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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6/등장 문명/스키타이 – 나무위키

기습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문명을 증오합니다. 1. 개요2. 고유 요소. 2.1. 특성2.2. 사카 궁기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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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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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in 문명 6. 저글링 러쉬를 문명 6에서도 해보자! 초반 …

문명 고유 시설인 ‘쿠르간’입니다. 쿠르간은 유목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안장 할 때 만들어진 건축물입니다. 주로 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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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ost.naver.com

Date Published: 10/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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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6 공략, 스키타이 공략 – 에잇의 창작소

문명6 공략, 스키타이 공략 · ㅣ 군사적 능력. 거의 전투에 최적화 되어 있는 종족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 ㅣ 과학적 능력과 문화적 능력. 유레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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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eaterofaeit.tistory.com

Date Published: 1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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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 문명/지도자 – 문명 백과사전 – 문명 VI – Civilopedia

스키타이인이란 약 천 년에 걸쳐 중앙 아시아의 대초원을 유랑한 무지한 유목-목축민들의 무리를 뜻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들에 대한 정보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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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ivilopedia.net

Date Published: 9/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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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 스키타이 운영 어케함 – 문명 마이너 갤러리 – 디시인사이드

[문6] 님들 스키타이 운영 어케함. ㅇㅇ(220.76); 2018.12.25 09:11. 조회수 1037; 추천 0; 댓글 6. 기마병/샤카 궁기병 타이밍에 확장 최대한 하고 넓힌 땅 기반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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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dcinside.com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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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로인 비단길을 만들고 통제했으며, 이 문명들의 번영에 기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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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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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명6 스키타이 무지성 말박이러쉬#1
오리엔트 문명6 스키타이 무지성 말박이러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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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오리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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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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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6 공략, 스키타이 공략

스키타이는 전작의 훈족과 매우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궁기병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 궁기병을 말없이 뽑을 수 있다는 점도 매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궁기병을 대동할때 도시를 직접적으로 점령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공성추 아니면 전차를 대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스키타이의 능력은

대초원 사람들 – 경기병 유닛 혹은 궁기병을 생산시 두마리가 나옴

키루스의 살인자 – 부상당한 유닛을 공격시 전투력 +5가 됨 적유닛을 제거하면 체력이 50이 회복됨

ㅣ 군사적 능력

거의 전투에 최적화 되어 있는 종족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스키타이를 하게 되면 바로 궁기병을 뽑아서 상대방을 선전포고해도 신난이도에서 조차도 스키타이를 막지 못한다. 이건 진짜다.

ㅣ 과학적 능력과 문화적 능력

유레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별다른 과학에 도움을 주는 시설이 없다.

그나마 쿠르칸이있는데 골드와 문화만 올려줄 뿐이다.

불가사의조차도 이러한 특성에 맞지 않으므로 오히려 스키타이는 초반에 모든 문명에 불을 지펴줄 요량이라면 적극 추천을 하는바이다.

ㅣ 스키타이 초반 공략

초반에는 궁기병 위주의 운영을 하면 좋고 궁기병이 두마리씩 나오므로 마구 뽑다간 재정 파탄날 수 있으니

적당하게 초반에 Ai 견제할 목적으로 뽑는다. 한마리는 자동탐색을 이용해서 2칸씩 갈 수 있는 궁기병의 특성을 이용해서 적당히 정찰을 해주면 된다.

유레카, 영감 위주로 공략을 해야 하는데 초반에 날뛰는 야만인들조차 궁기병의 물량에 당해낼 수 없으므로 안심하고 타일에 집중해도 되기 때문에 초반 운영이 상당히 안정스러운 종족이라 할 수있다.

과학력이 딸린다는 특성때문에라도 과학 건물은 지어주어야 하거나 아니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노려야 할수도 있다.

ㅣ 스키타이 중반 후반 공략

중후반은 늘 그렇듯이 테크를 빨리 올리는 종족이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희귀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주변의 형세에도 밝아야 하므로 주변을 잘 넓혀두는 것이 좋다.

희귀자원을 먹기 위해서는 개척자 플레이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는데

재정적으로 딸릴 수도 있으므로 과학 < 재정 < 전쟁 위주의 플레이를 해야 한다. 이때 사회제도는 유닛유지비용 -1 혹은 -2를 채택하여 사용한다. ㅣ 과학승리는 과학 승리를 달성하려는 Ai 를 제거해야만 가능하다. 전투위주의 플레이를 늘어놓다보면 이것저것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 과학을 올리려고 하는 플레이어를 찾아 없애야 한다. 불가사의도 전쟁 혹은 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ㅣ 아직은 덜 패치된 문명 패치가 덜 된 마당에 제대로 된 공략이 나올리만무하다. 그 이유는 패치가 거듭할수록 종족들은 밸런스가 바뀌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문명 5에서는 공중정원이 인구 10늘려주는 사기 불가사의였으나 지금은 생산력 높여주는 형식으로 바뀌었듯이...

문명 백과사전

역사적 배경

스키타이인이란 약 천 년에 걸쳐 중앙 아시아의 대초원을 유랑한 무지한 유목-목축민들의 무리를 뜻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들에 대한 정보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로마-그리스의 스트라보를 비롯한 고대 ‘역사학자’들의 얼마 안 되는 기록과 역시 몇 안 되는 힌두교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성기 시절의 스키타이인들은 폰투스-카스피 초원 전체 및 주변 지역과 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만주 국경까지 출몰했습니다. 이들은 비단길 양쪽에 자리하며 노예 거래로 부를 축적했고 독특한 예술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켄타우로스 및 여전사와 관련된 전설을 문명에 선사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습니다.

