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황소 | 이중섭은 왜 ‘소’ 그림만 그렸을까? 2719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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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한국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한국의 빈센트 반 고흐라 불리기도 한 그는\r
자신만의 색감으로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습니다.
현재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데요.
그의 작품들을 보다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소가 많다는 것이죠.
그만의 스타일로 그려진 소그림은
매우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데요.
그렇다면, 이중섭은 왜 앙상한 소를 그렸을까요?
#이중섭 #소그림 #근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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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 나무위키:대문

[4][5]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 소가 있다. 이중섭의 그림 ‘황소’는 2006년 35억~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6] ‘황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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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11/2021

View: 5036

이중섭 ‘황소’·’흰소’…모습 드러낸 이건희 컬렉션 : 음악 – 한겨레

이중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1950년대작 <황소>. 저 유명한 소 그림들이 나라의 품으로 들어왔다. 붉은 화면 속에서 검은 눈망울을 번득거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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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8/30/2021

View: 6420

이중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중섭 · 흰 소 (1954년 작품) · 《황소》 · 부부 (1953년 , 현대미술관 소장품) 두 마리의 새가 서로를 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파랑색과 빨간색이 대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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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0/2022

View: 2203

이중섭, 〈황소〉, 1953-1954 – 갤러리현대

이중섭, 〈황소〉, 1953-1954. 이중섭에게 소는 특별한 존재였다. … 소와 닭, 어린이와 가족의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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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alleryhyundai.com

Date Published: 2/29/2021

View: 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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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왜 '소' 그림만 그렸을까?
이중섭은 왜 ‘소’ 그림만 그렸을까?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중섭 황소

  • Author: 예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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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3.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PWmA_-Bws4

03화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의 황소

이중섭

황소

1950년대

26.4 X 38.7 cm

1955년 이중섭이 죽기 1년 전 39세에 첫 개인전이었던 서울 미도파화랑에 출품되었던 약 50여 점 작품 중의 하나로, 그 당시 출품작들이 1954년 통영에서 머물며 그렸던 작품들이 대다수였던 것으로 보아 1954년 통영에서 그린 작품으로 미루어 추정한다. 개인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수금이 잘 안 되어 여전히 이중섭은 죽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첫 개인전을 여는데 도움을 주었던 지인들 중의 한 명인 친구 김광균 시인이 출품작 중에 팔리지 않은 약 20여 점의 작품을 개인 사무실에 보관해 두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 ‘황소’ 작품이다. 이후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간 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이번에 다시 한번 공개되며 화제를 모으게 된다.

흰소, 1953-54, 이중섭, 30.7 X 41.6 cm, 이건희 컬렉션. UPI뉴스 / 문재원 ⓒ UPI뉴스

Lee Jung Seob, 1954. Photo by Jongbae Heo, from galleryhyundai.com

이중섭 Lee Jung-seob 1916 – 1956,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 전쟁 시기를 거쳐 소, 닭, 게, 아이 & 가족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정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 ‘민족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느꼈던 그리움과 사랑, 몸서리치게 힘들게 견뎌야 했던 가난, 어려웠던 시기에 느꼈던 한국인의 감정 등을 고스란히 그림에 표현해 내어 그의 작품이 곧 이중섭이다.

2018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47억에 낙찰된 이중섭의 ‘소’

1916년 북한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부유했던 외가의 도움으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낸다. 중학교 졸업 후,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학교’ 에 진학하여, 미술 교사였던 미국 예일대와 유럽 미술여행까지 다녀왔던 임용련 선생님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하게 된다. ‘한국인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교사의 가르침으로, 이때부터 한국인의 이미지와 가장 맞닿아 있는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임용련, 백남순 부부 copyright 제민일보

