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미래에셋 |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상위 256개 베스트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박현주 미래에셋 –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ppa.maxfit.vn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ppa.maxfit.vn/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한국직업방송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6,774회 및 좋아요 68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박현주 – 나무위키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소수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21/2022

View: 3258

박현주 (금융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제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하고 1999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8/2022

View: 1479

‘한국의 워런 버핏’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 겸 회장 – 동아일보

‘한국의 워런 버핏’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 겸 회장 …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 대학생 박현주는 서울 명동 거리를 자주 드나들었다.

+ 여기를 클릭

Source: www.donga.com

Date Published: 3/4/2021

View: 9169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믿어 주는 고객과 함께 가자, 미래에셋 …

박현주 미래에셋대우 홍콩법인 글로벌 회장 겸 글로벌경영전략고문(GISO). 박 회장은 이날 미래에셋그룹 창립 25주년 기념일을 맞아 임직원들에게 보낸 …

+ 여기를 클릭

Source: biz.chosun.com

Date Published: 5/19/2021

View: 2801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12년 연속 배당금 전액 기부 – 뉴데일리경제

미래에셋은 박현주 회장이 2021년도 미래에셋자산운용 배당금을 전액 기부한다고 31일 밝혔다. 박현주 회장은 지난 2010년부터 미래에셋에서 받은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biz.newdaily.co.kr

Date Published: 2/4/2022

View: 2036

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32)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도전을 …

미래에셋그룹 창업자 박현주 회장은 대학시절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1980’을 열번이상 통독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래라는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insidevina.com

Date Published: 11/18/2021

View: 665

[Who Is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미래창업투자와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잇따라 설립한 뒤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미래에셋 박현주 1호’를 출시했다.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 …

+ 여기에 표시

Source: m.businesspost.co.kr

Date Published: 8/1/2021

View: 151

[K매니지먼트 ⑨ 미래에셋 금융그룹] 박현주 회장 글로벌 야망 …

[K매니지먼트 ⑨ 미래에셋 금융그룹] 박현주 회장 글로벌 야망… 도전과 성공 스토리 과감한 해외진출·M&A로, 亞 3대 IB 반열에 – 매일경제,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mk.co.kr

Date Published: 6/11/2021

View: 9789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박현주 미래에셋

  • Author: 한국직업방송
  • Views: 조회수 6,774회
  • Likes: 좋아요 68개
  • Date Published: 2016. 4.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8Cycn_97Ig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현주(朴炫柱, 1958년 10월 17일 ~ )는 미래에셋금융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제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하고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해 미래에셋을 투자전문 금융그룹인 미래에셋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대한민국 최초로 주식형 및 채권형 뮤츄얼펀드를 설립하고, 부동산펀드와 PEF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설정하였다.

2018년 5월 미래에셋증권 회장직에서 물러나, 미래에셋증권홍콩 회장과 미래에셋증권 글로벌투자전략최고책임자(GISO)로 부임하였다.

박현주 회장이 이끄는 미래에셋의 혁신 사례는 2017.09 세계적 학술기관인 더케이스센터(thecasecentre)에 등재된 바 있다.

생애 [ 편집 ]

1958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현주가 고등학교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방황하던 그는 신뢰, 성실, 정직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바로 설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이후, 증권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부터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당시의 대한민국 증권 1번지인 명동에서 주식투자를 잘하는 청년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이때의 투자경험은 이후 박현주의 투자 철학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박현주는 우량주에 장기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다는 믿음 갖게 되었고, 가치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리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시절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리더십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경영학 이외의 책도 많이 읽었는데, ‘제3의 물결’이 가장 마음에 들어 무려 19번을 읽었다고 한다.

경력 [ 편집 ]

증권회사 근무 [ 편집 ]

스물일곱의 나이에 투자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86년에 동양증권에 입사하였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에서 금융상품 운용을 담당했고, 이후 32세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대한민국 증권사 지점 중 1위의 영업실적을 달성하였고, 곧이어 임원으로 승진하며 샐러리맨으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때의 조직관리 경험은 그에게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지지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했고, 이는 훗날 미래에셋 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지점훈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였다.

미래에셋 창업 [ 편집 ]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소수의 시각에서 투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인사이트와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를 이끌었다.

1998년 12월 대한민국 1호 자산운용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하고, 국내 최초의 뮤츄얼펀드인 ‘박현주1호’를 출시하며 대한민국 간접 투자시장의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박현주는 최초의 적립식펀드를 출시하고 이의 활성화를 통해 펀드 투자의 대중화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박현주 미래에셋회장, 증권업계 1위로 도약]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고 2000년에는 기업이익의 사회환원과 나눔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재 75억원을 출연하여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사재 출연 설립한 ‘박현주재단’ 정식출범)

사업가로서의 박현주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는데, 이는 “소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걷겠다’는 그의 평소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는 창업과 동시에 오랜 고민을 바탕으로 미래에셋의 경영이념과 핵심가치를 직접 작성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보낸 편지]

경영이념 – 열린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중시하자

핵심가치 – 미래에셋은 고객을 위해 존재합니다. 투자전문그룹으로서 독립성과 경쟁우위를 가집니다. 개인을 존중하며 팀플레이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실천합니다.

미래에셋은 2017년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다. [미래에셋 창립 20주년 기념사]

최초의 기록 [ 편집 ]

1997.08 대한민국 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 설립

1998.12 대한민국 최초 뮤츄얼펀드 박현주1호 출시

2001.02 대한민국 최초 개방형 뮤츄얼펀드 출시

2001.02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랩어카운트 상품 판매

2003.12 대한민국 최초 해외 운용 법인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4.03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적립식펀드 출시

2004.06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부동산펀드 출시

2004.12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사모투자펀드(PEF) 출시

2006.05 대한민국 최초 중국 본토 빌딩 투자_미래에셋상해타워

2008.07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한민국 최초 중국 증권감독위원회로부터 적격외국인투자자(QFII)인증

2010.04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SICAV 펀드 국내 출시

2011.01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홍콩증권거래소에 ETF 직접 상장

2012.07 대한민국 최초 중국 합작운용사 (미래에셋화신자산운용) 출범

2013.06 호라이즌 ETFs 국내 계열 운용사 첫 미국시장 ETF 상장

2014.03 호라이즌 ETFs 아시아 자산운용사 최초 미국시장 KOSPI200ETF 상장

2014.09 TIGER ETF, 세계 최초 중국 본토 레버리지 ETF 상장

2014.10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첫 RQFII 활용 ETF 상장

2016.12 미래에셋생명, 국내 최초 모바일 금융오픈마켓 iAll(아이올) 오픈

2018.01 미래에셋증권, 국내 증권사 최초 인도시장 진출

2018.11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중국 사모펀드 자격 획득

2019.11 미래에셋증권, 국내 증권사 최초 미국 나스닥 상장 주관사 참여 (바이오엔텍)

M&A 관련 [ 편집 ]

박현주는 그의 확고한 투자철학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다수의 M&A를 성공시키며 미래에셋을 국내 굴지의 금융투자전문그룹으로 성장 시켰다.