근대의 학자들은 고대의 작가들이 대초원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기마전사들을 지칭하기 위해 ‘스키타이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언급하지만 그 외의 생활 양식과 언어 등에서 유사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이 동부 초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곳에서 친척 뻘 정도 되는 마싸게타에족과 전쟁을 벌였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스키타이족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아락세스 강을 건넜고, 마찬가지로 아시리아로 이주하여 대혼란을 일으켰던 키메르족을 30년 이내에 몰아냈습니다. 승마술과 궁술에 매우 능했던 스키타이족은 지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정착지를 약탈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는 기원전 530년에 마싸게타에-스키타이 부족의 여성 통치자였던 토미리스에게 혼인을 제안했습니다. 그녀가 제안을 거절하자 키루스는 시르 다리야 강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토미리스는 그에게 그만 둘 것을 종용했고 강에서 하루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개방 지형 즉, 기마 전투에 이상적인 장소에서 ‘명예로운 전투’로 맞설 것을 요구했습니다. 키루스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그의 정예병들과 함께 야영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적이 와인의 숙취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키루스는 적은 병력을 남기어 다량의 와인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가 이끄는 스키타이의 본군은 야영지에 도착하여 만취해 버렸고 기다리고 있던 키루스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스파르가피세스는 스스로 목숨을 끓었고, 비보를 전해 들은 토미리스는 그의 전략을 ‘비겁’하다고 선언했고 기마전사로 이루어진 두 번째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인들에게 진격했습니다. 이어진 난전에서 키루스는 사망했고 그의 군대는 뿔뿔이 도주했습니다. 토미리스는 페르시아 왕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한 후 복수의 상징으로 그의 머리를 베어 피가 든 항아리에 담갔습니다. 이는 순전히 헤로도토스의 주장일 뿐으로 실질적인 내용은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원전 513년, 크게 분개한 페르시아인들은 다리우스 대제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다시 스키타이족의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이번에는 대략 700,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지켜내야 할 경작지나 마을이 없었던 스키타이인들은 넓은 공간과 기동성을 활용하여 좁은 지형에서의 전투를 회피했습니다. 궁기병들은 천천히 움직이는 열 대형의 병력을 일방적으로 괴롭혔고 낙오병들과 다양한 짐수레를 해치웠습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다수의 스키타이족들이 드디어 전투에 맞설 태세를 보였지만 갑자기 커다란 함성 소리가 울렸고 이에 놀라 도망치기 시작한 토끼들을 다수의 병력들이 쫓아갔다고 합니다. 다리우스는 ‘이 자들이 우리를 완전히 멸시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병력이 감소한 다리우스의 느린 병력은 마침내 볼가 강에 도착했습니다. 부족한 식량과 물자에 좌절한 다리우스는 아무런 소득 없이 그의 제국으로 철수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은 계속해서 개척민들을 약탈하며 좋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쿠르간이라 불리는 거대한 봉분(스키타이인들이 건축한 유일한 영구 구조물)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단서에 따르면, 기원전 470년경에 아리아피스라는 그리스 이름의 족장이 다수의 스키타이 부족을 연합하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마찬가지로 그리스 이름을 가진 아티아스에 의해 왕조가 전복된 기원전 340년경까지 이 연합을 통치했습니다. 스트라보의 기록에 따르면, 다뉴브 강과 메오샨 습지 사이의 모든 스키타이 부족을 연합한 아테아스가 머지 않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충돌했다고 합니다. 바로 전쟁이 발발했고 기원전 339년경의 전투에서 당시 90세였던 아테아스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제국’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필로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다시 스키타이인들과 싸우고 있었고, 시르 다리야 강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개척지를 따라 자행되던 이들의 약탈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고 남쪽으로 행군하여 영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주변을 잠식하고 있던 켈트족이 스키타이인들을 발칸 지역에서 몰아냈습니다. 이 기마전사들은 대초원과는 달리 산악에서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마우에스를 따르던 한 스키타이 부족 집단(인도-스키타이인)은 남동부의 박트리아, 소그디아나와 아라코시아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기원전 35년경인 아제스 2세의 재위 시절에 펀자브와 카슈미르 지역에서 거주하던 인도-그리스인들 대신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아제스 2세가 인도-스키타이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사망하자마자 인도-스키타이인들이 쿠샨에 의해 장악되었고 곧 이어 서쪽의 파르티아인들이 침공하면서 스키타이인들이 인도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대초원 너머의 서부에서는 남은 스키타이 부족들은 원래의 기마 및 약탈 방식을 유지하며 또 다시 300년의 세월을 생존했습니다. 일부 부족은 여러 장소에 정착하기까지 했습니다. 스키타이 네아폴리스(현재의 심페로폴)라는 도시는 크림 반도에 거주하는 스키타이 부족들의 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확장에 한창이던 로마 제국에 의해 자유로웠던 스키타이인들은 결국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트족은 로마 개척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르마트족을 몰아냈고 사르마트족은 스키타이인들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정복보다는 흡수의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하지만 3세기 중반에는 고트족이 스키타이 네아폴리스를 습격하였고 스키타이 문명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모든 유목 민족을 스키타이인으로 지칭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잔틴의 사절이었던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의 추종자들을 계속해서 ‘스키타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써 스키타이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들이 남긴 흔적으로는 초원 곳곳에 쌓여 있는 봉문만이 유일합니다. 평범한 전사들을 위한 작은 봉문에서 족장과 위대한 전사들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한 ‘거대한’ 쿠르간에 이르는 이 봉분들은 단순한 흙무더기나 시신 위에 쌓아놓은 쓰레기가 아니었으며 중앙의 방 위로 겹겹이 꼴을 쌓아 건축되었습니다. 꼴이 사용된 이유는 고인과 함께 묻힌 말들이 사후에도 풀을 뜯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봉분 중 하나에서 400개 이상의 말 뼈대가 족장의 시신 주변에 기하학적 대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스키타이 사회에서는 주요 인물이 사망할 경우 그가 몰던 말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하인들까지 사후 세계에서 그와 동반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쿠르간은 높이가 6층 건물과 맞먹으며 하단의 너비가 90미터를 초과합니다. 스키타이인들은 무지하고 야만적인 기마 민족 치고는 상당한 공학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매장 예식이 아주 엄청난 광경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회장자들은 왼쪽 손에 화살을 꼽았고 팔과 가슴을 칼로 그었으며 심지어는 귀의 일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행인 점은 활을 쏘는 데 필요한 손을 불구로 만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부 족장의 경우 장례 후 1주년이 되는 날에는 50마리의 말과 50명의 노예를 죽이고 배를 가른 다음 쿠르간 주변의 반듯한 기둥에 시체를 고정시켰습니다. 죽은 노예가 죽은 말들을 타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과시적인 모습은 여전사에 대한 그리스 전설의 기초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적어도 이에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돈 강과 볼가 강 하류 지역을 따라 자리한 봉분 중 많게는 20%에는 ‘남성처럼’ 전투 갑옷, 활과 검으로 무장한 여성들의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여전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토미리스의 일화로 비추어 볼 때 스키타이 문화에 여전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상당히 용감했을 것입니다. 스키타이인들의 방식은 좀 더 ‘문명화된’ 인접 부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면도를 하지 않고 문신을 새긴 스키타이족의 궁기병은 보통 짧은 합성궁을 이용했으며 상처를 벌어지게 만들어 회복이 어렵도록 미늘이 달린 화살을 날렸습니다. 또한 창촉에는 뱀독, 썩은 피와 마분을 섞어 발라 부상자가 빨리 사망하도록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은 자신이 죽인 적의 피를 마신 다음 적의 목을 베어 전리품의 몫을 챙겼다고 합니다. 이 끔찍한 증표를 제시하는 자만이 전리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마시는 행위는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후자의 경우는 전투에서 자신의 공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히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죽은 적의 두피는 굴레와 화살집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고 특히 용맹했던 적의 두개골에는 금박을 입혀 명예로운 술잔으로 사용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은 용맹함을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공포를 불러 일으킨 스키타이인들은 치명적인 궁수로서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반인반수, 켄타우로스의 전설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스키타이인들의 기마전사들은 엄청난 악명을 떨쳤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자비가 없고 목소리는 바다의 흉용함 같으며 항오를 벌일’ 전사들에 대해 경고했을 때, 그가 스키타이인들을 지칭한 것이라고 학자들이 주장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스키타이인들 역시 다양한 신 등을 섬겼지만 신앙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은 없어 보였습니다. 신의 계시는 돌에 새겨진 율법보다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침서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두피와 두개골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전리품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수시로 급습하거나 노예를 거래하여 금과 은을 얻었습니다. 스키타이의 장인들에게는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었으며 특히 사투 중인 늑대, 수사슴, 그리핀, 표범, 독수리와 말을 선호했습니다. 이들이 만든 대부분의 미술품, 도자기, 청동 장식품, 우상 등에는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사투 중이 아닌 경우에는 보통 누워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쿠르간에서 발견된 수많은 브로치, 허리띠, 투구, 귀걸이, 목걸이, 토르크와 여러 장신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의 몰락과 멸망을 둘러싼 학자들의 수많은 가설이 존재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정착하여 주변 지역의 부족과 결혼을 하고 목축과 약탈을 포기하는 스키타이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었다고 주장합니다. 3세기 후반의 쿠르간인들 중 일부는 가정 생활을 상징하는 난로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진정한 스키타이인이라면 무덤 속에서 탄식을 내뱉었을 것입니다. 일부 가설에서는 가뭄이 장기화되었거나 말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정착해야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방목지가 경작지로 바뀌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술을 좋아했던 스키타이인들의 성정이 그들의 몰락에 기여했다고 단언하는 가설도 존재합니다. 스파르가피세스의 일례를 참고해 보기 바랍니다.

진실이 무엇이 됐든, 스키타이인들은 대초원에서도 적극적인 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했으며 후대의 사르마티아인, 훈족, 몽골족, 티무르족과 카자크인들이 갈망하던 원초적인 야만성과 잔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키타이족 지역 스키티아 언어 스키타이어 종교 스키타이 종교 주신 타비티 민족계통 이란계 민족 하위분파 사르마티아인

사카인

소그드인

스키타이족(히브리어: סקיתים 스퀴팀 , 고대 그리스어: Σκὐθαι, Σκύθης, 영어: Scythia)은 사카(Saka), 사카이(Sakae), 사이(Sai), 이스쿠자이(Iskuzai), 아스쿠자이(Askuzai)라고도 불리는, 주로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한 이란계 민족에 속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며 이들 남쪽에 있던 식자 민족들에게 약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까지 중부 유라시아 스텝의 넓은 지역들에서 거주했다고 언급되었다.[1][2][3][4] 이들이 기원이 주로 이란족이라는 데에 합의한, 그리스의 역사가들에게 알려진 “고전 스키타이인”들은 흑해 북부와 북캅카스에 있었다.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중국에서 기록된, 다른 스키타이족 집단들에 대한 사료는 이들이 중앙 아시아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곳에서 그들은 각각 이스쿠자이(Iskuzai)/아스쿠자이(Askuzai), 사카 (고대 페르시아어: Sakā; 페르시아어/ساکا; 산스크리트어: शक Śaka; 그리스어: Σάκαι; 라틴어: Sacae), 그리고 사이 ( 중국어: 塞; 상고 한어: *sˤək)이라 불렸다.[5]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서 거주하는 스키타이족들끼리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으며, 스키타이라는 용어는 넓고 좁은 개념에서 사용된다. 영어로 “스키타이의”라는 뜻의 형용사 “Scythian”는 일반적으로 인종적이고 언어적인 의미를 나타내지 않고, 넓은 “스키타이-시베리아” 문화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발견물들에 대한 고고학적 상황에서 현대 학자들이 사용한다.[6] ’스키타이의’를 뜻하는 또다른 영어 형용사 Scythic는 유사한 방식으로,[7] 특별한 무기, 마구, 금속판에 새겨진 동물 미술의 존재로 특정 지어지는, 말을 탄 유목 생활 양식이 널리 퍼진 특정 시기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8] 철기 시대 기간에 스키타이족의 극서쪽의 영역은 고전 그리스 사료에서 스키티아라고 알려졌고, 좀더 좁은 관념의 “Scythian”는 스키타이어로 소통되는 이 지역으로 일부 제한된다. “Scythian”에 대한 다른 정의들도 사용되어,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9]

스키타이인들은 군마 전술을 익힌, 이른 시기의 민족들에 속한다.[10] 이들은 말, 소, 양들을 키웠고, 천막을 덮은 마차에서 살았으며 말의 등 위에서 활과 화살을 들고 싸웠다. 이들은 호화로운 무덤, 우수한 금속공예품, 뛰어난 미술 양식으로 특정 지어지는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켰다.[11] 기원전 8세기에, 스키타이인들은 아마도 주나라를 공격했다.[12] 얼마 안 있어, 스키타이인들은 서쪽으로 확장하였고 폰토스 스텝에서 킴메르인들의 세력을 몰아냈다.[13] 전성기에, 스키타이인들은 서쪽에서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동쪽으로는 남부 몽골 (오르도스 문화)과 남부 시베리아 (타가르 문화)에 이르는,[6][14] 유라시아 스텝 전역을 지배했고,[15][16] 최초의 중앙 아시아 유목 제국라고 불릴만 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쉽게 조직된 국가라고 불리기는 어렵다.[13][17]

오늘날에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동유럽 남부 영토, 크림 반도를 기반으로 한,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왕족 스키타이라고 알려진 권력 계층들의 지배를 받았다.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로인 비단길을 만들고 통제했으며, 이 문명들의 번영에 기여했을 것이다.[18]정착한 금속세공업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을 위한 휴대용 장식품들을 만들었다. 이 장식품들은 금속 재료에서 주로 살아남았고, 독특한 스키타이 미술을 형성했다.[19] 기원전 7세기에, 스키타이인들은 킴메르인들과 같이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서 중동 지역을 자주 약탈했고, 중동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기원전 650–630년에, 스키타이인들은 이란 고원 서부의 메디아를 잠시 지배했고,[20][21] 이집트 경계까지 힘을 뻗쳤다.[10] 메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후, 스키타이인들은 중동 지역에 대한 간섭을 계속했고, 기원전 612년 니네베 약탈에서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스키타이인들은 그 후에 아케메네스 제국과 잦은 분쟁에 연루되었다. 서부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에 큰 패배를 당했고[10] 그 후에 중앙 아시아에서 온 이란계 민족 사르마티아인들에게 서서히 정복되었다.[22] 아시아 스텝의 동부 스키타이인들 (사카인)은 기원전 2세기에 월지, 오손, 흉노의 공격을 받았고, 이들의 상당 수가 남아시아로 이주하도록 유발이 되어,[23][24] 그곳에서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스키타이이라고 알려졌다.[25][26][27][28]

명칭과 용어 [ 편집 ]

엄밀한 의미에서 ‘스키타이인’은 흑해 북쪽의 유목민들을 가리키며, 카스피해의 북쪽에 거주했고 시간이 흘러서는 스키타이인들의 땅을 대신 차지했었고 이들과 매우 유사한 사르마티아인과 구분한다. 페르시아의 단어 사카는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인들에게 사용된다. 중국인들은 사이 ( 중국어: 塞; 상고 한어: *sˤək)라는 용어를 한 때 일리강과 추강의 계곡에 거주했다가 타림 분지로 이주한 사카인들에게 사용한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이 스스로를 소클로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30]

이스쿠자이 또는 아스쿠자이는 스키타이인으로 추정되는 코카서스 남쪽에서 온 약탈자들에게 사용한 아시리아 용어이다. 스키타이/사카의 한 집단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사카스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또는 이들과 관련된 집단이 북부 인도를 침략했고 인도-스키타이인이 되었다.