1936년, 교사의 권유 & 최초의 백화점인 ‘백두상점’을 열어 성공한 사업가였던 형(이중석)의 경제적 도움으로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한 번 옮긴 학교인 분카가쿠인(文化学院)에서 같은 미술부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국 원산으로 와 결혼식을 올리고, ‘따뜻한 남쪽에서 온 여인’이라는 뜻으로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 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다. 1946년 첫째 아이는 태어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디프테리아’라는 병으로 죽고, 이후 1947년 둘째 이태현(2016년 사망), 1949년 셋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을 두게 된다. 어머니인 마사코와 함께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셋째 아들 이태성은 2005년 3월 아버지인 이중섭의 작품 8점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같은 해 10월 위작으로 밝혀져 우리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중섭과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 1945년, 원산 결혼식

2005년 위작 논란 당시 어머니 마사코(이남덕)와 아들 이태성씨. from daily.hankooki.com

1950년 한국 전쟁 시기에, 북한 원산에 대대적인 폭격이 일어날 거라는 얘기에 짐을 싸고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조카(이영진)가 머물고 있던 제주도까지 내려간다. 1951년 1월부터 약 11개월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가난했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지내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제주 서귀포에 그때 살았던 작은 단칸방인 이중섭 생가와 바로 옆에 이중섭미술관이 있는 이유이다.

제주 이중섭 미술관 from 제주관광공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아래 있는 이중섭의 생가. from hani.co.kr 한겨레

1952년 제주에서의 힘든 가난을 피해 일을 찾아 부산 범일동으로 옮겨 판자촌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는데, 현재 부산 범일동에 ‘이중섭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이유이다. 같은 해 장인의 부고 소식과 극심한 가난으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나고, 여권이 없던 이중섭은 한국에 남는다. 1953년 7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간 이중섭은 일본 히로시마 여관방에서 약 1주일 정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데, 이것이 너무나 안타깝게도 마지막 가족과 함께 지낸 소중한 시간이 된다.

부산 범일동 이중섭 거리, from TripAdvisor Review

1955년 지인들의 도움으로 첫 이중섭 개인전을 서울 미도파백화점에 있던 ‘미도파화랑’에서 연다. 약 20여 점이 팔릴 만큼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지만, 수금이 잘 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 이어진다. 이중섭은 어서 빨리 돈을 벌어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강한 만큼 절망감도 컸다. 거식증, 조현병, 지나친 음주 등으로 몸도 안 좋아져, 1956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간염으로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외롭게 사망한다. 무연고자로 3일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화장 후,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일부는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다.

1955년 이중섭 개인전 미도파화랑 안내장. 사진=이중섭미술관. ⓒ제주의소리

1955년 미도파화랑 이중섭 개인전 당시 이중섭 모습(가운데). ⓒ제주의소리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이중섭의 묘 앞에 그림 속 두 아들의 모습을 새겨 넣은 이중섭 추모비. from ohmynews.com

이중섭의 황소,

열정적인 붉은색 바탕 위에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 끔뻑 거리는 늠름한 황소의 모습이다. 선이 굵은 황소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우직한 소의 성격이 읽힌다. 날카로운 치아가 아닌, 낮게 고른 이빨을 살짝 드러내고 묵직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외국 소 울음소리 무 Moo~ 가 아닌 우리의 소 울음소리, 음메~ 하고 울 것만 같다. 누가 봐도 우리 한국인의 소이다.

‘당신의 황소는 스페인의 투우처럼 무섭다’

1955년 미도파화랑 전시회 이후, 남은 작품 20여 점과 추가 작품 45점 등을 가지고 대구 미공보원에서 개인전을 다시 여는데, 이 전시회를 보던 미공보원장 아서 메타카트 Arthur McTaggart (1915 – 2003) 가 한 말이다. 붉은색 바탕을 보고, 화난 스페인의 투우 Bullfight, 소의 모습을 연상한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의 투우에서 싸우는 소의 모습을 한 번 볼까?