[주요 M&A 이력]

2004.02 SK그룹 계열 SK투자신탁 인수 2005.06 SK그룹 계열 SK생명보험 인수 2011.11 캐나다 선두 ETF 운용사 호라이즌 ETFs 인수 [미래에셋, 캐나다 운용사 ‘호라이즌ETFs’인수완료] 2011.11 호주 선두 ETF 운용사 BetaShares 인수 2016.12 대우증권 인수 후 미래에셋증권 합병 2016.12 산업은행 계열 KDB자산운용사 인수 2017.07 베트남 프레보아 생명 인수 [https://www.yna.co.kr/view/AKR20170704133700002?input=1195m] 2017.12 PCA 생명(한국) 인수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6111083521?nv=o] 2018.07 미국 ETF 운용사 글로벌X 인수 [미래에셋, 세계최대 美 ETF시장 승부수, 글로벌X 전격인수]

글로벌 진출 [ 편집 ]

박현주는 미래에셋 창업초기부터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시장조사를 진행했고 현재 대한민국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해외진출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2003.12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6.09 미래에셋자산운용 베트남 하노이사무소 설립 2006.11 미래에셋자산운용(인도) 설립 2007.01 미래에셋증권(홍콩) 설립 2007.03 미래에셋자산운용(영국) 설립 2007.07 미래에셋증권(북경) 설립 2007.12 미래에셋증권(베트남) 설립 2008.02 미래에셋익재투자자문(중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미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브라질) 설립 2008.08 미래에셋증권(미국) 설립 2008.08 미래에셋명승투자자문(중국) 설립 2010.08 미래에셋증권(브라질) 설립 2012.10 호라이즌ETFs (LatAM) 설립 2016.01 미래에셋자산운용(호주) 설립 2017.10 미래에셋증권(인도) 설립 2019.09 미래에셋글로벌X(일본) 합작회사 설립[1][2]

글로벌 주요 투자 현황 [ 편집 ]

2009.08 호주 담수화시설물 투자 2011.08 세계1위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 인수 2011.10 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링크 사업 투자 2013.09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 “포시즌스 호텔 시드니” 인수 2014.12 미국 워싱턴Dc 오피스빌딩 1801k 인수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입주) 2015.05 하와이 리조트 호텔 ‘페어몬트 오키드’인수 2015.12 미국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호텔 ‘페어몬트 샌프란시스코’ 인수 2016.07 미국 아마존 본사 Phase VIII 빌딩 인수 2016.08 서부간선지하도로 사업투자 2016.09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 비치 리조트 & 스파 인수

사회공헌 [ 편집 ]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고 말하는 그는, 해마다 자신의 배당금 전액을 기부하며 사회 공헌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00년도에 그가 사재를 출연하여 설립한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청소년 27만 여명에게 인재육성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 왔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9년째 배당금 전액 기부”_[http://www.fnnews.com/news/201904011019110440]

미래에셋박현주재단 [ 편집 ]

그는 해마다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미래에셋박현주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미래에셋 박현주재단 홈페이지)

박현주는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공헌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98년 미래에셋육영재단을 세우고 2000년에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박현주는 평소에도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라며 “미래의 인재에게 투자하는 것이 미래에셋이 고객과 사회로부터 얻은 것을 환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바 있다.

미래에셋박현주 재단은 설립 이후 18년 동안 269,476명의 젊은이들에게 장학금과 해외체험 및 경제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왔으며 2019년 2월말 기준,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

– 미래에셋 국내장학생 연간 대학학비 전액지원 : 3,391명 – 미래에셋 해외교환장학생 학업장려비 지원 : 5,117명 – 미래에셋 글로벌투자전문가 학사/석사과정 학비지원 / 인턴십프로그램참여 : 122명 – 미래에셋 우리아이글로벌리더 대장정 어린이펀드가입자중 상해캠프지원 : 12,700명 – 미래에셋 글로벌문화체험단 해외체험의 기회가 적은 아동, 청소년에게 상해캠프지원 : 1,839명 – 미래에셋 경제/진로교육 우리아이 경제교실, 스쿨투어, 금융캠퍼스, 청소년 금융진로교육 등 : 246,307명 (2019년 2월말 기준)

배당금 전액기부 [ 편집 ]

2000년 그가 75억 원의 사재를 털어 설립한 비영리 사회복지재단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의 장학프로그램은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박현주 회장은 해마다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기부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_사설_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기부]

2015년에는 청년 일자리 해결을 위한 ‘청년희망펀드’ 조성 사업에 사재 20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회장_기부_매일경제]

박현주 회장은 `바르게 벌어야 바르게 쓴다`는 원칙의 소유자다.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는 최고의 기부자가 되는 게 꿈이다. 돈에 대한 철학도 확고하다. 2007년 펴낸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박 회장은 “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꽃이 진 뒤 씨앗을 만들고 다시 수많은 꽃을 피우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라며 “돈도 꽃처럼 돌고 돌아 씨를 만들고 열매를 맺어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꽃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Mirae Asset Foundation (인도) [ 편집 ]

2018년 1월 3일에 인도 뭄바이 지역에 설립된 미래에셋재단으로, 인도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교육 환경과 더 나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은 교육시스템 구축과 개발에 기여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3] 주요 활동계획은 장학프로그램을 통한 인도현지 학생들의 개인에 대한 배움의 기회를 확대하고, 교육 기관 인프라 개발지원을 통한 양질의 교육기회와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이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 및 교육 리서치, 혁신센터를 지원이다. 설립이후부터 현재까지 IIM 하이데라바드, IIM 벵갈루루 등 인도 내 최고 경영대학들과 협력을 통한 장학 프로그램 지원 및 미래인재 육성 (2019년 3개의 대학에서 19명의 장학생 선출), 세이브더칠드런 및 2개 현지 교육기관에 교육기금을 기부하며, 2019년 67명의 현지 학생에게 총 8,7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이는 약 일인당평균 40만원 (초/중등교육) ~ 350만원 (대학 및 석박사과정)의 수혜금을 지원받은 격이다.

수상 실적 [ 편집 ]

– 2006년 매경 증권인 대상을 수상했다. – 2008년 제40회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 2009년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마스터상을 수상했다. – 2011년 제1회 한국금융투자협회 금융투자인상 대상을 수상했다. – 2013년 10월 제1회 매일경제 기업인상을 수상했다. – 2015년 제17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 최우량기업상을 수상했다. [한국경영학회 특별강연] – 2017년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을 수상했다.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수상]

참고 [ 편집 ]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등재 [ 편집 ]

2010년 3월 박현주 회장은 한국기업인 최초, 아시아 금융권 최초로 하버드 비지니스스쿨 기업가정신 연구사례로 선정되었고, 창립 10여년 만에 국내 자본시장의 리더로 부상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성공 스토리(Mirae Asset: Korea’s Mutual Fund Pioneer)를 다루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기업가정신 연구사례선정_미래에셋]

더케이스센터 등재 [ 편집 ]

2017년 7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김수욱 교수 주도로 미래에셋의 혁신을 통한 성공과정을 분석한 Mirae Asset: A Disruptive Innovator in the Korean Financial Industry 연구결과보고서가 세계적인 학술기관인 ‘더 케이스센터(The Case Centre)’에 등재되었다. [[https://web.archive.org/web/20190326233255/https://www.thecasecentre.org/educators/products/view?id=145054 Archived 2019년 3월 26일 – 웨이백 머신 더케이스센터_서울대_미래에셋]]

미래에셋은 대기업 계열 금융사가 대부분인 한국 금융 시장에서 뮤추얼펀드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투자 문화를 창조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해외투자펀드, 부동산펀드, PEF 등을 소개하는 등 고객에게 다양한 투자 기회를 제공해왔다.

무엇보다 고객 우선정신으로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사업모델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Permanent Innovator로서의 행보를 보였고 사례연구에서는 이를 높이 평가했다.

저서 [ 편집 ]

–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박현주 지음, 김영사 출판사, ISBN 978-89-349-2580-4

– 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 홍찬선 외 지음, 올림 출판사, ISBN 978-89-958839-8-3

인터뷰 [ 편집 ]

– 신동아 : 박현주 미래에셋회장의 증권인생 24년_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 한국경제 :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일문일답_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일문일답

– The Wall Street Journal : For Asset Manager, a Future Beyond Korea_The Wall Street Journal : For Asset Manager, a Future Beyond Korea

참고 문헌 [ 편집 ]

1. Forbes (profile), retrieved 31 March 2019_[https://www.forbes.com/profile/park-hyeon-joo/#971c4d9740ad]

2. “Mirae Asset’s Park Hyeon-joo donates dividends for 8th straight year”_[http://www.theinvestor.co.kr/view.php?ud=20180403000303] Archived 2019년 3월 27일 – 웨이백 머신

3. “Mirae Asset’s focus on global emerging markets – Asia Asset Management – The Journal of Investments & Pensions”_[https://web.archive.org/web/20190327101136/https://www.asiaasset.com/15th2010_mirae.aspx]

4. 저서_돈은 아름다운 꽃이다_ISBN 978-89-349-2580-4_[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041952]

5. 미래에셋,SK생명 1600억에 인수_[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439808]

6. 미래에셋 `금융을 수출한다`_[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18&aid=0000540721]

7. 미래에셋, 캐나다 ETF운용사 인수한다_[https://www.mk.co.kr/news/stock/view/2011/07/421969/]

8. 미래에셋증권, 대우증권품고 한국판 골드만삭스 만든다_[http://biz.newdaily.co.kr/site/data/html/2015/12/24/2015122410028.html] Archived 2019년 4월 4일 – 웨이백 머신

