들은 이제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았고 거기에 대해서 자유로운 상태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분량에 대해서 압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명령하면

바로 달려가지만 주님께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는 계속 나아가지 않습니다.

타고난 본능은 여태까지 달려온 그대로 계속 달려가기를 원하지만

그는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는 점차로 희생과 포기가 쉬워집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이 난무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그곳까지 이르기까지 많은 눈물과 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점차로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옆에 있을 때, 그들은 웬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잘 못해도, 실수해도, 이 사람이 그들을 그대로 받아 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어떤 투정을 해도 그냥 웃으며 받아줄 것 같은 관용의 정신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숙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아버지된 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체험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알아갈수록 자녀를 불쌍히,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린 사람일수록 남의 결점을 잘 봅니다. 그리고 억울한 것을 잊지 못합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자기 속에 똑 같은 죄가 있으면서도

그들은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나 영이 자라갈수록 사람들은 악에 대하여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하여 슬퍼하고 아파하며 자신이 그 악의 대가를 지불하기 원하면서도

그 악인은 불쌍하게 여기고 관대하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는 점차로 주님을 사모하며 그분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제 그의 소원은 그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그의 기쁨은 곧 주님의 기쁨이며 그의 소원은 곧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는 자기의 기쁨보다 주님의 기쁨을 원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고 사모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한 소원과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점차로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어린 아기에게는 그저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실 뿐이지만

영혼이 어느 정도 자라고 맘이 통하게 되면 주님은 자신의 심장을 보여 주십니다.

그는 차츰 주님의 슬픔, 주님의 고독, 주님의 아픔, 주님의 안타까움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는 점차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주님께서도 기뻐하는 것이 아니며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하고 한숨짓는 일이 사실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의 소원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므로,

그는 이제 주님의 가장 큰 소원이 영혼을 얻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향하여 나아가고,

그들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들을 위하여 주님을 대신해서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하이드’ 로 유명한 선교사 하이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면서 심장을 찢는 듯한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주님께 ‘주님, 이 영혼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라고 흐느끼듯이 기도하면서 마음과 온 영혼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를 들었던 사람은 누구나 전율과 눈물과 감격에 사로잡힐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하고 애절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가 주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영혼을 사랑하는 영을 부어주셨기에

그는 그렇게 자신의 진액을 토해놓는 기도를 할 수가 있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숙된 영혼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러한 영혼들은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성숙된 영혼은 아름다운 특징이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보화에 수많은 광채와 빛이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아름답고 따뜻한 영혼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계속 계속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영혼의 여정을 계속 항해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아가씨들은 자신들의 미모를 가꾸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젊은 부인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몸매를 관리하기 위하여 무척 애를 씁니다.

그들은 나이가 50, 60이 되면 아무런 재미도, 즐거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이 성장됨으로 얻어지는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기껏해야 곧 썩을 육체의 아름다움은 아주 잠시뿐이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은 진정 찬란하고 황홀한 것이며 그 영광은 영원토록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위하여, 진정한 성숙을 위하여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얻게 됩니다.

아름다워집니다. 따뜻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하여 영혼을 얻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들을 사랑하고 치유하고 돕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또 사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성숙될수록 주님의 마음을 가집니다. 주님의 심장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우리는 영혼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우며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중에서>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첫째,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오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즉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줄 안다.

다섯째,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저는『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일곱가지 습관을 가질 수 없다』면서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적인 사람이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로 안 피켓-JW.org Reviewer

영적인 사람이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s2 / 18 p. 18-16 월 22 일 -XNUMX 월 XNUMX 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정신 태도를 가지도록 허락 할 수 있습니다.”Romans 15 : 5

요약하면, 이것은 eisegesis를 사용하여 성경에 대한 또 다른 면밀한 검토입니다.

극단적 인 예로서, 우리가 예수가 겸손하지 않고 대신 교만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잠시 가정 해 봅시다 (물론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마태 복음 4 : 8-10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여기에서 사탄은 특별한 선물을받는 대가로 작은 호의를 원했습니다. 예수의 아버지 께서 언젠가는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기쁘게하는 대신에 자랑스럽게 거절하고 그에게“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우리는 이것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상반되며 나머지 문맥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모든 내용은 예를 위해 제 말의 명쾌한 추가 인“proud”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정확합니다.

이제 다음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노아를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까? 예. 왜? 창세기 6 : 8-9,22는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호의를 찾았고의 로웠으며 하나님 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2 Peter 2 : 5는 종종 노아가 설교자임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증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하느님의 말씀 번역 “노아는 하나님의 승인을받은 삶의 종류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한 그의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이 이해는 창세기의 기록과 잘 들어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예. 왜? 야고보서 2 : 14-26은 믿음과 행함을 논하면서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과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설교 했습니까? 그가 그렇게 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 장 2 절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충실한 사람들이 천사들을 즐겁게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즉, 결과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더라도 (예 : 롯) 후대했다.

