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수도 | 【16】🇲🇳Mongolia Ulaanbaatar 시내 구경 #울란바토르 #Ulaanbaatar #Улан-Батор 46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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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Mongolia) – 국가/지역 검색 | 외교부

국가/지역 검색 · 기본정보. 일반사항. 국명 : 몽골(Mongolia); 수도 : 울란바타르 (Ulaanbaatar, 면적 서울의 7.7배); 인구 : 335만명 · 정치현황. 정부형태 : 민주공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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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ofa.go.kr

Date Published: 4/16/2021

View: 8541

울란바타르

울란바타르 (Улаанбаатар), 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는 36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이다. 울란바타르는 1639년 할하(외몽골)의 투세트칸 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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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ikitravel.org

Date Published: 3/16/2022

View: 8474

인구 절반이 텐트에서 살아야 하는 도시 – 한국일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의 게르촌에 사는 사람들은 상하수도, 난방시설 없이 겨울을 나야 한다. · 매주 사흘 그것도 오전만 업무를 보는 주 몽골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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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ookilbo.com

Date Published: 6/13/2022

View: 8660

몽골(Mongols) – :::신발끈여행사:::

오늘날에도 몽골은 지구의 끝자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인 올란바토르(Ulaan Baatar)외곽에서는 다른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세기에 발을 들여 논 것이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shoestring.kr

Date Published: 4/22/2021

View: 7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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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Mongolia Ulaanbaatar 시내 구경 #울란바토르 #Ulaanbaatar #Улан-Бато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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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몽골 수도

  • Author: 간영훈 iama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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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xlz2U5BU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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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몽고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몽골국(몽골어: Монгол Улс 멍걸 올스 (도움말·정보) , 음차 : 몽고(蒙古)), 약칭 몽골은 동아시아의 내륙국이다.[1] 가장 큰 도시는 수도인 울란바토르이고, 정치 체제는 민주 공화국이다. 1992년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다. 1,564,116km2의 넓은 면적으로서 카자흐스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내륙국이나, 인구는 약 300만 명으로 적다 . 13세기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했으며,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 칸 시절에는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고, 이후 명나라가 중원을 탈환하게 되면서 몽골 초원지대로 물러났다. 이후 1688년 ‘외몽골’로 불렸다.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1920년 철폐되었고,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1년 제2차 혁명을 일으켜 현재의 형태로 독립하였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접하여 있다.

명칭 [ 편집 ]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 올스(Монгол Улс) 즉, 몽골국이다. “몽골 올스”에서 “몽골”(Монгол)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민족 이름을 뜻하고 “올스”(Улс)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 직역하면 “몽골 민족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간혹 몽골을 몽고(蒙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다. 그런데 몽골 제국 원나라의 승상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편찬을 주도한 요사에는 1차례, 금사에는 36차례, 송사에는 6차례 몽고(蒙古)의 용례가 확인된다.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역사 입니다.

고대로부터 몽골 초원에는 흉노, 돌궐 등 여러 유목 민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흉노와 돌궐 같은 튀르크인 정복자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몽골로 건너가 동쪽의 몽골인을 정복 지배했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흉노와 돌궐을 몽골의 역사로 배운다. 고대 몽골인들은 사서의 기록에서는 몽골이라는 단어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튀르크인의 돌궐족들이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몽골 고원이 돌궐제국의 침략을 받아 정복당하면서 그 지배하에 있었다. 튀르크인들이 몽골을 정복하면서 원시 몽골인들은 튀르크인들의 몽골 지배하에 그 일원으로서 존재하였고 대부분 튀르크화되어 언어적으로도 튀르크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2] 몽골족의 직계 조상은 몽골 초원 동부에 존재한 동호족 계통인 더더우위, 몽올실위인데 이들은 흉노가 몽골초원을 정복했을 때와 돌궐이 유연을 정복했을 때부터 튀르크에 예속되어 있었다. 거란은 고구려의 지배 하에서 살고 있었으며 최근 몽골 다리강가에 고구려의 성벽과 고분이 발견되어 고구려인들이 몽골의 동부 지역의 몽골인들도 지배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문헌의 관점에서는 몽골이라는 이름은 원조비사에 나오는 몽올실위와 연관성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며, 몽골인은 더더우위와 몽올실위의 후계 민족이라고 볼 수 있겠다.

1206년 보르지긴 테무친이 몽골 지역을 통일하고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 제국이 건설되었으며, 이들은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이후 대원, 킵차크 칸국 등의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면서 14세기 말에 몽골계 제국 거의 대부분이 멸망하였고, 청나라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자 외몽골은 기회를 잡고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1913년 티베트와 우르가(울란바토르)에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몽골은 1924년 11월 26일부터 현재까지 독립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24년 11월 26일에는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몽골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시 소련을 지원하였다.[3] 1991년 말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으며, 1992년 2월 13일에 복수 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또한 계획 경제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하였다.

자연 환경 [ 편집 ]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 속한다. 국토는 4가지 성격의 지대로 나뉜다. 서쪽은 알타이, 항가이라고 하는 큰 산맥, 남쪽은 바위와 모래가 전부인 고비사막, 동쪽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 그리고 북쪽은 후브스굴 호와 사람이 뚫고 지나가기 불가능한 시베리아의 남쪽 산림(타이가)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고도는 평균 1,500m 정도다.

기후 [ 편집 ]

고비사막의 영향을 받아 매우 건조하다. 일년 평균 강수량이 388mm 정도다. 고비사막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중국, 한국의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 [ 편집 ]

1924년부터 1991년까지는 소련의 지원을 매우 많이 받은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의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를 사실상 폐기하였고 대신 민주공화제를 채택, 총리와 대통령의 권한을 나눈 정치제도로 확립된 이원집정부제로 연임이 가능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국민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헌법을 채택하였다. 나차긴 바가반디 대통령에 이어 2005년부터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정권을 이양받았으나 2009년 몽골 대통령 선거에서는 빈곤층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당의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전 총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정권교체를 이룩했으며, 2017년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과거 삼보 선수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던 할트마긴 바툴가가 결선 투표 끝에 승리하여 두번째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2017년 7월 10일부터 취임함으로써 현재는 동거 정부가 수립되었다.

행정 구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행정 구역 입니다.

몽골의 행정 구역

몽골은 21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군사 [ 편집 ]

18세~25세까지의 남자들은 1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거나 학생, 질병이 있는 자 등은 징병이 면제되는데다가 현역복무와 병역세 납부 중 양자택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복무율은 낮다.

몽골에서 병역세는 159만 투그릭(한화 70만원 상당)이며 이 돈을 병역세로 납부하면 병역의 의무가 사라진다.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수비대, 전투경찰(경찰소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내륙국이라 해군이 없다.). 국방예산은 약 2.2%정도로 세계평균보다 약간 낮다.

몽골 국군(통합군): 12,000여 명 국경수비대: 8,500여 명 전투경찰(경찰): 20,000여 명

과거 몽골군에는 해군이 있었으며 해군사령관 대위 이하 총병력이 7명에 불과해서 페지되었다.

경제 [ 편집 ]

2012년 기준 1인당 명목 GDP 예측값은 $3627, PPP는 $5371이다.

몽골 상공회의소 본회의장

인구 [ 편집 ]

몽골의 인구는 2016년 기준 3,080,000명[4]이다. 넓은 영토에 비해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어 전세계의 공식 독립국 중 가장 낮은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다.

언어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어 입니다.

몽골어가 공용어다. 러시아어는 공산주의 시절에 제2국어 수준으로 널리 가르쳤던 언어였다.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2007년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몽골을 방문한 이후, 다시 중요한 언어로 각광받고 있다. 서쪽에는 소수의 카자흐족들이 카자흐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과의 활발한 외교관계의 영향으로 한국어, 일본어를 배우는 몽골인들도 존재해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중국과 가까우므로 중국어도 필수 과목으로서 가르치기도 했다.

몽골어는 알타이제어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몽골민족이 과거에 사용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몽골계 언어 전반을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는 위구르계 몽골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어를 뜻한다.

현재 몽골어는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사용 지역 [ 편집 ]

사용지역은 몽골을 중심으로 중국 변경지구, 아프가니스탄, 볼가강(江) 유역 등 광대한 지역에 미친다.

현대 몽골어는 동서의 대방언군(大方言群)으로 나뉘고 그 밖에 약간 고립된 방언이 있으나, 지역적 언어차는 별로 심하지 않다. 그러나 2, 3개의 고립된 방언은 어형(語形) 변화가 심하여 다른 방언과의 차이가 크다.