9. 미래에셋, 하와이 리조트 인수_[http://www.fnnews.com/news/201505191706120227]

10.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9년째 배당금 전액 기부_[http://www.fnnews.com/news/201904011019110440]

11. [대한민국 100대 CEO]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 GISO(글로벌투자전략최고책임자) 맡아 세계시장 개척 ‘올인_[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9&no=203408]

12. 관광업에서 미래 봤다, 여수에 1조 투자_[https://www.hankyung.com/finance/article/2019051917481]

13. ‘박현주 1호’ 펀드 7개월 만에 수익률 100%…미래에셋 신화의 시작_[https://www.hankyung.com/finance/article/2019070547911]

같이 보기 [ 편집 ]

‘한국의 워런 버핏’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 겸 회장

박해윤 기자 [email protected]

강의실 대신 명동 증권사 찾던 대학생

대학생 때 꿈은 공인회계사

그에겐 늘 돈이 따라붙었다

인생의 멘토였던 김재철 회장 만류에도…

7명 직원 압구정에 투자자문사 차려

박해윤 기자 [email protected]

터를 먼저 보는 박현주의 대체 투자

미래에셋 본사 부지는 옛 주전소(鑄錢所)

남해안을 나폴리 같은 아름다운 해양도시로

아들과 두 딸 자신의 삶 개척해야

과감한 세대교체로 샐러리맨 신화 만들 것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1970년대 후반 대학생 박현주는 서울 명동 거리를 자주 드나들었다. 대학교 경영학과 강의실 수업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대신 어머니가 준 용돈으로 주식투자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명동 증권사 객장을 찾아다니면서 실전 투자를 하는 게 강의실에서 듣는 교수님 수업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눈앞에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짜릿한 게임이었다. 투자한 기업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어느 하루 대학생 박현주는 ‘사자’ ‘팔자’로 정신이 없는 명동 객장을 뒤로 한채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학생! 거기 똑바로 서 봐”라며 박현주를 불러 세웠다.“네? 저요?”회색 승려 옷을 입은 스님은 박현주를 명동 한복판에 세워놓고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곤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곤 홀연히 사라졌다.“너는 앞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도록 해라.”대학생 박현주가 강의실 대신 증권사 객장에서 주식 투자에 열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름도 모르는 스님의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이 아니었나’ 하며 박현주는 당시를 기억한다.대학생 박현주의 꿈은 공인회계사(CPA)였다. 당시만 해도 경영학과에 다니면 CPA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괜찮고, 수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동안 CPA 공부를 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회계학은 할 만했는데 상법 등 법 관련 과목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회계학 외에 통계학 재무관리 인사관리 조직론 등에 더 흥미가 많았다. 요즘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통계를 눈여겨본다.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발표 자료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그려보곤 한다. 많은 것이 통계, 그러니까 수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CPA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당시에 배운 회계학은 박현주가 증권사에 다니고, 이어 창업을 결심하고, 나아가 기업을 확장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같은 재무제표(財務諸表)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좋은 경영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고려대 재학 시절 하숙을 하던 박현주에게 하숙집 선배가 어느 날 툭 던진 말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현주야, 너 관상(觀相)을 봐줄 테니까 나중에 돈 벌면 나한테 10분의 1만 줘라. 너 얼굴 자세히 보니까 돈 아주 많이 벌겠는데?”선배는 당시 주역(周易)에 푹 빠져 있던 사람이었다.“네?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나중에 취직해서 저 먹고살기 바쁠 텐데요 뭘.”그러곤 웃어넘겼다. 박 회장은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청년 시절 이 두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명동에서 스친 그 스님은 박현주의 직업을 정해준 셈이고, 하숙집 선배는 그가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박 회장은 “돌이켜보면 내가 증권사에 취직하고 나아가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고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고 회고했다.박현주에겐 ‘투자의 귀재(鬼才)’라는 표현이 늘 따라붙는다.“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는 얘기도 박현주에겐 수식어나 다름없다.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한지 5년 만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을 달았고, 입사 10년 만에 강남본부장으로 전국 최연소 이사가 됐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아직도 이 기록을 깬 증권맨은 없다. 주식을 사고파는 매매 실적인 주식약정은 전국 1위에 항상 박현주라는 이름을 올릴 1990년대 중반 그는 잘나가던 증권사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39세 때였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지극히 아끼던 박현주의 사표를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의 사표를 말릴 수 없었다.“회장님, 지금 회사를 나가지 않으면 영영 봉급쟁이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흔이 되기 전에 창업해서 제 회사를 갖고 싶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평생 후회하면서 산다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박현주는 당시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구재상(현 케이클라비스 대표)과 서초지점장이던 최현만(현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함께 동반 사표를 냈다. 이들은 창업 동지이자 ‘박현주사단(師團)’으로 불렸다. 구재상은 운용의 베테랑이었고, 최현만은 관리의 달인(達人)이었다. 이렇게 3인방은 잘나가던 직장을 뿌리치고 힘을 합쳐 창업이라는 미지의 길로 들어섰다. 샐러리맨으로선 최고의 전성기에 창업을 택한 역(逆)발상이었다. 동원증권은 이들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1년 이상 퇴직금도 지급을 미루는 등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출발은 단출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인 압구정동에 조그만 투자자문 회사를 차렸다. 직원은 달랑 7명이었고, 자본금 100억 원짜리 회사였다. 자본금은 박 회장의 퇴직금과 사재(私財)를 털었고, 박현주라는 이름을 믿고 외부에서 투자한 돈도 들어 있었다. 회사를 창업한 뒤 행운인지 불행인지 외환위기라는 유래 없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졌다. 원화가치가 곤두박질치고 금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치솟았다. 부도나는 회사가 잇따르고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잘린 샐러리맨들이 넘쳐났다.가장이 직장을 잃으면서 무너지는 가정도 잇따랐다. 주가가 폭락하고 아파트 값도 폭락했다. 부도난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이던 대우그룹이 마침내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고금리 수익증권을 팔던 투자신탁회사의 부실은 곪을 대로 곪은 상황이었다. 모두 내 돈이 어떤지,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아야 했다.이 모든 위기가 박현주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투자의 패러다임을 바꿀 절호의 찬스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투자신탁회사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는 무렵 ‘투명한 자산운용’을 내걸고 뮤추얼펀드 돌풍을 일으켰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현주펀드’를 선보였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증권사 객장에서 개미군단을 상대하던 그가 이제는 직접 투자가 아니라 간접 투자로 돌아설 때라고 역설했다.박현주는 서울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부산 서면의 롯데호텔, 광주 파크호텔, 대전 유성호텔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면서 투자설명회에 직접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왜 지금 뮤추얼펀드인지, 내 돈을 누가 운용하는지 투자자들이 알아야 하는 펀드매니저 실명제 바람이 이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길거리를 가다보면 돈이 발길에 툭 차일 정도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투자의 패러다임이 급속히 바뀌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만큼 기회가 많았을 때였지요.”조그만 자문사로 출발해 인터넷증권사로 시작한 미래에셋증권은 출범 17년 만인 2016년 여의도 자본시장의 부동(不動)의 1위이던 대우증권을 인수해 자본시장의 ‘메기’가 됐다.자본시장에서 박현주는 주식과 펀드의 대명사였다. 주식브로커로 출발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주식 투자의 달인이었다. 개별 종목 투자의 위험이 커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펀드로 갈아타야 한다면서 내놓은 것이 뮤추얼펀드 1호인 ‘박현주펀드’였다. 자산운용사 설립에 이어 SK생명 인수로 미래에셋생명을 만들고, 이어 대우증권을 인수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면 증권 보험 자산운용 등 3대축으로 짜여 있다.하지만 박현주가 부동산을 보는 눈은 매의 눈처럼 매섭다. 지금은 해외 부동산과 호텔에까지 투자하면서 포트폴리오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박현주 회장의 부동산 투자는 풍수(風水)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풍수지리라는 것은 땅의 이치에 기반한다고 믿는다. 좋은 땅의 기운이 좋은 자리를 만들며, 같은 땅이라도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곳은 좋은 터가 아니라고 한다.“잘 모르는 사람들은 풍수를 주술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의 관점에서 보면 풍수는 과학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옥 터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낭패를 본 기업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죠. 비즈니스를 하면서 제 자신도 풍수에 대한 공부를 꽤 했습니다. 미래에셋 부동산의 역사도 여기서 비켜가지 않았습니다.”뮤추얼펀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2000년 초반 박 회장은 미래에셋 사옥을 서울 여의도 옛 주택은행 본점 건너편의 한국유리 빌딩으로 정했다. 한국의 맨해튼 격인 여의도는 지기(地氣)가 센 탓에 대로변에 위치한 사옥들은 풍파가 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의도 국회를 바라보는 쪽에 들어선, 대로변에 위치한 많은 금융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문 닫는 사례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미래에셋의 첫 사옥인 한국유리 건물은 대로변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앞서 미래에셋은 서울 강남의 삼성동에 있는 빌딩을 샀다가 서둘러 매각한 전력이 있었다. 박 회장이 보기엔 건물은 좋았지만 사무실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지금 본사가 있는 서울 을지로의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은 청계천을 바라보는 입지로 과거 주전소(鑄錢所) 터였다. 청계천 공사가 진행될 무렵 매입한 이곳에 빌딩을 세우고 비즈니스를 한 이후 미래에셋의 사업은 번창 일로를 걸었다. 동전을 찍어내는, 다시 말해 돈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던 만큼 돈 벌기엔 딱 좋은 부지라고 한다. 물론 이 결정은 박 회장이 직접 내렸다. 박 회장은 당초 센터원 빌딩 36층에 있는 회장 사무실의 책상이 청와대를 마주 보는 쪽으로 배치된 것을 보고 청와대를 비껴 옆으로 좌석 배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전망으로선 좋을지 모르지만 강한 기운에 압도될 수 있어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서울 광화문 포시즌호텔은 처음에 사옥 부지로 활용하려 했지만 박 회장이 호텔 부지로 바꾸었다. 입지상 오피스로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래에셋의 사옥 입지를 결정할 때는 이처럼 창업주인 박 회장이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난 후 여러 조언을 받아 최종적으로 이뤄졌다.요즘 박 회장은 틈날 때마다 강원 홍천과 전남 여수 경도, 남해안과 동해안 등지를 둘러보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해안을 낀 곳에 새로운 해양 도시를 설계하는 꿈을 꾸곤 한다. 서울이 아닌 동해안이나 남해안 등지에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육 인프라를 지방으로 분산하면 자연스레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나 지방과의 균형 발전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여수에서 거제까지 남해안을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면 유럽의 어느 해변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마치 나폴리 같은 곳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죠. 이런 아름다운 천혜 관광자원을 잘만 개발하면 지역 주민들이 수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관광 수요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요. 정부가 균형발전 지방분권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잘 개발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획기적으로 해야 합니다.”미래에셋은 올해 창립 사반세기를 맞았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로 창업한 지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창업 당시 39세던 박 회장은 이젠 60대 중반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서열에 미래에셋그룹은 20위다. 재벌로 출발하지 않은 회사로 이처럼 고속 성장을 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박 회장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키워야 할 토대를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이다.슬하에 두 딸과 아들 등 3남매를 둔 박 회장은 세습경영을 하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상태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세습을 하는 한국 재벌 오너 2세와 3세 등 후세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던 것이다. 두 딸과 아들에게는 주식을 물려주지만 경영에는 직접 간여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대신 1년에 두어 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해 대주주로서 경영권 참여에 국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재벌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딴 ‘미래에셋식 경영’이다.많은 인재들이 서로 경쟁해 회사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문호를 활짝 열어놓으면서도 전문경영인이 오래하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대표이사 정년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재벌 체제는 지양하면서도 재벌 총수가 물러나면 그를 보좌하던 중역들도 자연스레 물러나는 한국 재벌의 과감한 세대교체의 장점을 본받겠는다는 생각이다. 박 회장은 대표이사에 대해 정년제도를 도입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다. 대표이사에 정년제를 도입하면 임원들도 자연스레 정년제에 해당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정착될 것이라는 기대다.지난해 말 박 회장은 과감한 세대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젊은 피가 자연스레 조직에 수혈됨으로써 미래에셋을 보다 젊게 가져가야 할 적기로 판단한 것이다. 미래에셋을 100년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유능한 샐러리맨 출신들이 그룹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회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젊은 피들이 꾸준히 미래에셋을 노쇠하게 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100년 기업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박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을 비롯한 창업 세대들은 뒤로 서서히 물러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한국 기업과 금융회사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히려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역동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재벌 체제의 좋은 점은 따오고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장점도 배합해 미래에셋만의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최영해 기자 [email protected]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12년 연속 배당금 전액 기부