Jose Tomas was among the top Spanish bullfighters performing on the final day. Lluis Gene/Agence Fr

아니, 이 모습이 어떻게 우리의 황소와 비견될 수 있으랴? 너무나 인간미 없는 인간과 소의 모습 아닌가? 누군가 한쪽은 죽어야 끝나는 경기, 등에 창을 꽂고 뿔로 들이받는 인간과 소의 모습, 우리의 한국적인 소의 모습에서는 전혀 없는 감정 아닌가? 소의 얼굴과 인간의 표정 또한 너무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모습, 이중섭이 아서 메카타트의 얘기를 듣고 버럭 화를 낼만 하다.

“내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닌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도 한국의 소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스페인의 화가, 피카소 Pablo Picasso (1881 – 1973) 또한 소의 모습을 작품에 많이 표현했다.

‘Bull’, 1945, Pablo Picasso (a series of eleven lithographs)

Bull’s Head, 1942, Pablo Picasso, Musée Picasso, Paris

지금 보니 확실히 다르구나! 그냥 같은 소라고 생각했었는데 출발이 다른 소였다. 소의 본질이라고 표현한 단순화된 소의 모습 또한 우리의 소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피카소의 소는 스페인에서 많이 보아왔던 투우하는 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황소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끔뻑, 끔뻑한 커다란 눈망울이 스페인의 소에는 찾기 힘들다.

눈,

우리는 저 눈을 통해 소의 감정을 읽는다. 눈을 통해 소와 교감한다. 우리에게는 소하면 너무나 소중하고 선한 저 눈을 빼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저 눈이 슬퍼 보이면 우리의 감정 또한 슬픈 것이리라, 우리 한국인의 감정이 저 눈에 담겨 있다. 우리가 곧 저 황소이다. 황소가 곧 이중섭인 것이다. 이중섭이 자신의 자화상을 단지 1점밖에 그리지 않은 건, 자신의 자화상이 곧 황소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가 그린 그렇게 다양한 황소의 모습이, 황소를 그린 게 아니라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다.

살짝 벌린 입이 무언가 말을 하는 듯하다.

과묵하고 듬직한 한 청년이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듯하다. 이건 말 못 하는 동물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과 메시지를 입을 통해, 얼굴 표정을 통해, 온몸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나 친근해 보이는 우리 가족의 모습, 우리의 모습,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다.

굵은 선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선 하나 하나에 힘의 강약이 느껴져, 힘찬 소의 역동성이 더 느껴진다. 소의 감정이 더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 굵은 선에서 느껴지는 손 끝의 감정이 고스란히 소의 모습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중섭이 어렸을 때 고향인 평안남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 벽화의 그림에 인상을 받고, 그의 그림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한다. 휘갈겨 쓴 듯한 한 폭의 필체를 보는 듯하다. 우리 수묵화의 붓터치를 소의 라인 하나하나에 담아내었다. 하늘로 솟구치는 뿔, 인간의 머리처럼 붓을 범벅 거리며 표현한 황소의 머리, 옆으로 삐친 듯이 표현하여 머리의 움직임을 표현한 귀, 붓의 놀림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포헌 황석봉, 선상에서 1, 2, 2018, 캔버스에 혼합 먹, 130 ×97 ×(2) cm, 개인소장

흰소, 1953-54, 이중섭, 30.7 X 41.6 cm, 이건희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 2,

이중섭 사후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잠깐 보였다가 그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희귀 작품으로 알려져 있던 ‘흰소’ 작품이 이번 이건희 컬렉션 작품으로 깜짝 세상에 알려졌다. ‘흰소’ 라 하여 ‘백의민족’인 우리 한국인의 모습을 전쟁 이후 힘들어하는 소의 모습으로 비추어 그린 게 아닐까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조금은 앙상해 보이는 몸으로 힘겹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그에 반해 하얀 붓터치의 흩날림으로 표현한 힘찬 꼬리의 흔들림은 아직 이 소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고 있는 소와 눈을 마주쳤을 때, 아, 너 역시 우리 한국인의 소이구나.