세메레니 오스벌드는 스키타이인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을 연구했고 다음의 결과를 제시했다: Skuthes Σκύθης, Skudra, Sug(u)da, Saka.[31]

처음 세 개의 단어는 “나아가다, 쏘다” (영어 단어 shoot와 같은 어원)를 뜻하는 인도유럽어 어근 *(s)kewd- 에서 전래했다. *skud- 는 동일 어근의 제로 그래이드 (기본적인 모음 교체가 이뤄지는 모음 음소 */e/와 */o/가 없어져서 만들어진 모음 교체) 형태이다. 세메레니는 스키타이인들의 자기 지칭 명칭을 스쿠다 (*skuda, 대략 “궁수”)라고 복원했다.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스쿠테스 Σκύθης (복수형 스쿠타이 Σκύθαι)와 아시리아어 아스쿠즈 를 만들어냈으며, 고대 아르메니아어: սկիւթ skiwtʰ 는 이타과정을 거친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d/에서 /l/로 바뀌는 후기 스키타이어 음성 변화는 그리스어 단어 소클로토이 (Skolotoi, Σκώλοτοι, 헤로도토스 4.6)를 만들어냈으며, 이것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로열 스키타이인들의 자기 지칭 명칭인 스키타이어 스쿨라 (*skula)에서 온 것이다. 다른 음성 변화들에는 소그디아 가 있다.

에서 전래했다. 는 동일 어근의 제로 그래이드 (기본적인 모음 교체가 이뤄지는 모음 음소 */e/와 */o/가 없어져서 만들어진 모음 교체) 형태이다. 세메레니는 스키타이인들의 자기 지칭 명칭을 (*skuda, 대략 “궁수”)라고 복원했다.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Σκύθης (복수형 Σκύθαι)와 아시리아어 를 만들어냈으며, 고대 아르메니아어: 는 이타과정을 거친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d/에서 /l/로 바뀌는 후기 스키타이어 음성 변화는 그리스어 단어 (Skolotoi, Σκώλοτοι, 헤로도토스 4.6)를 만들어냈으며, 이것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로열 스키타이인들의 자기 지칭 명칭인 스키타이어 (*skula)에서 온 것이다. 다른 음성 변화들에는 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어: Sakā, 그리스어: Σάκαι ; 라틴어: Sacae, 산스크리트어: शक Śaka 들에 반영된 형태는 “가다, 돌아다니다”를 뜻하는 이란어 동사 어근 sak-에서 왔고, 따라서 “유목민”을 뜻한다.[32]

넓은 의미와 고고학 분야에서 스키타이의를 뜻하는 영어 형용사 Scythian와 Scythic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시점의 모든 스텝 유목민들에게 사용될 수 있다.[33] 오르도스 문화와 타르가르 문화는 중요한 ‘스키타이적’ 특징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조금 더 흔히 ‘스키타이인’은 이란어군에 속하는 스키타이어를 구사하는 서쪽과 북쪽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로 한정된다. 스텝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하더라도, 그것이 대해 명확한 증거는 없다.

기원 [ 편집 ]

문헌 증거 [ 편집 ]

파일:ScythianGroups.png 기원전 7-3세기 폰토스 스텝 지역의 스키타이인과 이들과 관련된 고고학적 집단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아무도 살지 않았던 스키타이의 땅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타르기타오스라는 남자였다. 그의 양친은 제우스와 보류스테네스강의 딸이라고 한다. 타르키타오스에서 리포크사이스, 아르포크사이스, 크라크사이스 3명이 태어났다. 이 세명이 있던 시대에 하늘에서부터 황금의 그릇붙이가 스키티아의 땅에 떨어져 왔다. 장남이 제일 먼저 이것을 찾아냈고 이것을 얻을려고 하니까 황금이 불타올랐다. 장남이 멀리 떨어지고 둘째 아들이 가까이가니 다시 황금은 불타올랐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가 가까이 가니 불은 꺼지고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장남과 둘째 아들은 셋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를 왕으로 추천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장남의 리포크사이스를 시조로 하는 아우카타이씨, 둘째 아들을 시조로하는 카티아로이씨와 트라스피에스씨, 셋째 아들인 크라크사이스를 시조로 하는 왕족 파라라타이씨의 4씨족이 생겨났고 그들 모두의 이름과 왕의 이름은 스콜로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크라크사이스는 광대한 스키티아의 국토를 3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중에 하나의 나라를 가장 크게 하여 그 나라에 황금의 그릇붙이를 보관하였다.[34][35]

스키타이인의 기원에 관한 헤로도토스의 설명들은 최근에 들어 신용되지 않고 있지만, 동시대 스키타이의 약탈 활동에 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들이 좀 더 믿을만하다고 여겨진다.[36] 더욱이, 킴메르인처럼 스키타이인이라는 용어가 흑해에서 남부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집단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스키타이인들은 특정 민족이 아니라”, “과거 여러 시대에서 본거지를 두지 않고 여러 장소”에서 활동한 다양한 민족이었다.[37] 신약성서에서는 골로새서 3장 11절을 통해 스키타이인을 한 차례 언급한다.[38]

고고학 증거 [ 편집 ]

서기 125년경 흑해 의 북쪽 곶을 따라 있는 스키타이 바실레이 (“로열 스키타이”)의 영토.

역사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들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두 가지 일반적인 가설을 제시했다.[39] 과거 소비에트 그 후에는 러시아의 연구자들이 조금 더 지지하는 첫 번째 이론은 스키타이인들이 내륙 아시아, 다시 말하여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온 동부 이란족 집단이라는, 헤로도토스의 (세 번째) 설명을 따른다. [39][40]

기르스망과 다른 이들에 따른, 두 번째 가설은 스루브나야 문화권이 킴메르인과 연관이 되었음에도, 스키타이 문화의 결정체가 흑해 해안의 “목제 무덤” (또는 스루브나야) 문화권의 집단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39] 돌루하노프에 따르면, 이 가설은 스키타이 유골이 목재 문화권의 유골과 유사하고, 중앙 아시아의 사카이의 유골과는 이질적이었다는 인류학적 증거의 지지를 받는다.[41] 그러나, 맬러리에 의하면,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안드로노보 문화와 “목재 무덤 문화권의 최소한의 동쪽 거주자”들은 인도이란인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39]

다른 이론들은 “스키타이인”이라는 것이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이 생활 방식 (유목), 문화 풍습, 언어에서 특정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관련없는 다른 민족들을 전반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매우 일반적인 용어라고 심지어 주장한다. 기원전 1천년은 이질적이고 광범위한 지역 사회들에 전래가 없는 문화적, 경제적 연결의 시대를 열었다. 이동이 가능하고 광범위하게 유사한 삶의 방식은 도나우강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스텝을 따라 있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들 사이의 접촉을 촉진시켰고, 많은 문화적 유사점으로 이끌었다. 고대의 관찰자들인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스키타이인”이라는 문화일반적 분류로 함께 묶였다.

역사 [ 편집 ]

고전 고대 시기 (기원전 600년에서 서기 300년) [ 편집 ]

헤로도토스는 최초로 스키타이인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남겼다 그는 킴메르인들을 흑해 북쪽 해안가에서 스키타인들에게 밀려나간, 독창적인 선주민 민족으로 분류했다 (Hist. 4.11–12). 헤로도토스는 또한 스키타이인들이 아우카타이, 카티아로이, 트라스피안, 파랄라타이 또는 “왕족 스키타이”로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4.6).

헤로도토스에게, 스키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 북쪽에서 사는 이국적인 야만인들이었다. — Michael Kulikowski, Rome’s Gothic Wars from the Third Century to Alaric, pg. 14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스키타이인들을 공격했던 기원전 512년, 다리우스 1세는 전해진 바에 의하면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들의 영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유목민들인 스키타이인들은 교전 없이 페르시아군들을 영토에 진입하게 놔두면서, 이들을 좌절시켰다고 한다.[42]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다리우스 1세는 이런 방식으로 볼가강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기원전 5-3세기 동안에, 스키타이인들은 분명히 번영했다.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역사에서,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 스키티아 미노르에서 도나우강을 타고 20일간 동쪽으로, 오늘날의 동부 우크라이나와 돈 강 하류 유역을 가로질러 뻗어있는 대스키티아를 구분했다고 적었다. 당시에 타나이스강이라고 알려진 돈강은 주요 무역 역할을 해왔다.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의 흑해 식민 항구들인 올비아, 케르소네소스, 킴메르 보스포루스, 고르고피아에서 통하여 북방에서 그리스로 이어지는 무역의 통제권을 통해 확실히 부를 얻었다. 이들은 곡물들을 기르기도 했고, 그리스로 밀들, 양 떼들, 치즈들을 실어 보냈다.