미래에셋은 박현주 회장이 2021년도 미래에셋자산운용 배당금을 전액 기부한다고 31일 밝혔다.

박현주 회장은 지난 2010년부터 미래에셋에서 받은 배당금을 전액 기부하고 있다. 올해 기부하는 배당금은 16억원이다. 12년간 누적기부액은 총 282억원에 달한다.

기부금은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통해 장학생 육성 및 사회복지 사업에 사용된다. 박현주 회장은 2008년 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2010년부터 배당금 전액을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미래에셋 해외 교환 장학생’ 프로그램은 한국 인재들이 넓은 세계에서 지식 함양 및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학비와 체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교환학생 장학사업이다. 지난 2007년부터 현재까지 총 6017명의 대학생을 전세계 50개국으로 파견했다. 장학사업 프로그램 전체 참가자는 1만명이 넘는다.

또한 미래에셋박현주재단과 계열사는 ‘글로벌리더 대장정’, ‘글로벌 문화체험단 등 인재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전체 참가자는 36만명이 넘는다.

한편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2000년 박현주 회장이 사재 75억원을 출연해 설립했다. 설립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인재육성 중심의 사회공헌사업을 전개하며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 실천’을 위한 나눔문화를 확산하고 있다.

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32)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도전을 통한 성장

– ‘앞으로 달려가면 바람 없어도 바람개비는 돌아간다’

– 금수저 아닌 자수성가형…‘배려가 있는 자본주의’ 지향

– 한국 금융산업의 글로벌 강자 도약 선봉역할 기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증권회사의 잘나가는 임원으로서의 순탄한 앞날이 보장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창업의 길을 택해 끝없는 도전으로 오늘날 국내 최대를 넘어 아시아 톱3 금융투자회사를 일궈냈다. (사진=미래에셋)

미래에셋그룹 창업자 박현주 회장은 대학시절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1980’을 열번이상 통독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래라는 말에 매료됐다. 또 대학 2학년 때부터 주식투자를 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판단으로 투자의 매력을 체험했다. 그리고 자본시장의 발달없이 자본주의의 발전도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미래와 자본, 평생의 명제가 된 두가지의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박 회장은 끊임없이 도전했다. 중견 증권사 임원으로서 순탄한 앞날이 보장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1997년 미래에셋 캐피털과 미래에셋 투자자문을 설립했다. 박 회장은 당시 심경을 “첫 눈에 첫 발을 내딛는 마음과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역경에 굴하지 않는 방법은 초심을 다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 이라는 의지로 도전하며 성장했다.

1998년 국내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미래에셋 박현주 1호’를 출시했다. 이 펀드는 주식형으로 최대 1년만기의 폐쇄형 펀드였다. 박현주의 명성을 기대한 투자자들은 500억원 한도의 이 금융상품을 2시간만에 완판시켰다. 박 회장은 1년뒤 80%라는 높은 수익률로 투자자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1999년에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고 2005년 SK생명을 인수한 미래에셋생명으로 퇴직연금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2017년에는 PCA생명을 인수, 대형 생보사로 키웠다.

미래에셋은 지난 2011년 캐나다 최대 ETF(상장지수펀드) 운용사 호라이즌 베타프로를 인수, 북미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사진은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토론토증권거래소(TSX)에서 인수계약을 체결한후 호라이즌 베타프로 회장 등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래에셋)

“2020년까지 자기자본 10조원, 세전이익 1조원, 자기자본이익률(ROE) 10%를 달성하겠다.” 2015년 KDB대우증권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박회장은 이렇게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구상을 2021년 상반기에 모두 달성했다.