바닷가의 추억_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이중섭, 32.3×49.5cm, 이건희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 3,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 원산에서 폭격을 피해 제주도로 내려와 지낼 때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955년 미도파화랑 개인전에서 발표된 것으로, 1959년 개인전 이후 행방을 알지 못하던 작품이었는데, 이번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으로 발표되어 모두를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추운 겨울날 제주도 바닷가에 눈발이 휘날리는데 물고기들은 물 위로 튀어 오르고 새들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춤을 추듯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천진난만하게 인간과 동물이 함께 놀고 있다. 어디서도 전쟁통 피난의 어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피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모습이다. 피난으로, 가난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함께 지냈던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음을 바닷가의 추억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People Reading the Newspaper (Number 84)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 1950-52, 이중섭,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Family in Paradise (Number 50) 도원(낙원의 가족), 1950-52, 이중섭,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Fairyland (Number 57) 요정의 나라, 1950-52, 이중섭,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955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미공보원장 아서 메타카트 Arthur McTaggart (1915 – 2003) 이 3점을 구매해 뉴욕 모마 MoMA 에 기증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모마 MoMA 미술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양담배를 싸고 있던 은박지를 못,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고 그림을 그린 다음에 물감을 전체적으로 바르면 긁힌 그림들 사이로 색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 전체 색을 닦아내면 위와 같이 긁힌 부분만 색이 남는 ‘은지화’ 가 된다.

화장실에서 시작한 은지화,

이중섭과 친한 친구였던 화가 한묵이 얘길 하길, 6.25 피난 시절 부산 남포동에서 같이 무대장치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이중섭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무심코 옆에 굴러 다니던 못으로 담뱃갑 은박지 위에 그림을 그려봤다고 한다. 그 후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담뱃갑을 전부 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이후 약 300여 점의 많은 은지화를 그렸다. 가난해서 그림 그릴 종이, 도구를 살 형편이 안 되어 은지화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던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일상의 못, 은박지, 엽서 까지도 새로운 시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두 아이, 1950년대, 이중섭, 은지화/유채/8.5×15.5cm/개인 소장

끌어안고 있는 두 아이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헤어지기 싫어서 꼬옥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이중섭과 가족의 헤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른쪽 위의 ‘대향’은 이중섭의 호이다.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편지, 1954, 이중섭, 10.5 x 25.7 cm, 개인소장

1952년 7월 일본으로 간 가족과 헤어져 지낸지 거의 2년여 즈음, 이중섭이 헤어져 있는 아들 태현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려진 그림으로, 이 그림만 따로 그린 작품도 있다. 편지 속 내용은, ‘엄마, 태성 군, 태현 군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황소 군의 위에는 구름이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힘들었던 가난, 혼자만의 외로움, 짧은 생애, 사후에 더 빛을 보는 화가 등 이러한 이유로 이중섭을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와 많이 연결하여 연상하곤 하지만, 그냥 이중섭은 이중섭으로 기억하고 싶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이중섭, 64.5 x 29.5 cm,

소달구지를 타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전쟁통의 힘들고 절망적인 모습이 아닌, 너무나 밝고 경쾌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평화의 새를 날리고, 꽃을 따서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 그 사이에 웃으면서 아이들이 달구지에서 떨어질까 몸을 잡고, 다리를 잡고 케어하고 있는 엄마, 앞쪽에서 쇠줄을 잡고 너무나 즐겁게 춤을 추듯이 한 손을 하늘로 치켜 세우며 달구지를 이끌고 있는 아빠, 아빠의 손 끝에서 희날리는 구름, 경쾌하게 가족을 실어가고 있는 노란 황금 소의 모습, 보는 내가 다 즐겁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지, 가족과 헤어져 있는 이중섭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꽃, 새, 구름, 그리고 황금 소, 여기서도 이중섭의 ‘황소’ 를 만나는구나.