몽골어를 대표하는 방언은 동(東)몽골방언군에 속하는 할하어 계(系)의 언어로 현재 몽골 전지역의 공통어 구실을 한다. 할하는 옛부터 몽골제국, 원나라의 지배 계층이였다. 차하르는 몽골 제국이 남하하여 중국을 정복할 때 내몽골에 살던 몽골계 부족으로 하층 계급이다. 그래서 몽골어를 대표하는 방언은 할하어이며, 차하르어는 거의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몽골어는 13세기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중세 몽골어 시대, 17세기부터 현대까지의 근대 몽골어 시대 등 두 시기로 나뉜다.

문화 [ 편집 ]

종교 [ 편집 ]

몽골인의 주된 종교는 티베트 불교로 역사적으로는 티베트와의 관계가 깊다. 하지만 1992년 선거로 민주화된 이후 개신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이 소수 있다. 신앙자 분포는 불교 53%, 이슬람교 3%, 토속종교 3%, 기독교 2%, 무종교 39%이다.

스포츠 [ 편집 ]

몽골의 전통 무술 브흐는 몽골의 국기(國技)로 정착되어 있다. 체구가 건장한 청년들은 일본에 가서 스모 선수로 등단하기도 한다.

축구가 인기 있으며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교통 [ 편집 ]

몽골 횡단 철도(The Trans-Mongolian Railway)가 시베리아의 울란우데(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에서 울란바토르를 거쳐 중국의 얼롄하오터 시를 잇고 있다. 얼롄하오터에서는 선로가 바뀌며 베이징까지 잇는다. 이 철도의 몽골 내 노선은 1,110km다.[5] 그 지선 하나는 다르항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에르데네트까지 잇고, 또 다른 지선 하나는 울란바토르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바가누르(몽골어: Багануур)를 잇는다. 그 외에 처이발상 철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접속되어 있다. 몽골정부는 이 두 철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6] 또한 초이발산과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노선도 추진되고 있다.[7] 몽골 철도의 총 길이는 1,810km이고, 철도 밀도는 11.5km/10,000km2로, 이웃한 중국에 비하여 0.12배에 불과하다. 자동차 도로는 잘 발달되어 국내 항공로와 마찬가지로 각 주에 통해 있다. 국내 항공로는 중국,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다.[8] 몽골의 차량은 약 21만대다.

항공 [ 편집 ]

수도 울란바토르에 몽골 유일의 국제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이 있다.

대외 관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대외 관계 입니다.

같이 보기 [ 편집 ]

출처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몽골 [ 편집 ]

대한민국 [ 편집 ]

해외 [ 편집 ]

기타 [ 편집 ]

몽골의 역사 이전 시대 몽골

1992년 2월 13일 ~ 다음 시대 몽골 인민 공화국

01-01 몽골_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안녕하세요!

진수포토의 박진수입니다^^

저는 아름다운 순간을 담기 위해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고

이제 그 순간의 기록을 이곳 두피디아에 작성하려합니다.

순간순간을 담아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작가명 역시 진수포토라 하였고

인스타그램에서 jinsu.foto라 검색하시면 더 많은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몽골을 첫 시작으로 하여

라오스, 홍콩, 호주, 뉴질랜드 등

다양한 나라의 잊지못할 순간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 앞으로의 여행기

예쁘고 즐겁게 봐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Insta @jinsu.foto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별들이 수놓여진 은하수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몽골행을 택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면적은 한반도의 7.4배나 되지만 인구는 약 300만명뿐인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국가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국토의 80%가 목축지로 구성되어 있고

이어서 산림이 10%, 경작지가 1%를 형성합니다.

이 말은, 즉, 그 넓은 땅 위에 도시를 형성하는 곳은 전체의 10%도 안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국토의 90% 이상이 인간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그대로의 모습이 보다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몽골은 북반구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는 나라로 꼽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언젠가 몽골을 꼭 가보리라’

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수야, 여름 휴가 계획 짰니?”

“아니요, 아직 어디로 갈지 못 정했습니다.”

“그래? 그럼 너 나랑 몽골가자.”

“가겠습니다!”

함께 가자는 말씀에 저는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답을 했고

다음날, 친한 형과 함께 몽골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몽고가 아니라 몽골 또는 몽골리아

본격적인 몽골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몽골(Mongolia)과 몽고를 혼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몽고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북방 민족인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칭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고가 아닌 몽골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명칭입니다!

몽골은 고유의 언어인 몽골어를 주로 사용하며 표기 방식에 있어서는 키릴 문자를 사용합니다.

원래는 고유의 몽골어가 있었지만 1944년에 러시아의 키릴 문자가 차용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몽골어가 서서히 잊혀졌다고 합니다.

화폐의 단위는 투그릭(tugrik)이며 달러가 아닌 원화를 가져가도 손쉽게 환전이 가능합니다.

(2017년 07월 당시 1,000원 = 2,000투그릭)

대한민국 국민이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관광 비자가 필요하며 최대 90일까지 머무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몽골로 가기 위해서는 울란바토르의 칭기즈칸 국제 공항으로 가야만하는데

비행기 편 수(대한항공, MIAT)가 제한되어 있어 요금이 비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저가 항공사인 에어 부산이 취항하기 시작했고

신(新) 공항 건설이 완료되면 다른 저가 항공사들이 취항할 것이라 하니

티켓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해질 것이라 예상하는 바입니다. 본격적인 몽골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흔히 몽골(Mongolia)과 몽고를 혼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몽고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북방 민족인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칭하는 것이라 합니다.그렇기 때문에 몽고가 아닌 몽골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명칭입니다!몽골은 고유의 언어인 몽골어를 주로 사용하며 표기 방식에 있어서는 키릴 문자를 사용합니다.원래는 고유의 몽골어가 있었지만 1944년에 러시아의 키릴 문자가 차용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몽골어가 서서히 잊혀졌다고 합니다.화폐의 단위는 투그릭(tugrik)이며 달러가 아닌 원화를 가져가도 손쉽게 환전이 가능합니다.(2017년 07월 당시 1,000원 = 2,000투그릭)대한민국 국민이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관광 비자가 필요하며 최대 90일까지 머무를 수 있습니다.대한민국에서 몽골로 가기 위해서는 울란바토르의 칭기즈칸 국제 공항으로 가야만하는데비행기 편 수(대한항공, MIAT)가 제한되어 있어 요금이 비쌌습니다.하지만 최근에는 저가 항공사인 에어 부산이 취항하기 시작했고신(新) 공항 건설이 완료되면 다른 저가 항공사들이 취항할 것이라 하니티켓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해질 것이라 예상하는 바입니다.

울란바토르로 향하는 첫 걸음, 그러나 시작부터 난관

저는 라오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라오스 여행기는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라오스 꽝시폭포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몽골로 떠날 짐을 싸야한다는 생각에

배낭 속의 옷과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빨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돌린 빨래가 다 말라갈 때 쯤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윗옷 속에 고이 모셔둔 여권도 빨아버렸다는 것을…..

멘탈이 풍비박산 난 저는 단숨에 인천공항으로 향합니다.

인천공항 3층 F카운터 뒤에는 외교부 영사관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방문하면 긴급여권을 발급해주는데

기가막히게도 외교부 영사관이 문닫기 20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하게 됩니다.

어렵사리 단수여권을 발급 받기는 했으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한데

그 비자가 빨아버렸던 여권에 함께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하니 카운터의 직원분께서도

몽골에 입국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풍비박산났던 제 멘탈은 가루가 되어 소멸해버렸지요.

몽골에 도착하여 입국 심사대의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니

서류를 작성하고 새로운 비자를 발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장 늦게 심사를 받고 나왔으나

몽골 땅을 밟았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때의 짜릿함은 글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이와 같은 사건 덕분에 몽골 여행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고

현재 저는 3개의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ㅎㅎㅎㅎ

몽골로 떠나기 이틀 전,저는 라오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옵니다.(라오스 여행기는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라오스 꽝시폭포에서)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몽골로 떠날 짐을 싸야한다는 생각에배낭 속의 옷과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빨아버렸습니다.그리고 돌린 빨래가 다 말라갈 때 쯤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윗옷 속에 고이 모셔둔 여권도 빨아버렸다는 것을…..멘탈이 풍비박산 난 저는 단숨에 인천공항으로 향합니다.인천공항 3층 F카운터 뒤에는 외교부 영사관이 대기하고 있습니다.이곳에 방문하면 긴급여권을 발급해주는데기가막히게도 외교부 영사관이 문닫기 20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하게 됩니다.어렵사리 단수여권을 발급 받기는 했으나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몽골에 가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한데그 비자가 빨아버렸던 여권에 함께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다음날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하니 카운터의 직원분께서도몽골에 입국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하셨습니다.이 말을 들으니 풍비박산났던 제 멘탈은 가루가 되어 소멸해버렸지요.몽골에 도착하여 입국 심사대의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니서류를 작성하고 새로운 비자를 발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비록 가장 늦게 심사를 받고 나왔으나몽골 땅을 밟았다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행복하던지그때의 짜릿함은 글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이와 같은 사건 덕분에 몽골 여행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고현재 저는 3개의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ㅎㅎㅎㅎ