박 회장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2021년 미래에셋그룹 전체 자기자본은 17조원을 돌파하고 세전이익은 2조3000억원 가량이라며 앞으로 자기자본 30조원을 돌파하는 시점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했다. 멈추지 않는 도전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대우증권 인수이후 미래에셋증권은 국내 1위를 넘어 아시아 톱3 IB(투자은행)로 발돋움했다. 자기자본 기준으로 일본 1위 노무라증권은 30조원, 2위 다이와 증권은 14조원에 이른다. 다이와증권은 1920년에, 노무라증권은 1925년에 설립됐다. 미래에셋증권은 100년 역사를 보유한 아시아 유수의 증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열에 올랐다.

이제 미래에셋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투자그룹으로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무엇보다 덩치가 커진 만큼 자기자본이익율(ROE) 제고를 통해 은행과 차별성을 키우는 초대형 금융회사로 커 나가야 한다. 미국의 대형IB인 JP모건, 모건스탠리 등은 100조원이 넘는 자기자본에도 ROE가 10%를 상회하고 있다.

미래에셋은 2020년 8.94%로 비교적 양호한 ROE를 달성했지만 자본이 늘어날수록 수익률 제고 부담도 커진다. 미국에서 주식 소수점 거래 등 혁신에 앞장선 찰스슈와브는 미래에셋증권과 비슷한 연매출 100억달러(약 11조원)를 올리면서도 14.2%에 달하는 높은 ROE를 기록했다.

또한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시장에서 전문서비스를 제공하고 높은 수익을 올리는 기업투자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박 회장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은 금수저 출신이 아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이다. 그가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를 사회공헌의 테마로 잡은 배경이다.

이를 위해 1998년 미래에셋 육영재단을 세우고 2000년에는 사재 75억원을 출연해 미래에셋 박현주 재단을 출범시켰다. 2021년 기준 해외 교환 장학생 5939명, 국내 장학생 3578명, 글로벌 투자전문가 장학생 등 총 9641명의 학생이 미래에셋의 지원을 받았다. 또 재단의 장학사업과 글로벌 문화체험, 경제 및 진로교육 등 인재육성 프로그램에 32만명이 넘는 학생이 참가했다.

샐러리맨의 신화, 스타 주식브로커, 한국 자본시장의 개척자, 최고의 금융전문가 등등…. 박현주 회장의 앞에는 그동안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왔다. 그는 ‘도전을 통한 성장’을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정하고 끊임없이 부딪혔다.

박 회장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길 뿐”이라고 했다. 국내 최고의 지점을 만든 영업감각, 최연소 증권사 임원으로서의 현장 안목, 자기 이름을 딴 국내 최초의 금융상품 출시라는 책임의식, 명실상부한 국내 최초의 글로벌 금융기업이라는 비전. 박현주 회장의 도전을 통해 우리는 미래 한국 금융산업의 글로벌 강자 도약이라는 청사진을 그려본다.

권오용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제실장•기획홍보본부장, 금호그룹 상무, KTB네트워크 전무를 거쳐 SK그룹 사장(브랜드관리부문), 효성그룹 상임고문을 지낸 실물경제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공익법인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로 기부문화 확산과 더불어 사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혁신민국(2015), 권오용의 행복한 경영이야기(2012),가나다라ABC(2012년), 한국병(2001년)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인사이드비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Who Is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 1999년 2월8일 박현주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앞줄 오른쪽)과 홍인기 증권거래소 이사장(앞줄 왼쪽)이 증권거래소 신관 대회의실에서 ‘미래에셋 코스피 200 인덱스펀드’ 상장을 기념하는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이는 최초의 뮤추얼펀드 상장이었다. <연합뉴스>

[K매니지먼트 ⑨ 미래에셋 금융그룹] 박현주 회장 글로벌 야망… 도전과 성공 스토리 과감한 해외진출·M&A로, 亞 3대 IB 반열에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서울대 강연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글로벌X 클라우드 ETF’가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위치한 나스닥 마켓사이트(NASDAQ MarketSite)에 표시돼 있다.