황소, 1953-54, 이중섭, 32.3 ×49.5cm, 개인소장

같은 듯, 다른 또 다른 황소 작품이다. 전문가도 구별이 쉽지 않아, 이건희 컬렉션 작품이 이 황소로 오인되기도 했다. 무엇이 다른 걸까?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확연히 다른 황소의 모습이다.

이빨 2개가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 뒤의 붉은 배경이 세로 방향, 가로방향의 차이, 또한 황소의 모습이 더 몸집이 있고, 날씬하고의 차이 등이다. 누군가는 오른쪽의 소가 더 젊어 보인다고도 한다.

당신은 어느 황소가 더 마음이 가는가?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email protected]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대표’ 미술관, 이제야 이중섭 ‘소’ 두 마리 품게 된 사연

“창피하지만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작품들이 사실은 없었습니다. 지난 4월에 1488점의 기증작을 받으며 미술관은 말그대로 소원성취를 한 것이죠.”

이건희 기증전이 드러낸 현실

‘국민화가’ 대표작 소장 빈곤

‘이건희 기증전’ 개막에 앞서 20일 기자들과 만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들의 말이었다. 이들은 “이중섭의 소 한 마리 없었던 미술관에 이번 기증으로 두 마리가 한 번에 들어왔다. 이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삼성가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고(故)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주요 문화재와 미술품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늘(21일)부터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선 국보·보물 28건을 포함한 명품 77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선 한국 근대미술 거장 34명의 대표작 58점을 소개한다.

특히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내년 3월13일까지)이란 제목을 내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이응노·천경자 등 한국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이 줄줄이 걸려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국립현대미술관의 현실도 드러났다. 국가대표 미술관인 그곳에 지금까지 이중섭의 ‘소’ 그림 한 점 없었고, 김환기의 점화 역시 단 한 점도 소장돼 있지 않았다는 것.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국민작가’들의 대표작을 이번에 비로소 소장하게 됐다. 이건희 기증전이 드러낸 현실을 다시 짚어본다.

①기증받기 전엔 이중섭 ‘소’ 한 마리 없었다

이번 전시엔 이중섭(1916~1956)의 작품이 총 네 점 출품됐다. 그중 소 그림이 ‘황소'(1950년대)와 ‘흰 소'(1950년대) 등 두 점. 널리 알려져 있듯이 ‘황소’는 이중섭이 일본 유학 시절부터 즐겨 그리던 소재 중 하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소는 인내와 끈기를 뜻하는 민족적 상징물이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이중섭의 소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중섭의 심리 상태와 처지는 소를 통해 표현되고 했다”면서 “힘차면서도 어딘지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게 이중섭 황소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소 그림 한 점 없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소’ 그림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국민화가’ 이중섭의 대표 작품이지만, 그림 한 점 사들이기엔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예컨대 2018년 3월 서울옥션에서 이중섭의 소 그림이 47억 원에 낙찰됐다. 비싸기도 하지만 경매에 자주 나오지도 않는다. 당시 소 그림은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천만 원에 낙찰된 이래 경매에 처음 나온 것이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한 해 동안 작품 구입에 쓸 수 있는 예산은 48억원. 한 해 예산을 다 써야 이중섭 소 그림 한 점을 겨우 살 수 있다는 얘기다. 학예사들이 “이번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비어있던 큰 구멍들이 비로소 메꿔지게 됐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②김환기의 점화도 단 한 점 없었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을 압도하는 그림이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김환기(1913~1974)의 대형 회화 3점의 위용이 남다르다. ‘여인들과 항아리’ ‘산울림 19-II-73#307’ (이하 산울림), ‘3-X-69#120’ 등은 각기 다른 특색으로 끊임없이 실험을 계속하며 변화를 모색한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중 ‘산울림'(1973)은 김환기의 뉴욕 시기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주는 작품. 김환기는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점, 선, 면만으로 이뤄진 추상 실험을 이어왔는데, 1970년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점화를 시도했다. 화면 전체에 물감으로 점을 찍고 반복하며 리듬을 만들어내며 무한히 확산되어가는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산울림’은 김환기의 점화 그림이 한창 무르익은 시절의 그림이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들은 “이번 기증이 이뤄지기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엔 김환기의 점화 역시 단 한 점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산울림’이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첫 김환기 점화라는 얘기다.