몽골에도 도시가 있고, 건물이 있고, 차가 다닌다

Wikitravel

울란바타르 (Улаанбаатар), 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는 36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이다. 울란바타르는 1639년 할하(외몽골)의 투세트칸 곰보도르지(1594-1655)가 시레트 차간 노르 호수 주변에 어르거(궁전이라는 뜻)라는 천막촌을 짓고, 자신의 아들 자나바자르를 위하여 궁전을 지어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곳은 오늘날 몽골국 우부르항가이 아이막에 있다. 1639년 당시 5살이었던 자자바자르는 외몽골 지역 라마교 수장으로 선포되었다. 이 천막촌은 그 후 오르혼강, 톨강, 셀렌게강 유역을 따라 25여 차례나 이동하면서 그 이름도 수 차례 변경되어, 지금의 몽골 수도 위치에 정착하고 이흐 후레라 불리게 되었다. 1911년 외몽골이 청나라에서 독립하고 나서 니슬렐 후레(수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몽골 혁명이 완성된 1924년(몽골인민공화국 선포)의 인민대회에서 혁명 영웅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타르로 개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구 [ 편집 ]

울란바타르는 몽골의 가장 큰 도시이다. 1956년에 몽골 총인구의 14.4%가, 2012년에 45.8%가 수도 울란바타르에 살고 있다. [2] 총면적은 272/km2이다. 몽골에 1990년부터 시장경제가 채택되면서 울란바타르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급격히 늘어갔고 게르촌(천막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울란바타르 총인구의 47.2%는 울란바타르에서 태어난 원주민이고 나머지 50%는 다른 지역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울란바타르 총 인구의 40%는 아파트에서, 60%는 게르촌에서 살고 있다. [3]

경제 [ 편집 ]

울란바타르는 몽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중심지이다. 총인구의 45% , 총업체의 65%는 울란바타르에 위치하고 있다.

교통편 [ 편집 ]

비행기 [ 편집 ]

칭기스칸 국제공항

기차 [ 편집 ]

은 ( IATA ) 울란바타르 도심에서 18 km 떨어져 있는 몽골의 허브공항이다. MIAT (Mongolian Airlines) 몽골항공사 운항 국제노선은 베를린 Berlin , 모스크바 Moscow ,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 서울 Seoul , 베이징 Beijing , 홍콩 Hong Kong , 싱가폴 Singapore , 오사카 Osaka , 도쿄 Tokyo 이다. [4] Hunnu Airlines 흉노 항공사 운항 국제노선은 중국 얼렌(二連) Erlian , 만저우리(满洲里) Manzhouli , 하이라얼(海拉爾)하이라얼 Hailar , 국내 노선은 호보드시(市), 올랑곰시(市), 초이발상시(市), 무릉도(市), 달랑자드가드시(市) 등이다. ( http://www.hunnuair.com/en/timetabled ). Aero Mongolia 아이러몽골리아 항공사 운항 국제노선은 중국 내몽골 자치구 후흐호트, 러시아 이르쿠츠크가 있고, 국내선은 울기(市), 올랑곰(市), 호브드(市), 무릉(市), 달랑자드가드(市) 등이 있다. Korean Air 대한항공사는 서울-울란바타 직항을 매일 운항하고 있다. 이외에 중국국제항공공사 Air China , 아에로플로트 러시아 항공사 Aeroflot , 터키항공 Turkish Airlines 등 항공사가 운항하고 있다.

타란스 시비리야 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way의 지선인 타란스 몽골리아철도는 울란바타르를 지나간다. 이 철도로 중국 북경에서 울란바타르를 걸쳐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Trans-Mongolian line . 울란바타르-중국 국경 도시인 얼렌(二連)Erlian행은 일주에 3-4회, 울란바타르 -러시아 이르쿠츠크행은 매일, 울란바타르-중국 북경행은 일주에 1회(목요일) 운행되고 있다.

자동차 [ 편집 ]

육로로 제3국가 주민이 입국할 수 있는 3곳이 있다. 러시아에서 셀렝게도(都) 알탄볼락 검문소를 통해서, 중국에서 도르노고비도(都) 자민 우데 검문소를 통해서, 카자흐스탄에서 차강노오르 검문소를 통해서 울란바타르에 들어올 수 있다.

볼 거리 [ 편집 ]

칭기스칸 광장

일반적으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도 울란바타르의 중심에 위치한 이 거대한 광장의 한 가운데 몽골 혁명의 영웅 수헤바타르의 동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21년에 울란바타르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몽골 혁명의 영웅인 수헤바타르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정부청사 앞면에 칭기스칸의 좌상(坐像)과 칭기스칸의 두 장군(Urlugs)의 기마상이 위치하고 있다. 칭기스칸 광장 주변에 거대한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및 증권거래소 등이 치하고 있다. [5]

자이산 전승기념탑은 도시 남쪽의 조그마한 언덕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러시아인들이 각종 전쟁에서 회생된 무명용사와 영웅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자이산기념탑 정상에서 울란바타르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간단테크치늘렌 사원

박물관 및 미술관 [ 편집 ]

문화 시설 [ 편집 ]

인구 절반이 텐트에서 살아야 하는 도시

2019년 2월. 몽골에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수도 울란바토르 중심의 중국대사관이었다. 매주 3회(월 수 금) 오전만 업무를 본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오전 9시 25분에 도착하니 이미 줄이 40m 가량 늘어서 있다.

울란바토르는 전 세계의 수도 중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힌다. 겁없이 양말을 한 겹만 신고 갔다가 발가락이 얼어붙은 채로 3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대사관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내 앞으로 사람들이 계속 끼어들었다. 일찍 와서 순서를 기다린 건 아무 소용이 없었던 셈.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리를 맡아주고 하는 걸 봐서는 이것이 몽골의 문화이겠다 싶었다.

한국도 사실 얼마 전까지 은행가면 번호표도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줄이 엉키고, 버스에 우겨 넣어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울란바토르 사람들도 그 시기를 거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장에서 받은 신청서를 꼼꼼히 작성한 뒤 준비해 온 서류(중국에서의 초청장, 인아웃 티켓, 통장 잔고, 몽골 비자 사본 등)를 제출했다. 그런데 아뿔싸! 창구 직원이 퉁명스럽게 서류가 완벽하지 않다며 되돌려 보냈다.

허탈함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 마주친 24세 몽골 청년 바타르 씨와 그의 친구들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다. 애초 몽골과 중국 사이엔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몽골인은 비자없이도 중국을 갈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대사관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타르는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방문 비자가 아닌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한 것. 몽골은 사회 곳곳에 아직 1990년대 이전의 사회주의 제도가 남아 있는데 교육 분야가 대표적이다. 유치원부터 고교 과정까지 학비가 무료이다. 게다가 대학도 1년에 100만원 들지 않는다. 대학 진학률은 80~90%에 이를만큼 높지만, 의무 교육이 끝나는 9학년 이후 더 이상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몽골 사람들은 인구 330만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로서, 언제든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 등에 동화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걱정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하 자원에 기대어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반드시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깔려 있다고 한다.

가장 많이 쓰고 비중이 큰 외국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어. 그리고 러시아어, 중국어가 뒤를 잇고 있다. 최근엔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의 중요도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자연스레 한글을 배우려 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 유학을 가려는 수요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 개방에 인색한 일본이나, 월급이 적은 러시아나 중국보단 한국에 가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울란바토르에서 한국말 쓸 때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구만 120만이 넘고, 등록되지 않은 인구와 외국인 등을 더하면 14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중 한국에서 일을 했거나 유학을 다녀 온 사람들이 많아 40만명 이상이 한국을 알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몽골에선 한국말을 하지는 못 해도 알아듣는 이들이 꽤 있으니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도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평균 월급은 약 400달러(약 44만원, 11일 현재 환율 기준). 일자리는 구하려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월급이 충분치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고 삶의 만족도가 높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외국에 나가 일하려 한다.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여러 차례 자금 지원을 받을 정도로 몽골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버는 수준은 거기서 거기인데, 버는 족족 소비로 연결된다. 저축 개념이 없기도 하고.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한국의 이마트가 2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마트를 찾았을 때 쇼핑객 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CU 편의점도 동네 곳곳에 점포를 확장하고 있다.

몽골은 생활에 필요한 제품의 절대 다수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데, 몽골 기업이 해외 브랜드와 손을 잡고 몽골 내수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 CU 편의점 역시 몽골 기업의 제안으로 들어온 사례다. 상품 진열대에 한국산 식품들이 진열돼있고, 평소 삼각 김밥과 컵 라면을 먹는 몽골인들을 보니 한국인지 몽골인지 헛갈릴 정도다.