고리토스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운데에 방패는 목재 위에 평평한 가죽을 얹어 만들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림반도 케르치 인근에 묻힌, 쿨오바 쿠르간 에서 출토된 호박금 잔에 있던 것을 그린 스키타이 전사들. 오른쪽에 전사는 활을 그의 무릎 뒤쪽으로 고정시켜 활줄을 걸고 있다. 전형적인 뽀족한 후드, 가장자리를 모피나 플리스로 다듬은 긴 외투, 장식을 한 바지, 발목에 묶은 짧은 부츠를 하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확실히 길고 풀어헤친 머리를 했고, 모든 성인 남자들은 수염을 길렀다. 맨 머리에 창을 양손으로 잡은 사내의 왼쪽 엉덩이에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운데에 방패는 목재 위에 평평한 가죽을 얹어 만들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스트라본 (기원전 63년경 – 서기 24년)은 아테아스 왕이 마이오티스 습지와 도나우강 사이에 있는 스키타이 부족들을 그의 힘 아래로 결속시켰다고 기록했다. 그의 서방 팽창은 기원전 339년 스키타이인에 맞서 군사적 행동을 취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재위 기원전 359-336년)와의 분쟁을 가져왔다. 아테아스는 전투 중에 전사하고, 그의 제국은 분열됐다. 이 패배의 여파 속에서, 켈트인들이 발칸반도에서 스키타이인들을 대체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 러시아 남부에서는, 스키타이인들과 근연 관계인 사르마티아인들이 점차 이들을 압도했다. 기원전 329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악사르테스 전투에서 스키타이인들과 충돌했다. 스키타이인들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북쪽과 동쪽 국경을 압박하며,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아테아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 및 마케도니아의 소그디아 사트라프의 반란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키타이군은 이악사르테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유목민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고, 그는 훨씬 더 진중한 문제들이 그의 관심을 끌던, 남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는 체면 손상 없이 이를 할 수 있었고, 스키타이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평화 협정 중재를 위해 몸값 없이 스키타이 포로들을 풀어줬다. 이 방식은 성공적이었고, 스키타이인들은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괴롭히지 않았다. 스트라본의 설명 때까지 (기원전 10년기), 크림반도의 스키타이인들은 드네프르강 하류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스키타이의 왕들인 스킬루스와 팔라쿠스는 케르소네소스와 킴메르 보스포루스를 포함한 크림반도의 해안 통치를 두고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재위 기원전 120-63년)와 전쟁을 했다. 스키타이인들의 수도, 스키타이 네아폴리스는 오늘날의 심페로폴의 외각에 있다. 이후에 고트족들이 3세기 중반에 도시를 파괴했다.

동부 스텝의 사카인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사카 입니다.

파일:ScythianC14AsiaEuropeFig6SketchEn 3dGraph.gif 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스키타이 쿠르간의 타임라인

현대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카라는 용어를 동방 스텝과 타림 분지에 거주하는 이란어군 화자 부족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43][44] 고대 페르시아의 비문 역시도 사카를 흑해 북쪽에 있는 서부 스키타이인들 – Sakā paradraya 또는 “바다 너머 스키타이인”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45][46]

다리우스 1세 시기 (재위 기원전 522년-486년)로 거슬러 올라가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아케메네스 시대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에서, 사카인들은 소그디아나 국경 너머에 살았다고 말해진다.[47][48] “Sakā para Sugdam” 또는 “수그다 (소그디아나) 너머 사카인”이라는 용어는 다리우스가 서쪽에 쿠시 (에티오피아인들)의 반대편, 다시 말해서 그의 제국 동쪽 끄트머리에서 그의 제국의 경계를 만든 민족들을 묘사하기 의해 사용했다.[45][49]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시기 (기원전 486-465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 비문은 사카인들을 중앙 아시아의 다하에인들과 짝지었다.[47] 베히스툰 비문에서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사카 부족인 Sakā tigraxaudā (“뾰족 모자를 쓴 사카”)와 Sakā haumavargā (“하오마 마시는 사카”)는 카스피해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45][50][51] 일부는 Sakā haumavargā가 Sakā para Sugdam일 것이고, 따라서 Sakā haumavargā는 Sakā tigraxaudā 보다 더욱 동쪽에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또다른 이들은 “소그디아나 너머”라고 말해지는 고려한 지명이라고 여겨짐에도 불고하고, 파미르와 신장이 그들의 본거지라고 주장한다.[45]

Sakā tigraxaudā의 왕 스쿤카 (Skunkha) 베히스툰 비문의 있는 스쿤카. “사카인의 왕 스쿤카.”라고 쓰여있다[52] 스쿤카의 초상. 기원전 520년–519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나란히 싸운다고 말해지는 사카인들과 충돌했다.[53]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 대제는 카스피해 동쪽 지역 원정을 하던 동안에 사카인들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민족인 마사게타이족과도 맞닥뜨렸고,[54] 기원전 530년 이들과의 전투 중에 전사한다.[55] 다리우스 1세 역시도 동쪽의 사카인들과 전쟁을 했고, 폴리아노스에 따르면 세 명의 왕이 이끄는 세 개의 사카 군대와 싸웠다고 한다.[56] 기원전 520–519년, 다리우스 1세는 Sakā tigraxaudā 부족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왕 스쿤카 (베히스툰 비문에서 뾰족한 모자를 쓴 모습으로 새겨짐).[43] 사카의 영토는 아무다리야강 (옥수스)과 시르다리야강 (이악사르테스)의 상당 범위를 포함하는 초라스미아의 일부로서 아케메네스 제국에 흡수됐으며,[57] 사카인들은 그때부터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쟁에서 많은 수의 궁기병들을 페르시아군에 지원했다.[46]

중국의 《한서》에선, 일리강과 추강의 계곡을 “사이의 땅”, 다시 말하여 사카의 땅이라고 불렀다. 중앙 아시아의 이 지역에 이들이 도착한 정확한 날짜는 확실하지 않으며, 아마 다리우스 1세 재위 이전일 것이다.[58] 기원전 550-250년 사이의 것으로 올라가는, 쿠르간 형태 (분구)의 대략 30개 사카 무덤들이 또한 톈산산맥에서 발견되었다. 사카의 존재에 대한 암시는 타림 분지에서도 발견됐으며, 7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59] 일부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770년에 서주의 수도 호경의 약탈이 서방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알타이산맥 출신의 스키타이인들의 약탈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60]

하지만 흉노와 다른 민족 집단들 간에 무력 우위에 대한 결과로서, 사카인들은 박트리아로 밀려났고, 이후에는 남쪽으로는 인도 북서쪽과 동쪽으로는 중국 북서부에 있는 신장의 서부 타림 분지 지역에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로 밀려났다.[61][62]

사카인들의 이주에 대한 기록들은 사마천의 《사기》 같은 중국의 서적들에서 나타난다. 본래 중국 간쑤성의 둔황과 치롄산맥에서 거주했던 인도유럽계 민족 월지는 흉노의 지배자 목돌선우의 몽골계 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177-176년에 이들에게 정복당한, 간쑤성의 하서주랑에서 달아났다.[63][64][65] 결국 월지는 사이 (사카)를 남서쪽 소그디아 쪽으로 공격과 압박을 가한 책임이 있으며, 사이인들은 헬레니즘 계열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쪽으로 시르다르야강을 건넜으며, 또한 페르가나 분지로도 진출하여 다위안에 정착했다.[66][67] 고대 그리스계 로마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들에서 박트리아를 무너트렸다라고 하는 아시이족의 네 개 부족들이 일리강과 추강이 있는 시르다르야 북쪽의 땅에서 왔다고 주장했다.[58] 그뒤에 사카인들은 자신들이 인도-스키타이인이라고 알려진, 인도아 대륙 북서쪽 지역에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나아가, 현재 중국 타림 분지에 코탄과 툼샤크 같은 정착지를 세웠다.

코탄과 타림 분지의 왕국들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코탄 왕국 입니다.

사카인들은 박트리아에서 이주하여 당시 카자흐스탄 지역 오아시스에 진출하여 국가를 건국하였다.[58] 카자흐스탄 지역에 있던 사카계 국가들로는 코탄과 사처 (莎車, 사카인들에서 이름이 붙은 걸로 추정)가 있었다.[68][69]

사카계 국가인 코탄의 언어는 카로슈티 문자로 된 간다라 프라크리트어이었다.[70] 3세기 산산의 문서에서 산스크리트어 작위 세나파티와 동격인 이란어 단어, hinajha (“대원수”)라는 코탄 왕의 작위를 기록한 것을 통해, 사카인들이 엘리트 지배 계층과 연결되었다라는 징조가 있지만, 거의 동일한 코탄 사카어 단어 hīnāysa도 문서에 나타나있다.[70] 코탄어로 코탄 왕의 지배시기를 kṣuṇa라고 하는데, 로널드 E. 에머릭 (Ronald E. Emmerick, 2001년 사망) 이란 연구학 교수에 따르면, “이란인들과 왕실의 권력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암시한다.”고 한다.[70] 그는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코탄의 왕실 칙령 문서 언어가 코탄 사카어인 것은 “코탄의 지배자가 이란어군 화자일 것”이라 주장했다.[70] 추가적으로, 그는 코탄 명칭의 오래된 형태, hvatana가 사카라는 명칭과 의미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71]티베트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72][73] 이 지역의 튀르크화와 이슬람화를 이끈, 카라한 칸국의 회교도 튀르크족에 동화되었다.[74][75]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인도-스키타이 입니다.

인도 스키타이의 왕 아제스 2세 (재위 대략 기원전 35–12년)의 은화. 불교의 삼보 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은화의 반대편에 남아있다

사카인들이 인도 아대륙의 북서쪽으로 이주한 후,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사카의 땅”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드란기아나)로 알려지게 되었다.[47] 이 내용은 사카인들이 지빈 罽賓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국을 공격하여 정착했다고 하는 중국의 기록과 거의 같은 시대인[76]인도 북부 인도-스키타이의 사카 왕국 (기원전 200년 – 서기 400년)의 유물에 속하는 마투라 사자 기둥머리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카로슈티 비문에서도 증명되었다.[77] 동시대 드란기아나 지역을 페르시아어로 사카스타나 (Sakastāna)라고 불렀고, 아르메니아어에서는 그리스어, 팔라비어, 소그디아어, 시리아어, 아랍어와 유사한 동의어인 사카스탄이었으며, 중세 페르시아어가 중국 신장의 투르판에서 사용됐다.[77]

고대 후기 [ 편집 ]

고대 후기 때, 스키타이의 민족 개념은 점차 모호해졌고 외부인들은 폰토스 카스피 스텝에서 사는 아무 민족들을 언어에 상관없이 “스키타이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아틸라에게 파견된 비잔티움의 대사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의 수행원들을 반복적으로 “스키타이인”이라고 나타냈다. 그러나 에우나피오스, 클라우디우스 클라디아누스, 올림피오도로스 등은 그들이 “스키타이인”이라고 적을 때 보통 “고트족”을 의미한다.

고트족들은 2세기부터 로마 국경 인근 지역 거의 대부분에서 사르마티아인들을 몰아냈고, 중세 초기 시대 무렵에는, 초기 슬라브인 (원시 슬라브인)들은 동유럽에서 이란계 민족 집단을 동화시키고 흡수하면서 동유럽에서 동부 이란어 억양을 배제시켰다.[78][26][27][28] 튀르크족의 이주는 중앙 아시아에서 언어적으로 사카인들을 동화시켰다.