한편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선 김환기의 1971년작 푸른색 점화 ‘우주, 5-IV-71 #200’이 8800만 홍콩달러(약 132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국가 미술관 예산으로는 도저히 사들일 수 없는 가격대다.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들은 ‘국가 대표 미술관에 이중섭의 ‘소’도 없고, 김환기의 점화도 없다’고 말하며 이를 항상 안타까워해왔다”면서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미술관 소장품의 심각한 갈증이 일부 해소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해온 이중섭 작품은 11점. 그러나 이번 기증품 중 이중섭 작품은 총 104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등)에 달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에 귀한 이중섭 작품이 대거 들어오며 기증품만으로도 이중섭 개인전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소장품이 풍부해졌다”며 “앞으로 조사·연구를 통해 작품을 차례로 소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③박수근 대작도 한 점 겨우 있었다

이번 전시에선 박수근의 작품이 ‘절구질하는 여인'(1954)’유동'(1963)’농악'(1960년대) 등 총 3점이 전시되고 있다. 3점 모두 대형 작품들이다.

박수근은 A4 종이 사이즈의 소형 작품을 많이 해온 작가로 유명하다. 작품의 80%가 손바닥 2개 크기의 소품인 것. 그래서 박수근의 대작은 매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전시작 3점 모두 이례적으로 큰 사이즈다. 고 이건희 회장은 박수근 작품 가운데 대작은 거의 다 소장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 대작들이 미술관으로 온 것. ‘절구질하는 여인’은 6·25전쟁 직후 야심 차게 그려 국전에 출품해 입선한 작품. ‘농악’은 박수근이 그린 농악 그림 7점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작이다.

지금까지 미술관이 소장해온 박수근 작품은 총 11점. 이중 이번에 전시된 3점과 같은 크기의 대작은 단 한 점뿐이었다. 이번에 ‘이건희 컬렉션’ 중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박수근 작품은 회화 18점, 드로잉 15점 등 총 33점에 달한다. 한편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는 소품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이 기증됐다. 윤범모 관장은 “박수근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오는 11월 덕수궁관에서 열릴 ‘박수근 회고전’에서 많이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국가 자원”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했다. 소장품 0점으로 출발한 미술관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미술관은 이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았다. 윤범모 관장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이번 기증품 1488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켰다”면서 “이게 모두 국가의 자원이다. 이번 기증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가 정말 크다”고 말했다.

이중섭 ‘황소’·‘흰소’…모습 드러낸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언론 설명회…1488점 세부 내역 공개

7월 덕수궁관 전시서 첫선…8월 서울관 특별전 개최

이중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1950년대작 .

저 유명한 소 그림들이 나라의 품으로 들어왔다. 붉은 화면 속에서 검은 눈망울을 번득거리며 입을 벌린 와 눈동자 없는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간신히 발걸음을 내딛는 .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 화가’로 등극한 이중섭(1916~1956)이 60여년 전 삶의 나락에서 몸부림치며 그린 두 걸작이다.

이중섭이 1953~54년 그린 .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사실이 공식 발표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942~2020)의 수집 미술품들(이하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규모와 수준 면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중섭의 그림들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의 한국 근대미술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표작으로 꼽히는 1955년 개인전 출품 그림 와 1970년대 출판물에 소개된 뒤로 오랫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희귀 작품 , 전쟁 피난민들이 눈발을 맞으며 새와 물고기 등과 어우러진 (1950년대) 같은 회화 명작이 19점이나 된다. 뜨거운 가족애가 와닿는 작가 특유의 엽서그림 43점과 전쟁 기간에 담뱃갑 은박지에 못 등으로 그린 은지화 27점까지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이중섭이 1950년대 초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