우리 입장에서야 기업의 해외 진출은 반가운 일이지만, 반면 대형마트 입점으로 기존 재래 시장이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CU 편의점의 등장은 기존 골목 가게들이 생존의 문턱을 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해외에서 돈 벌어 귀국한 이들이 소비를 주도하다

몽골에서 만난 기억에 남는 이들 중 줄라(Zultsetseg)와 만레이(Manlai) 부부가 있다. 이들은 해외로 가려는 몽골 청년세대들이 늘고 있는 흐름을 대변하듯 몽골 학생들의 중국 유학을 돕고 현지에 연결해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업체는 중국의 10여개 학교와 유학원과 연결돼 있고, 그 규모는 계속 성장하는 중이라고 했다.

대화 주제가 자연스레 출산율 이야기로 옮겨갔다. 1970년대 중반까지 평균 7명 이상을 낳았던 몽골의 연간 출산율은 1976년도에 6명대로 떨어졌고 이후 꾸준히 하락해 2002년에는 2.14명까지 떨어졌다.

그렇지만 2010년부터 연간 경제 성장률이 15% 이상을 찍으며 규모가 커지고 출산율도 2014년 2.81까지 꾸준히 올랐다. 특히 이런 수치 증가에는 한국 등 해외에서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몽골인들이 귀국해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소비를 하는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매년 몽골 인구의 1%가량인 3만여명이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고 있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사거나 가게를 차려 사업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는데, 울란바토르 시내에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포함해 한식을 파는 가게가 100개 넘게 성업 중이라고 한다.물론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너무 많다는 게 현지인들의 반응이었다.

또 기골이 장대한 몽골 남자들이 한국에서 주로 이삿짐센터 등에서 일하며 노하우를 쌓고 돌아와 비슷한 성격의 창업하기도 한단다.

몽골의 인구가 330만으로 적지만, 1960년대 1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폭풍 성장이 이뤄진 셈이다. 몽골 인구는 머지않아 400만명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인구 증가는 국가 경제 규모를 키우고 성장의 발판이 되지만 크고 작은 문제점들도 가져오고 있다.

특히 교육 영역에서의 과밀화가 그렇다. 울란바토르의 학교들은 대게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구성돼 있다. 학급당 최소 40명에서 많게는 60명까지 묶여 있고, 과밀 학급으로도 해소가 안돼 2부제 또는 3부제를 하고, 심지어 책상 하나를 3명이 함께 쓰기도 한단다. 물론 여기엔 자식들을 좋은 학군의 학교에 다니게 하려는 부모의 교육열이 보태진 측면도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는 과밀화가 적다.

게르촌의 등장과 세계 최악의 공기 질

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살다보니 ‘게르촌’(빈민가)의 규모가 빠르게 커지는데 이 존재가 현재 몽골과 울란바토르의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르는 대대손손 수천 년을 유목민으로 살아온 몽골 사람들의 전통적 주거 형태다. 둥근 모양의 텐트인데, 200만원이면 구매가 가능하다.

그런 게르들이 초원이 아닌 울란바토르 외곽의 산 위에 설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10~15년 전만 해도 게르촌은 없었다고 한다. 도시 인구 자체가 늘고 있고, 추위를 이기지 못한 가축들이 얼어 죽거나 먹이를 찾지 못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유목민도 도시로 향하고 있다.

몽골말로 조드(zud)라고 하는데, 엄청난 혹한으로 인해 가축이 죽는다.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5축으로 총 6천만 두나 보유한 유목민들은 이들이 재산의 전부다. 공장식 축사를 하지 않고 유목을 하기 때문에 구제역에서 자유롭지 않아 수출은 하지 못한다. 1944년의 조드는 꽤 유명한 일화로 당시 700만 두의 가축이 죽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2010년 서북부에 위치한 옵스 지역에서 -55℃ 이하를 장장 55일 동안 기록한 조드로 인해 200만 두가 죽었다.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오지 않아 동물들에게 물을 먹이려 10킬로를 이동하기도 한다.

기록적인 수가 죽기도 하지만, 기록되지 않는 가축의 죽음도 많아 울란바토르의 외곽 산은 나무가 아닌, 게르와 벽돌집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도심 내로 들어와 월세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월세 부담이 없는 게르 생활을 택하게 되지만, 함께 감당해야 할 것이 수도와 전기의 혜택을 대체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을 곳곳에 설치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해야 하며, 지하수를 아끼기 위해 이따금씩은 사용이 금지되는 날도 있다.

게르촌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마을 여성들의 일감 찾기를 돕는 단체 ‘몽골의 미래’를 찾아 졸자야(zolzaya) 대표로부터 현재 몽골과 울란바토르가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시는 폭증하는 인구 문제가 심각해지자 주민등록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여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시 당국은 물론 정부 입장에서도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를 뒤엎는 검은 연기의 정체는

가장 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공기 오염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도시여서 공기의 이동이 쉽지 않고, 게르촌에 사는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석탄과 나무, 쓰레기 등을 계속 태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는 도시 전체를 뒤엎고 있다.

오후 6시만 되면 탄 냄새가 도시에 진동을 하는데 이를 오타라고 부른다. 특히 태우는 시간이 긴 폐타이어는 1개 당 500원이면 살 수 있어 소득이 없는 게르촌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연료다.

도시 인구 60% 이상이 모여 살고 있는 게르촌에서 집집마다 난방을 위해 폐타이어를 비롯해 여러 물질을 마구잡이로 태우고 도로에는 오래된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어 내면서 숨 쉬기 힘들 정도의 나쁜 질의 공기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마스크 제공 등 별다른 대책도 없어 해마다 공기 오염에서 비롯한 사망자 수만 1,500명을 넘을 정도라고 한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부정부패도 심각하다. 이를테면 시내에는 짓다 만 건물들이 여럿 눈에 띄는데, 상당수가 건축 비용이 어디론가 증발돼 버린 경우라고 한다. 몽골의 국회의원들은 대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도 함께 맡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여행사 등의 기업을 운영한다.

각종 사업 허가 등은 이권 다툼으로 변질되고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공익은 저 멀리 두고 오직 각자 주머니만 열심히 채우려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다.

게르촌에 아이들을 위해 지어지던 학교와 유치원 역시 공사가 중단됐고, 게르촌의 열악한 주거 상황 해결을 위한 대규모 임대주택 10만 채 보급 사업도 중간에 뒤집혔다고 한다. 이것만 계획대로 된다면 게르촌의 도시 빈민 40만명이 좀 더 나은 삶은 터전을 얻을 수 있고, 참기 힘든 공기 오염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여러 국회의원들이 직접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특히 이들은 객관성을 멀리한 채 자신에게 유리한 기사를 만들어내는데 힘을 쏟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몽골의 실제 모습은 반쪽짜리 민주주의라는 비판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반쪽 민주주의의 근거는 또 있다.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는 몽골은 특정 정치 세력이 총리와 장관 등 내각을 차지하면 상당수의 공무원들을 갈아 치운다. 이전 정부가 해놓은 사업도 손쉽게 뒤집힌다. 국가 운영의 안정성 면에서 볼 때 좋지 않은 상황이고 국민들은 정부를 쉽게 믿지 못한다.

더구나 공공 조직이나 공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느라 부정부패가 나타나도 나 몰라라 한다고 한다.

몽골 전체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는 도시 울란바토르. 그리고 도시 인구 2명 중 1명이 게르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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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Mongols)

통계 자료

Area: 1,566,000 sq km (610,740 sq mi)

면적: 1,566,000 sq km (610,740 sq mi)

Population: 2.5 million

인구 : 2천 5백만명

인종 : 칼카몽골족(86%), 카자흐인(6%), 중국인(2%), 러시아인(2%), 그 외 수많은 소수인종언어:몽골어, 튀르크어, 러시아어, 중국어

종교: 티벳불교, 회교, 샤머니즘

정체: 의회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몽골은 거대하고 대륙에 둘러싸여 있으며 프랑스의 3배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징기스칸(Ginghis Khan)과 쿠빌라이칸(Kublai khan)의 몽골 정복시대에는 몽골의 영토는 끝없이 넓었다. 20세기까지 몽골의 국토면적은 지금의 2배였으며 시베리아의 커다란 땅과 몽골내륙(지금은 중국에 속해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라이기도 하며 평균고도가 1580m(5180ft)이다. 많은 높은 산이 서쪽 멀리 위치해 있다. 몽골알타이누루(Mongol Altai Nuruu)들은 만년설로 덮혀 있고 그것 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타반보그드울(Tabanbogd Uul)(4370m/14,350ft)로서 몽골, 러시아, 중국보다 높이 솟아오른 멋진 빙하가 있다. 봉우리들 사이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 있다. 몽골의 다른 지역에는 많은 염수호 와 담수호가 있다. 가장 큰 호수는 홉스굴누루(khovsgol nurr)로서 전세계 담수의 2%에 해당하는 물이 있다. 몽골 남부의 3분의 1은 고비사막(Gobbi Desert)이 자리잡고 있다. 비록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에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풀이 양, 염소, 낙타 때들에게 충분히 공급될 정도로 있다. 몽골의 나머지 대부분은 초원으로 유명한 타키(Takhi)말의 원산지이다. 이 타키(takhi)말은 징기스칸이 정복을 위한 원정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말이다. 비록 1년에 260일이 맑은 날씨를 나타내고 ‘푸른 하늘의 땅’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의 기후는 매우 극단적이다. 대부분의 날씨가 긴 아 북극지방의 겨울기후의 영향을 받아 4월 말 까지도 고비(Gobbi)사막에서 눈을 볼 수 있다. 어떤 호수는 6월까지 얼어있다.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짧은 우기가 있지만 소나기는 짧고 조용히 내린다. 높은 고도 때문에 여름에도 밤에는 춥다. 울란바토르(Ulaan Baatar)의 겨울(10월부터 4월까지)은 길고 추우며 1월과 2월에는 기온이 -30℃(-22℉)까지 내려간다. 짧은 봄기간(5월에서 6월) 동안에는 끔찍한 모래폭풍이 발생한다. 역사