고전적인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1세기 경에 많은 수가 줄었들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동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게르만 부족들과 연맹들이나 말을 탄 유라시아 유목민 야만인들을 가리킬 때 “스키타이인”이라고 전통적으로 말하는 것을 계속했다[79]: 서기 448년에 말을 탄 두 명의 “스키타이인들”은 대사 프리스코스를 판노니아에 있는 아틸라의 주둔지로 데려갔다. 이 경우에 비잔티움인들은 스키타이인들을 이들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아틸라를 따르는 고트족과 훈족들을 신중히 분별했다.

사르마티아인(알란족과 오세트인을 포함)들은 동부 이란어군 화자로서,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인이라고 간주되었고,[80] 이란족의 후손이라고 거의 대부분 생각된다.[81]

비잔티움의 사료들은 860년경에 콘스탄티노폴을 공격한 루스인 약탈자들을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스키타이인들과 민족적 관련이 전혀 없음에도, 자신들의 동시대의 기록물에서 “타우로스키타이인”이라고 나타내기도 했다. 포티오스 1세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동안에 루스인들에게 스키타이인이라는 용어를 적용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고고학 [ 편집 ]

스키타이의 고고학적 유물에는 쿠르간 무덤 (무기, 마구, 스키타이풍의 야생동물 예술품 등의 “스키타이 3특징”을 포함하는, “왕족 쿠르간”을 구성하는 단순한 예시부터 ), 황금, 비단, 짐승의 제물 등을 포함하며, 이들의 유적지 곳곳에 인신공희 의심을 받기도 한다.[82][83] 미라 처리 기술과 영구 동토는 몇몇 발견물들의 상대적인 보존을 도왔다. 스키타이 고고학은 북부 폰토스 스키타이 스텝의 도시들과 요새를 조사하기도 한다.[84]

투바 공화국의 아르잔 및 다른 곳에서 출토된 호화로운 스키타이 부장품들은 기원전 900년경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볼가강 하류에서 발견된 한 무덤은 유사한 시기의 것이며, 스키타이 영토의 동유럽 끝에 위치한 스테블레프의 무덤 중 하나는 기원전 8세기 말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85]

고고학자들은 스키타이 유물 및 유적지를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1기 – 스키타이 이전 또는 원시 스키타이 시기: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 중반까지

2기 – 초기 스키타이 시기: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3기 – 고전 스키타이 시기 :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고고학계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 초기인 중앙 아시아의 사얀-알타이 지역과 후기인 동유럽의 북 폰토스 스텝 두 개의 뚜렷한 정착지로 나누어 기록한다.[86]

폰토스 스텝의 서쪽 끝 및 유럽으로 진입하는 지역에 대한 “좁은” 스키타이 정의와 관련한 대안 체계는 다음과 같다:

초기 스키타이 – 기원전 8세기 중반 또는 기원전 7세기 초에서 대략 기원전 500년까지

고전 스키타이 또는 중기 스키타이 – 대략 기원전 500년에서 대략 기원전 300년까지

말기 스키타이 – 대략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2세기 초까지, 크림반도와 드니프르강 하류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9]

쿠르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쿠르간 (고고학) 입니다.

쿠르간이라는 거대한 봉분 (일부는 높이가 20m를 넘음)은 스키타이와 관련된 매우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제공한다. 이 봉분들은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의 스텝 지역을 관통하여, 몽골에서 발칸반도까지 고지대와 습지대를 따라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유라시아 스텝 벨트에 위치해있다. 이 무덤에서 고고학자들은 스키타이의 생활과 예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87] 몇몇 스키타이 무덤들은 그리스, 인도 지역의 기술들의 흔적이 밝혀졌고, 스키타이인들 사이에 그리스화, 및 다른 토착 지역의 문화에 대한 동화 과정임을 나타낸다.[88]

봉분을 의미하는 우크라이나어 단어 쿠르한 (우크라이나어: Курган)은 러시아어 용어 쿠르간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성”을 뜻하는 튀르크어족 단어에서 유래했다.[89]

일부 스키타이-사르마티아 문화는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 설화가 생기게 했을 지도 모른다. 무장한 여성들의 무덤들이 남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데이비드 앤서니는 “돈강 하류와 볼가강 하류에 있는 스키타이-사르마티아 ‘전사들의 무덤’의 대략 20%는 남자들인거처럼 전투 복장을 갖춘 여성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러한 풍습이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 전설에 영감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다.[90]

Sengileevskoe-2 쿠르간의 발굴 현장에서, 무덤 인근에 대마초를 태우고 있을 동안 강력한 아편 음료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코팅을 한 황금 그릇이 발견되었다. 그 황금 그릇은 복식과 무기를 나타내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91]

파지르크 문화 [ 편집 ]

파지르크인 기수. 파지르크인들은 스키타이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92] 기원전 300년경 무덤에서 발견된 그림에서 펠트 모자를 쓴기수. 파지르크인들은 스키타이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파지르크 문화 입니다.

현대 학자들에게 조사된 동부 스키타이 고분군에는 남부 시베리아 (몽골 인근)의 알타이 산맥에 있는 노보시비르스크 남쪽, 알타이 공화국의 울라간 (붉은) 지구에 있는 파지르크 고분군 쿠르간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1925년-1949년 사이에 발견된 5개의 대형 봉분과 1개의 소형 봉분에서 파지르크 문화를 추론했으며, 이 봉분 중에 하나는 1947년에 러시아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루덴코가 발굴했다. 봉분들은 바위와 돌로 된 커다란 케언으로 덮인 낙엽송으로 만든 목곽을 봉했다.[93]

파지르크 문화는 사카이와 관련된 지역에서 기원전 7-3세기 사이에 번성했다.

일반적인 파지르크 문화의 무덤들은 흔한 도구들만 포함하고 있으나, 그중에 한 곳에서, 고고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양털 융단인 그 유명한 파지르크 카펫을 발견했다. 다른 놀라운 발견물에는 기원전 5-4세기의 것으로 잘 보존된, 4미터 높이의 바퀴가 있는 장례용 마차가 있다.

빌스크 발굴지 [ 편집 ]

폴타바 (우크라이나) 인근 마을 빌스크 (겔로누스 참조)에서 이뤄진 최근의 발굴은 그 당시 세상에 어떤 도시들보다 큰 “거대 도시”를 찾아냈다 (빌스크 유적지). 보리스 슈람코가 이끄는 고고학자 팀은 이 유적지를 스키티아의 수도로 주장되는 겔로누스의 터라고 잠정적으로 여겼다. 도시의 성곽과 40 평방 킬로미터의 넓은 지역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크기를 넘어섰다. 우크라이나 스텝의 북쪽 경계에 있어서 남북의 무역로에 대한 전략적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기원전 5-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들로 판단할 때, 작업 공방과 그리스 도자기가 풍부했을 것이라 본다.

틸리아 테페 유물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틸리아 테페 입니다.

셰베르간 인근 북부 아프가니스탄 (과거 박트리아)에 있는 틸리아 테페 (“황금 언덕”이라는 뜻)에서 1968년에 발견된 유적지는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극도로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다섯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무덤들로 이뤄졌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보통 잠깐 거주했던 스키타이 부족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대체로 발견된 무덤들에서 뛰어난 장신구의 수 천 조각이 나왔는데, 이 장신구들은 보통 금, 터키석, 청금석 등을 조합한 것들이다.

뛰어난 수준의 문화적 싱크리티즘이 유물들에 스며들었다. 헬레니즘의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영향력들이 기원전 140년경까지 같은 지역에 셀레우코스 제국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존재와, 기원후가 시작 될 때까지 인도아 대륙 북서쪽에 인도-그리스 왕국이 남아있던 덕에, 많은 형태와 인간의 묘사 (아모리니에서 원에 있는 아테나의 묘사와 그리스어로 쓰인 아테나의 명칭까지)에서 나타났다. 이런 요소는 당시 박트리아 지역에 문화적 영향력들에 대한 풍부함을 증명한다.

문화와 사회 [ 편집 ]

부족 구분 [ 편집 ]

스키타이인들은 자발적인 연합 정치 체제인 연맹 부족들에서 살았으며, 목초지를 통제하고 대게 말을 탄 목동들로 이뤄진 초원 부족들을 침입해오는 외부자들에 맞서 공동의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가축화된 동물 육종의 생산성은 정주한 농업 사회의 생산성을 크게 앞질렀지만, 초원 경제는 보충적인 농업 생산물도 필요했고, 안정적인 유목 사회는 축산물과 군사적 보호를 대가로, 정주민들과 공생 또는 강압적인 동맹으로 발전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의 주요 세 부족이 리폭사이스, 아르포사이스, 콜라사이스 등 세 형제들에서 전래했다고 언급한다.[94]

형제들의 통치 기간에, 모두 황금으로 된 쟁기, 멍에, 도끼, 그릇 들이 하늘에서 스키타이의 영토로 떨어졌다. 형제 중에 첫째 형은 그것들을 가져가고 싶었으나, 그가 가까이에 가자 황금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둘째 형도 그 물건들에 접근했으나, 똑같은 결과가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셋째가 다가가자, 불이 꺼졌고 황금으로 된 선물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 뒤에 두 형들은 막내 동생을 왕으로 추대했고, 그 이후에 황금의 선물들을 스키타이 왕이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켰으며, 매년 막대한 공물을 갖고 다가갔다.[95]

헤로도토스는 또한 다른 스키타이인들을 다스렸던 엘리트 계층인 로열 클랜 또는 왕족들을 언급한다:

게로스강의 반대편에는 “왕족”의 땅이라 불리는 지역과 스키타이인들 중에 가장 용감하고 강력한 이들이 있으며, 이들은 다른 스키타이인들을 자신들의 백성이라고 여긴다.[96]

이 사실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두 형들은 막대 동생에게 왕의 권력을 온전히 넘겨주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리폭사이스는 아우카타이 (Auchatai)라는 스키타이 부족의 후손이고, 차남 아르포사이스는 카티아로이(Catiaroi)와 트라스피아인(Traspians)의 후손이며, 막내 동생은 파랄라타이(Paralatai)라고 불리는 “왕실”의 부족의 후손이며, 스키타이인들이 말하길, 이 왕실 부족 전체는 이들의 왕의 이름을 붙은 스콜로토이 (Scolotoi)라고 불리지만, 그리스인들은 이들에게 스키타이인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따라서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의 기원 시기인 최초의 왕 타르기타오스 (Targitaos) 때부터 이들을 정복하려 했던 다레이오스(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12년)까지, 자신들이 만들어졌고 말하며, 천 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재했다고 한다.[97]

봉분(튀르크어 명칭인 쿠르간으로 알려진) 속 스키타이 왕들의 화려한 매장품들은 강력한 엘리트 계층의 존재에 대한 증거이다. 엘리트 계층들은 일부 고전 사료들에서 “로열 다하에”라고 불렸지만, 문자 그대로의 다하에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거주했고, 현재는 단절된 인도유럽민족으로 보통 여겨지며, 스키타이인들과는 구분됐다.