다니엘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예. 왜? 다니엘 10 : 11-12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했기 때문에 여호와 께 매우 바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에스겔 14 장 14 절은 노아, 다니엘, 욥을 의로운 사람들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그는 호별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했습니까? 대답은 ‘아니오!

우리가 언급 할 수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분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을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충실한 모범에 비추어 다음 말씀을 어떻게 이해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때 동정심 많은 관심을 보일 준비가 된 예수를 좋아합니까? 또한 예수께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Luke 4 : 43) 그러한 모든 감정과 행동은 영적인 사람의 표입니다.”(문단 12)

eisegetical 결론을 눈치 챘습니까? 나는 그것이 마지막 문장이라는 데 동의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영적인 사람인지 여부를 정의하는 것이 설교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주석 연구 (성서 자체 해석)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진술은 모두 사실이지만 결론은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이를 이유로, 우리가 고려한 (같은 결론으로 ​​더 많은 것을 고려할 수 있었던) 옛날에 충실한 세 사람은 모두 우리 모두가 영적인 사람으로 간주 할 사람이지만,이 기사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예수를 논의 할 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간주되기 전에. 그것은 여호와 께서 어떻게 보 셨는지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말이되지 않습니다.

노아 (현대인들에게 완벽한)

아브라함 (독특하게 하나님의 친구라고 함)

욥 (땅에서 그와 같이 흠없이 똑바로있는 사람은 없음),

그리고 Daniel (매우 바람직한 사람).

예를 들어, 대사는 자국의 지시를 따릅니다. 그렇게하면 충성스러운 것으로 간주 될 것입니다. 이제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따라 행동했다면 잠재적으로 거부되고 자신의 직책에서 불충실 한 것으로 제거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국가의 의지 인 정부의 의지를 따르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찬가지로“그리스도를 대리하는 대사로서”(2 고린도 5 : 20)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분과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면 영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매튜 7 : 21, John 6 : 40, Matthew 12 : 50, John 12 : 49, 50)

1 세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우리는 비디오에서 Matthew 24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신중한 주석 연구를 통해 우리는 전파 활동의 표징이 1 세기에 성취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미래에 그것을 전파 할 근거가 없습니다. (24 : 14) 또한 전파 활동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듣는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면서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도망 치라는 조언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이 70 CE의 유대인들을 모두 소멸 시켰을 때 펠라에게. 오늘날 우리가 전파하라는 동일한 사명을 받고 있는지의 여부는 다른 날에 대한 토론입니다.

이 기사는 다음 3 질문에 답하려고합니다.”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영성 발전에 어떤 예가 도움이됩니까?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기위한 노력은 어떻게 영적인 사람이되는 데 도움이됩니까?

기사가 첫 번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3 항에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 : 2-14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문맥 특히 고린도 전서 16 : 1-2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앞의 구절들은 그들이 영적인 문제와 영적인 말을 결합하여 영적인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마음 상태가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을 두지 않으 십니다. 누가 복음 11:13은“하늘에 계신 아버지 께서 청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 십니다!”라고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 장 13-3 절은“육으로 난 것은 육 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 이니”,“누구든지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왕국으로.”

“반면에“영적인 사람”은“모든 것을 검토”하고“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문단 3).

이것이 문제의 진정한 요점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해“모든 것을 검토”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께서 가르치신 다른 좋은 소식을 가르치고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버렸음을 의미 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증인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조사해 왔습니까? 아니면 대다수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했던 것처럼 행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조사하여 신뢰한다고 주장 할 수 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적 또는 종교적 이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영적으로 생각합니다.”(문단 7)

그렇다면 왜 조직에 대한 헌신을 줄이거 나 ‘영적으로 약하다’고 떠난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일부 사람들은 걸려 넘어져서 믿음을 잃었거나 권위를 남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현재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강해서 조직이 지금 권장하는 (그리고 성경이 항상 권장하는)을 스스로 수행했기 때문에 떠나고 있습니다. 성경만을 사용하여 스스로 많은 것을 검토했습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들은 우리가 한때 진리라고 믿었던 것과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 사이에 심각한 단절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성경과 조직이 가르치는 것과 조직의 실제 관행 사이에는 단절이 있습니다.

10 단락은 야곱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는 분명히 여호와와 그분의 조상들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에 믿음을 두 었으며 하느님의 뜻과 목적에 맞게 행동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이 조직의 인위적인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위의 성경적 근거의 결론을 확인시켜줍니다.