이미 알려진 대로 몽골인 들은 800년 전쯤에 문자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들의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음유시인들이 노래한 입으로 전해져 온 서사시로 기록하였다. 주변국가와의 많은 접촉(대부분 불행하였지만)으로 인해 몽골에 대한 역사가 주변국가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5000년 전의 중국왕조 역사에서 몽골인과 그들의 선조 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몽골인 들을 중국산 물건에 욕심이 많은 파괴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늑대와 흡사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고비(Gobbi)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500,000년 전 인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유목형식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먼저 농업이 시작된 것처럼 보이고 몽골의 짧은 여름에도 불구하고 밀농사를 유목생활과 병행하여 1000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하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선택한 직후에 말, 야크, 낙타를 길들였다. 몽골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당 왕조(618-907 AD)때 처음 사용되었다. 그 시대에 몽골에는 위구르(Uighurs)인과 튀르크인 들이 여러 개 의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다. 위구르인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몽골을 지배하게 된 후에 여러가지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중국의 당 황제를 도와주러 간 후 그들을 내부의 반란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위구르인들은 대부분의 몽골지방을 840AD에 키르그즈(kyrgyz)인(지금은 중국의 청진(xinjiang)지방에 살고있다)이 공격하기 전까지 지배하였다. 몽골에 남아있는 키르그주(kyrgyz)의 유물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이다 – 비밀역사 서사시와 그 후에 나타난 모든 몽골 문서는 1940년대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러시아시릴(Russian Cyrillic)문자로 대치하기 전까지 아래로 내려쓰는 서체로 쓰였다.

몽골은 북아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 동맹을 맺는 경우는 없었고 12세기말까지 같은 부족 내에서 자유로운 부족간 동맹이 더 많았다. 테무진(Temujin)이라는 20살의 몽고청년이 출현하여 대부분의 몽골부족을 연합하는 성과를 올린 것은 12세기 후반이었다. 1189년 그는 징기스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의미는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어떠한 몽골 지도자도 이처럼 효과적으로 몽골인 들을 통합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인 들이 몽골어로 징기스칸(Chinggis Khaan)을 경외시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징기스칸은 서양 난폭자 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철자가 틀린 것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에게 그의 이름은 무자비와 전쟁의 화신으로 남아있고, 몽골사람들에게 그는 강함, 유일함, 법과 명령으로 인식되어있다. 그는 양립하지 않는 부족들을 단합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으고(200,000명 이상)격심한 반목을 종결시켰으며 몽골인 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젊은 왕이었다. 징기스 는 오늘날의 카라코린(kharkhorin)에 수도를 세웠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 그가 신뢰하는 기병대(몽골의 우수한 타키말로 구성되었다)를 출병시켰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몽골제국은 베이징에서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대략 1216-94)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송 왕조(960-1279)를 멸망시키고 원 왕조를 출범시켰다. 쿠빌라이는 곧바로 몽골제국의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지하였다. 싸움을 위한 전쟁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쿠빌라이는 방대한 제국을 함께 더욱 굳건히 지키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몽골의 최고 전성기였다. 제국은 한국에서 헝가리까지 뻗어나갔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도달하여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고 유럽국가와 의 무역을 추진하였다. 빠른 속도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넓은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수천 필 의 말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몽골의 원 왕조는 기근해결사업을 모색하였고 시골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를 확장하였다. 지폐를 통화의 유일한 방식으로 시행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마르코폴로와 다른 여행자들이 중국을 방문하고 그들이 본 것에 대해 기술하여 지식이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몽골제국의 장대함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1294년 쿠빌라이칸 이 죽은 후 몽골은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계급층으로 평판이 매우 나빴으며 세금면제를 받았고 몽골제국은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로 넘쳐 났다. 14세기 중반 명 왕조 의 첫 번째 황제는 몽골을 베이징에서 추방했다. 60,000명 이상의 몽골인 이 몽골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원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들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전쟁은 자주 발발했으며 길고 긴 몰락의 시대가 이어졌다. 몽골이 불안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몽골의 오랜 적이었던 만주인 들은 청 왕조를 세웠다(1644-1911).그들의 군대는 용맹하였지만 만주인 들은 처음에 몽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았다. 사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몽골은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서쪽의 준가(zungar) 몽골 족은 동쪽의 칼카(Khalkha)몽골 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칼카족의 심각한 실수로 인해 준가 족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칼카족은 만주의 청 왕조를 끌어들여 군대를 파병하길 바랬다. 대부분의 몽골 족처럼 준가 족 병사들도 말 등 에서 활을 쏘는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만주는 머스킷(Musket)총과 대포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인 들은 전쟁을 수행조차 못했다. 1732년 준가 몽골 족 은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패배하였고 몽골은 만주차이나(manchu China)의 지배하에 놓였다. 만주족은 1800년경까지 정당하고 매우 합리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그 후에 청 제국은 점점 부패와 독재성을 띄게 되었다. 중국과 몽골의 소작농들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많은 세금을 징수 당했으며 약간의 반항에도 비인도적인 처벌을 당해야했다. 결국 몽골은 반란을 도모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1911년 중국의 청 왕조가 멸망하였을 때 몽골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였고 1911년 12월 1일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몽골은 젭준담바(Jebtzun Damba: 살아있는 부처)의 지도하에 신권정치를 지향하는 정부를 세웠다. 1915년 5월25일 몽골에게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카야카다조약(Kyakhta)에 몽골, 중국, 러시아가 서명했다. 1917년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은 몽골의 귀족정치에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은 1919년 몽골로의 진격명령을 내렸고 수도를 점령하였다. 1921년 초에 후퇴한 백러시아(White Russian)의 반공산주의 군대가 몽골로 진군했고 중국을 내몰았다. 야만적인 중국과 러시아군대로 인해 몽골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불타올랐다. 시베리아에서 백러시아군대에 비해 러시아 공산당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당에 도움을 청했다. 같이 힘을 합쳐 1921년 6월에 올란바토르를 다시 되찾았다.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명목상의 대표로서 계속 유지되었고 새롭게 구성된 몽골인민당(몽골역사에서 첫 번째 정당이었고, 그후 69년 동안 유일한 정당이었다)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1924년 11월26일에 몽골인민공화국(MPR)을 선포하였고 몽골은 세계에서 2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몽골 공산주의는 1920년대 후반 스탈린(Stalin)이 절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소련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충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숙청은 곧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앞잡이인 코루지니초이발상( Khorloogiyn Choibalsn)이 몽골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초이발상은 스탈린의 지휘에 따라 토지와 가축을 몰수한 후 소작인들에게 재분배하였다. 1932년 700명 이상(대부분 승려였다)이 투옥되거나 살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압류 당하고 공영화되었다. 농부들은 협동농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개인사업은 무너졌고 중국을 비롯한 외국무역상들은 추방당했고 모든운송수단은 국유화되었다.