미래에셋 금융그룹은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대표주자다. 미래에셋은 자산운용, 증권, 벤처투자, 캐피털, 보험 등 비은행 금융산업 각 부문에서 전방위적 성장세를 나타내며 발군의 역량을 과시한다. 미래에셋은 차별화 전략과 스케일업, 글로벌 시장 개척으로 한국 금융산업의 새 역사를 썼다. 미래에셋 금융그룹을 설립한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을 한국 금융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선도기업으로 키워냈다. 그의 도전정신과 리더십은 불확실성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아시아 톱클래스 금융 비즈니스 모델을 실현하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금융투자그룹으로 부상한 미래에셋의 성공 스토리를 조명한다.미래에셋 금융그룹은 2021년 상반기 자기자본이 17조원에 육박했다. 미래에셋증권은 한국 증권업계 최초로 자기자본 10조원을 돌파하면서 아시아권에서 손에 꼽히는 자기자본 규모를 갖춘 대형 투자은행(IB)으로 부상했다. 미래에셋그룹은 대규모 자기자본 확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골드만삭스, 아시아를 호령하는 글로벌 IB로 도약하겠다는 박현주 미래에셋 금융그룹 회장의 목표가 실현되고 있다.“2020년까지 자기자본 10조원, 세전이익 1조원, 자기자본이익률(ROE) 10%를 달성하겠다.” 박현주 회장은 2015년 KDB대우증권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이 같은 청사진을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구상을 2021년 상반기에 모두 달성했다. 미래에셋증권은 2021년 상반기 자기자본이 10조467억원을 기록했다. 그리고 미래에셋캐피탈의 자기자본은 2조3480억원,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조1135억원, 미래에셋생명은 1조9140억원, 미래에셋벤처투자는 2166억원으로 각각 집계됐다. 이로써 미래에셋 금융그룹의 자기자본은16조6388억원에 달한다. 박 회장은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21년 미래에셋그룹 전체 자기자본은 17조원을 돌파하고 세전이익은 2조3000억~2조4000억원가량 낼 것”이라며 “앞으로 자기자본 30조원을 돌파하는 시점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무엇보다 미래에셋증권이 자기자본 10조원을 돌파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2016년 금융위원회는 초대형 IB 육성 방안을 발표하면서 자기자본 10조원을 기준선으로 삼았다. 세계 금융시장에서 굵직한 거래에 참여하려면 자기자본이 100억달러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증권사는 자기자본 규모가 커야 다양한 업무를 취급하면서 글로벌 영업력을 강화하고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국내 증권사 중 미래에셋증권의 위상이 독보적인 가운데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은 자기자본이 6조원에 육박하며 삼성증권은 5조원대 중반 KB증권과 하나금융투자는 5조원대 초반이다. 게다가 미래에셋증권은 해외투자 성과가 가시화하고 해외법인 실적이 호조를 보인 데다 발행어음업 인가에 힘입어 2021년 증권업계 최초로 순이익 1조원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9월 미래에셋증권은 자기자본이익률(ROE) 11.6%를 기록했다.그동안 미래에셋증권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1999년 설립 당시 미래에셋증권 자본금은 500억원에 불과했다. 후발 주자인 미래에셋증권이 2015년 KDB대우증권을 합병하면서 대형 증권사로 도약했다. 2016년 미래에셋증권 자기자본은 6조6389억원으로 단숨에 두 배가량 늘었다. 동시에 취급하는 상품과 비즈니스 영역은 대폭 확대됐다. 미래에셋증권은 멀찌감치 앞서가던 일본 유수 증권사와 견줄 만한 규모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래에셋증권은 설립 22년 만에 자기자본 10조원 고지를 밟고 국내 1위를 넘어 아시아 ‘톱3’ IB로 발돋움했다. 일본 1위 노무라증권의 자기자본은 2020년 말 기준으로 약 30조원에 달하고 2위 다이와증권은 14조원에 이른다. 다이와증권은 1902년에 설립됐고 노무라증권은 1925년 출범했다. 1999년 설립된 미래에셋증권이 100년 역사를 보유한 일본 증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미래에셋증권이 노무라증권·다이와증권과 경쟁할 수 있는 아시아권에서 손에 꼽히는 빅 IB 반열에 올랐다. 미래에셋은 두둑한 실탄을 바탕으로 글로벌 인수·합병(M&A)시장에서 아시아 맹주로 호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샐러리맨 신화’ ‘스타 주식브로커’ ‘한국 자본시장의 개척자’ ‘최고의 금융 전략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이름 앞에는 그동안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왔다. 그는 한국 금융산업의 신기원을 연 주인공이다. 그는 ‘도전을 통한 성장’이라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성취한 금융인이다. 그는 통찰력과 예측력이 강하고 야성적 투자감각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지구촌 세상의 흐름을 면밀히 생각하고 고민한다. 여러 현상 간 상호작용과 인과관계를 추론한다. 그는 미래의 세계를 관통하는 트렌드를 예측하는 탁월한 인사이트를 가지고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한다.박 회장은 승부사적 기질을 갖췄다. 그는 날쌘 표범처럼 기회 포착 능력이 탁월하다. 전략적 의사결정을 내리기까지 심사숙고한다. 또한 거의 중독에 가깝게 운동에 매달리며 홀로 의사결정에 몰입한다. 선택과 집중은 의사결정의 요체다. 의사결정은 핵심을 키우고 곁가지를 잘라내는 일이다. 기업이 해야 할 비즈니스와 해서는 안 될 비즈니스를 가려내는 것이다. 그는 전략적 선택을 ‘강점이 있는 분야, 핵심역량에 주력해 최고로 포지셔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룹 중역회의에서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그래서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수많은 사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제로베이스에서 전략을 짜는 경우가 많았다. 박 회장은 항상 중장기 미래를 내다보고 전략을 수립한다. 일단 마음을 굳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전속결로 추진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올인한다.박 회장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은 금수저 출신이 아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박 회장은 책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됐다. 그가 어린 시절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위인전기였다.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점을 독서를 통해 인식했다. 장기적으로 한 길을 걸어간 위인들이 많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판단으로 투자의 매력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는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됐다.대학 시절 박현주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1980)이었다. 그는 이 책을 10회 이상 반복하며 열독했다. 이 책을 통해 미래라는 말에 매료됐다. 그는 미래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후 미래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게 됐다. 박 회장은 대학시절부터 키워온 미래에 대한 비전과 자산운용 비즈니스를 향한 꿈을 담아 설립하는 회사 이름을 ‘미래에셋’으로 짓게 된다. 박 회장은 미래를 향한 투자와 혁신으로 더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미래에셋 브랜드에 담았다.“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가 1990년대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중앙지점장 재직시절 영업의 지침으로 삼은 지점훈이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방법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의미다. 그는 어려움이 닥쳐도 특유의 상황 판단력과 돌파력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서울 명동은 한국 증권산업의 중심이었다. 서른두 살 때 증권사 최연소 지점장에 오른 그는 패기만만한 25명의 직원들과 함께 전국 1000여 개 증권사 지점 중에서 실적 1등을 달성했다.박현주는 중견 증권사 임원으로서 순탄한 앞날이 보장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에 자신의 비즈니스 세계를 열었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출범했다. 당시 심경은 “첫눈에 첫발을 내딛는 마음과 같았다”고 한다. 박 회장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창업 당시 그는 “대출 중심의 한국 금융시장이 어떻게 하면 투자 중심의 금융시장으로 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또한 “투자 문화를 개선해 한국 자본주의와 증권시장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고 결심했다. 아시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자본시장 규제 완화와 증권투자신탁업법 시행은 큰 기회가 됐다.1998년 한국 최초의 회사형증권투자펀드(뮤추얼펀드) 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은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 회장은 그해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미래에셋 박현주 1호’를 출시했다. 당시 그가 세운 원칙은 ‘팔리는 상품이 아니라 고객에게 좋은 상품을 설계한다’는 것이었다. 고객의 호응에 대성공을 거둔 뮤추얼펀드는 투자자가 주주가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다른 펀드보다 운용의 투명성을 높인 금융상품이었다. 박현주 회장은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고, 2005년 SK생명을 인수해 미래에셋생명을 출범시켜 퇴직연금시장 진출 교두보를 마련했다. 2017년에는 PCA생명을 인수, 대형 생보사로 키웠다.미래에셋은 저축에서 투자로, 직접투자에서 간접투자로, 상품 중심에서 글로벌 자산배분으로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바꿔 왔다. 투자는 새로운 산업의 씨앗을 뿌려주고 육성하는 일이다. 특히 미래에셋은 고령화시대 금융의 컨버전스를 연금투자로 봤다. 근로자의 노후자산인 퇴직연금을 운용함에 있어 저수익 안전자산에 묶어두는 대신 고수익 투자자산을 편입하는 과감한 전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한국을 넘어 글로벌 금융시장에 자산을 배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분산투자로 수익성과 안전성을 겸비한 미래에셋의 연금자산 규모는 20조원을 넘었다. 박 회장의 미래에셋 성공 스토리는 2009년 하버드비즈니스스쿨 MBA의 ‘국제 기업가정신’ 강의교재로 채택됐다.당대 세계 최고 기업가와 초일류기업을 소개하는 케이스 스터디 교재에 박 회장이 주인공으로 선정된 것이다. 또한 미래에셋 금융그룹의 파괴적 혁신 사례는 2017년 세계적 학술기관인 ‘더 케이스’ 센터에 등재됐다.미래에셋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지향한다. 미래에셋은 고객 우선 정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사업 모델을 끊임없이 만들기 위해 중단 없는 혁신을 추구한다. 