국립현대미술관은 7일 서울 소격동 서울관에서 윤범모 관장과 김준기 학예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설명회를 열어 삼성가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작품 1488점(1226건)의 세부 내역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내역을 보면, 기증 컬렉션은 나혜석,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백남순,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김환기 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과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등 외국 근대작가 8명 작품 119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섭의 작품들은 모두 104점. 단일 작가로는 평생 산을 그린 화가 유영국(187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이다. 기증작품 대부분이 작가의 필력을 입증하는 양질의 수작급들이어서 이중섭 대표작이 별로 없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단숨에 국내 최고 수준의 이중섭 컬렉션을 확보하게 됐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번 기증품만으로도 별도의 이중섭 미술관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미술관 쪽은 내년 3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 실물들을 소개하는 연속 기획전의 마지막 3부로 ‘이중섭 특별전’을 따로 개최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백남순의 1930년대 대작 .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가의 30년대 작품이다.

미술관 쪽이 내보인 기증 작품 목록에는 주로 책이나 논문의 도판으로만 봤던 한국 근대기 대가들의 희귀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한국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이 1922년 25살에 그린 청록산수대작 를 비롯해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유학파 화가 백남순이 1937년 그린 대작 , 나혜석의 몇 안 되는 진품 그림 , 작품이 4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김종태의 1929년작 유화 , 일제강점기 근대조각사의 선구적 작품인 윤효중의 목조각 등이 눈길을 끈다. 널리 알려진 근대 대가들의 대표작들이 다수 들어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중섭의 명작들 외에 박수근의 대작 과 , 장욱진의 1937년작 와 1950년대 수작 , 김기창의 1955년 대작 , 권진규의 조각상, 유영국의 1960년대 전성기의 연작,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대작 와 푸른빛 전면점화인 73년작 등이 기증작품 목록에 올랐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김환기의 두 대작이다. 가로 길이만 5m를 넘는 는 김환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1980년 이후 40년만에 실물이 드러났다. 전면점화는 그의 추상화풍을 상징하는 핵심 연작인데도 국가미술관이 그동안 단 한점도 소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증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장욱진이 1937년 그린 초기작 .

김종태의 1929년작 .

일반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서양 거장의 작품들이 처음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되면서 상설 전시로 만나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클로드 모네의 를 필두로 폴 고갱의 초기 풍경화, 호안 미로의 , 살바도르 달리의 , 마르크 샤갈의 ,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 카미유 피사로의 등 회화 7점과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이 기증됐다고 미술관 쪽은 밝혔다. 근대작가는 아니지만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로 불리운 진보 미술진영에서 활약한 리얼리즘 작가 신학철씨의 연작일부가 기증작품군에 포함된 것도 이건희 컬렉션의 방대한 수집 범위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증된 작품들 가운데는 회화류가 412점으로 가장 많다.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등으로 각 영역들을 고르게 안배했다.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를 차지한다. 작가의 출생 시기를 기준으로 잡으면 1930년 이전에 태어난 이른바 ‘근대작가’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 수는 약 860점(58%)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작가별 작품 수를 보면, 유영국(187점)과 이중섭(104점)에 이어 유강열(68점), 장욱진(60점), 이응노(56점), 박수근(33점), 변관식(25점), 권진규(24점)의 순으로 나타났다.