정부의 종교반대운동은 특히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공포의 시간이 수도원에 도래하였고 수천의 승려들이 체포되거나 사형 당했다. 1939년에 27,000명 정도의 시민이 사형에 처해졌으며(그 당시 몽고 인구의 3%에 다다른다) 그중 17,000명은 승려였다고 알려졌다. 1980년대 초기에 소련정부가 침체상태로 흔들리고 있을 때 몽골은 잠빈밧몽크(Jambyn Batmonkh)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의해 재정비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밧몽크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 와 글라스노스트정책의(몽골에서는 일토드(il tod)로 알려졌다) 조심스러운 시도를 종용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었고, 1989년 완전한 외교상의 관계가 다시 확립되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몽골의 자치권인정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몽골에서는 소련의 붕괴정도에 신경을 쓰거나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0년 3월 올란바토르의 국회건물 앞 광장에서 과거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규모의 집회를 가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밧몽크는 권력을 상실했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났고 격렬한 시위와 항의는 계속되었다. 5얼에 정부는 헌법을 수정하여 1990년 6월부터 다수정당 선거제도를 허용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올란바토르의 유권자들은 다른 정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으나 외곽의 시골지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에서는 여러 명 의 젊은 민주주의 자들과 힘을 나누겠다고 발표하였다.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었다. 4년 후 1996년 6월30일 선거에서 몽골민주연합은 뜻밖에도 집권 몽골공산당(MPRP)을 참패시키고 75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공산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경제

국내총생산 GDP : US$ 5억 달러

1인당 국민총생산 GNP : US$ 1,468 달러

GDP per head: US$1970

일인당 GDP : US$1970

Annual growth: 6%

년간성장율: 6%

물가상승률: 53%

주요산업: 구리, 가축, 캐스미어 실, 울

주요수출국: 구 소련 과 동유럽, 중국, 호주 문화

몽골인의 생활방식은 유목생활이며 가축들의 이동경로와 친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초원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몽골 인은 이동하기 쉽고, 크며 흰 펠트천으로 만든 텐트의 일종인 게르(Ger)에서 산다. 저는 보편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즉, 문은 항상 남쪽을 향하게 트고, 뒤를 향하고 약간 서쪽에는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 있으며 저의 뒤쪽에는 연장자나 가치 있는 소유물을 두는 곳이 있다. 그리고 검정색의 벽에는 부처상과 함께 가족제단, 가족사진 그리고 옷장이 있다. 전통적이고 종교적이며 미신적인 수많은 규칙과 게르에 관련된의상에 대한 설명을 지방주민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몽골인 들은 티벳불교를 독실하게 믿고있으며 몽골과 티벳과의 연계는 깊고 오래되었다. 모든 독실한 몽골의 불교신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신성한 도시인 라사(Lhasa) 에 가보려고 시도한다. ; 티벳인들은 그들의 권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의 지원을 번갈아 가며 받고 있다. 1921년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몽골에는 110,000명의 라마승려가 700 여러 곳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930년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승려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현장으로 보내졌으며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약탈당했으며 모든 종교적인 제례와 축제는 금지되었다. 1990년이 되어서야 종교의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 후로 불교(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는 눈에 띄게 활기를 띄었다. 수도원은 다시 문을 열었고 심지어 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중 일부가 라마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수도원과 사찰(sum)은 항상 티벳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주목할 만한 소수 수니회교파(Sunni Muslim)는 대부분 카자크(Kazaks)종족으로 되어있는 몽골의 서쪽멀리 있는 지역에 발달하였다. 몽골의 그림, 음악 그리고 문학은 티벳불교 와 유목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타삼(Tsam)춤은 악마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한 춤이며 유목생활과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공산정권시절엔 금지되었다가 다시 충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전통음악에는 방대한 종류의 악기와 노래형식이 사용된다. 몽골 구미(Khoomi)노래는 매우 정성 들여 연습한 남성들이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사용하여 고음을 내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한번에 여러 개의 음을 발성하기도 한다. 고대 몽골의 전통곡예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통음악과 춤의 행위는 완벽하지 못하다. 공식언어인 몽골어는 우랄알타이어(Ural-Altaic)계 언어중 하나이며 필란드어, 터어키어, 카자흐어, 우즈벡어 와 한국어도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 1944년부터 러시아 시릴문자(Russian Cyrillic alphabet)가 몽골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으며 그것들 중 유럽언어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최근에서야 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문서중 하나이며 몽골의 위대했던 날들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몽골루니푸차토치얀(몽골의 숨겨진 역사)을 번역하였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몽골의 격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아침식사는 너 자신을 위해 먹고 점심식사는 친구들과 나눠먹고 저녁식사는 적들에게 적선하여라. 가장 잘 차려지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사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이다. 보통 기름기가 많은 끓인 양고기와 밀가루가 식탁에 올라오며 때때로 약간의 낙농식품과 쌀이 곁들여 지기도 한다. 몽골 서부의 카자크족의 식사에는 말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다. 몽골인들은 차를 매우 즐겨 마시며 일반적으로 수테차이(suutei tsai (소금차))가 있다. 아르히(arkhi)(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가축들이 그들의 집을 만드는 기간동안에는 발효시킨 말 우유에 3%의 알콜을 넣어 만드는 아이락(aikag)을 양조한다. 많은 몽골인들은 이것을 증류하여 알콜 함량이 12%로 증가한 쉬밍아르히(Shimiin Arkhi)를 만든다. 축제 및 행사

연중 가장 큰 행사는 나담축제(Naadam Festival)로서 에린거반나담(eriyn gurvan naadam)으로 알려져 있고 레슬링, 활쏘기, 경마의 “사내다운 스포츠”를 펼친 후 열린다. 축제는 보통 7월 11일부터 13일 사이에 전국에 걸쳐 열리며 1921년 몽골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행사는 축제의 첫날과 둘째 날 에 주로 열린다. 차강사르(Tasgaan Sar(백월))은 1월이나 2월에 있는 음력신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끔찍한 겨울철을 보낸 후에 몽골인 들은 3일 동안 많은 음식과 술과 노래로 축제를 여는 것이다. 여행자 정보

비자: 어는 국적의 사람이든지 출•입국 비자는 필요하다.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초대되거나 몽골인, 몽골회사 또는 주거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후원을 받아야 하며, 또는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에 참여하여야 한다. 어떤 상담소나 영사관에서는 다른 곳보다 까다롭지 않은 겨우도 있다. 비자 수수료는 US$25정도이다.

주의해야할 질병: 브루셀라병, 콜레라, 수막염, 선페스트

시간: UTC/GMT+8시간; 우스코브드(Uus Khovd)와 같은 바얀올지(Bayan-olgii), 우브스(Uvs) 와코브드의 서부지역-UTC/GMT+7시간

전기: 220V/50Khz

도량형: 미터법(환산표를 참고하여라 경비 및 환전

Currency: togroog (T or MNT)

통화 : 투그릭(togroog)(T or MNT)

일반경비

저렴한 식사: US$3-5

일반 식사: US$5-10

고급 식사: US$10-20

저렴한 숙소: US$5-10

일반 호텔: US$10-20

고급 호텔: US$20이상 만약 관광상품을 통한 여행을 한다면 하루에 US$100 정도를 쓰게 될 것이다. 관광상품과 똑 같은 풍경, 같은 숙소, 같은 장소를 혼자서 여행할 경우 하루에 US$80으로 관광할 수 있다. 비용을 개인지프차 와 야영에 지출하면 값비싼 저에서 지내는 것보다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숙박과 식사는 하루에 최소 US$10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2배정도의 예산을 짜두는 것이 좋다. 시골지방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호텔에 머문다면 하루에 US$15가 소비될 것이고 텐트를 가지고 야영을 한다면 하루에 US$7정도 소비될 것이다. 미국 달러로 된 여행자수표와 약간의 현금을 미국달러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몇몇의 호텔과 공항에서는 편리하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나면 신용으로는 어떠한 것도 살 수 없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8년 이전에 발행된 미국달러는 사용할 수 없다. 아마도 울란바토르의 고급식당과 호텔에서는 필수적으로 10%의 세금이 징수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지역에서는 계산서에 세금을 포함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세금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는 곳도 있다. 고급식당에서는 봉사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저렴한 물건은 공공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몽골현지인 보다 많은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여행 시기

여행시기는 보통 5월에서 이른 10월까지이며 울란바토르는 지독한 추위를 견딜수 있다면 연중 방문할 수 있다. 이른 7월에 몽골의 남부지방은 최적의 날씨를 보이며 또한 몽골의 나담 축제가 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가 울란바토르의 부적절한 숙박시설과 형편없는 교통수단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6월과 9월은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이고 많지 않은 방문객이 있다. 고비사막을 가기에 가장 좋으며 뜨겁지 않은 시기는 9월과 10월이다. 10월 중순과 3월 중순 사이에는 눈보라 와 심한 추위로 비행기가 결항되고 도로가 끊길 수 있으며 몽골의 교통수단이 운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주요 여행지