고령화 저성장 시대에 자본시장의 DNA를 바꿔 투자를 활성화하고 미래 산업을 육성화하는 도전정신을 실천한다. 미래에셋은 네 가지 투자원칙을 정해 실천한다. 첫째, 경쟁력의 관점에서 투자 기업을 본다. 둘째,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한다. 셋째, 기대수익과 함께 위험을 고려한다. 마지막으로 운용을 담당하는 개인이 아니라 팀이 신중하게 의사를 결정한다.미래에셋은 발상을 전환하는 혁신적인 사고로 통념에 도전했다. 기존의 관행을 다시 되짚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1990년대 말 창업 초기 박 회장이 선택했던 최선의 전략은 기존 자산운용사(투자신탁회사)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다.“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소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 한국, 대한, 국민 등 대형 투자신탁 3사의 주력상품은 채권형 상품이었다. 3대 투신사는 고금리 시기에 채권형 상품 판매로 ‘공룡화’되어 있었다. 외환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주가지수가 급락한 경험을 가졌던 투자자들에게 주식형 상품은 기피 대상이었다. 주식형 펀드 비중이 크지 않았던 시절, 미래에셋은 주식 가격이 저평가되어 있다는 판단 아래 차별화된 전략에 힘을 모았다.1999년 현대투자신탁에서 판매한 주식형 수익증권 ‘바이코리아’의 열풍이 불었다. 당시 선보인 ‘미래에셋 박현주 1호’는 주식형으로 최대 1년 만기의 폐쇄형 펀드였다. 박현주의 명성을 기대한 투자자들의 참여로 500억원 한도가 출시 2시간 만에 완판됐다. 한국 주식의 디스카운트 현상은 투자매력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기존 대형 투신사들은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은 대기업이 무너졌지만 재무구조가 우량한 기업들은 살아남았다. 미래에셋은 저평가된 우량기업 주식에 집중 투자했다. 그리고 1년 뒤 80%라는 높은 수익률로 투자자들의 믿음에 보답했다.박 회장은 저축자산의 투자 자산화를 예견하고 개인투자자를 위한 간접주식투자상품 개발에 주력했다. 예금상품이나 채권 이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겠다는 목표 아래 미래에셋은 채권형 펀드가 아닌 주식투자펀드 개발에 올인했다. 성장성이 높은 상장기업 주식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주식운용에 나선 것이다. 금리가 하락하는 저금리 구조로 진입하리라는 중장기 예측 아래 개발한 주식형 펀드는 투자자에게 높은 수익률을 제공했다. 종목 선정에 있어서도 업종 대표주를 중심으로 우수기업을 선정하는 전략적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간접금융 상품에서 직접금융 상품으로 금융중개 기능이 탈은행화(Disintermediation)하는 추세와도 맞아떨어졌다.미래에셋은 출범 초기부터 브랜드 인지도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명의 신생 금융회사인 미래에셋은 금융상품에 대한 대규모 매스마케팅(Mass Marketing)을 적극 전개했다. 미래에셋은 신문과 TV, 잡지에 거금의 광고비를 투입해 미래에셋 상품을 소개하고 브랜드를 키우며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박 회장은 자신이 직접 광고를 디자인하고 카피를 작성하는 등 열의와 정성을 마케팅 활동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투자자는 미래에셋에 대한 관심과 호응으로 화답했다.미래에셋이 추구한 또 하나의 차별화는 펀드 판매채널의 혁신이다. 상품 판매 네트워크가 취약했던 미래에셋은 남다른 판매 채널 전략을 채택해 큰 성과를 냈다. 미래에셋과 관련이 없는 은행과 직접적인 경쟁상대가 아닌 증권사들을 펀드 판매 창구로 이용하는 역발상이 통했다. 다른 금융회사의 견제를 받지 않고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은행 판매 채널은 미래에셋의 적립식펀드 판매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은행 적금처럼 고객이 매달 자동이체 방식으로 일정 금액을 불입하는 적립식펀드는 중산층의 자산형성에 기여하는 상품이다. 적립식펀드는 주식시장의 변동성 위험을 줄여주는 투자수단으로 평가된다. 이는 평균 주식매입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낳는다. 미래에셋은 적립식펀드에 대한 잠재고객을 은행 창구 판매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보한 셈이다. 나아가 미래에셋생명이 적립식 퇴직연금상품을 개발해 선도적으로 판매하는 계기도 마련했다.증권업계의 후발 주자인 미래에셋증권은 온라인 증권거래를 통한 대폭적 수수료 인하에 앞장섰다. 미래에셋은 모든 지점 객장에 주식시세 전광판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 위탁매매 수수료 위주의 수익구조에서 벗어나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로 전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부분의 증권사가 고객의 이익에 반해 빈번한 매매를 유도함으로써 수수료 수입을 증대시키는 ‘푸시전략’을 펼친 상황에서 미래에셋만의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미래에셋은 벽을 문으로 바꾸듯 금융에 새 길을 여는 영원한 혁신가가 되겠다.” 2017년 미래에셋 그룹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박현주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그동안의 성공에 안주할 수는 없다. 박 회장의 도전은 계속된다. 창업 후 20년간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규모 확대에 성공한 박 회장은 2017년 신년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투자의 야성’으로 제2의 창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④ 아시아 정상 등극을 통한 글로벌 전략“미래에셋을 아시아 1위의 금융투자회사로 키워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2007) “한국인만으로 세계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하기는 어렵다. 동맹군을 찾아야 한다. 인구 100만 명이 채 안 된 몽골족이 150년간 2억 명의 세계 인구를 지배한 연합(동맹) 전략이 벤치마킹 대상이다.”(2006) “자산 다각화 포트폴리오로 지혜롭게 투자하겠다.”(2012) “기회가 닿는 대로 경쟁력 있는 기업을 공격적으로 M&A하고 국내외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이다.”(2015)박현주 회장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수습되자 세계로 눈을 돌렸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해외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2001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연수를 마친 박 회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을 수립하고 행동에 나섰다. 그는 해외진출 시 해당 국가의 성장 지속성, 인프라 투자 충분성, 천연자원 보유,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인구구조 등 영업환경을 면밀히 검토했다. 현지 시장이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긍정적 흐름을 보이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글로벌 진출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포기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리고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현지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따져봤다.미래에셋은 2003년 홍콩에 자산운용사를 설립, 금융수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갈증과 도전은 희망이 된다”는 신념을 품은 박 회장은 칭기즈칸 전략을 앞세워 이머징 마켓을 집중 공략했다. 미래에셋은 글로벌 투자 전략으로 투자영역과 자산규모를 확대했다. 해외 영업거점 확충과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통해 미래 수익원 확보와 투자위험 분산 관리를 실현함으로써 한국 금융의 새로운 비즈니스 영토를 개척했다. 2021년 9월 미래에셋은 현재 세계 15개 지역에서 34개의 현지 법인과 사무소를 통해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영미권과 ▲중국, 홍콩, 대만 등 중화권 ▲브라질, 인도, 베트남 등 이머징 국가에 진출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미래에셋 해외법인은 증권 위탁매매, 기업금융(IB), 프라임 브로커리지 서비스(PBS) 등 현지 사업을 영위하는 동시에 해외 금융상품을 국내에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미래에셋은 이머징 마켓 최고의 주식 투자 전문그룹으로서 한국 투자자들에게 특정 지역과 업종을 테마로 하는 펀드를 소개했다. 글로벌 금융지도를 더욱 넓고 촘촘하게 그려가는 미래에셋은 전 세계 36개국에서 1700개 이상의 상품을 판매 중이다. 해외 현지에 설정된 자산도 90조원을 웃돈다. 미래에셋이 지역별 특화 전략을 통해 시장변동성에 적극 대응한 결과는 실적 개선으로 나타났다.그동안 항상 빼어난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 창업한 미래에셋은 2000년대 초 닷컴버블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3차례 위기를 겪었다. 주가 하락기엔 어떤 운용사도 탁월한 수익률을 내기 힘들다. 2008년 인사이트 펀드의 투자 실패는 미래에셋의 쓰라린 경험이 됐다. ‘해외판 박현주 펀드’로 불리며 인기를 모았던 인사이트 펀드는 중국의 거품경제 붕괴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겹치며 운용자산의 가치가 폭락해 투자자에게 손실을 입히고 ‘반토막 펀드’라는 오명을 입기도 했다. 인사이트펀드는 7년이란 인고의 시간을 지나 플러스 수익률로 돌아섰다. “실패하더라도 모든 경험은 한국에 남는다”는 신념이 실적으로 화답했다. 고통과 실패의 경험으로 쌓은 장기투자 노하우는 결국 든든한 보약이 됐다. 2019년 3월 박회장은 미래에셋그룹 임직원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사내 편지를 썼다. “위기는 미소 띤 얼굴로 찾아온다. … 항상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고 글로벌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길 바란다.”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은 미래에셋 금융그룹 해외법인의 헤드쿼터 역할을 한다. 홍콩법인은 원 아시아 에퀴티 세일즈 조직을 통해 해외투자자 대상 브로커리지 서비스를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각 지역으로 확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홍콩법인은 해외 IB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럽 최대 바이오 업체인 바이오엔텍의 나스닥 상장, 아시아 최대 물류 플랫폼 기업인 ESR의 홍콩 상장 등 글로벌 IPO 주관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미래에셋증권의 베트남법인도 2007년 베트남 최초 외국계 종합증권사로 출범한 이래 10년 만에 현지 최대 증권사로 도약했다. 미래에셋은 2018년 미국의 상장지수펀드(ETF) 전문 운용사인 ‘글로벌X’ 인수를 통해 글로벌 자산운용 역량 강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캐나다 호라이즌스 ETFs 등 해외 조직이 상장시킨 ETF는 2021년 9월 말 기준 368개에 달한다. 미래에셋의 글로벌 ETF 순자산은 87조5000억원으로 글로벌 10위권 운용규모를 자랑한다. ‘아시아그레이트컨슈머’와 ‘아시아섹터리더’ 펀드는 미국에서 설정된 아시아 펀드 가운데 3년 수익률 최상위권을 유지했다.해외사업은 미래에셋의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다. 