역대 최대 규모인 삼성가의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총량 1만점을 넘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특히 근대미술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명품들을 소장품으로 대거 확보해 컬렉션의 양과 질 측면에서 획기적인 도약을 이루게 됐다. 근대미술 전시 때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불문율처럼 작품 대여를 요청했던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청전 이상범이 1922년 그린 청록산수대작 .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

미술관 쪽은 기증 작품들에 붙이는 공식 명칭을 ‘이건희 컬렉션’으로 확정하고 다양한 경로로 작품들을 관객에게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덕수궁관에서 오는 7월 열리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서 일부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8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 전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 점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12월엔 ‘2부: 해외거장’ 전을, 내년 3월엔 ‘3부: 이중섭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미술관 쪽은 이와 별개로 올해 11월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회고전에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들을 대거 선보이며,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컬렉션 일부를 출품할 예정이다.과천관에서는 내년 4월과 9월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관 아카이브가 결합된 기획전 ‘새로운 만남’을 잇따라 연다.지역 미술관과 연계한 순회전도 계획 중이다. 이와 함께 미술관 쪽은 내년까지 기초학술조사를 벌여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 도록과 연구 논문 등을 발간하고 학술행사도 열 방침이다.

한편, 윤범모 관장은 기증품을 모아 전시하는 ‘이건희 특별관’ 건립 등을 검토하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한 것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내부 검토를 하고있다”고 전했다.

노형석 기자 [email protected] ,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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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예술가 정보 출생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사망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서대문적십자병원 직업 화가 학력 도쿄 문화학원 분야 미술 주요 작품 흰 소 영향

[1][2][3] 부부 (1953년 , 현대미술관 소장품) 두 마리의 새가 서로를 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파랑색과 빨간색이 대조를 보여준다.

이중섭(李仲燮), 1916년 9월 16일~1956년 9월 6일)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 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4]

생애 [ 편집 ]

생애 초기 [ 편집 ]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고 한다. 사업 종류가 일제 시대에 거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했다.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 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려낸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서 써낸 일화가 있다.

일본 유학 [ 편집 ]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귀국 [ 편집 ]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다. 1945년 5월에는 원산에서 일본인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했다. 이남덕은 이중섭을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다.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에는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인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이후 [ 편집 ]

1950년 한국 전쟁 때 월남해서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전시회 [ 편집 ]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 정도였다고 한다.

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로 인해 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이중섭을 찾았는데 이미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기념 [ 편집 ]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한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헤

서훈 [ 편집 ]

위작 논란 [ 편집 ]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에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에 가짜로 밝혀져서 대한민국의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

같이 읽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이중섭과 황소

‘황소’라는 작품은 우리나라의 화가, ‘이중섭’씨가 1953년경에 그린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품으로는 ‘싸우는 소’, ‘서귀포의 환상’등이 있다. 그는 소를 주제로한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 ‘황소’는 그가 그렸던 다른 소그림들과 다르다. 빨간 배경, 소의 두상 등… 이중섭이 보통 그리던 전신의 소와는 차별화 된 느낌이다.

1. 화가 이중섭

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하고, 재학중에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 주목 받았다. 그리고 1945년에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고,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 때 이중섭의 첫아이가 사망했다. 해방 후 북한이 공산주의가 되자,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다 6.25 전쟁이 일어나서 부인과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지만, 그는 홀로 원산을 탈출하여 제주도에 안착했다. 하지만 생활고로 인해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다시 올라왔다. 1953년에 가족들과의 잠시 만남을 끝으로 가족들과는 생이별했다. 그 뒤에도 가족들을 만나기를 염원했지만, 1956년에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40세에 사망했다.

2. 이중섭이 소를 그리는 이유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소를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소에선 순수한 조선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중섭 작가는 “소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고 나서부터 소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소는 그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3. 황소

이중섭씨는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의 두 번째 공모전에서 협회상을 받아 주목을 받게 된다. 1941년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또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는 서양적인 화풍을 탈피하고,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기도 했다.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분출하듯 고개를 휘저어 올리는 소의 움직임을 그린 ‘황소’그림은 그의 표현력을 담아낸 대표작이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눈빛은 공간을 장악한 느낌을 자아내고, 코와 입가의 선연한 붉은 색 및 배경의 붉은 노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초점을 잃은 채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눈은 소의 슬픈 내면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이중섭 작가의 비극적인 내면을 담아 내고 있는 것 같다. 고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소는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서 소는 갈등과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 희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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