울란바토르

외국인들에게는 UB라고 불리는 몽골의 조용한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이제는 한물간 1950년대 유럽풍의 도시형태와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구 소련제 자동차와 버스들은 서서히 새로운 일제 자동차와 버스로 교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들이 거리를 거닐고 염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척이며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몽골의 벼락부자들과 거리를 함께 거닌다.툴(Tuul)강을 따라 세워졌으며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울란바토르는 공산국가형식의 고층아파트건물이 있는가 하면 약 250,000명의 지역주민이 도시주변의 확장된 게르가 밀집한 교외지역에 살고 있다. 펠트천으로 만들어진 게르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가지고 있어 특히 봄철에 심한 바람을 막아준다. 지형 상으로 산중턱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기에 매우 좋으나 겨울철에는 공해로 인해 보기 어려우며 기온이 상당히 내려간다. 도시의 중심은 수헤바타르(Sukhbaatar) 광장이다. 이곳에서부터 1921년 혁명의 영웅인 뎀디니수헤바타르(Damdiny Sukhbaatar)가 중국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광장은 또한 1989년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집회의 첫 번째 凉弩堅竪?한다. 평상시에 이곳은 조용한 곳으로 비둘기와 3류 사진사들만이 배회하고 있다. 회색의 주 의회건물이 광장을 마주하고있고 높이가 높은 현대적인 문화의 궁정(Palace of Culture)은 유용한 건물로서 인상적인 몽골아트겔러리와 다른 몽골문화에 관련된 전시물들이 있다. 광장에서 한 블록 북서쪽에 있는 자연사박물관(Museum of Natural History)은 만약 시골로 가려면 한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는 몽골의 지리, 동물, 식물 에 관해 것들이 전시되어 있고, 최근의 몽골역사에 대한 전시물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2개의 공룡 뼈로서 고비에서 발굴된 것이며 고기를 먹는 거대한타보사우르스(Tarbosaurus)와 이것의 첫 번째 사촌으로서 오리너구리 부리를 가진 초목을 먹는 작은 사우로포스(Saurolophus)이다. 자나바자르 미술박물관(The Zanabazar Museum of Fine arts)에는 회화, 조각에 관련된 훌륭한작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이중에는 존경받는 조각가, 예술가 그리고 승려, 자나바자르들의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탕카스(tangkas; cloth painting)와 불상 등과 같이 보기 힘든 종교적 색채의 전시물들이 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100여 개 이상의 티벳 불교 썸(sum; 사원)과 키이드(khiid; 수도원)가 50,000명 이상의 울란바토르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부분의 사원과 수도원 및 그것들에 속한 소유물들은 193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한 숙청작업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간단테친렌 키이드(Gandantegchinlen Khiid)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 하에 파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대략적인 의미로 ‘ 완전한 즐거움을 위한 최상의 장소’인 간단(Gandan)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웅장한 사원이 여러 개 있다. 이곳에 사는 150명 이상의 승려들이 많은 찬불과 의식을 행하며 사원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복트칸(Bogd Khaan)의 겨울별궁(Winter Palace) 역시 가 볼만한 곳이다 1893년과 1903년 사이에 세워진 이곳은 몽골의 8번째 복트칸(살아있는 부처)과 마지막 왕이 2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어떤 역사책을 보는 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트칸은 육식과 술등의 불경스러운 즐거움에 취해있었고 매독으로 맹인이 되었다고 쓰인 역사서가 있는가 하면 그가 신통한 예언자였으며 민족주의자라고 쓰인 역사서가 있다. 그가 1924년 죽었을 때 소련이 이끌던 몽골의 공산당은 그를 대신하는 어떠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게 금지하여 몽골의 불교지도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울별궁에는 6개의 사원이 있으며 복트칸에게 바친 선물들이 수집되어있고 박제한 동물들을 환상적으로 세워놓은 곳도 이곳에 있다.

Four Holy Peaks 신성한 4봉우리

울란바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봉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테스트시검(Testseegum), 친겔타이(Chingeltei), 송지노카이르칸(Songino Khairkhan) 과 바얀거크(Bayansurkh)산은 나침반상의 4위치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하이킹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이고 유명한 낙엽수림, 대초원과 매력적인 조류와 아이벡스(야생염소)와 검은담비 등과 같은 동물들이 있다. 테스트시검울(Tsetseegum Uul)은 가장 장엄한 봉우리로 취급된다. 테스트시검울의 높이는 2260m(7400ft)이며 울란바토르의 남쪽을 내려다보는 복트칸울(Bogdkhan Uul)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이곳으로의 여행은 6월 초순부터 9월 말까지 만 가능하며 입산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울란바토르에서 15km(9mi)정도 떨어진 복트칸국립공원의 입구에서 얻을 수 있다.산의 남쪽에서 테스트시검으로 가는 만츠쉬르키히드(The Manzshir Khiid) 코스는 가장쉬운 코스이다. 이 코스를 따라서 넓은 목초지, 암석, 오보스(ovoos)(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남겨진 돌무더기)가 많은 지역이 펼쳐져 있다. 자이산(Zaisan)코스는 가장 풍경이 좋은 코스이며 가장 어려운 코스이기도 하다. 6시간정도 걸리며 길을 따라서 위험스럽게 보이는 가파르게 놓인 돌들이 있다. 언제나 등산할 수 있으나 항상 허가가 필요하며 나침반과 많은 물, 음식, 보온용 옷가지 등을 가져가야 하며 갑작스러운 폭우와 냉풍으로 인해 여름에도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Khustain Nuruu Nature Reserve 쿠스타인누루 자연보호구역

쿠스타인누루(Khustain Nuruu)자연보호구역은 1993년에 몽골의 야생 타키말과 그것들이 살고있는 스텝초원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타키말은 가장 확실하게 인식되었고 명성을 얻은 몽골의 다양하고 진기한 야생동물의 상징이다. 프르체발스키(Przewalski’s)말( 이 말에 흥미를 느낀 첫 번째 사람인 폴로(Polo)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로도 알려진 타키말은 많은 가축이 떼지어 있는 시골을 돌아다닐 때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 대부분 멸종되었는데 밀렵꾼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마구 사냥하였고 개발과 가축들이 풀을 다 뜯어먹어 먹이가 부족해 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에 국제환경보호단체의 도움으로 많은 타키말 들이 쿠스타인누르의 90,000ha(222,300acre)에 달하는 넓은 특별보호구역과 고비 남쪽에서 다시 도입되었다. 이제 200필 정도가 이 보호구역과 야생에서 살고 있다.자연보호구역은 울란바토르에서 약 100km(62mi)북서쪽에 떨어져있다. 울란바토르의 남쪽으로 40km(25mi)떨어진 준모드(Zuunmod)에서 쿠스타인(Khustain)으로 여행하는 편이 쉽다. 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미니버스 그리고 공용택시가 울란바토르에서 준모드까지 운행된다. 준모드에서 자연보호구역으로 가려면 지프차가 필요할 것이다.

Kharkhorin (Karakorum) 카라코람

1220년 징기스칸은 카라코람에 그의 방대한 몽골제국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건물은 징기스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오그다이칸(Ogedai Khan)에 의해 완공은 되었으나 카라코람이 수도로서 사용된 것은 쿠빌라이칸이 지금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0년간만 사용되었다. 수도를 옮긴 후 몽골제국은 계속해서 붕괴되었고 카라코람은 버려졌으며 나중에 약탈자들과 같은 만주족 군인 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남아있던 것들은 16세기에 에르덴주(Erdene Zuu)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숙청작업동안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카라코람의 현대적이고 적막한 도시는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에르덴주(수많은 보물 이라는 뜻)는 몽골 라마교의 본산지였다. 수도원은 1586년에 짓기 시작했으나 300년 후가 되어서야 완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60에서 100개의 사원과 외곽벽안에 위치한 300여 개의 게르가 있으며 매우 높은 곳에 있어서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살고 있다. 카라코람과 같이 만주족의 침입으로 사원은 버려진 후 파괴되었다. 스탈린의 암살단원에 의해 에르덴주에 있는 사원 중 3곳을 제외한 모든 사원이 파괴되었고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승려들이 살해당했다. 수도원은 1965년에 종교적 장소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 다시 개방할 때까지 문을 닫고 있었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야 수도원은 제 기능을 다시 시작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그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대한 벽이 복합적으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고 3개의 사원 안에는 유년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성년시절의 3단계 부처 생애를 기리기 위해 헌납되어있다. 주 사원이며 중심사원은 부처의 주(Zuu of Buddha)라 불리며 어릴 때의 부처 상이 있다. 수도원 벽의 외곽은 2개의 ‘거북 돌’이다. 이것들 중 4개는 한때 고대 카라코람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근형태의 돌로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수도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언덕중의 작은 계곡사이에 숨겨져 있다. 이 돌을 보고 온 모든 여자는 24시간 내에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그 지방의 전설이 있다. 카라코란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70km(230mi) 떨어져 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도시사이를 운항하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여러 번 있다. 년 중 운행하는 버스는 7-8시간 정도 걸리며 자주 있는 편이다.