학자들이 세 부족들을 전통적인 방식인 지리학적 구분 방식으로 다뤘지만, 조르주 뒤메질은 앞에서 언급한 신성한 선물들을 초창기 원시 인도유럽 사회에 대한 그의 삼기능론적 관점으로 쟁기와 멍에는 농민, 도끼는 전사, 그릇은 성직자들을 상징한다는 예시를 들며 사회적 계급의 상징으로서 해석했다.[98] 뒤메질에 의하면, “콜라사이스의 성공에 반대되는 아르포사이스와 리포사이스의 헛된 시도는 고위 계층이 왜 농민이나 성직자 계층이 아닌 전사 계층인 것을 설명했을 것이다.”라고 한다.[99]

군사 [ 편집 ]

칼집

호전적인 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은 기마술, 말 등에서 합성궁의 이른 사용으로 알려져있다. 뛰어난 기동력을 가진 스키타이인들은 스텝 지역으로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성가신 보병들과 기병들의 공격을 좀 더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전술은 적들을 약화시키고, 더욱 패배시키기 쉽게 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악명높은 호전적인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싸웠고 싸우기 위해 살았으며”, “적들의 피를 마시고 적들의 머리가죽을 냅킨으로 사용했다.”[92][100] 가까운 사이끼리 동맹을 맺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의 지배를 받은 스키타이인들은 궁병들로 유명했고, 용병으로 많은 직업들을 얻었다. 스키타이 엘리트 계층들은 잎갈나무로 된 목관 위로 흙을 덮은, 높은 봉분인 쿠르간이 있었으며, 낙엽성의 침엽수인 잎갈나무는 겨울에도 견디는, 재생을 하는 나무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거일지도 모른다. 알타이 산맥에 파지르크 고분군은 기원전 5세기의 얼음 처녀를 포함한 “파지르크 문화”의 스키타이인들을 일부 특히 보존했다.

우르미아 호 남쪽의 사키즈라는 마을 인근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680년과 625년 사이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금과 은으로 만든 금속공예품과 상아로 구성된 지비에 보물은 스키타이의 “동물의장” 특징을 지닌 유물들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발견된 한 은제 접시는 아직까지 해독되지 않았으나 스키타이 문자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또한 날카롭고 독성을 가진 화살들의 사용,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말의 피를 먹고 자랐다.”라고 하는 말을 중점에 둔 유목민적인 삶, 유격전의 전술로 유명했다.

의복 [ 편집 ]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계단의 부조에 있는 스키타이 파견단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의 복장은 부츠 안쪽으로 걷어 집어 넣은, 덧대어지고 누벼진 가죽 바지, 열린 튜닉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등자나 안장 없이, 안장 깔개만을 써서 말을 탔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이 의복을 만들고 연기를 내어 자신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대마초를 사용했다고 기록했으며(Hist. 4.73–75), 고고학적으로도 장례 의식에서 대마초의 사용을 확인했다.

스키타이 여성들은 남자들과 상당히 유사한 복장을 했다. 1990년대에 발견된, 파지르크 고분은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의 유골이 있었는데, 각 유골 모두 무기, 화살, 도끼 들이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사카인들이 “큰 모자와 … 바지를 착용했다.”라고 언급했다. 의복은 보통 평조된 양모, 마포, 견직물, 펠트, 가죽 및 피혁으로 이뤄졌다.

파지르크의 유물들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스키타이인/사카인들이 입었던 의류들을 많이 전해주었다. 아파다나, 베히스튠의 고대 페르시아의 박육조와 비문들, 고대 그리스 토기, 우크라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 등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발견물들은 스키타이의 의류에 대한 실제적 묘사들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사카인들이 “끝 쪽이 가늘어지고 위로 뻣뻣하게 서 있는 큰 모자”를 썼다고 한다. 아시아의 사카인들의 모자는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계단 부조에서 귀를 넘어 목덜미로 늘어진, 높게 솟은 모자의 모습으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101] 중국에서 도나우강 유역까지, 스키타이인들은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것처럼 원뿔 모양이거나 프리지아 모자처럼 좀 더 둥근 모양 등 다양하고 부드러운 모자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 여성들은 다양한 머리 장신구들을 착용했고, 그 중에는 납작한 원통에 더 가까운 모양의 일부 원뿔이 있었고, 금속 (금으로 된) 장식판으로 장식된 것도 있었다.

파지르크 발견물들(남부 시베리아, 우랄과 카자흐스탄 계곡에서도 볼 수 있는)을 기반으로 한 일부 모자들은 북중국에 남아있는 유목민 모자와 유사한, 모자 위에 단단히 부착되어 쓰개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동물 문양의 목제 구조물로 덮였다. 남성과 여성 전사들은 보통 펠트 아플리케나 금속(금제) 장식판으로 장식한 튜닉을 입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는 사카인들의 튜닉을 관찰할 좋은 시작점을 다시 한번 제공한다. 여기서 복장은 소유자의 무기 (검, 단검, 고리토스, 전투도끼, 숫돌 등)는 벨트에 결속되어있고, 무릎까지 내려오고 벨트로 고정시킨, 바느질을 한 긴 소매의 옷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된 다양한 고고학적 발견물들을 바탕으로, 스키타이 남성과 여성들은 항상 벨트로 결속된, 긴 소매의 튜닉을 착용했고, 자주 벨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카자흐스탄의 사카인(이시크 황금 남자/처녀)들은 짧고 폰토스 스텝의 스키타이의 것 보다 좀 더 딱 맞는 튜닉을 착용했다.

예술 [ 편집 ]

기원전 4세기의 오르도스 문화 권의 청동 플라크; 말이 호랑이에게 공격받고 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스키타이 미술 입니다.

흑해의 북쪽 곶을 따라 있는 그리스 식민지에 있는 장인들과 스키타이인의 접촉은 전 세계의 박물관에서 가장 화려한 유물들에 속하는, 그 유명한 스키타이 황금 장식물들 만들어냈다. 민족지학적으로 극도로 유용하기도 한, 금속 공예품에서 스키타이인을 수염난 장발의 코카소이드로 묘사한다. “그리스 스키타이 양식” 작품들은 스키타이인들이 그리스 문화 요소들을 이미 받아들인, 후기 시기부터 스키타이인을 헬레닉 스타일에 가깝게 묘사했으며, 가장 정교한 왕실 조각들은 이 수익성 있는 시장을 위해 그리스 금속세공업자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유라시아 스텝 전역을 가로지르는 다른 금속 공예품들은 동물의장을 사용하며, 싸우거나 아래로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동물을 나타낸다. 이 양식의 기원은 불명확하지만, 인근 정주민들의 미술의 영향들을 주고 받았을 것이며, 유라시아의 넓은 곳을 가로지르는 소재에 관한 빠른 경로로 작용했다.

표범 모양의 금제 브로치, 방패나 가슴판 용으로 추정하며, 길이 33 cm에, 기원전 7세기 말의 것이다

남아있는 스키타이 유물들은 개인 장신구, 무기용 장신구, 말의 장신구 등 거의 대부분이 작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금속세공품들이다. 그러나 영구동토에서 나온 발견물들은 문신은 말할 것도 없이, 화려하고 선명한 직물, 가죽제품, 목공품들을 선보인다. 서부 스카타이의 왕실 조각들은 그리스의 사실주의를 지닌 말을 공격하는 날개 달린 그리폰, 싸우고 있는 사슴과 독수리 등 중앙 아시아의 동물 요소를 만들어내고, 젖을 짜는 양 같은 일상적 요소들과 결합시켜냈다.

2000년에, ‘스키타이의 황금’이라는 전시회가 북미 대중들에게 흑해의 북쪽에 있던 그리스 장인들이 만들어내고, 현재 우크라이나의 평원에 봉분 속에 묻힌, 스키타이 유물들이 소개했다. 2001년에 훼손되지 않은 왕족 스키타이의 무덤의 발견은 그리스 양식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스키타이 동물의상이라는 것을 알렸다. 시베리아의 투바 공화국의 수도인 키질 근처에서 발견된 이 무덤에서 44파운드 무게의 금들이 로열 스키타이 부부를 짓누르고 있었다.

중앙 아시아의 고대 영향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유목민들이 있는 서부와 서북부 국경지역과 중국 본토 지역의 접촉에 따라 중국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스텝 지역의 스키타이풍의 동물의상을 받아들였고 (싸우는 자세를 취한 동물의 묘사), 특히 금이나 청동으로 된 정사각형의 허리띠 장신구에 그랬고, 비취와 동석으로 자신들만의 양식으로도 만들어냈다.[103][104]

스키타이의 영향력은 심지어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확인되었다. 신라의 금관 같은 여러 한국의 유물들이 스키타이 양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105] 교류를 통해 전달된, 유사한 금관이 고훈 시대 일본에서 찾아 볼 수 있기도 하다.[106]

종교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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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인들의 종교적 믿음은 조로아스터교 이전 이란계 민족 종교의 한 형태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계 민족인 페르시아인의 신앙과는 달랐다.[107] 스키타이 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이는 타비티로, 이후에 페르시아인들의 불의 신 아타르와 인도아리아인의 불의 신 아그니로 대체 된다.[107] 스키타이인의 신앙은 조로아스터교와 힌두교의 체계 보다는 좀 더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점쟁이들이 최면 상태와 예언을 유도하기 위한 대마초의 사용은 스키타이 신앙 체계의 특징이었다.[107] 성직자 계급인, 에나레이는 아르김파사라는 여신을 숭배했고 여성이던 것으로 추측한다.