마찬가지로 다음 단락에서 Mary에 대해 설명 할 때 “B그들 중 [메리와 요셉]은 더 많았습니다 여호와의 뜻에 관심이있는 그들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마찬가지로 12 단락에서 예수에 관해 이야기 할 때“그는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버지 여호와를 본 받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했으며 에 살았다 하나님의 뜻과 표준과의 조화. (John 8 : 29, John 14 : 9, John 15 : 10)”

야곱, 마리아, 예수에 대한 각 단락 (예,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한 단락 만-야곱과 마리아와 동등 함)에 대해 논의한 후 우리는 두 개인이 어떻게“더 영적으로되었는지”에 대한 검증 할 수없는“경험”의 두 단락으로 취급됩니다. ”. 그녀를 변경하여 하나 “가장 겸손한 복장” 다른 하나는 포기해서추가 교육과 좋은 고용에 대한 희망”.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은 확실히 경전 적 원칙이지만, 그러한 사소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영성을 상식시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단정하게 옷을 입지 만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거절하는지 “더 나은 교육과 좋은 고용” 영적으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것이 퍼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 요구 사항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3 단락 (15-18)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따라서 18 문단 중 4 만 예수의 모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이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사고 방식과 그분의 성격의 모든 범위를 알아야합니다. 그런 다음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합니다. 예수의 생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처럼되는 것은 우리를 여호와처럼 더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해졌습니다.”(문단 15)

우리는 적절한 때에 올바른 영적 음식을 제공받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듣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할 수있는 최선입니까? 이 규정은 물질이나 물 또는 탈지유와 같은 물질이 전혀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인용문에서 예수를 아빠로, 여호와를 할아버지로 바꾸면 어떨까요? 그러면 5 살짜리 소년도 거의 같은 내용을 쓸 수 있습니다. ‘아빠처럼 되려면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을 말해 주어야합니다. 그런 다음 그를 복사 할 수 있습니다. 아빠는 아빠를 복사 해 아빠를 복사하면 할아버지와 같습니다. 아빠는 내가 그를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

신의 유일한 의사 소통 채널이라고 주장하는기구에 대한 찬사를받는 것은 드물다.

다음 단락은 더 간단한 진술로 이어집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성서 책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노출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그분의 발걸음을 밀접히 따르고”“같은 정신적 성품으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 베드로 첫째 1:2; 21 : 4.”

히틀러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지 만, ‘Mein Kampf’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히틀러의 마음에 노출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발걸음을 밀접하게 따르고 히틀러와 같은 정신적 성향으로 자신을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

이러한 단순한 진술의 의미는 복음을 읽은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집안일을 한 후, 모든 조직 요구 사항, 사역, 회의, 홀 청소 및 유지 보수, 집회 준비, 과제, 출판물, 그리고 묵상하기 전) 고갈과 함께 잠 들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까, 아니면 반대입니까?

우리의 가상 5 세조차도 그것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다면 세척, 자동차 청소, 쇼핑 카트 밀기 등 자신이하는 일을 시도하고 복사 해 보라고 제안하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아빠, 나 한테 너무 어려워.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원할 때에도 성격 특성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을 빼고 싶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과 음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결석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18 단락은“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했습니다.” 이 기사는 실제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 했습니까? 조직의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영적인 사람들의 훌륭한 모범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이 기사에서 영성을 정의하고있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들의 모범을 따라 가면 정말 영성을 이루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단순히 영성의 환상을주는 행동 규범을 따르고 있습니까? 성경은“경건한 정성을 가진”사람들에 대해 말하고,“이것들로부터 돌이켜”라고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디모데 둘째 2 : 3) 다시 말해, 우리는 위조 된 영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본 받아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그리스도의 생각”을 갖는 것이 어떻게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되는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시연하거나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물질에 비해 부피가 큰 물품으로, 기분이 좋은 요소로도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웟취먼 니(본명은 니토쉥)는 1903년 11월 중국 스와토우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되던 무렵 도라유 씨의 전도로 개심한 모친의 변화된 행동의 영향과, 도라 유 씨의 집회에 직접 참석한 결과로 개심한 후 일편단심 주께 헌신하였는 바, 이 시기는 저자보다 10년 연상의 모택동이 북경대학 도서관 사서보로 제직하며 맑스주의 사상에 골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신앙노선은 맑스주의사상의 조류에 거슬러 설정되었던 것이다…

웟취먼 니(본명은 니토쉥)는 1903년 11월 중국 스와토우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되던 무렵 도라유 씨의 전도로 개심한 모친의 변화된 행동의 영향과, 도라 유 씨의 집회에 직접 참석한 결과로 개심한 후 일편단심 주께 헌신하였는 바, 이 시기는 저자보다 10년 연상의 모택동이 북경대학 도서관 사서보로 제직하며 맑스주의 사상에 골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신앙노선은 맑스주의사상의 조류에 거슬러 설정되었던 것이다. 1956년 4월 체포되었고, 수많은 허위 죄목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집단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72년 5월 옥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 성공회 마거릿 바아버 선교사의 개인적 영향과, 웨스트캇, 루터, 죤 녹스, 죠너던 에드워즈, 죠지 윗필드, 안드류 머레이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영적인 사람

다음은 Bing에서 영적인 사람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 기독교
  • 교회
  • 예수
  • 성경
  • 설교
  • 강연
  • 조정민
  • 베이직
  • 베이직교회
  • 논현동교회
  • 조정민목사
  • 조정민설교
  • 조정민목사설교
  • 아침예배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YouTube에서 영적인 사람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LIVE] 영적인 사람의 특징 (고린도전서 2:10-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20505 | 영적인 사람,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