미국과 캐나다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타이거 ETF 수수료는 해외법인 실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래에셋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투자전문인력을 바탕으로 새롭고 혁신적인 테마형 ETF를 꾸준히 공급한 것이 운용자산 증가, 실적 개선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낳은 것이다. 또한 국내 펀드시장의 성장 둔화와 과열된 수수료 경쟁 속에서 돌파구를 폭이 넓고 깊이가 깊은 해외 시장의 역동성과 가능성에서 찾은 전략이 주효했다.금융수출의 선봉장, 미래에셋은 이제 국내보다 해외에서 돈을 더 많이 버는 회사가 됐다. 한국 금융을 세계에 수출하겠다는 박 회장의 집념이 꽃을 피운 것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 해외법인의 당기순이익은 2021년 3분기까지 265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국내법인의 누적 순이익 2437억원을 웃도는 규모다. 미래에셋그룹은 미래에셋증권은 물론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생명 등 모든 계열사가 해외 시장에서 각자도생한다는 목표로 전략을 펼친다. 박 회장은 해외경영에 관해 “이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진입한 느낌이 든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속도는 한층 빨라질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명했다.미래에셋은 국내 투자 중심이던 한국 금융권에서 글로벌 투자를 선도해왔다. 미래에셋은 2006년 중국 상하이 푸둥 대형 빌딩(미래에셋상하이타워) 인수를 시작으로 2011년 세계 최대의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를 보유한 아큐시네트, 2013년 호주 ‘포시즌스호텔’과 커피빈 미국 본사, 2019년 프랑스 파리 ‘마중가타워’ 빌딩 등 해외 기업과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미래에셋의 M&A는 지역과 산업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 각 지역의 시장동향과 투자정보를 신속히 파악해 다양한 글로벌 투자기회를 찾는다. 박현주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1년에 300~400개 딜이 우리에게 들어온다. 대부분 해외 매물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호텔과 오피스를 중심으로 대체투자를 진행해온 미래에셋은 물류센터를 비롯해 병원, 리스 등으로 대체투자를 확대해 나간다. 특히 글로벌 물류 인프라스트럭처는 코로나19 대유행 여파가 언택트 쇼핑과 이커머스 시장의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투자처로 주목받는다.글로벌 혁신기업에 대한 투자는 알토란 같은 성과를 냈다. 미래에셋은 그동안 중국 드론제조업체 DJI, 동남아시아 차량공유서비스 그랩, 인도 이커머스 식품업체 빅바스켓, 인도 차량 공유서비스 올라, 그리고 미국 대체육류 개발 제조업체인 임파서블 푸드에 투자했다. 그리고 인도의 조마토, 인도네시아 전자상거래기업 부깔라팍 등이 상장하자 엑시트(투자금 회수)하면서 해외법인 실적향상에 보탬이 됐다. “의학이 발전하고 고령화가 심화하면서 헬스케어라는 새 산업이 등장했다. 중국 인구가 15억 명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헬스케어 분야에 관심을 두고 투자해야 한다.” 박 회장은 2018년 미래에셋생명 사내 방송에서 글로벌 투자 포트폴리오를 부동산 시장 호황 이후를 내다보며 경쟁력을 갖춘 회사를 중심으로 꾸리는 것이 미래에셋의 방향성이라고 강조했다. 미래에셋은 네이버, 셀트리온, GS리테일 등 주요 기업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한 글로벌 신성장 투자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이버와의 지분 교환이다. 미래에셋증권과 네이버는 2017년 상대방 주식을 5000억원 규모로 매입하면서 글로벌 진출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당시 박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의 아이디어를 지닌 회사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면서 “미래산업을 하는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M&A)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미래에셋과 네이버는 1조원 규모의 ‘미래에셋·네이버 아시아그로스펀드’를 공동 조성했고 이 펀드는 세계 최대 기업 간 거래(B2B) 플랫폼에 투자를 진행했다.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이고, 인재와 시스템이 기업과 국가의 성패를 좌우한다. 미래에셋은 돈보다 사람에 투자한다. 미래에셋은 역량 있는 경력자를 대거 영입한다. 미래에셋은 권한 위양과 다양한 전문가의 지혜를 모으는 인재경영을 지향한다. 동시에 글로벌 투자 전문가 양성 등 다양한 인재육성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미래에셋그룹은 2021년 11월 대대적인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미래에셋 창립멤버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는 금융투자업계 최초로 전문경영인이 회장으로 승진했다. 박현주 회장은 글로벌경영전략고문(GISO)과 홍콩법인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해외 시장 진출과 인수·합병 등 그룹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미래에셋자산운용 임원 수는 113명으로 늘었다. 전체 임직원 542명 중 20.85%가 임원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이처럼 임원 수를 크게 늘리며 공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박 회장의 사업방침에 따른 것이다. 박 회장은 유능하고 젊은 직원이 회사를 이끌어 나가도록 하기 위해 직위나 보상 등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왔다. 스카우트 과정에서 유능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임원 승진을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임원 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다른 회사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특히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자산배분, 부동산투자개발 등 주요 사업을 부문별로 나눠 각각 대표를 두는 ‘부문 대표’를 23명으로 늘렸다. 실질적 책임과 권한을 갖는 대표 수를 늘려 임원들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포석이다. 그동안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스타급 선수’로 이름을 날리는 펀드매니저를 지속적으로 영입해왔다.경쟁사보다 ROE가 낮아 막대한 자본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는데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박현주 회장은 평소 “회사가 얻은 열매를 작은 부분이라도 전체 직원들과 나누려고 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배려가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공헌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98년 미래에셋육영재단을 세우고 2000년에는 사재 75억원을 출연해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오래전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설립 이후 20년 동안 재단의 장학사업과 글로벌 문화체험, 경제 및 진로교육 등 인재육성 프로그램에 32만 명이 넘는 학생이 참가했다.2021년 3월 기준 해외교환 장학생 5939명, 국내 장학생 3578명, 글로벌 투자 전문가 장학생 124명, 글로벌 장학생 124명 등 총 9641명의 학생이 미래에셋의 지원을 받았다.미래에셋 금융그룹이 세계적인 자산운용사와 글로벌 투자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이머징마켓을 넘어 선진국 금융시장을 포괄하면서 깊이 있는 자산운용서비스와 글로벌 네트워크 역량 강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 동시에 신규 비즈니스 확충과 수익성 강화로 자기자본이익률(ROE) 제고를 통해 은행과 차별성을 키우는 초대형 금융투자회사로 거듭나야 한다. 예컨대 미국의 대형 IB인 JP모건, 모건스탠리 등은 100조원이 넘는 자기자본에도 ROE가 10%를 상회하는 호실적을 보이고 있다.미래에셋의 경우, 늘어난 자본만큼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2020년 말 기준 글로벌 증권사의 ROE는 JP모건이 10.7%, 모건스탠리가 11.4%, 골드만삭스는 8.5%를 각각 기록했다. 미래에셋증권은 2020년 8.94%로 비교적 양호한 ROE를 달성했지만 자본이 늘어날수록 수익성 제고 부담도 커진다. 미국에서 주식소수점거래 등으로 혁신에 앞장선 증권사 찰스슈와브는 미래에셋증권과 비슷한 연매출 100억달러(약 11조원)를 올리면서도 14.2%에 달하는 높은 ROE를 기록했다.세계적으로 고객자산관리(Wealth-Manage ment)를 잘하는 증권·자산운용사가 최고 금융사로 인정받는다. 회사 규모와 별개로 고객에게 높은 수익률을 돌려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빅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보 어드바이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금융투자 분야에서도 인공지능(AI) 기술 인프라 구축과 AI를 활용한 자산관리기법의 고도화 등 혁신적인 서비스 개발도 요망된다. 또한 M&A나 상장(IPO) 업무에서 저가 출혈 경쟁이 아닌 전문 서비스를 펼치면서 합당한 수수료를 받는 금융투자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국내에서 미래에셋증권은 은행과의 진검승부를 앞두고 있다. 초대형 IB 비즈니스 가운데 발행어음 사업과 종합투자계좌(IMA) 사업 전개에 주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천신만고 끝에 따낸 발행어음 사업을 ROE 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투자금융업계 최초로 종합투자계좌(IMA)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IMA는 증권사가 원금을 보장하면서 고객 예탁금을 운용해 은행 금리 이상 수익을 지급할 수 있는 통합계좌를 말한다. IMA는 별도의 한도 없이 고객예탁금 및 기업금융 사업을 키울 수 있어 사실상 은행과 같은 예금·대출 업무 수행이 가능해진다.IMA 업무 허용은 한마디로 금융 영역 파괴의 신호탄인 셈이다. 미래에셋이 인터넷전문은행 진출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IMA 사업을 통한 예금·대출 업무 진출 가능성을 내다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래에셋은 인공지능, 전자상거래와 금융결제 서비스 역량을 갖춘 네이버와 협업을 통해 예금·대출 업무를 강화한다는 방침이어서 향후 금융전략 추진방향이 주목된다.[홍기영 월간국장/경제학박사][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6호 (2022년 1월) 기사입니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에 대한 정보 박현주 미래에셋

다음은 Bing에서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 기업비사
  • 기업
  • 미래에셋
  • 박현주
  • 대한민국
  • 펀드
  • 바람
  • 펀드바람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YouTube에서 박현주 미래에셋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업비사 31회 미래에셋 박현주, 대한민국에 펀드바람을 일으키다 | 박현주 미래에셋,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