언어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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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스키타이 집단의 언어들은 확실히 증명된 바가 없고, 이 언어들의 내적 차이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들 언어는 동부 이란어군 가족에 속한다. “스키타이-시베리아”고고학 문화에 포함된 모든 이들이 이 어군의 언어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스키타이어는 서쪽의 “스키타이-사르마티아어”와 동쪽의 “스키타이-코탄어” 또는 사카어라는 방언연속체가 형성됐을 것이다.[108] 현대 학계의 일치 사항은 사카어는 북인도의 파미르어의 선조격 언어인 것이다.[109] 스키타이어는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에 슬라브족과 튀르크족의 확장에 대한 결과로,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동화되었다. 일부 동부 어군의 잔재가 오늘날 중앙 아시아의 파슈토어와 파미르어로서 살아남았다. 구 스키타이의 서부 (사르마티아) 어군은 알란족의 중세 언어로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현대의 오세트어가 되었다.[110][111] 이 문서들은 튀르크어족계 카라한인들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 이슬람교가 도래하기 이전에 거의 대부분 작성되었다.[111][112]

생김새 [ 편집 ]

초기 생김새 분석은 스키타이인들이 동부 (파지르크 지역)에 있다하더라도, 지역과 시기 그리고 신분에 따라 혼혈인 ‘유럽-몽골인종”의 유전형이 발생하기도 했음에도 거의 대부분 “유럽인종”의 특징을 지녔을 것이라 만장일치로 결론내렸다.[113]

예술품에서, 스키타이인들은 분명한 유럽인의 특징들로 묘사되었다.[114] 역사에서,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스키티아의 부디니족을 붉은 머리에 회색빛 눈을 가진 이들로 묘사했다.[114]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스키타이인들이 붉으스름 (purron)한 피부를 지녔다고 했다.[114][115]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시인 칼리마코스는 스키티아의 아리스마페스족{Arismapes (아리마스피족)}들을 약간 금발이라 묘사했다.[114][116][114] 《박물지》에서, 1세기 로마 작가 대 플리니우스는 세레스를, 때로는 이란계 부족이나 토하라인들처럼 적발에 푸른 눈을 지녔다고 간주했다.[114][117] 2세기 말, 기독교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스키타이인들이 약간 금발이라고 했다.[114][118] 2세기 그리스 철학자 폴레몬은 적발과 푸르거나 회색빛 눈으로 특정 지어지는 북방인들 중에 하나에 스키타이인들을 포함시켰다.[114] 2세기 말 또는 3세기 초에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는 사르마티아인, 스키타이인, 다른 북방 민족들이 붉으스름한 머리카락을 지녔다고 했다.[114][119] 4세기 로마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스키타이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민족인 알란인들이 키가 크고, 보통 금발에 회색빛 눈을 지녔다고 하였다.[120] 4세기 니사의 주교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스키타이인들이 밝은 피부색에 보통 금발이라고 기록을 남겼다.[121] 종종 폴레몬을 따르는, 5세기 의사 아다만티우스는 스키타이인들이 보통 금발이라 했다.[114][122] 동게르만족들이 후기 로마 자료에서 “스키타이인”이라고 자주 나타나기에, 아다만티우스와 그레고리우스의 생김새 묘사가 동게르만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역사기록학 [ 편집 ]

헤로도토스 [ 편집 ]

헤로도토스는 스키티아 북쪽 지역에 겔로누스라는 거대 도시에 기록을 남겼고,[123] 오늘날 우크라이나 빌스크 인근의 한 지역으로 추정한다:

부디니족은 크고 강력한 민족이다. 그들은 모두 깊고 푸른 눈과 밝은 적발을 지녔다. 이들의 영토에는 겔로누스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으며, 모두 목제로 된, 높은 벽과 대략 5.5km 마다 설치된 30개의 감시탑 ( τριήκοντα σταδίων )으로 둘러싸였다. 그곳의 모든 주택들과 신전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이곳의 신전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고, 모두 목제로 된 그리스풍의 그림, 제단으로 장식되었다. 3년 마다 바쿠스를 기리는 축제가 있으며, 이 축제에서 토착민들은 바쿠스의 분노에 빠진다. 사실 겔로누스인들은 과거의 그리스인들로, 해안가를 따라 있는 작업장에서 쫒겨나, 부디니족에게 망명을 와서 거처를 얻었다. 이들은 심지어 반은 그리스어로 반은 스키타이어로 말을 한다.

헤로도토스와 다른 고전 역사가들은 스키타이족 근처에서 사는 꽤 많은 부족들을 기록했고, 아마도 동일한 일반적 환경과 흔히 말하는 “스키타이 문화”라는 유목민들의 스텝 문화를 공유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학자들은 “언어학적 스키타이인”과 그들의 정확한 관계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이들 부족들에는 아가티르소이족, 겔로누스족, 부디니족, 네우로이족들이 포함된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의 기원에 관한 네 가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첫 번째 (4.7) 이야기는 스키타이의 전설에 관한 것으로, 초대 스키타이왕 타르기타우스 (Targitaus)를 하늘신과 드네프르강의 딸의 자녀로 나타낸다. 타르기타우스는 페르시아인들이 스키티아로 침입하기 전이나 기원전 1,500년 이전까지 1천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 하늘에서 쟁기, 멍에, 컵, 전투도끼 등 금으로 된 네 개의 도구가 떨어졌다. 막내 아들만이 금 도구에서 불이 붙지 않게 만지는 데 성공했고, 이 아들의 후손들은 헤도도토스가 “왕족 스키타이”라고 불렀고, 금으로 된 도구들을 지키는 일을 계속했다. 두 번째 (4.8) 이야기는 폰토스계 그리스인들이 전하는 전설로, 스키타이인들의 초대 왕이 헤라클레스와 에키드나의 자녀로 등장한다. 세 번째 (4.11) 헤로도토스가 말하길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하며, 스키타이인들이 마사게타이족 (페르시아 북동쪽에 살았던 강력한 스텝 유목민족)과 전쟁이 이들을 서쪽으로 가게 할 때까지, 중앙 아시아 남부 지역에서 있다가 왔다고 한다. 네 번째 (4.13) 이야기는 헤로도토스가 술에 흠뻑 취한 체로 북동쪽으로 스키티아 너머 더 멀리 갔다가 주장하는 그리스 음유시인 아리스테아스의 전설에서 기인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은 이세도네스족과 분쟁이 일어날 때까지 원래 리파이우스 산맥 남쪽에 살았다가, 키클롭스들의 압박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인과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은 아시아에 사는 스키타이인들을 사카족이라 나타냈다. 헤로도토스 (IV.64)는 이들이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스키타이인이라고 묘사했다:

사카이 또는 스키타이인들은 바지를 입었고, 한쪽이 솟아있는 크고 뻣뻣한 모자를 썼다. 그들은 자신들 나라의 활과 단검을 들고 다녔으며, 추가로 전투 도끼 또는 사가리스를 휴대했다. 그들은 진정 아미르기오이 (서방) 스키타이족이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그들에게 붙인 이름이기에 사카이라고 부른다.

스트라본 [ 편집 ]

기원전 1세기에, 그리스계 로마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너머 중앙 아시아에 위치했던 동부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124]

스트라본은 그가 “스키타이인”일 것이라 믿었던 다양한 부족 명칭을 기록했고,[124] 그렇게 함으로써 동중앙아시아의 관련없는 부족들과 스키타이인들을 거의 확실히 합쳐버렸다.

카스피해에서 시작하는, 오늘날 스키타이인들의 많은 이들은 다예라고 불리며, 이들 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자들은 마사게타이족과 사카이라고 불리지만, 각각의 스키타이 부족민들이 자신들만의 이름이 있음에도, 모든 나머지 지역들은 스키타이인라는 일반적인 명칭이 주어진다. 스키타이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목민들이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들은 그리스인들을 박트리아에서 몰아낸 이들로, 바로 아시이족, 파시아니족, 토카리족, 사카라울리족이며, 이들은 사카이와 소그디아니의 나라들과 인접하고 사카이에게 정복되었던 야크사르테스강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왔다. 그리고 다예에 말하자면, 그들 중 일부는 아파르니, 또 몇몇은 크산티이, 그리고 그중에 몇몇은 피수리라고 불린다. 오늘날에 아르파니족들은 히르카니아와 바다와 맞닿는 곳에 가까이 있으며, 나머지 부족들은 아리아를 향해 쭉 뻗어 있는 지역에까지 퍼져있다. 이들과 히르카니아, 파르티아 그리고 저 멀리 아리아 사이는 거대한 메마른 사막이 있으며, 스키타이인들은 이 사막을 가로질러 히르카니아, 네사이아, 파르티아 평야에도 살았다. 이들은 조공을 받치는 데 동의했는데, 이 조공은 특정 정해진 시기에 이들이 땅을 휘젓고 약탈을 허용하게 해줬다. 하지만 허용한 것 보다 더 난동을 피워서, 전쟁이 뒤따랐고, 결국 그들의 불만이 생겨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항상 이웃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서로의 차이를 해결하는 등 다른 유목민들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스트라본, 지리학, 11.8.1; transl. 1903 by H.C. Hamilton & W. Falconer.)[124]

인도 자료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인도-스키타이 입니다.

사카인들은 푸라나, 마누 법전,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파탄잘리의 마하브스야 등을 포함한 인도 서적들에서 수 차례 언급되었다.

유전학 [ 편집 ]

수많은 고대의 미토콘드리아 DNA (mtDNA) 샘플들은 추정상 옛 스키타이인들의 “선조들”인 유라시아 스텝과 시베리아 극지대에 있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유해를 통해 복원되었다. Y-DNA와 비교했을 때, mtDNA는 세포 당 많은 mtDNA 복제본이 있어서 고대 표본들을 추출하고 늘리는 데 좀 더 수월하다.