Khovsgol Nuur 홉스굴누르

2760sq km(1080 sq mi)넓이에 물이 너무나 깨끗해서 마실 수 도 있는 고산지대호수를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나서 2000m(6560ft)높이를 가진 많은 산과 무성한 소나무 숲 과 싱싱한 목초지 와 그곳에 방목하여 기르는 야크 와 말을 상상해 보아라 그러면 심장이 멎도록 웅장한 몽골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가진 홉스굴누르(Khovsgol Nuur)에 대한 막연한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세계에서 14번째로 큰 상수원지역이다.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이곳을 ‘어머니’로 취급하는 지역 몽골인들 에게 신성시되고 있다. 이곳은 물고기로 가득 차 있고 주위에는 양, 아이벡스, 공, 무스, 20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호수주위에는 안내자 없이는 찾기 힘들지만 수많은 동굴이 있다. 이 지역에는 다크해드몽골족(Darkhad Mongols), 부리아트족(Buryats) 과 타스탄(Tsaatan)와 같이 3개의 독립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경탄할 만한 90개의 강이 호수로 흘러들어 오지만 한 개의 강만이 호수에서 흘러 나간다. 에진골(Egiin Gol)이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Baikal)에 다다른다. 홉스굴누르는 겨울에 얼고, 그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가로질러 오는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거대한 도로로 사용된다. 이 호수가 녹았을 때 방문객들을 카약을 즐길 수 있고 그 주변에서는 하이킹이나. 말타기(또는 야크타기)를 즐길 수 있다. 홉스굴누르의 남부 경계는 울란바토르에서 775km(480mi) 북서쪽으로 떨어져 있고 임시항공기나 버스 또는 지프를 손수 운전하여 갈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은 춥고 호수가 얼어있기는 하지만 봉(4월부터 5월까지)이다. 여름(7월과 8월)은 따뜻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호수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는 카트갈(Khatgal)시의 남쪽입구에 도착하기 몇 킬로미터 전에 있는 홉스굴누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주도로에서 얻을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 Amarbayasgalant Khiid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

카라코란의 에르덴주키히드(Erdene Zuu Khiid)이후에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Amarbayasgalant Khiid) 은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으로 인식되었다. 이곳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북부 중앙몽골에 위치한 암바야사갈란트키히드은 1737년 몽골의 위대한 불교신자로 봉헌되었을 뿐 아니라 조각가이며 만주족왕인 칸수자나바자르(Kansu Zanabazar) 에 의해 세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이곳에서 그들의 나아갈 방향을 찾았고 37개의 사원과 불상 중 10개를 파괴하였다. 오늘날 사원은 평소에는 문을 닫고있으나 수장승려에게 개방하기를 요청할 수 있고 또한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30여명의 승려들의 환영과 매일의 의례를 볼 수 있다.매일 운행하는 버스와 자주 운행하는 특급열차가 울란바토르와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219km(136mi)떨어진 다크한(Darkhan)까지 연결되어있다. 수도원은 다크한에서 남동쪽 140km(87mi)떨어져있으며 다크한에서 수도원까지 가려면 지프가 필요할 것이다.

Gurvansaikhan National Park 거반사이칸

고비사막의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거반사이칸(Gurvansaikhan)에는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많이 있으며 저 캠프와 도로 등의 편의시설이 상당히 잘 마련되어있다. 공원에는 산, 공룡호박과 특이하게 형성된 모래언덕, 바위와 년 중 얼음으로 덮힌 계곡 등이 있다. 또한 이 공원은 몽골사막 되새, 회색독수리(Cinerous Vulture), 사막 휘파람새와 호우바라 능애(Houbara Bustard)를 비롯한 200여종의 조류들의 서식지이다. 드문드문 자란 초목들은 검은꼬리 가젤, 눈표범, 아벡스, 아르갈리 양과 멸종위기의 야생낙타와 같은 동물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준다. 적은 입장료를 동물박제를 전시해놓은 작은 박물관이 있는 욜린엠(Yolyn Am)계곡에서 받는다. 많은 외국인들은 고비를 외지며, 색다르고 신비한 장소로 알고 있다. 그런 점들을 보이기도 하지만 고비는 주로 풀, 관목 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오아시스와 모래는 사막의 3%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한번 극심한 폭우가 내리며 기온은 여름동안에 40℃(105℉)를 넘고 겨울에는 -40℃(-40℉)를 기록한다. 거반사이칸은 울란바토르에서 남서쪽으로 340km(211mi)떨어져 있으며 달란자드가드(Dalanzadgad)시에 근접하였으며 중국국경에서 멀지 않다. 고비로 가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달란자드가드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지프를 빌린다. 울란바토르와 달란자드가드사이를 1주에 한번 운행하는 버스도 있다.

Khovd 코브드

한때 작은 농업지역사회였고 나중엔 러시아와 몽골의 무역중심지 이였던 코브드시는 이제 주요산업도시이며 서부몽골로 떠나는 탐험의 출발지로 좋은 장소이다. 도시의 북부지역은 1762년 이곳을 정복한 후 강제로 통치자가 된 만주족 장수에 의해 세워진 지금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폐허만 남은 상진커렘(Sangiin Kherem)유적지가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복합건물들은 1911년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킨 중국혁명 후에 완전히 방치되었다. 유적지의 북쪽에 있는 메마르고 울퉁불퉁한 언덕에서는 좋은 풍경을 볼 수 있고 하이킹하기에도 좋다. 코브드는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1425km(884mi)떨어져 있고 아발리키르(Arvaikheer), 바얀콘거(Bayankhonger) 와 알타이를 거쳐서 서쪽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경유한다. 울란바토르에서 코브드까지가는 정규항공편이 있고 그곳에 도착해서는 지프를 빌려 도시외곽으로 관광을 갈 수 있다. 레저스포츠

울란바토르주변의 신성한 4개의 봉우리에는 도전할만한 하이킹코스와 깜짝 놀랄만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테스트검(testseegum)봉우리의 남쪽측면에 있는 만즈시르키히드(Manzshir Khiid)등산로는 가장 쉬운 길이다 자이산(Zaisan)등산로는 가장 볼거리가 많고 가장 어렵다. 코브드언덕 주변의 거반사이칸(Gurvansaikhan)국립공원과 고비사막에는 더 많은 하이킹 코스가 있다. 거대한 홉스굴누르(Khovsgol nuur)호수는 낚시와 카약을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이고 호수가 주변의 동굴에서 이루어지는 동굴탐험도 즐길 수 있다. 1월과 2월은 스키를 즐기기에 좋다. 활강스키와 크로스컨트리스키 여행은 울란바토르에서는 즐길 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다. 울란바토르와 그 주변에서는 지금도 말, 낙타, 야크 등을 사로잡아 길들여 타고 다니며 그 옛날 징기스칸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상기하고 있다 몽골로 가는 길

대부분의 관광객은 베이징,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울란바토르까지 항공편으로 이동한다. 오사카나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몽골에 입국하는 관광상품도 있다. 국제적인 몽골항공회사는 MIAI이며 장난스러운 말로 ‘아마도 나는 오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Maybe I’ll Arrive Today)’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라고도 한다.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생기는데 좋지 않은 기상조건 때문이다. 공항이용료는 US$10정도이다.외국인이 몽골로 입국하거나 출국하는 유일한 다른 방법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Trans-Mongolian Railway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곳은 중국-몽골 국경의 에른자민오드(Ereen-zamyn-ood)와 러시아-몽골 국경의 나우시키소크바타(Naushki-sokh baatar)가 있다.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지프나 버스를 이용하여 국경을 넘었다고 하는 여행자들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이것은 지금도 불법이다. 국내 교통편

하부조직 없이 방대한 지역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 몽골은 항공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80여 개 이상의 공항이 있으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활주로를 가진 공항은 없다. 주요항공사인 MIAT는 지방도시와 주요도시, 그리고 관광지역으로(모든 곳은 아니지만)운행하는 항공편을 가지고 있다. 항공 시간표는 정기적으로 바뀌며 외국인은 몽골 현지인 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으며 컴퓨터 전산화된 예약시스템은 없다. 따라서 출발지에서 되돌아오는 항공권도 같이 구입해야 한다. 도시를 관광하기에는 버스가 가장 좋으나 서비스가 엉망이고 버스가 오래되어서 여행은 안락하지 못하고 매우 느리다. 여행을 오래할 경우엔 버스의 파손도 발생할 수 있다. 버스노선은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하여 그곳에서 끝나며 서부몽골로 가는 버스노선은 없다. 관광지를 순환하는 조금 비싼 미니버스는 빠르고 좀더 안락하다. 몽골의 1750km(1090mi)에 다다르는 철도는 남북을 가로지른다. 이 철도는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Trans-Mongolia Railway의 일부이다. 택시는 포장된 도로에서만 유용하다 즉 전체길이가 47,000km(29,150mi)에 달하는 도로 중 1200km(744mi)만이 포장도로이므로 택시는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프는 포장되지 않은 대부분의 도로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이며 원거리에 있는 관광지를 방문할 땐 필수적이다. 지프는 속도가 느리고 기계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보통 지프에는 운전사와 안내자 그리고 공용지프라면 다른 승객들이 함께 탄다. 국제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한다 하더라도 개인지프로 여행을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경찰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고 사고를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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