초창기 연구들은 mtDNA의 일부만을 분석할 수 있었으므로, 현대의 서유라시아인이나 동유라시아인과 관련성에 대한 넓은 상관관계들만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예시로, 2002년 연구에서 카자흐스탄의 베랄 (Beral) 지역 쿠르간에서 매장된 사카 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분석되었다. 두 유골의 유전자들은 밀접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HV1 미토콘드리아 sequence는 유럽인들에서 주로 흔한 Anderson sequence와 유사했다. 여성의 HV1 sequence는 아시아의 기원을 한 거에 가까웠음을 나타냈다.[125]

좀더 최근 연구들에서는 특정한 mtDNA 혈통을 위주로 가능할 수 있었다. 예시로, 2004년 연구는 알타이 공화국의 키질 (Kizil) 지역의 “스키타이-시베리아인” 남성에서 얻은 HV1 sequence를 조사했고, 모계쪽 혈통이 지리학적으로 서부 유라시아 혈통인 N1a에 속했다.[126] 같은 연구 팀이 알타이 공화국에서 발견된 두 스키타이-시베리아 유골에서 나온 mtDNA를 다시 조사했는데, 이들이 전형적인 “유럽-몽골인종의 혼혈”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유골들 중에 하나는 모계쪽 혈통으로 F2a을, 나머지 한 명은 D 혈통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으며, 두 혈통 모두 동부 유라시아인들의 특징들이다.[127]

이 초기 연구들은 러시아 학자들의 증가하는 연구량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이들 연구의 결론은 (i)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동서 유라시아 혈통의 혼혈들은 서 유라시아 혈통과 함께 동쪽 멀리에서도 발견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ii) 철기 시대 쯤에 서부 스텝에서 동 유라시아 혈통의 늘어나는 증거와 함께 명백한 역전이 일어났다; (iii) 발칸반도-다뉴브, 이란 지역들 등 남쪽에서 스텝 지역으로 향한 이주민들의 역할 가능성이 있다.[128][129][130]

그러나 이 비교는 현재는 세련되지 않은 기술인 단연쇄반복 (STRs) 로 보여지는 것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2009년 Keyser et al가 한 연구 이래로, “유럽계” R1a (M458, Z280) 와 “남아시아계” R1a (Z93)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집단과 지리학적으로 명확한 SNPs가 발견되었다.[131] 이들 보다 구체적인 하위 항목에 대한 고대 스키타이-시베리아인 샘플 재분석이 유라시아 스텝 집단들이 궁극적으로 동유럽이나 유라시아 중 하나나 그 둘 모두를 기원으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분명하게 할 것이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유럽의 “고전” 스키타이인들, 중앙 아시아의 사카이, 또는 스키타이 문화에 속하는 극동 (알타이 지역)의 이름없는 유목민 집단 등 어느 집단이 연구되었는가에 달려있기도 하다.

철기 시대 흑해의 스키타이인들의 미토콘드리아 혈통에 대한 2017년 연구에 의하면, 다른 고대 집단과 북 폰토스 스텝 지역 (NPR) 스키타이인의 mtDNA 혈통 비교가 청동기 시대 스루브나야 집단의 견본과 가까운 유전적 유사성을 암시하며, 이 유사성은 스루브나야인들이 NPR 스키타이인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고고학적 가설과 일치한다.[132]

최근 새로운 aDNA 실험들은 유라시아 전역의 다양한 고대 표본들로 이뤄졌고, 그 중에 두 개는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때 SNPs의 현대 기술들 (이전 실험의 STRs와 비교했을 때)이 사용되었다. 볼가 지역과 유럽 스텝 지역의 철기 스키타이 표본은 동유럽인도 남·서아시아인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두 표본은 남·중앙아시아의 이란어군 화자들과 서아시아의 북부 지역 사람들과 동유럽 사람들 간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스키타인들의 지리학적 기원과 일치한다.[133][134][135]

남부 우랄 지역, 동카자흐스탄, 투바에서 나온 표본에 대한 고대 유전자 다형 분석은 서부와 동부 스키타이인들이 각자의 지리학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고 기원전 1천년 동안에 서부 집단에서 동부 집단으로 유전자 흐름이 비대칭적인 대단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는 것을 반대의 경우 보다 나타냈다. 철기 시대 서부 스키타이인과 관련된 현대의 집단은 캅카스, 러시아, 중앙 아시아의 다양한 민족 집단들에서 발견되고, 많은 이란인과 다른 인도 유럽어 화자 집단들 사이에도 퍼져있다. 동부 스키타이 집단과 유전적 유사성이 있는 집단들은 거의 대부분 튀르크어 화자들, 특히나 튀르크어의 킵차크어 계열 화자들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결과는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스텝 지역을 가로지르는 유전자 흐름과 일치한다.[133][136][137]

유산 [ 편집 ]

근세 시기 사용 [ 편집 ]

그리스 역사가들이 구축한 평판 때문에, 스키타이인들은 오랫동안 잔인함과 야만함의 전형으로서 역할을 했다.

신약 성경에 있는 파울루스가 쓴 편지에서, “스키타이인”은 누군가들에게는 경멸적으로 여겨지나, 그리스도에서는 신에게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예시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없다.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없다. 야만인도, 스키타이인들 조차 없다. 노예나 자유인도 없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있다.[138]

예시로 셰익스피어는 스키타이인들이 그들의 자녀를 먹어버렸다라는 전설을 자신의 희곡 리어왕에서 언급한다:

야만스러운 스키타이인이나

자신의 식욕을 채우기 위해

자식들을 먹는 자라도, 내 가슴엔

가까울 것이며 내 동정과 구원을 얻으리라,

나의 딸인거처럼 말이다.[139]

특징적으로, 아일랜드에 대한 근세 잉글랜드의 담론은 아일랜드의 토착민들이 이 고대의 “유령”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종종 스키타이인들과 비교를 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인들이 주장했던 조상들만큼이나 야만스러운 이들임을 알렸다. 에드먼드 스펜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생각하기에 아일랜드에 정착한 민족 중에 최초는 스키타이인일 것이라 본다 … which firste inhabitinge and afterwarde stretchinge themselves forthe into the lande as theire numbers increased named it all of themselues Scuttenlande which more brieflye is Called Scuttlande or Scotlande.[140]

이 기원의 증거들로, 스펜서는 피를 마시는 것, 유목민적인 생활방식, 망토를 걸치는 것과 특정한 머리카락 모양 등 아일랜드인들의 관습이라 주장하는 것들, 그리고

또한 아일랜드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함성에는 스키타이의 야만성의 경향이 묻어나온다.

인용하였다.

스펜서의 출처 자료들 중 하나인 윌리엄 캠든은 이 기원 전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워낙 오래된 이들이고,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지배자이었으며, 항상 무적이었고, 다른 제국에게 종속된 적이 없었던 것을 보아, 스키타이족의 후예로부터 전래했다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라 생각될 수 없다.[141]

15세기 폴란드 연대기작가 얀 드우고시는 사르마티아인들을 폴란드의 선사시대와 연관 지은 인물이며, 이 연관은 마르친 비엘스키, 마르친 크로메르, 마치에이 미에호비타 등의 다른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이 이어갔다. 다른 유럽인들은 국제 통용 언어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와 민족들에 대한 정보의 상당한 출처를 제공한 미에호비타의 Tractatus de Duabus Sarmatiis에 대한 폴란드의 사르마티즘 관점에 의존한다.[142] 이들 전통에서는 사르마티아인들이 노아의 아들 야벳의 후손들이라 명시한다.[143]

17, 18세기에 러시아 외부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스키타이인들의 후손이라 여겼다. 18세기 시에서 러시아인을 스키타이인이라고 일컫는 것이 전통적인 것이 되었고,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그의 마지막 시, 스키타이족 (1920)에서 이 전통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19세기에 서구의 낭만주의 계열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문학에서 “야만인” 스키타이인을 자유분방하고, 용감하며 민주적인 모든 금발 원시 인도유럽인의 조상으로 변화시켰다.

후예 주장들 [ 편집 ] [92] 스키타이인들 사이에 망명 중인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에 대한 외젠 들라크루아 의 그림

사르마티즘 및 노아의 세대 문서에 이 부분의 추가 정보가 있습니다.

오세트인, 파슈툰인 (특히, 사카자이족), 자트인[144], 파르티아인 (카스피해 동쪽을 본토로 두는 이들로 카스피해 북쪽에서 내려왔을 거라 생각된다.)을 포함한 많은 민족 집단들은 스키타이인의 후손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일부 폴란드인,[142] 픽트족, 게일족, 헝가리인 (특히, 야즈인) 등 다른 민족들의 전설들은 스키타이인에서 기원했다는 언급을 한다. 몇몇 작가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실상 마찬가지로 메디아 제국과 함께 캅카스 알바니아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스키타이인은 몇몇 켈트인의 민족 기원 전설에서 또한 등장한다. 1320년 아브로스 선언문의 두 번째 단락에서, 스코틀랜드 엘리트 계층들은 스키티아가 스코트인들의 옛 본토라고 주장한다. 11세기 《에린 침략의 서》 , 14세기 학자의 지침서와 아일랜드 민속 설화에 의하면, 아일랜드인들은 스키티아에서 기원했고 오검 문자를 만들어 낸 스키타이인 귀족 페니우스 파라사이드의 후손들이라 한다.

카롤링거의 프랑크인 왕들은 메로빙거 왕조의 선조를 게르만계 부족 시캄브리에서 찾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쓴 프랑크인의 역사에 있는 그의 기록들에서 클로비스 세례를 받았을 때, 클로비스는 “Mitis depone colla, Sicamber, adora quod incendisti, incendi quod adorasti.” 말과 함께 시캄브리족으로 일컬어졌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서는 reveals that the 프랑크인들은 시캄브리족이 기원전 11년에 자신들의 족장 프랑크를 기리며 부족명을 바꿨다고 하는 스키타이나 킴메르 부족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다고 밝혔다.

스키타이인들이 특정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켈트 부족들의 시조라는 근거를 하여, 섀런 터너의 앵글로색슨의 역사 같은 대영 제국 시기의 영국 역사기록학은 스키타이인을 앵글로색슨족의 선조로 만들었다.

이 사상은 존 윌슨의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에서 받아들여져, 윌슨은 “유럽 인종, 특히나 앵글로색슨인들이 특정 스키타이 부족의 후손들이고, 이 스키타이 부족은 (중세 시대 이래로 이전에도 말해져 많이 시사되었던)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의 후예들이라는 사상으로 발전시켰다.[145] 사라진 열 지파의 작가이자 현대 유대인 연구소의 교수인 튜더 파핏 (Tudor Parfitt)은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 추종자들이 인용하는 증거가 “분야의 낮은 수준에도 빈약한 구성”이라 지적했다.[146]

관련된 고대 민족 [ 편집 ]

같이 읽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서적 [ 편집 ]

더 읽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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